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41강 / 사무엘상 15:1 ( 오지마라) / 180828

정인순 2018. 8. 2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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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취:주향

오지마라 (삼상 15장1-24절)
대전- 41강

이근호


2018년 8월 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1-24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삼상 15: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삼상 15: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 시키니라
(삼상 15: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 15: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삼상 15: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삼상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삼상 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아말렉과 전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우리가 만약 이스라엘 입장이라면 고요하고 조용하게 살기를 원했을까요? 말썽 없이 예수님의 인생이 고요했으면 고요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자기들에게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행한다는 결과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소에 자신들이 원했던 안정된 생활을 그들은 구원이라고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이지요. 자기들이 기대하는 행복이라는 것, (행복 = 구원) 이라고 본 겁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주장했지요. 교회에 나와서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교회에 나와서 행복했다면 구원받은 증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이나 구원이라는 것은 아무 탈 없는 거에요. 안정되고 여유 있는 생활이겠지요.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 때 없는 사람이 착하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까? 있는 사람이 착하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까? 있는 사람이지요. 좀 베풀어도 자기의 생활에 지장이 없을 때 착하게 사는 겁니다. 좀 손해 봐도 마음에 평정을 갖는다면 사람들 보기에 대범한 사람처럼 보이지요.

옛날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가 차를 긁혀서 5만원 정도 손해 봤다고 해서 울고불고 안하지요. 그런데 하루 일당이 오 만원 되는 사람이 오다가 오 만원을 잊어버렸다. 이건 난리가 나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부자가 그까짓 오 만원 가지고 난리를 피우나 나를 봐! 나는 오 만원 손해 봐도 안정되잖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많이 가진 자가 선해요. 많이 있고 여유 있는 자가 착하지요. 자기 집 옆에 교회가 있다면 교회에 왜 나갈 까요? 이유가 빈 마음으로 가진 안을 거 아니에요. 아무 기대나 욕심 없이 교회에 가진 안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5 라면 교회에 나가고 나서 3이 될 리가 없고 7, 8 ,9 ,10으로 늘어나길 기대하며 교회에 나가는 겁니다. 교회에 나갈 때부터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것이 특별히 인간성이 더 나빠서가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 안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동행했던 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동행 했던 자들이 생각한 구원이라는 것은 안정되고 아무 탈 없이 사는 것을 생각한 거에요. 이런 것을 원하는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께선 어떻게 보시냐 하면 낚길 미끼로 본겁니다.


이스라엘이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에 의해서 교회에 나가고 나서 더 행복하고 아무 탈 없고 가정이 안정되게 된다는 것을 미끼로 해서 이것을 부숴버리는 쪽으로 가요. 왜냐하면 행복을 생각할 때 인간은 지금의 행복으로 만족하지 않잖아요. 지금의 행복이 7이라면 8. 9. 10.. 점점 행복이 높아지는 어떤 노선이, 길이 형성되겠지요. 그런데 이 길의 끝은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은 이 길 말고 네가 원하는 길에는 천국이 없다는 겁니다. 넓은 길에는 천국이 있습니까? 없지요.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는 이유가 그 만큼 행복해지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고생이 많아요. 그래서 아무도 그 길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 하시게 되면 가기 싫은 길도 억지로 가게 만들어요. 인간이 현재에 만족하는 하느냐 하지만 인간 자체가 이 땅에서 나름대로의 흔적을 남기려 하는 존재입니다. 너 어디로 갈거냐? 하는 겁니다. 이렇게 가면 안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길을 갈 것이다 라는 의도를 강제로 꺾어 버립니다. 주님의 인도함 때문에 안가고 싶은 길도 주님이 동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야될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쪽 주님의 길로 가게 되면 인간은 뭐를 포기해야 됩니까?

자신의 행복과 구원은 포기해야 되지요. 그래서 인간은 구원 될 자격이 없습니다. 행복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들의 본심이라는 것은 인정해요. 누구나 태어나면서 행복하고 싶은 것은 본심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는 이유 때문에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 헌금하면서 은근히 노리는 것, 이 모든 것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것 관리해서 열심히 교회 다니고 헌금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향을 이용해서 오히려 그것을 꺾어버리십니다. 좌절시키지요.


좌절시켜서 주님이 가는 길로 가게 하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잘못된 길로 가는 이유가 뭐냐하면 자신의 구원 때문에 설정했잖아요. 그러면 이 쪽 길은 무엇을 포기해야 되요? 내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은 접어야 되요. 포기해야 되요. 이쪽 길은 나와 관련된 곳이 아니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길이 되요. 하나님의 이름은 한자로 하면 주가 되고 주가 주되심에 다 이루셨다는 그 길. 그 길로 이스라엘이 강제로 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주가 주되심을 드러내며 가는 그 길이 주님께 인도함을 받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의도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대척 관계, 반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되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주께서 안 들어 주시는 거에요. 내가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에가 군대에서 훈련받고 좋은 곳을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안 들어 주시는 거에요. 아침에 눈 뜨면 우리가 기대하는 게 있잖아요. 그 기대가 내가 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에요. 만약에 내 기도대로 된다면 나는 악마와 동행중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중이 아니고 악마는 인간을 격려만 하면 되요. 격려하고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격려만 하면 되요. 7번 넘어져도 8번 일으켜서 힘내라!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열심히 기도해라! 이게 악마가 하는 일이에요. 네가 가는 길이 내 길이야! 이게 악마가 하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네가 가는 것은 네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건데 이것이 같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행하면서 아말렉이라는 종족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무 탈 없이 안정되게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주의 길에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하고 싶었던 전쟁이 아니에요. 전쟁에서의 승리 보다 더 좋은 것은 아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 더 좋아요. 아프다가 건강해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안 아픈 게 더 좋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의 인생에 스크래치가 나지 않는 것.


깨끗하게 구두 닦고 나면 반들반들 하잖아요. 그것처럼 내 인생도 항상 윤기 있고 기름지고 아무 탈 없이 흠집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기를 원하지요. 백설 공주처럼 그런데 계모 만나서 작살나지요. 나중에 공주가 아니고 거지처럼 됐지요. 그래도 (난장이들이) 위해 주잖아요. 어디가도 예쁜 건 티가 나! 백설 공주가 예쁘지 않았다면 이웃 나라의 왕자가 반했겠어요? 안 반했겠지요. 그런데 성경이 재미있을까요? 백설 공주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까요? 백설 공주 이야기겠죠. 보세요. 자기 행복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이 뭔가 잘못 고른 것이 아니에요. 잘못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자기가 고를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거 할래? 저거 할래? 하나님이 물어도 이미 자기가 정해져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내가 안 고를래야 안 고를 수 없지요. 그러나 내가 원치 않은 것을 고르려 하면 반드시 주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이미 자기 마음에 정해진 것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 마음이 바로 악마의 성품입니다. 나만 잘되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천국은 내가 살기 좋은 나라가 천국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아 봤잖아요. 살면서 천국을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세상 경험입니까? 기억나는 것이 지금 한번 돌아다보세요. 줄곧 기억에 남는 것이 천국 경험이에요? 이 세상의 기억입니까? 세상 기억이지요.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생각나는 것이 세상 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을 선택합니까? 기껏 아는 것이 세상이고 세상에서 좀 더 잘 살고 잘 되고 여유 있는 것 그런 것만 머릿속에 가득 들었는데 어딜 가요? 참! 거짓말도 무슨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더울 때 죽고 싶습니까? 아니면 에어컨 팡팡 트는 곳에 가고 싶어요? 덥다고 죽고 싶지 않아요. 에어컨 있는 곳에 가서 더 살고 싶어요. 인간은 자기 욕망에서 스스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악마가 심어준 성품에서 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탈출할 때 알아서 탈출하라는 것이 아니고 탈출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동행하지 아니하면 너는 내가 있다는 것이 귀찮고 짜증스럽고 힘들더러도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로 데려 갈 때는 군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서 엉망이 된다하더라도 그렇게라도 주님께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악마의 성품에서 조합된 거에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지 누구 좋으라고 하는 세계는 안 가려고 해요. 남 좋은 일 시킬 필요 없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바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 길 이거든요. 십자가로 갈 때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15세기에는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철학자가 연구를 스스로 해봤어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데 단 하나만 의심 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것이 옥수수일까? 과일일까 사과일까? 의심할 수 있어요. 저것이 바나나이냐? 사과이냐를 의심할 수 있고 지금 내가 꿈에서 사과를 보는 것인지 현실에서 보는 것인지 의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따져도 의심 할 수 없는 게 하나가 뭐냐 의심하는 나는 의심 할 수 없다입니다. 꿈꾸고 있는 나는 의심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마저 의심하라는 겁니다. 나마저 의심하라는 겁니다.


이게 가능해요? 불가능해요? 불가능한 거지요. 사무엘 상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한다고 했습니다. 동행한다고 할 때 이스라엘 쪽에서 보면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동행해 주니까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게 있어요. 잘 되는 것. 내가 잘 되게 되면 나만 잘되는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가정이에요.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나에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숫자가 늘어나지요. 그렇다면 나라는 가정도 내가 잘되는 이상으로 가정도 잘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기가 농사를 짓는다면 간 고등어는 언제 먹습니까?

농사짓는 나 말고 옆에 자기 직업에 전념하는 사람 하나 있어줘야겠지요. 물고기 잡는 사람도 있어야 되지만 옆에 통닭 튀겨주는 사람이 있어줘야 가끔 먹어줘야 되잖아요. 안 좋은 기름이지만 스트레스 받을 때 콜라와 함께 먹으면 맛있거든요. 또 먹는 것만 있으면 안 되고 가끔 노래방에 노래 부르러 가게 노래방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러니까 이 집단 자체가 결국은 나와 내 가정을 위해서 필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치킨 먹고 싶을 때 치킨 먹게 해 주시고 고등어 먹고 싶을 때 고등어 먹게 해 주시고 배고플 때 밥 먹게 해 주시고 내 자식은 나 이상으로 잘 생겨야 되고 튼튼해야 되고 나보다 더 공부 잘해서 유명한 사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각하는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 전혀 차이가 없는 거에요. 그것을 행복이라 하는 것이고 그 행복이란 미진한 것을 마저 채워줄 때 극대화 되겠지요. 극대화 된 향복, 내 가정이 극대화로 되고 이웃이 잘되면 나도 덩달아 잘 되는 것 같지요.


내가 북한에 사는 것보다 미국에서 사는 것이 더 낫지요. 왜냐하면 미국은 잘 살고 북한은 못 사니까 그래서 북한에서 빠져나와 미국으로 망명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추가되는 행복을 기대하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천국까지 가게 해 준다면 이렇게 고마울 수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뭘 받는다고 아까 했습니까? 복을 받는다 했지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복이 뭐냐 하면 그냥 잘 되는 겁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충만이라고 하지요. 또는 팽창, 이것이 창세기 1장에선 복이 넘치는 거에요.


양적으로는 번식이고 질적으로는 의로움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우다고 했지요.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저주는 죄인에게 주어지고 저주의 반대는 영생인 낙원이 주어지겠지요. 영국 사람들이 미국의 인디언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들이 원한 것은 전에 살 던 것보다 더 풍족하고 팽창하고 자식이 번식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청교도인들 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그대로 연장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되려면 땅이 있어야 겠지요.


땅에서 잘 된다는 것은 뭡니까? 이미 그들은 경험했다고 보는 겁니다. 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 보는 게 다 땅이잖아요. 대전에서 태어나면 다 대전 바닥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이 오심으로서 제공되는 추가적인 그 무엇, 하나님이 없을 때 보다 하나님이 오심으로서 추가되는 행복 + 행복이 되겠지요. 아무 탈 없는 안정된 여유 있는 생활, 그것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현재 인간과 천국 사이에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서 천국을 이룬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뭐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것을 아까 길이라 했어요. 그 길에 있어서 인간의 소망과 기대가 하나님이 추가해서 개입함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 질 때 그 나라를 천국으로 본겁니다. 내 행복의 극대화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상 동행하니까 인간들이 이해하는 그 길 말고 다른 길을 제시 하시지요. 다른 길을 제시하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은근히 구원을 원했는데 인간의 구원을 말아먹는, 인간이 구하는 구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다른 길을 인도해요. 그것이 뭐냐하면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모든 기억은 천국에 대한 기억이 아니고 내가 잘 되는 기억이지요?


내가 잘 되는 기억은 자기를 의심해 본적이 없는 나는 잘 살아야 돼! 왜? 나는 괜찮은 존재니까. 그래서 아까 데카르트 이야기를 했는데 데카르느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했지요. 이게 옥수수이냐? 아니냐? 이게 옥수수는 맞는데 이게 꿈속에서의 옥수수이냐? 있느냐? 내가 현실에 있느냐? 꿈속에 있느냐?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뭐라 했어요? 그렇게 의심하는 나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우리에게 뭘 요구하십니까? 너를 의심해라! 너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라.


그냥 자신을 부인하지 않은 체, 너 자신의 문제 있음을 의심하지 않은 채 따라와 봐야 조작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예수님이 아닌 거지요. 자기의 뜻을 가지고 주님을 붙들어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야기 한 바로는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지옥 가는 거에요. 하나님께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데 인간과 천국 가는 그 길에 예수님이 아무 탈 없이 안정되게 생활하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 민족이 나와요. 아말렉과 전쟁하는 거에요. 전쟁을 하면 인간들의 아무 탈 없음이 깨지고 소박한 꿈도 다 깨져요.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전쟁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다.

전쟁하는 길을 가면서 평소에 남들과 경쟁하잖아요. 전쟁할 때 빈손으로 못나가잖아요. 준비한답시고 마련 한 것이 뭐냐하면 기껏 자기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된 기술들, 요령들, 지혜 등을 동원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으로 주님이 붙이신 적들을 이기지 못해요. 전쟁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붙이신 전쟁에서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선 백전백패에요.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패배한다는 뜻이고 구원에 실패하는 거에요. 이것은 애굽에서 나와서 도로 애굽에 갇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이유는 애굽에서 나온 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일이라는 거에요. 니 보기엔 애굽에서 나왔으니 두 번 다시 끔직한 애굽의 포로된 생활을 하지 않게 하시겠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되풀이해요. 타임 루프라고 하는데 시간이 고장나게 되면 분명 하루를 보냈는데 이튿날이 되면 또 그 날이에요.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시간이 자꾸 반복이 돼서 제자리인 거에요. 하루가 지나면 지나야 되는데 계속 제자리가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이 제자리 뛰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행하시는 주님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동행 당하는 인간은 과거도 잊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가는데 동행하는 주님은 시간이 계속 맴돌아요.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위주가 아니고 언약 사건 위주이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이 동일하게 벌어지지 않으면 늘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언약적 원칙의 효과입니다. 똑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게에요. 어제가 8월 27일이지요. 오늘은 28일이라 분명히 달라져야 하는데 아침에 눈뜨면 8월 27일이나 8월 28일이나 주님은 똑같이 취급하는 분이 주님입니다. 분명히 달라졌고 애도 그 만큼 컸고 강아지도 늙었지만 모든 게 변해 시간이 흘렸다는 것을 알지만


나도 거울 보면 늙었다고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외형을 전혀 보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 길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행 하시는 주님의 자기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자기 목적은 어떻게든 자기 백성을 천국에 넣어 주시는 거에요. 그 전제가 뭐냐하면 우리는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포기해야 되요. 구원을 포기해야 됩니까? 나를 포기해야 됩니까? 나를 포기하고 자기를 의심해야 되요. 자기를 잊어 버려야 되요. 맨 정신으로 자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는 거에요.


누구와 편하게 이야기 할 때도 전제가 뭐냐하면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서 이야기 하지요. 내가 이렇게 들었는데 너에게 전한다. 들은 것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것이 문제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들은 나마저 문제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 못해요. 의도가 그래요. 끝까지 자신을 포기 못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 언약 법칙이 요한복음 6장 66절을 읽어 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라고 했는데 오게 하여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오지 못한다 했습니까? 예수님께로지요.

(요 6: 66)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기억이 아니고 내 위주로 살려는 세상 기억 밖에 없어요. 세상 기억 밖에 없는 인간이 무슨 천국을 가고자 해요? 자기가 아는 것은 세상에서 버틴 것 밖에 아는 게 없는데 이렇게 해서 내가 살고자 하는 기억 밖에 없는 인간이 어딜 가요? 주님이 좋다고요? 자기만 좋아하며 살아온 기억 밖에 없는데 내 좋은 것을 포기 못 하는데 가긴 어딜 갑니까? 콩고 말도 못 하면서 콩고에 가는 거하고 똑같은 것이지! (웃음) 전혀 말도 못하면서 가요? 죽으려고 가요? 탄카니카에 가서 죽을 라고?그래서 오늘 제목을 오지마라라고 정했는데 천국에 오지마라는 거에요.

지금 천국을 가겠다는 게 문제가 되요. 자기를 포기 못하고 자기부인도 못하면서 내 가정, 내 새끼, 내 남편도 포기 못하면서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천국이 그렇게 만만하니? 오지마란 말이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지마라를 알려 주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오지마라! 이게 선교이고 전도에요. 오지마라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그럼 누가 갈 수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게 한 자만 온다입니다를 전하는 거에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 못해요. 부인 못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힘이 스스로 자기 부인 못하는 것을 깨뜨려서라도 천국에 오게 만들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이고 능력입니다.

천국에 오지마라! 입니다. 그러면 어디가요? 지옥에 가야지! 너는 너 밖에 모르기 때문에, 너 밖에 모르는 인간은 그냥 지옥에 가야 되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대상은 하나인데 자기의 사랑을 유지 하면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소유라고 해요. 다들 결혼 할 때 소유 해봤지 않습니까? 언제 사랑했습니까? 소유하는 것이지 남편이 돈도 좀 잘 벌고, 직장이 안전하니까 저 남자 같으면 소유할 가치가 있다. 입을 보니 귀엽게 생겼네! 소유하잖아요. 남자도 보니까 애 잘 키울 것 같고 음식 솜씨 좋고 어딜 내 놔도 이쁘다하고 말 잘 듣고

정숙하게 직장도 안 다니고 시집 갈 준비만 해 가지고 그 가정을 보니 그 어머니가 남편만 잘 위하는 것을 배웠으니 얼마나 나를 잘 위하겠는가! 그런 착각에 의해서 그 여자와 좋다고 하지요. 조건과 조건의 만남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한 거에요. 소유가 안 되는 경우는 내 몸에서 자식을 낳을 때 소유가 아니라 소유 당하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소유합니다. 인간이 절대적 자기를 믿는 한 예수를 믿어도 소유이고 하나님을 믿어도 소유이고 삼위일체나 교회도 모두 소유에요. 진짜 교회는 침목 단체가 아닙니다. 친목 단체는 헌금을 할 때 보람을 느껴요.


왜냐하면 그 헌금이 나에게 편리함과 칭찬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헌금 할 보람이 생겨요. 그런데 어떤 교회가 천국을 외치고 오지 마라를 외치는 교회에 헌금을 한다면 그 헌금은 마치 길을 가다가 창문을 열고 돈을 뿌리는 것과 같아요. 헛돈 날린 거에요. 왜냐하면 아무 보람이 없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헌금 하는 것이 죄라고 하니 누가 기분 나빠서 하겠어요? 그래서 천국과 교회는 오지 마라니까 왜 왔어? 그러면 그 쪽에서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가 보냈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되요. 니가 뭔데? 아버지가 보냈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께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로,

왜냐하면 인간은 가고자 할 떼 이미 네 중심에서 미래를 천국이라고 오해하거든요. 그래서 천국은 아버지께 오리는 말이 아니에요. 아버지께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보내 버리지요. 예수님에게 네가 경험하지 않는 것, 네가 체험 하지 않은 것, 네가 몰랐던 모든 천국은 예수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주 천국은 이와 같다, 천국은 이와 같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천국은 이와 같다고 하는 당사자가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천국이에요. 천국에 갈 사람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내용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막상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요. 보아도 알지 못 하지요. 아무도 몰라요. 포도원 같은 경우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포도원에서 일을 시켜놓고 품삯은 나중에 온 사람하고 똑같이 줘 버려요. 이 세상을 뒤집어 버려요. 우리가 이 세상에 얼마나 충실하고 태어 날 때부터 온갖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상식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 위해서 합세했던 모든 이론은 천국의 이론과는 정 반대되는 것을 실컷 배운 거에요.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애가 있으면 애를 키운다거나 손자를 본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모든 일들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래서? 자! 실컷 애도 키우고 일을 했다 한다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한 기억이 남지요? 내가 키웠다는 것. 내가 군대도 보내고 고생하며 다 키웠다. 계속해서 내가 지워질 수 없어요. 그렇지요. 결국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땀 뻘뻘 흘려가며 일해도 결국 남는 것은 천국이 아니고 땅에 대한 미련이고 나의 행복이에요. 집착이고 그거 해서 뭐하게? 그거 해서 실컷 지옥에 가란 말이죠. 거기에 몰두하고 온갖 마음과 몸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고 영혼을 다해 오직 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 했다면 가라! 지옥으로,


그런 식으로 지옥에 가란 말이죠.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마음은 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천국에 갈 수 없어요.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요. 우리 힘으로 변화가 안 된다니까요. 내가 열심히 한 나를 어떻게 미워해요? 광고 CF에도 나오잖아요.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떠나요~ 둘이서 제주도 푸른 밤으로~ ) 제주도 요새 험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생각해도 제주도로 놀러 가나 지중해로 놀러 가나 태국으로 가나 가봤자 거기 누가 있어요? 내가 있잖아요. 사랑하는 내가 있잖아요. 내가 끼어들면 지옥입니다. 어딜 가도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내가 끼어들면 그 순간 망치는 겁니다.

집에서 하던 행세, 집에서 새던 바가지 어딜 가도 안 샙니까? 갈 때부터 싸우던 것 올 때까지 싸우고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벗어나요? 안되지요?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고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거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아무도 올 수 없단다. 이게 전도에요. 사람 꼬시는 게 전도가 아니고 사람들 꼬셔봐야 얼마 안가서 본색 드러나고 다 가요. 자기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 안 해주면 삐져서 다 도망 가버려요. 교회라는 것이 허상입니다. 사람들을 모았다. 어떤 인간들을 모았는데요?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놨는데 그게 무슨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아말렉을 붙여 줍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어요. 진멸이 뭐냐하면 ‘파괴’라는 방식의 예배에요. 이게 진멸이에요. 내가 누구를 잔혹할 정도로 지근지근 밟아 놓는다. 그러면 그렇게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하겠지요. 내가 이토록 잔인했었는가를 생각하겠지요. 하나님이 아말렉을 완전히 짓밟아라! 심지어 갓 난 어린 애 까지 다 죽여 버려라! 가축이며 모든 것을 다 죽여 버리라 하거든요. 그것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해요. 신명기에도 나오고 민수기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은 다 죽여 버려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다 죽임으로서 이스라엘도 마땅히 죽어 줘야 되는데 거룩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으로 깨닫는 거에요? 집에서 자상한 아버지와 함께 공원에 갔는데 가면서 강아지도 데려 가는데 평소 강아지를 굉장히 예뻐해요. 그런데 공원에서 아버지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을 몰랐던 거에요. 예를 들면 강아지가 쫄랑쫄랑 다가오니까 갑자기 안 하던 욕을 하면서 돌로 개를 쳐서 피를 내고 박살 내놨다. 그럴 때 누가 무서워하겠어요? 평소에 그런 면을 못 봤던 가족들이 저게 아버지의 또 다른 진심인지 언제 아버지가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겁을 내겠지요.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싹다 죽여라! 그게 나의 예배이다. 봉헌, 진멸이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잘한다! 내 자식 잘한다! 네가 날 닮았구나! 그런데 막상 진멸에 나서는 인간의 입장에선 눈에 뭐가 보입니까? 눈에 밟히지요. 애들을 볼 때 누가 생각나겠어요? 내 애를 생각해서 차마 못 죽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기를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아말렉과의 전쟁이 아닌 거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아느냐?” 네, 좋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서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고뢔? 진짜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그런데?”제가 안 그래도 착하고 구한 하나님을 원했는데 정말 이렇게 저희에게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네가 왜 착하고 훌륭한 하나님을 왜 원했는데?” 제 품성이 원래 착하기 때문에 제 품성보다 더 착한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 니 품성이 원래 착하냐?”하지요.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누굴 자랑하는 겁니까? 이런 하나님을 믿을 정도로 나는 착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자기 자랑하는 세계,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이게 지옥이에요. 다시 말하면 천국은 어떤 세계냐 하면 나의 착함을 안 받아주는 세계에요.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버지께서 떠밀어서 온 사람들의 집합이 천국입니다. 내가 차마 갈 수 없는 세계에요. 정리하자면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아말렉에 있는 강아지까지 작살내라 했을 때 그대로 작살낸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없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어요. 왜? 다들 착하기 때문에 인간은 왜 자기를 사랑합니까? 자기 속에 차마 내칠 수 없는 귀한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가끔 자기가 미워질 때도 있어요. 그건 뭐냐하면 예상 밖으로 남에게 실수하게 됐을 때 말하자면 뮤지컬 연습 늦게 끝나서 술 한 잔 먹고 그라이슬러 외제 차타고,

자기가 운전하고 20대의 배우가 두 명 같이 타고 가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갓길에 세어둔 트럭을 박아 버렸어요. 원래 악한 사람이 아닌데 부자처럼 여유 있는 사람이 착하게 되어 있어요? 아니에요? 착하게 되어 있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 하면 박해미(뮤지컬 배우) 있는 거에요. 음주 운전해서 두 명 죽고 세 명 다친 이야기. 그런데 그 남자가 아주 부자 아닙니까? 유명한 부자. 그 사람이 술 먹고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였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술 많이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유명한 아내는 이 죄를 어떻게 다 씻을 까하며 통곡을 했다잖아요.


그 날이 바로 우리나라 축구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가 아시안 게임에서 4강에 올라간 날이에요. 축구가 이겨도 문제는 남들이 아무리 잘 된다 하더라도 내게 사건이나 일이 벌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지옥이 되지요.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들이 음주 운전으로 사고 나서 죽든 말든 내 땅 값이 100배 올랐다면 내겐 천국이에요. 이런 시고 방식 가지고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만 기억해요. 어딜 가요? 천국 못 가요. 천국은 그냥 나를 잊어버리고 잘했든 못했든 내 잘못을 짓밟아 버리고 예수님만 잘되면 좋습니다가 천국에 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실수 없잖아요. 남편은 음주 운전해서 수 억 날라 가게 되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은 아무 문제없잖아요.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가 되려면 우리에게 뭐가 일어나야 되요? 내 것이 와장창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게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 길로 인도하는 거에요.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전쟁이 일어나요. 어떤 전쟁? 내 잘났다가 박살나는 전쟁이 일어나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사람이 술 먹고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니지요.

어떻게 실수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맨 날 음주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건이고 박살내는 전쟁이에요. 누구는 그 일이 고소하다고 여기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감사합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하고 원망하겠어요? 이것을 주일 오전에 과도한 처벌이라고 한 겁니다. 평소에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박해미나 그 남편도 평소에 많이 베풀어 줘요. 배우들을 자기 딸 같고 동생 같다고 이야기 했어요. 얼마나 베풀어 줬겠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베풀어 줬는데 이 사단이 났잖아요. 그럴 때 자기가 한 행위보다 기억하는 자기 인생보다 더 과도한 처벌이 주어 졌지요.

그러나 그것을 격어야 되요. 우리가 그게 십자가 은혜에요. 평소에 네가 뭐 때문에 감사했냐는 거에요. 십자가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말로는 잘 하지요. 그 십자가는 뭐냐하면 내가 부인되지 않는 가짜 십자가, 가짜 예수란 말이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게 위해서 십자가의 진짜 체험, 예수님이 목숨 받쳤잖아요. 우린 목숨 안 바쳤잖아요. 그러한 경험을 체험케 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인생이 쪽 났다는 것. 오늘 제목을 쪽? 오지마라로 정합시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