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7:1-4 / 야곱의 족보

정인순 2018. 5. 3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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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곱의 족보

 

이근호

2018년 5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1-4

(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개인적으로 복과 저주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형식 속에서 복과 저주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언약의 깊이에 진전이 있습니다. 언약이 주어지는 이 세상 환경은 모두가 ‘무신론자들’이요 불신자들입니다. 아담의 단순한 초상이 수많은 형상으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살면 그것이 곧 저주입니다.

하지만 복을 수령한 자격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복이란 저주 속에서 언약의 작용하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즉 어느 누구나 복받을 만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의 계열에 속한 사람이나 저주의 계열에 속하는 사람이나 인간의 눈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지상에 상호 섞일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구분된 그 영역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아서 대비하거나 거처를 옮겨서 구원이 성사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식이나 행세는 다들 동일한 아담의 성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주가 이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복이 낯섭니다.

저주받을 자가 복을 받는다는 점이 놀랍고도 기이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이 없이는 일어나는 못할 기적입니다. 도대체 복이 제공되는 기적, 죄인이 의가 되는 기적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는 저주의 계통이라고 낙점받은 에돔 족보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돔 족보의 사람들은 ‘살 권리’를 행사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가 있기에 마땅히 자식이 있고, 그 다음에 손자가 생겨서 이로서 이런 식으로 혈육적인 노선을 유지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자들입니다. 즉 내가 있기에 나는 살 권리가 확보되어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족보를 통해서 자랑이 되는 것은 대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혈육의 사다리는 ‘살 권리’를 천명하고 증명하는 바탕이 되는 겁니다. 사실 모든 인류가 다 이런 성향을 보입니다. 살아 있기에 살아남도록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라는 겁니다. 윗대와 아랫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므로서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한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양상이 에돔이 대표로 보여주는 저주받은 족보의 특징입니다. 야곱 족보에 속한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살고자하는 바는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목표요 이유가 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야곱에 속하든 에서에 속하든 간에 모든 인간들은 언약에 대해서 외면하며 사는 무신론자들이요 불신자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알아서 신자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자칭 복의 노선이라고 우기는 것은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누가 자진해서 자신의 살 권리를 반납하겠습니까? 인간은 사회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혈육적인 연속성을 추구하는 성질로 단합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서 그 마음 자세조차 기존 사회에서 흘려들어온 겁니다. 즉 자신의 연속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아무리 정이 돈독해도 상대방은 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나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간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개인적 야망을 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란 바로 이런 나의 저의를 지속적으로 훼방하고 방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들 위주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야곱의 족보의 특징이 구별됩니다. 살 권리로 연결되는 족보가 아니라 살고 싶어도 하나님의 준비된 언약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혈육과 단절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사회에 합류해서 살고 싶어도 그 사회가 성도를 추방하고 왕따 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무신론자들이고 불신자들입니다. 사회 자체가 그런 성격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 배제당할 때에 본인의 믿음이 출중해서 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극히 육적인 감정 문제로 그 사회에서 미움 받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대결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독점적으로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가족이라는 사회에서 요셉은 밉상받고 배제당합니다. 언약은 이런 식으로 작용합니다. 홀로 신자라고 자처하고 나선다고 해서 복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 나 할 것없이 모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심코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복된 인물은 강제로 ‘살 권리’가 박탈당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와의 단절이 본의 아니게 발생하고 만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자신의 모든 사랑이 집중된 아들이 이 세상에 더는 없는 죽은 자로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아버지 종의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빌하의 자녀는 단과 납달리요, 실바의 자녀는 갓과 아셀입니다. 요셉은 이 형들의 잘못된 것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종의 자녀와 정실 부인의 자녀를 구분짓입니다.

이는 인간 혈육 내부에서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기 위함입니다. 즉 천국은 종의 자녀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직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만 들어간다는 원칙을 전에 아브라함 언약 안에 대원칙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의 자녀의 특징이 신약에 오게 되면 법으로 자기 자신의 잘남을 챙기는 자를 말합니다.

반면에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는 법에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이다는 겁니다. 법과 사랑의 대조는 이 지상의 사회에서는 미움받는 존재의 출현으로 현실화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으로 살기에 이 세상에서 미움받아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0강-창 37장 1-4절(야곱의 족보)1805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56페이지입니다.

창 37:1-4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야곱의 약전이라는 말은 야곱의 족보라는 겁니다. 야곱의 족보 이전에, 지난 시간에 본대로 에돔의 족보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 있지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대비가 돼요. 빛과 어두움,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 이렇게 짝을 이루어서 대비되는 상태에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비가 된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내 스스로 거울 보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폼을 내봐야 그것은 착각이지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간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을 안다는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비교를 해보라는 말이지요.

비교를 해서 어떤 차이점을 찾아내야 돼요. 얼굴도 같고 살아가는 것도 같아요. 세상 모든 살아가는 것이 그렇고 그런 겁니다. 특별난 것이 없어요. 특별난 것이 없고 보통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달리 살아가는 사람이 그 중에 특이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이 되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 이미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말은 이미 살았을 때부터 그 사람의 장래와 운명도 달랑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갈 길이 달랐다는 말이 있잖아요. 가는 길이 다른 거예요. 밥 먹는 것도 똑같고 잠자는 것도 똑같은데 그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과 이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 마치 대전에서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듯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갈라지는 각도가 좁아요. 그 각도 때문에 점점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차이점이 점점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는 소통이 안돼요.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요. 그 사람이 쳐다보는 것은 지옥이지만 성도가 쳐다보는 것은 하늘나라기 때문에 관심사가 달라요.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세상 되어가는 일에 목숨 걸어요. 조금 세상에서 잘되면 좋다고 까불고 좀 못되면 절망하고 자살할까, 이렇게 나오고. 조금만 변화해도 어쩔 줄을 모르고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많이 가졌는데도 늘 불안하고, 장래일이 걱정근심이 되고,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에 겁을 내고 그렇게 살아가는 반면에 신자들은 장차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에서 볼 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불신자는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내 인생 실패했다고 놀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사람을 겁내는 것은 불신자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보게 되면 같은 사람이지만 그 구분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서 약속에 의해서 새로운 인간 쪽, 약속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행이고 약속 없이 그냥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기 몸뚱이 하나 가지고 그냥 가게 되면 그것은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육에 속했기 때문에 지옥행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거지요. 그 약속을 어디서 찾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약속을 보여줄 때는 반드시 네가 구원받았다가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사람, 복 받지 못한 사람, 저주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면 두 사람을 갈라지게 하는 요소가 항상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같은 식구라도 마찬가지에요. 형 동생 사이라도 마찬가지고 부모와 자식사이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 같은 교회 나오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지진처럼 갈라짐이 있습니다. 그 갈라진 틈바구니에 하나님의 약속이 딱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너보다 잘난 것은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는 이쪽으로 분류되었다, 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신자고, 그렇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나는 착하고, 훌륭하고, 나는 죄 지은 적 없고, 나는 잘나가고, 아마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줄걸, 하고 자기 자랑삼아 인생을 매일 같이 남에게 떠벌이기 위해서, 남에게 뭔가 보여주는 삶, 자랑질 하는 삶, 자기 노력한 것, 애쓴 것, 훌륭한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자꾸 남에게 내세우는 사람은 기준이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아니고 본인이 끄집어낸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은 저쪽이지요. 지옥 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래서 아브라함이 나타날 때는 아브라함과 그 외 다른 종족들, 이삭이 나타날 때는 이삭과 그리고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이전에는 셈이 있으면 함 족속, 함 족속은 저주받은 족속이고 셈 족속은 복 받은 민족, 이렇게 셈과 함, 그전에 창세기 4장에서는 아벨이 나오면 가인이 나옵니다.

항상 짝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야곱이 나오면 그 다음에 형 에서가 나오고, 에서는 저주받은 쪽, 야곱은 복받은 쪽,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야곱은 복 받았고 에서는 저주받았다고 할 때 그것으로 끝나면 안되고, 저주받은 사람은 어떤 식의 족보를 형성하고 복 받은 자의 족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이 창세기 36장과 37장,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을 보는데 지난 시간에 본 창세기 36장에서 저주받은 자 에서의 족보는 이러이러 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하기 전에 에서의 족보의 특징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지요.

저주받은 족속인 에서족보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신들의 살 권리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부모가 살아 있기에 자식 낳는 것은 당연지사고, 그 다음에 자식이 생기면 손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손자가 생기면 증손자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증손자가 생기면 고손자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뼈대 있는 핏줄과 핏줄의 연속성을 족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 사람은 에서에 속한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이상할 거예요. 족보라는 것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나를 낳고, 나는 누구를 낳았다는 것을 적어놓은 것이 족보인데 족보라는 것이 그것이 전부지 별 다른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우리가 익히 아는, 특히 한국 사람은 이방인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족보를 새기고 적고 한다는 것은 조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조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는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왕 사는 것 잘 먹고 잘살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생각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저주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 그러니까 남은 죽더라도 나만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끝.’ 그 생각 외에 다른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누구를 지키는가? 내가 나를 지킨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키고 장래는 나 하기 나름이다. 이런 원칙에 충실한 것이 창세기 36장에 나오는 에돔의 족복, 에서의 족보인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 야곱의 족보를 모르는 사람은 에돔의 족보를 보면서 ‘이거 우리하고 똑같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라고 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그래요. 여기서 중요한 겁니다. 세상 사람은 다 그런 것 맞아요. 어느 누구도 자기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심지어 교회 나오는 사람도 교회 왜 나오느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교회 나오지요. 똑같지요. 교회 나오는 사람이나 안 나오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다를 것 하나도 없어요.

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기 집구석 잘되기 위해서, 자기 자식 잘되기 위해서, 자기 몸 건강하기 위해서.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비는 이유가 뭐예요? 몸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오래 살고, 행복하고, 가족화목하고, 사업 잘되고, 나라 잘 되고. 끝.

그게 전부잖아요. 산에 가서 비는 것이나 교회 가서 비는 것이나.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있고, 그것 때문에 절이 있고, 그것 때문에 성당이 있고, 그것 때문에 달이 있고 별이 있고. 누구한테 비는 것은 자기 잘되기 위해서 비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저주받은 인간이에요.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평생을 그렇게 삽니다. 옆의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자기 주변사람이 그렇게 살고, 부모가 그렇게 살고,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에 그렇게 같이 사는 내가 정상인줄 알고 있어요. 인생은 그런 삶밖에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보기 전까지는. 창세기 36장에 에돔의 족보가 나온 것은 참 잘한 것이지요. 에돔의 족보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흔히 만나는 사람, 보통사람들의 삶, 에돔이, 보통 사람들의 대표자가 우리를 대표한다는 말은 우리도 한통속이라는 것을 그대로 성경은 보여주는 겁니다.

특별날 것 없고 특이할 것 없고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그냥 그대로 남들 흉내 내면서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지금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저주받은 삶이 되고 지옥 가는 삶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천국 갈 사람은 없어요. 천국이 있다 해도 갈 사람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런 나라는 없어요.

왜냐? 평소에 세상 살면서 자기 위주로 살았거든요. 자기위주로 사는 인간을 받아주는 하늘나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 잘되기 위해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좋은 나라 간다는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것은 탐욕이고 건방짐이지요. 야곱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 야곱에 속한 사람이나 에돔에 속한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복 받았다 하지만 복 받은 흔적이 없어요. 살아가는 것은 대동소이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복 받았는지, 누가 지옥 가는지 구분도 안돼요. 살아가는 게 똑같기 때문에. 어디서 구분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요. 제가 똑같다고 한 말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똑같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무신론자고 신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교회 나와도 신자 아니고 교회 나와도 무신론자에요. 사람이 교회 나온다고 신자 된 것 아닙니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신자라고 하는데 그것 신자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종교지요.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자기종교고 그냥 하나님은 구색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은 딱지 붙이는 것이고 언제든지 돌아서서 떼면 끝나는 거예요. 교회 와서 찬송 부르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 같지요. 교회 문 밖에 나서면서 하나님 떼고 예수 떼버리면 올 때나 나갈 때나 똑같아요. 그래서 야곱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유념할 것은 뭐냐?

에돔의 족보 할 때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가 살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야곱의 족보에 속한 사람들도, 나는 이 땅에 살아 있으니까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라는 살권리를 똑같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인간 개과천선 되는 것 아니에요. 좀 착하려고 노력하고, 술 끊고, 담배 끊고, 그렇게 해보지만 술 담배 끊었다고 인간 바뀐 것 아니거든요. 사람이 점잖은 사람이 있을 때는 점잖게 해요. 그러나 내 감정 건드리면요, 15년 동안 점잖았어도 그 순간 욱하고 패버립니다. 인간 조져놔 버려요.

그 담겨있는 기본성깔이 갈 데가 어디 있어요? 어디로 안갑니다. 여전히 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전부 다 무신론자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신론자라고 해요. 모든 인간은 무신론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자기 외에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자기 손가락을 믿고, 주먹을 믿고, 자기의 가진 것을 믿기 때문에 교회 나온다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 아닙니다. 무신론자입니다. 여기 나오는 요셉도 무신론자고요. 2절에 봅시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여기 요셉이 나오거든요. 에돔의 족보에는 에돔이 나옵니다.

36장의 에서의 족보,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대략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에돔의 족보에는 에돔이 나오는데 37장 2절에서 야곱의 족보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야곱의 족보는 야곱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자기족보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연결되지 않으면 이것은 끊어지는 거예요.

에돔의 족보는 자기 몸만 있으면, 결혼해서 자식만 낳으면 자동적으로 족보가 만들어져요. 그러나 축복받은 족보, 야곱의 족보는 몸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몸과 자식 사이에 끊어짐이 있습니다. 끊어진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구나 살 권리를 주장하고 살아 있기에 더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가 특별히 이 축복받은 족보 안에 개입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복 받은 근거는 내가 여기 있음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된다는, 내가 죽은 인간이라는 것이 근거가 되어야 돼요. 내가 산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새로운 체험이 주어져야 이것이 복 받은 족보입니다.

그러니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이 족보에 끼어들겠습니까? 아무도 끼어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모든 인간은 불신자기 때문에, 그리고 무신론자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신자에요. 그러면 나는 영원해야 돼요. 내가 누구에게 꿀린다든지 내가 인생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내가 용납 안합니다. 왜? 나는 나니까.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니까.

이것은 에돔 쪽에 속했든지 야곱 쪽에 속했든지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나왔습니다. 돋보기를 가지고 인간의 조상인 아담을 본다고 한다면 멀리서 보면 아담 얼굴이지만 가까이 가게 되면 전부 다 점점으로 분해될 거예요. 수백만 개의 점으로. 인류에 무수한 인원수가 있어요. 많은 숫자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 단일체, 그 형상은 아담의 형상입니다. 아담은 하나인데 거기에 가짓수가 그렇게 많아요. 모든 인간은 똑같이 동일한 속성으로 성질을 부리면서 산다는 이야기를 제가 드리는 거예요. 별난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 지은 것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자기가 교주에요.

종교라 하지만 하나님종교가 아니고 사실은 내가 교주에요. 내가 교주고 내가 나에게 신자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만약에 지옥에 간다면 누가 격려하는지 알아요? 내가 나를 격려해줘요. ‘지옥 가서도 좀 참으면 나올 거니 걱정하지 마. 너 혼자 가는 것 아니니까 용기를 내.’ 지옥 가는 나를 내가 격려한다니까요.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를 포기 안합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이 무슨 신자입니까? 이게 바로 무신론자에요. 신자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차이점이 없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택할 자는 택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작용이 개입되는 겁니다.

야곱과 요셉을 끊어놔요. 야곱의 아들이 요셉입니다. 원래 아들이 12명인데 그중 누구를 제일 사랑하느냐 하면, 야곱은 요셉을 제일 사랑해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3절에 보면 나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명품이지요. 명품 옷을 지어 입히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열 두 자식이 있지만 다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중에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그 요셉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머지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사달이 나서 결국은 야곱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을 일찍이 죽은 자식으로 인식되도록 사태가 전개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려요. 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해서 아브라함 보고, 네 아들 이삭을 칼로 잡아라, 하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있었지만 야곱 때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 아들을 잃어버린 아들로 쳐요. 그러면 요셉에게 뭐가 있느냐? 아버지의 사랑이 몽땅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아들이 살아있을 때는 그 아들이 살아있음으로 아버지 자신이 살아있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버리면 아버지는 본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살맛도 없어요. 살고 싶은 기분도 안 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이 땅에 살 권리가 없어졌음’이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살아도 소용없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너 나 믿나?” “믿습니다.” “천당 가거라.” 그런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거짓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 순간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뿐이니까, 내가 제일 소중하니까 하나님은 그냥 들러리에요. 내가 소중한 나를 그냥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분이라고, 하나의 사냥개처럼, 또는 머슴처럼, 집사처럼 여기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해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봐야 그런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짓말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무신론자에서, 불신자에서 신자 된다든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런 경우,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자격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아요. 나를 놔두고 누굴 믿어요? 내가 제일 소중한데. 여기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관계는 끊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둘이 만나고 사귈 때도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은 정말 착각입니다. 인간은 부부가 되어서 같이 살아도 절대로 내 뜻 상대가 이해 못하고 상대가 이해한 것을 내가 오해합니다.

평생을 잠자리를 같이하고 살아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딱 붙어 다녀도 상대의 말을, 그 진심을 내가 캐치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생각만 하기 때문에. 자식부모간도 마찬가지고. 친구는 더 마찬가지고요. 같은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자기가 절대자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만 할 뿐이지 남의 말을 들어주는 척이나 하지만 절대로 자기가 손해나가면서 남 들어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홀로 가요. 끝까지 혼자입니다.

끝까지 혼자고 자기가 손해나느냐, 이익이냐 만 따집니다. 저 사람과 만나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내 것을 얼마나 빼앗길 것인가. 내 내부의 제일 밑바닥에는 그 주판알 튕기기, 계산이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든지 안 그러면 바보든지 둘 중 하나에요.

인간은 절대로 믿음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만 믿기 때문에. 특히 사랑한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사랑한다는 것은 내 것 만들겠다는 하나의 소유욕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얼마나 주면 내 것 되겠느냐. 어떻게 하면 내 남자가 되겠느냐.

둘 다 지금 장사하고 있는 겁니다. 둘 다 안 그런 척 폼 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끝까지 자기가 자기만 생각해요. 인간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살하기 직전까지는 자기이득을 남에게 넘겨줄 마음은 일체 없습니다. 아무리 해줘도 이용만 할 뿐이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진짜 마귀가 웃겠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교회 나와도 자기밖에 몰라요. 그러면 신자도 아닌 이 불신자가 어떻게 신자가 되는가? 자기 힘으로 안 된다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안되는데 주변에서 그 인간으로 하여금 뭘 포기하느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은 살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어, 라는 그런 사건,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사건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게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오늘 본문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셉이 열일곱 살 이었습니다. 요셉이 13년 동안 고생 되게 하나가 나중에 서른 살이 되어서 국무총리가 돼요.

서른 살에 국무총리 된다는 것을 미리 알지는 못해요. 다만 지금 요셉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해서 룰루랄라 신났어요. 신났는데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할 때 빌하와 실바라는 아버지의 첩의 자식들과 함께 있다는 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됩니다.

빌하라 하는 것은 아버지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여종이지요. 라헬이 아기를 못 낳으니까 여자주인의 종을 통해서 아기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라는 두 명의 자식을 낳았어요. 그리고 실바라는 것은 사랑하지 않은 아내, 라헬의 언니죠. 레아의 여종인 그 실바에게서 역시 두 명의 자식이 나왔어요. 갓과 아셀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면, 빌하와 실바, 단과 답달리, 갓과 아셀이라는 형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자질을 했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육 자체 내에서 또 분류를 해버려요. 종의 자식과 정실부인의 자식을 구분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어떤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종의 자식은 천국가지 못하고 진짜 본처의 자식만 천국 간다는 원리가 아브라함언약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처가 하갈이고 아브라함의 본처 이름은 사라지요. 사라와 하갈을 구분하는 이유는 사라와 하갈이 인류의 각자를 대표하는, 청군백군을 대표하는 것이 있어요.

지옥 가는 하갈은 뭘 대표하느냐 하면, 법에 의해서 자기 잘난체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을 대표로 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법의 대표자에요. 그들은 항상 남 앞에, “나 잘못한 것 없다. 법대로 해라. 나는 법에 맞다.”

항상 법을 통해서, 나는 정당하고 나는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갈 쪽에 속한 반면에 사라에 속한 사람은, 내가 내세울 것은 없는데 내 세울 것이 없다는 그것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어, 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행함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을 들이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법이 있는 사람은 법의 종, 죄의 종이 되고 법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라고 해요. 법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러면 법을 떠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람은 법을 안 떠나고 싶어 해요.

왜? 법이 있어줘야만 법에 입각해서, ‘난 너에게 꿀릴 것이 없다. 내가 이렇게 못살아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줄걸? 나는 너무나 법대로 산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난 지금껏 남에게 해코지 한적 없다.’ 자꾸 어떤 법에 근거해서, 나는 잘났다, 나는 잘났다, 를 연발해서 내세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몰라요. 나는 이기주의입니다. 나는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이 죄 덩어리. 시커먼 연탄덩어리. 하나님이 만들어놓았는데 어떻게 자기 밖에 모르느냐?’ 이런 식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러운 죄인이겠어요?” 그걸 인지하는 사람, 그걸 인식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가 법 지키는 바리새인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누가 구원받았습니까? 강도가 구원받았지요. 그것도 살인강도가 구원받았잖아요.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이 그렇게 칭찬했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요즘 같으면 창녀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구원하느냐는 말이지요. 구원에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잘났다, 에요. 나는 언제든지 나 혼자 살 수 있다. 남을 등쳐먹든지 이용하든지 나는 남에게 지는 것을 못 본다. 나는 남에게 양보 없다. 기어이 나는 내 것은 챙기는 대단한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다 그래요. 요셉도 마찬가지고 형제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누가 손을 댔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는 거예요. 개입해서 미워하게 만듭니다. 요셉을. 누가?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 종의 자녀들이 요셉이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니까 그 사랑받는 것 때문에, 물론 다른 형제들도 미워하지만 특별히 이 형제들이 미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미워하기 시작하게 되면 요셉은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왕따 당하는 겁니다. 사회 속에서 왕따 당한다는 이게 무슨 뜻이냐? 우리 집 근처에 쓰레기통이 있는데 아침에 운동하러 가다 보면 쓰레기통이 온천지 길바닥에 다 찢어져서 있어요. 그 범인이 누구냐 하면 개에요.

흉악한 개도 아니고 그저 가정에서 키우는 반려견이에요. 그런데 그 개는 주인이 그냥 내다 버린 거예요. 키우기 귀찮아서 내다 버리니까 이 개가 스트레스 받아서 화가 난 거예요. 분풀이를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온 동네 쓰레기통은 다 찢으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못 찾아서.

사람이 어떤 때 화를 낼까요? 본인이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먼저 정해놓은 것이 있는데 사회가 세상이 내가 딱 정해놓는 내 기준에 부합되지 않을 때 그 분노를 사회를 향하여 터뜨려 버리는 겁니다. 술을 왜 먹습니까? 분노 때문이에요.

사회에서 종일 무시당해서 어디에 풀어야 되거든요. 술 먹는 순간 자기는 천하에 절대적인 신이 돼버려요. 남들에게 시키고 명령하고. 왜? 평소에는 늘 지시받고 명령받았기 때문에 그 울분을 딴 데 쏟을 데가 없어요. 술집에 가서 쏟아내는 겁니다.

나는 정말 착하고 싶어요. 사회가 나를 가만두지 않아요. 이 세상이 나를 건드려. 그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요. 폭발해.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지요. 정말 돈도 없고 힘이 없을 때는요. 사회가 시키는 대로 꾹꾹 참으면서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수철처럼 억눌린 것이 있어요. 언젠가 내가 돈 벌면, 로또 당첨되거든 보자는 식으로. 언젠가 내가 출세할 때 너 같은 인간들 내가 혼쭐낼 거야, 하고 복수하려는데 이것은 점점 더 자기생각이 점점 더 증강되고 강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형제들을 통해서, 이 사회를 통해서 요셉을 이 땅에서 매장시켜 버립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해요. 아버지의 사랑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형제들의 사회 속에서 왕따 당해서, 쉽게 말해서 세상에서 버림받은 겁니다.

요셉같이 버림받은 것, 그것이 정말 성도라면 이런 요셉이 우리 안에 다 들어가 있어야 돼요. 그게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서 요셉의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 요셉의 길을 가서 그 예수님이 아버지의 나라에 갔다면 요셉과 똑같은 대우를 사회에서 받을 때, 이게 바로 나를 구원하고자, 나를 천국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이다. 이게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은 내가 화를 낼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감사해야 될 문제다. 만약에 주께서 사회에서 나를 이렇게 인간대우 안 해주면 내가 얼마나 내 자랑을 하고 내가 최고인양 내가 한 고집하고 한 성격한다고 남에게 안 밀리려고 내 자랑하며 힘자랑하고 으스대며 허풍과 허세를 떨면서 평생을 나만 쳐다보면서 살았겠느냐 그 말이지요.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밀리고 잘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이여, 정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나를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받게 하는 이 속에 진짜 인간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그 길속에 유일하게 구원의 길이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예수님의 길이고, 그게 축복받은 족보입니다. 버림받는 것. 그것도 아무 이유도 없이, 출신 때문에, 자기 잘못도 아닌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에서 밑바닥 인생 살면서 버림받아 사는 것. 그 사람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주여, 주께서 조치 안했으면 나는 저 사람과 똑같이, 에돔의 자식들과 똑같이 지옥 갔어야 될 인간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남들 잘되니 그게 탐이 나고, 남 출세하니 같이 출세하고 싶고, 남들처럼 살고 싶은 그런 욕망이 왜 없겠습니까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보다 천국이 더 좋아지고 나보다 주님이 더 사랑스러워지라고, 주님 생각하라고 인도하시는 그 길을 도리어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