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한윤범 20180907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하체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0장 17절부터 21절까지 제가 쭉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지리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듣기만 해도 상당히 민망하고 난감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 우리 자신이 민망합니다, 듣기 곤란합니다, 라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신,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딸을 시집보내던, 아들을 장가보내던 내 몸도 내 것이 아니에요. 내 몸도 아닌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생각하는 본연의 인간으로부터 벌써 우리는 이탈돼있는 겁니다.
내 것이라는 걸 잊게 되면 그냥 잊는 게 아니에요. 내 것이니까 이걸 지키려고 할 거고 그 지키는 방식은 그냥 지키는 게 아닙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 지키려고 합니다. 적어볼까요. ‘라는 것은 ’내 것‘이 되고 내 것을 지키려 한다. 나에서 내 것으로. 내 것에서 소중한 내 것, 앞에 ’소중한‘이 붙어요. 그렇게 되면 소중하게 지키려고 하지요. 나를 내 것이 되면 계속 내 것으로 유지한다 이 말이죠. 그 앞에 ’소중한‘을 붙이면 소중하게 지키려 하고, 그렇게 해서 이게 의로운 나, 결국 나는 의롭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아주 무가치하다면, 내가 의롭지 않다면 내가 보기에도 내가 소중하지 않겠지요. 방향이. 만약에 내가 의롭지 않다면 소중하지 않은 내 것이 되겠고, 소중하지 않으면 내 것을 포기하려 하고, 내 것이 포기되면 나는 없어지는 거죠. 그러면 결국 이건 자살이죠.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나는 있고 나는 발전해서 내 것이 되고 그냥 내 것이 아니라 소중한 내 것이고, 소중한 내 것에서 의로운 내 것, 가치 있는 내 것이 된다.
이것은 무슨 요소를 뺀 거냐 하면, 내게서 죽음이란 요소를 쫙쫙 빼는 거예요. 바비큐 할 때 닭을 뱅뱅 돌리면 기름기가 쫙쫙 빠지지요. 죽음이란 요소를 살아가면서 계속 배제하고 밀어내는 겁니다. 나는 안 죽고 싶은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이유는 없어요. 왠지 안 죽고 싶어, 왠지 더 살고 싶어요.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고 소중한 내 것이 살고 싶은데 왜 살고 싶으냐? 이 의로움, 잘난 내가 잃기 싫은 겁니다.
벌써 이러한 태도,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보게 되면,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상당히 불만이 많아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불만스러워요. 왜냐하면 내가 사는 세계에서 나는 소중한 내 것, 의로운 내 것을 원하고 이런 쪽으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이런 내 의도를 충족시키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불만스런 존재로 우리한테 기억이 되는 겁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 주느냐는 겁니다. 나는 살고 싶은데. 그리고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소중한 내 것으로 살고 싶은데.
그래서 성경은 별로 인기가 없어요. 성경은 보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은 멀리 하고 싶고 기껏 한 주에 한 번 정도 나와서 여기 왔다고 눈도장 찍고 예배 끝나면 다시 소중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라는 말씀을 해버립니다. “그 죄를 당하리라”고 돼있어요.
이것은 누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누가 다가온다는 순간에 바짝 긴장해야 되고 누가 말씀이라든지 신체적 접촉으로 건드리게 되면 잠자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마성이 잠에서 깨어나요.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건드리는 겁니다.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런 말을 우리에게 가까이 하나님이 속삭인다든지 이야기한다는 그것이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마성, 악마성이죠. 마성을 자극한 게 돼요. 이게 ‘금지의 족쇄’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또 한 번 확인해주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창세기 2장에서 금한 과실을 따먹었잖아요. 하나님이 금했단 말이죠. 금했는데 그 족쇄를 풀기 위해서 악마가 시켜서 금지한 과실을 먹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악마 입장에선 뭐냐? 금지의 족쇄를 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너에게 금지할 어떤 요소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처음에 금지할 사항으로 연결돼있었는데 그걸 가위로 잘라버렸다고 보면 됩니다. 잘라버리면 하나님은 따로 하나님이고, 나도 따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를 통해서 계속 간섭을 해야 되는데 그 금지를 끊었으니까 우리 따로 놀자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네가 그걸 먹는 날에는, 즉 금지를 끊어버리면 너도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자식이 독립하듯이. 요샌 결혼해도 독립도 안 해. 아이 봐 달라하는데 무슨 독립이 돼요.
완전히 남남으로 독자적으로 금지가 깨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지금 레위기 20장 말씀은 이제 내 할 도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자세거든요. 내 것이 있다는 자체가, 자충이라 하는데, 스스로 충족하는 나는 나 있음으로 스스로 충족하고 싶은 욕구가 와요. 이게 마성입니다. 인간의 악마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내 것이 된 나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고 그 자체로 우리는 의롭게 봐서 어떤 누구로부터 질책당하는 걸 싫어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런데 레위기 20장이 있다는 말은, 이렇게 하지 말라, 저렇게 하지 말라고 왔다는 말은 분명히 따로 논다고 생각한 금지조항이 새롭게 추가된 셈이 됐어요. 인간 입장에서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지요. 딱 기분 나쁜 거예요.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이랬다저랬다 왜 간섭을 하느냐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일체 간섭받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부모한테 해주면 해주지 부모가 허락 없이 먼저 잔소리하지 마세요. 자식들 그렇잖아요. 그게 범죄 한 인간의 노골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금지를 네 마음대로 끊었지만 금지는 네가 끊었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금지를 전에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선 인간 몸에다 금지의 실제성을 새겨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자의 하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할 때에, 지금 금지의 족쇄를 인간들이 싫어한다, 알지요. 하나님은 금지 없는 창조는 창조로 보지 않고 있어요. 처음에 인간을 만들고 따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선악과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과실이 있는데 이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 속에서 만들어놨어요. 예수님의 주되심도 죽음에서 나왔듯이 인간의 창조도 죽음에서 나온 거예요. 흙이란 게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명사로 보지 않고 동사로 보겠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것을 동사로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행동으로도 얼마든지 죽음을 표현할 수 있겠노라, 하고 주께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죽어서 숨 안 쉬고 가만있는 물체를 죽음으로 보지 않아요. 죽음 자체가 활발한 활동성을 보이는 죽음, 움직이는 죽음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죽으리라. 했을 때 인간이 물어봤습니까? 못 물어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금지 너머는 질문 대상이 안 돼요. 왜 그렇게 했느냐는 금지 너머의 질문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어요. “따먹지 말라면 따먹지 말지 무슨 이유를 달아. 토 달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피조세계에요. 그걸 넘어서면 안 되는데 악마가 그걸 넘어서서 이야기하죠. 네가 따먹는 날에는 죽는 게 아니고 네가 신이 된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넘어서지 말아야 될 경계선을 장벽처럼 만들어놓은 거예요.
왜 제가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의 하체가 선악과처럼 금지돼있고, 그리고 왜 여자의 하체에 대해서 금지해야 됩니까, 왜 그걸 봐선 안 됩니까, 하는 너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거기에 질문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여자의 하체에 대해서 거론하셨는가? 물론 남자의 하체도 나오긴 나와요. 17절에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돼있는데, 그 뒤에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이렇게 돼있어요. 또 18절에 보면,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이런 말씀 하나하나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금지했다고 보시면 여러분 이해하기가 쉬워요.
그러면 문제를 왜 이렇게 하셨는지 풀어보겠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남녀가 짝을 이루는 것이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전혀 관계가 없지요. 남녀란 인간이 짝을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짝을 이룬다. 그건 내 마음이다. 비가 오는 것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남녀가 짝을 이뤄서 혼인을 하는데 만약에 가뭄이 계속된다. 이럴 경우에 사람이 어디까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짝을 이룸으로써 가뭄이 해소되도록 하늘에서 비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여자를 땅으로 보고 남자를 하늘로 보는 거예요. 하늘과 땅이 교접하게 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이게 바알종교고 동양철학입니다. 동양철학은 하늘은 별로 중요치 않아요. 땅이 중요해요. 땅에서 임금님이 제대로 된 결혼하게 되면 하늘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단비가 내린다. 그런 신화가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바알종교의 특징이에요.
인간이 행동해서 인간이 얻고자하는 것은 받아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은 스스로 뭐로 보느냐 하면, 자충족적 존재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만족해야 될 사람으로 봐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이라 했지요. 세상사는 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던, 인정 안 하던.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이 썩 좋진 않아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좋은 감정을 안 갖고 있어요. 내 인생 어렵게 사는데 좋을 게 뭐 있겠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을 대할 때도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하나님과 상대할 때는 하나님이여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소서,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겁니다. 모자람을 채워달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모자람을 채워주게 되면 인간은 자충족적 존재가 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분명히 인간 자체가 금지에 둘러싸여있지요. 금지 바깥의 이유 때문에 인간은 만들어졌거든요. 그리고 이 경계선은 절대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금지를 잘라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금지를 잘라버렸으면 인간은 분명히 만족해야 되는데 인생사는 게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땅에서 저주받아서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은 여러 가지로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들고 불편합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면서 늘 마음속에 불만을 가지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게 돼있어요. 나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걸 빨리 채워주세요. 모자람을 보충해주세요, 라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 금지안에 있어야 된다는 금지의 울타리가 인간에게는 계속 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채워줄 것을 채워주는 신을 좋아하지요. 그게 무슨 신이라 했습니까? 바알신, 우상숭배를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필요한 걸 보충해주는 하나님을 기도를 하던 예배를 하던 뇌물을 바치던 헌물을 하던 아이를 제물로 바치던 어쨌든 간에 내 것 채워주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선호하겠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인간을 채워주겠어요, 아니면 인간이 잘라버렸다는 금지를 오히려 가져오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본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금지라는 것을 깊숙이 집어넣어야 되겠지요. 집어넣은 것이 뭐라 했습니까? 여자의 하체를 그렇게 한 겁니다. 특히 18절에 보면, 월경하는 여자와 동침하라 해서, 오늘 본문은 주로 여자이야기에요. 여자를 하나의 경계면으로 삼는 겁니다. 월경하는 여자가 금지조항으로 남자한테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남녀가 짝을 이룬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아요. 왜냐하면 남녀가 짝을 이룬다 하지 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금지된 조항을 지니고 있는 그 여자를 짝을 이룬다. 이렇게 돼야 돼요. 말은 길지만 여자를 볼 때에 그냥 개인 대 개인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욕정의 모자람을 채워주기 위해서 여자가 있는 게 아니에요.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여자 쪽에서 이야기하니까 남자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여자를 뭘 보느냐 하면, 자기의 모자람을 마저 채우는 용도로서 다가서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남자나 여자나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스스로 신이 되었지요. 모든 인간은 신이 되었잖아요. 신이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 그 다음에 내 것이다. 남자나 여자 입장도 마찬가지에요. 나라는 여자는 여자로서 내 것을 갖고 있고, 그냥 여자가 아니고 어떤 여자라 했습니까? 소중한 여자고, 소중한 여자로 단정한 이것이 의롭다고 본 거예요.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로서 내 것을 갖고 있고, 소중한 남자를 위하여 그걸 마저 채우기 위해서 여자가 나한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를 생각하는 것과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는 것이 서로 대화를 하게 되면 쌍방 간에 대화가 안 돼요. 서로 노리는 점이 어긋나게 돼있어요. 원래 여자는 약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돼있고. 창세기 3장에 그렇게 징벌을 받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소유물로 삼고 여자는 모든 면에서 약하기 때문에 남자 없이 못 먹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소유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구성해놨어요.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자가 여자기 때문에 남자보다 징벌을 더 심하게 매긴 겁니다. 징벌을 제일 심하게 매긴 것은 여자를 꼬신 뱀한테 했고요. 뱀은 땅과 밀착해서 살아가게 돼있어요. 그 다음에 징벌이 여자에서 남자로 가잖아요.
어쨌든 그동안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데로 순응하고 남자가 요구하는 데로 소유물처럼 문화가, 인간역사가 그렇게 돼있는 거예요. 그 증거가 창세기 4장에 곧장 나옵니다. 4장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라고 라멕이란 왕이 그런 소리하거든요.
여자가 그 소리를 왜 들어야 됩니까? 남자가 지 소중하다는 객기를 왜 여자가 다 맞춰줘야 돼요? 그리고 뒤에 5장에 족보이야기 나오는데 족보에 여자이름 안 나오지요. 전부 다 남자이름만 나오지요. 남자가 인류이 대표가 돼버렸어요. 여자는 종속이 되고. 남자는 능동적이 되고 여자는 수동적이 됐어요. 남자가 주는 것을 여자는 받아먹는 존재가 된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전혀 대화가 안 되는 것이 남자 쪽에선 여자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대화의 반대를 독백이라고 해요. 남자는 독백하고 여자는 독백을 들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에요. 여자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남자한테 안 통합니다. “이게 어디서 말이 많아.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너는 나 아니면 못 먹고 살아. 나 아니면 어딜 가도 못 살아.” 그러니까 창세기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배필이잖아요. 배필이 아니고 남자의 남자 됨을 받쳐주는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함부로 다뤄도 되는 대상, 남자가 화날 때는 패도 되고, 남자가 욕정이 넘칠 때는 강간해도 되고.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 여자는 남자가 원할 때 무조건 다 들어줘야 될 대상으로 삼는 그 여자에게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기에 금지조항이 기재가 되는 거예요. 금지조항이 새겨지면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신을 상대하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이 집어넣은 금지조항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를 금지조항으로 할 때 금지조항이 어느 부분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벗은 줄을 알았는데 그 알은 게 뭐라고 하체를 치마로 부끄러움이 나오는 모습을 가리게 되는 거예요? 모든 몸이 다 부끄러운 게 아니고 신기하게도 하체부분이 유난히 수치, 부끄러울 요소가 계속 나와서 그걸 아담이나 하와가 가릴 필요가 있다는 이 자체가 인간의 몸이 인간의 요구를 충족할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리와 원칙에 의해서 다뤄져야 될 몸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발을 감춘다든지 머리카락을 감춘다든지 코를 감춘다든지 이렇게 하지 않고 왜 하체를 감춰야 하는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돼요. 부끄러운 부분이 왜 하체에 집중돼있는가? 여러분, 보통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사랑한다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될 때 사랑이란 말이 돼요. 부끄러움을 벗어난 상태. 이 상태는 죄 짓기 상태에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을 아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지요. 무죄, 또는 뭘 해도 의로움, 무죄 상태일 때만 부끄럽지 않게 된다. 강의 처음부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범죄 하고 난 뒤에 나, 그 다음에 나는 내 것이 되지요. 나에서 내 것이 됐다는 것은, 나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내 것이라는 의식, 이걸 소유의식이라 하는데, 그냥 나라고 하면 안 알아줍니다.
당신 누구야? 하면, 나는 이런 것 갖고 있다는 소유의식으로 자기를 표현해요. 그런데 내 것인데 줄까? 이러지 않아요. 내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내 것이에요. 소중한 내 것이니까 이미 인간의 행동은 지키려고 해요. 왜 소중한지 물으면, 이게 거룩하고 착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롭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고 유지될 만한 가치가 있는 계속해서 손해 보면 안 될 정도로 가치 있기 때문에 의롭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려면 부끄러움이 없어야 돼요. 모든 것이 잘났는데. 없어야 되는데 인간은 뭔가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금지에 속해있는 거예요. 금지가 인간의 경계면입니다. 인간의 육에서 영으로 가는 경계면이에요. 여자의 하체는 18절에 보면, ‘여인의 근원’이라 돼있어요. 여인의 하체는 육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금지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이것 넘어서면 영적 세계에요.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절대로 영적 세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육적 세계는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나는 내 것이 있다. 내 것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소중하니까. 이 모든 것을 수치를 발산하는 경계면으로 계속 공박하는 겁니다. 인간, 너는 본래 인간 아니다. 문제 있다는 겁니다. 잘못된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 역할을 여자의 하체가 하는 겁니다.
피는 육체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인간 속에 죽음이 가득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죽음이 인간의 몸을 지배한다는 겁니다. 원래 생명이 있으면 피부 바깥으로 안 나와야 돼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인간 속에 생명이 작용하는 게 아니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처럼 그 죽음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인간을 다스리고 있고 통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초등학생들 싸우다 코피 나오면 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코피 안 나오는 쪽과 멍은 들었지만 코피 안 나오는 쪽과 판정내릴 때 누가 이기고 누가 집니까? 코피 난 쪽이 지게 돼있어요. K-1 격투기에서 코피 나면 관객들은 벌써 끝났다고 봅니다. 피가 흐른다는 것,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내 것으로 유지하고 그걸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계획이 무산돼있다는 겁니다.
그 무산됐다는 것을 무슨 소식으로 이해하느냐? 남자의, 남자가 인간의 대표니까 여자들은 남자에 복속돼서 여자는 존재가치도 없어요. 인간을 대표하는 남자에게 극히 무시당하는 여자로 하여금 들이대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금지조항이 자기한테 오게 되면,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이 외부에서 뭔가 오게 되면 가만있는 점잖은 인간들도 잠자는 마성이 발작하게 돼있다고.
아버지가 되어서 딸과 성관계 안 한다. 자기 아내와만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서 아내를 배려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서 친척집에 가서 외숙모나 또는 고모나 백숙모 만났을 때 절대로 겁탈하거나 이상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제도 마찬가지고 제수씨나 21절에 형수의 아내나 이런 사람의 하체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로서 바른 취지다, 라고 하는 그 아버지는 하나님이 만든 아버지가 아니고 본인이 본인을 가치 있는 존재로 계속해서 지속하기 위해서 스스로 외부에서 자기에게 지워진 위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위치로 인하여 자기가 괜찮은 존재, 아버지로서 남한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나는 아버지로서 또는 남편으로서 또는 어떤 교회 목사로서 누구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장례식에서 일가친척 중 여자들을 만날 때 아무 생각 없는데 레위기 20장을 주님께서 들이대면 이게 잠자는 마성을 깨운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몰랐을 땐 거짓말할 줄도 몰라요. 그런데 누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잠자던 마성에 의해서 거짓말 해볼까가 나온다니까요.
이 세상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나의 순수함을 훼손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나의 의로움을 용납하지 않아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금지가 오게 되면 잠자던 나의 악마성이 깨어난다니까요.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다니까요. 하라 하면 안 하고 싶고. 가만히 점잖게 사는 나를 들쑤셔놔요. 누가? 말씀이. 누가? 하나님이. 이게 바로 복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저 사람은 사랑하게 되면 지도 감동받아 사랑하겠지, 하잖아요. 세상에 그런 여자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여자는 자기를 남자의 종속으로 보는 게 아니고 절대자로 봐요. 나, 이것 아는데 애먹었어요. 여자는 스스로 자기를 신으로 간주합니다. 신인데 왜 남자한테 복종하는가? 지금 억지로 참는 거예요. 때를 기다리면서. 아이 낳고 보자, 딸 시집보내고 보자. 억지로 참는 거예요. 남자들은 그걸 몰라요. 여자가 착하다고요? ㅎㅎ 개가 웃을 일입니다. 여자는 헌신적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가 신인 것을 남자가 못 알아보는 이유가, 여자가 눈물 흘리는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보다 단수가 높아요. 남자처럼 참질 않습니다. 남자는 세 번 울지요. 태어날 때 울고 나라 잃을 때 울고 부모 잃을 때 울지만. 그것도 옛말이고.
남자나 여자나 선악과 따먹고 스스로 자기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어떤 식으로?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요. 그 소중함이 어디까지 가느냐? 절대로 나한테 대외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 나는 완벽하게 의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께서 여기다 말씀을 줘버리죠. 말씀을 주면 여기서 잠자던 반발성, 악마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 19절 봅시다. 내가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대번에 이렇게 나와요. 내가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 정도 내가 막가는 인간으로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그럼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그러니까 너는 너를 모르지. 이모, 고모, 조카, 삼촌, 그것 다 떼어내 봐요. 떼어내면 나는 신이라는 것만 남아요. 남자란 신과 여 자란 신만 남았어요. 그 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한 행동은 절대로 수치스럽지 않아야 내가 하나님다운 거예요. 신다운 거예요.
그런데 인간 속에 남자나 여자나 마성 나오지요, 욕구, 욕정 나오지요. 그들이 이모인지 고모인지 그런 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수치에요. 그 수치스러운 것을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따먹은 악마의 본성이 그대로 작용해서 여자가 부끄럽다는 것을 자기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하체입니다. 하체를 내가 정복함으로써 너는 영원히 나한테 코 꿰인 내 것이야.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내 것으로 정당하게 소지하는 게 돼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한테 피해보는 너는 소중하지 않아요. 내가 소중하니까 나한테 강간당해도 끽소리하지 말고 가만있어.
그동안 남자들이 힘이 세고 남자들이 인류를 대표하고 남자들의 모든 권력을 다 갖고 있잖아요. 아까 창세기 4장 보셨지요. 라멕이 그런 소리할 때 아내 둘이 왜 들어야 돼요? 라멕은 하나잖아요. 여자는 둘이잖아요. 지가 뭔데 둘을 가집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여자는 남자가 원하는 데로 다 들어줘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사랑한다고 해요. 그게 사랑입니까? 소유지요. 인간이 이미 신이 된 입장에선 사랑이란 없어요. 그냥 항복하고 내 것이 되라는 뜻이에요. 끽소리하지 말고 나의 노예가 돼야 된다. 노예가 딴 것 있겠어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거예요.
남자는 이미 그걸 성공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성공적으로 했다는 그게 문제가 돼요. 왜냐하면 잠자는 신을 건드렸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하체를 폭력으로 드러내는 것은 곧 신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자는 영과 관련돼있어요. 여자의 근원이 죽음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여자 몸 자체에 하나님의 지시가 연결돼있어요. 여자를 함부로 남자 입장만 생각해서 다루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설치한 부비트랩, 지뢰를 건드린 게 돼요. 동시에 지뢰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걸 건드린 남자는 악마의 괴물로서 노출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노출돼야 돼요. 노출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남자가 누군지 모르는데 연약한 여자가 등장함으로서 힘을 가진 남자가 그 여자를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억울하고 상처받느냐 하면, 여자 쪽에서 억울하고 상처받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연관돼있다고 했지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뭐냐? 남자 없이 남자를 배제하는 겁니다. 남자 없이 하나님을 임신하게 돼있어요. 뱀을 이기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뱀을 이기는 것은 여자에요. 여자의 자손이 뱀을 이겨요.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