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홍민희 강남-요한복음 18장 8절(잃어버린 상태) 181002a-이근호 목사
자, 요한복음 18장 8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볼 때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잃어버린’ , 잃어버렸는데 아버지가 주신자로 보는 겁니다. 이 내용이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난해할 수 있는데 아버지 여기 있고 세상에 아들 계시지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가 있는 겁니다. 주신 자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를 주면 우리의 상식에서는 뭐가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 잃어버림 자체가 여기 없어야 되겠지요. 줄 때 확실하게 주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자는 필히 잃어버림이 요건으로 갖춰져야 된다는 겁니다. 잃어버림이 성사되어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주신 자가 된다는 겁니다. 잃어버려야 되는데 잃어버릴 때 잃어버린 자가 스스로 알아서 그 아버지께로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로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오셨다 이 말은 이 아들, 예수님 하는 일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잃어버린 자가 스스로 올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자 마저 아들에게 오게 하는 그 기능이 예수님이 하는 기능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그 다음 문제는 이들이 잃어버렸다 할 때에 어디서부터 어디로 잃어 버렸느냐 하는 것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림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바로 생명의 대척관계, 생명의 반대가 뭐냐 하면 ‘죽음’이죠. 죽음이죠.
어떤 영화에 보면 신부가 수녀한테 묻는데 이런걸 물어요. 신부가 나오는 그 영화인데 “기적의 반대말이 뭐냐?” 이렇게 물어요. 기적의 반대말이 뭐냐? 자, 기적의 반대말이 뭡니까? 기적의 반대말. 묻고 답변을 안 해줘요. 기적의 반대말은 이게 정답은 ‘저주’ 입니다. 저주에요. 왜 그러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은 될 수 있는대로 저주에 안 빠지는 것이 계속 자기가 살고 있는대로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의 반대말은 어쨌든간에 내 것이 빼앗기지 않는 저주 받는거죠. 내 것이 손해나지 않는 것, 내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그것을 기적이라고 보고 그 반대말은 뭐냐 하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이 영화가 뭐냐 하면 ‘The Nun’ 이라는 영화에요. 지금 개봉하고 있어요. 루마니아에 수도원에 거기에 지옥이 올라오는 구멍이 있는데 그것을 폭격 맞아가지고 그 구멍이 뚫려가지고 악마가 구멍으로 올라와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 천주교 바티칸에서 수녀 한 사람 신부 한 사람 해가지고 다시 봉합해서 악마가 더 이상 세상에 들끓지 않도록 그 영화입니다.
nun 이란 뜻은 뭐냐 수녀라는 거에요.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 거기에 보면 왜 천주교가 마귀 종교인지 다 나와 있어요. 악마가 물리친다고 용을 써. 악마가 악마를 그야말로 사도행전 19장에 나온거 있지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누구냐는 식으로. 악마가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예수도 알고 그 다음에 누구도 압니까? 바울도 알잖아요. 그럼 바울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면 되는데 바울이 생각하는대로 생각을 못해요.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해요.
천주교에서 기적은 뭐냐? 천주교가 부흥되는게 기적이에요. 이게 자기거잖아요. 교회 기적은 뭡니까? 자기 교회 자기 부동산인 교회 부흥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이게 The Nun 이잖아요 이게. 이게 이단이란 말이죠. 어떻게 저주 안 받으려고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든지 ‘나’라는 것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도리하는 여기 이거에 겁을 먹고 기적과 은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살아온 내 것 잊어버리지 않기.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불상사나 불행한 일 끔찍한 일 나쁜 경우 그렇게 생각되는 그 진원지가 어디에요? 가만히 커피마시면서 생각나는 것은 어쩌지? 어떡해? 뭐든지 어떡해 조금만 여유 있다하면 불상사가 끊이지 않고 늘 상상되는 그 근원지가 어디냐 이 말이죠. 우리 마음이죠.
저는 그걸 마음에 가래 끓는것 같다 그러는데 가래가 계속 올라오는 거에요. 좀 지저분한 이야기지만. 마음속에 계속해서 어쩌지? 어떡해? 그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거에요. 나 그러면 망할거야. 나 망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면 나 완전히 망했지.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발생되는 그 염려의 그 장소는 뭐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지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나오는 것은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걸 우리가 탓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그러한 불상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필수 코스에요. 요한복음 18장에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9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래요.
예수님께서 이 깜짝 놀랄만한 일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누가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이라든지 예수님의 위상이라든지 지금까지 온 업적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주변에 있던 12제자가 11제자가 든든하게 한번 주님을 이렇게 가까이 했더니만 그대로 천국까지 골인. 이게 얼마나 안심되는 일입니까?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꿨더니만 천국까지 그대로 무사하게 골인. 그걸 우리는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고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게 원하고 있잖아요.
사실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지칠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가래처럼 계속 나오는 나는 망하면 안돼 이러면 인생 조지는거야 라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어떤 사전의 처방을 하나님 앞에 아부하는 식으로 갖다 앵기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제가 많이 받습니다. 그냥 느낌이 아니에요. 실상이죠. 기도해도 불안 불안 헌금해도 불안 목돈해도 불안 교회 참석해도 불안 불안. 이거 왠 불안감? 항상 이 불안감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 원인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코스와 우리가 생각하는 코스가 안 맞아서 그래요. 하나님의 코스는 우리를 예수님한테서 떼어놓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다 나 좋아라고 믿잖아요. 그것을 떼어놓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방법은 뭐냐? 하나님을 안 떨어지는 방법을 찾아요 우리는.
주님의 방법은 뭐냐? 구원의 방법은. 다시 말해서 주님과 떼어 놓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주님과 이렇게 떨어지고 잃어버렸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계속 갖게 하십니다. 주님과 연이 닿은 사람들은. 자기가 모자라고 자기가 아는게 참 점점 더 없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관심사가 자동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좀 더 주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복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요. 왜? 자기가 많이 모자라니까. 그런데 자기가 모자라지 않고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그 다음부터 엉뚱한데 정신 팔고 있습니다.
목사 같으면 교회 부흥이나 신경 쓰고 교인 수나 신경 쓰고 자기의 실력이나 업적 같은게 남이 안 알아줄까? 그 과시하기 위해 신경 쓰고. 이게 뭐냐 하면 이만하면 됐다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서 왜 나 아직까지 이렇게 아는게 없어. 나는 왜 이리 무식해. 나는 왜 모자라 같으면 어디에 자꾸 관심이 가느냐 하면 주님의 그 깊이 있는 말씀과 복음에 대해 관심 있다 이 말이죠. 그만큼 자기 실력으로 구원되는게 아님을 아는 거에요 자기 실력으로. 주께서 계속해서 이끌어 주고 채워주고 도와주고 하셔야 된다는 겁니다.
중세 때 화가들이 여러분들 중세 끝나고 르네상스시대 때 화가 그림들 있잖아요. 그림 보니까 잘 그렸어요? 안 그렸어요? 유명한 명작들 보면. 너무너무 잘 그렸죠.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렇게 묘사를 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냐. 정말 이 사람들 실력있다 하는데 그 사람들 베낀거에요.
‘Camera Obscura’ 라고 하는데 Camera Obscura가 뭐냐 하면 중세 때 처음 발명한 거에요. Obscura 가 뭐냐 하면은 암실이에요 ‘암실’. 방이 있는데 어떤 방이 있는데 캄캄한 방이에요. 구멍만 뚫어 놨어요. 구멍만 뚫어 놓고 이 앞에 마차가 지나간다든지 산이 있다든지 동물이 지나가고 태양이 비친다면 여기에 이 벽에 있는 이 그림자가 비치게 되면 이 산의 형상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나겠습니까? 거꾸로 나타나겠어요? 거꾸로 나타나죠.
이게 뭐냐 하면 구멍이 너무 커도 흐릿하고 적으면 안보이고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벽이 있으면 그림자가 이걸 통해서 사물이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위 아래 하고 겹쳐져 가지고 사람이 거꾸로 보이는 거에요. 이게 처음의 카메라의 원리입니다. 카메라의 원리에요. 카메라의 원리니까 여기에다가 프리즘 거울 같은 것을 장치하게 되면 거꾸로 된 것을 바로 딱 할수 있습니다. 그 밑에 도화지만 딱 놓으면 되요. 도화지 딱 놓고 습자지 놓고 그래도 베끼면 되는 거에요. 참 쉬워요. 그림이 아니고 복제를 하는 거에요 복제를 이렇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예수님이 실천한 일을 뭐하고 했습니까? 모형이고 뭐라고 했습니까? 그림자지요. 이 그림자가 이 세상 자체가 어둡고 죄로 컴컴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바깥에 있는 것은 전부다 거꾸로 보이는 겁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뭐냐? 이 암실같은 이 세상에서는 우리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가잖아요. 그런데 이 주님의 계시 주님의 그림자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미래로부터 현재로 시간이 이렇게 흘러옵니다. 다 이루었다 하는게 그 말이에요. 이미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이 현재가 있는거에요. 미래의 관점에서. 미래의 이미 완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만 현재의 인간들은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테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림자니까. 성도는 주님의 그림자니까. 이게 로마서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 일을 통해서 염려가 자꾸 생기는 거에요. 이래서 내가 천국 가겠나? 탈락된거 아닌가. 염려가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염려에 대해서 뭐가 동원되겠냐 하면 그냥 염려만 끝나는게 아니라 뭔가 염려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울거에요. 그 대책이 뭐냐 하면 할 수 있는대로 자기가 주님 앞에 주님을 이만큼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순종을 다하고 주님 앞에 껌뻑 죽고 나 주님 위해서 살아갑니다라는 티를 자꾸 내야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10절에 나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베드로가 주님과 자기가 한편이라는 것을 본인이 보여주고 싶은거에요. 베드로가 주님과 한편이고 한편 값을 해야 된다. 적어도 첫 수제자니까 그 행동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바로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현재에 발휘하고 있는거에요.
인간은 과거에 기억된 것을 현재에 써먹게 되어 있어요. 기껏 안다는 것이 과거에 아는 거에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요. 대구 강의에서 은혜 이야기할 때 두가지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은혜와 아직 모르고 있는 은혜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는 아는 은혜를 은혜로 보지않아요. 왜냐? 아는 은혜를 이미 인간의 자기 실력으로 업적으로 실적으로 이미 이게 자기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거는 은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성경에 사도 바울에게 성도에게 규정할 때 뭐로 보느냐 ‘봉사자’입니다. 봉사자거든요. 봉사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업적과 실적을 생각하지 말아야 봉사자에요. 업적을 실적을. 봉사란 것은 뭐냐 하면은 이미 은혜를 받았잖아요 이미 은혜를. 이미 은혜를 받았다 하는 것은 자기가 계산하지 않는 사태다 이 말입니다. 내가 계산하고 예상하지 않는 사태에요. 내가 과거에 이게 은혜라고 생각했다면 이건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 실력 발휘한거 밖에 안되요.
만약에 베드로가 칼 빼가지고 예수님을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는 그래서 예수님과 나는 떨어질 사이가 아니고 지금도 함께 있음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은 그것은 일반 사람들하고 할 때 하는 이야기에요. 이건 거꾸로 된 상이 아니라고요. 빛이 없는 상태에서 같은 어둠과 어둠 상태에서 인간이 인간을 할 때는 성의를 보인만큼 그 사람이 뭔가 나한테 혜택을 줄 것이라는 그런 거래관계죠.
인간은 기껏 할수 있는게 그런거 밖에 못해요. 잃어버리려면 확실하게 잃어버려야돼요. 이거는 자식들이 애먹일 때 부모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럴려면 집나가 이렇게 하죠? 뭐 아버지야 집나가라 하지만 어머니는 잠시 후에 뒤에 또 돌봐주잖아요. 나가라는 이야기 아니야. 아빠가 화나서 하는거니까 아빠 화 풀리면 다시 전화하면 돼. 잘못했습니다 하면 되는거야. 너 아빠 몰라?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식으로 하지요. 주님께서 잃어버렸다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 본인이 알아서 기어들어 올 수 있는 그 장소가 아니에요. 인간쪽에서 붙들수있는 주님이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그 이명직 목사하고 가면서 이야기 했잖아요. 개천절 이야기했죠. 목사님 낼 생일이라고 했죠? 하늘이 열린 날이 생일이랍니다. 아 참 생일이 아니고 결혼기념일. 그런데 성경에서 인간이 밑에서 시도해가지고 하늘문이 안 열리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원래 하늘문은 없어요. 그래서 마가복음은 찢어진다고 했죠. 강제로 하늘쪽에서 강제로 문이 없는데 강제로 찢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가 오신거에요. 인간쪽에서 어떤 방법으로 문을 찾아서 열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같으면 뭐냐 하면 ‘잃어버린 자’ 되게 하는 거에요. 다시 제자들이 예수님 못찾아 오는 그 장소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헤어져야 되는 겁니다. 헤어질 때 한 10km 헤어질까요? 너무 가까워요? 그럼 한 20km? 30km 쯤 헤어지면 됩니까? 천리 헤어지면 못 찾아오겠습니까? 그정도가 아닙니다. 제자들 입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는 소리까지. 여기에 그 소리까지 나와야 돼요.
여기 성경에 뒤에 보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또 26절에 보면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뭡니까? 닭이 울더라”. 베드로하고 닭하고 차이 없다 이 말입니다. 짐승하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미리 예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닭이 운다고 예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예고한 닭이나 예고한 베드로나 닭 = 꼬끼오, 꼬끼오 = 베드로고. 베드로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기 위해서 꼬끼오를 옆에서 같이 결부시켜 놓은겁니다. 니가 제자될 바에 닭이 제자되겠다. 정말 이렇게 멀리 있어도 찾아오기 마련이거든요. 아예 마음 자체가 마음 자체에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빛이 생각하는 빛의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 예수님이 베드로 세계에 아예 없었음을 완전히 확인되는 들추어지는 그 자리까지 말입니다.
엉뚱한 예수님, 전혀 예수님같지 않은 예수님. 가짜 예수님. 그것을 베드로가 알아야 돼요. 베드로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잖아요. 그 제자가 ‘Camera Obscura’ 완전히 뒤집어 져야 되요. 제자인 척하는 제자 엉터리 제자 가짜 제자. 그리고 스승도 따져보면 가짜 스승.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다 도망갔어요. 배신한 가룟 유다만 아니고 도망한 제자들 그 나물의 그 밥이에요. 비빔밥 전부 다 똑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필수적인 절차였다는 겁니다 이게. 필히 그래야 돼요. 다 잃어버려야 그 다음에 그 다음이 뭐냐 하면 잃어버려도 되는데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날 다시 살린다는 것이 오직 예수님의 하심에 의해서만 예수님께서 행하심 안에서만 그것이 성사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디까지 잃어버려야 되는가? 그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질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예수님 살아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살아계십니까? 안 보이지요? 그럼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죽은 귀신 믿는다는 말과 똑같은 거죠? 안 보이는 안 보이는 유령을 지금 일반 사람들 살아있는 것처럼 똑같이 살아 있다고 인정하는게 되지요? 그렇지요?
그거 헛깨비 쫓는거 아니에요? 이거는 예수 10년 되고 20년 되고 30년 되도 관계없어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위에 사람이 다 꺼지고 다 사라지고 다 핍박한다 할지라도 전혀 상관없을 정도 되야 돼지요. 왜냐하면 주님이 계시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미워하고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뭐 별게 아니죠.
제사를 지내는 것은요 죽은 조상을 기억해서 존경해서 예를 드리는 거지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럼 제사 지내는 사람은 죽은 귀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죽은 사람은 없고 이미 죽으셨음을 기억하고 자손들에게 그분의 덕이다라는 것을 보람을 느끼는 거죠. 만약에 진짜 조상이 와서 제사상에 그걸 먹고 간다면 그것은 조상숭배가 아니고 무당이에요. 신들린겁니다. 가짜 무당 배운 무당말고 신들린 무당은 어떻습니까? 신들린 무당이 만약에 권투를 한다면 슉슉 내가 하는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 이럴거란 말이죠.
무당이 작두에 올라갔다. 춤춘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 하면 왜 작두냐 하면은요. 그냥 스펀지에 요새 라텍스 스펀지에 재미나게 하는게 아니고 작두에 올라가는 이유는 스펀지에 올라가면 자기가 재미나서 까부는건지 진짜 귀신이 까불게 하는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작두는 아무나 못 올라간다 이 말이죠. 그야말로 진품 진짜 귀신들린 자만이 작두에 올라가서 춤을 춘다는데 진짜 신들리면 그렇게한다 하거든요.
나는 그거 안 믿고 싶어요. 나같으면 그 작두에 올리는게 아니고 도루코 칼날에 올려버려야지. 작두라 해도 두껍다 이 말이죠. 여자 몸무게가 한 보통 50-60 잡으면 얼마 안 아픈 훈련만 되면 굳은살 배기면 괜찮단 말이죠. 제대로 하려면 도루코 면도날에 해야지.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너무 장난기가 많다. 누가 한번 작두에 올라가면 내가 가서 보면 작두가 이만해서 특수 주문했어 전혀 안 다치는 정도. 약간 날카로운거 이거는 훈련만 하게 되면 굳은살 있어서 괜찮은거.
남자들 100m 17초에 달릴수 있습니까? 100m 17초. 되지요? 남자들 빠르면요 젊을 때 17정도 뛰어요. 여자들은 17초 안되요. 여자들은 100m 자체를 못뛸거에요. 아마 걸어갈거에요. 두시간을 계속 100m를 17초에 달리는 사람 있다면 그게 바로 이번에 마라톤 신기록 세운 사람입니다. 아마 기계 자동차 같으면 가능해요.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전거 같은것도 되는데 인간은 안 되잖아요. 그러나 훈련을 하니까 42195m를 100m 17초 속도로 달릴수 있었던 거에요. 이게 훈련하니까.
무당도 마찬가지인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함께 있다는걸 훈련해야 됩니까? 자, 지금 제가 묻는 것은 이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것은 죽은 귀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오늘날 세상이 합리적이잖아요. 모든 것을 인간의 사고로 납득이 되야 된다고요. 합리적인데 그 합리화했다는 말은 주님 보시기에 합리적이란 말은 주님 이야기만 하시면 우리가 순종하든지 납득을 하든지 논리를 따지든지 신학을 하든지 해서 이걸 우리가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구나 이걸 알아채서 제가 그걸 이해하고 믿고자 합니다. 이걸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거에요.
그러면 뭡니까 결국 베드로가 주님 옆에 있는거와 똑같은 거에요. 내 쪽에서 시작해 가지고 주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이걸 지금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거에요 지금. 아까 Camera Obscura라 하는 것은 뭡니까?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지요?
고린도전서 3장 18절인가? 맞는가 모르겠어요. 3장 18절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그 다음에 뭡니까? 미련한 미련 등신되라 이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인간 대 인간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유통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차라리 이 세상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자가 되야 된다 이말이에요.
고린도전서는 뭡니까? 구원은 어디에서 옵니까? 똑똑한데서 오는거에요? 뭐에서 오는겁니까? 어리석고 미련한데서 오잖아요. 십자가가. 십자가를 내세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세상 사람들 똑똑한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차라리 미련해 버려라 이 말이거든요. 어리석어 버려라. 세상은 뭐냐 하면 세상은 과거에 자기가 살던 현재를 구성을 합니다. 그러면 과거에 뭐냐? 과거에 자기가 본게 있잖아요. 본 것을 그대로 믿는거에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미 죽으신 분이지요? 죽은신 분 같으면 우리 곁에 없어야 마땅하죠.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논리에 의하면 죽으신 분은 죽은 자끼리 모이고 산 자들은 산 자들끼리 눈에 들어오고 이 세상은 산 자들의 집합이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Camera Obscura라 하는 것은 이게 거꾸로인거에요. 현재 인간들은 다 죽어 있고 살아있는 것은 누구 밖에 없다? 오직 주님만 살아있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숨 꼴딱꼴딱 넘어가기 전에 한시적으로 살아있는 것이지 사실은 이미 죽은 기계란 것이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사니까 주님이 사니까 살아있는 거에요. 이걸 내세울 때 이 세상에서 이걸 지혜롭다 합니까 이게 미련하다 합니까? 미련한거에요. 안 미련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이게.
어떻게 아버지가 안 믿는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복음 믿는 아들 불러놓고 야 네 눈에 누가 보이느냐? 아버지가 보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있나? 예수님이 있나?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는 죽은 자로 있고 예수님은 산 자로 있습니다 이러면 이거는 미친 인간이죠. 지금 소위 복음 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어떤 마음 갖고 있느냐? 안 미치려고 해요. 남한테 이상한 눈총 안 받으려고 해요. 바보 등신 안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학을 했고 뭘 했고 똑똑하고 그 똑똑한게 무슨 소용 있어요 천국에. 뭐 신앙 생활 40년 했고 50년 했고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만 보이는데. 교회 예배당 크기 사람 숫자 헌금 나오는 거 그거만 보이는데 이게 무슨 신자입니까? 그 눈에 보이는 교회 예배당 보이니까 날마다 마음속에 뭐냐? 마음속에 가래 끓어가지고 아이고 교인들 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헌금 계속 나와야 되는데 어떡해 우리 교회 부흥해야 되는데 맨날 이런 어떤 불상사 염려 걱정 계속 나온다 이 말이죠.
벌써 전도사 생활 오래 됐는데 2년 후에 목사 안수 받아야 되는데. 목사 안 받으면 나 뭐하지? 걱정하는거에요. 끊임없이 장사 가게하는 사람은 가게 옮겨놨는데 좀 장사 좀 되야 될텐데. 주부 같으면 우리 애 공부 좀 해야 될텐데 결혼 안 했으면 딸 빨리 결혼 시집가야 되는데 아들 장가보내야 되는데 맨날 이 생각 이 생각. 자기가 뭔가 모자란다 생각은 안 하고 계속 뭔가 나는 잘못 되었어 나는 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고 지금 가지고 어떻게 남한테 인정 받을까?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나는 살만하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간이지 그거 지금 뽐내려고 교회 다닙니까? 예수님 그것 때문에 믿는 거에요? 또 이럴때는 꼭 서울말이 나와. 평소에 안 나오다가.
지금 신자라는 사람들 신자 아니에요. 가짜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누구나 다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 이야기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옛날에 옛날에. long long time ago. once upon a time. 아는 방언 다 나온다.
한때. 한때 예수님 계시는데 사도바울 통해서 교회 세워라해서 훌륭한 목사님 만나서 장로님 만나서 교회 세웠다고 눈에 교회만 보여요 교회만 보여. 그것도 교회라고 저희들끼리 교회해요 저희들끼리. 그게 무슨 교인이고 성도예요.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앞에 안 살아 있는 사람 되야 돼요. 살아도 산게 아니고 살아도 죽은거고 죽어도 죽은거에요.
왜냐하면 나 살고 죽는 것은 관심 뚝 관심 밖에 걱정거리도 되지 말아야 돼요. 왜?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주님 때문에 살아있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것은 이미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있음을 위하여 살아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주님이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뭐냐? 죽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에요. 죽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
어디까지 제자들이 끊어져야 되냐 하면 제자들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죽음으로서 죽음이라는 영이 헤어지는 거에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되 영영히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영영히 완전히 헤어지는 상태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몰아붙입니다. 몰아붙입니다.
예수님 죽었대. 이제는 볼 일 없다. 우리 가자 엠마오로. 그게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잖아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 제자 이름이 한사람이 글로바에요. 글로바하면 늘 생각나는게 탁구, 이 탁구의 상표가 글로바에요. 제자들이 볼 일 없다는 거에요. 왜? 산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오늘날 교회 뭐 어떻고 뭐 어떻게 주를 섬기자 그거 다 떼어. 다 떼어버리고 우리교회 표어라 이러면 큰 교회 표어 조언을 할께요.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그걸로 액자를 만들어. 이게 솔직한 거에요.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죽은 예수 찾지말고. 죽은 예수 찾아봐야 예수가 밥을 먹여주나 예수가 뭐 해준다고 죽은 사람 찾지말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어떻게? 교인들끼리 힘을 합해서. 교회 사람들 십시일반 헌금하잖아요. 헌금해가지고 가난한 사람 도우면 가난한 사람 살잖아요. 그게 교회 할 일이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들먹여가면서 서로 도와준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거 실천에 옮기면 그게 교회 됩니까? 왜 귀신 무당 되기를 왜 그렇게 싫어해요?
봉사자는 여기서 ‘봉사자’란 은사 받은 사람은 다른말로 봉사자는 실적을 업적을 계산안하지요? 왜냐하면 봉사니까. 그런데 그 봉사자를 봉사하게 하는 것은 뭐냐? 은사다 은사.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멸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는게 있어요. 사람이 살아남는게 아닙니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이 뭐냐? 세가지에요. 사람이 아니고 짐승도 아니에요. 믿음, 소망, 사랑만 살아 남아요. 이 말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은사거든요. 선물이거든요. 이 선물주신 주님만 영원토록 살아남아요. 주님만. 그래서 그 말은 이어보면 주님만 살아남기 때문에 주님의 선물 받은 사람만 살아 남아요. 그 선물받은 사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업적이나 실적을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야기 해요.
주께서 믿음을 위해서 주께서 소망을 위해서 주께서 사랑을 위해서 저희들을 사용했잖아요. 죽은 우리를 사용하셨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믿음과 내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소망과 나는 죽고 내 안에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나오도록 그렇게 주께서 다루셨잖아요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자기가 죽었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면 그것처럼 세상사는게 그것처럼 편한게 없어요. 그것처럼 편해요. 죽은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으로 죽었어요. 율법을 못 지킨다고 죽었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못 지킨다면 못 지킨 자를 율법대로 우리는 어떻게 되야 돼요? 우리는 저주 받아야 되잖아요. 저주 받아야 되는 자 그걸 오늘 본문에 다른 말로 ‘잃어버린 자’에요. 잃어버린 자인데 아버지께서 보냈다는 이유 때문에 잃어버린 자리에서 주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가 돼요.
잃어버린 자였는데 그런데 내가 여기 18장에 다시 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다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 모든 솜씨와 능력은 누구한테 나오느냐? 예수님에게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떤 식으로 잃어버린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관계의 끊어짐이 어디서 어디까지 쫙 제대로 끊어지는지를 그 다음부터 철저하게 제자들 앞에 보여줍니다.
18장 32절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내게 주신자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그 말씀만 예수님한테 중요한 거에요. 따라서 그 말씀에 응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절차를 보여주는데 그 절차의 하이라이트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죽으신 분이 되겠지요? 죽은신 분이니까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있으신 분이에요? 없는 분이에요? 없는 분이죠. 왜냐하면 안 죽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여기 제자입니다. 제자가 자기는 안 죽었지요. 안 죽었으니까 이거는 있음이 되는거죠. 그런데 자기는 살아 있는데 예수님은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있음’이 돼요? ‘없음’이 돼요? 제자들 입장에서. ‘없음’이 되는 거에요. 이 정도로 헤어지는 거에요.
예수님 없어지면 결국 남는 것은 뭡니까? 본인만 남아요. 본인만 여기 있지요. 이걸 뭐냐? 이 상태가 뭐냐? ‘잃어버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잃어버린 상태. 이게 잃어버린 상태가 되거든요. 잃어버린 상태가 되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또 잃어버린 상태가 되니까 마음이 그대로 있잖아요. 잃어버린 상태로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 마음도 있지요. 그 마음에 뭐가 끓어나오느냐 하면 가래가 끓지요? 맨날 나오는게 뭐냐 하면 현재 있는 나를 어떻게 보존할 것이냐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나 어떻게 살지? 이제 예수님도 안 계시면 누구 믿고 살지? 하나님 믿고 사나? 하나님 믿는 것도 예수님 믿는 것도 뭐냐 하면 그 예수님, 하나님을 자기 관리 하에 둡니다. 교회 목사 같으면 아이고 교회 어떻게 하나? 교회 집세 올려달라고 하는데 끝났어 끝났어. 망했어. 그러면 또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계속 더 잘해야 되는데. 교인수 늘어나면 요새는 그런 일 없지만 계속 더 와야 되는데. 세상에 한도 끝도 없는 걱정과 근심 그게 바로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인간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니까 너 걱정되지? 그게 너의 본모습이야. 본모습이야. 그런데 만약에요 만약에 성령을 받게 되면 만약입니다. 만약에 하늘이 찢어지고 그때 비로소 하늘 문이 열려서 성령이 왔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면 그 다음부터는 아까 제가 이야기한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변한다 했을까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는 왜 이렇게 모자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내가 따로 어떻게 하겠다가 아니라 나는 뭐를 해도 등신같고 병신같고 나는 주님의 영광 그런 데는 한참 멀었어.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이것도 내 뜻 아닌 것 같은 느낌 들고. 주께서 뜻이 있어서 살려 주시겠지만 어쨌든간에 주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 감사함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실적과 업적을 계산할 여지가 없어요. 계산할 필요도 없고 여지도 없어요. 왜? 부족한데 뭐. 아무것도 아닌데 뭐요. 무슨 내 실적과 업적을 이야기해요. 뭐 자식 잘 키웠다고요? 뭐 했다고요? 주님이 키웠지 내가 키웠습니까? 전에 이야기했지요. 내가 키우지 아니한 것에 대해 어떤 권리 주장하지 말라고요.
사람이 남한테 기대 거는 것은 그만큼 투자했다는 뜻이거든요. 누가 누구한테 투자해요? 인간은 절대로 남한테 투자한적 없습니다. 자기한테 투자하지 남한테 투자한적 없어요. 투자 이만큼 해놓고 이자 이만큼 다 빼먹으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한줄 알아? 이 딸아. 뭘 키운다고 고생했어요? 귀엽기만하구만. 그렇게 해놓고 너는 왜 내 말 안 듣느냐 이렇게 해놓고 자기 엄마말 안 듣는다고 윽박지르고 아빠말 안 듣는다고 윽박지르는데 그럴 권리 없습니다.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한테도 그런 권리 없어요.
우리는 자식 앞에서 남편 아내 앞에서 개 앞에서 자신의 모자람을 발견해야 돼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잘 커줬구나 이 개야 이런거. 다른 개는 우울증 걸린다는데 너는 우울증도 안 걸리고. 어떤 실적과 업적을 계산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자기 신앙이에요. 이건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아니고 자기 집착이다 자기 집착.
성령 받으면 그냥 거룩한 무당되는 거에요. 거룩한 무당. 신들린 겁니다. 진짜 성령들린거에요. 주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 주께서 어떻게 지시하는대로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슬픈 일은 주님이 없을 때가 가장 슬퍼요. 주님이 어 지시를 안 할 때가 가장 슬퍼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울어라 결혼식에 신랑 없거든. 결혼식 때는 신랑 없는 것이 울 일이에요. 그러나 신랑이 있다면 웃어야돼요. 신랑이 있다면. 기뻐해야 된다고. 목사님 신랑은 있는데 전세값 올려달라고 하고 신랑은 있는데 암수술하는데 돈은 없고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래요.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면 암 걸린 것도 주의 뜻이에요.
우리가 생각하고 사고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믿음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절벽으로 절벽 끝으로 막 걸어 갑니다.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면 이근호 목사 당신 말대로 주와 함께 있다면 내가 절벽 끝으로 갈 때에 주께서 강력한 회오리 바람이 불든지 손모가지를 치든지 해가지고 절벽 끝에 가기 전에 직전에 나를 끄집어내면 나 주님이 없다는 소리 두 번 다시 안 할게. 절벽으로 걸어가는거 한번 시험 해볼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정말 주님이 살아 있다면 정말 절벽 가는데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면 내가 지금 절벽 끝에 갈 때 주님께서 멈춰라하고 잡아당기는 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기회가 되겠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하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시험인거에요. 그게 마귀의 시험인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왜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됐느냐 하면 절벽 끝에 가게되면 주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를 잡아당긴다는 그 스토리를 누가 만들었어요? 본인이 만들었어요. 본인이 만들었는데 본인이 속아넘어간거에요. 문제를 자기가 출제해놓고 주님보고 풀어라 이게 말이 돼요?
또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내가 인도네시아 놀러가서 해변가에 있는데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저 뒤에서부터 뭐 저런 파도가 다 있어? 할 때에 주께서 나를 이끌어서 높은 곳으로 높은 산으로 피신해가지고 과연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내가 확인토록 하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올거라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 어떻게 했습니까? 한참 해변에서 공놀이 하다가 퍼져가지고 수천명 죽게 만들었잖아요.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해변에서 공놀이를 마음대로 하세요. 하면서 나는 여태까지 배구하면서도 여태 모자라. 이 생각하면 돼요. 나는 토스가 안돼 토스가. 주여 나는 토스가 안돼요. 배구도 등신같이 합니까. 등신 죽여줄게. 하면서 홀딱. 다 죽어버리는거에요.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파도를 일으킨게 주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도네시아나 절벽 끝이나 가지 마세요. 집에서 짜장면이나 먹으면 돼요. 아 왜이리 맛있지? 주의 은혜에요. 매사가 주님이 살아계셨어. 주님이 살아계셔 주신 은사 은혜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살아 있는게 아니고 내가 살아 있음을 소소한 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