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주향 언약 구원(마 25장 28절-46절) 대전- 102강
이근호
2018년 7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28-46
(마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28절부터 보면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달란트의 전체 숫자는 변하지 않는 데 열 달란트 받은 자가 몇 달란트 되요? 열 한 달란트가 되지요. 그러면 열 달란트 받은 자가 여러분이라면 자기가 가진 열 개와 다른 한 개가 같은 의미가 아니겠지요. 원래 내 것이 아닌데 게으름 피웠던 종이 책망 받으면서 나온 한 개잖아요. 결국은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천국을 설명하려면 없는 것이 있어야 되요. 천국이 있다면 있음이지요. 그 다음 구원이 있다도 있음이잖아요.
여기에 있음은 기존의 있음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없었던 것인데 심판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고 구분 짓고 차별을 하는 결과로서 새롭게 등장된 것. 그게 구원입니다. 쉽게 말해 나의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의 구원은 없는 거에요. 인간 구원도 없고 교회 구원도 없어요. 구원은 예수님 구원 밖에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언약 구원입니다. 하늘에서 준비된 언약을 죄악 된 세상에 풍덩 담가서 만약에 지상을 초코렛이라 한다면 언약이 과자라고 한다면 과자를 초코렛 속에 집어놓았다가 풍덩 넣었다가 빼면 초코렛으로 코팅되겠지요. 그게 구원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지상의 죄를 통해서, 집어넣었다가 건져 버리면 세상의 죄로 입혀진 언약이 되겠지요. 그것을 하나님의 의,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언약 구원입니다. 제가 집단 구원이라고도 했는데 이렇게 언약 구원을 설명해야 될 이유가 뭐냐? 사람이 천국을 가려면 지금은 죄 때문에 고생 하지만 나중에는 천국에 가서 잘 산다 이렇게 되겠지요. 어려우니 잘 들어 보세요. 그러면 이 노선이 내가 여기 있고 천국이 있고 천국이 있는데 나는 거기 들어간다에서 내가 여기 있고 천국은 저기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넣어준다. 이렇게 만 있으면 이 내용이 별로 모자람이 없어 보이지요.
그러면 지옥이 여기에 끼여들 여지가 없지요. 지옥은 왜 있지?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지옥 가 주는 자가 있어야 천국에 간다면 지옥과 천국의 연관 관계를 따져야 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너는 천국에 못 간다. 이랗게 된다면 내가 소망하는 천국가기가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아닌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간다면 나와 천국만 있으면 되요. 두 가지 요소만 있으면 되요. 하나님이 보내 주면 되니까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이 없어서 천국에 못 간다면 내가 있고 천국이 있다는 요소만으로 제대로 된 천국을 설명할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나는 잘못된 천국을 나 혼자 상상하고 있는 거에요. 지옥에 가야 될 사람은 반드시 지옥가야 된다라는 요소가 합치된 천국인 것을 내가 인정해야 되요. 만약에 내가 천국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지옥가야 된다면 지옥 가는 사람에게 미안하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가서도 미안해 할 거에요. 미안할 생각하려면 천국에 가지 마세요. 무슨 미안한 생각을 해요.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도록 지옥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 애초부터 내게 문제 있는 거에요. 내가 잘못된 천국을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간다면 나라는 것은 내가 나답기 위해서, 즉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내가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면 딸과 나는 남남이 아니지요? 나에게는 딸이 있다가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 늘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길 가다가도 내 딸 쯤 되는 애가 지나간다면 맞아! 나도 저 애 정도 되는 딸이 있지! 라고 비교 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 안에 잠재의식 중에 딸이 있다라는 것이 잠복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천국에 갈 때 나만 가면 안 좋아요.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로 엮여 있잖아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딸도 같이 가야 되요. 사랑한다면 아내도 같이 가야 되요. 그러면 천국에 갈 땐 셋이서 같이 모여 가야 되요. 표 세상 끊어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표가 두 장 밖에 없다면 천국에 가도 우울해요.
슬픈 천국이에요. 나라는 것이 구성될 때 단순히 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만나고 스쳐 지나가고 상처주고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모든 인연들로 형성된 내가 죽어서 어디에 간다고요?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 기억과 미련들은 어떻게 할 거에요? 다 갖고 가야하는데, 나를 괴롭게 했던 인간들이 천국에 가고 난 뒤 보니 마침 저 지옥에 가 있다면 얼마나 천국에서 신이 나겠습니까? “꼴 좋다! 까불더니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하겠지요. 이것이 과연 천국이냐? 과연 구원이냐? 그런 천국과 구원은 주님께서 준비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너무 손님맞이하는 것에만 바빴습니다. 그게 급선무였습니다. 고객 관리하느냐고, 인간들이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노리는 천국을 그대로 인수인계해서 성경 내용과 아무 상관도 없는 가짜 천국을 상품화 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진짜 천국은 뭡니까? 진짜 천국은 나의 있음으로 인하여 항상 있음으로 가리워진 곳이 천국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 비로소 천국이지 내가 있음이 되어 버리면 내 남편도 가야 되고 자식도 가야 되는데 만약 아이가 셋 중에 둘만 가서 고민 된다면 그것도 천국이 아닐 거에요. 뭔가 내 중심으로 가족을 생각하며 가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캠핑장입니다.
가족끼리 놀러 간 거에요. 그러면 뭐부터 출발해야 하냐하면 넉넉히 받았냐부터 출발하지 말고 뻬앗긴 자의 자리를 우리가 찾아가야 되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천국을 설명하실 때 친절에 친절을 다했어요. 친절의 한도를 넘어 섰어요. 없는 것. 없는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있어 봤기에 더 있기를 원할 거에요. 있는 자를 없는 자로 바꾸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오셔서 제대로 우리의 실정을. 본 모습을 콕! 찔러 주듯 이야기해야 되요. “너 없지?” 다시 말해 너는 주인(하나남)과 관계성이 없지? 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주인만 없으면 띵가~띵가 놀 생각만 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놀고 싶었는데 주인이 있으니 못하다가 주인이 타국에 가서 없으니 이 참에 본색을 드러낸 거에요. 이제 내 세상이다. 처음부터 나는 나 위주였었어! 라고 한 거고 주인이 타국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주인이 마치 있는 것처럼 열심히 일하는 열 달란트 받은 자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이상해요. 아무리 둘러봐도 주인이 없는데 왜 열심히 일하지? 그것은 이 두 사람은 주인이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주인이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인과 자기 사이의 관계가 멀리 있고 안 보인다고 해서 전혀 지장 없다는 거에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관계없이 머리로만 복음을 아는 사람은 들통이 다 나는 겁니다. 왜? 나 좋으라고 믿었던 자기 본색이 다 드러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없다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슬퍼하거나 애통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의 구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의 구원을 노리고 예수 믿은 거에요. 나에게 없는 천국을 주신 다고는 생각 안 하고 내가 노리고 소망했던 천국을 주님은 전문가니까 나에게 안겨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너는 무슨 자격으로 천국에 가야 돼? 라는 질문에 답변할 게 없어요. 주제 파악을 못하고 나는 마땅히 천국에 가야 돼! 왜? 몰라! 나니까 이래요. 관계성이 없는 겁니다. 관계성이 없는 자라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거에요. 결국 한 달란트를 맡긴 것은 없음을 없음으로 드러내기 위해 주신 거에요.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김정은이에게도 오늘도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하잖아요. 심장 뛰게 하고 계속 살려 주시는 것은 악인에게도 주시는 것은 은혜 받을 것도 못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거에요. 뺏는 작업의 배후에 뭐가 나오냐?
뺏는데 안 뺏고 주시는 은혜가 천국의 은혜에요. 빼앗을 권리가 있는 분이 안 빼앗는 거에요. 빼앗을 권리가 있는 분이 덤으로 더 주시는 게 뭐냐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공로가 있어 주는 게 아니고 뺏어도 되는 데 공짜로 주셨기 때문에 은혜가 은혜로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내 구원은 포기 되지요. 주님의 구원에 합류한 것 뿐이에요. 그리스도가 구원 받는 데 나도 지체로써 끌려간 것 뿐이에요. 강아지가 있지요, 이사 갈 때 같이 따라 가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식구가 된 것을 감사합시다.
여기 달란트 비유가 뭐냐하면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내가 내 주인이 아닌 거에요. 주인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잠시 종으로 있는 거에요. 주인이 만약에 있다가 죽었다면 우리도 같이 죽은 거에요. 주인이 부활 됐다면 우리도 부활된 거에요. 참 신기하지요. 이 신기한 것을 이번 사도행전 초반에 강의 할 겁니다. 구원은 내 구원이 아니에요. 장난감 자동차 갖고 놀다 박살났지요. 애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요? 자기 것이 아니니까 얻었다는 걸 알잖아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 너의 주인은 따로 있고 네가 네 주인 노릇 하지 말라는 거에요.
특히 열 달란트 받은 자는 뭐냐하면 저 놈이 잘못해서 내가 얻었다가 아니라 빼앗는 분이 나에게 주신 거에요.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에요. 열 한 달란트 된 것이 열 달란트가 문제가 아니라 한 달란트 플러스로 추가 된 것이 천국입니다. (10 + 1)여기에 천구구의 비밀이 담겨 있는 거에요. 지옥에 가는 사람이 없었다면 짤린 자 하나가 없었으면 추가 된 하나가 없었을 테니까! 내가 천국을 간다는 것은 내 대신 지옥에 가는 자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뺏고 주고 뺏고 주고 하는 당사자가 일방적인 결정을 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빼앗을 자에게서 빼앗고 줄 자에겐 주셨다는 것을 참회하는 거에요, 천국은. 구원은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 하면 아예 나의 구원은 있다? 없다? 아예 나의 구원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천국에 안 넣어 주셔도 되는 데 넣어 주셨군요 라고 되는 거에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제일 먼저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지요. 불의한, 악한 청지기에요. 악한 청지기가 천국 가는 모델로 등장해요. (악함 = 천국) 악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주님께선 악한 자를 거론해서 천국의 모델로 삼으시는 이유가 뭐냐? 구원은 애초부터 악한 자든, 착한 자든 구원받을 자가 없었음을 악한 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오후 설교에서 언약궤는 없어요,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없음으로 두지 않고 약한 자, 별 볼일 없는 자를 집어넣는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별 볼일 없는 자를 집어넣게 되면 사람들은 없네가 아니라 어디서 되지도 않는 인간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가 창녀와 돈 밝히는 나쁜 놈이 천국에 간다 말이 됩니까?
나쁜 놈이라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조현아를 봅시다. 한진 그룹의 조현아가 천국에 간다. 이게 말이 되요? 머리채를 확 잡아 뜯지는 못할망정 조사받다 삐져서 집에 간다고 하니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무슨 천국에 가요? 그렇게 밀수를 해놓고 잘 사는 값을 하는데 온 국민이 다 욕하는 조현아는 천국에 가고 세월호가 물레 빠졌을 때 자기는 생각지 않고 많은 사람을 구한 의인이 지옥에 간다면 세상 꼬라지 뭐 그 딴 게 있나 하겠지요. 이 말은 악한 자가 구원 받는 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자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도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안다고요? 이런 분이 예수님입니다. 아무도 구원 받을 자 없고 다만 주께서 원하는 자만 건지시는 거에요. 나는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까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있음이 되어 버리면 마치 주님이 자기를 위해 있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내 구원을 위해 나의 구원이 발생되어 버려요. 그러면 안 되고 있음을 내에게서 빼서 누구에게 줘야하냐 하면 주님께 줘야 되요. 나는 죽고 날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있음이 되는 것.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서 움직이는 기호라고 했잖아요.
주님이 생명을 보여주기 위한 움직이는 기호라고 했어요. 성도가 하나의 시그널처럼 움직여요. 날씨가 덥지요. 더우면 짜증납니다. 제가 전에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경험이 있는 데 콩크스?를 가지고 전기 롤을 돌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실내 기온이 55도에요. 그 안에서 일하다가 밖에 나오면 얼마나 시원한 지! 바깥은 40도거든요. 온도 차가 15도 이상 나는 거에요. 얼마나 시원한 지! 강도가 천국 가는 것이 왜 그리 시원할까요? 모든 사람이 욕하잖아요. 강도라고 죽으면 지옥 갈 거라고 그런데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가고자 평생 목숨 걸고 율법 공부하면서 쟁취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아무 연고도 이유도 없이 합격 통지서를 받은 거에요. 서울 대학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재대가 없는 행복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팔자, 운명. 내 운명이 아닙니다. 주님의 운명이 덮친 거에요. 조건이 있어요. 나는 없는 존재로 계속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는 조건 하에 연결 가운데서 우린 없는 자입니다. 없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없기 때문에 난 있는 자라 구원 받아야 한다면 지난 오후 설교처럼 다시 바깥에서 요단 강물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태가 또 일어나요. 우린 우리 식대로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우기면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음이 되어 버려요. 그 있음으로 버팁니다. 누가 더 잘났는가 하고 버팁니다. 30절 봅시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이게 지옥 아닙니까? 지옥 이야기를 먼저 한 이유가 천국은 지옥을 거쳐야 그것을 재료로 천국이 등장하는 거에요. 너는 지옥가라 나는 천국 갈래 그런 것 없어요. 지옥을 충분히 알아야 돼요. 독자적으로 독립해서 살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이미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동그라미 쳐서 이것은 내 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게 창세기 3장에서 악마의 마음입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 것으로 사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다 그렇게 사니까 악마가 없는 거지요. 그게 정성적이고 자연스럽고 그렇지요. 바깥 어두운 데에 비하면 천국은 뭐다? 요한계시록 22장에 해도 필요 없어요. 달도 필요 없어요. 빛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빛은 어디에서 나오는 가? 예수님의 영광의 빛에서 나와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 몸에서 발산되는 빛, 눈부신 빛이지요. 그래서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사도 바울이 그 빛의 영광에 감탄했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내가 어디 있는 지 모를 정도로 황홀하다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요한계시록 21장에는 보석같이 빛난다. 이 모든 것이 뭐냐? 쉽게 말해서 빛의 세계에 들어간다. 천국이 빛의 세계라면 지금 대전은 무슨 세계입니까? 어두움이지요.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빛이 오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그러면 뭐가 지옥이냐 주님을 생각 못하는 게 지옥입니다. 주일 낮 처음에 했잖아요. 지옥이 무엇이냐? 주님과 상관없이 사는 게 지옥이에요. 사람 점잖고 인간성도 좋아요. 아내에게 잘 해주고 신사적이고 친절하고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마음을 낮추고 지옥 갑니다. 없는 사람에게 동정하고 아는 사람 죽었다고 울고
불교식으로 잔 올리고 향 피우고 그렇게 공부를 해도 자기가 지옥에 있다는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니까 그건 왜 공부를 못했지요? 이상하지요? 그렇게 남을 위해, 노동자를 위해 해도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왜 모르지요? 죽은 놈이 더 죽으라고 도와준 거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천국을 만나기 전에 권력부터 만납니다. 이 세상 전체가 권력 세계에요. 권력 속에서 한 지점을 잡을 때 이것을 주체라고 하거든요. 나의 나됨. 남들이 자기를 보고 참 훌륭합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하잖아요. 주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저주받은 거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모르면 저주가 그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검사는 저주와 함께 있어요. 그 검사와 결혼하게 되면 저주받은 자와 결혼하는 거에요. 결혼할 때 아무하고나 하세요. 어차피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하되 알고는 하라는 거지요. 마귀가 하는 일은 다른 게 아니고 다른 건 다 허락해요. 돈도 권려도 허락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도 부활도 다 이야기해요. 절대로 십자가의 저주 받음은 악마가 제일 싫어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헤친다고. 아까 이야기 했지만 천주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권력을 만난다고 법과 원칙과 관습과 풍습과 제도가 있어요.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뭐 만납니까? 법과 관행을 지키는 거에요. 법과 관행으로 지켜지는 신앙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는 몇 시에 해야 되고 세 시, 여섯 시, 아홉 시에 세 번 해야 되고 회개하고 고백 할 때는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했어요. 그러다 바뀌었어요. 신부에게 몰래하면 되요. 신부도 안 보이게 앉아서 왜 그런 짓을 하냐는 말이에요. 그래야 신앙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신앙이 유지되는 게 아니지요. 지금 종교 놀이 하고 있는 거에요. 애들 소꿉놀이 하고 있듯 그게 천주교에요. 무슨 성령이 그런 소꿉놀이에 구애받는 게 어디 있어요. 성령은 우리 죄를 지적하는 겁니다. 십자가 앞장 세워서.
그러니 얼마나 사기 집단입니까? 신부들은 무슨 이상한 옷 입고 관 쓰고 지팡이 집고 무근 병정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복장을 하고 수녀도 마찬가지에요. 왜 꼭 그런 티를 내야 유지되는 단체라면 그 단체 자체가 보이스 피싱이에요. 그건 완전히 사기 집단이에요. 신앙이고 뭐고 다 조작해 낸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빼앗기면 되요. 있음 자체를 빼앗기세요. 죽어도 좋아가 되어버리면 살아 있어도 은혜가 되는 주의 뜻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목숨이 내 것이라 우기지 말고 제일 좋은 건 죽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 혜택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고 어차피 빨리 죽으나 늦게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 죽어 가면서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어떤 사람은 차츰차츰 죽이고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 가다가 옆에서 트럭에서 뭐가 빠졌어요. 멀쩡하게 운전하고 가다가 자기 아내 죽은 사람이 있잖아요. 오늘 아침에 서해안 고속도로 가다가 (뭐가)빠졌어요. 날아가서 운전하는 차 안의 아이 둘이 다쳤어요. 무슨 죄 때문에 죽은 거에요. 그 날 미리 기도하고 운전하지 안 해서 타이밍 맞춰 죽은 겁니까? 그런 거에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은 것이 그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까? 진작에 죽어야 될 사람들이에요. 그동안 고속도로 운전하기 전까지 살려 줬다가 그때 죽이신 거에요.
사는 것을 자기의 권한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자식 자랑하고 무슨 자랑하다가 언제 죽을지 몰라요. 주께서 또 살려 주셨구나! 해야죠. 31절 봅시다. 마지막에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셨지요? 이 논리에 뭔가 문제 있다면 말하세요. 예수님이 독생자로 하늘에 계셨잖아요. 그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요? 맞지요? 그러면 육신으로 오실 때 그냥 멍하니 오셨습니까? 아니면 약속대로 오신 겁니까? 약속대로 오셨다고 해도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해도 다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도 같은 말입니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러면 예수님 몸 안에서 뭐가 발생 되느냐 하면 창세 전에 숨어 있던 하나님의 뜻이 발산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발산 될 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보통의 목수 아들이에요.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러면 약속을 동그라니 처 볼께요, 예수님 몸이 있다. 예수님도 동그라미 처 볼께요. 예수님이 여기 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 해야 될 일이 뭐냐하면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지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뭐를 오해 하냐하면 예수님의 몸을 통해 발산되는 것이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지 못한 기적을 베풀어 오셨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면 이 기적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부합니까? 좋아합니까? 좋아하지요. 왜 좋아 하냐하면 이 기적들은 내가 원했는데 안 된 것 내가 병들었는데 주님 옷자락을 만져도 나음을 얻는 것. 중풍병자가 못 걸었는데 나아 걷게 됐을 때, 배고픈데 배부르게 하셨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원했던 거지요? 원했던 바를 예수님이 해주셨다 해서 싫어할 이유가 없어요.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예수님의 표적이 점점 더 깊이를 더해 갑니다. 그래서 성전을 건드려요. 허물고 사흘 만에 세우리라 해요. 성전을 건드리니까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즉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공통점이 있다고 여겼는데
우리의 몸은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다라는 것을 그동안 몰랐는데 예수님이 성전을 건드리니까 우리가 살짝 기분 나쁘려고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 성전이라는 부동산 건물이라는 말이죠. 예수 믿는 건 좋아요 그러나 예배당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을 같이 믿으니까 형제인데 하지만 형제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 목사 욕은 하지마라 이거 거든요. 우리 교회 짓는다고 내가 밑천 많이 댔는데 그런 교회를 헐어 버린다고 그런 섭섭한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은 은연중에 우리 자아 속에 뭐가 들어 있어요?
내가 돈 내서 예배당 지은 건물을 하나님께서 얼추 인정해 줄 것이라는 것을 포기 못하고 갖고 있지요. 예수 믿는 건 좋은데 교회 안 나오는 내 딸은 건들지 마라! 이건 뭐에요? 나의 구성 요소에 누가 뭐라 해도 내 딸은 미워 할 수 없다라는 것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는 좋아했지만 예수님은 기적과 함께 말씀들이 같이 쏟아져 나옵니다. 천하 아비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제자들은 안 들은 것으로 쳐요. 왜? 거북하니까 또 예수님이 너희들이 어디를 갈 때 전대는 챙기자 말고 지팡이나 챙겨라 하니 제자들은 안 들은 것으로 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는 고난을 받으러 간다 하니까 베드로가 안 들은 것으로 치는 게 아니라 반대 하지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보디가드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의 존재도 없는 거에요. 모든 것을 몰빵했으니까, 화투 칠 때 남은 돈을 다 집어넣은 거에요. 화투 칠 때 국화가 두 장이 나오면 구땡이지요? 그럴 때 판돈을 다 걸었잖아요? 그런데 태풍이 불어 무효가 됐다하면 지금 것 두 시간 동안 십 만원 정도 잃었는데 회복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갑자기 태풍이 분다든지 전화가 와서 빨리 집에 안 들어오나 하고 아내에게 전화가 온다든지 이러면 안 되잖아요. 하든 것 마저 하고 가야 되요. 그러다 저쪽이 장땡이 나오면 어쩌려고 다 날리는 거죠.
인간은 자기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 당시 유대 사회도 그랬어요. 당신이 기적을 일으켜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을 주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은 건드리지 말아야 된다는 거죠. 주님은 너희가 좋다고 할 때 너희가 어디에 잡혀 있는지 모른다. 너희는 나를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떡을 주니 사람들이 왔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가 가버리고 두 번 다시 함게 있지 앟다고 했습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거에요. 예수님께서 그러면 모든 기작은 어디와 어디로 응축됩니까? 병 고침, 설교, 물 위로 걸으심 등의 표적은 진짜 표적을 하나님 뜻에 있음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에 종속되는 겁니까? 십자가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중심으로 설교한 겁니다. 십자가는 거부하고 다른 것, 부스러기를 챙긴다는 것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짓이에요. 어렵지 않아요. 십자가 중심이지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 몸을 통해서 약속이 주어진다고 십자가 졌지요? 그다음 뭐가 남았습니까? 사흘 만에 부활 했지요?
동그라미가 있다면 동그라미 밖에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의 세계가 끝이었습니까? 40일 있다가 어지로 올라가셨습니까? 승천 했지요. 승천하고 끝납니까? 다시 뭐합니까? 재림하시지요. 이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언약 구원이에요. 언약 구원이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언약 구원을 하시게 되면 구원에 필요한 내용은 다 충족되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구원 되서 주시는 것이 뭐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면 뭐도 자동적으로 오는 거에요?
재림하게 되어 있고 승천하게 되어 있고 부활되게 되어 있고 용서 받게 되어 있어요. 성령 받으면 그 안에 모든 약속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믿고 재림 기다리고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믿고 잠자면 탈락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관찰해서 믿는 게 아니고 이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통째로 주어지는 관계가 믿음의 관계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31절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이것은 조금 있다 오겠지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처음에 십자가 알 때 이 내용도 결국 그 사람에게 덮쳐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에요.
승천 따로 믿고 부활 따로 믿고 재림 따로 믿고 하는 게 아니에요. 믿고 재림 하는 지 안 하는지 두고 보자가 아니라니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몸으로 왔을 때 재림까지 되어 있어요. 왜 재림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다니엘서에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니엘서를 완성하기 위해 왔잖아요. 다니엘서 7장에 보면 인자가 하늘에서 오잖아요. 그게 재림 아닙니까? 구름 타고 온다고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30절에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되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를 이야기 하는 것은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고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이런 혜택 안에 들어와 있는 거에요. 사도 바울은 이미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자동 적으로 부활 되고 재림되고 하는 혜택 안에 들어 있게 되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이지 재림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십자가를 믿으려고 해요. 십자가도 믿고 이것도 따로 믿고 저것도 따로 믿고. 무슨 뷔페식당에 왔습니까?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게 치매 걸리면 다 잊어버리는데 십자가라는 것은 챙기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앞에 내가 없음의 존재. 죄인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죄인이 될 때 용서가 주어지고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고 할 때 나는 선택 잘했어! 나는 훌륭해! 강도가 그렇게 한 게 아니지요. 오히려 반대로 반문해야죠. 사도 바울처럼 주여! 왜 이러십니까? 어딜 봐서 저에게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뭘 보고 천국 주십니까? 이유가 없어요. 이우를 내 쪽에서 끄집어내기 마세요. 왜? 우리는 지옥가야 마땅한 사람이에요.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조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아담이 나빠서. 이런 것을 알려면 내가 안 믿고자 해보세요.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해보세요. 그래서 예수님 생각나는지 안 나는지 해보세요.
24장 36절 봅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신지 그 날 과 그 때는 본인도 모른다는 거에요. 그래서 너희 보기에 내가 아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네가 나를 믿고자 하는 이유를 “저 분은 아시겠지!”이런 식으로 나를 믿는다고 시도 하는데 그것마저 실패로 끝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구원된 거에요. 그 날과 그 때를 몰라도 괜찮아요.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고 주님이 그 죄를 이미 용서 하셨다는 사실이에요.
기온이 대전 38도이고 대구가 몇 도이든 상관없어요. 좀 선선해지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쪄 죽어라! 이 놈아! 하면 예~ 그럴 수밖에 없어요. 32-33절 봅시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여기에서 심판주가 하는 행위를 두 자로 이야기 하면 뭡니까? 분별이지요. 쉽게 말해서 분리시키기. 분리시키는 자체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틈을 벌일 때 벌어지는 그 틈 사이에서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천국입니다. 틈이 없으면 천국이 안 보여요.
두꺼운 지각으로 덮여 있어요. 그런데 땅이 갈라 질 때 밑에서 마그마가 나오지요. 그 마그마는 원래 있던 거에요? 새로 생긴 거에요? 처음에 지표면에 있는 우리는 새로 생긴 거지만 일이 터지고 보니까 내가 놀던 땅 밑에, 내가 살던 고향 땅 밑에 지옥 불이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 처음부터 우린 지옥의 백성인 거에요. 나의 살던 고향은 지옥이었던 거에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 3장 생명나무가 없는 곳이 나의 살던 고향이에요. 나의 살던 고향은 선악과 따 먹은 고향이에요. 여기도 선악과, 저기도 선악과. 오직 선악과 밖에 없는 동네.
주께서 우린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는데 째버리고 올라온 천국에서 손 내밀어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분별해 버립니다. 천국가는 사람도 몰라요. 본인이 천국에 해당되는 사람인지를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알아요. 성령이 오니까 일체 나의 행함은 보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 됐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뽑혔다는 사실.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뽑힌 거에요. 그러면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는 것은 알려 주실 때 비로소 알게 되는 비빌입니다. 숨겨진 비밀이지요.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남 약 올리기 밖에 없어요. 결국은 남 약 올리는 겁니다.
이번에 사도행전 할 때 할 겁니다 인간의 선교가 주님의 선교를 방해한다고 왜냐하면 주님의 살아 있음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살아 있음이 주님의 살아 있음을 방해하고 훼방질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살았다는 것을 찢어버립니다. 오징어 구운 것을 찢어 버리 듯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성도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바깥으로 발산하게 됩니다. 그러면 살던지 죽던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솜씨이고 나라는 것은 주님의 작품이 되너 버립니다. 작품 꼬라지 하나 참 웃기지요.
하지만 철저하게 살아가면서 못 다한 죄를 계속 짓게 하십니다. 그 죄를 짓는 즐거움.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강도가 되던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그것마저 적절한 인생인 것을 저희가 반항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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