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60강-창 41장 32-36절(대책안 제시) 1810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32-36절입니다. 구약성경 63페이지입니다.
창 41:32-36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적치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꿈의 내용과 꿈의 내용을 해석해서 요셉이 바로왕에게 조언한 내용을 연결시켜 보게 되면, 꿈의 실제내용에서는 좋은 이삭, 무성하고 충실한 이삭이 먼저 등장했고, 그 다음에 동풍에 바짝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꿈의 내용에 있어서는 달랑 일곱 개의 이삭밖에 안 나와요. 소 이야기도 있지만 이삭 이야기가 뒤쪽 부분에서 겹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요셉은 그 일곱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7년이라고 임의로 해석을 했고 충실한 그 이삭을 뭐로 보느냐 하면, 풍년이라고 봤고 바짝 마른 일곱 이삭을 7년의 흉년이라고 본 거예요.
41장 7절에 보면,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삼켜버리면 뭐가 되느냐? 아무리 7년 동안 풍년이 들어도 그 풍년이 뒤에 나오는 7년 흉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황폐한 토지가 되어버립니다. 이게 꿈의 내용입니다.
그 꿈의 내용대로 되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애굽은 완전히 황폐한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꿈을 주게 된 그대로 진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왕이 자기 꿈 해석에다 요셉을 개입시킵니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남의 꾼 꿈속에 타인이 들어가서 해석을 한다는 것은 꿈의 주도권이 꿈 꾼 사람에서 어디로 이전하느냐 하면, 해석자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전하게 되면 꿈 꾼 사람들의 그 내용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내용의 꿈, 7년 풍년 나오고 그 다음에 7년 흉년 나온다는 그 꿈을 왜 그 사람은 꾸게 되었고, 그 꿈을 왜 해석자에게 인계했느냐에 대한 취지가 담기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꿈의 내용대로 하게 되면 어떠한 대책도 나와서는 안돼요. 그냥 황폐하면 황폐해야 돼요. 그게 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주도권이 해석자에게 넘어갔다는 말은, 이제는 바로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앞으로 될 사태에 대해서 손을 뗐다는 이야기입니다.
황폐함, 흉년이 드는 것을 막을 재간이나 능력이 자기에게서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고, 해석자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단순히 해석자라는 것은 그 사람 꿈 꾼 것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만이 아니냐, 라고 하는데 요셉이라는 이 해석자는 단순히 꿈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제안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흉년으로 끝나야 될 이 애굽의 운명이 해석자를 제대로 만나서 이제는 해석자가 애굽의 운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 되면, 꿈의 내용에 없는 추가적인 내용이 해석에 의해서 덧붙여서 주어진다는 거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꿈은 실제로 바로 왕이 꾸지만 실은 요셉에게 일찍이 주었던 하나님의 꿈의 실현과정 속에 일부로서 바로왕이 꿈을 꾸게 된 겁니다.
바로의 꿈이 아니고 요셉의 꿈의 내용에 들어 있는 그 꿈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바로 왕까지 주님께서 요셉의 꿈을 실현시키는 일에 참여를 시킨 거예요. 그렇다면 이 꿈의 해석은 지난번에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한 것으로 꿈의 해석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그 꿈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이미 주도권이 요셉에게 넘어갔으니까, 요셉은 바로의 꿈이 아니고 자기 꿈의 일부로서 편입시킨 그 꿈을 통해서 진정 요셉의 꿈속에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이냐, 라는 것이 오늘 대책 안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 대책 안을 제시하는데 34절에 보면,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라고 해요. 지시하는 자가 요셉이고 지시받는 자가 바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일곱 해 동안 저축하라는 이 내용은 바로왕의 꿈의 내용에는 없는 겁니다.
해석자 요셉에 의해서 제시된 추가적인 내용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라고 하는 이 대책 안에 계속해서 주어지는데 이 대책 안은 이미 바로의 꿈에서 벗어나서 요셉의 존재이유, 요셉이 하나님의 꿈의 인도함을 받아서 꿈이 요셉을 앞장세워서 애굽에 들어가게 한 그 연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주도권을 바로에서 요셉에게 인계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시를 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바로의 꿈 꾼 내용과 요셉의 지시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정리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의 꿈의 내용에서 소가 등장하고, 두 번째 겹쳐서 꾼 꿈에 이삭이 등장하지요.
이것은 땅이 갖고 있는 그 효용에 대해서 인간이 전적으로 의존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땅에서 곡물이 나지 아니하면 인간은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 잘났다, 하지만 땅이 제 때에 곡물을 내지 아니하면, 땅의 효능을 내지 아니하면 인간은 거기서 마땅히 다 죽습니다.
이걸 더 간편하게 말씀드려서, 인간의 운명은 어디서 종속되느냐 하면, 땅의 운명에 종속돼요. 땅의 운명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도 결정 나는 겁니다. 이 말은 또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땅의 한계에 갇혀 있는 신세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땅에서 풍년이 나게 되면 인간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고 땅이 흉년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못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갇혀 있는, 인간의 환경이 되는 땅을 흔들고, 땅을 다룸으로 말미암아 곧 인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루시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마치 인간의 신세가 어떤 신세냐 하면, 망망대해에 네모난 스티로폼 위에 인간이 소복이 담겨서 풍랑이 일렁거리는 대로 맡겨진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인 겁니다.
요셉의 꿈의 해석을 통해서, 요셉의 입을 통해서 한꺼번에 인간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바는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너는 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못사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아무리 인간이 잘나도.
오늘날 교회 오는 사람들의 모습,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또는 자칭 성도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 모습과 태도를 물끄러미 보게 되면, 제가 잘못 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앙인처럼 안보이고 문화인으로 보여요. 교회 다니기가 일종의 문화 활동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을 이야기하라 하면 교회 문화 활동을 내놔요. 우리교회는 이런 행사를 하고, 바자회하고, 어디에 놀러가고……. 문화 활동의 특징이 뭐냐? 신앙과 문화 활동의 차이점은, 문화는 인간이 주가 되어서 인간이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화에요. 문화 또는 문명입니다.
문화, 문명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발명한 것이고. 신앙은 누구한테 종속된 것이 신앙이잖아요. 그러면 신앙이야기하면 이런 이야기해야 돼요. “나 누구한테 종속되었어.” 이런 이야기를 해야 돼요. “누구한테 종속되었는데?” “주님한테 종속되었어. 이렇게 주님에게 종속되어서 살아왔고 주께서 이렇게 날 이끌었어.” 이게 신앙이야기지요.
이번에 우리교회가 이런 행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문화기관입니다. 문화 활동기관이에요. 전부 다 문화인밖에 없어요. 신앙은 안보이고 문화인들만 보인다는 말이지요. 종속이라는 말은 뭐냐? 나 고유의 것이 박살났다는 뜻이에요. 나만의 것이 박살난 거예요.
문화라는 것은, 내가 어떤 문화를 만들 권한이나 자격이 있다, 나는 내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자다, 하는 것을 티낼 때 문화를 언급하거든요. 나는 인생을 이렇게 설계하겠어, 나는 인생을 이렇게 꾸려나가겠어, 할 때는 자기가 주가 되고 문화가 자기업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내가 주제파악을 못해서 나오는 헛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그 토지가 풍년이 되면 살고 흉년이 되면 못사니까요.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꿈을 주게 된 것은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인간치고 풍년 안 되기를 바라는 사람 누가 있어요? 흉년 되기를 바라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바라는 대로 풍년이 안 되고 인간이 바라는 대로 흉년이 안돼요. 아무리 인간이 풍년을 원했다 할지라도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은 흉년입니다.
충실한 이삭이 나올 때 좋아들 했지요. 그러나 그 충실한 이삭은 바로의 꿈에 의하면 필히 흉악한 이삭에 의해서 몽땅 다 잡아먹히게 되어 있어요. 꿈도 희한한 꿈이에요. 원래 이삭은 식물이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 박혀 있는 겁니다. 뭘 잡아먹는 것은 동물성 짐승들이나 하는 것인데 꿈의 내용이 식물이 식물을 잡아먹는 거예요.
잡아먹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없애버리고 얼마 전까지 풍년이 되더라도 그걸 기억치 않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결론은 뭐냐? 흉년이에요. 하나님이 인간들이 의지하는 이 대지에 하나님이 손을 대버리면 결국은 저주만 주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바로의 꿈에 대한 해석입니다. 저주밖에 없어요.
그리고 저주는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사이좋게 손잡은 것처럼 축복과 저주가 손잡고, 마치 양말이나 장갑의 한 쌍처럼 같이 등장해서 괜찮은 날, 풍년, 풍족한 시기를 허락하고 그것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드는 작전, 이게 이 대지, 인간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 대지의 운명입니다.
그 대지의 운명이 곧 인간의 운명이에요. 이게 세상을 전체적으로 보는 안목입니다. 망망대해위에 네모난 스티로폼 위에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서 풍악을 울리고, 방탄소년단 공연하고, 문화 활동해 보는데,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약간 배부르니까 배부른 티낸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시간 되면 교회도 나오고. 그게 문화 활동이잖아요.
“하나님, 저 교회 나왔으니까 천당 보내주세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천당 가는 것 없어요. 인간의 운명은 땅과 더불어서 지옥 불에 가는 겁니다. 나중에 이 땅이 불바다 돼요. 그 불바다에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 가는 겁니다.
청소할 때 빗자루로 쓰레받기에 담잖아요. 그 쓰레받기에 임시적으로 모였던 그 먼지는 집합적으로 모여서 어디로 가느냐? 쓰레기통으로 다 들어가지요. 주께서 대지를 통해서, 땅을 통해서 모아놓은 것은 전부 다 땅의 불심판과 더불어 지옥 가는 거예요. 끝이에요.
이것이 땅에서 태어난 인간의 운명입니다. 제가 어제, 화요일에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아기가 하나 태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쁘다, 하는 것만 보지 마시고 진정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아가야, 이 더러운 세상에 왜 태어났니? 아이고, 불쌍해라. 너는 아직 고생할 날이 한참 남았구나.”
그러나 그렇게 고생한들 무슨 낙이 있어요? 아무 낙이 없어요. 왜? 충실한 이삭을 황폐한 이삭이 갉아 없애기 때문에, 소멸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낙이라 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겁니다. 지금 괜찮으니까 앞으로 괜찮은 줄 알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용납 안합니다.
이 땅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이 같이 부분으로 종속되었다는 그 말은 땅의 운명과 같이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애굽의 운명이 왜 그런 식으로, 나중에 멸망할 때 멸망하면 되지 왜 미리 이야기를 하느냐? 지금 애굽이 요셉을 미리 체포했거든요. 미리 요셉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 말이지요.
요셉을 잡아넣었는데 그 요셉의 배후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계시가 함께, 가방을 등에 메는 것처럼 이미 전개될 하나님의 계시, 꿈이 요셉의 등허리에 함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바로왕은 그 요셉을 애굽의 토지의 운명에다 끼워 넣은 거예요. 개입시킨 겁니다.
개입시키니까 차이가 나는데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애굽의 운명은 아무리 풍성해도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결국은 황폐가 마지막 결론이에요. 그게 애굽의 갈 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여기에 끼어들었다는 말은, 요셉을 통해서 어떤 바로의 꿈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대책 안이 등장하는 거예요.
풍년, 그 다음에 흉년, 끝! 이게 바로의 꿈인데, 풍년, 흉년, 그로 인하여 죽었던 애굽나라가 융성하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요소가 거기에 개입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이 세상은 멸망된 세상, 우리는 거기서 육으로 태어났다.
육으로 태어난 그곳에 주님께서 이 세상 해석자로서, 메시아로 오셔서 그 해석자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죽을 우리 육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영생을 얻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추가적인 겁니다. 이걸 잉여라 하는데 여분의 것이에요. 여분의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내 인생 잘되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종속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다루시는 이 대지, 이 땅의 운명 속에, 처참하게 불바다 되어 없어질 이 운명 속에 하나의 일부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체적 안목 속에서 알게 되는 겁니다.
바로 왕이 요셉을 개입시키는 것이 신의 한수였습니다. 전체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이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그렇다면 애굽 땅에 사는 사람들이, 요셉이 바로왕을 통해서 알려주는 애굽의 온 미래, 마지막 운명까지 전부 다 한꺼번에 설명을 해 줬을 때에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애굽주민들의 애환, 슬픔, 기쁨, 행복, 불행, 좋았다, 웃었다, 기뻤다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의 일환이냐?
잠시 제공된 풍족과 더불어서 결국 저주로 이어지는 회로에 불과합니다. 경로, 패스, 그 하나의 길에 불과한 거예요. 좋았던 것도 저주, 그래서 기뻐했던 것도 저주, 슬펐던 것도 저주, 어떤 어른께서 돌아가신 것도 저주의 모습, 죽으려고 했는데 링거 맞고 다시 살아난 것도 저주, 이래도 저주, 저래도 저주, 애굽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무쌍한 하나의 사태와 일 자체가 전부 다 저주의 일환이에요.
저주로 이끌어질, 저주로 내려가야 될 경로, 길에 함축해서 모아지는 겁니다. 큰 바다로 강물이 내려갈 때 이쪽 산에서 내려가는 계곡 물도 합류하고, 저쪽 산에서 내려가는 계곡물도 합류하듯이 골목골목 쏟아지는 모든 인간이 결국 행진하게 되면 지옥으로 행진입니다. 그것을 뜻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애굽의 바로왕만 꿈을 꾸는가? 다른 사람도 꿈을 꿨잖아. 다른 사람의 꿈은 가치 없고 바로왕의 꿈은 왜 그렇게 중요하냐, 이렇게 의문점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걸 자기고 뭐라고 하느냐? 바로왕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적단독성.
모든 보편적인 것을 한 인물에게 다 집약시킨 거예요. 바로 왕이 꿈꾸는, 바로 왕 사적인 꿈이 아니고 애굽의 운명의 대표자로서 단독자지요. 우월한 단독자. 애굽의 모든 운명을 껴안고 모든 보편적인 애굽을 응축시켜서 대표로 꾼 꿈이 바로의 꿈이에요.
그러면 요셉이 해석을 했던 그 꿈에 비해서 그 당시 애굽 주민들의 꿈들은 뭐냐? 개꿈이지요. 이것은 해석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에요. 왜? 그것은 보편적 꿈에 종속되니까. 그것은 해석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이걸 신약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 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런 인생은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나는 오늘 왜 이렇게 우울하지?’ 혹은 ‘나는 오늘 왜 자꾸 기쁘지? 좋았다가, 기뻤다가, 조울증인가?’ 그런 것도 주님께서 관심도 없어요. 주께서 관심 있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보편적 단독자하고만 상대합니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을 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꾸어나가는 그 인생을 주님의 인생으로 바꿔치기 해야 돼요.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주님이 우리의 해석자 됨을, 우리의 허락도 없이 쑥 하고 성령이 들어와 버리면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 내 인생이 아니라 보편적 단독자이신 예수님, 세상을 제대로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세상의 운명을 끝장내신 그 분이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뭘 증거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축복과 저주마저도 임의로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자기증명, 예수님의 자기존재확인을 위해서 우리는 종으로 택하심을 입은 겁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은 뭐냐? 네모진 스티로폼 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입니다. LA다저스 가을야구 하는데 2대 1로 이겼다든지, 이제는 넥센이 이겼으니까 한화하고 붙어서 가을야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북한 철도 공사하는데 어느 기업이 들어가는지? 주식 값은 어떻게 되고 환율은 어떻게 되는지?
이 모든 것은 사각의 스티로폼 위에서 일어나는, 아무 의미 없는, 정말 무가치한,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에 자기들끼리 으샤, 으샤, 하고 문명을 만들어내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거요. 인간들은 거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자기 나름대로의 비전을, 그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보고 괜찮은 것을 자기 꿈으로 끄집어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돌 가수가 출세하니까 ‘난 공부하기 싫어. 난 아이돌 가수가 될 거야.’ 그걸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괜찮다 싶은 거기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나중에 커서 한의사 될 거야. 만날 놀면서 보약만 달이면 돈 버니까.’ 꿈을 딱 거기서 끄집어내요.
‘나는 목사할거야. 하루 일하고 6일 노니까.’ 뭐 이런 것. 끄집어낼 때 사고방식이 뭐냐? 근거가 있어요. 나는 축복받아서 풍족을 누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기정사실화시키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왜곡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노는 장소에요. 문화회관이라니까요. 교회는 곧 노는 장소. 그 외 아무 이유 없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바로의 꿈을 자기의 꿈으로 인수해서 황폐로 끝나야 될 것을 이런 요셉의 지시에 의해서 오히려 애굽나라가 더 융성하게 되는 경우는 누가 개입했는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전개과정을 애굽이라는 무대를 가지고 보여준 거예요. 그게 뭐냐? 축복과 저주는 같이 동반해서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를 신약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는 5천명이 있었는데 배가 고팠어요.
설교를 다시 하게 되면, 이 땅 인간은 대지 위에 살면서 대가가 곡물을 내면 인간은 살고 대지가, 땅이 곡물을 내지 못하면 죽습니다. 인간은 결국 잘난 게 아니에요. 대지가 갖고 있는, 먹을 것을 생산하는 효력에 인간은 완전히 종속되어 있고 갇혀 있는 거예요.
땅이 먼저지 인간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땅의 운명이 먼저지 인간의 운명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걸 몰라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땅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를 봐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땅을 어떻게 다루는가? 신약성경에 보게 되면 바깥에 있던 땅이 사라지고 그 땅을 다루었던 그 방식으로 예수님인물 안에서 새로운 땅이 만들어져요.
주님 안에 있는 새로운 땅을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땅은 인간이 두 발로 딛는 그게 땅이지만 신약에서 땅은 뭐냐? 예수 안이 땅이에요. 성령 안이 땅이고 십자가 안이 새로운 땅입니다. 거기서는 영원한 예수님이 이뤘던 성과가 효능을 발휘하는데 그걸 두자로 천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다섯 자로 하나님나라라고 합니다. 네 자로 하면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언약이 여분의 것, 추가적인 여분의 것을 마음껏 발휘하는 곳이에요. 여분의 것이니까 여분의 것을 두자로 하면 ‘은혜’에요. 은혜가 마음껏 쏟아지기 위해서는, 애굽의 운명은 풍족한 것 주고 황폐하게 하는 것, 축복을 주고 저주를 받게 했잖아요, 주님의 나라는 뭐냐?
저주 주고 저주밖에 없는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행하심에 근거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에 근거한 새로운 추가적인 긍휼, 불쌍히 여김이 제공되면서 오직 긍휼만 존재하는, 저주를 향한 긍휼만 풍족하게 계속해서 영원히 생산되는 나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이 사람들이 배가 고파요. 허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5천명을 먹였거든요. 5천명 먹인 것에 유념하지 말고 6장 12절에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그들이 먹고 배불러 버리면 이것은 일시적인 거예요. 주님께서 오셨던 진정한 여분의 취지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마침 딱 맞게 열 두 바구니에 꽉 찬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땅 사람들을 먹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도 못한, 그들이 생각한 토지 의존적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땅에서 나오는 주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는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 만들기에 그들은 지금 참여하고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적 속에 이런 내용을 담은 겁니다.
그것을 단출하게 공식화시킨 것이 로마서 9장 16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 긍휼히 여긴다 하는 거예요. 긍휼히 여긴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로마서 9장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해서 저주받을 인간이 어떤 긍휼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전제로 해야 돼요. 저주 받는 것은 합당한 조치기 때문에 거기서 더 욕심을 내면 안돼요.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한 겁니다. 우리는 단절되어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갇혀서 죄 값으로 죽어야 되고 이 토지에서 태어난 인간은 이 토지의 불바다와 함께 같이 묻혀야 되고 영원히 지옥가야 돼요. 그게 당연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서라, 말아라. 너희들이 뭘 원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너희가 뭘 시도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지금 기대하는 것이 문제고요 희망 갖는 것이 문제에요. 사람이 기대하고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주받을 인간, 땅과 더불어 토지와 더불어 저주받을 인간, 하나님의 토지에 대한 최종적인 운명은 저주에요.
땅에 대한 운명이 바로의 꿈을 통해서 저주로 확정된 이상은 달리 기대하거나 비전이나 꿈을 만들면 안돼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줘야 되는 겁니다.
천당 가고 싶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기 싫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당 가자, 지옥가자, 결정하거나 선택할 권한이 우리한테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이 토지에 종속된 존재임을 통해서 심하게 느껴져야 돼요.
나라에서 아무리 물가 잡으려고 해도 비 안 오고 가뭄 들면, 저수지에 물 말라버리면 천하에 경제학자라도, 노벨경제학상 받아도 소용없습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줘야 돼요. 지진이 일어나지 않아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나온 거예요.
‘우리는 비만 먹고 햇빛만 쬐지 말고 도대체 나한테 이런 단비와 공기를 줄 이유도 없다. 왜? 우리는 이 토지와 같은 운명체기 때문에, 이 세상이 황폐로 끝날 토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그 일부로서 지옥가야 해.’ 그걸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긍휼이 올 때는 웬 떡이냐 하는 거지요. 웬 떡이냐?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가 개 같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 방향을 보세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개도 먹지 않습니까, 한 거예요.
원래 방향이 내 것이 아니에요. 주인의 상에서, 그 다음에 이게 떨어진다는 말은, 여분의 것으로 떨어지는 것, 방향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개가 왕왕거린다고 떼서 주는 것이 아니고 개는 그냥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은 여분의 것이에요. 천국 안보내도 괜찮아요. 생명 안줘도 괜찮아요. 그게 개의 자세입니다. 멍멍!
이게 개의 자세에요.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귀한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주는 긍휼의 표시라는 것을 창녀가 알았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알았다고요. 강도가 알았어요. 잘난 체 하는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어린애 같은 심정이 아니면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영안이 떠져야 돼요. 성령을 통해서.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데 요셉처럼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모멸감과 어떤 배척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장래와 우리의 운명과 미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상관없는 일이에요. 남북통일이 되든 말든, 월드컵 가든 말든, 우리 애가 공부 잘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어요. 내가 앞으로 굶어죽든, 내 몸이 암에 걸리든, 아무 상관없어요. 한걸음, 두 걸음 주님의 긍휼하심이 천국 가는 경로가 될 겁니다.
요셉이 가는 길, 요셉 안에 주님의 꿈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자기증명을 하고자 하는 기능이 우리 안에 있는 이상 우리의 가는 길은 주님에 의해서 천국으로 끌려가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꿈의 내용이 어떠하든 추가적인 내용, 그것이 바로 긍휼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먼저 축복 얻기 전에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인 것부터 명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