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8절 / 잃어버린 상태 / 181002

정인순 2018. 10. 3.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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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취:홍민희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

181002a-이근호 목사




자, 요한복음 18장 8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잃어버린’ , 잃어버렸는데 아버지가 주신자로 보는 겁니다. 이 내용이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난해할 수 있는데 아버지 여기 있고 세상에 아들 계시지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가 있는 겁니다. 주신 자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를 주면 우리의 상식에서는 뭐가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 잃어버림 자체가 여기 없어야 되겠지요. 줄 때 확실하게 주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필히 잃어버림이 요건으로 갖춰져야 된다는 겁니다. 잃어버림이 성사되어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주신 자가 된다는 겁니다. 잃어버려야 되는데 잃어버릴 때 잃어버린 자가 스스로 알아서 그 아버지께로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로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오셨다 이 말은 이 아들, 예수님 하는 일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잃어버린 자가 스스로 올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자 마저 아들에게 오게 하는 그 기능이 예수님이 하는 기능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그 다음 문제는 이들이 잃어버렸다 할 때에 어디서부터 어디로 잃어 버렸느냐 하는 것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림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바로 생명의 대척관계, 생명의 반대가 뭐냐 하면 ‘죽음’이죠. 죽음이죠.


어떤 영화에 보면 신부가 수녀한테 묻는데 이런걸 물어요. 신부가 나오는 그 영화인데 “기적의 반대말이 뭐냐?” 이렇게 물어요. 기적의 반대말이 뭐냐? 자, 기적의 반대말이 뭡니까? 기적의 반대말. 묻고 답변을 안 해줘요. 기적의 반대말은 이게 정답은 ‘저주’ 입니다. 저주에요. 왜 그러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은 될 수 있는대로 저주에 안 빠지는 것이 계속 자기가 살고 있는대로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의 반대말은 어쨌든간에 내 것이 빼앗기지 않는 저주 받는거죠. 내 것이 손해나지 않는 것, 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그것을 기적이라고 보고 그 반대말은 뭐냐 하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이 영화가 뭐냐 하면 ‘The Nun’ 이라는 영화에요. 지금 개봉하고 있어요. 루마니아에 수도원에 거기에 지옥이 올라오는 구멍이 있는데 그것을 폭격 맞아가지고 그 구멍이 뚫려가지고 악마가 구멍으로 올라와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 천주교 바티칸에서 수녀 한 사람 신부 한 사람 해가지고 다시 봉합해서 악마가 더 이상 세상에 들끓지 않도록 그 영화입니다.


nun 이란 뜻은 뭐냐 수녀라는 거에요.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 거기에 보면 왜 천주교가 마귀 종교인지 다 나와 있어요. 악마가 물리친다고 용을 써. 악마가 악마를 그야말로 사도행전 19장에 나온거 있지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누구냐는 식으로. 악마가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예수도 알고 그 다음에 누구도 압니까? 바울도 알잖아요. 그럼 바울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면 되는데 바울이 생각하는대로 생각을 못해요.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해요.


천주교에서 기적은 뭐냐? 천주교가 부흥되는게 기적이에요. 이게 자기거잖아요. 교회 기적은 뭡니까? 자기 교회 자기 부동산인 교회 부흥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이게 The Nun 이잖아요 이게. 이게 이단이란 말이죠. 어떻게 저주 안 받으려고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든지 ‘나’라는 것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도리하는 여기 이거에 겁을 먹고 기적과 은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살아온 내 것 잊어버리지 않기.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불상사나 불행한 일 끔찍한 일 나쁜 경우 그렇게 생각되는 그 진원지가 어디에요? 가만히 커피마시면서 생각나는 것은 어쩌지? 어떡해? 뭐든지 어떡해 조금만 여유 있다하면 불상사가 끊이지 않고 늘 상상되는 그 근원지가 어디냐 이 말이죠. 우리 마음이죠.


저는 그걸 마음에 가래 끓는것 같다 그러는데 가래가 계속 올라오는 거에요. 좀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마음속에 계속해서 어쩌지? 어떡해? 그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거에요. 나 그러면 망할거야. 나 망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면 나 완전히 망했지.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발생되는 그 염려의 그 장소는 뭐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지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나오는 것은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걸 우리가 탓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그러한 불상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필수 코스에요. 요한복음 18장에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9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래요.


예수님께서 이 깜짝 놀랄만한 일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누가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이라든지 예수님의 위상이라든지 지금까지 온 업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주변에 있던 12제자가 11제자가 든든하게 한번 주님을 이렇게 가까이 했더니만 그대로 천국까지 골인. 이게 얼마나 안심되는 일입니까?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꿨더니만 천국까지 그대로 무사하게 골인. 그걸 우리는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고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게 원하고 있잖아요.


사실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지칠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가래처럼 계속 나오는 나는 망하면 안돼 이러면 인생 조지는거야 라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어떤 사전의 처방을 하나님 앞에 아부하는 식으로 갖다 앵기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제가 많이 받습니다. 그냥 느낌이 아니에요. 실상이죠. 기도해도 불안 불안 헌금해도 불안 목돈해도 불안 교회 참석해도 불안 불안. 이거 왠 불안감? 항상 이 불안감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 원인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코스와 우리가 생각하는 코스가 안 맞아서 그래요. 하나님의 코스는 우리를 예수님한테서 떼어놓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다 나 좋아라고 믿잖아요. 그것을 떼어놓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방법은 뭐냐? 하나님을 안 떨어지는 방법을 찾아요 우리는.


주님의 방법은 뭐냐? 구원의 방법은. 다시 말해서 주님과 떼어 놓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주님과 이렇게 떨어지고 잃어버렸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계속 갖게 하십니다. 주님과 연이 닿은 사람들은. 자기가 모자라고 자기가 아는게 참 점점 더 없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관심사가 자동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좀 더 주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복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요. 왜? 자기가 많이 모자라니까. 그런데 자기가 모자라지 않고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그 다음부터 엉뚱한데 정신 팔고 있습니다.


목사 같으면 교회 부흥이나 신경 쓰고 교인 수나 신경 쓰고 자기의 실력이나 업적 같은게 남이 안 알아줄까? 그 과시하기 위해 신경 쓰고. 이게 뭐냐 하면 이만하면 됐다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서 왜 나 아직까지 이렇게 아는게 없어. 나는 왜 이리 무식해. 나는 왜 모자라 같으면 어디에 자꾸 관심이 가느냐 하면 주님의 그 깊이 있는 말씀과 복음에 대해 관심 있다 이 말이죠. 그만큼 자기 실력으로 구원되는게 아님을 아는 거에요 자기 실력으로. 주께서 계속해서 이끌어 주고 채워주고 도와주고 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중세 때 화가들이 여러분들 중세 끝나고 르네상스시대 때 화가 그림들 있잖아요. 그림 보니까 잘 그렸어요? 안 그렸어요? 유명한 명작들 보면. 너무너무 잘 그렸죠.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렇게 묘사를 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냐. 정말 이 사람들 실력있다 하는데 그 사람들 베낀거에요.


‘Camera Obscura’ 라고 하는데 Camera Obscura가 뭐냐 하면 중세 때 처음 발명한 거에요. Obscura 가 뭐냐 하면은 암실이에요 ‘암실’. 방이 있는데 어떤 방이 있는데 캄캄한 방이에요. 구멍만 뚫어 놨어요. 구멍만 뚫어 놓고 이 앞에 마차가 지나간다든지 산이 있다든지 동물이 지나가고 태양이 비친다면 여기에 이 벽에 있는 이 그림자가 비치게 되면 이 산의 형상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나겠습니까? 거꾸로 나타나겠어요? 거꾸로 나타나죠.


이게 뭐냐 하면 구멍이 너무 커도 흐릿하고 적으면 안보이고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벽이 있으면 그림자가 이걸 통해서 사물이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위 아래 하고 겹쳐져 가지고 사람이 거꾸로 보이는 거에요. 이게 처음의 카메라의 원리입니다. 카메라의 원리에요. 카메라의 원리니까 여기에다가 프리즘 거울 같은 것을 장치하게 되면 거꾸로 된 것을 바로 딱 할수 있습니다. 그 밑에 도화지만 딱 놓으면 되요. 도화지 딱 놓고 습자지 놓고 그래도 베끼면 되는 거에요. 참 쉬워요. 그림이 아니고 복제를 하는 거에요 복제를 이렇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예수님이 실천한 일을 뭐하고 했습니까? 모형이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림자지요. 이 그림자가 이 세상 자체가 어둡고 죄로 컴컴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바깥에 있는 것은 전부다 거꾸로 보이는 겁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뭐냐? 이 암실같은 이 세상에서는 우리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가잖아요. 그런데 이 주님의 계시 주님의 그림자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미래로부터 현재로 시간이 이렇게 흘러옵니다. 다 이루었다 하는게 그 말이에요. 이미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이 현재가 있는거에요. 미래의 관점에서. 미래의 이미 완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만 현재의 인간들은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테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림자니까. 성도는 주님의 그림자니까. 이게 로마서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일을 통해서 염려가 자꾸 생기는 거에요. 이래서 내가 천국 가겠나? 탈락된거 아닌가. 염려가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염려에 대해서 뭐가 동원되겠냐 하면 그냥 염려만 끝나는게 아니라 뭔가 염려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울거에요. 그 대책이 뭐냐 하면 할 수 있는대로 자기가 주님 앞에 주님을 이만큼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순종을 다하고 주님 앞에 껌뻑 죽고 나 주님 위해서 살아갑니다라는 티를 자꾸 내야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10절에 나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베드로가 주님과 자기가 한편이라는 것을 본인이 보여주고 싶은거에요. 베드로가 주님과 한편이고 한편 값을 해야 된다. 적어도 첫 수제자니까 그 행동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바로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현재에 발휘하고 있는거에요.


인간은 과거에 기억된 것을 현재에 써먹게 되어 있어요. 기껏 안다는 것이 과거에 아는 거에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요. 대구 강의에서 은혜 이야기할 때 두가지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은혜와 아직 모르고 있는 은혜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는 아는 은혜를 은혜로 보지않아요. 왜냐? 아는 은혜를 이미 인간의 자기 실력으로 업적으로 실적으로 이미 이게 자기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은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성경에 사도 바울에게 성도에게 규정할 때 뭐로 보느냐 ‘봉사자’입니다. 봉사자거든요. 봉사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업적과 실적을 생각하지 말아야 봉사자에요. 업적을 실적을. 봉사란 것은 뭐냐 하면은 이미 은혜를 받았잖아요 이미 은혜를. 이미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은 자기가 계산하지 않는 사태다 이 말입니다. 내가 계산하고 예상하지 않는 사태에요. 내가 과거에 이게 은혜라고 생각했다면 이건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 실력 발휘한거 밖에 안되요.


만약에 베드로가 칼 빼가지고 예수님을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는 그래서 예수님과 나는 떨어질 사이가 아니고 지금도 함께 있음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은 그것은 일반 사람들하고 할 때 하는 이야기에요. 이건 거꾸로 된 상이 아니라고요. 빛이 없는 상태에서 같은 어둠과 어둠 상태에서 인간이 인간을 할 때는 성의를 보인만큼 그 사람이 뭔가 나한테 혜택을 줄 것이라는 그런 거래관계죠.


인간은 기껏 할수 있는게 그런거 밖에 못해요. 잃어버리려면 확실하게 잃어버려야돼요. 이거는 자식들이 애먹일 때 부모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럴려면 집나가 이렇게 하죠? 뭐 아버지야 집나가라 하지만 어머니는 잠시 후에 뒤에 또 돌봐주잖아요. 나가라는 이야기 아니야. 아빠가 화나서 하는거니까 아빠 화 풀리면 다시 전화하면 돼. 잘못했습니다 하면 되는거야. 너 아빠 몰라?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식으로 하지요. 주님께서 잃어버렸다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 본인이 알아서 기어들어 올 수 있는 그 장소가 아니에요. 인간쪽에서 붙들수있는 주님이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그 이명직 목사하고 가면서 이야기 했잖아요. 개천절 이야기했죠. 목사님 낼 생일이라고 했죠? 하늘이 열린 날이 생일이랍니다. 아 참 생일이 아니고 결혼기념일. 그런데 성경에서 인간이 밑에서 시도해가지고 하늘문이 안 열리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원래 하늘문은 없어요. 그래서 마가복음은 찢어진다고 했죠. 강제로 하늘쪽에서 강제로 문이 없는데 강제로 찢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가 오신거에요. 인간쪽에서 어떤 방법으로 문을 찾아서 열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같으면 뭐냐 하면 ‘잃어버린 자’ 되게 하는 거에요. 다시 제자들이 예수님 못찾아 오는 그 장소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헤어져야 되는 겁니다. 헤어질 때 한 10km 헤어질까요? 너무 가까워요? 그럼 한 20km? 30km 쯤 헤어지면 됩니까? 천리 헤어지면 못 찾아오겠습니까? 그정도가 아닙니다. 제자들 입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는 소리까지. 여기에 그 소리까지 나와야 돼요.


여기 성경에 뒤에 보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또 26절에 보면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뭡니까? 닭이 울더라”. 베드로하고 닭하고 차이 없다 이 말입니다. 짐승하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미리 예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닭이 운다고 예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예고한 닭이나 예고한 베드로나 닭 = 꼬끼오, 꼬끼오 = 베드로고. 베드로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기 위해서 꼬끼오를 옆에서 같이 결부시켜 놓은겁니다. 니가 제자될 바에 닭이 제자되겠다. 정말 이렇게 멀리 있어도 찾아오기 마련이거든요. 아예 마음 자체가 마음 자체에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빛이 생각하는 빛의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 예수님이 베드로 세계에 아예 없었음을 완전히 확인되는 들추어지는 그 자리까지 말입니다.


엉뚱한 예수님, 전혀 예수님같지 않은 예수님. 가짜 예수님. 그것을 베드로가 알아야 돼요. 베드로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잖아요. 그 제자가 ‘Camera Obscura’ 완전히 뒤집어 져야 되요. 제자인 척하는 제자 엉터리 제자 가짜 제자. 그리고 스승도 따져보면 가짜 스승.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다 도망갔어요. 배신한 가룟 유다만 아니고 도망한 제자들 그 나물의 그 밥이에요. 비빔밥 전부 다 똑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필수적인 절차였다는 겁니다 이게. 필히 그래야 돼요. 다 잃어버려야 그 다음에 그 다음이 뭐냐 하면 잃어버려도 되는데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날 다시 살린다는 것이 오직 예수님의 하심에 의해서만 예수님께서 행하심 안에서만 그것이 성사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디까지 잃어버려야 되는가? 그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질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예수님 살아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살아계십니까? 안 보이지요? 그럼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죽은 귀신 믿는다는 말과 똑같은 거죠? 안 보이는 안 보이는 유령을 지금 일반 사람들 살아있는 것처럼 똑같이 살아 있다고 인정하는게 되지요? 그렇지요?


그거 헛깨비 쫓는거 아니에요? 이거는 예수 10년 되고 20년 되고 30년 되도 관계없어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위에 사람이 다 꺼지고 다 사라지고 다 핍박한다 할지라도 전혀 상관없을 정도 되야 돼지요.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미워하고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뭐 별게 아니죠.


제사를 지내는 것은요 죽은 조상을 기억해서 존경해서 예를 드리는 거지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럼 제사 지내는 사람은 죽은 귀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죽은 사람은 없고 이미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자손들에게 그분의 덕이다라는 것을 보람을 느끼는 거죠. 만약에 진짜 조상이 와서 제사상에 그걸 먹고 간다면 그것은 조상숭배가 아니고 무당이에요. 신들린겁니다. 가짜 무당 배운 무당말고 신들린 무당은 어떻습니까? 신들린 무당이 만약에 권투를 한다면 슉슉 내가 하는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 이럴거란 말이죠.


무당이 작두에 올라갔다. 춤춘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왜 작두냐 하면은요. 그냥 스펀지에 요새 라텍스 스펀지에 재미나게 하는게 아니고 작두에 올라가는 이유는 스펀지에 올라가면 자기가 재미나서 까부는건지 진짜 귀신이 까불게 하는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작두는 아무나 못 올라간다 이 말이죠. 그야말로 진품 진짜 귀신들린 자만이 작두에 올라가서 춤을 춘다는데 진짜 신들리면 그렇게한다 하거든요.


나는 그거 안 믿고 싶어요. 나같으면 그 작두에 올리는게 아니고 도루코 칼날에 올려버려야지. 작두라 해도 두껍다 이 말이죠. 여자 몸무게가 한 보통 50-60 잡으면 얼마 안 아픈 훈련만 되면 굳은살 배기면 괜찮단 말이죠. 제대로 하려면 도루코 면도날에 해야지.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너무 장난기가 많다. 누가 한번 작두에 올라가면 내가 가서 보면 작두가 이만해서 특수 주문했어 전혀 안 다치는 정도. 약간 날카로운거 이거는 훈련만 하게 되면 굳은살 있어서 괜찮은거.


남자들 100m 17초에 달릴수 있습니까? 100m 17초. 되지요? 남자들 빠르면요 젊을 때 17정도 뛰어요. 여자들은 17초 안되요. 여자들은 100m 자체를 못뛸거에요. 아마 걸어갈거에요. 두시간을 계속 100m를 17초에 달리는 사람 있다면 그게 바로 이번에 마라톤 신기록 세운 사람입니다. 아마 기계 자동차 같으면 가능해요.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전거 같은것도 되는데 인간은 안 되잖아요. 그러나 훈련을 하니까 42195m를 100m 17초 속도로 달릴수 있었던 거에요. 이게 훈련하니까.


무당도 마찬가지인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함께 있다는걸 훈련해야 됩니까? 자, 지금 제가 묻는 것은 이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죽은 귀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오늘날 세상이 합리적이잖아요. 모든 것을 인간의 사고로 납득이 되야 된다고요. 합리적인데 그 합리화했다는 말은 주님 보시기에 합리적이란 말은 주님 이야기만 하시면 우리가 순종하든지 납득을 하든지 논리를 따지든지 신학을 하든지 해서 이걸 우리가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구나 이걸 알아채서 제가 그걸 이해하고 믿고자 합니다. 이걸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거에요.


그러면 뭡니까 결국 베드로가 주님 옆에 있는거와 똑같은 거에요. 내 쪽에서 시작해 가지고 주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이걸 지금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거에요 지금. 아까 Camera Obscura라 하는 것은 뭡니까?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지요?


고린도전서 3장 18절인가? 맞는가 모르겠어요. 3장 18절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그 다음에 뭡니까? 미련한 미련 등신되라 이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인간 대 인간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유통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차라리 이 세상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자가 되야 된다 이말이에요.


고린도전서는 뭡니까? 구원은 어디에서 옵니까? 똑똑한데서 오는거에요? 뭐에서 오는겁니까? 어리석고 미련한데서 오잖아요. 십자가가. 십자가를 내세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세상 사람들 똑똑한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차라리 미련해 버려라 이 말이거든요. 어리석어 버려라. 세상은 뭐냐 하면 세상은 과거에 자기가 살던 현재를 구성을 합니다. 그러면 과거에 뭐냐? 과거에 자기가 본게 있잖아요. 본 것을 그대로 믿는거에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미 죽으신 분이지요? 죽은신 분 같으면 우리 곁에 없어야 마땅하죠.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논리에 의하면 죽으신 분은 죽은 자끼리 모이고 산 자들은 산 자들끼리 눈에 들어오고 이 세상은 산 자들의 집합이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Camera Obscura라 하는 것은 이게 거꾸로인거에요. 현재 인간들은 다 죽어 있고 살아있는 것은 누구 밖에 없다? 오직 주님만 살아있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숨 꼴딱꼴딱 넘어가기 전에 한시적으로 살아있는 것이지 사실은 이미 죽은 기계란 것이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사니까 주님이 사니까 살아있는 거에요. 이걸 내세울 때 이 세상에서 이걸 지혜롭다 합니까 이게 미련하다 합니까? 미련한거에요. 안 미련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이게.


어떻게 아버지가 안 믿는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복음 믿는 아들 불러놓고 야 네 눈에 누가 보이느냐? 아버지가 보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있나? 예수님이 있나?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는 죽은 자로 있고 예수님은 산 자로 있습니다 이러면 이거는 미친 인간이죠. 지금 소위 복음 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어떤 마음 갖고 있느냐? 안 미치려고 해요. 남한테 이상한 눈총 안 받으려고 해요. 바보 등신 안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학을 했고 뭘 했고 똑똑하고 그 똑똑한게 무슨 소용 있어요 천국에. 뭐 신앙 생활 40년 했고 50년 했고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만 보이는데. 교회 예배당 크기 사람 숫자 헌금 나오는 거 그거만 보이는데 이게 무슨 신자입니까? 그 눈에 보이는 교회 예배당 보이니까 날마다 마음속에 뭐냐? 마음속에 가래 끓어가지고 아이고 교인들 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헌금 계속 나와야 되는데 어떡해 우리 교회 부흥해야 되는데 맨날 이런 어떤 불상사 염려 걱정 계속 나온다 이 말이죠.


벌써 전도사 생활 오래 됐는데 2년 후에 목사 안수 받아야 되는데. 목사 안 받으면 나 뭐하지? 걱정하는거에요. 끊임없이 장사 가게하는 사람은 가게 옮겨놨는데 좀 장사 좀 되야 될텐데. 주부 같으면 우리 애 공부 좀 해야 될텐데 결혼 안 했으면 딸 빨리 결혼 시집가야 되는데 아들 장가보내야 되는데 맨날 이 생각 이 생각. 자기가 뭔가 모자란다 생각은 안 하고 계속 뭔가 나는 잘못 되었어 나는 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고 지금 가지고 어떻게 남한테 인정 받을까?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나는 살만하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간이지 그거 지금 뽐내려고 교회 다닙니까? 예수님 그것 때문에 믿는 거에요? 또 이럴때는 꼭 서울말이 나와. 평소에 안 나오다가.


지금 신자라는 사람들 신자 아니에요. 가짜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 이야기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옛날에 옛날에. long long time ago. once upon a time. 아는 방언 다 나온다.


한때. 한때 예수님 계시는데 사도바울 통해서 교회 세워라해서 훌륭한 목사님 만나서 장로님 만나서 교회 세웠다고 눈에 교회만 보여요 교회만 보여. 그것도 교회라고 저희들끼리 교회해요 저희들끼리. 그게 무슨 교인이고 성도예요.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앞에 안 살아 있는 사람 되야 돼요. 살아도 산게 아니고 살아도 죽은거고 죽어도 죽은거에요.


왜냐하면 나 살고 죽는 것은 관심 뚝 관심 밖에 걱정거리도 되지 말아야 돼요. 왜?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주님 때문에 살아있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것은 이미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있음을 위하여 살아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주님이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뭐냐? 죽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에요. 죽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


어디까지 제자들이 끊어져야 되냐 하면 제자들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죽음으로서 죽음이라는 영이 헤어지는 거에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되 영영히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영영히 완전히 헤어지는 상태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몰아붙입니다. 몰아붙입니다.


예수님 죽었대. 이제는 볼 일 없다. 우리 가자 엠마오로. 그게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잖아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 제자 이름이 한사람이 글로바에요. 글로바하면 늘 생각나는게 탁구, 이 탁구의 상표가 글로바에요. 제자들이 볼 일 없다는 거에요. 왜? 산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오늘날 교회 뭐 어떻고 뭐 어떻게 주를 섬기자 그거 다 떼어. 다 떼어버리고 우리교회 표어라 이러면 큰 교회 표어 조언을 할께요.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그걸로 액자를 만들어. 이게 솔직한 거에요.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죽은 예수 찾지말고. 죽은 예수 찾아봐야 예수가 밥을 먹여주나 예수가 뭐 해준다고 죽은 사람 찾지말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교인들끼리 힘을 합해서. 교회 사람들 십시일반 헌금하잖아요. 헌금해가지고 가난한 사람 도우면 가난한 사람 살잖아요. 그게 교회 할 일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들먹여가면서 서로 도와준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거 실천에 옮기면 그게 교회 됩니까? 왜 귀신 무당 되기를 왜 그렇게 싫어해요?


봉사자는 여기서 ‘봉사자’란 은사 받은 사람은 다른말로 봉사자는 실적을 업적을 계산안하지요? 왜냐하면 봉사니까. 그런데 그 봉사자를 봉사하게 하는 것은 뭐냐? 은사다 은사.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멸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는게 있어요. 사람이 살아남는게 아닙니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이 뭐냐? 세가지에요. 사람이 아니고 짐승도 아니에요. 믿음, 소망, 사랑만 살아 남아요. 이 말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은사거든요. 선물이거든요. 이 선물주신 주님만 영원토록 살아남아요. 주님만. 그래서 그 말은 이어보면 주님만 살아남기 때문에 주님의 선물 받은 사람만 살아 남아요. 그 선물받은 사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업적이나 실적을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 해요.


주께서 믿음을 위해서 주께서 소망을 위해서 주께서 사랑을 위해서 저희들을 사용했잖아요. 죽은 우리를 사용하셨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믿음과 내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소망과 나는 죽고 내 안에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나오도록 그렇게 주께서 다루셨잖아요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자기가 죽었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면 그것처럼 세상사는게 그것처럼 편한게 없어요. 그것처럼 편해요. 죽은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으로 죽었어요. 율법을 못 지킨다고 죽었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못 지킨다면 못 지킨 자를 율법대로 우리는 어떻게 되야 돼요? 우리는 저주 받아야 되잖아요. 저주 받아야 되는 자 그걸 오늘 본문에 다른 말로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인데 아버지께서 보냈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린 자리에서 주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가 돼요.


잃어버린 자였는데 그런데 내가 여기 18장에 다시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다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 모든 솜씨와 능력은 누구한테 나오느냐? 예수님에게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떤 식으로 잃어버린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관계의 끊어짐이 어디서 어디까지 쫙 제대로 끊어지는지를 그 다음부터 철저하게 제자들 앞에 보여줍니다.


18장 32절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내게 주신자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그 말씀만 예수님한테 중요한 거에요. 따라서 그 말씀에 응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절차를 보여주는데 그 절차의 하이라이트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죽으신 분이 되겠지요? 죽은신 분이니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있으신 분이에요? 없는 분이에요? 없는 분이죠. 왜냐하면 안 죽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여기 제자입니다. 제자가 자기는 안 죽었지요. 안 죽었으니까 이거는 있음이 되는거죠. 그런데 자기는 살아 있는데 예수님은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있음’이 돼요? ‘없음’이 돼요? 제자들 입장에서. ‘없음’이 되는 거에요. 이 정도로 헤어지는 거에요.


예수님 없어지면 결국 남는 것은 뭡니까? 본인만 남아요. 본인만 여기 있지요. 이걸 뭐냐? 이 상태가 뭐냐? ‘잃어버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잃어버린 상태. 이게 잃어버린 상태가 되거든요. 잃어버린 상태가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또 잃어버린 상태가 되니까 마음이 그대로 있잖아요. 잃어버린 상태로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 마음도 있지요. 그 마음에 뭐가 끓어나오느냐 하면 가래가 끓지요? 맨날 나오는게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나를 어떻게 보존할 것이냐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나 어떻게 살지? 이제 예수님도 안 계시면 누구 믿고 살지? 하나님 믿고 사나? 하나님 믿는 것도 예수님 믿는 것도 뭐냐 하면 그 예수님, 하나님을 자기 관리 하에 둡니다. 교회 목사 같으면 아이고 교회 어떻게 하나? 교회 집세 올려달라고 하는데 끝났어 끝났어. 망했어. 그러면 또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계속 더 잘해야 되는데. 교인수 늘어나면 요새는 그런 일 없지만 계속 더 와야 되는데. 세상에 한도 끝도 없는 걱정과 근심 그게 바로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인간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니까 너 걱정되지? 그게 너의 본모습이야. 본모습이야. 그런데 만약에요 만약에 성령을 받게 되면 만약입니다. 만약에 하늘이 찢어지고 그때 비로소 하늘 문이 열려서 성령이 왔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면 그 다음부터는 아까 제가 이야기한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변한다 했을까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는 왜 이렇게 모자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내가 따로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나는 뭐를 해도 등신같고 병신같고 나는 주님의 영광 그런 데는 한참 멀었어.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이것도 내 뜻 아닌 것 같은 느낌 들고. 주께서 뜻이 있어서 살려 주시겠지만 어쨌든간에 주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감사함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실적과 업적을 계산할 여지가 없어요. 계산할 필요도 없고 여지도 없어요. 왜? 부족한데 뭐. 아무것도 아닌데 뭐요. 무슨 내 실적과 업적을 이야기해요. 뭐 자식 잘 키웠다고요? 뭐 했다고요? 주님이 키웠지 내가 키웠습니까? 전에 이야기했지요. 내가 키우지 아니한 것에 대해 어떤 권리 주장하지 말라고요.


사람이 남한테 기대 거는 것은 그만큼 투자했다는 뜻이거든요. 누가 누구한테 투자해요? 인간은 절대로 남한테 투자한적 없습니다. 자기한테 투자하지 남한테 투자한적 없어요. 투자 이만큼 해놓고 이자 이만큼 다 빼먹으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한줄 알아? 이 딸아. 뭘 키운다고 고생했어요? 귀엽기만하구만. 그렇게 해놓고 너는 왜 내 말 안 듣느냐 이렇게 해놓고 자기 엄마말 안 듣는다고 윽박지르고 아빠말 안 듣는다고 윽박지르는데 그럴 권리 없습니다.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한테도 그런 권리 없어요.


우리는 자식 앞에서 남편 아내 앞에서 개 앞에서 자신의 모자람을 발견해야 돼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잘 커줬구나 이 개야 이런거. 다른 개는 우울증 걸린다는데 너는 우울증도 안 걸리고. 어떤 실적과 업적을 계산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자기 신앙이에요. 이건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아니고 자기 집착이다 자기 집착.


성령 받으면 그냥 거룩한 무당되는 거에요. 거룩한 무당. 신들린 겁니다. 진짜 성령들린거에요. 주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 주께서 어떻게 지시하는대로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은 주님이 없을 때가 가장 슬퍼요. 주님이 어 지시를 안 할 때가 가장 슬퍼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울어라 결혼식에 신랑 없거든. 결혼식 때는 신랑 없는 것이 울 일이에요. 그러나 신랑이 있다면 웃어야돼요. 신랑이 있다면. 기뻐해야 된다고. 목사님 신랑은 있는데 전세값 올려달라고 하고 신랑은 있는데 암수술하는데 돈은 없고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래요.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면 암 걸린 것도 주의 뜻이에요.


우리가 생각하고 사고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믿음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절벽으로 절벽 끝으로 막 걸어 갑니다.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면 이근호 목사 당신 말대로 주와 함께 있다면 내가 절벽 끝으로 갈 때에 주께서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 불든지 손모가지를 치든지 해가지고 절벽 끝에 가기 전에 직전에 나를 끄집어내면 나 주님이 없다는 소리 두 번 다시 안 할게. 절벽으로 걸어가는거 한번 시험 해볼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정말 주님이 살아 있다면 정말 절벽 가는데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면 내가 지금 절벽 끝에 갈 때 주님께서 멈춰라하고 잡아당기는 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하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시험인거에요. 그게 마귀의 시험인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왜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됐느냐 하면 절벽 끝에 가게되면 주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를 잡아당긴다는 그 스토리를 누가 만들었어요? 본인이 만들었어요. 본인이 만들었는데 본인이 속아넘어간거에요. 문제를 자기가 출제해놓고 주님보고 풀어라 이게 말이 돼요?


또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인도네시아 놀러가서 해변가에 있는데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저 뒤에서부터 뭐 저런 파도가 다 있어? 할 때에 주께서 나를 이끌어서 높은 곳으로 높은 산으로 피신해가지고 과연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내가 확인토록 하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올거라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 어떻게 했습니까? 한참 해변에서 공놀이 하다가 퍼져가지고 수천명 죽게 만들었잖아요.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해변에서 공놀이를 마음대로 하세요. 하면서 나는 여태까지 배구하면서도 여태 모자라. 이 생각하면 돼요. 나는 토스가 안돼 토스가. 주여 나는 토스가 안돼요. 배구도 등신같이 합니까. 등신 죽여줄게. 하면서 홀딱. 다 죽어버리는거에요.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파도를 일으킨게 주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도네시아나 절벽 끝이나 가지 마세요. 집에서 짜장면이나 먹으면 돼요. 아 왜이리 맛있지? 주의 은혜에요. 매사가 주님이 살아계셨어. 주님이 살아계셔 주신 은사 은혜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살아 있는게 아니고 내가 살아 있음을 소소한 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

181002b-이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그 성경에 보면서 볼 때 누가 보느냐 하면 내가 현재 있는 내 마음 가지고 그렇게 보거든요. 보게 되면 내가 행할 수 있는 것과 행할 수 없는 것을 일방적으로 이렇게 정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지요. 그런데 그럴 때 뭐를 놓치느냐 하면 내 안에 ‘내가 이기지 못하는 요소’가 있음을 자꾸 잊어버려요. 우리는 지키고 싶어 내 안에 내가 이기지 못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충동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고 또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내가 내 성격 때문에 말씀대로 못 지키는 걸 알게 되면 그냥 못 지키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것을 변명을 하고 그걸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은 그게 내 진심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게 진심입니다 라고 이렇게 안에 있는 것을 억압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주님은 중심을 보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고 그 중심을 잘 요리했고 그 윤리 도덕으로 덮어놓을 정도로 성의를 보이는 나 자신을 좀 보라고 주님 앞에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헤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과정 과정 하나가 제자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자기 속마음을 숨겨왔는가를 그대로 다 보여주는 절차를 보여줘요. 절차를 쭉 나열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서 가는 이것이 불신자 이렇게 겁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 나중에 과정을 자기 백성이 볼 때에 주님 하신 일이 우리가 도저히 역으로 다시 우리가 찾아올 수 없는 그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그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약간 좀 미리 어렵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여기에 19장에 보게 되면 19장 2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하게 하신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지요. 한번 적어 볼께요. 성경에서는 요한복음을 강조한 것을 적어 볼께요 크게. 응하게 그 다음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참 첫째 시간에 제가 이것 잘못 썼어요. Camera Obscura, 카메라 ‘암실’이라는거 상을 거꾸로 맺히게 하는 장치. 어디? 어둠 속에서 빛은 거꾸로의 모습으로 반대의 모습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응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거든요. 응하는데 뭘 응했느냐 하면 메시아의 옷을 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옷이 필요 없잖아요. 옷을 두고 이게 골고루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게 내기를 해요 내기를. 군병들이 내기를 한다고요.


누가 몽땅 다 가져가는지 내기를 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대상이냐 하면은 내기를 거는 판돈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자기의 오락과 자기의 즐거움거리 밖에 안 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이. 그러면 이걸 보고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아 참 군인들 잔인하다. 남은 피 흘려 죽는데 자기들은 내기를 하고 예수님을 그렇게 하찮게 보느냐 라고 분노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본인 내부에 벌레가 예수님을 하찮게 보는 벌레가 인간들 안에 제자들 안에 들어있어요. 모든 인간들에게 다 들어있다고요. 예수님을 하찮게 보는 것. 우리는 예수님을 하찮게 안봅니까?


다시 이야기할께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가면서 하시는 계속해서 던지는 이 요한복음의 나열은 성도로 하여금 도대체 우리 안에 어떤게 들어있기에 주님과 우리를 죽음으로서 완전히 결별되야 되는가를 알려주는겁니다. 그럴 때 여기 군병들이 등장하지요. 여러 가지 체포 뭐 가야바의 18장에 보면 제사장의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가 있는데 이 안나스 가야바 원래 장인이 적임자고 안나스가 지금 현재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제사장 같이 있으니까 둘 다 제사장으로 보면 되요.


이런 사람 등장하니까 이게 전부 남의 이야기고 우리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 예수님을 하찮게 팔아먹고 그 예수님을 보는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당신을 볼 때는 이런 안목으로 이런 정도로 밖에 안봅니다 그것을 불시에 그 당시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쪽을 통해서 낱낱이 보여주는데 그 낱낱이 보여주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19장이 아주 세밀한거에요. 우리하고 성도하고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말 관계있는 이야기에요.


그 당시에 그 안나스나 가야바 안나스 이 패들이 예수님을 함부로 체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그들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그들의 권력 위에는 누가 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있었고 그 본디오 빌라도 위에 누가 있느냐 하면 로마라는 실제적인 권력체가 있어요. 그래서 빌라도가 여기 18장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자꾸 주춤한다고요. 멈칫한다고. 이 사람 죄가 없는데. 자꾸 몇 번이나 풀어줄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럴 때 마지막에 내는 카드가 뭐냐 하면 만약에 이 예수를 사형시키지 아니하면 당신은 황제한테 배신하는 것이라고 협박을 해버린다고 이게.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이 세상에 권력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거에요.


그러니 이것이 예수님 체포할 때 정신 기조였지요? 그 정신 기류와 분위기가 지금 우리 안에는 없냐 이 말입니다. 없겠어요? 교회 안에 없습니까? 당회장 목사 전도사 그 조직체 계급체 장로 권사 그 안에는 권력이 없어요? 보이는 사람 말 듣지 보이지 않는 주님 말 듣겠습니까? 요한복음 18장 19장 이게 남의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가 평생토록 한번 알면 그만이다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두고 우리는 확인해야 되고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이 괴물이라면 이 괴물이 아직도 우리 안에 꿈틀 거리고 있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평생 가도 우리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가 믿는 것은 말씀의 응함이라. 아버지가 보낸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이란 자기 약속 때문에 구원받는 거에요.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질문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게 있을거에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 질문부터 하고 싶어 하지요. 요한복음 6장 끝에 보면 요한복음 6장 38절 끝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는 지금 예수님이 누구 할 일 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 본인이 할 일이지요. 예수님 본인이 할 일을 이렇게 선언하는 거에요. 할 때 이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질문을 의문을 던지느냐 하면은 예수님 그렇게 하시는데 그 예수님이 나를 안 건져주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 그 질문을 하고 싶은거에요 전부 다. 주께서 나를 비켜가면 어떻게 되느냐 비켜가면. 내 옆 사람은 건지고 나는 그냥 비켜서 너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야 하고 넘어가면 나는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떻게 살아? 지금까지 예수님한테 공 들인게 많은데.


성경공부도 참석하고 열심히 하고 뭐 교회 봉사도 하고 열심히 했는데 나 그냥 슥 빠지면 어떡해? 그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 속에 있는 낭패성, 불상사, 불행 그게 우리 마음속에 나온다 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소리도 안 나오도록 서울말로 하면은 확실하게 부산말로 하면 학실하게. 확실하게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어떤 근거 자체가 폭파되었음을 그 자체가 이미 구멍 뚫렸음을 주님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내가 알게 아직 많이 남아있고 나도 아직 모자란게 그렇게 모자란게 많구나. 이정도 하면 하나님 충성이고 이정도하면 하나님 섬기는구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든지 갑자기 누가 50억 줄게 이러면 갑자기 흔들리면서 복음을 버리면 50억 줄게 갑자기 뭐가 흔들리면서 그동안 나 라는 인간 자신을 자기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에요. 자기가 아무리 자기를 파봐도 자기를 안 되는거에요.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주님 앞에 완전히 잊어버려야돼요.


이런 비유해서 저녁때 좀 죄송합니다만 이런 비유까지 거론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쏟아낸 대변을 도로 음식을 만든다 상상하겠습니까? 아 내가 상상해도 지저분하다. 쏟아낸 대변 가지고 다시 음식을 만든다 못 만들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걸 하신다니까요. 주님은 똥으로 지금 천국 백성을 만드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뭐 됩니까? 똥 되야 되는 거에요 지금. 그런데 이게 저주인데 우리가 저주받은 사람 아니라고 자꾸 우긴다 우리자신은.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 보내버리고 십자가 예수님 주변에 누굴 포진합니까? 저주 받을 자들을 포진해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야 될 죽여야 될 그 사고방식 있잖아요. 그 사고방식에 너희들도 이미 같이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평교인이기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그만큼 안 중요할거에요. 왜냐하면 평교인들은 교회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배드리고요 후딱 점심 먹고 빨리 집에 가기 바빠요. 평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가 중요한게 아니고 자기 집구석이 중요해요. 오늘 제목을 자기 집구석이라고 할까. 교인들한테는 자기 집구석이 중요하다니까요. 그래서 걱정하는 것은 자기 교회 때문에 걱정하는게 아니고 자기 집구석 때문에 걱정해요. 모든 걱정 염려를.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목사 입장에서는요 교회보다 더 중요한게 없어요. 교회가 자기 자존심이라니까요. 교회 있고 없고 교회 되고 안 되고가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교인들은 교회 와서 뭐냐 뭘 느끼느냐 하면 목사가 교회를 교회에 대한 애정 집착에서 오는 어떤 권력 같은 것을 교인들이 느낍니다. 느낄 수밖에 없어요. 닦달하는 거에요 목사가. 여러분 집은 좋은 아파트 살면서 교회 지붕 새는데 여러분 가만히 있을거에요? 돈 안내고? 교회 어떻게 할거에요? 그러면서 홀딱 들추는 것이 학개서 막 들추는거에요. 자기는 좋은 집 짓고 주의 성전은 소홀히 한다 그 대목 필요한 대목 다 끄집어내가지고 예배당 건축하고 교육관 늘리자고 하는거에요. 여러분의 비전을 위해서 선교 헌금 더 내고 자식들을 위해서.


뭘 느꼈다고 했어요 방금? 그 가운데 뭘 느껴요? 권력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목사말 들으면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지요. 인정받는 동시에 그 사람은 가정에서도 인정받고 이제는 교회와서도 인정받으니까 인정받는걸 다 챙긴거에요. 제2의 가정처럼 교회를 섬기게 될 겁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정신구조에요. 이게 예수님을 죽이는 정신구조에요.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은 교인대로.


뭐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입이 째졌어. 뭐 충성해서 구원받는거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입이 째졌어. 교인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왜? 자기 집은 아직 있거든. 자기 집은 지금 손 안 대고 있거든요. 교회는 나 몰라라 에요. 자기 집만 잘되면 되요. 어차피 교회는 내 집 아니니까. 안 그래도 그 전까지는 두 집 살림한다고 고생하고 좀 신경썼거든. 교회도 돈 내고 그래야 되는데. 목사가 와서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하니까 좋은거야 이제 자기 집구석만 챙기면 된다고요.


그러면 복음의 타켓이 어디로 갑니까? 혈육으로 갑니다. 혈육이 곧 저주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엔 아예 교회 보이지도 않지 뭐. 왜냐 피할 구석이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까. 마음 둘 곳까지 저주로 날려버렸으니까. 이제 마음 둘 곳이 없거든요. 그러면 나는 나의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이러고 있거든요. 나의 가치는? 지금 예수님을 죽여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당시 그들이 찾아놓은 밥상의 가치, 유대인의 가치를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는 겁니다.


이 본문이 18장에 나와서 여기 18장 14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보세요 ‘유익’이잖아요 유익. 공리주의 아닙니까. 어떤 일을 했을 때에 우리한테 이익이 되느냐 그 얘기잖아요. 한사람을 죽여서 예수님을 죽여서 누구한테 이익이 있다? 우리한테 이익이 있다면 그 사람 평소에 살아온게 뭡니까?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데 그리스도가 훼방꾼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을 죽이는 동기였잖아요. 그 동기가 현재 우리 속에는 없느냐 이 말입니다. 있어요 이 동기가. 지금 이 사람들 욕할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다들 전부 다 예수님 곁에서 잃어버린 자가 되야 돼요. 우리는 약간 저쪽은 200km 잃어버렸고 우리는 5km 잃어버린거 아니에요. 다 잃어버린거에요.


어떤 쪽이든 알아서 그리스도 찾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대변이 음식되는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이런거 없어요. 안 되는걸 되게 하셔요. 안 되는걸 되게 하시는걸 뭐냐 하면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남는 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뿐이에요. 이거는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성령 안 받으면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해요. 말씀 보다 더. 곧 죽어가면서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해요. 치매 걸리고 아무리 병들어도 인간이 끝까지 놓지 않는게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가치 자신의 자존심입니다. 어른들 돌아가신 어른들 한번 보세요. 끝까지 놓치 않는 것은 그것 놓으면 이제는 진짜 가시는 거에요 그것 놓으면.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 자기의 명예같은거 끝까지 지킵니다.


아까 영원히 남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 소망 사랑이죠. 인간에게 영원히 남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나 나 나 나 나. 끝까지 악마가 집어 넣어준 나의 절대성 그것 못 놓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미 구원을 시켜놓고 18장 19장을 되풀이 해버립니다. 이미 구원된 사람한테서 18장 19장을 계속 되풀이하는거에요. 되풀이할 때 이게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매순간 마다 우리는 성도로 하여금 네가 원하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던지게 되면 우리가 해야 될 답변은 참 아직도 모자라네 아직도 이렇게 무식하네요 이런겁니다.


아이가 손녀가 독감 걸렸어요. 한국에 와서 독감 걸렸습니다. 독감 걸렸을 때에 온 집안이 혼이 나갔지요. 이제 두 돌 밖에 안 된 아이가 독감 걸릴 때 사실은 우리 손녀만 독감 걸린게 아니에요. 대구 시내 어지간한 애들 독감 걸렸어요. 올해 1월달이잖아요. 얼마나 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했지요. 우리나라 모든 애들이 독감 걸려도 절대로 우리 손녀만큼은 절대로 독감 걸리면 안돼. 왜? 내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자기가 가진 줄도 몰랐지요. 모르는데 걸리고 보니까 남의 아이 독감 걸리는 그것이 거기서 우리가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 우리 인생에 가는 길에 특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요.


걸리는 것 그건 그거고. 독감 걸리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는 뭐하느냐 자동적으로 뭘 하겠어요? 기도가 됩니다.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기도 시작은 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리고 응답은 어떻게 옵니까? 왜 낫게 해야하는데? 이렇게 주께서 시비조로 나오지요. 그러면 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말이 없지요. 기도라는 할 말을 통해서 응답은 할 말 없음으로 끝나버립니다. ‘할 말 없음’으로. 그러면 뭐냐? 주의 자식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옵소서.


건강할 때 주님은 저 하늘에 계셔요. 기도할 때 좀 가까이 옵니다. 기도 응답 받으면 내가 있는 자리가 주님의 자리고 나는 주님 있던 자리에 내가 가버려요. 지난 낮설교 한 것처럼 그분이 내가 되고 나는 그분에 의해서 ‘너’라고 지칭이 되는 거죠. 자식이나 손녀나 주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왜 독감 걸리게 하느냐? 우리가 얼마나 호들갑 떨 수 있는 그런 내부, 내가 미처 나를 이기지 못하는 수상한 음흉한 나의 내부를 또다시 들추어내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이만하면 됐다. 된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훌륭해. 이만하면 복음 아는거야 라고 했을 때 주께서 예상 못한 사태를 일으켜 가지고 얼마나 우리가 내가 철딱서니가 없고 진짜 주님 보시기에 구원 안 해도 상관없는 그냥 지옥에 내쳐도 주님 탓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 거에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모든 염려라든지 걱정이라든지 예상되는 불상사같은 이 모든 것이 그냥 건방진 인간의 사치에 불과한겁니다. Camera Obscura 식으로 거꾸로 사물이 맺히는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낙타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가는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이걸 Camera Obscura에 집어넣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이것을 Camera Obscura 에 집어넣으면 어떤 대답이 나오느냐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너무 많은 IQ를 필요로 합니까? 낙타는 바늘구멍에 못 들어가요. 만약 들어갔다고 한다면 낙타가 통과한게 아니에요. 낙타가 통과한게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자,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서 본인이 죽은 자만이 이미 천국에 도달된거에요. 천국치고 낙타 통과 안 된 사람 하나도 없어요. 전부 낙타 통과 하고 온 사람이에요. 모든 성도는. 그런 식으로 다룰거에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다루는데 우리 마음은 뭡니까? 부자 되고싶은 거에요 우리 마음은.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부자 되도 괜찮아요. 왜? 부자 된 그것이 심령이 가난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치고는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낙타 통과한 부자기 때문에. 왜냐하면 심령이 부자기 때문에. 심령이 부자가 또 가난하다 같은 말이 되어 버리죠.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이 넉넉하기 때문에. 심령의 가난함이 넉넉하기 때문에 천국이 너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질문 방금 한 이 이야기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여러분 답변을 이런 식으로 해야 돼요. 제가 지난 지난 시간인가?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인간은 모래위에 지은 집 밖에 없다. 어떤 인간도 모래위에 집을 짓게 되지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구원을 할 때 구원의 대상자가 전부 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야 돼요. 그래야 나중에 구원받은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짓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이 막 반박하기를 그래도 성령 받으면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다 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라고 그 답변을 요구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없지요. 이미 ‘나’ 라는 것을 이미 성령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 가 있다는 것은 아직 성령을 통과 성령을 받은게 아니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나의 자리가 누가 있어야 되요? 주님이 안 되려는 나를 그렇게 되게 했습니다 라고 나와야지. 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인데 어떻게 반석 위에 집을 지을까 구상하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서 드디어 내가 얻고자 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버리면 자기가 기대한 요구사항을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가 얻은게 되요. 그것은 까부는 거지요. 그것은 자기가 장난치고 있는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께요. 은혜가 두 종류인데 하나는 뭐냐.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 과거의 알고 있는 은혜 있잖아요.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니까. 아는 은혜를 가지고 미리 고대하고 기대한거에요. 목표를 잡은거에요. 그러나 실제는 내가 모르는 은혜가 와요. 그럼 모르는 은혜가 뭐냐 하면 너는 죽어도 상관없어 라는 은혜를 주께서는 주셨다는거에요.


그러나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뭐냐? 살아있는 내가 얼마나 잘되고 얼마나 뽐내고 남한테 참 믿음 좋구나 그런 소리 듣는 그 은혜를 주시옵소서 라고 인간이 고대 하고 있는 거에요. 사람이 고대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걸 조작하게 되는 겁니다. 진짜 성령 받으면 조작할 필요도 없어요. 옛날에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하는 것도 죄였습니다 라고 나와야지.


왜냐하면 구원은 내 계획이 아니고 누구 계획이니까? 주님의 계획이고 주님의 계획이죠. 내가 옷 벗고 있는데 누가 가위 바위 보 해서 옷 가지고 갑니까? 아니죠? 아까 요한복음 몇 장 입니까? 19장 24절 한 번 봅시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하는 것이 지금 누구한테 해당되는 거에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지요? 내 옷 가져가라. 가위 바위 보 하지도 않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옷을 탐을 낸다는 이 사고 방식이 오늘날 소위 예수 믿는 소위가 아니고 진짜 예수 믿는 성령 받은 우리 안에도 있다 이 말이에요 제 말은.


예수님 덕분에 얼마나 혜택 받았어? 같은 성도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거에요. 아이고 집사님 우리 애가 35살 됐는데 시집 못 갔는데 아이고 예수님이 신랑감을 그렇게 우연히 만나가지고 좋은 신랑감 만났습니다 라고 한다면 같은 나이 딸이 아직도 시집 안 간 입장에서는 저 인간은 기도를 어떻게 했기에 저런 혜택 받았지? 이렇게 생각 되지요? 그게 예수님 이용해서 가위 바위 보 한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시기 질투 없겠어요? 아 우리 딸은 안가도 되요. 통으로 당신 딸만 잘 살면 됩니다 이런 인간 없어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자기 딸은 시집보내고 싶어. 그런 인간 없습니다.


여기 지금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동원된 그 군인들이 옷 나누기 할 때에 이거는 두고 두고 성도란 이름으로 두고 두고 수시로 이런 마음가짐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나는 예수 믿어서 어떤 혜택을 받았나? 군인들은 옷이나 가졌지 나는 옷도 하나 못 얻었는데 이런 식이라니까요. 다시 생각합시다. 잃어버린 자를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리지 않아서 기어오는거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는 잃어버릴만해서 잃어버린 거에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압시다. 우리는 잃어버려도 괜찮아요. 그래도 마땅하니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응하게 함인데 응하는게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가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살리는 이것은 몫이 누구 몫이냐? 예수님 몫이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하실 몫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서 그 일을 하는데 누가 방해 놓고 틱틱 거리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다고 우기는 동시에 그 예수님이 하는 일을 내가 가리게 되는 거에요. 살 때 그냥 살아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체포하던 그 군인들과 그 체포하던 그 인간들의 사고방식으로서 살아있어요 우리가.


여기에 19장 28절 봅시다. 이러다 18장 19장 다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했지요. 예수님이 목마르다 할 때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댔지요? 입에 댔을 때에 거기 사람들 모여 있는 네 명의 마리아가 있었거든요. 막달라 마리아하고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하고 이모하고 또 하나의 마리아 있어요.


여기 나오네 25절에 나오네.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4명이 있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하고 동생하고 글로바의 부인 아내 마리아하고 막달라 마리아하고 4명 있었단 말이죠. 있을 때 거기에 예수님이 목마르다 할 때에 여러분 그 자리에 현장에 있다 칩시다. 내가 목마릅니까? 예수님이 목마릅니까? 예수님이 목마르지요.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이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중에.


아무도 없지요. 그냥 목마른거에요. 아 십자가 달릴 때에 액체가 빠지니까 목마르구나 이렇게 알지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아무도 인지를 못하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성도가 되었으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예수님 십자가로 인하여 살아있는 상황 아닙니까? 예수님으로 살아있는 상황이라면 예수님이 대한민국 움직이고 뭐 북한 핵문제 이 모든 것이 전부다 성경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거에요. 십자가에 다 이루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대목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시편 69편에 나옵니다. 시편 69편에 보게 되면 21절에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여기에 목마름 갈증 나오지요? 갈할 때 나오지요? 목마르다 나오지요? 시편에서. 이걸 응했다 말이에요 이걸. 이걸 응한거에요. 이거 누가 압니까?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만 알아요. 우리는,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가 아 나 이렇게 무식하나. 뭐가 무식하느냐 하면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잃어버린 자, 이정도로 잃어버린 자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모든 이 세상에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목마를 때에 그 다음 봅시다. 23절 시편 69편 23절 봅시다. 오늘 하이라이트 최고 중요한 거에요. 23절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그 다음에 뭡니까? 보지 못하게 하지요. 이게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처음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이거는 우리가 무당되어야 돼요 정말. 왜냐하면 세상이 보지 않는 것을 예수님 살아 있는 것을 우리가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마치. 예수님 살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왜냐? 여기 본문에 의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주의 말씀을 응하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장님들입니다. 소경들입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은 보지 못해요. 이건 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항상 염려와 걱정이 수심이 떠나지를 않아요. 재벌되도 마찬가지에요. 승진되도 마찬가지고 장관되고 마찬가지고 인간이 이민가도 마찬가지에요. 캐나다 미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심 걱정이 없는 날이 없어요. 왜? 그들은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들만 보기 때문에. 그러면 성도는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사람들과는 달라. 뭐가 다른데? 뭐가 달라야 되겠어요?


그들과 똑같은 입장인데 그들과 똑같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생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살아가는건 똑같은데 플러스 세상 사람들은 눈이 감겼어요. 눈이 감겼는데 성령이 온 사람들은 눈이 열렸지요. 열릴게 되면 감긴 것도 알게 되고 보이는 것도 알게 되고 둘 다를 알게 돼요 둘 다를. 이걸 다중현실이라고 전에 대전에서 강의할 때 다중현실이라고 했잖아요. 현실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라고요. 여러분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 우리 생명이 있다고. 이게 하늘과 땅을 양 쪽 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알기 쉽게 말하면 뭐냐? ‘신들린 사람’이에요. ‘거룩한 무당’이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네가 이야기 한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성령이 이야기한 것이다’ 라는 것을 언급할 때 이것은 신종 무당이에요 ‘신종 무당’. 요새 그런 무당 새로 생겼나? 우리가 걱정을 안 한다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세상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똑같이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해답이 없어요. 나 왜 이리 사나? 나 왜 이렇게 사는거야? 갑자기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 쓰러져 잠이 들면서 나 왜 이렇게 사는거야? 그것처럼 우리는 뭐냐? 똑같이 힘들게 사는게 힘들어요.


일본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비행기 타면 멀미나고 똑같이 힘든데 그게 무엇을 응하게 함이라? ‘말씀’, 주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또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고 성도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별난 인생 사는게 아니에요. 야근할 때 빼주고 그런거 없어요. 여기 뭐 배 아프면 배 낫고 그런거 없습니다. 이 아프면 이 낫고 그런거 없어요 똑같아요. 그런데 그래야만 돼요. 아플 때 아파야 되고 나을 때 나으면 되고 그래야만 돼요. 그러니까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자책하지 마세요.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주님 주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성도가. 거기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더 혹독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정신구조에 대해서 우리가 혹독하게 더 깊이 알고 더 많이 알아야 돼요. 왜냐? 많이 용서 받은 자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되어 있어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거에요.


저는 압니다. 강의 이렇게 백날 해봐야 또 끝나면 버스 빨리 와야 되는데. 너무 늦으면 안 되는데. 우리 마음에 가래가 늘 끓듯이. 성경은 성경이고 우리 집구석은 나 아니면 집구석이 안돌아 가는데. 우리 집구석은 반듯하게 남한테 꿀리지 않게 하고 싶어. 우리 집구석은 잘되고 싶어 남 보란 듯이. 복 받았다고 티내고 싶어. 부자가 낙타가 통과하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우선 부자 되고 싶어. 낙타는 뭐 바늘구멍을 크게 만들든지 뚫든지 그건 그 때문제고.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일어난 사건을 성령께서 이렇게 반복해서 하는 것은 그들만이 나쁜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들만이. 그들만이 유별나게 그들만이 극악무도해서 십자가에 죽인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상관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상관없는 자를 상관있게 하신 겁니다 주께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라고 특별하게 관계해서 그들만을 보여줘서 십자가를 보여줘서 실상을 공개하신겁니다.


너 이 정도 밖에 안 돼. 너 이것밖에 안 돼. 남 욕하지마. 베드로 욕하지마. 뭐 닭 울었다고 뭐 나 같으면 배신 안 한다고. 매일같이 넌 배신해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배신했잖아. 예수님 믿고 난 뒤에 어떤 이득이 뭐가 있었습니까? 맨날 이거 계산한다고요. 대제사장 안나스가 계산한게 그거잖아요. 예수님 죽음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오느냐?


그러고 난 뒤에 그다음 18장 그 뒤에 아까 20절 했지요. 유대인들 보이는 회당에서 이렇게 쭉 보게 되면 성경이 그렇게 쉬워요. 18장 19장이 거저 넘어갑니다. 자, 한번 봅시다. 25절 이야기는 아까 했으니까 넘어가고요. 닭이 울더라. 29절 봅시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아까 군중에 요새에 두 번 왔다 갔다 했지요. 지난 시간에 했지요.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조건 우리가 요구하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해달라.


그렇게 하니까 31절에 빌라도가 ‘너희가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가 싫으면 너희가 재판하면 될 거 아니냐’ 그렇게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재판하게 되면 31절에 ‘사람을 죽이는 권리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이거는 뭐 애초부터 죽이겠다는 거에요. 누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람들이 정말 못 된 사람들입니까? 잠깐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이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뭐를 빼겠다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 그림자를 빼겠다는 거에요. 그렇지요?


그럼 우리가 하루 아침 일과를 봅시다. 예수님 고려합니까? 예수님 빼고 시작합니까? 빼고 가실게요 빼고 가실게요. 우리는 예수님 빼고 일해요 빼고. 너 오늘 학원 시험 쳤지? 몇 점이야? 이 말은 뭐냐 예수님 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애가 이야기하기를 엄마 주께서 내가 수학 치는데 주께서 역사하셔서 40점 맞게 하셨어. 하면 회초리 들고 와. 애가 하는 말이 엄마 나를 때리는 것은 예수님 때리는거야. 까불지 마라 너 공부 안 했으면서 어디 핑계를 대고 있어. 성질났는데. 우리가 성질나잖아요.


‘때림’의 연장은 뭡니까?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안 따라줬잖아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인간들이 원하는 말을 부합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어리석음이라는 거에요. 미련한게 그거에요. 모든 세상이 합리화되고 똑똑한 사람을 찾고 있는 세상이에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등신같은 인간은 이 세상이 원하지 않습니다. 자진해서 등신된다는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거는 주에 의해서 완전히 등신 바보가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받았다. 내가 구원받을만한 이유 있으면 대봐라. 없다. 그 논리가 납득이 안 되는데 납득이 안 될 문제다. 납득이. 나도 납득이 안돼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내가 이해가 안돼. 그 순간 우리는 내 것 지키겠다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3초동안은 사라집니다. 3초동안은. 하나 둘 셋 사라집니다. 3초 지나면 아이고 내가 예수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빨리 장보러 가야 돼. 다시 내가 나를 사는 그러한 작동이 계시됩니다. 또 몇 탕 더 뛸까? 아르바이트 할까. 이런 거에요.


그런데 32절 다시 보겠습니다. 18장 32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그 다음에 뭡니까? “응하게 하려 함이라”. 야~ 보세요. 하나님이 절대로 인간에게 안 지잖아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던 간에 그것조차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한대로 네가 움직인다, 계획한 대로.


그런데 이 말이 성도한테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기 때문에 굉장히 좋아요. 성도한테는 기분 좋은데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하는 인간에게는 이게 고문같은 겁니다. 어떤 저주 같은거에요.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렇게 대들어요. 어쩌라고. 그럼 착하지 말까? 그럼 방종인데? 그럼 막 살까? 이러잖아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끝까지 포기 못해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예수 믿는 것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 그 말이 맞는거 같은데 그럼 교회에 교인들이 안 모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거든요. 이걸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교인들이 교회 안 나오고 말은 맞지만 나는 교회 복 받으려고 왔는데 복도 없다고 하고 목사님 나는 믿음 없으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그냥 가버리면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걱정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본인과 주님 사이에 바로 연결되면 되는데 옆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교회’라는 것을 집어넣는 거에요.


주님 살아있다는 것을 교회 잘 되는 것으로 주님 살아있다는 것으로 대신 하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만 살아있으면 나는 죽어도 없어져도 괜찮은데 주님 대신에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를 이루는데 내가 보탰으니까 나는 가치 없다가 아니라 갑자기 나도 쓸모 있다가 되어 버려요. 쓸모 있다가 되어 버리면 자기 포기하기 굉장히 힘들어요. 이거는 거의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반설을 설득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헛깨비를 잡아야 되는데 헛깨비가 아니고 실적있는 것만 잡으려고 한단 말이죠.


성도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른 세상에서는 뭡니까? 헛깨비 잡는거에요. 도깨비 잡는 것하고 똑같아요. 헛깨비 잡는거에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교인들 안 오잖아요. 교인들 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 버리고 뭐는 얻고? 주님 버리고 생긴 것이 뭡니까? 교회 얻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주를 위해서 이런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세요? 나는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뭘 했다고? 주의 이름으로 뭘? 귀신 쫓아내고 뭘 가르쳤다고? 나는 너 몰라. 주님이 알아야 돼요. 주님이 알려면 나는 나에 대해서 몰라도 괜찮아요. 내게 신경 안 써도 괜찮아요.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 역할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 역할하려면 이미 잃어버린 자를 주께서 이미 찾았다고 확정을 내린 상태여야 돼요. 성령을 받아서 이미 구원은 받아놓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됐는가를 18장, 19장을 쭉 보게 되면 베드로 도망가지요 그 사람들 그렇게 예수님 욕하고 가위 바위 보 하고 했지요.


그런데 그것마저 주님의 말씀에 응하게 한다면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같은 한통속이였었는데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렇게 성령이 와서 비로소 이 사실을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이 사실을 비로소 눈이 떠서 이 사람들이 곧 내 모습인 것을 발견할 때 주께서는 의인을 부른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피로써 용서한다는 그 피의 고마움이 세상의 어느 것보다 더 귀한 고마운 선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살아 있어서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현재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믿는 척한 것이 얼마나 가증한 것이고 거짓인 것을 날마다 폭로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오히려 폭로당한 그것이 신앙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