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1절 / 사랑의 전달 / 180904

정인순 2018. 9. 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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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취:홍민희

강남-요한복음 18장 1절(사랑의 전달)

180904a-이근호 목사



자,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건 일방적인 예수님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자 여기 구제품이 있다 가져가라 라고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이 준비한 것을 우리 쪽에서 달려가서 그걸 꺼낼 방법이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자 가져가! 해도 우리가 무슨 수로 가져옵니까? 가져올 수가 없는데.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랑을 형성하는 그 요건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밀었잖아요.


사람들 속에 있는 속성이 예수님을 밀쳤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밀쳤는데 밀친 그 당사자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아이고 미안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몰라봤습니다 내가 다가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안에 과연 여전히 남아있을까를 생각해보세요.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미워할 때는 자신의 있는 가진 것을 다 종합해볼 때 예수님은 그다지 우리에게 필요치 않고 우리를 괴롭게 한다 해서 예수님을 떠밀고 우리 인간세계 밖으로 추방을 시켜놨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마음이 들어가지고 아! 우리가 실수했습니다. 우리가 죽이지 않을 분을 죽였습니다. 자 가자 예수님한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러 가자 우르르 몰릴 수 있는 그런 색다른 요소가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아요. 전부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우리한테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어떤 연결고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만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가져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26절을 보면서 그리고 18장을 보면서 뭐를 생각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제공하느냐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적어볼께요.


자, 우리 쪽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달하시는가? 이게 요한복음에 남은 예수님의 과제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도, 기도 내용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고 그 요한복음 17장 16절에 나오지요? 그렇잖아요.


제 말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16절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분명히 되어 있지요? 지금 거짓말하는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는걸 그걸 너희도 느끼지?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순수하게 예수님 본인 혼자 그렇게 결정 내린거예요. 이 말 듣자마자 그래 나 세상에 안 속했어 하고 유유자적하게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낙오자 될까봐 벌벌 떨거든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 개인의 소견이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혼자 단정한 그 내용을 봤지? 그래서 너희도 알아서 느껴라 하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는 이 세상 없이는 못 삽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 세상 사람이에요. 물론 세상에서 나를 실망케 하면 마지막에 번개탄 피워놓고 죽는 순간 죽는 순간도 아마 죽으면서 세상 원망 많이 할걸요. 나 같은 인재를 못 알아보다니 하면서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망하는데.


어쨌든간에 예수님의 일방적 생각을 그거는 주님의 생각이고 우리의 생각은 그게 아닌데 주께서 이렇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말을 이미 단정하시고 그 다음에 절차가 뭐냐 하면 그렇게 단정한 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만 남아있어요. 전달하는 것만 남아있다 이 말이죠.


이런 것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이것을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에 우리가 기분 좋아요? 아니면 반갑습니까? 아니면 별로 반갑지 않아요? 어떤 마음입니까? 뭐 돈이나 좀 주시지 뭐 쓸데없이. 우리가 원한적도 없는데 왜 쓸데없이 그걸 주실려고 합니까 라고 별로 달갑지 않지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26절 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한테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한테 있다. 이제 그 사랑을 내 백성한테 내가 전달하겠다. 그거는 주님의 뜻이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다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져가라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나 말고 내가 나보다 더 월등한 사랑을 찾아서 나서고 싶은 생각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의사는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그것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조건하에 주님을 사랑하지 내 사랑 포기하고 주님께 가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께서 어떻게 전달하느냐. 그 이야기하기 전에 그러면 사랑이 뭐냐. 사랑이 뭐냐. 주님이 확정한 사랑이 뭐냐면 일체감이에요. 일체감. 분명히 둘인데 하나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만들었죠. 자, 여자는 뭐냐 남자는 뭐냐 분명히 누가 봐도 그거는 두 사람이에요. 두 사람인데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볼 때 서로 객관적으로 볼 때는 떨어져있어요 떨어져있다고요.


잠을 자고 떨어져 자고 밥을 먹어도 각자 밥을 먹고 밥을 떠서 남에 입에 집어넣는 그런 일은 없다 이 말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생활에 그런게 있어요. 숟가락으로 남 입에 넣어주고 남이 자기 입에 넣어주고 얼마나 불편합니까. 자기가 퍼 먹으면 되는걸. 뭘 남을 배려한다고 그런건 요양병원에나 그런게 있어요. 요양병원에나. 요양병원은 아침에 난리도 아니에요. 밥 먹는데.


이 둘 사이에 분명히 둘인데 누가 봐도 둘인데 하나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둘이라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둘 사이에 사랑이 있음이라는 것을 빠트리게 돼요. 두 사람 만들어 놓고 부부라고 하면 안돼요. 하나를 해놓고 하나를 둘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둘이라도 이것이 하나이다.


그러면 그 하나에서 둘 사이에 결코 둘이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 요소를 가지고 바로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살 그 다음에 살 중에 살이죠. 맞지요. 자기 갈빗대에서 나왔으니까. 내 살 중에 살이라는 말은 영어로 하면 in 이죠. 어디 안, 안에 있는거예요. 당신은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비록 떨어져 있더라도 내 안에 있는거예요.


그걸 저는 일체감으로 봅니다 일체감. 부부 그렇게 사십니까? 한국에 들어간다. 너나 가라. 일체감이라 하는 것은 너도 안 보고 나도 안 보고 제 3의 하나에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대 앞에서 나는 소멸되는 거예요. 그대 앞에서. 김수희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리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서 왜 작아지는가.


사랑이라 하는 것은 조건이 뭐냐. 반드시 둘이 형성돼야 되고 그 다음에 둘이 끝이 아니예요. 시작은 둘이고 끝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나는 내 중심으로 살잖아요. 그럼 뭐가 누락되느냐 하면 사랑이 없어요. 하나에서 나와서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게 없습니다. 그냥 정복욕이죠 소유욕이죠. 저거 내거야 하는 소유욕이죠.


저는 그 결혼식할 때 반지 하는거 아주 저는 반대합니다. 그 반지가 마치 코 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반지를 줌으로서 너는 내거야 라는 그런 의식처럼 느껴져서 아주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 반지 준 적 없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그랬겠지. 왜 소유를 해야돼요? 왜 소유해야 됩니까? 차라리 소유 당하는게 낫지요. 소유해서 뭐 이렇게 부릴려고? 종으로 삼으려고 하녀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까?


편하게 네 인생 내 인생 살면 돼지 왜 상대방을 관여하고 간섭하고 왜 그런거예요? 그런 것을 저는 아주 못마땅해 해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있는 이상은 사랑은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이 내 앞에 꿇어야 되고 내 앞에 벌벌 기어야 되고 그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악마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3장 이야기 하는거 아닙니다. 2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2장을 딱 보게 되면 그 일체감, 사랑이란 것이 있기 위해서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그 나 말고 누가 등장하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달하느냐 할 때 주님께서는 본래의 아담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의 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요한일서 4장에 우리가 사랑을 한 게 아니예요. 그럼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그러면 사랑이 아니예요. 그건 예수님마저 소유하려는 소유욕이고 종교적인 탐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어느 분이 등장해야 돼요. 내가 그 분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분.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쪽에서 우리한테 필이 꽂혀야 되지요. 네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가 했다라고 외치면서 다가와야 되겠지요. 예수님 앞에서 이뻐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뻐보이지 않더라도 재롱부리지 않더라도 이미 주님은 우리한테 꽂혔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우리한테 꽂혔어요. 왜냐하면 다가오심 자체가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을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이 아니지요. 죄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인과 예수님을 자기를 뭐로 보느냐 동질화시킨 겁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이것은 터무니없는 사실이죠. 어떻게 원수를 자기의 한 몸으로 삼습니까? 원수인데. 원수 잖아요 원수. 원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께 원수된 자 잖아요 로마서 5장 10절에. 그런데 어떻게 원수를 자기 몸으로 삼습니까?


자기를 핍박하고 자기를 내치고 자기를 꼴보기 싫다고 자기를 도망친 자를 어떻게 자기 사람으로 삼드냐 이 말입니다. 그 찾아올 때 새삼스럽게 우리 잘 해보자고 찾아오는게 아니예요. 이미 그 자기 신부가 행했던 모든 죄를 대신 다 치뤄놓고 오는거예요. 그것을 값을 치뤘다고 하죠 값을.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고 치룬 흔적을 지니고 십자가입니다. 흔적을 지니고 대신 다 해결했음을 통보하면서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뭐냐 하면 너는 내 안에서 하나의 원래부터 하나였었어 하면서 오는 겁니다.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 안에서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이야기예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 빠트림 없이 예수님이 알아서 그것을 다 구현해내요.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지키려고 하면 떼찌! 손 떼!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주의 증인이 되리라 했거든요 그런데 주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마 주의 증인 되는 짓 하지 마. 내가 되게 해줄게 내가 되게 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이 정말 주님의 이러한 엄청난 사랑이 우리한테 꽂혀서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신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 뭐냐, 구하지 않았는데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내가 찾아냄이 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65장인가 그렇게 되어 있지요? 65장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사야 61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목사님 저 성령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저 안 받은거 같기도 하고 받았다면 어떤 흔적 티가 납니까? 라고 물으면 내 쪽에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나 내 잃어버린 내 자식 찾으러 왔어. 주인이 와서 자기 물건 찾아갈 때 그 주인을 만난 그 물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해요. 잃어버린 동전 또는 탕자 그걸 찾아냄을 당할 때 그게 바로 성령 받은거예요. 뭐 뜨겁다 머리에 열이 난다 그런거 가지고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는거예요.


교회 안가도 되고 헌금 한 푼 안 해도 되고 선교 전도 안 해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성경공부 안 해도 되고 이렇게 안 모여도 되고 뭔가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갔는데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너는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너는 나의 신부였어 라고 내 사랑이였어 라고 찾아오는 것.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그 다음 가사가 뭐냐 하면 앞을 봐도 이쁘고 뒤를 봐도 내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옆을 봐도 마찬가지고 너무나 일방적이죠. 어떤 사랑 받을 조건을 구비한 적도 없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니까 우리는 그냥 받기만 했을 뿐. 그냥 받기만 했을 뿐이에요. 해준 거 없이 그냥 받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리고 성령 받고 난 뒤에 더 따로 또 해야 될 어떤 과제 같은 것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 쪽에서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성령께서 신랑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아담이 자기 신부를 찾아 왔을 때 그 신부가 어떤 신부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간주를 하고 찾아와요 죽은 자.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능한 자 그게 죽은 자예요.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그 뒤에는 정녕 뭐라고 했습니까? 죽었지요.


선악과 따먹도록 허락해가지고 인간을 죽은 자로 만들었어요. 아무리 살아있어도 나이 들면 다 죽어요. 우리는 이미 죽음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하며 내세우는 것은 그게 죽음의 흔적들이에요. 육체의 열매가 다 죽음의 흔적들이에요. 뭘 해도 거기에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긴 채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해놓고 어떤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느냐 하면 주의 말씀에 의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거예요. 이것은 주의 말씀에 위반되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미 알아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산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기도할 때 달라고 기도하지요. 달라고 기도 왜 하겠습니까? 그냥 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예요. 그러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달리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겠지요. 달리 기도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 주여 안 줘도 됩니다. 기도 원대로 해주지 마세요. 이럴꺼면 아예 기도하지 말지 뭐 때문에 하겠어요. 수고스럽게. 달라고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거든요. 다급하다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자로 이것을 ‘절실함’ 입니다 절실함, 절실함.


이번 한국이 아시안게임 때 한국이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 땄잖아요. 대만한테 2:1로 졌지요. 그런데 금메달 땄잖아요. 왜? 절실함 때문에. 손흥민이가 왜 그렇게 설쳤습니까? 군대에 안 가려고. 이 절실함이에요 절실함. 살면서 자기 하는 행세 보니까 지옥 갈 게 분명하거든요. 그럼 무슨 절실함이 생깁니까? 어쨌든 저쨌든 도를 아십니까든 뭐든 간에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그 절실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이끈거예요. 교회로 모인겁니다. 그러니 이게 교회가 지옥의 단체지요.


절실함들의 집합소예요 절실함들의 집합소. 거기는 느긋한 사람 오게 되면 이상하게 봐요. 느긋한 사람이 오면. 너 뭐 믿고 느긋하냐? 십자가 믿고 느긋하다 하면 이해가 안돼요. 너는 왜 그렇게 절실함이 없어? 안 해도 되거든. 무슨 배짱이 똥배짱이 저란 배짱이 다 있냐 말이지 너 그래서 벌 받는다! 너 그래서 저주 받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구원 받았는데 저주 좀 받지 뭐.


제가 전에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셜교 시간에 했는가? 살면서 힘들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 유황불에 들어간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그거 생각해보면 살면서 고생하는거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뭣도 모르고 유황불 가는 사람들 많은데 그 사람들 들어갔다 못 빠져 나와요. 까짓것 고생 좀 해도 괜찮아요. 소위 가진 자의 여유 아닙니까. 이 동네 일층만 내려가 보세요. 일층에 화장실만 있는게 아닙니다. 문 열고 나가면 지옥 갈 사람들 거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몰라요 그 사람들은 지옥가는 줄 모른다니까요.


그리스도가 안 찾아온거예요. 교회를 안다녀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안 찾아온거예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가 찾아오게 되면 내가 하는 그 짓이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헛짓 외에는 할 게 없어요. 모든게 헛짓이에요. 헛짓인데 그게 그렇게 귀엽대. 아 귀엽다면 너무하고 그게 이쁘대. 그것마저 이쁘답니다 주께서. 왜? 우리한테 꽂혔으니까.


죄 지어 죄 지어. 왜냐하면 이미 다 해결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가능성 있는 사람을 찾아오는게 아니고 가능성 없는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아픈 사람을 부르러 왔어요 아픈 사람을. 병원에 올 때 팔이 부러져서 발은 괜찮은데 팔이 부러져 온 사람이 더욱 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겠어요? 안 그러면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져서 기어오는 사람이 더 의사를 의사답게 하겠어요?


주님께서는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진 정도가 아니고 아예 시체가 오는걸 봐요 시체가. 어이구 김 시체 최 시체 와요 시체 이리 와 이리 와. 죽은데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은 능력 중에 일부를 떼어주시는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은 하나밖에 없어요.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1절.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의 임하면 죽은 자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라 이러잖아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내가 보기에 너는 죽은 인간이라는 것을 너도 동의하라는 그 뜻이에요. 동의하라는 그런 뜻이에요. 자꾸 이 솜씨 어떻습니까 자꾸 솜씨 부리지 말고. 어떤 솜씨 부려도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이 그만큼 귀한겁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버지와 부탁해서 우리와 사랑을 만들어 놨는데 사랑은 일체감입니다. 일체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상대를 나의 개체로 보지 않는거예요. 말이 좀 어렵기 시작하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했거든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그럼 그 사랑의 원천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랑이에요. 사랑은 여기 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는 이 죄된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과 자기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거는 빈말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거지요. 나 잘 되기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로 예수님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 땅에 없어요. 없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또 반발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우리한테 주게 되면 우리한테 사랑이 있잖아요 왜 없다고 이야기합니까?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에서 근질근질 할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어 버려요.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소지하는게 아닙니다. 소지할 주체가 이미 죽어 있어요.


이 일체감 이 일체감을 세상에다가 그대로 줘버립니다. 그런데 일체감을 할 때 아버지의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가 하나가 됐다 우리가 편하게 그렇게 생각 하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의 그 절정이 마감이 최종인 것이 살아있는 예수님과 살아있는 아버지 사이에 성립되는게 아니예요. 그거는 하나의 약속이 되는 거고.


언제 아버지의 사랑이 빛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의 환경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을 때 그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죽을 때. 죽음이 끼어들지 않는 사랑의 온전한 사랑은 없어요.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을 때 사랑은 활짝 피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도 상대방이 있다면 나는 살았다는걸 느끼지 않고 죽어도 괜찮다 할 정도로 일체감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대만 살아도 나는 없어도 상관 없다는거예요. 그런걸 체험해야 알지. 아마 결혼초기에는 이런게 다 있었을 거예요. 신혼여행 갔을 때는. 그럼 돌아올 때는 딴 생각이지만. 갈 때는 그런 생각 있었을거예요. 죽어도 좋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이 일체감이 사랑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이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죠. 전달하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전달할 때에 인간에게 이 죄 많은 자기 백성에게 이 사랑을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는 겁니다. 집어넣을 때 이렇게 집어넣어요. 새로운 현재를 구성해서 집어넣어요. 새로운 현재. 이게 시간 요소에 들어갑니다.


새로운 현재가 들어가요. 그럼 새로운 현재하고 옛날 현재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옛날 현재는 인간이 자기 몸 중심으로 흐를 때 현재라고 합니다. 인간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기억을 할 때 기억하는 지금이 현재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 현재라고 느끼거든요.


그 말은 인간이 현재를 느낀다는 그 말은 자기가 내가 현재를 느끼는 나는 살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런 이야기 했죠.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이 본인이 살아있다고 본거예요. 그게 철학의 한계예요. 그러나 주님은 인간을 뭐로 봅니까? 살아있다고 보지 않고 죽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왜 자기가 살아있다고 보느냐 하면 달리 나를 규정해서 다른 외부의 절대적 기준이 없어서 그래요. 나를 측정하는 기준을 내가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마치 물에 빠졌을 때 자기 신발끈을 가지고 그걸 잡아당기면 신발끈을 잡아당기는 자기 그 본인이 잡아당기는 그 힘에 의해서 바깥으로 튀어 나옵니까? 지가 제주도 은갈치입니까? 벌떡벌떡 튀어서 물 위로 나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모든 과학과 모든 철학이 자기가 자기를 이끄는 거예요. 그 과학이라는 것이 그런겁니다. 어떤 과학도 죽음을 연구하는 과학은 없어요. 일단 살았다고 치고 더 살려볼라고 애쓰는 겁니다. 그래봤자 죽어요. 그래봤자 죽고


이 현재라는 것이 새로운 현재가 들어갑니다. 새로운 현재가 들어가게 되면 인간의 현재는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 내가 여기 있다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에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 미래는 이렇게 전개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그 의도가 있어요 그 의도가 있는 한 나는 살아있어요. 새로운 현재라는 것은 인간의 현재를 묵살을 만들어 버립니다. 묵살을 만들고 새로운 현재는 무슨 현재냐 하면 하나님의 하신 일 예수님의 하신 일의 그 업적을 그 다음에 방사하는 것.


‘방사’ 라는게 뭐냐 하면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확 퍼뜨리는걸 말하죠. 그리스도의 몸은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서 영원히 살아있지요. 그 살아있는 기능이 확 방사가 될 때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영원한 현재예요. 영원한 현재. 예수님이 영원한 현재 되심. 그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사랑을 담아요. 그게 그래야 되요. 그러면 기존의 있는 5월 6일날 은혜 받아서 구원 받았다든지 이런 인간이 그렇게 하는데 인간이 달력에 표시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없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이건 뭐냐 하면 인간 자체를 뭐로 보느냐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죽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죽어버리면 뭐도 죽겠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과거 이야기나 현재 이야기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이 인간이 죽음으로서 그것도 다 죽은 이야기가 돼요. 헛소리 되는 겁니다 헛소리. 그걸 가지고 ‘망상’ 이라고 하는 겁니다. 망상 또는 꿈. 인간의 현실은 뭐냐 인간이 말하는 현실은 곧 꿈이에요. 그걸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네 자로 가상현실이라고 했지요 ‘가상현실’ 이 세상은 가상현실, 꿈이에요.


이게 왜 꿈이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규정할 때 남들을 경유해서 자기를 규정해요. 남들을 경유해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아 저 사람은 많이 본 사람이다 라고 할 때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미국에서 봤나? 할 때에 갑자기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옛날에 버지니아에 갔던 나를 경유해서 파악한다니까요 경유해서.


얼마 전에 우리 어머니 모친께서 돌아가셨는데 모친께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 병든 모습이 기억나는게 아니고 어머니가 한참 아름다웠을 때 지금 생각하면 50대 중반 그 때 모습이 계속 남아있어요 그 때 모습이. 50대의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남아있어요. 그렇다면 어머니를 생각할 때 그때 나는 몇 살이겠어요? 그때는 나는 한 10대나 20대쯤 되겠지요? 23살 차이니까. 그 정도 되겠지요.


그때 내 모습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우리 어머니는 저런 모습이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때 나는 갑자기 졸지어 젊은 내가 되는 거예요 젊은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싶은 그것을 현실로 하는 순간 그 현실의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망상이에요. 인간은 망상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애가 전교 1,2등하는 아이인데 갑자기 중간고사 봤는데 전교 15등으로 떨어졌어요. 그러면 엄마가 화가 나지요? 왜 화가 나느냐 하면 엄마가 알던 내 자식은 전교 1등 아니면 2등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뭐냐? 전교 12등이에요. 그럼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 될 게 아닙니까? 아 주께서 12등 하게 하셨구나 받아들이면 되는데 화가 왜 납니까? 왜 내가 아는 현실에 부합이 안 되느냐고 화가 난거예요. 너는 1등이야 1등 해야 돼 1등. 실수하면 2등 넌 1등해야 돼.


딸을 시집 보내놨는데 이혼해서 왔어. 엄마가 친정 엄마가 화가나. 왜? 너는 내 생각에 그런 딸은 없다는 거예요. 엄마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 현실을 직시하세요. 아니야 나 직시 못해. 왜? 그 현실 없으면 내가 나를 미워할거야. 나 이렇게 착한 딸을 두었다는 그것이 자기를 규정했는데 딸이 그렇게 자식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내 꿈을 펼쳐라가 아니라 내 꿈이 망가졌잖아요. 그 보상 누가 할거예요? 그 만회 누가 할거예요? 분노하지요.


타인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내가 꿈꾸는 현실 내가 기대하는 현실을 위해서 너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어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자기를 위한 현실을 구상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좋았던 기억 편집하고 나빴던 기억은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고. 나쁜 기억은 무의식 중에 들어가가지고 나중에 꿈으로 튀어나와가지고 놀라게 만들고.


좋았던 기억은 모아가지고 남한테 보란 듯이 남한테 과시하는 용도로써 그걸 술 먹으면서 그걸 퍼뜨리고 나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조작하는 거예요. 꿈을 가지고 또 꿈을 가지고 또 조작해요. 나중에 자기가 조작한 꿈인지 자기가 몰라요. 심지어 자기가 있던 그 꿈 꾼거 가지고 그거 조작해서 해버리면 원래 있지도 않은 가짜 꿈이 꿈 속에 나타나요. 진짜 개판이다 완전히. 구라를 했든 거짓말을 했든 과거 이야기가 나중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돼. 하도 구라를 많이 퍼뜨려가지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인간밖에 안되는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하세요. 말씀은 언어지요 언어. 언어에 담아서 합니다. 언어에 담아서 이야기를 할 때는 왜 언어에 담아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까 이야기했어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한다? 타인을 통해서 경유해서 자기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했지요? 물론 망상이고 꿈이지만.


저 사람과 더불어 나.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하냐 이것을 나는 현실로 보겠다 이게 인간의 고집이에요. 저 사람과 더불어서. 그러면 저 사람과 더불어 하면 여기서 저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되겠지요. 그 관계가 뭐냐 하면 대화입니다 대화. 대화할 때는 뭐가 도구로 사용된다? 언어가 되지요 언어. 언어가 되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현실을 구성하면서 뭐를 동원시킨다? 언어를 동원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랑을 전달할 때 이 인간들이 자기 망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언어에다가 주님의 이 사랑, 영원한 사랑을 여기에 담아버려요. 담습니다. 언어는 뭐냐 하면 언어는 쉽게 얘기해서 봉투입니다 봉투. 봉투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의미가 담긴 봉투입니다. 그러면 봉투를 열고 안에 의미를 챙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언어는 예수님이 자기가 십자가에 다 이루었던 것을 언어라는 봉투에 그 내용을 담아서 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의 언어를 지켜보려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지키자 해가지고 봉투를 열고 보게 되면 그 내용은 어떤 소식이냐 하면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누가 산다? 내가 사는게 등장했다 이 말이죠. 어머나 왜 이러지 뭐 이런 내용이 다 있어. 뭐 이런 희귀망측한 이야기를 다 했지. 이거 설교하면 교인 다 떠나고 한명도 안 오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냥 넘어가자. 여러분 그냥 안 들은 척 하세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것도 넘어갑시다.


그런 뭔가 평소에 남하고 결속을 했던 이야기 있잖아요. 서로 사랑합시다. 형제를 도웁시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에 내가 나의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 남을 꼬시고 남을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그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가지고 서로 협조하고 배려하고 서로 도와줘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듭시다. 그걸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원시 공동체라고 해요.


공동체가면 목회하는 사람들 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줄 알아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뭐 다 이야기 끝났지요 뭐.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무슨 뜻입니까? 재산 바쳐라 이 말이죠 교회에다가 공동체에다가. 여러분 초대교회 안 되면 여러분 지옥갑니다 한마디 딱 던지고 초대교회 딱 보니 뭐 나와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미국 와서 돈 몇 푼 남지도 않았는데 교회 와서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라니까 다 내놓으라는 말인가?


거기다가 사도행전5장 보세요.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 나오지요? 아까워가지고 반 내다가 졸지에 부부가 사이좋게 한 날에 죽었어요. 장례 치뤘습니다 하루에 18만원이니까 둘이하면 36만원. 다 치룬거예요 그냥. 아 그게 성경에 있잖아요. 그러면 목사가 여러분 이상적인 공동체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되기를 싫어해요? 이것이 구원 받는데 여러분 안 할렵니까?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서로 하고 원시 공동체 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 유물론적 단계에서 제 5단계 공산주의 사회 그 전에는 사회주의고 자본주의는 붕괴되고요. 노예 제도에서 이렇게 바뀌어서 온거란 말이죠. 이 공동체는 이번 주일날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공동체가 도대체 뭔지.


사랑을 봉투에다가 넣었는데 그 봉투에 내용을 보니까 기존에 있는 이 현실, 이 현실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다 쓰잘데기 없는 망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그 말씀을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까? 이거는 지키면 안돼지요. 지킨다는 말은 그 내용이 모자라니까 내가 손 좀 더 봐서 완전케 하겠다는 그 의미가 있잖아요. 손대면 안돼지요.


주님은 인간을 죽이는게 아니에요. 죽이는게 아니고 죽음을 생산하지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죽음을 생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집이 있어가지고 안 죽었다고 우기잖아요. 안 죽었다고 우기는데 주의 말씀이 딱 오게 되니까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죽었고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미 죽었고 누구하고 비교해서 죽은 거에요? 누구하고 비교해서? 옆 사람하고 비교해서? 아니예요.


예수님과 비교해서 이미 우리는 죽은 거예요. 죽은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시간 주님의 공간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시간과 공간과 떨어져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난뒤에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낙원에서 쫓겨나면 그건 죽은 거예요. 뭐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아요. 간단한 거예요. 영역이 다른 거예요 영역이. 사는 자리가 달라서 죽은 거예요. 숨 쉬는데 아 이거 따지지 마세요. 숨 쉬고 안 쉬고 상관없어요. 그렇게 영역이 다르게 되면 그 다음에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무리 아담이 자식을 낳아도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 죽음을.


죄의 삯은 사망이죠. 죽었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그 죄가 이미 너를 접수하고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네가 죄를 지었다고 따지는게 아니에요. 죄가 우리를 통해서 죄가 스스로 자기의 현존을 우리를 통해서 알리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나팔이에요. 죄가 나올 뿐입니다.


기드온 전쟁할 때에 기드온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기드온 300명이 전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도구였고 통로에요. 기드온 300명이 준비한 무기가 뭐였습니까? 횃불이고 항아리죠 나팔도 있었지만. 그러면 횃불은 어디에 숨겼다? 항아리 속에 숨긴 거예요. 항아리 속에 숨긴 거예요. 그리고 전쟁은 이미 엄청난 미디안에 그날 밤에 꿈에 이미 하나님이 공격해서 완전히 혼란케 했습니다.


그 전쟁의 방법이 뭐냐? 현실을 고수한 인간에게는 꿈으로 대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꿈이 예수님의 꿈이라고 여기는 현실이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우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 위치를 바꿔버린 겁니다. 벌써 어렵지요? 주와 객을 뺑 돌려버린 거예요 위치를. 뺑 돌려버리는 겁니다. 생명과 죽음을 뺑 돌려버려요. 돌리듯이 돌려버려요. 객이 주 자리에 주가 객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미디안 전쟁에서 핵심은 뭐냐 하면 수십만의 군대가 있다라고 여겼잖아요. 그 자체가 그 자체가 개꿈이에요 그게. 그 자체가 개꿈이라고. 그리고 기드온은 뭐냐 하면 에이 300명이 뭐야. 300명 가지고 어떻게 이겨? 라고 하는 그 300명이 주에 의해서 그게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현실로. 꿈이 현실을 이기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꿈에 의해서 개판되는 거예요. 완전히 패배하는 거예요. 주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을 이기는 겁니다. 우리는 망상 속에 살면서 자기 출세하려고 애쓰죠. 지금 죽어 있는데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은 더 살아볼라고 합니다. 죽은 자의 사명은 하나만 하면 돼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 티를 내면 되요. 그 사명은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죽었으면 네가 어디서 죽었는지를 죽음을 끄집어내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쪼개서 수술해서 이것 때문에 죽었다고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그 수술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이에요. 시편 57편에서 다윗은 간음죄에다가 다윗은 살인죄를 저질렀잖아요.


주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할 때에 주와 객을 바꿔서 다윗이 성령에 의해서 바꿔치기한 거예요. 내가 죄 진게 아니고 모친의 죄가 나를 수술한 거예요. 나를 이용한 거예요. 모친의 죄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 거예요 그 모친의 죄가. 그 모친의 죄를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의 활동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활동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다윗과 똑같은 경우가 우리를 통해서 반복됩니다. 내가 죄 진게 아니고 죄로 하여금 죄를 드러낸 거예요. 내가 죽는게 아니고 죽음이 내 안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내 힘으로 바꿔치기 못하는데? 주님 나라의 성령이 오니까 바꿔치기 한 거예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생산체제로써 우리가 주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활동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잖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의 몫이고 죽어도 주의 몫인데 관계 없는 내가 망상 밖에 모르는 내가 왜 거기에 내가 죽는다고 길길이 날뛰냐 이 말이죠. 나하고 관계없는데. 내 죽음이 나와 관계 없어요.


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떻게 쓰실거냐 하는 문제는 내 몫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하실 몫이에요. 그동안 오래 살려줬잖아요. 그만하면 됐지 뭐 더 꽂아가지고 제발 요양병원 가가지고 코에 뭐 집어넣을까요 하지 마세요. 그 집어넣으면 못 뺍니다. 빼면 살인죄가 되거든요. 애초에 그거 집어넣지 마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어떤 그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옆에 보니까 그걸 꽂아가지고 25년째 꽂고 있어요 25년째. 병원에서 돈 꼬박꼬박 다 받아 가지고. 그걸 왜 꽂아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걸 음식을 못 삼키면 고삐를 끊으라는 신호입니다. 내가 다 쓸 것을 다 썼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인간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꽂아가지고 음식은 주니까 죽지는 않지요. 얼마나 아프다고요. 무진장 아프다는 거예요.


그걸 집어넣고, 빼면 의사가 살인죄 걸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거 빼지도 못해요. 돈은 계속해서 자식들 돈은 계속 넣는 겁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이 과학이 문제예요. 왜 죽은 인간을 살리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누구의 증인되느냐가 중요하지. 지옥같은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살아서 뭐할거예요. 에어컨 켜봐야 아파트 단지가 다 정전되는데. 죽었는데 어떻게 쓰실 것인가 그건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10분 쉬시면 돼요.  

 

 강남-요한복음 18장 1절(사랑의 전달)

180904b-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첫째 시간에 언어는 봉투라고 했습니다. 언어는 봉투고 그 안에 의미가 담겨 있지요. 담겨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할 때에 너는 죽었고 내 안에 산다고 갈라디아서를 인용해서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러면 요한복음 다음에 바로 갈라디아서 나오지는 않지요. 절차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 절차가 뭐냐 하면 바로 18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에 의해서 예수님이 잡혔습니다. 잡혀서 체포 당해서 나중에 십자가에 죽지요. 예수님한테는 자기 죽음에 있어서의 자기 매개체 그걸 매개체라고 하는데 가룟 유다라는 매개체가 있어요. 물론 가룟 유다 내부를 쪼개 보면 거기에 누가 들어있느냐 하면 사탄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구원 받고자하고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어떤 매개도 없어요. 왜? 다같이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대구 사람 서울 사람 미국 사람 아무 의미 없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언어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제시된 것은 사탄이라는 그 매개성이 필요합니다.


악마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했다는 것은 악마가 무엇의 대표자냐 하면 모든 인간세계를 통괄하는 통괄권이 아버지로부터 위임을 받았잖아요. 악마가 나서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결정적으로 관여했다는 말은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모든 세상에 모든 것들이 악마의 뜻에 따라서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모든 것이.


일본을 2:1로 이겼잖아요 한국이. 그거 십자가하고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목사고시 시험 짓는다면 아시아의 축구게임과 십자가를 논하라면 됩니다. 방탄소년단의 팬클럽에 가서 십자가를 논하라 이런 것. 아무도 못 맞히겠죠. 세상에 일어난 어떤 사소한 일도 모기가 윙하고 돌아다니는 이 모든 일도 십자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이걸 방사라고 했죠 ‘방사’


예수님이 자기 존재를 확산 시키는 거예요 사방으로. 여러분 치마처럼 확 퍼지는 겁니다. 뿌리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주와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 나와 관련된 일은 이 세상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그 응축되는 그 중심체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있다든지 나에게 손해가 있다든지 이런 일은 아예 그런 의미조차도 우리는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아까 악마의 통치를 받은 이상은 내 자신을 위해서 언어를 만들어 내지요. 언어를 매개로 사용해서 내게 필요한 현실 구성에 나섭니다. 현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꾸역꾸역 나를 빛낼 현실을 계속 다듬어 나가는 겁니다. 나 자식 이만큼 키웠다든지. 내가 고생해서 너 다 키웠다든지 이런거. 계속해서 자기 역사 자기 스토리를 구성해 내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딱 오게 되게 되면 그것은 뭐냐?


언어에 대한 의미 활동을 주님께서는 뭐로 삼느냐 하면 성도한테는, 크게 쓸께요. 침묵이에요 ‘침묵’.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예요. 우리는 입 안 다물죠. 절대로 안 다뭅니다. 간절함에 막 기도하고 막 난리도 아니예요. 새벽기도 나오고. 우리가 침묵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 좋아라고 세상에 필요한거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세상은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이래서 구원 받겠느냐 더 착해야 해. 아니 이 경건으로는 안돼 더 경건해야해.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 돼. 남 두 시간 기도하면 난 세 시간 기도하고, 더 철저하고. 내가 전에는 함부로 기도했는데 이제는 꿇어앉아서 기도하고.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진도만 가도 선교하고 했는데 이제는 아프리카 가든지 마다가스카르에 가가지고 의료봉사를 하던지 그렇게 인간극장 나온 것처럼 그것처럼 봉사하고. 인간극장하고 있어요 지금. 마다가스카르 가서 의료봉사 기독교 봉사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던지 그렇게 해야 더 신나고 이러는데.


그 마다가스카르 의료봉사 그 사람 죄인들입니다. 그 죄인을 부러워하면 안돼지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현실을 또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거예요. 망상인데 그 사람은 거기에다가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의미를 주면 안 되는데 자꾸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자꾸 가미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침묵 안 합니다. 뭐든지 활동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침묵 안 하니까 누가 침묵하겠어요? 주님이 침묵하죠 주님이. 그래 잘났다 그래 네가 정말 너 알아서 해라 나 입 다물고 있을께. 주님이 침묵해버려요.


그 침묵의 기간이 뭐냐 하면 바로 단절입니다 ‘단절’. 이게 십자가의 단절이에요. 단절입니다. 월드컵할 때 4강 갈 때 8강인가 4강 할 때 박지성이가 한 골 넣었죠? 세레모니가 뭐냐 하면 이거예요.(쉿) 입 다물라고. 내가 감독 히딩크 만날 때까지 가만 있어라. 히딩크 만나 안고 난리 났지요. 주님께서의 침묵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참지 못하고 떠들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난리도 아니예요. 오른손이 했는데 왼손이 파티 열고 난리예요. 그 자랑질을 못 해가지고 자제가 안돼요. 도무지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선교 해놓고 사진 찍고 뭐하고 가슴 찢는 회개 막 책 내고 이런 소리 하면 우리 김철기 목사가 또 싫어할텐데.


주님께서 침묵을 하는 것이 제자들과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단절입니다. 우리 잠시 이별하자는 잠시 헤어지자. 잠시 헤어져 버리면 각자가 소속이 뚜렷하게 드러나요. 침묵이라는 것이 하나의 하나의 갭으로서 강요를 딱 해버리면 우리가 아무리 호소해도 주께서 침묵하시거든요. 아무소리 안 한다 이 말입니다. 침묵한다는 말은 네 말 안 들어 준다는 거예요. 네가 평소에 사람에게 하는 그 개소리를 나한테 짖지 마라는 겁니다. 나한테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침묵하게 되면 드디어 우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주님이 안 도와 주는데 뭐. 주님이 안 도와 주는데 나라도 설쳐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자기 살 궁리에 들어가게 되죠. 그게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장이에요.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장이 21장이잖아요. 21장에 보면 누가 누구를 찾아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한 예수님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 7명 모여가지고 12명중 가운데 5명 어디로 가버렸는지 가버렸어요. 7명 모여가지고 고기 잡을 때 그때 주님이 나타났잖아요. 주님이 먼저 나타났거든요. 그때 베드로 하는 말이 나타나주셔서 죄송하다는 거예요. 베드로의 심정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셔야 하는데. 뭐 찾아갈 수도 없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죠. 주께서 찾아오신 거예요. 왜 찾아오셨느냐 하면은 의미라는 것은 내게 의미가 있을 때 타이밍이 맞아야 그 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그 I'm missing you.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을 때 내가 그리워하고 보고싶을 때 딱 나타나게 되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구약에 그렇게 나오잖아요.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을 만날 때 그 에스더가 나타난 그 타이밍이 어떤 타이밍이냐 하면은 왕이 자기 왕비인데도 불구하고 왕비한테 막 뿅 갔어요. 나라의 반을 주겠다. 나라의 부동산을 반을 주겠다는 겁니다. 강남이고 뭐고 반을 주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반했으면 아까 복습해봅시다. 사랑은 뭐다?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잊어버리는 것. 그대 있음에 나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여러분들도. 그대 있는 걸로 내 삶을 대신 한다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 했어요. 우리의 사랑은 연습도 없이 무대에 올라간다. 우리의 사랑은 연습도 없이 무대에 올라간다. 그런데 이게 꿈일지도 몰라 꿈인지도 몰라. 이게 비나리라는 심수봉의 노래. ‘비나리’. 우리 사랑 꿈인줄 몰라. 연습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거예요 연습도 없이.


왜냐하면 뭔가 왔거든요. 확 오니까 내가 옛날에는 사랑 오기 전에는 내가 누구한테 반했어요? 나의 잘남에 반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왔을 때는 내 잘남을 그야말로 아낌없이 포기해버립니다. 아낌없이. 나를 개무시해도 반갑다예요. 당신이 나를 개무시한다면 오히려 그게 나한테 영광입니다예요. 메조키스트적인 그런 자학적인 것이 있어요. 있는데. 지금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다. 그런 사랑을 안 해 봤으니 뭐. I miss you. 나는 당신을 그리워한다.


그 말은 나는 내가 안 그립다는 겁니다. 더 이상 나는 가치 없다는 거예요. 당신 앞에서 나는 서슴없이 고백하는데 나는 당신에 비해서 전혀 가치 없습니다. 내가 가치 없음을 당신이 가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용납하겠습니다. 미친거 아니냐 그렇게 하겠지만 사랑을 만나면 그렇게 돼요. 그런데 그게 자유예요.


그동안 자기 몸뚱아리 챙기느라고 얼마나 고생들 했습니까? 얼마나 고생했어요. 도덕이 나쁜 이유는 자기 파괴요소가 없어요. 도덕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자기 파괴요소가 없습니다. 계속 자기 잘 나야 돼요. 남자분들이 여러분들이 여자분들은 몰라 남자들이 왜 군대 이야기를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군에는 사랑하려고 가는게 아닙니다. 군에 애인 만들려고 군에 가는게 아니잖아요. 군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예요.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군대생활하니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얼마나 힘듭니까.


여자가 처녀로 살면서 그렇게 힘들지요. 그런데 누가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제안을 하면서 손에 물도 안 묻히겠다는 거예요. 물론 고무장갑 끼워 주겠지만. 손에 물도 안 묻히겠다 무조건 다. 이게 왜 좋으냐 하면요 그동안 내가 나 챙긴다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내가 하고싶은거 다 해주겠다는데 물론 그건 빈말이지만. 경제적 여건이 되야 되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다 이 말이죠. 내 꿈은 그동안 내가 힘들여서 했는데 이제는 내 꿈을 내 이상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해준다니까 아낌없이 그대 품안에 아낌없이 안겨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그쪽이 전적으로 나를 책임질거니까. 아이 낳을 때까지만 유효한 겁니다.


주님께서 단절해놓고 제자들은 도망쳤어요. 제자들의 본색이 드러났죠. 그럼 7제자들 함께 있으면 뭐냐 하면 그 있는 자리가 뭐냐 하면 죽음의 자리예요. 그 죽음의 자리가 늙으면 죽는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없는 자리예요. 그냥 고기만 있어 고기만 잡으면 되는 거예요. 옛날에 했던 거 그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교육받은거 그거 다 잊어 버려요. 시험치고 나면 다 잊어버리듯이 다 잊어버렸어요.


아무리 잊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 뭐냐? 살아있는 나를 내가 살리지 않으면 아무도 못 살린다는 것.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지 예수라도 책임 안 진다는 것. 내가 부지런히 벌어야 내 자식이고 나도 살 수 있다는 것.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거예요. 그것은 지워지지 않아요. 인간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어요.


내 스스로 달라져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안 달라져요. 그리고 내가 처해있는 나의 현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시키는 이 현실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거예요. 누가 나보고 죽었다고 해? 나는 지금 말하고 손이 움직이잖아. 이게 어떻게 죽은거야 라고 철썩같이 이것만이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갇혔는데. 그게 꿈에 갇힌 거예요. 사실은 망상에 갇히고 현실에 갇힌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 안 계셔도 상관없는 삶이기 때문에. 주님 안 계셔도 상관없는. 나만 튼튼하면 아무 행복에 지장이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현재 사랑 없는 세계에요. 왜냐하면 나를 잃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일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어요? 세자로 ‘일체감’ 이라고 했지요. 나는 남이 있으면 안돼 일체감 필요 없어. 남이 있으면 귀찮아 짜증나요. 나이들면 다 짜증나요. 누워 있으면.


그런데 주님 없는 그 자리에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뭘 느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거기에 찾아왔잖아요. 저는 이것을 낯선 가까움. 분명히 낯선데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고기 잡아서 주님과 빠이빠이 했는데 주님은 우리를 빠이빠이 하지 않았어요. 어디 있는지 알았어요. 주께서 제자들 일곱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어요. 어디에 지금 살고 있는지 알았어요. 고기 잡으러 갔는가? CCTV까면 다 나와요. 주님은 우리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때 주께서 하는 단어가 두자의 단어가 나옵니다. 단어는 뭐라고 했습니까? 봉투라고 했지요. 그 봉투 안에 의미 담기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베드로보고 하는 말이 네가 나를 그 다음에 사랑하느냐? 고기를 더 잡아주는게 아니에요. 분명히 고기를 더 잡아 줄 수도 있지요.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으니까. 요한복음 21장에 그렇죠? 21장인가 20장입니까? 네 오른편에 던져라 할 때 21장이죠.


오른편으로 던져라 했을 때에 이것은 고기 문제가 아니에요. 고기 문제가 아니고 말이 이상합니다만 익숙한 낯섦이죠. 분명히 익숙한 음성인데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그게 왜냐하면 내가 건널 수 없는 그 단절을 주께서 훌쩍 뛰어 넘은 거예요. 나는 저쪽에서 갈수 없는데 갈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갈수 없는 그 장소 그 낯선 장소에서 주님께서 이쪽으로 와버린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설정한 그 낯선 공간에 제자들이 포섭된 겁니다. 덮쳐진 거예요. 주님의 계심에. 그리고 계셨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그 질문이 모든 중심 되는 핵심 단어가 너 몸 건강하냐? 응? 고기 많이 잡았어? 이게 아니고 네가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이 말은 저는 이걸 어느 설교에서 사랑은 모든 것의 모든 것. everything. 모든 것의 모든 것. all. 모든. 모든 것. 전부.


자, 그렇다면 이걸 요한복음 18장과 연관시켜 봅시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께서 이 말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기드론 시내라고 하는데 시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가보니까. 저는 이걸 돌판 있어서 그냥 걸어갔어요. 예루살렘과 감람산 그 사이를 기드론 시내라 하는데 그냥 물도 없어요. 그냥 가면 되는데 약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거기 가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이 체포당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가룟 유다한테 체포 당한 그 장소에 성당이 서 있어요. 또 성당에 들어가봤잖아요. 그 성당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문제가 아니고 성경의 실제 이야기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마태복음 이게 실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신화 동화 만화 꾸며낸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제가 그 거기 예루살렘 답사 가가지고 제일 큰 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제일 충격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천사가 왔다는 목자의 들판. 목자의 들판을 보면서 이게 천사가 온 그 들판을 보는 동시에 나의 내 중심의 현실은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세상은 천사중심이고 주님 중심이지 영적세계 중심인데 그 앞에서 어디 깝죽대면서 내 중심을 거기에다가 내 중심의 인생, 나 이렇게 살았습니다를 어디 거기에다가 갖다 들이 밉니까. 무슨 내 인생이 있어요. 주님 앞에 포섭되고 전부 다 포함될 뿐인데요.


그것만해도 거기까지 멀리 간 비행기 값 뽑았습니다. 일인당 500만원 든다고 보면 돼요. 일인당 500만원. 많이 비싸지요. 여러분도 한번 갔으면 한다 생각 들었어요. 가기 전에는 다 환상이라 했는데 이왕 환상인거 가보면 더 괜찮잖아요. 가룟 유다 왔을 때에 그 장소에서 제자들과 이제는 헤어집니다. 예수님이 따로 가요.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낯선 가까움이라 했는데 낯선 친숙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 이상하게 어려운데. 예수님이 인간 제자들+예수님 함께 있었잖아요. 함께 있었을 때 과연 함께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절대로 함께 있었던게 아니예요. 함께 같은 아람어를 쓰시고 숙식을 같이해도 같이 있었던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분리가 됨으로써 이 제자들에게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제자들이 있는 이 현실에 뭐가 없느냐 하면 바로 사랑이 없는 거예요. 이쪽에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하면 뭐가 없다고 말합니까? 일체감이 없다는 말 2가 없다. 제대로 된 2. 2가 있고 1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예수님에 꼽사리 끼는 겁니다.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나의 구원은 없어요.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밖에 없어요. 왜냐? 예수님의 언약 상대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한 것 잠깐 이야기해볼까요. 약속과 언약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약속은 하나의 스케쥴이에요. 계획이다 이 말이죠. 박미선 씨가 이야기했잖아요. 이야기는 내가 할 테니까 글은 네가 써라. 순풍산부인과에서 그런 이야기했답니다. 자기는 말하고 남한테 어려운거 시키고. 약속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고 그걸 구체화시키는 계약 상대자는 언약 상대자 계약 상대자예요. 언약은 계약입니다.


여기는 뭐냐 하면 상대자가 있어야 언약이 돼요. 주께서는 이루는 것은 약속을 이루는게 아니고 뭘 이루느냐? 언약을 이루는 거예요 언약을. 언약을 예수님이 이루었다는 말은 언약은 누구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이걸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일을 이루는데서 어떤 매개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한다고 이루어지는게 아니예요. 왜? 인간에게는 어떤 매개체가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아요. 왜냐하면 내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게 아니기 때문에. 내 뜻을 위해서. 내 현실 잘 되기 위해서 주님이 계신게 아니기 때문에. 내 뜻을 위해서 어떤 단어를 쓰시고 어떤 용어를 쓰시면 주여 내 기도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기도 마지막에다가 예수 이름 갖다 붙이면 들어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이런게 소용 없어요.


죽은 놈이 이상한 소리 하는걸 그걸 왜 들어줘요. 죽은 자인데. 그래서 제대로 기도하려면 뭐냐 하면 주여 제가 죽어있다는 것을 또 까먹었으니까 죽어 있다는 것을 계속 인식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면 되죠.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 그럼 죽은 자가 어떻게 죽느냐 하면 죽은 자는 누가 봐요? 이게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견본’ 이라는게 있지요 견본? 견본. 주님은 주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견본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 자신을 필요한 거예요. 그것 봐 죽었지만 내가 살려줬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자기의 성취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거 봐 나쁜 짓해도 봐라 구원받잖아 이런 거. 자기밖에 몰라도 가끔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잖아. 이런게 기적이란 말이죠 이런게. 이런게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낯설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용어 또 어려운게 나오지만 낯설다는 말은요 내가 동그라미 친 바운더리 친 그 바깥이다 이 말이죠. 낯설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익숙하게 알거든요. 그 안에 바깥에 있다. 그걸 뭐냐 하면 여분의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은 여분의 것이에요. 안 줘도 괜찮은데 주신 거예요. 안 줘도. 나같은 인간을 구원 안 해도 되는데 구원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구원을 사랑합니다. 왜? 낯설고 여분의 것이기 때문에. 횡재라는 말 있지요? 그게 딱 어울려요. 왠 떡이냐. 갑자기 제목이 ‘왠 떡이냐’.


저는 백날 구원해도 구원 하나 안 하나 똑같아요. 우리는 구원 하나 안 하나 나 잘 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줄 우리는 마귀한테 그것만 배웠고 우리가 할 수 있는게 그거예요. 나 잘 되는 거예요. 나 뽐내는 거예요. 남에게 보여주는 삶, 우리는 주특기 그겁니다. 남한테 보여주는 삶이에요. 아내가 머리했는데 남편이 가만있으면 섭섭하기 짝이 없어요. 예를 들면 갈라 서 이렇게 나와요. 뭐야? 잘 나왔다 물어야지. 머리 잘 나왔냐고 물어줘야지. 그런데 남편의 바운더리에는 그게 없어요. 남편은 지금 프로야구 보고 있어요. 삼성이 지금 5등 가을야구 그것만 보고 있어요. 그 앞에 머리 들이밀어도 그거 관계 없어요.


인간은 각자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자연스럽고 할 줄 아는게 그거 밖에 없어요. 제발 할 줄 아는 것만 하세요. 더 이상 유별나게 주를 위해서 하지 말고 본인 잘 하는거 있잖아요. 자기 챙기는 것. 변명하는 것, 자기 죄 감추는 것. 그거 뭐 안 가르쳐 줘도 안 배워도 그렇게 잘 하더라구요. 그거 하세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늘 낯설게 느껴지도록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감사가 안 나옵니다. 익히 아는 것은 감사가 될 수 없어요. 당연한게 되지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아들이 하나 밖에 없어요. 두 부부가 아들이 이뻐서 조금만 공부 잘 하면 우리 아들 천재 같애 아이큐 150 넘는거 같아 이렇게 호들갑 떨어요. 그래가지고 아들이 해달라고 하는거 다 해줘요. 건담이고 뭐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해달라는거 다 해줬습니다. 애가 그걸로 부모한테 감사할 줄 알았어요. 부모의 착각이에요. 욕망의 차감의 법칙도 몰랐던 거예요. 경제의 기본. 사람이 한번 레벨이 올라가게 되면 점점 더 더더더 레벨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분수에 안 맞는 것을 계속 달라고 합니다.


부모로서는 사는 보람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서 그 아이가 만족하는 것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만족하는 것을 그 부부의 유일한 세상사는 보람이었어요. 아이가 도가 넘쳤어요 이제는. 세상에 고등학생이 차 사달라고 하는 거예요. 운전면허증도 없어요. 그래서 이거는 좀 심하다 해서 아빠가 그것도 잠시 화를 냈어요 잠시. 안 된다. 잠시 화냈다고 그 아이가 아파트 15층에서 문 열고 투신을 시도합니다. 아이 누가 그렇게 키웠습니까? 누가 그렇게 키웠어요? 부모가 바보 등신같이 자식이 부모한테 잘해주면 자식이 부모한테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요. 부모한테 고맙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빈말인데 그것은 더 빼내기 위한 하나의 언어의 매개에 불과하거든요.


세상에 무슨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자식은 누구한테 태어났느냐 하면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거든요. 부모가 그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때는 나중에 자기가 자기 자식 사랑할 때, 그동안 너무 심했다 생각해서 예의 삼아 부모한테 부모 노래 부르면서 이제야 부모의 사랑을 불효자는 웁니다 이러면서 그 때 때우기 위해서 봉투 10만원 넣고 때우기 위해서 한 소리 이벤트에 불과한 거예요.


절대로 인간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어요. 왜? 생겨먹은게 그래요. 이게 못 되서가 아니예요. 그럼 자식은 왜 사랑하느냐? 자식은 끝까지 자기 소유거든요. 부모가 자식이 부모를 이용해가지고 부모가 아플 때까지 늙은 부모 다 온갖 다 시키고 용돈 쥐꼬리만큼 주고 내쳐도 그런 자식을 부모는 미워하지를 않아요. 미워하지 않는 것 때문에 자식이 점점 더 고질병이 더 심해져요. 이제 부모는 더 함부로 해도 괜찮고 내 쫓아도 상관없다 하더라도 남이 그 자식을 욕해도 누가 막느냐? 부모가 나서서 막아줘요. 내 자식 누가 욕 하냐고. 부모는 끝까지 자식을 버려놓는 당사자가 부모입니다. 그놈의 말도 안 되는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이 그런 거예요. 사랑이 인간의 사랑은 그런 겁니다. 그 현실이라는 현장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현실을 인간은 떠나지를 못하면서 현실이 뭔지를 몰라요. 왜? 외부에서 나에게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둘 다 바보거든요. 같은 인간이 다 바보니까 아무도 알려줄 수가 없습니다. 명절 돼 보세요. 전부 다 지 자식 자랑 공부 자랑 명절 때 쭈욱 큰집에 다 모여서 고스톱 치면서 이야기하는거 보면 전부 다 지 자식 공부 천재 천재 아닌 애가 없어. 전부 다. 공부 못 하면 딴 거 또 잘 해. 게임 잘 한다는 거예요. 나중에 올림픽 나가서 e-게임해서 우승하겠다는 겁니다.


어떤 애는 또 공부는 못하지만 벌써 춤은 잘 춘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걸그룹이 300:1입니다. 300명이고 성공할 수 있는 비율이 0.01%에요. 통계로 딱 나옵니다. 왜 부모가 자식한테 미치느냐 하면 달리 미칠 데가 없거든. 달리 투자할 데가 없어요. 부모 생겨먹은게 그거에요. 그 부모 밑에 그 똑같은 자식이 나왔으니까 그 자식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장소에요. 장소, 자리. 내가 속해 있는 그 환경이 말해줍니다. 인간은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대표하는 것은 사탄이고 그 사탄을 12제자 가운데 누가 대표했다? 가룟 유다가 대표한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 팔아먹자 12제자 다 깨졌어요. 가룟 유다는 망해도 우리끼리 만나자 그런거 없어요. 다 깨졌어요. 따라서 잡힐 때 제자들이 안 잡아서 잡혔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아야 돼요. 따라서 여기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알아서 잡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상당히 재미있는 문제지요. 예수님이 잡힐 때에 그러시면 안 됩니다 붙잡을 수 있는 능력자는 인간 속에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어요. 자,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서 현실 꿈이죠 꿈인데 하여튼 개꿈인데. 인간 세상에서 빠져나오잖아요. 빠져나올 때 예수님이 인간에게 떠밀려서 빠져나온게 아니고 예수님이 알아서 빠져나온 거예요.


왜냐하면 사탄도 천사거든요. 천사는 자기 일이 없어요. 천사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할 뿐이에요. 원래 천사는 피조물이거든요. 악마가 인간세계에 있으니까 자기가 왕질하지 주님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악마는 자기 주장 못해요. 가룟 유다야 네 할 일 해야지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얼굴 확 돌아가면서 나간 거예요. 마귀 마저 누가 다룹니까? 주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마귀 마저.


사도행전 19장에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귀신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주님 쪽에서 사도 바울을 다루는 걸 내가 알고 있는데 너는 나하고 같은 편이면서 나를 쫓아낸다는 것이 네가 말이 되나? 너는 주님이 몰라 이 말 아닙니까. 어디 쫄개가 어디 쫄개가 주인을 쫓아내요. 이 세상은 모든걸 악마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마를 겁낼 필요가 없다니까요. 워~해도 겁내지 마세요. 복도에서 턱턱 걸어와도 겁내지 마세요. 여고괴담에 나왔어요. 겁내지 마세요.


주께서 허락하지 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생명 못 뺏어가요. 살고 싶어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어떤 뮤지컬하는 사람이 칼로 칼 치기 해서 배우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 시간이 그거 안 해도 죽게 되어 있어요. 그거 안 하고 박해미하고 같이 있어도 죽게 되 있어요. 갑자기 헉하고 죽게 되어 있다니까. 죽는 환경은 죽는 요건과 그 변수는 주님이 장만해주는 겁니다. 내가 죽을 장만 하는게 아니에요. 번개탄 피워 죽으려고 해도 그 가게에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 못 죽어요. 다음 날로 미뤄야 돼. 어떤 사람은 한강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물 너무 차가워서 못 그 다음 날로 미뤄서 살았잖아요. 물 차가우면 못 뛰어내려요. 좀 괜찮게 죽어야지 추워서.


세상의 모든 발걸음과 모든 움직임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절대로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게 아닙니다. 세상 안에 갇혀있거든요. 마귀는 새장 안에 갇혀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해요. 주께서 빠져나갈 때 죄 안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면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오느냐 부활하셨잖아요. 다시 들어옵니다. 그럼 다시 들어올 때 뭐를 포함되느냐 하면 예수님 다시 들어올 때 사랑이 있잖아요. 사랑한다고 했지요. 사랑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단절’,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죽음 나의 죽음’ 이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안에 그 의미가 포함된 사랑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죽자 이 말이에요. 나 너 찾아온 것은 우리 꼭 끌어안고 임당수에 그냥 같이 죽으라고 온 겁니다. 그럼 우리 집에 가훈은 뭐가 되겠어요? 죽자가 되겠지요. 앞으로 뭘 하면서 살겠다가 아니라 주식을 어디 투자하면서 살고 펀드를 어떻게 분산하면 몇 개 들어서 살 거가 아니고 펀드를 어디 들어야 내가 죽을 수 있느냐. 건강검진을 일년에 몇 번 받아야 내가 죽을 수 있느냐 이걸 생각하면 돼요. 그 오메가3를 하루에 몇 번 먹어야 내가 죽을 수 있느냐. 그럼 오메가3를 안 먹으면 죽지 않겠느냐 안 먹으면 골병 들지요. 그러니까 건강하게 죽어야 돼요. 쌩쌩하게 죽어야 돼요 쌩쌩하게. 아침에 조깅해야 돼요. 다이어트해서 깨끗하게 뱃살 줄이고 몸매 괜찮게 죽어야 돼요.


왜? 그 죽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소원인 거예요. 제가 그 저 주일날 했지만 우리가 고인을 떠나보낸게 아니라 우리가 남겨진 자입니다. 아이 우리는 남겨두고 먼저 가면 어떡해. 오히려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느냐 하면 남겨진 자를 위로해야 돼요. 형님 우리 남겨졌습니다. 아이고 진작가지 않고 순서가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글쎄 말입니다. 아이고 동생아 너무 안됐다. 지금 돌아가신 분 보고 울면 안 되고 우리가 울어야 돼 우리가. 또 순서 탈락했거든요.


날 안 데려가고 왜 어머니를 왜 돌아가게 하십니까? 고생 내년 되면 더 더울 거 아닙니까? 내년되면 더 덥거든요. 내년 되면 아파트 전체가 다 정전 되면 에어컨도 못 킨다니까. 아프트 전체가. 어떻게 그걸 견딥니까? 날씨는 덥지요. 겨울은 얼마나 또 추울까요. 얼마나 좋겠나 빠져버렸으니까. 이거는 뭐 엄마가 같이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가버리고 얼마나 이기주의예요. 자식은 고생하라고 남겨두고. 오메가3 에다가 또 로얄제리 먹어가면서 또 뭐더라 더블엑스? 암웨이에서 또 나온게 있나봐요. 그거 먹어가면서 오늘 또 혈압약까지 먹거든요. 죽자. 이거 먹고 죽을 때 쌩쌩하게 퍼덕거리면서 죽자. 늘 이렇게 해야 되고 차 오면 비켜야 되고 왜? 그냥 하면 또 비참하게 죽으면 안돼. 비켜야 되고 또 cctv 달고 도둑놈한테 죽으면 안 되니까 그거 해야 되고 다 해야 돼요. 주께서 허락하신 거기 때문에 마다할 일 없습니다. 선물이니까.


자, 마지막으로 이야기 할 것은 바로 ‘불러냄’ 이에요. 어떻게 불러내느냐 하는 겁니다. 주께서 불러내실 때 어떻게 불러내느냐 하면 우리에게 낯선 체험을 줍니다. ‘낯선 체험’. 낯선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우리가 딱 이렇게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 이런 인간이야 나 이게 현실이야 나 이만큼 고생해서 이런 인생 내 가정 이루었어 라는게 있는 겁니다. 기존에 있어줘야 그것과 대비해서 ‘낯섦’ 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잖아요.


그럼 기존에 있는 것은 뭐냐? 쉽게 말해서 행복의 요건이 뭐냐 하면 돈과 명예와 건강 이 세가지만 있어도 명예 속에 많은게 포함되니까 남이 날 알아준다 이 말 아닙니까. 돈과 명예와 건강 이 세 가지만 있어도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이게 기존의 것이란 말이에요. 행복이란 돈+명예+건강 이 세 가지로 기본 되어있는데 여기에 주님께서는 포함되지 않는 낯선게 들어와요. 낯선게 들어오는 순간 이 세 가지를 잠시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잠시에요 잠시. 어떤 사람은 3초 어떤 사람은 5초 가는거 있는데 잠시 잊어버리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낯선 분이 새로운 존재로 다가와요 존재. 새로운 존재니까 몸으로 들어가죠. 먼저 봅시다. 인간은 나는 행복하다 돈 있어야 되고 명예 있어야 되고 건강하다 할 때 이 주인공이 누구예요? 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제가 주인공이라고 했지만 어렵게 말해서 이 주체가 누구예요? 내가 주체지요. 그러면 주님이 찾아와 버리면 내가 주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객체로 바뀝니다. 하나의 객체로 바뀌어요.


그러면 주님 오게 되면 나는 나 밖에 몰라 이렇게 됐는데 이게 뭐로 변합니까? 2가 되지요. 이 주님이 주인이 되고 나는 주님을 위한 객체가 될 때 이 둘 사이에 뭐가 형성되겠습니까? 바로 사랑이 되지요. 사랑은 단절되었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도 없고 좋아한 적도 없고 기다린 적도 없고 오시라고 한 적도 없어요.


우리가 주님을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때는 우리가 빌어먹을 때만 그런 소리 나와요 진심으로. 그렇잖아요. 인간이 빌어먹지 않는 상황에서는 예수님 오시옵소서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그냥 오시지 말고 돈 들고 오시고 명예 들고 오시고 건강케 해주시고 빈손으로 오지 말고 선물 들고 오라 이 말이거든요. 북한이랑 똑같아요. 회담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면 싫어해요. 세상이 다 그런 거예요.


사랑은 단절이라는 말은 사실은 내가 사는 동네이야기만 기억하고 있어서 그 기억이 모아져서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억한 것. 내가 경험한거 말고 기억한 것. 기억하더라도 내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이거는 기억이 안 되잖아요. 내가 기억한 거예요 기억한 거. 내가 기억한 것의 집대성이 바로 이것이 현실로 본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억을 무슨 기억으로 보느냐 하면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기억을 뭐냐 하면 다녀간 기억.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그 기억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요. 주님의 체험이거든요. 주님의 체험을 우리 속에 집어넣을 때 우리는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낯선 사랑이 되면서 주의 자리에 있던 것을 객체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러분들 표정 보니까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명사거든요 명사. 명사에서 명사로 갈 때 앞에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여기에 동사가 필요해요 동사가. 내가 여기 있는데 나는 뭐가 되고 싶다 할 때에 뭐가 되고 싶다 할 때 이것은 명사로 이렇게 굳히잖아요 명사. 확정된 명사로 덩어리로. ‘나’ 라는 덩어리로 만들 때 그 다음에 여기서 동사니까 동사는 뭐냐 하면 뭐 이렇게 행하자 이렇게 행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행하자 될 때 이 동사 자리에다가 주님께서는 여기에다가 네가 모든 동사 행함은 죽음이다.


죽음에서 나온 동사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겁니다. 주님의 죽음. 그런데 나의죽음이죠. 나는 죽은 행동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여기 마주해서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주님께서 원하는 너에서 주께서 원하는 명사로 가버리죠.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명사에서 이것을 저는 나의 소망 나의 희망 기대 돈과 명예와 건강 이렇게 되지요.


인간은 열심히 실천이라는 이름의 행함을 집어넣습니다. 그냥 놀면 뻔뻔스럽잖아요. 뭔가 기도를 하든지 헌신을 하든지 주님께 착하게 살아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명사는 주님께 생각하는 명사는 이게 끊어져 단절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방향을 틀어야죠. 현재 나라는 인간이 나의 행함으로 이쪽으로 빠지는 것을 주님께서는 주님의 행함 주님의 죽으심에 빠져버리면 내가 모르는 낯선 목적의 주님 앞에 객체, 주님의 신부로서 낯선 객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요구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과의 여기서 뭐가 됩니까? 여기 끊어져 있음을 발견하지요. 이 끊어져 있음이 뭐냐 하면 이게 뭐로 이어져야 되느냐 이게 감사로 이어져야 됩니다 감사. 그래서 요한복음 18장이 있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잡혀갔을 때에 이 세상 빠져나올 때에 너희들 다 도망갔잖아. 도망간 너희를 내가 다시 찾아왔다는 말은 네가 나한테 더 이상 해줄게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없다는 말이에요. 내가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주께서 먼저 사랑한다고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만약에 철이 없어가지고 사랑하면 뭐 내가 원하는거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건 네가 원하는 명사고 주께서 가자하는 명사는 이미 이거는 주께서 다 해놨어요. 신데렐라 그 공주처럼 이제 시집만 가면 돼요 시집만. 여기서 시집 가봤잖아. 또 가면 돼요. 시집만 가면 돼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집에 좀 허술하니까 개선하려고 하고 자기가 동사 자기가 열심히 걸레질 해가지고 반들반들 깨끗하게 되면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 자기가 행하기 전보다 더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집에. 그런데 이층집은 완전히.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 아까 기억이란 말 했지요. 내가 아는 현실 속에서 우수한 현실로 개선해볼라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여기 일층집이라면 이층집에 누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나라 천국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을 원하는게 아니예요.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더 우수한 더 사회적으로 더 나를 행복케 해주는 여기를 지향하면서 행동을 조심해야 얻을 수 있다. 실천을 바르게 하면 얻을 수 있다. 맨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 일층과 이층은 단절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층에서 내려와가지고 가자! 손목 비틀고 데려갑니다. 손목 비틀고. 우리는 계속 이러시면 나 실패해요 하는데 너는 실패해도 괜찮아. 이러면 저 죽습니다. 그만 살아야지.


자꾸 봉투의 의미가 달라져요. 내가 원하는 의미를 주는게 아니고 내가 낯선 의미가 계속해서 말씀 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이거 지켜서 우리 애들 공부 잘하고 요한복음 봐야지. 왜? 그거하면 애들 공부 잘하겠지. 내가 원하는걸 달라고 하는데 주께서는 내가 그런 너의 행함이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행함과 우리가 하는 행함을 계속 대비를 시켜가지고 이것이 서로 끊어져있음을 확인해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케하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이미 다 이루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일은 항상 뭐로 끝나겠어요? 감사와 고마움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 가운데 필수적으로 나의 고집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착각과 망상을 있는데다 다 노출시킵니다. 그게 뭐냐 내 인생 꼴아박았다. 내 인생 망가졌다. 남한테 남을 통해서 내 인생을 구축하는데 내 친척 앞에 명절날 내놓을게 없네. 애는? 꼴찌했습니다. 주식은? 말아 먹었습니다. 집은? 쫓겨났습니다. 뭔가 내놓을게 없어. 서울에 있는 애한테 너 명절날 안 내려오나? 취직했나? 취직 못 했습니다. 시집은? 못 갔습니다. 내려오지 말아라.


사람은 보여주는 삶을 사는데 이게 명사인데 이게 현실에서 나한테 강요받은 건데 전혀 없는 거예요. 취직 못 해도 내려가세요. 너 왜 그렇게 사니? 나 이렇게 사는 것도 내가 감사한줄 이제 알았어요. 주께서 이렇게 살게 했습니다. 그것 봐라 또 주님 핑계댄다. 네가 게을러서 못 해놓고 네가 실수해놓고 너 음주운전 해서 200만원 물어줬잖아. 그것도 모르지? 이 뻔뻔한 것. 나 뻔뻔함으로 삽니다. 너 음주운전 했잖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러면서 삽니다. 그렇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라 아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찾아오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전달에서 십자가란 단절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는 사랑으로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내 인생에 관여하지 않고 내 인생에서 손을 놔버리게 해주신 그 은혜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