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1:1-2 / 신실한 자 / 2018.11.18

정인순 2018. 11. 1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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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2     신실한 자


‘신실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 오늘날 참 신기하게 들립니다. 사람이란 다 같은 것 아닙니까?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입니다. 유별난 사람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분합니다. ‘신실한 자’라는 부류를 만들고 그들을 향해서만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신실한 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해석될 수 없는 이야기를 펼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신실한 자’가 되기 위해 그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신실한 자’를 규정하기를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 안’이라는 조건을 오늘날에 있어 ‘교회 다니는 사람’과 견줄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결정을 품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즉 ‘교회’라는 것이 특정 지점에 설립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 집에서 그냥 있는 자들을 오늘날에는 ‘교회 다닌다’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교회를 다니려면’ 일단 자기 거주지에서 외출해야 합니다.


다른 집합장소를 향하여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집회 장소에 도달하게 되면 그들은 말하기를 ‘교회 다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입회하고 등록합니다.


이게 바로 ‘교회 안’의 모양새입니다. 실제 건물이나 집회 공간이 당연히 염두에 두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은 무엇입니까?


건물도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특정한 공간도 없습니다. 소위 ‘교회 등록’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도리어 ‘교회 등록’, ‘교회 다니기’로 인하여 ‘예수 안’에 있는 의미가 방해받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시간을 채우는 스케줄을 따로 가질 때 마치 뭔가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스케줄이 없다면 자기 의미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누구와 가족관계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을 하나 아니하나 상관없이 그 관계는 소멸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 안’이란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신실한 자



이근호
2018년 11월 18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1-2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의 편지는 ‘단절’을 전제로 한 편지입니다. 신실한 자, 곧 신앙이 있는 자와 신앙이 없는 자를 단절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신앙이 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사 45:15)

이는 늘 ‘자신을 숨기는 식’으로 활동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를 신에게 맡기고 싶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같은 인간들과 사귀면서 행세하는 그 방식을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써먹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귀면서 죽을려고 사귀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우선으로 더 살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과 사귀게 됩니다. 자신이 건장하고 풍성하고 자랑질하면서 사는데 보탬이 된다면 인간들은 남들과 사귀 생각을 가집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귐을 중단하거나 거부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귐이나 자신의 양들과 사귐에서는 ‘살아야겠다’가 논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죽음’에 대해서 주고 받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객체’의 등장입니다. 요한복음 10:11, 17-18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음’으로 주고받으면서 사귈 수 있는 관계가 참된 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12제자들에 있어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깊은 관계로 사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곳에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사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5에 보면, 제자들의 형편을 도마가 노골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즉 신체적으로 같은 공간대 공간으로 동행하고 있다면 결코 못 따라갈 일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공간에서 ‘안’과 ‘밖’이란 인간의 자율권에 속한다고 제자들은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율권 밖으로 주님이 나가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마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즉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가시는 곳으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는 겁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만 가실 수 있는 나라에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마저 제대로 떼어 놓으시는데 성공하시고 만드신 나라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꿈같은 세계가 예수님이 사라진 나라입니다. 이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해서 에베소서 1:4에서는 ‘창세 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의 체계로서 ‘창세 후’의 체계를 싸우려고 하시는 겁니다.

창세 후의 세계를 박멸하려고 하십니다. 이 ‘창세 후’의 세계가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세 후’의 세계는 다양하고 여러 가지가 갖추어져 있는 세상입니다. 즉 ‘여럿’으로 구성된 세계가 창세 후의 세계입니다. 지식도 여러 가지입니다. 목숨들도 여러 가지입니다. 취향도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나 진실은 오직 하나입니다. 생명도 ‘여럿 목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목숨, 곧 예수님의 목숨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창세 전’의 세계의 계획이 충족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세 후’의 세계 박멸에 나서게 됩니다. 기존의 주체와 객체로 구성된 모든 ‘여럿’이 모두 다 박멸의 대상이 됩니다.

교역이란 죽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살기 위해 하는 겁니다. 주변 상황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든지 살고보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의 ‘주체’란 오직 본인 뿐입니다. 그러나 창세 전의 주체란 ‘예수 안’으로 표현이 말해주듯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주체’만 영원토록 차지하게 됩니다.

마치 역기를 가지고 예를 들면, 역기에 있어 중량을 담당하는 덤벨이라는 양쪽 가에 끼어넣어지는 둥근 추 같은 것이 주체와 객체라면 그런 덤벨이 다 소실되는 겁니다. 오직 남는 것은 역기봉이라는 가운데 연결고리 뿐입니다. ‘신실함’이란 곧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 관계가 곧 의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속성, 곧 ‘예수 안’에서 작렬하는 속성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정없이 기존 세계의 주체와 객체를 박멸합니다. 세월을 흘러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라지게 합니다. 마치 이런 이야기가 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꿈이 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현실로 나타났다면 도대체 이 기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현실속에서 성경책이 단순히 무시해도 되는 비현실적인 서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천시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대로 메시아가 오셨고, 이 땅에서 죽었다고 말씀으로 살아나셨다면, 과연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이겠습니까?

오늘날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은, 성경 속에 숨겨져 있는 진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나타난 현실이라면 그동안 우리는 가짜 현실 속에서 꾸준히 살면서 나름대로 희망과 사랑과 믿을 가졌다고 자부한 겁니다. 바로 이런 가짜의 내력은 ‘숨겨진 참된 현실’이 등장해야 제대로 밝혀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상에 작업하시고 남겨놓이시고 등장시키시는 ‘신실함’을 찾으시는 겁니다. 이런 자는 자신이 살고자 하나님과 거래나 흥정이나 교역에 나서지 않습니다. 차라리 모든 일을 잃는다 할지라도 기적같은 구원의 세계에 접촉된 것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등장하는 현장 속에서 늘 우리의 뜻이 묵살됨을 통해서 주님의 손수 일하심의 고됨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강-엡 1장 1-2(신실한 자)

181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방금 읽은 이 내용은 사실은 인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숨어계시다가 마지막 때 나타나는 하나님이십니다.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잘못된 생각으로 착각했던 하나님하고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던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같이 하나님 믿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방민족의 하나님을 보고, 네 하나님이 잘못된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민족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냐고 이야기를 해요.

지고의 존재, 지고의 존재, 신은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믿든지 네가 믿든지 결국 그 추구하는 것에 도달해보면, 산 정상에 가보면 어느 길로 올라왔느냐에 상관없이 같은 정상에 도달하듯이 네가 올라가도 하나님이고 내가 올라가도 하나님이니까 각자의 하나님을 믿자, 라는 식의 생각을 이방민족들이 갖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하나님이 엉터리라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뜻으로” 할 때 그 하나님은 이방민족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숨어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하고는 상관이 없지요. 단군의 자손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라는 말도 성립이 안 되지요.

사도라는 것은 누구의 지시와 소명을 받아야 되는데 이 세상 인간은 소명이나 지시 같은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누구나 교육만 잘 받으면 이 땅에서 얼마든지 역량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신학교가서 교육만 잘 받으면 훌륭한 목사 된다는 거지요.

이 세상 모든 문제는 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인간의 모든 것은 다 고만고만한데 교육을 잘 받았으면 그만큼 훌륭한 사람, 교육을 못 받았으면 질 떨어지는 인간이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양육 받는 것이 문제다, 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인데 ‘사도’라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니고 찍었다는 거예요.

예레미야 1장에도 선지자가 나오는데 아예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이 너를 찍었다는 거예요. 찍었다고 하니 갑자기 낙지에 초장 찍어먹는 것이 생각나는데요. 낙지에 초장을 찍으면 그 찍힌 채로 입에 들어가잖아요. 주님께서 찍은 자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육은 안돼요. 교육 받은 것이 화근입니다. 차라리 등신 같으면, 나는 등신입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뭔가 아는 게 있다는 것, 내가 뭔가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내 모습과 다른 위장된, 조작된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너 어느 대학 나왔어?” 누구 만날 때 그렇게 하잖아요. 사도, 이것도 일반인들과는 상관이 없는 거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안의” 할 때 ‘안’ 그 자체가 문제거리예요. 왜냐하면 안에 있다는 것은 밖에 있다가 누구 안에 합류할 때 안에 들어왔다, 가 성립되는 거거든요. 안과 밖을 선택할 때는 본인이 “나 밖에 나가 있을래?” 혹은 “안에 있을래?”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문제입니다. 출생자체가 누구의 안에 들어 있다는 이것은 인간의 선택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기에 이 ‘안’이라는 말 자체도 우리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지요.

그 다음에 오늘 설교 제목이 본문의 “신실한 자”인데 이 신실한 자라는 이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만남은 교역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이거 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얼마를 주겠느냐? 모든 인간의 사귐은 무역, 교역이에요. 줄 것 주고 얻을 것 얻는 거예요.

얻을 것 생각 안하고 준다는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부부사이에서. 왜 결혼하느냐 하면, 내가 이거 양보하고 당신이 이거 양보하면 우리는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교역입니다. 주고받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퍼주는데 남자는 밖으로만 나돈다. 그러면 교역을 끊어야지요. 나에게 이익을 주지도 않는 인간에게 청춘과 인생을 무조건 퍼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면 갈라서야지요. 부모하고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16월까지는 괜찮아요. 봐줄 수 있습니다. 20개월? 우리 봐 줍시다. 그런데 유치원 들어가고부터는 자식이 부모와 교역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답답해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아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했는데요. 제가 답변을 아주 간단하게 했어요. 제발 아들에게 이용당하는 부모 되지 마세요, 라고.

아들에게 이용당하는 부모가 되었다는 말은 벌써부터 부모가 아들을 통해서 들인 밑천을 뽑아내려고 교역을 시도한 겁니다. 내가 너를 키운다고 스스로 양보한 것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아는 자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자식을 낳아도 부모사랑 모르게 되어있어요. 자기자식만 생각하지요.

따라서 자식한테 기대를 건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이에요. 자식에게 교역의 손을 내밀었건만 자식은 교역의 손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잘해준 만큼 자기가 나를 이만큼이라도 더 생각해주겠지.’ 이만큼도 생각 안합니다. 이만큼도 생각 안 해요.

친구 패놓고 친구가 입었던 패딩을 입고 돌아다닌다잖아요. 그거 입고 경찰서에 온 애도 있어요. 친구 때려서 추락시켜놓고 죽은 친구의 패딩 입고 경찰서에 왔다는 것은 도대체 그 애 부모가 자기 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지? 몰라요.

모든 인간관계는 교역관계입니다. 그걸 가지고 ‘사귐’이라 해요. 인간의 사귐이라 할 때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너 나 믿지?”입니다. 그걸 신실함, 또는 충성됨, 또는 신앙이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지요.

그 신실한 자가 인간세계에는 없습니다. 없는 이유가 있어요. 신실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열 두 제자를 뽑았어요. 제자들은 예수님하고 사귈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내 쪽에서 당신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를 했고 모든 것을 헌신했기 때문에, 우리 사이는 보통사이가 아니고 서로 사귀는 사이기 때문에 주님이 준비한 것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는 식으로 열두 제자가 주님 앞에서 얼쩡거렸어요.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까 읽은 교독문을 다시 보세요. 교독문 46번에 보면 도마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요. 요한복음 14장 4절인데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니까 도마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도마가 하는 말이 맞아요. 도마는 자기 한계를 안 벗어난 입장에서 계속해서 예수님께 사귀기를 시도하고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오늘날 우리의 형편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어디에 간다고 하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은 “주님 가신 길에 우리가 따라갈 의사가 있습니다. 그 길만 알려주신다면 죽기 살기로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주님과 우리 제자들의 사귐이고 그것이 우리사이 아니냐,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 거예요.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간다고 한 거예요. 사달난 겁니다. 50년 교회 다녔는데 헛짓을 했어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주님과 사귀는 것을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신실한 믿음, 또는 충성이라고 일방적으로 곡해한 겁니다.

뭘 얻으려고 한 거예요. 주님과 사귀는 관계니까 이만큼 목숨 내놓으면, 이만큼 주께 해주면 주께서 갖고 있는 것을 역시 나에게 해주겠지, 라는 이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것은 교역이에요. 주고받는 물건거래에요. 이것은 거래고 인간의 사귐의 한계에요.

얼마나 주님께서는 일을 철저하게 잘 하시는지 그것을 거부해버립니다. 네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가지고서는 갈 수 없는 곳에 내가 간다. 네가 질문한 의도, 네가 노리고 있는 의도, 네가 기대하는 그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그곳에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예수님만 가는 곳이에요. 예수님만 갔던 나라기에,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 누구도 가지 못하는 나라, 그 나라 이름은 천국이니라. 아무도 가지 못할 나라, 더 나아가서 아무도 가지 말아야 될 나라, 주제파악도 안된 인간이 갈 수 없는 나라, 그것이 바로 숨어 있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숨어 있는 천국입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없고 뭐만 있느냐? 가짜 천국을 만들어놓고, 그 천국 가는 방법도 만들어놓고. 교회라는 것이 그런 것이거든요. 천국도 만들고, 교회라는 것도 만들고, 죽으면 그곳에 간다고 줄곧 사람들을 사기치고 속이고 보이스피싱을 계속해서 하는, 그래서 서로가 위로하는 가운데 서로 사귀는 공간, 그게 교회에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신실한 자에게만 편지를 한다고 할 때,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제대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신 분이에요. 편지 받을 사람이 없어요. 에베소서라는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이 없어요. 이해할 사람이 없어요.

없는데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날림으로서 비로소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천국 가는 사람이 발생이 돼요. 생산이 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지나가는 이야기로 후딱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객체를 생산하는데 생산하는 이유가 새로운 주체와 객체사이를 순환하기 위해서 생산한다고 했거든요.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객체가 생산되어서 그 사이, 그게 예수 안이거든요, 그 사이에서만 순환된다면 하나님의 작업은 뭐냐 하면, 현재 객체와 주체를 박멸시키는 그 작업에 분주하십니다.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바로 현장성이에요.

현장성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지만 들어보면 사실은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겁니다. 그 현장이 왔을 때 비로소 벌어지는 사건이 현장성이에요. 주일에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지, 하고 사전에 준비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딱 나와서 마이크 앞에 서면 그 현장성이 발휘되면서 자기의 본심이 다 튀어나와요.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그대로 다 노출돼요. 미리 내가 사전에 예상한 것, 기대한 것이 묵살되는 현장성. 그 순간, 그 시점, 그 자리에 오기 전에 미리 그 순간을 예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아무리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기대에 불과하지요.

막상 그 현장에 왔을 때 그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어디에 써먹고, 어떤 태도나 행동이 떠오르게 될 것인가의 그 몫은 누구 몫이냐 하면, 순전히 주님 몫이에요. 그것을 저는 생산이라는 말로 하는 거예요. 공장에서 물건 하나 만들어내듯이 생산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렵다는 투로 들으시는데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뭔가 일을 할 때는 예상하기 마련이고 그 예상하는 일을 만들어 낼 때는 무엇이 그 안에 들어 있느냐? ‘내가 이렇게 처신한다면 나는 괜찮잖아. 나 괜찮은 존재이지.’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인간은 뭐든지 예상하고 상상한다는 그 말이지요.

고3이 수능 칠 때 고사장에 들어가서 시험 칠 때 ‘나는 먼저 펜 내려놓고 기도한다. 기도하면 주께서 평안한 마음을 주실 것이다.’ 드디어 첫째 시간 국어. ‘중력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찍자.’ 이게 현장성이에요.

내가 예상한 것을 전부 다 털리게 만드는 것.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주체를 박멸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이 살아있으면 내가 죽고요, 내가 살아 있으면 주님이 죽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성에서 내가 하는 예상, 내 기분, 나는 이래서 괜찮은 존재일거야,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이렇게 비칠 거야, 라는 모든 기대를 박살 낼 때 ‘주님은 진정 살아계시는군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군요.’ 그게 바로 생산이에요. 그게 주님의 생산입니다.

‘예수 믿고 있으면 믿음이라고 인정해줄 것이고 믿음으로 기도하니까 암도 낫고, 방언도 아니까 내가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나중에 92세 되어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게 된다면 죽기 전에 숨 헐떡거리면서,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사도신경도 외워서 주께서 나타나서, 그래 너를 영접하노라,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 고단한 인생을 끝내고 천국에 간다.’

그렇게 여러분이 시나리오를 짜고 상상한다면 결국 남는 것이 뭐냐? 괜찮은 나가 남아요. 괜찮은 자아. 다시 말해서 나라는 주체는 박살이 안 나는 상태에서 가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하신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네가 그동안 엉뚱한 길로 가고 있었구나. 네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넣어주지 않는 세상에 내가 들어갔다. 그런데 너는 어느 한 순간도 너 자체를 놓지를 못했다. 따라서 네가 갈 곳은 내가 갈 곳과 완전히 다르다.”라는 결론에 도달되는 겁니다.

주체 객체의 박멸은 곧 무엇의 박멸이냐 하면, 과학과 철학과 인문학 그 모든 것의 박멸이에요. 문학과 예술,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 주체가 자랑질 하려고 나온 것이 과학, 철학이거든요. 이 세상의 인류의 문명이라 하는 것은 이 정도까지 안다는 것을 자랑질 하고 싶어서 학문의 진보를 계속 이뤄나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고대이집트의 비밀이 하나 있는데 3천 년간 지속된 비밀이 있어요. 그 비밀이 뭐냐? 인간은 발전하지 않는다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고대이집트에서는 바로왕이 일체 새로운 일은 용납하지 않았어요. 지상을 그 자체로 완전한 하늘나라로 만든 겁니다. 이집트제국의 4천년 역사가 한 것이 그거예요.

진보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변화가 된다는 말이고 변화가 된다는 말은 지금이 미흡하다는 뜻이고 미흡하다는 뜻은 최종판정과 최종가치는 내가 모르고 인생을 마감한다는 그것이 싫다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최종확정이 된 채 나에 대한 규정을 짓고 죽더라도 편하게 죽을 수 있는데 계속 내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화된다면 이것은 불확실성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인생 산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와 사상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해서 이집트에서는 전부 스톱을 시킨 겁니다. 남는 것은 전부 반복, 나일강이 범람하고, 농사짓고, 다시 가뭄이 들고, 또 다시 범람하고, 농사짓고, 가뭄 들고.

그 주고받는 반복의 질서만 인정하고 그 나머지 진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집트의 비밀이에요.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책은 다 불타버립니다. 도서관의 그 모든 책은 필요 없어요. 인간의 진보를 자꾸 촉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진보한 만큼 행복할지 싶지요? 순간입니다. 다시 돌아서면 ‘애걔? 이게 다야? 이것뿐이야?’ 또 마음에 허기를 어떻게 달랠 건데요?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히딩크의 말이 맞아요.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행복? 행복은 잠간이에요. 이게 행복의 전부는 아닐 거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부가 사랑한다. 순간은 좋아요. 사랑한다고 목걸이해주고 옷 사주고. 기분은 좋은데. 옷 받아 챙기고, 목걸이 받아 챙겨놓고서 한 달도 안 되어서 또 뭐가 어쩌고. 남편이 “다 해줬잖아. 뭐?” “이게 다야?” “어쩌라고!” “나 사랑 안하는구나.” 이렇게 끝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신실함이라는 것은 거래입니다. 거래에는 반드시 주체가 있고 객체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내가 저사람 것을 얻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행하면 되느냐, 하는 이것이 거래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교역의 조건이 되지요.

그 사람과 상대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신실함, 또는 경제용어로 신용이라 하는데, 쉬운 말로 ‘서로 믿자. 서로 신뢰해야지. 서로 믿어야지.’ 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믿으라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상견례 날짜 받아놓고 여자하고 헤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 웃는 사람은 드라마 본 사람입니다. 제 3의 매력인가 뭔가. 그거 울고불고 할 필요 없어요. 거래 깨진 거예요. 이용해 먹으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더 나은 거 같은, 나의 만족도를 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채워줄 것 같은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것을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을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귐과 사랑을 통해서 인간의 자체적인 한계를 도출해내지요. 한계를 들춰내요. 인간이라는 이 주체가 있는 한 인간은 천국에 못갑니다. 지옥밖에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새롭게 생산되는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래요.

오늘 본문 이야기하면,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가 없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가 없다는 말은, 그 없는 이유를 위해서 주께서는 이 세상을 다루십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라는 것은 지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천국에 못가니까 그게 지옥이잖아요. 예수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이 편지를 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께서 살아계셔서 친히 관여해서 생산해낸다. 주체와 객체를 따로 생산해낸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창세전에 있는 거예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돼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창세전의 이야기하고 창세후의 이야기가 서로 싸운다고 보시면 좋습니다. 창세전에 있었던 그 구조, 그 체계하고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시적인,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적응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면서 나름대로 지구상에서 살아보려고 애쓰고 죽어서는 천국 가려고 애쓰고, 교회 세우고, 성당세우고, 절간 세우는 그 모든 시도와 창세전과 싸운다고 보시면 돼요.

주님은 나, 나라는 것과 싸우는 거예요. “주님 사귑시다.” 주님은 “너하고 안 사귄다.” 그 이야기에요. “주님 믿습니다.” “나는 네 믿음은 인정 못한다.” 그 이야기에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너는 사랑도 아니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천국을 소망합니다.” “너의 천국은 거짓된 천국이야. 마귀가 만든 천국이야.”

이 싸움을 벌이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이 본문을 보고 어디에 딱 꽂혀야 되느냐하면, 예수 안이라는 그 지점에 터치가 되어야 돼요. 그거 안 되면 오늘 본문 다 소용 없습니다. 에베소서 1만 독이나 한 사람도 있어요. 1만 독 하면 뭐합니까? 1만 독이나 1독이나 마찬가지지요.

주체가 살아있는 한,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에베소서는 의미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기도할 때는 뭔가 얻었을 경우의 상황을 미리 예상하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계시다. 살아계셔서 나랑 사귀니까 나를 예쁘게 보겠지. 내가 기도까지 했으니 착하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내가 이것을 얻고 난 뒤의 내 모습은? 수능 20점 올라간다.’ 이런 것.

그러면 창세전의 상황과 창세후의 상황이 하나님에 의해서 서로 싸움이 일어났다면, 창세전의 상황에서의 믿음이란, 창세전의 인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에베소서는 신실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쉬운데요. 운동기구 바벨은 양쪽 끝에 무게를 더할 수 있게 쇠뭉치가 달려 있고 중간에는 연결하는 봉이 있어요. 양쪽 끝에 쇠뭉치를 주체와 객체로 봅시다. 쉽게 말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는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나 이렇게 기도해서 이런 복을 받았다. 전부 다 가치 있게 살아있다는 그걸 자랑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0장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17절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 대 인간의 사귐에서는, 일단 내가 살아있고 당신도 살아 있어서 좋은 것을 서로 윤택하게, 풍성하게 합시다, 라는 조로 모든 인간관계가 된다고 했지요. 부부관계, 자식관계도 그렇게 모든 생각이 지금보다 더 풍족하게 잘 살기 위해서 애쓰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 이유 때문에 믿는 거예요. 안 죽으려고 믿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과 자기백성의 대화, 사귐은 죽음을 주고받는 거예요. 죽음이 주는 자유를 느끼라는 그 말이에요. 네가 없어짐에서 오는 가벼움을 아느냐는 그 말입니다. 예수 안이 천국인데요. 예수안의 천국에 터치가 된 사람은 이 땅에서 그만 죽어도 상관없어요. 오히려 이 땅이, 지옥이 발목 잡는 것이 부담돼요.

이 세상이 지옥이거든요. 이 지옥에서는 그저 모아두고 쌓아두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분이 수면내시경 하려고 전화를 했어요. 내과과장이 전화해서 “다 비우고 오세요. 물도 마시지 마시고 다 비우고 오세요. 만약에 위속에 뭐가 남아있으면 부담됩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물조차 마시지 않고 다 비웠을 때에 이제는 의사가, 당신은 왜 아파야 되며 어디가 아프며, 그리고 주님이 의사라면 “너는 왜 죽어야 되는가?” 그게 비로소 눈에 또렷하게 들어오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뭘 많이 갖고 있고 많이 쌓아두게 되면 마치 내가 안 죽을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사람처럼,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 자기를 착각하게 만든다니까요.

바벨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양쪽에 쇠뭉치가 달려있고 가운데 봉이 있잖아요. 주님께서 양쪽의 쇠뭉치를 떼어버려요. 떼어버리면 나중에 가운데 봉만 남는다고요. 이게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그 관계, 여기에 작은 것이 달렸는지 큰 것이 달렸는지는 관계없어요, 역기의 봉, 그 관계가 신실함이에요. 그게 믿음이라고요.

옆에 창기가 달렸는지 세리가 달렸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네가 얼마나 부자인지, 몸이 아픈지 건강한지 묻지도 않아요. 주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뭐냐? 그 역기의 봉 같은 관계성입니다.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해요. 하나님의 의는 소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지가 되면 그 주체가 또 있어야 돼요. 그걸 모아놓는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사귐은 나에게 힘을 더 보태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거든요. 부모자식관계, 부부관계도 다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잘 보여서 용돈 더 타낼까, 하는 식으로 전부 다 내 힘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간다고요.

그러면 그 사고방식 가지고 교회 나왔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경공부 하는 이 모든 게 뭐냐 하면, 나를 더 가치 있게 키우기 위해서, 천국 갈 만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뭔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꾸 모으게 되면 이것은 내시경 할 때 부담돼요.

자꾸 쓰레기만 쌓인다고요. 내가 없어도 좋은 세계, 그게 천국입니다. 내가 여기서 사라져도 좋은 세계, 그게 천국이에요. 그 천국에 접촉한 것, 터치된 그게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구원이 되었으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완전히 망해도 불만가지면 안돼요. 구원받았다는 자체가 주님의 수고로움에서 주신 거거든요. 주님의 노고에서 구원이 온 거예요.

꿈 이야기 안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 눈치여서요. 초등학교 6학년 때에요. 건물 3층이었으니까. 제가 비산동 대성국민학교 나왔거든요. 대성국민학교 3층은 6학년이 사용했어요. 거기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공부 끝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3층에서 1층으로 갑자기 내려가는 바람에 놓쳤습니다.

잠이 깨고 난 뒤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주님 앞에 기도까지 했어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요. 어떻게 만날 수가 없습니까?” 거기서 응답이……, 이젠 신비주의로까지……, 응답이 뭐냐? 저는 감히 생각도 못했는데 “꿈에서 잊어버린 것은 꿈에서 찾아라.”

그 말이 뭐냐 하면, 이 성경책 이것이 꿈입니다. 현실 아니거든요. 현실은 과학이에요. 수능이 현실이고 북한 핵문제가 현실이지 이것은 꿈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안보는 이유가 이게 개꿈,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생활하는데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성경은 그냥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성경이 꿈으로 끝난다면 모르겠는데 이게 현실화되었다는 것이 문제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이 쇼크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꿈이 현실이 됩니까?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을 못해요.

우리는 인간세계 출신들입니다. 따라서 현실은 현실이고 꿈은 개꿈이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꿈과 현실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했던 현실은 이게 바로 개꿈이 되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나라 천국만이 영원히 지속되는 진정한, 영원한 현실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에는 많은 지식이 있어요. 지식의 특징이 ‘여럿’입니다. 다양성, 여럿,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에요. 그리고 뭐도 여러 가지인가? 사람도 여러 가지, 사람의 목숨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진실과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고 목숨도 여럿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럿 되는 목숨중의 하나인 우리의 목숨도 주님의 생명 앞에서 사라져도 괜찮아요. 내 목숨 죽는다고 해서 그렇게 불평하지 마세요. 우리의 죽음은 여럿 중 하나 없어질 뿐이고 내가 죽는 것과 주님의 생명이 살아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목숨인데, 그저 여럿에 해당되는 사항인데. 이 이야기는 사도바울이 옛날에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새롭게 우리에게 편지로 남기고 있습니다. 신실함이라는 것은 네 솜씨가 아니고 네 능력이 아니라는 거지요.

철야를 한다고, 목소리 높여서 고함지른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합리화만 자꾸 가중될 뿐이에요. 일종의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교육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재촉하는 겁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눈만 뜨면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생각이, ‘주님, 살려주세요.’ “왜?” “이유는 없습니다. 나니까요.” “너는 여럿 중에 하나에 불과한데?” “그래도 나는 살려주세요.”

그런 억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실함을 남기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신실함을 다 끊어내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복음을 가지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서 조작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을 확실하게 나누기 위해서,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 에베소서 1장 1절 2절을 주신 거예요. 이 성경말씀을 주신 겁니다.

인간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과 예수님과 있었던 일련의 사태, 과정,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길로 나는 홀로 간다. 따라와도 소용없다.” 목사나 장로가 되어도 소용없어요. “네가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소용없다. 네가 어떤 것을 동원해도 소용없는 그 나라에 내가 간다.”

왜 그런가 하면, 시간상 창세전과 창세후는 서로 대척관계, 대립관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전에 있었던 그 내용이 에베소서 1장 1절, 2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제는 수면 내시경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뭘 로 간주하느냐 하면, 뭘 해도 소용없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요.

그렇게 간주하시고 죽은 자에 이 에베소서 1장 1, 2절을 담아버립니다. 담게 되면 우리 자신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너덜너덜해져요. 다 소용없게 되는 겁니다. 누굴 만나기 전에……, 특히 상견례의 예를 듭니다. 상견례는 내가 초청하지 않는 타인과 마주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그렇게 거북하고 어색하다는 것은 저뿐만 아니라 다 느끼지요.

만나기 전에, 옷은 뭘 입고 가고, 우리 집안에 흠이 되지 않도록 평소에 안하는 행동을 하려 하니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말 하나 잘못해서 다 된 결혼이 산통 깨지지나 않을까, 모든 것이 조마조마하고요. 나중에 끝나고 나면 커피가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고 긴장이 풀리면서 퍼져버리지요.

모든 인간의 행동이 마치 포석정 같아요. 경주의 포석정은 물이 그냥 순환하고 있을 뿐이에요. 돌고 또 돌고, 맨날 돌아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느냐? 그 도는 포석정 노선이 너덜너덜 해져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현장에서만 살자. 난 현장체질이야.’ 미리 이만큼 ‘우리 집안 잘났습니다. 우리 아들 잘났습니다.’ 이러지 말고 그 현장에 주께서 가게 하셨습니다. 그 현장에 도착하게 했잖아요.

도착하게 했으면 뭔가 성령께서 내 입을 통해서 뭔가 하는 행동이나 뭘 하실 것을 이야기해 주시겠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도박이거든요. 모 아니면 도다. 그런 식으로 자기를 이 세상 세월 속에 그냥 던지는 겁니다. 낙엽처럼, 버렸다 치고, 망했다 치고, 조졌다 치고, 하루치만 그냥 사는 거예요.

미리 예상하지 말고, 벌벌 떨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이렇게 하면 저쪽이 저렇게 나오겠지’ 하고 계산해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지 말고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이게 신실함이에요. 왜? 어차피 바벨의 그 중간 봉만 남고, 주께서 나를 다루시는 그것만 남고, 내가 갖춘 것들은 다 떨어져 나가야 되기에. 바퀴벌레 박멸하듯이 떨어져 나가야 되거든요.

세월 속에서 날마다 우리를 늙게 만들고 쇠퇴하게 만들잖아요. 이게 박멸하는 과정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제발 너는 좀 없어지면 안 좋겠어?”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를 없애주는 과정입니다. 엷어지고 얕아지고 희미해지는 그것을 여러분이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기도의 목적, 기도의 끝은 감사와 고마움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딸을 시집보냈더니 대판 싸우고 친정에 와서 찔찔 울어요. “엄마, 내가 김서방 몰래 주식투자 했다가 1억 5천 날렸어요.” 이렇게 했을 때 친정엄마가 딸에게 뭐라고 합니까? 등짝을 후려치면서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남편이 준 돈으로 살림이나 잘 살지. 왜 그랬어?!” 하고 등짝을 치지요.

“엄마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이렇게 후회하는 인생 살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해야 돼요. 후회하지 마시고 그 현장성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우리 인생을 자꾸 후회하지 마세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남자 만나지 말지.” “몰라. 귀신 씐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그것을 후회하지 않아.”

신실한 사람은 내 주체를 날려 보내고 내가 선택한, 내가 교역의 대상으로 선택한 그 인간도 같이 날려 보내거든요. 남는 것은 역기의 봉, 오늘 제목은 역기 봉이다, 믿음, 창세전에 예수님이 너를 갈 수 없는 나라에 데려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주시고 성령을 주신 그 관계성, 그것만 달랑 남기 때문에 그것만 가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속고 속았습니까? 교회에 속고, 목사에 속고, 마귀에 속고, 나 자신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천국 가서 싱글벙글 할 줄 알았습니다. 주여, 나 같은 인간 없애주시고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노고와 희생만 자랑하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