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8:20-23 / 약조물

정인순 2018. 7. 2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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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조물

 

이근호
2018년 7월 25일     

 

       

본문 말씀: 창세기 38:20-23

(38: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38:21)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38: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38:23)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인간은 자기 위주로 세상관을 펼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는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자기 세계에 들어오면서 자기 형편들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약속이, 기존의 자기 세상관과 현실관을 더 낫게 만들 것이라고 여깁니다.

유다도 그런 보통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자기 가정이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가정이라는 사실보다는 ‘나의 가정’이라는 점에 충실합니다. 며느리 하나 자기 집안에 들어와서 아들 둘을 죽게 했다면 이는 곧 ‘재수없는 며느리’라고 낙인 찍을 만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마저 거들낼까봐 유다는 자기 며느리를 자기 면전에 사라지게 합니다.

이는 곧 남은 셋째 아들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곧 자기 가정을 건사하는 방식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즉 ‘소유를 통한 자기 인생 확보하기’에 충실한 겁니다. 하지만 며느리 다말은 이 집안에 내려진 ‘언약’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일반 가정과는 달리, 언약으로 복 받은 가정이기에 언약이 우선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즉 자신과 혼인한 이 집안 남자들이 죽게 되는 것은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언약을 살리기 위한 복의 일환으로 보았던 겁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런 며느리를 자기 집안에 사라지게 했습니다. 소유적 관점에서 형성된 자기 세상관에 입각해서 이런 조치를 내린 겁니다.

하지만 그 소유성에 근거한 현실관 속으로 언약에 충실한 며느리의 언약적 현실관에 침투합니다.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만나고서는 약조물을 받아냅니다. 이런 약조물의 구성은 소유와 소유의 교환의지로 이루어진 겁니다. 즉 창녀는 몸을 주고 구매자는 재물을 주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의 소유적인 현실관에 접속합니다. 그리고서는 그 약조물의 구성원의 입장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약조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동네에는 창녀가 원래 없습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깟 약조물을 되돌아 받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평소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약조물을 구성한 그 며느리 다말은 그 약조물의 자신을 전부를 다 넣은 것입니다. 언약적 가정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가치 전부를 다 집어넣어놓고서는 시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약조물)을 인간 쪽에서 소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원해도,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원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갈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인간들이 원한다고 해서 그 정성과 성의와 심상을 가상이 여겨 봐주는 식으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구원 의지 속에는 ‘소유하므로서 형성되는 나’라는 의식이 강력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나 약속을 내가 소지하므로서, 그 소지된 언약으로 천국 입성에 합격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언약은 소지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발목잡힐 언약이 아닙니다. 도리어 언약은 인간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인간쪽에서 아무리 찾고 아무리 발견하고 가지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 언약입니다.

유다에게서 사라진 그 다말이, 다시 유다에게 나타날 때는 이번에 유다의 인생관이 바뀌게 됩니다. 즉 사라짐을 당한 자가 도리어 자신을 버린 자를 찾을 때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미움을 받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언약의 완전체가 되는 겁니다.

유다는 자기 세계관을 유지하면서 다말에게서 약조물을 되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말의 전부가 들어있는 채로 약조물을 되돌려받으려면 유다는 이 약조물에 의해서 그동안 자신의 모든 세상관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약에 준해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실 때는 그 인간의 모든 세상관을 파괴하고 해체하고 심판해버리십니다.

마치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도마가 예수님을 만날 때, 그는 예수님의 손에서 못자국을, 그리고 옆구리에서는 창자국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가해자의 피해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에 의한 피해자라는 인식은, 자기 위주의 세상관을 포기했다는 말이 됩니다.

약조물 중심으로 다말은 시아버지와 부부가 됩니다. 이는 곧 기존의 예상된 부부가 아니라 다른 가치체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단순한 남녀의 만남으로 형성된 부부가 아닙니다. 사라진 자에 의해 찾아지게 된 자 끼리의 만남입니다. 이 사이에서 ‘사라짐’이 부각됩니다. 언약이란 인간의 소유성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비켜갑니다. 언약 안에서 인간은 피해자만 발견할 뿐입니다. 자신의 비-언약적 세상관으로 인해서 ‘필요없는 자’로 낙인찍혀서 배척당하신 바로 그 분에 의해서 되찾음이 될 때만 구원이 됩니다. 기존의 ‘가진 것으로 구성되는 내 인생’이라고 우기는 자를 찾아주시는 겁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여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정을 분해 한다고해서 남자와 여자로 환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형성을 만드시고 입으로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리 그 흙이 흙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인간=흙+하나님의 숨결’로 분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가정=남+여’이라고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란 남자와 여자의 만남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제 3의 세계임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헤어지도 가정을 맛본 기쁨과 아픔을 여전한 겁니다.

이처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혼인은 단지 ‘가정 살리기’가 아니라 ‘언약 살리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파괴시키는 현장에 이러한 ‘낯섬’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제단의 제물이 아무리 바쳐서 불에 다 사라지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애쓴다할지라도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성에 의해서만 구원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가졌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8강-창 38장 20-23절(약조물)

1807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20-23절입니다. 구약성경 59페이지입니다.

창 38:20-23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유다가 딤나로 내려가서 창녀와 관계를 맺었는데 그 창녀에게 값을 주기 위해서 염소새끼를 주도록 약속을 했고 그 염소새끼를 정말 줄지 안줄지를 확정짓기 위해서 나중에 염소새끼가 왔을 경우에 염소새끼와 바꿀 수 있는 약조물을 미리 건네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 이 세 가지를 그 창녀가 가졌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집에 돌아가서 염소새끼를 가지고 온 겁니다. 염소새끼 가지고 창녀에게 주려고 온 동네 돌아다니지는 않을 거잖아요.

동침한 값을 뒤늦게 염소새끼로 지불하기 위해서 주고 자기가 맡겨놓은 약조물을 되찾기 위해서 자기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동네 창녀를 찾았는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답니다. 그러면 허깨비하고 동침한 거예요? 어떻게 된 거지요?

그래서 친구가 유다에게 와서 창녀가 없더더라, 당신이 갖고 있는 약조물을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고 하니까 유다가 하는 말이, 나는 어쨌든 염소새끼는 줬으니까 나한테 잘못은 없다고 하는 그 대목을 우리가 지금 봤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어떤 내용으로 일을 하고 계신가, 하는 그것을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 지금 어떤 일을 합니까?”라고 물어봤자 별 소득 없어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약과 관련된 인사들, 하나님의 언약이 제공된 그 사람들이 뭔가 활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 활동하는 가운데서 특이한 사항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 특이한 사항이 곧 하나님의 뜻이에요.

여기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인물은 유다가 되는 겁니다. 유다 이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하는 거예요. 평소에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한다는 것은 언약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니까 유다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사는 겁니다.

이걸 세자로 ‘막 산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그냥 막살아요. 막 사는데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되어진 사람입니다. 언약과 관련된 사람이 이 땅에서 그냥 편하게 남들 살아가는 것처럼 살 때 거기서 어떤 특이점을 알아내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는 어떻게 살았는가? 유다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요. 자기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오늘 약조물을 통해서, 또는 염소새끼를 통해서 볼 때 어떻게 살아가느냐?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겁니다. 누가 자기에게 봉사했으면 거기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겁니다. 값을 치르고 얻을 것은 얻고.

유다라는 사람을 일반사람으로 보면 돼요. 일반적인 사람 유다는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하면, 가지는 형식으로 행동에 나서요.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는 더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있는 것은 보존하고 없는 것은 더 가지고. 소유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와 약속을 할 때는 저쪽 가진 것 하고 이쪽 가진 것 하고 교환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시키는 거지요. 만남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거 내놓을 테니 당신은 뭐 줄래, 하는 이것은 당신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내놓는 겁니다.

창녀는 몸을 주고 유다는 자기 가진 염소새끼를 주겠다는 것. 그래서 형성되는 것이 뭐냐? 약조물이에요. 오늘 설교제목이 ‘약조물’인데 약속물, 약조물이 되는 겁니다. 약조물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유다의 평소의 생활관과 현실과 세상 보는 관점, 그게 약조물 안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상대방 창녀도 뭘 받고 몸을 허락했다는 점에서 유다의 생활관, 현실을 보는 눈과 창녀의 보는 눈이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합니다. 동일하니까 서로 거래가 형성된 거지요. 창녀를 부인으로 삼을 그런 생각은 없고 서로 갖고 있는 것 교환하는 방식이 곧 인간이 살아가는 거예요.

목사는 설교하고 교인들은 헌금하고, 그거잖아요. 그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떤 특이점이 없어요. 아무런 특이점이 없습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은 받고. 그리고 각자 돌아서게 되면 자기삶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갖고 있는 것의 총집합’ 그것이 자아고 자기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흔한 인간들의 삶의 관계를 유다는 계속 견지합니다. 계속 이어나가지요. 염소새끼를 가져왔으니까 약조물과 교환하기 위해서 창녀를 찾는데 이 창녀가 없어요. 창녀가 없습니다. 창녀가 없으면 유다의 약조물의 일부가 사라진 거예요. 둘 사이에 약속한 것인데 그 약속을 형성하는 요소에서 한쪽이 없으니까 약조물 자체가 형성이 안 되어버린 겁니다.

약조물이 깨진 거예요. 자기 것을 받으려고 하니까 사람 자체가, 약속한 상대가 없어졌어요.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목적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것 하나님께 주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챙기면 나는 계속해서 내 것으로 유지할 수 있고 견지할 수 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이겁니다. 그게 일방적인 신에 대한 개념이고 그것이 곧 우상이지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언약을 이 땅에 펼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약속이죠. 언약이 형성될 때 과연 언약이 어디에 있느냐? 여기서 사람들은 또 언약을 가지려고 해요. 평소에 버릇이 뭔가 좋은 것을 가짐으로서 내가 현재 내 존재를 더 좋게 만들겠다는 의식으로 평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다가 죽어서 어디가지? 천국. 그러면 천국을 가지려면 내가 이 땅에서 뭘 가지면 되지? 예수 믿으면 된다. 옳지 예수 믿고 나 천국갈래. 이게 평소에 하는 거예요. 평소에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도 같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으로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 없는 일상적인 인간들의 모습이지요. 종교생활이란 그런 거잖아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데, 쉽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원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의 버릇이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원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당연히 나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당연히, 인간이 이렇게 성의를 표시하면 하나님도 성의를 표시해줘야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고 그게 하나님의 정상적인 활동이다, 미리 그렇게 짐작해버려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찾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찾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지옥이지요. 성경은, 신약성경은 특히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찾아내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수가 없다고 했어요.

교회 어떻게 할 거예요? 교회 가면 다 하나님 찾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찾아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찾지를 않습니다. 그 원리가 언약의 원립니다. 인간이 창녀를 찾지요. 창녀는 없어요. 창녀는 없습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정당성, 자기는 할 도리 다 했다.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었다고 우기는데 약속당사자가 사라졌습니다. 없습니다. 그 동네에 창녀가 없어요.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데 정작 하나님은 없어요. 사라졌어요. 어떡할 거예요? 50년 교회 다니고, 60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 다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혼자 소꿉놀이 했어요. 교회라는 것 만들어놓고.

교회 만들어놓고 교제하고 교육하고 예배드리고 선교하고. 교회 4대 요소는 다 해놓고. 4대요소는 다 했는데 하나님이 찾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 교회는 캠핑장소지요. 노는 장소지요. 하나님이름 가지고 노는 장소에요. 왜 그렇게 새벽마다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찾는지. 정작 하나님은 사람을 안 찾아요.

안 찾겠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안 찾겠다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천국을 갑니까? 못 가지요. 오늘 언약의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버린 자가 도로 버린 자를 찾는 그 내용이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8장 11절에 보면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시아버지가 자기 앞에 있는 며느리를 사라지게 했어요. 없애버렸어요. 친정에 가서 수절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 며느리는 없는 거예요.

유다의 평소의 현실관, 하나님관, 언약관, 유다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생활 속에는 며느리가 빠져야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며느리가 있어버리면 유다의 현실관에 지장이 된다고 유다가 생각한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며느리 다말은 비록 이방여자지만, 아버지의 막내아들 셀라하고 혼인시켜줘야 그것이 언약적 현실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들 셋을 자기가 소유화시켰으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소유함으로 살아간다고요. 그런데 셀라마저 잃어버리면 자기는 아무런 살아가는 낙이 없고 이 유다의 인생관자체도 좌절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이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건재하기 위해서 재수 옴 붙은 며느리를 집안에서 내쫓는 거예요.

네가 우리 집에 시집와서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아들 다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겁니다. 옛날에 시가에서 싫어하는 며느리에게 그런 구박을 했잖아요. 어디서 너같은 것이 들어와서 우리 집안을 말아먹느냐고 했잖아요. 집안 말아먹는 여자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다말이 없어져줘야 집안이, 막내아들이 그나마도 살아남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다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자기의 세속적인 세상관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정작 펼치고자 하는 언약적 현실관을 지금 내쫓아버린 거예요. 추방시켜 버린 겁니다.

언약을 받은 유다가정에 언약이 사라져버렸어요. 언약 없는 유다는 세속입니다. 그것은 일반인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하나님이 언약을 준 취지, 의의가 없어집니다. 일반인들하고 똑같아요. 지옥 가는 사람과 진배없습니다. 동일합니다.

다말은 언약을 알기 때문에 우리 시아버지가 언약의 축복에서 배제될 리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시아버지가정은 야곱의 언약의 축복에서, 저주가 아니고 축복 쪽에서 배제될 리가 없고, 그러나 막상 시아버지는 완전히 언약을 내쫓고, 그러면 억지로라도 다말이,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언약 없는 현실관속에 하나의 언약의 움직임으로 삽입되어야 되겠지요. 어떤 식으로라도.

삽입되려면 뭐가 되어야 되느냐? 지금 유다가 언약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며느리와 언약을 내쫓은 이유는 소유방식으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과 동일한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시아버지의 현실관, 언약관속에 삽입이 되려면 그 시아버지의 소유관, 그 사고방식이 파괴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공식 나옵니다. 언약은 파괴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건전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 언약이, 그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현실관을 파괴시키고 심판하는 거예요. 너는 죽은 자다. 너는 살 가치도 없어.

너는 현실을 논할 가치도 없고 천국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가치도 없고 이야기할 권리나 자격도 안 된다는 겁니다. 시아버지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입하고 개입시키는 방식은 아버지가 평소에 하는 방식, 가진 것을 교환함으로서 자기의 일상적인 생활을 지속하려는 그 방식에 며느리가 똑같이 모방해서 거기에 끼어들면서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이 동네는 창녀가 없습니다. 이 동네 창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예수님은 죽었다고 이야기하지요.

사람들이 말하는 죽었다는 의미는 여기 없습니다, 의 다른 표현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제사 드리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래서 교회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반복적인 제사행위를 예배라고 하면서 회상하고 기억하게 만듭니다. 치매 걸릴 때까지.

치매 걸릴 때까지 계속 기억해서 자기는 신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를 기억하듯이 그런 류에 예수님을 포함시켜 버려요. 왜 그런가 하면, 엄연히 살아있는 것은 살아 있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보다 더 살아 계시다는 생각은 사람들 속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 살아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주님이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기인생이라는 말을 끄집어 낼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인생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궈낸 인생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 인생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어디 함부로 입으로 놀립니까? 입에서 나올 수가 없지요.

저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는 말이 못 나와요. 본인만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언급하는 거예요. 아주 어린 자식이 길을 가다가 자기보다 덩치 큰 아이나 험상궂은 아저씨를 만나면 그 애는 그 자리에 그냥 있지 않습니다. 대번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아버지 뒤로 숨습니다.

그게 뭐냐? 그 길은 자기 길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는 길에 자기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해 보여주지요. 그러면 성도가 주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라면 맨 날 예수님 뒤에 숨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일궈나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계획잡은 인생이 아니고 자기가 목적으로 삼는 인생 아니에요.

아버지는 아실 거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아버지께서 아실 거예요. 나는 아버지가 인도하는 대로 갈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어요. 성공실패를 논할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 입장이 되지를 않아요. 유다에게 약조물을 받을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은 약조물 자체가 깨어진 겁니다.

약조물 자체가 깨졌다는 말인데 약조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약조물 안에 유다의 일부가 들어 있어요. 지팡이하고 끈하고 거기에 도장이 들어있어요. 그 약조물 하나 없어도, 도장 없고, 끈 없고, 지팡이 없어도 유다는 삽니다. 그거 돈으로 얼마나 하겠어요?

하지만 이 다말은 약조물 안에 자신의 전부가 들어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예수님의 전부가 들어 있는데 예수님을 약조물로 생각하는 우리한테 예수님은 믿으면 좋고 안 믿으면 그만이고.

왜? 예수님보다 돈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자존심, 내가 가진 금전문제, 내가 가진 자식들, 내가 가진 가정, 내가 일구어낸 내 일생, 과거, 업적, 그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한테 사소한 일부에 불과한 거예요.

예수는 선택과목이지 필수과목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잖아요. 지금 우리가 짜증내는 것은 날씨가 38도가 넘었다는 사실입니다. 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한다는 사실이지 예수님 없어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것은, 사라진 예수님은 에어컨으로도 해결이 안돼요.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은 내 식으로 다 해결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없는 것은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기의 전부를 집어넣은 그 다말의 심정으로 유다의 심령이 변동이 일어나야 돼요.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이유가 나오지요. 언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와 동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완전교체를 하기 위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속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겁니다.

그 완전교체라 하는 것은 무엇에서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는 나의 일부라는 사고방식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전부를 드린 것처럼 그 예수님이 전부라는 맘으로 바뀌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가진 것, 우리의 가진 것으로 일궈낸 현실관이 파괴되도록 유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관, 현실관을 사정없이 파괴하시고, 해체시키고, 부숴버리고, 심판하십니다. 없애버립니다. 고마운 줄 아셔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이 유다는 다말에게 감사해야 돼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약조물을 받아야 될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유다는 자기와 약속한 사람이 날라가 버렸어요. 이것은 유다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이제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전부를 집어넣은 그 약조물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 약조물을 통해서 약조했던 그 상대자가 이번에는 유다를 찾아올 차례입니다.

찾아오면서 어떻게 오느냐? 당신으로 인한 피해자입장에서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당신의 평소의 생활관 때문에, 자기만 챙기면 그만이고, 챙긴것들의 집합이 곧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그러한 일반인들의 사고방식, 지옥 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모든 것을 주고서도 천대받은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뚜벅뚜벅 다가오시지요. 이것이 구약에서는 뭘로 오느냐 하면, 제물로 오십니다. 특히 레위기 6장에 보면 번제가 나오는데 번제물은 올려놓으면 사라지고 올려놓으면 사라져요. 왜? 제단에서 불로서 홀라당 다 태우니까.

올려주면 사라지고 올려주면 사라지고. 이것은 뭐냐 하면, 제물이라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미지인데 하나님의 이미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드려봤자 하나님은 그것 먹고 계속 사라지는 거예요.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인간 쪽에서는.

뭘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편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먹튀입니다. 먹고 날라 가버렸어요. 없어요. 아무리 줘도 그것 다 사라져버립니다. 사라진 예수님, 그분이 진짜 예수님이십니다. 사라진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어요.

가지마세요, 하고 붙들 수도 없습니다. 내 일 도와주시고, 내 몸 건강하게 해주시고, 우리교회 부흥시켜 주시고, 내 가정 잘되게 해주시고, 애들 잘되게 해달라고 붙들 수가 없어요. 인간 손에 붙들리지 않는 하나님. 왜냐하면 인간이 붙드는 것은 그 붙듦으로 자기 인생을 개발하고 이끌고자 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세속적인 것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인간의 육과 영은 어떻게 결합되는가? 오늘 아침에 미국의 아시는 분이, 샌디에고 계시는 분이 그런 식의 질문을 했어요. 집 건축할 때 건축자재 두 개를 붙일 때는 시멘트 발라버리면 돼요. 미국에 계시는 분이 질문을 이렇게 했거든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니까 흙에서 생령이 된지라, 할 때 그 ‘숨’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 질문의 발상이 뭐냐? 흙, 흙이라는 건축자재, 그 다음에 주님의 ‘숨’이라는 건축자재와 접촉이 되게 되면 그것이 인간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건축자재를 시멘트로 붙여놓은 것처럼 인간도 붙여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보면 안 됩니다. 인간은 예상 못할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거예요. 시멘트로 붙여서 두 요소를 하나로 뭉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부부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를 묶어서, 노끈이라든지 수갑으로 채운다고 그게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형사와 범인이 수갑 채울 때 부부지간입니까? 아니지요. 붙어 있다고 부부가 아니에요. 그것은 남자와 여자 두 요소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예상 못한 다른 체계가 형성되어야 돼요. 그게 가정이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창세기 2장에 보면 두 사람이 있는데 그걸 한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한 몸은 두 요소로 된 것이 아닙니다. 두 요소로 분해할 수가 없어요. 분석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분석하려고 하지요? 그 하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내가 예상 못한, 주께서 허락하신, 새롭게 형성된 그것에 관심을 쏟아야 됩니다.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언약이라는 것은 육과 영이 만나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육과 영이 만나서, 세속과 하나님의 뜻이 만나서 언약이 되는데 그 언약 안에서는 세속으로 다시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왜? 언약자체가 날라 가버리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뤘던 가정을 계속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 3의 예상 못한 체계를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자는 사랑 없이 그 남자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 둘 붙어서 가정을 이뤘다면 헤어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남자 입장, 그 가정의 행복과 포근함을 놓칠 수 없는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가정이 깨지는 거예요.

그 좋았던 시절이 날라 가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 만난다고 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떠나간 그 여자가 와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사람에게 왔다가 사람에게 밉상 받고 떠나는 거예요. 정말 천국 가는 백성이라면 떠났던 그분이 와야 돼요.

다른 분이 오면 안돼요. 부처가 오면 안돼요. 나의 죄와 나의 허물을 까발리고 나의 죄 때문에 대신 몹쓸 아픔을 겪었던 그 분이 와야 돼요. 우리는 그분을 기다려야 됩니다. 다른 분은 오면 안돼요. 잘해준다는 부처 이런 것이 오면 안돼요. 축복 준다는 그런 가짜 예수 오면 안돼요.

상처 입은, 손에 못 자국 박힌 그 분이 와야 돼요. 창 자국 있는 그 분이 와야 돼요. 우리는 그분을 기다려야 됩니다, 도마처럼. 그게 약조에요. 그게 언약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 언약의 구체화입니다. 우리는 교회부흥을 기다리면 안돼요. 나의 부자 됨을 기다리면 안돼요. 내 몸의 건강 기다리면 안 됩니다. 가정의 화평 이런 것을 기다리면 안돼요. 내 자식 잘되는 것, 출세하는 것, 그것 기다리면 안돼요.

그것은 기존의 세속에서 세속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그 모습을 보이는 것뿐이에요.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기도에 그런 것이 섞여 나온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에요.

정말 언약 속에 있다면, 언약의 사람이라면 그분이 와야 돼요. 나 때문에 시달린 그분, 나 때문에 지옥의 고통을 받으신 그 분, 내가 갈 필요도 없는 지옥을 홀로 가셔서, 너는 갈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주시는 그분이 와야 돼요.

그분은 우리의 일부가 아닙니다. 전부가 돼야 돼요.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입니다. 그분 없으면 나라는 것도 없어요. 그분이 오신다. 그러면 나는 그분 앞에서 모조리 다 파괴되고 깨져야 돼요. 내 인생? 내 인생이 어디 있어요. 그분의 인생으로 전환되는데.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바로 나의 제물이다. 로마서 12장에 나오지요. 산 제물이 되어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주님 앞에 바칠 제물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갑니다.

제물이라 하는 것은 더러운 거예요. 사실은 더러운 거예요. 더럽지만 어떤 경우에 더럽냐 하면, 깨끗한 주님 앞에서만 더러운 거예요. 우리 주님을 더럽게 보냈기 때문에 더러운 겁니다. 주님에게 고통을 제공했다는 관계 때문에 우리는 죄인된 거예요. 그게 바로 유다가 되는 거예요.

다말을 희생해서 유다를 살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구조, 이 지상에 펼쳐진 펼침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했지만 다말은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잖아요. “유다는 다말에게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아니에요. 이제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없던 새로운 예상 못한 가정이 형성되었어요. 이것은 미친 가정이에요. 이것은 이상한 가정이에요. 무슨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붙었는데 그것도 당당한 언약적 가정, 가정구성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는 추방시킨 자요, 또 하나는 추방시킨 자를 찾아오는 분, 추방시킨 자는 남자요, 쫓겨나서 다시 찾아오는 것은 여자요. 그래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는 쪼다고 쪼다같은 남자를 여자가 살리는 겁니다.

이게 주님의 언약적구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이용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주님이 찾아낸 십자가를 증거하는 결과물이 되게 해주시고, 주님이 우리의 바탕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신부로서 새로운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