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34:5-8 / 모세의 죽음

정인순 2018. 5. 13. 16:13

 

음성            동영상

 

 모세의 죽음

 

이근호
2018년 5월 13일               

 

본문 말씀: 신명기 34:5-8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4: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죽습니다. 일반인들의 죽음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죽을 때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죽음은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마저 다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 죽음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을 빼놓고 그냥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 마저 사소한 일입니다.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모세는 모세 본인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의 살아있음을 증거해야 될 인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언약에 관한 내용이 다 말해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두 가지 점에서 인간의 육과 언약의 만남에서 드러나게 되는 한계를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공간과 시간입니다. 공간적으로 말해서, 모세는 이쪽과 저쪽을 가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요단강을 가운데 두고, 요단강 건너가면 약속의 땅이고, 요단강 건너가지 못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형편이라고 규정됩니다. 문제는 과연 약속의 땅, 약속된 내용의 전부를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모세의 죽음과 약속의 땅과의 연결점을 따져 봐야 합니다. ‘모세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면서 죽었다’는 그 내용이 약속의 땅이 품고 있는 약속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모세가 만약에 살아있으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쉽게 말씀드려서, 저기 땅이 있고,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어이 살아있는 모세를 죽게 만드는 그 원칙이 작용하는 바로 그런 원칙이 작동할 경우에만 약속의 땅입니다. 모세의 죽음과 약속의 땅됨이 관련 있다는 말입니다.

특정 지정된 장소를 약속의 땅이라고 따로 설정을 하는 것은 곧 일반인들의 죽음과 다른 ‘모세의 죽음’만이 정작 말하는 바가 말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17:1-3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 본문에서 모세는 일찍 천국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살아 있을 때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이 고정되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자신의 현 처지를 통해서 약속의 땅인 것과 아닌 땅을 구분시켜 줍니다.

약속의 땅이란 모세 본인에게 내려준 언약이 그대로 유효하게 살아 있는 땅입니다. 어느 정도로 유효하냐 하며는 모세 본인조차 못 들어가게 할 정도로 모세언약은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문제는 지리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람들은 모세가 가리키는 저 요단강 저편의 땅이 ‘약속의 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범주성으로 인하여 도리어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버린다는 점입니다. 느헤미야 13:26-27에 보면,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이방여인과 혼인하므로서 우리들은 이 땅에서 쫓겨났으니 이제는 이방여인과 혼인한 자들은 이혼하라는 겁니다. 그것으로서 약속의 땅의 거주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약은 끝까지 이런 식입니다. 인간의 행함 여부에 따라 이 약속의 땅의 거주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약속의 땅됨과 아니됨이 인간 행함에 달렸다고 보는 겁니다. 구약은 끝까지 이렇게 갑니다. 레위지파의 언약을 계속 고수합니다. 이게 바로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한계입니다. ‘땅’의 범주가 이 지상의 특정 공간 중심으로 짜여진 겁니다. 그 땅에서 쫓겨나가면 영영 구원은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나 후계자 여호수아가 아무리 백성들을 으르고 달래고 협박해도 후대 세대가 되면, 선조 세대가 만났던 하나님과 그 사건을 다 잊고 맙니다. 이는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 그만큼 세 대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지역과 기억이 나는 사건에 대해서만 그들은 언약이 약속의 땅에 정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저주가 꼬리에 달라붙어서 결국 그 사람의 일생을 전부 집어삼키게 됩니다. 아무리 과거가 멋있고 대단해도 지금 당장 오늘 살아남을 일이 인간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인간들이 쉬지 않고 죽음에 쫓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지자와 성도들도 그러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모든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은혜 받았다고 해도 지금도 와서 그 은혜 받은 느낌에 대해서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특정지역이 약속의 땅이라고 우겨도 그 약속의 땅이라는 지리성을 벗어나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죽음을 통해 이 공간성과 시간성을 극복하는 요소가 나와야 합니다. 모세의 죽음은 ‘언약의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겁니다. 즉 죽음이 다가 아니라 죽음을 물고서 생명으로 바꾸는 작업이 새언약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계속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 새언약이 오기 위해서는 먼저 모세 언약이 찾아들어야 합니다.

새언약 입장에서의 죽음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그 어떤 벌레도 통과하지 못하는 방충망 같은 겁니다. 즉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세상 전체를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범위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새언약의 가치가 삽니다. 새언약은, 인간이 죽어도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즉 구원이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새로운 범주로 인간이 찾고자 해도 찾아내지를 못하는 범주입니다. 그곳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려줄 수가 있습니다. 죽어도 갈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곳, 바로 그것은 새언약의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있는 줄로 몰랐던 그 세계에 횡재하듯이 들여다 보내준 그 기쁨을 늘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84강-신 34장 5 - 8절(모세의 죽음)201805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4장 5 - 8절입니다. 구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묘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우리는 모세가 여기 죽었다고 되어 있는 걸로 보고 있는데 원래 뜻은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된 겁니다. 그 취지가 “모세가 일백이십 세에 죽었을 때에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제거 된 것은 그 모세에게 붙어 있는 게 있어요.

모세라는 인간이 전에 수요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보편적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언약이 달라붙기 전에는 무엇이 달라붙어 있느냐 하면 바로 저주가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죽습니다.

이 달라붙었다는 표현을 제가 쓰는 이유가 그 항공기 엔진에 불이 나게 되면 꼬리부터 불붙기 시작하죠. 그래서 아무리 오래 살고 오래 살아도 그 꼬리부터 붙어 있는 저주의 불이 그 인생을 갉아 먹습니다. 갉아먹기 때문에 옛날에 잘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못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지금 옛날에 아무리 잘 살았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해야 돼.’가 인간이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뒤 따라오면서 계속 갉아먹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죽는다는 것은 갉아 먹힐 대로 갉아 먹히다가 전부 다 갉아 먹히는 거예요. 빼빼로 게임 알죠. 성인 남녀가 빼빼로 하나물고 서로 갉아먹기 하다가 서로 뽀뽀하면 다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죽음이 우리와 뽀뽀할 때 우리는 다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어요.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자 돈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 털고 가야돼요. 다 놓고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덮고 안보지만 사람자체가 누구나 성경입니다. 왜? 누구나 뒤에서 저주가 와서 갉아먹고 있고 본인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으니까요.

그래서 그 죽음을 ‘늙어서 죽겠다’라고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진리는 모르는 체 저주에 덮쳐서 강제로 납치되어 가지고 그쪽 세계로 가버리죠. 그러면 모세는 왜 있느냐. 사람은 죽기는 죽는데 왜 죽는가를 이야기 해주기 위해서 모세가 있는 겁니다. 왜 죽는가.

그게 모세가 그냥 개별적 개인이 아니고 보편적 인간입니다. 보편적 진리를 개인을 통해서 다 보여주는 그러한 위치에 모세가 있는 겁니다. 모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냥 보통 인간의 행동이 아니고 언약의 움직임라고 이렇게 모시면 되는 겁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참 감사할 일이죠. 왜냐하면 이야기를 백날 해 봐야 그쪽 경험과 이쪽 경험밖에 없지, 보편적인 것은 안 나타나거든요. 보편적인 것은 진리를 이야기 합니다. 세상 시작과 끝을 몽땅 다 알려주는 그런 횡재. 그런 기회는 성경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 일등이 되었을 때 그 사람 입장에서 제일 짜증이 나는 것은 로또 일등 된 이유를 남에게 설명할 때 이게 설명이 안 되거든요. 횡재니까. 어떤 방법이 없잖아요. 그냥 일등이 되어버린 거죠.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 이게 모세 어릴 때부터 정신 차리고 뭐 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이 그냥 찾아 온 거예요.

횡재한 거죠. 횡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횡재한 것은 설명을 못 할뿐더러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임의로 빼 갈수도 없어요. 그쪽이 나를 덮쳤으니까. 제가 지금 죽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뒤꼬리부터 있는 이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빼낼 수 없는 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면 이 죽음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얻는 이 꼬리부터 있는 이 횡재를 내가 귀찮다고 빼 버릴 수가 없어요. 달라붙어 있는 이 영생을.

그게 바로 보편자가 가지고 있는 특색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할 때에 살아 있는 내가 구원받았다 하지 말고 나를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 하면 죽음으로 데리고 가요. 죽음으로 데리고 가게 되면 이 죽는다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소한 일입니다. 죽는 것도 사소할 일이에요.

죽는 것도 사소한 일이라면 살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것은 당연히 사소한 일이죠. 보통사람들은 죽음을 통해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지만 모세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체제를 전부다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럼 보여주는데 뭘 보여 줄 것인가?

보여준다고 하니까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이주일. “뭔가를 보여드립니다.” 해놓고 뒤 돌아보면 뭔가가 안 나와요. 나중에는 담배 피워서 폐암으로 죽었지만. 아, 그거 보여줬네요. 담배 많이 피우면 암 걸리는 거. 맨날 뭔가를 보여주는데 오늘날도 설교하면서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한다”라고 하는데 실재로 여러분들이 사회 살면서 뭘 보여줬습니까?

우리가 웃음이 나는 게 당연하죠. 뭘 보여준 거예요? 어떤 걸 보여 준 겁니까? 그걸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정리해야 돼요. 모세가 보여준 것은 두 가지를 보여줬습니다. 하나는 장소적인 것과 또 하나는 시간적인 거. 지리적인 것과 시간적인 거. 이 두 가지를 보여줬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세입장에서의 하나님은 쉽게 말해서 횡재했다는 거죠. 횡재했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큰 일 날 뻔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안 만났으면 어쩔 뻔 했을까? 큰 일 날 뻔 했다.’ 너무 좋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주님 만나서 너무 좋아요.’ 이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연락이 되기 때문에 모세가 고민하는 수준하고 일반인들의 고민의 레벨이 달라요. 다릅니다. 세상을 보는 범주가 달라요. 모세가 죽는 것도 범주가 달라요. 일반인들은 늙어 죽겠지만 모세는 죽으면서도 무엇에 충실 하느냐 하면 모세 언약에 충실합니다.

언약 나오면 또 어렵게 시작하죠? 모세가 죽는 것은 모세 언약의 틀에 맞추어서 그 원리원칙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죽음조차도 모세언약에 합당하게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모세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죽으심과 마찬가지라 이 말이죠.

예수님 돌아가실 때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잖아요. 그래도 죽어야 되었던 것처럼. 그러면 그 죽으면서 뭘 보여준다고 하는데 뭘 보여주었느냐.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이라 했을 때 그 약속의 땅이 이미 확정되어 있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어디서 죽었느냐 하면 “모세가 죽어서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나니” 그리고 4절 끝에 보면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건너가지 못한다는 말은 경계선이 쳐있다는 말이에요. 이쪽도 모래고 저쪽도 모래고 같은 모래예요.

지금 모세가 죽은 모압 땅이 지금의 요르단이에요. 그리고 약속의 땅은 요단강 건너가면 여리고성 나오고 그 다음 아이성 이렇게 나오거든요. 예루살렘으로 통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하늘에서 보면 구글 지도하고 똑같아요. 여기 요단강 있고 이쪽에 요르단 땅 있고, 동쪽에는 요르단 서쪽에는 유대 땅이에요. 별거 없어요.

제가 어디에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교회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교회가 뭐로 만들었나 하면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이 콘크리트 벽에 벽돌로 만들었고 패널로 만들었거든요. 무슨 벽돌 안에는 천국이 있고 벽돌 밖에는 지옥이 있느냐 이 말이죠.

천국 지옥이 지역적으로 이 건물 안, 이 부동산 안에는 천국 있고 이 부동산 밖에는 지옥입니까? 아니잖아요? 예수님 안에는 천국이 있고 예수님 밖에는 지옥이에요. 그게 이 말이 뭐냐 하면 현재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으로서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모세 언약이 아니고 새 언약이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모세 언약의 기준에서 철폐해서 새 언약 시대에 들어 간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하나님께서 새 언약 이야기하면 될 텐데 모세 언약을 왜 이야기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모세 언약을 설명을 해 줘야 새 언약의 취지가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아닌 걸 거쳐야 되요. 아닌 걸 거쳐야 새롭게 되었을 때 ‘아, 그거 아니잖아.’를 한꺼번에 파악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요단강 동쪽에서 죽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를 통해서 이러 이러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 못 간다는 것을 모세는 마지막에 장렬하게 불꽃을 태우면서 자기 몸을 던져서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언약에 충족해야 된다는 것을, 언약에 충족하지 않으면 못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요건에 충족되지 않으면 못 간다는 말 중에서 ‘언약에 충족되지 아니 하면’을 잘라내서 버려 버리세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가 남느냐 하면 간단한 게 나와요. ‘못 간다.’ 인간은 구원 못 받습니다. 이걸 모세를 통해서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실을 설명을 안 해 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 모세 안 됐다. 조금만 노력 하면 들어 갈 수 있었을 건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이 모세의 죽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예요. 모세의 죽음은 못 들어가는 나라에 하나님 만나서 어째서 못 들어가는가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모세예요. ‘이랬든 저랬든 못 들어간다.’ 가 기초로 깔려야 돼요. ‘못 간다’가 기초가 되어야 해요. ‘못 간다’가 기초가 되었는데 만약에 가게 되었다? 횡재한 겁니다. 큰일 날 뻔 한 거예요.

바라기는 성령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매일같이 ‘큰일 날 뻔 했다’는 말이 계속 나오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나와서 제가 나중에 이야기 한 것처럼 악마에게 살살 빌면서 밥이나 먹고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계속 빌거든요. 그리고 집에 와서 ‘아휴, 큰일 날 뻔했다’ 하죠.

악마에게 빠질 수밖에 없는 이 허약한 몸이지만 ‘큰일 날 뻔 했다’ 하는 거죠. 왜? 모세 언약이 아니고 지금은 새 언약이니까. 새 언약 증거 하라고 우리의 이 몸을 아직까지 안 죽이고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저주도 꼬리에 붙었지만 축복도 같이 꼬리에 붙어 있으니까. ‘큰일 날 뻔했다’ 이게 성령의 기쁨이에요.

그러면 ‘큰일 날 뻔했다’가 만약 5월 12일에 ‘큰일 날 뻔 했다, 아휴, 다행이다’ 했으면 5월 13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는 됐다’입니까? 아니에요. 5월 13일치가 새롭게 ‘큰일 날 뻔 했다, 아휴, 다행이다’ 가 기다립니다. 또 내일이 되면 내일 치의 ‘큰일 날 뻔 했다, 아휴, 다행이다’ 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걸 정리하게 되면 “매일 죄 짓고 사세요.”입니다. 매일 죄 짓고 사는 겁니다. 안 지을 수가 없어요. 타고 난 본성이 죄고 할 수 있는 모든 재주가 비비는 재주밖에 없고, 내 몸을 챙기는 재주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이런 재주. 나는 내 몸을 살리고자, 나만 살고자 하는 재주와 그리고 그런 인간을 살리시는 재주가 함께 복합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할 일은 죄 짓는 거예요. 나만 살겠다고 설쳐대는 겁니다. 그리고 장렬하게 죽는 겁니다. “나 평생 죄 지었는데 천국 가거든.” 이런 재주는 주님이 모세 안에서 발휘하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발휘해 주는 거예요. 어쨌든 모세는 경계선에 있습니다. 이 땅에는 경계선이 설치되어 있고 이쪽이면 천국이고 이쪽이면 지옥이라는 것을 죽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모세를 통해서 모세 코앞에서 그들에게 눈으로 목격하게 만들었다는 그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리고 그게 모세 언약이에요.

제가 주일학교 설교 할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방주 바깥에 있는 사람과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과 눈으로 보면 똑같아요. 물이 오기까지, 홍수가 오기 전까지는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물이 오니까 달라도 어찌 그렇게 다른지요. 저쪽은 물에 다 잠겨 버리고 이쪽만 물에 떠 있고.

그래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물었어요. “너는 물에 가라앉는 게 좋으니? 물에 뜨는 게 좋으니?” 물에 뜨는 게 좋대요. 물에 뜨는 것이 좋으려면 그 때 물이 오기 전에 조치가 있어야 해요. 조치가. 벌써 다르다는 이유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해요. 다르다는 요건에 준해서 우리가 살아가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거.

선악 자체를 초월하는 거예요. 선이냐, 악이냐 그것을 묻는 거 자체가 전혀 이거는 성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러한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예를 들어 봅니다. 저는 드라마를 잘 안보지만 예능프로에 보면 거지 연기하는 게 있어요. 거기에 등장인물들이 고생 무지하게 하고 어떤 사람 보면 강호동이도 나오고 하는데 아무 집에 가서 밥 달라는 거지 노릇하는 예능프로도 있어요. ‘한 끼 줍쇼’라고.

제가 그걸 보고 참 속이 상했어요. 왜냐하면 강호동이가 그 밥 한 끼 먹으면서 거지 노릇하지만 그 한 편 출연하는 강호동이의 출연료는 수천만 원을 넘잖아요. 역할은 거지인데 수억 벌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완전 눈속임 아닙니까? 거지가 아니면서 거지 노릇하면서 돈 버는 거예요.

악인도 아니면서 악한 역할 하면서 사실은 천국 간다면 결국은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큰일 날 뻔 했다’는 그런 심정으로 우리의 주어진 숙제와 역할을 거침없이 우리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거침없이. 못할 게 없어요. 망하는 역할 하세요. 망해도 출연료가 수억입니다. 수억이 뭡니까? 영생이에요. 영생.

이 땅에서 망해도 영생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거지 나사로 아닙니까? 거지 역할인데 나중에 역할 끝나고 보니까 천국 가서 복락을 누리고 있다는 이 말이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갔습니다. 진짜 못 갔습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이미 모세와 엘리야는 천국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는 못가는 역할로 간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죄거든요.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되는 이유가 예수 믿기만 하지 말고 행함을 보태라고 하잖아요. 예수 믿는 것도 죄고 거기에다 행함 보태서 믿은 그 행함도 죄예요. 그 역할 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 역할 해줘야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너무 교인들을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드는데 사람이 의인역할은 하기 쉬워도 죄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이 허락이 안돼요. 자존심이. 타고난 본성이 용납을 못한단 말이죠. 다시 해보겠습니다. 진도 나가겠습니다.

모세가 할 것은 이미 확정된 장소가 이미 있고 그 장소에는 나는 못 들어간다는 이겁니다. 이 말은 천국은 이미 결정 났다는 겁니다. 언약으로 이미 결정 난 거예요. 그거 하나 알려 줬습니다. 장소적으로. 이게 문제 있다는 것은 조금 있다 말씀 드릴게요.

두 번째로, 시간적으로 모세가 아무리 해도 그 당시 사람은 이걸 인정해요. ‘아멘’ 하면서. 여호수아가 ‘아멘’하니까 그 백성들이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다음에 사사기 들어가 버리면 모세가 죽으매, 또 여호수아가 죽으매, 옛날에 하나님이 이루었던 모든 일을 다 그 후 세대가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적으로 조금만 지나가 버리게 되면 이 약속의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고 개판되어 버립니다. 결국 모세 언약은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어떤 자기의 결심이라든지 자기의 노력으로라도 이미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이걸 임의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15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다. 그러면 15년 후에 지금 상태는 ‘그때 뭐 때문에 은혜 받았지? 은혜 받은 상태가 어떤 거지?’ 다 잊어 버려요. 시간적인 한계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교회 앞자리에 오니까 은혜 되더라. 그런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세상에서는 ‘교회 앞자리에서 무슨 은혜를 받았지?’ 또 다 잊어버려요.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동영상보다도 여기에서 생중계 듣는 게 낫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성령께서 모이기에 힘쓰라 하잖아요. 그 만큼 우리가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느긋하지만 나중에 치매 걸리면 소용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결심했어. 나는 믿어. 나는 이제부터 주님을 사랑해.’ 이게 다 헛말입니다. 아무 소용없어요.

‘이제부터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말씀이 지적한 대로 바르게 살겠습니다.’ 기도해도 내일 되서 집사님 볼일 보시면 다 날라 가고 흩어져 버려요. 시간적 공감적 제약 때문에. 이게 바로 모세 마감, 모세 언약의 한계입니다. 그 한계를 어디서 보여주는가. 모세 언약을 따랐던 이스라엘 역사가 그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스라엘 땅을, 이것을 지켜야 구원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해서 구약 끝까지 갑니다. 심지어 유대인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 이스라엘 땅, 자기 지역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습니까?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성전을 수축해요. 너희들의 집은 잘 살면서 성전은 아주 폐허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서 꾸중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특히 느헤미야에 13장 26-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 하게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느헤미야를 보는 사람들이 저에게 질문하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이겁니다. 왜 성경은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느헤미야까지 율법대로 해야 하는가? 느헤미야는 두 가지입니다. 십일조 해야 되고 약속의 땅 버리지 말기. 약속의 땅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전을 유지하라는 이야기예요. 성전유지하고 십일조 해야 하고 또 한 가지, 느헤미야와 에스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방여인과 이혼하라는 겁니다. 이방 여인과.

이방 남자와 이혼하라는 말은 없어요. 이방 여인과 이혼하라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한다는 목사님들이 이 대목을 설교하기가 굉장히 난처한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데.’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 에스라, 느헤미야는 왜 그렇게 주장하는 지를 그 내력을 모르는 거예요.

특히 말라기 같은 경우에 십일조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말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뭐냐 하면 “레위 인들을 잘해줘라, 레위 언약은 영원함이라.”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예수님 피만 믿으면 되는데 레위 언약을 왜 자꾸 언급하고 레위 인들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지, 레위 인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계속 유지했다는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에 대해서 제가 언급을 하겠지만 왜 자꾸 이렇게 어떤 특정 이방여인과 이혼해야 된다고 해서 나중에 강제로 이혼 다 해요. 이혼 다 해서 친정에 다 보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죠. 안 믿는 여자와 결혼해서 구원 받느냐는 겁니다. 안 믿는 여자와 결혼해도 구원 안돼요.

왜냐면 처음부터 구원이 안 되니까. 처음부터 구원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안 믿는 여자를 내 쫓아라, 십일조 해라, 성전을 지켜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이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성 때문에, 육적인 한계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걸 우리가 그걸 충분히 부인해도 평소에 이런 걸 많이 느껴요.

특히 천주교인들은 안방에 가게 되면 다른 방에는 그런 게 없는데 안방에 가면 제일 중심지에 티비 옆에 제일 중심지에 뭘 하느냐 하면 마리아 상을 놓고 거기에서 빕니다. 특정 지점을 공간적인 의미를 둬요. 그리고 특정 시간, 그 시간에 기도해야 그 기도가 효력이 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것의 문제점이 뭐냐, 그 문제점은 모세 언약의 끝자락이 어떻게 끝나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쫓겨 갑니다. 범주가 시간과 공간 범주를 인간은 못 벗어나요. 모기가 방충망을 뚫고 못 가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계속해서 우리를 앞으로 차단합니다. 절대로 우리 몸으로 율법 지켜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계속 차단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으로 와서 어느 쪽으로 율법 밖으로 나가느냐 하면 율법 속으로 들어와서 일점일획까지 다 이루시고 율법을 뚫고 율법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율법 밖에 나가서 따라 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 쪽에서 율법 밖으로 나간 그 개구멍을 통해서 다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성령 받은 우리는 율법을 충분히 알아요.

알고,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거 알고 그렇게 그 구멍 따라서 충분히 앞뒤 좌우 온 몸으로 느끼면서 나중에 빠져 나가게 되면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주님이 성령 안주셨으면 큰일 날 뻔 했다’라는 기쁨이 확 다가오면서 전에 자기가 자기의 양심과 마음과 정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게 뭐냐를 봐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 못 지켰잖아. 너는 왜 믿음이 오래 안가? 너는 왜 앞자리 안 앉고 뒷자리 앉아?’ 이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계속 주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인생이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칼날’과 같아요. 칼날이 측면에서 보면 단단한 쇠뭉치 같은데 측면이 아니라 단면에서 보세요. 결국은 가늘어 져서 날카롭게 되잖아요. 날카롭게 다 떨어지죠. 측면에서 보면 뭉뚱하지만 세워서 단명으로 보면 면이 안보일 정도로 날카롭잖아요.

모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내가 행하고 믿은 거 또 믿고 지킨 거 또 지켜 보았자 그것은 죽음으로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죽음을 유발하는 요인들이에요. 칼날 같아서. 언제 건 우리는 다 언약에 의해서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우리 남은 생을 ‘왜 죽는가? 왜 특정 지역, 특정 시간, 특정 기도, 특정 헌금 이것들이 왜 나를 구원 못하는 가?’를 생각하며 그것이 새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의 오심을 인해서, 그 피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용서로써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편자 입장에서 이제는 모세 입장에서 마음껏 드러내라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으면 안 되고 살아야 된다고 고집 부리는 그것이 사실은 언약 적이 아닌 외침인 것을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언약이 왔다면 우리가 무엇에 시달리고 무엇에 조마조마하고 무엇에 간 떨어지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낮은 범주이고 갇힌 범주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