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7:31-35 / 슬퍼하는 야곱

정인순 2018. 6. 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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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퍼하는 야곱


이근호
2018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31-35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7:32)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37: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7:35)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생일이란 태어난 날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아버지 집에서 죽은 자로 떠나간 것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꿈이 있는 쪽은 꿈이 없는 쪽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쪽은 세상살이를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버티는 겁니다.

요셉도 지금껏 그 세계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꿈만 꾸지 않았다면 형들로부터 버림받을 일이 없습니다. 요셉의 뜻이 아니라 꿈의 뜻에 의해서 요셉은 본인이 원치도 않는 살아온 세계와 결별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결별’이 되지만 아버지 야곱의 입장은 결별이 아니라 ‘자식의 죽음’입니다.

살아서 나간 자식이 다시 나타날 때는 몸체는 없고 그가 입었던 채색옷만 찢겨진 채로 아버지의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짐승의 피가 묻힌 채로 말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스스로 이 사태를 단정 짓습니다. “내가 유독 사랑하는 자식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 이제 그 자식은 없다. 내 아들 불쌍해서 어떻게!”라고 절규합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어느 가정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벌어진 사건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란 곧 가장 귀한 것입니다.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이 자신이 사랑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하나님이 관여해서 잃게 했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애곱은 대성통곡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세상 살아갈 의욕을 잃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요셉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에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거기에다 얹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없어진 겁니다. 아버지 야곱은 본심은 죽은 자식을 따라 자신도 죽고 싶을 뿐입니다.

과연 같이 죽는다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누구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그 사람을 따라 죽는다고 과연 그 사람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삶이 개인적인 것처럼 각자 죽음도 그들의 삶의 연장이기에 개별적입니다.

마치 주간 근무하다가 야근 연장 근무한다고 해서 일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대낮에 하던 일을 형광등 밑에서 한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을 때에 대신 살려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죽음도 각자 죽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대표 죽음’을 성사시키십니다.

그 작업을 위해 일단 꿈을 꾼 요셉과 타인들을 분리시킵니다. 그냥 좋은 관계로 분리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격하게 ‘죽음 사건’을 통해서 격리시킵니다. 이는 그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대표 죽음’을 행사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의 결정체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3:36-3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예수님과 끝까지 떨어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3에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아직 베드로의 자리가 천국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 마련에 베드로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홀로 그 자리를 마련하는데 성공하고 나면, 그 후에 베드로가 그 자리에 앉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베드로의 천국행에 있어 베드로 자신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게 됩니다. 즉 천국에는 구원될 자의 협조가 전혀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자신을 ‘산 자’로 간주하게 되면 결국 자기 몫으로 챙길 빌미가 됩니다. ‘나 여기 있음’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천국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들과 분리시키면서 곱게, 말썽없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유는 기존의 형이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있음’가 아니라 ‘사건’적인 방식의 삶입니다. 존재란 ‘나의 중심성’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건’이란 그 우발적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요셉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이 요셉을 주도해서 다루어지게 합니다. 이는 요셉으로 하여금 벌어진 사건의 원인으로 자신의 행함과 연결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형들의 세계에서는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결정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즉 “내가 이러이러 하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과를 유발한 각가지 원인들을 임의로 삭제시키고 오직 자신의 옳음을 반증해 줄 가닥만 남길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비슷한 세계가 아니라 정반대로 되는 세계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정반대’가 되는 근거는 바로 요셉이 자진해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아 내침을 당한 방식으로 형들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도 요셉을 따라 나설 위인이 없게 하는 그런 세계를 요셉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몸은 비록 옛요셉 그대로이지만 사람은 전혀 다른 요셉으로 살게 됩니다. 다시 ‘내 인생’이라는 것을 용납 받지 못합니다. 꿈이 주도해서 결과를 생산하는 그런 세계가 요셉의 몸을 통해서 발산됩니다.

요셉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꿈의 전개과정이 됩니다. 자신에게 있어 현존하는 세계는 ‘옛날 살았었던 그런 고향’일 뿐입니다. 전의 세계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꿈이 세계, 이것이 요셉의 몸을 통해 구체화되는 야곱 언약의 세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는 존재감이 주님이 유발하는 사건을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