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공은주 안양20180511a약2장12절(교환)-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2장12절 할 차례입니다. 2장12절에 보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심판의 반대말이 긍휼이에요. 성경은 심판부터 먼저 이야기해요. 심판부터 먼저 딱 이야기하게 되면 “어머야? 큰일 났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쫙 깝니다. 일단은.
심판을 쫙 깔아 놓고 그 심판을 깔 때 그 원칙이 있어요. 어떤 인간의 행함도 심판을 이길 수 없다. 요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그 위에 10절, 11절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다고 분명히 10절에 나와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 말씀하는 것은 일단 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행함으로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요게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요게 신약이라는 말이죠. 신약이라면 그러면 구약 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노아 외에 모든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 하면, 다 물속에 잠긴 거 아시지요? 노아 외에. 그러면 심판이 오기 전에 홍수 오기 전에 노아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노아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노아에 있는 것이 그들이 없는 것이 뭘까요? 지금 심판이 딱 터지니까 노아 빼놓고 나머지 다 물속에 잠겼습니다. 그 물속에 잠긴 사람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어요. 그런데 먹고 마시는 게 잘못입니까? 그러면 노아는 안 먹었어요? 노아는 장가갔으니까 자식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 다음에 사고팔고. 장사해야 될 게 아닙니까? 생산이 남게 되면 나머지는 물물교환 하던지 팔고 사고 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일상생활인데 일상생활을 나쁘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안 나쁜 게 뭐가 있겠어요? 뺄 게 없어요. 일상생활인데. 일상생활을 충실히 하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죠.
어떤 가정에 애가 태어났는데 10년 동안 부모 밑에 있다가 20살 돼서 정성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다. 홍수가 떨어졌다. 그 애가 20살 동안 살면서 그다지 나쁜 것을 뽑아내려 해도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가 주신 돈 가지고 공부하면서 이제 20살 돼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나쁜 짓 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잖아요. 태어난 지 6개월 됐다. 태어난 지 1년 됐다. 애가 기저귀에 오줌 누는 게 잘못입니까?
그런데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노아라는 인간의 행동과 노아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사이에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게 있어요. 없는 게. 그걸 창세기6장에서는 두 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가 있느냐 하면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더라.
실험실에 콩이 열 개가 있는데, 콩과 콩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없어요. 같을 수는 없지요. 약간 찌그러진 것, 동그란 것, 납작한 것 있지만, 그래도 납작된 콩이고 동그란 콩이고, 콩 콩 콩이에요. 똑같아요. 다 콩이란 점에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핀셋을 가지고 이쪽에 있는 콩 열 개중에 그 중에 한 개를 끄집어내서 이쪽으로 옮겼다면 같이 옮김을 당하지 않은 콩들이 그 옮기는 콩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니는 뭐가 잘나서 저쪽으로 가느냐” 라고 따지겠지요. 따질 때 그 옮겨가는 하나의 콩 입장에서는 “나는 이래서 너희보다 더 훌륭해.” 하는 말을 할까요? 못할까요? 못하지요. 그러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행함에 속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노아한테는 뭐냐 하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 그러면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요건 붉은 걸로 할게요. 하나님의 심판이지요. 아까 노아의 물 심판 했잖아요. 야고보서2장 10절에서는 뭐로 심판한다 했습니까? 야고보서2장 10절에서는 이걸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못 지키면 다 못 지키지요. 이게 율법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하던 것이 신약 때는 율법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를 2장10절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은 주신 적이 없어요.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경 듣기를 원하지만, 동창생이 미국가자 하면 후다닥 갑니다. 성경을 언제 봤는지...., 미국 갑니다. 미국 갈 때 그래도 성경책 들고 가야지. 그런 일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평소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준 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만 지켜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지킨 것을 뭐로 주느냐 하면 행함 차원이 아니고 뒤에 하나 더 있는 것. 은혜 파이프를 통해서 은혜를 줘버립니다. 이게 바로 선물이에요. 마지막 심판할 때 “니 어떻게 살았느냐?” 를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준 선물 아직도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내가 준 선물. 그런데 주님이 준 선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과 별개로 주신 거거든요. 이걸 로마서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 외라고 해요. 율법 외. 율법 있고 그리고 율법 외 있고.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지만, 율법 외로 뭘 얻는다 했습니까? 의인이 돼요. 그러면 내가 의인됐다면 내 행함이 끼어 들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내 행함이 끼어 들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행함이 끼어 들 게 없는데도 끼어 들겠다할 때에 그것에 관한 방법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율법을 들이대 버립니다. 들이댈 때 이렇게 합니다. “야, 너 이리와.” “너, 율법 몇 개 지켰어?” “한90% 지켰는데요.” “그러면 10% 못 지켰잖아.” “그건 뭐 인간인 이상 못 지켰지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거예요. 자기 딴아 99%지키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 어긴 게 돼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인간이 뭐에 집중한다는 것을 하나님이시니까 모를 일이 없지요. 그걸 간파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아주 쉽게 했는데, 문제가 그냥 쉬운 게 아니에요. 여기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행함으로도 의로움을 얻지 못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데 은혜를 오늘 12절에서 13절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하고 같은 말인데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은혜가 뭐라고 되어있지요? 긍휼. 긍휼은 불쌍히 여김이거든요. 불쌍히 여긴다는 거예요.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내가 손을 안대면 니는 끝났어!” 이게 불쌍히 여김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김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겠어요? 사라져야 되겠어요? 계속 유지되어야 돼요.
요한계시록2장에 보면 에베소교회에 하나님께서 지적하기를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하는 거예요. 첫 사랑을 첫 긍휼로 바꿔봅시다.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처음에 왔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을 해놓고 한 10년, 20년 복음알고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헤헤거리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뭘 잃어버린 거예요? 첫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내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이란 이유가 없다고요.
여러분, 구약에 보면 율법 없이 구원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율법 없이 구원된 사람이에요. 본인은 율법 없이 구원된 줄 몰랐어요. 몰라가지고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함을 가지고 자기한테 쫙 깔아놨습니다. 아들7명이고 딸3명이었습니다. 철없는 애들이 생일잔치를 하잖아요. 그러면 욥이 아버지가 되어서 불러요. 그냥 단체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불러가지고 그 애를 위해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
최초의 제사는 번제에요. “하나님, 얘가 철딱서니 없어서 함부로 까불고 촐랑댔던 것을 제 번제를 받고 어여삐 여겨주세요.” 하고 이렇게 했어요. 한 명씩 한명씩 불러서 다 그렇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그 욥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욥이 잘못 생각한 거죠. 욥의 자기 행함이 섞였겠어요? 안 섞였겠어요? 당연히 섞이지요. 정성을 그렇게 했잖아요. 정성을.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 중보기도가 그거 아닙니까. 저 자식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중보기도를 했는데 만약에 그 자식이 신천지에 빠졌다 하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얼마 전에 신천지 이야기했지요. 우리 아는 집안에서 약사 돈 갔다 바쳐가지고 납치해가지고. 아직도 납치해있어요. 경찰 찾아오고.
그럴 때 내 자식을 이만큼 서른 살까지 키워났는데 그것도 잘 키웠는데 신천지에 빠졌을 때 부모심정이 굉장히 아프지요. 남의 자식 신천지에 빠져도 상관없어요. 내 정성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욥의 시작은 이상하게 욥이 믿음이 있는 거 같은데 이게 믿음에 테두리는 있어요. 테두리는 있는데, 믿음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알맹이는 자기 행함으로 꽉꽉 채워놨어요. 욥이 처음에. 꽉꽉 채워놨습니다.
주께서 그 행함을 다 들어내십니다. 다 들어내면서 뭘 하느냐 하면, 일이 이렇게 잘 된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바친 것과 연결돼 있던 연결고리를 다 끊어버려요. 니가 이렇게 잘된 것은 니 행함 의로움이 아니라는 그걸 다 들추어내버립니다.
그래서 중간에 욥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말고 일찍 죽이셔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발언까지 해요. 자기 창조했음에 대한 거부로 나와요.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 친구 엘리후가 드디어 욥 입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시비거리가 터져 나오게 하는 겁니다. 토할 때 신물까지 나오듯이 액이 나오듯이 속에 있는 게 다 나왔어요. 욥도 죄인이었던 겁니다. 욥도 죄인이었습니다.
그걸 종교로서 카바를 했는데, 다 드러내니까 나 잘못 없고 이런, 이런 일은 누구 잘못이다? 하나님의 조치가 불합리합니다. 하나님이 뭔가 문제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엘리후가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피조물이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보고 저렇게 뭔가 문제 있다고 욕을 하는 저런 사람이 드디어 욥의 본성이었다고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그쯤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버릴만한데 하나님의 긍휼이 잘해서 플러스로 주님의 은혜를 주는 게 아니고 잘했음을 바닥을 드러냅니다.
뭐로 보느냐 그냥 니가 못난 존재라고 드러내고 그 다음에 긍휼을 은혜를 줘버려요. 줘버리면 나중에 욥기 42장에 보면 나오지요. 그렇게 말 잘하던 욥은, 얼마나 욥 이야기가 욥기에 가득 차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마지막에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라는 거예요. 할 말이 없어버려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왜냐하면 구원된 자는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 살 때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같은 교인들하고 비교해요.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비교하고, 목사하고 괜찮은 목사하고 비교하고 그리고 나하고 비교하고. 이 땅에 비교가 된다 말이죠. 그게 변화되어야 돼요.
욥이 왜 그렇게 욕을 했느냐 하면 친구하고 자기하고 비교한 거예요. 욥을 보면서 우리가 세상체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사탄이 뭐냐 하는 거예요. 사탄이. 욥기1장에 나옵니다. 사탄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탄의 그 생각을 이렇게 알려준 주님께 감사합시다.
사탄이라는 게 얼굴 시커멓고 퍼렇고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탄이 한 내용이 성경에 이렇게 알려줬어요. 그 사탄의 이야기를 한 번 적어볼게요. 요 생각이 사탄입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이게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알아요. 인간은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있어요. 원래 인간을 사탄이 그렇게 변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가려면 변해진 인간을 또 바꿔야 돼요.
자꾸 제가 일방적으로 변한다 해가지고, 괜찮은데 왜 그러느냐 하지 말고 지금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이게 벌써 우리의 본래의 내가 아니라니까요. 본래의 내가 아니에요. 본래 주님이 만드신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부모의 죄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성경 크게 보게 되면 요번 수요일에 했지만, 내가 어떠함이 아니라 했지요. 아담이 어떠했다. 라고 해야지 나는 이런 짓을 했어요. 나는 맴매 맞아야 돼! 나는 나쁜 사람이야. 이러지 말라는 말이지요. 아담자체가 나로 하여금 그런 바닥을 냈는데 왜 개별자로 자꾸 머물고자 하느냐 말이죠. 이건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개별자, 보편자 이 내용은요, 우리는 개별자에서 개별자는 가짜에요. 가짜는 이미 가짜기 때문에 진짜의 나라는 못 갑니다.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바꿔야 돼요. 바꾸려면 개별자를 믿지 말아야 돼요. 보편자를 믿어야 돼요. 나를 믿지 말고 보편되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한다니까요.
내 어설픔이. 내가 100점이 안돼요. 99점까지 가도 99점해도 아까 나왔잖아요. 야고보서2장10절,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빵점이다. 빵점이에요. 사탄을 통해서 욥은 다른 사람하고 비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욥이 어려웠을 때 친구 세 명이 찾아오잖아요. 세 명 찾아오면서 욥이 자기의 구원을 받았느냐 인데 구원 테두리는 사실은 욥이 잘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정해놔서 한 거예요.
욥을 통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을 영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고난 뒤에 뭐가 나오느냐, 고난 + 영광이 나오지요. 그러면 고난이 없다면 영광의 길로 간다? 안 간다? 못가지요. 고난 가야 그 길이 영광의 길인데, 고난 안 들어가는 길이 무슨 영광이에요. 그건 길이 끊어져있습니다. 가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게 고난을 임의로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 고난을 임의로 하면 안돼요. 왜 성질대로 살아야 되느냐 하면 성질대로 살게 되면 사람은 성질만 부리는 게 아니고 성질 + 뭐를 겨냥하느냐 하면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성질은 두 가지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나쁜 성질 발휘는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요거 하고, 이것도 참 나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좋은 일을 했으니까 내가 기대한 것이 엄청 빠른 시간 내에 성취될 것이라는 이 두 번째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교회 가서 착한일하니까 자식들한테 복이 올 것이라는 그 기대. 누가 이걸 부정할 거예요? 이게 본심인데. “아니야. 아니야. 이건 기복신앙이야.” 여러분, 기복신앙을 없애는 것도 기복신앙이에요. 기복신앙을 없애는 그 착한일이 기복신앙 안했을 때 주어질 보너스 까지 다 줄 거라는 기대를 인간은 하게 마련이에요.
주님께서 욥을 어디까지 낮추느냐 하면 아예 모든 기대가 자살로 이어지는 지점까지 가게 만드는 겁니다. 욥에 나오는 이야기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이제는 나는 소망 없다. 이걸 욥기에서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나는 이제 소망 없다. 끝났어! 친구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친구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요걸로 얼마 안가서 죽는다. 욥은 얼마 안가서 죽는 줄 알았어요. 죽는다.
하나님하고 사탄하고 했던 내기 중에서 딴 거는 다 건드려도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 를 욥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처음에. 처음에 몰랐어요. 하나님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까닭 없이 하나님을 안 믿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까닭 없이 안 믿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를 제거하느냐 하면 요걸 제거하는 거예요.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이유 없음’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사랑.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아까 했지요. 요걸 본문에서 긍휼이라 했습니다. 이게 긍휼이에요.
새로운 손님이 오셔서 시간이 지났지만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건 다시 해도 괜찮아요. 야고보서2장12절부터 하는데, 12절하면서 제가 10절과 연관시켰습니다. 10절에 뭐라고 했던가요?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날아간다. 그걸 제가 밑에 깐다 했지요. 그걸 제가 율법을 깐다 했지요. 율법을 깐다했는데 처음에 구약 때 노아 때는 뭘 깐다고 했어요? 물로 깔았지요. 물로 깔았을 때 물에 빠진 사람과 노아의 평소의 행함에 차이가 있다? 없다? 전혀 없어요. 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았으니까. 그러면 노아가 그들에게 없는 게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6장에 보니까 노아는 뭘 입었더라?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은혜. 그런데 은혜를 입은 것을 이걸 신약의 방식으로 한다면 신약에 율법을 깔아버려요. 전에는 아까 뭘 깐다고 했습니까? 물을 까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뭘 깔았다? 불을 깔아버렸어요. 불을 깔았는데 신약에서는 율법을 깔아버립니다.
율법을 깔아놨는데 그럼 율법을 지키면 되지. 하는데 10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것도 10년 이상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려요. 율법은 12절에 보니까 율법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심판의 역할을 해요.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리 되어 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여러분이 저한테 묻는다면 12절이 무슨 뜻인가, 물어보면 이런 거예요.
성경에서 좀 아는데, 말씀에 비하니까 말씀이 딱 와보니까 “나는 심판 받아야 마땅한 존재다.” 라는 그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심판받아 마땅하다. 왜?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반이 되니까. 율법 위반자로서 무빙,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심판받을 자로서 무빙, 움직이는 겁니다. 심판받을 자로 움직인다는 말은 “그러면 가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늘의 천벌 받고 저주받으면 너는 어떻게 살래?” 이리 되잖아요. 그게 바로 신약의 13절이 문제에요. 심판을 먼저 깔아놔야 심판 안 깔린 곳에는 뭐가 의미가 없냐, 긍휼의 의미가 없어요. 긍휼이란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거죠.
그렇다면 사랑은 뭐라고 했어요? 이유 없는 게 사랑이죠. 그런데 긍휼은 왜 이유가 없어야 되느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불쌍하니까. 탕자비유 알지요.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습니다. 탕자는 저기 서있고 아버지는 여기 있어요. 탕자가 먼저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라는 말도 못하지요. 나는 나를 아는데 아버지의 아들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라고 서있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안 받아줘도 탕자는 불평한다? 아니에요. 불만스럽다? 아니에요. 왜? 자기 자신을 아니까. 지옥가도 가야 되는 걸아니까.
그 때 아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는 사람은 긍휼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를 찾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고 모델이 어떤 모델이냐 하면 바로 찾아야 될 인간의 모델로 아주 적합한 거예요. 자기의 행함과 의가 삽입이 안 되었으니까요. 오늘 아침 뉴스에 어떤 사람이 법원에서 14년형을 받았는데 그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느냐 하면 아버지가 카드 값을 안 갚아준다고 해서 아버지를 죽여 버린 자에요. 18년인가 14년인가 그렇게 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가 왜 아들의 카드 값을 갚아야 되지요? 경상도 말로 호로 자식이지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호로 자식입니다.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데 구원하겠다고 교회오고 있어요.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 있어요. 제가 설교할 때 했거든요. 교회 올 때는 구원 받으러 오면 안 된다고요. 처벌해달라고 와야 되지요. 왜냐하면 주님은 처벌자고 나는 처벌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 와야 되지 갓 바위에 비는 것처럼 교회 왔으니 복 달라. 무슨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느냐 말이죠.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교회가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성경도 몰라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는지 몰라요.
그럼 교회에서 뭐냐, 댓다 행함을 강조해요. 법을 해가지고. 그럼 모델이 누구냐, 목사가 모델이 돼버리지요. 나는 언제 나중에 목사처럼 되면 내신 성적이 우수한 등급이 되겠지. 교지를 받으면 되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걸 이야기했다고 했어요? 행하지 못하는 걸 이야기했어요? 행하지 못한 걸 이야기해서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구분시키는 기준이 바로 성경이에요.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니 봐, 못 행하지. 하지만 이 율법은 누가 가지고 간다?” 주님이 가지고 가지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버리면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탕자가 됩니다.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탕자가 되어버려요. 심판받아 마땅함을 아는 사람에게 이것을 가지고 12절의 자유함의 율법이에요. 아, 참 이 내용이 어렵지요.
율법 앞에 율법은 자유를 안 줍니다. 안 주는데 율법 앞에 자유를 붙였다는 이 말은 율법의 기능이 결국은 무엇을 양산한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나타내요. 자유라는 말이 어려우면 당당함, 더 노골적으로 뻔뻔스러움, 탕자만큼이나 뻔뻔스러움. 아버지 재산 다 날려놓고 무슨 낯짝을 들고 이제 와서 종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탕자가 주님의 하시는 긍휼에 절대적인 재료가 돼요. 사례가 된다고요. 왜? 더 이상 내 행함과 내 의 자랑거리가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걸 철학적인 용어로 적합품. 적합성 적절하다. 적절성이란 말을 한 거예요. 적절성이란 예를 어느 강의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울산강의에서 했어요. 유리가 아름답다. 유리가 아름답지요. 유리가 아름답다고 해서 톱으로 쓰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지요. 철은 투박하고 보기 싫지요. 하지만 톱으로 쓰는 데는 유리로 만들면 안 되지요. 철로 만들어야 되지요. 모양을 떠나서.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떠나서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천국에는 아름다운 세계에요. 그러면 천국이 아름다운 세계라고 이쁜 사람들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가는 데가 아니지요. 그럼 뭐냐, 천국의 적합성이 있어야 돼요. 천국의 적합성은 예수님이 갔던 코스로 그대로 밟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보고 뭐냐, 자기 십자가 지라고 했겠지요. 그 십자가라는 말이 예수님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안지고 제자들보고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키지요. 못 지키는 말씀하신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거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고요. 제자들이 그 이야기 듣고 예수님 다 떠나버렸어요. 나중에 십자가 질 때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이야기가 풀어서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닙니다. 다시 성령이 올 때 성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완성했던 예수님의 일대기가 들어있지요. 그 일대기 성령의 일대기를 선물이란 이름으로 또는 은사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덮쳐버려요. 덮쳐버리면 제자들은 본인이 결정하지 않고 주께서 가신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어요. 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그 가면서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가면서 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이루었던 것과 같이 병행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성령 받고. 성령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게 시편51편에 다윗이 성신 받고 하는 고백이 뭐냐 하면, 주께서는 번제도 원치 않고 제사도 원치 않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잖아요.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말은 본인이 본인을 뭐라고 본다는 말입니까? 뭐로 본다? 상한 심령으로 보는 거예요. 그랜드케냐 가서 찍은 사진 말고 엑스레이 사진을 내놓는 거예요. 엑스레이 사진 시커멓지요. 폐병 한 5기되면 암 말기쯤 되면 어떻게 됐습니까? 시커멓지요. 다 썩었지요. 상한 심령이지요. 그걸 자랑스럽게 내놓는다니까요. 그게 자랑스러워서. 그게 뭐냐 뻔뻔함이라니까요.
뻔뻔함. 이 말은 뭐냐 하면 늘 무릎 치면서 “주여, 오늘도 왜 내가 살아있는 게 이상합니다.” ‘왜 살아있지? 오늘도. 이상하게 왜 살아야 되지?’ 이걸 통해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는 억지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것 때문에 마귀한테 납치당해서 모든 말씀을 자기 잘난 맛으로 지키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도 안 지킨 게 돼버려요.
그럼 내가 살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는 어디서 와야 됩니까? 사랑은 이유 없다 했지요. 오늘 논리를 여러분이 연결을 다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력 믿고 갑니다. 사랑은 이유 없지요. 그럼 이유 없으니까 이유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게 어떤 사람이냐, 그게 사랑 받은 사람이거든요.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유 있어요. 어느 쪽으로. 긍휼. 긍휼로 가버리면 내가 왜 살아야 되느냐 하면 천하의 죄인이 나 같은 죄인이 또 있을까? 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긍휼이 현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이 될 수가 있는 문제인데요. ‘싹쓸이 염원’입니다.
이게 예상보다 굉장히 말이 어려워요. 싹쓸이라는 말은요, 고만 하나님 같이 이 순간에 유황불에 전부 다 안양이고 뭐고 대구 간에 홍수에 물 휩쓸리듯이 핵 미국 김정은 싱가포르 싹 쓸어 다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 니 죽고 내 죽자는 이야기죠. 그런 생각 드신 적 있지요? 에이~ 이참에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아주 말은 어렵지 않고 쉬워요. 싹쓸이염원, 그러니까 기대 희망이 뭐라고요? 내용이? 니 죽고 나 죽자. 싹쓸이 해버리자 에요. 자식이 결혼하고 뭐, 딸하고 살고, 뭐고 간에 싹쓸이 다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아주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미래를 앞당겨 주옵소서.’ 이리 되면 굉장히 이게 설명이 어렵게 돼요. 미래라는 말은 도달되지 않았잖아요. 도달되지 않은 것을 지금 성령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이미 도달된 거예요. 그러면 싹쓸이 되고 난 뒤에는 뒤에 남는 건 뭘까요? 오직 주의 백성과 천국과 지옥으로 남겠지요. 그 삶을 미리 벌써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벌써부터.
그렇게 되게 되면 누가 입맛이 없느냐 하면, 아까 욥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사탄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했지요. 그게 뭐냐,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 했지요. 어느 인간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이리 했어요. 뭔가 챙기는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이 그동안 줄곧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그런 노하우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모든 것이 일이 마감됐어요. 끝나버렸어요. 싹쓸이 됐으니까. 더 이상 꿈틀거리는 지렁이 하나도 없어요. 다 끝나버린 미래를 내가 미리 삶을 살게 되면 그 휩쓸려 간 사이에 거기에 누가 휩쓸려갔어요? 까닭 없이 하는 이것도 같이 휩쓸려 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유 없이 구원된 겁니다.
그동안 정말 교회에 속았다. 목사에게 속았다. 하는 이유가 사실은 목사나 교회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내가 어떤 기대감, 이익 요 기대는 내가 요쪽으로서 이렇게 뭐 바치고 약간의 성실하고 착하면 그런 기대가 나한테,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니까 착하시니까 설마 착한 걸 배제하지 않으니까 30배까지는 너무하지만 10배까지는 주시겠지. 라는 어떤 기대감과 엮어져있던 거예요. 그게 악마의 밥이었던 겁니다. 그게.
내가 문제 있어요. 내가. 앞에 하나님께서 이상한 목사를 보낸 이유가 너한테 문제 있다고 그렇게 보내줬건만, 우리는 눈치코치도 없어. 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나는 천하에 제일 믿음이 좋고, 다른 사람은 개판이고. 다른 사람은 지옥가고 나는 천당 가고. 지금 착각한 거예요. 속 시원하게 동탄에 보면 택지개발해 보면요, 밭 있는 거 밀어버리면 깨끗해요. 그것처럼 시원하게 살아보면. 앞에 거칠 것이 없는 아예 모든 걸 포기해버리면. 자살하려하지 마시고 자살 했다 치고 삽시다. 이미 자살했어. 자살하고 다시 살아났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거든요. 죽고 난 뒤에 나흘만에 다시 강제로 제대했는데 다시 입대해가지고 앞에 눈에 거칠게 없어요. 알아요. 세상은 미래가 어떻게 마감된다는 것을 마리아, 마르다는 모르지만 오빠는 알아요. 그걸 가지고 12절에 율법 앞에 뭘 붙인다고요? 자유. 자유케하는 말씀입니다.
자유케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주 이 꼬리가 이렇게 죽 올라갈 정도로. 너무 좋아가지고. 기분이 좋아서. 제가 수요일에 했잖아요. 내 일어난 일은 내 어떠함이 아니고 내 속에 아담의 어떠함을 보여준다고요. 그동안은 나의 어떠함 때문에 내가 인생이 꼬이고 인생이 완전히 꼬라박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죄가 아니고 나도 물려받은 거예요. 누구한테 물려받았어요? 부모님들한테 물려받았는데 그 부모의 부모 죽 소급해서 오늘 보니까 아담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그런 아담이 범죄 해놓고 죄도 없는 내가 고생, 고생을 하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보편적 원칙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아담 잘못해서 후손을 고생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잖아요. 그 원칙을 성경의 로마서5장에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실제로 체험이 안 된 거예요.
그러려니 했고 성경은 뭐 보면 잠만 오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은 내 힘으로 내가 알뜰히 살아야 자식이라도 하나 더 살리고 뭐 이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자식도 주님이 알아서 살리고 모든 걸 주님이 알아서 하고 나는 쪼다고 바보 등신으로 만들어 놓은 이 자유 함을 악마가 그걸 엿보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굴레 안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율법 외에 의가 구원됐는데 율법 외를 못 보게 만들어요. 이야기를 해도 우리가 안 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기대감 때문에. 지금보다 인생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내가 착실하게 살고 십일조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이런 어떤 기대감 때문에 하는데 그 기대감을 수요일 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로 그걸 가지고 ‘개별성’이라 했거든요.
개별성에서 출발해서 개별성으로. 개별성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그렇게 우리를 조저 놓은 거예요. 하나님은 보편적 아담을 만들었지, 개별자는 안 만들었는데, 개별자 되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저 여자가 따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여자여, 니는 왜 따먹나?” “악마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전부 다 개별자 의식으로 돌아섰어요.
이것은 진짜 도끼로 쪼개도 남은 몸 가지고 또 개별자 주장할 거예요. 이걸 아예 이리 쪼개고 이리 쪼개면 남아 있는 사분의 일이 꿈틀거리면서 “저는 잘못 없어요.” 이럴 거예요. 인간의 세포가 쪼개면 세포 하나, 하나 살아나가지고 꿈틀거리면서 요만큼 남은 자존심은 살렸다. 이런 식으로 살 거예요. 아이고, 얼마나 인간이 마귀적인지. 이건 완전히 쪼개고, 쪼개고 완전 도마에 쪼개도 하나, 하나가 전부 개별자로서 따로 살아있어요. 그러면 한 번 보세요. 내 머리카락이 또 지 알아서 지 자존심세우고 있다니까요.
주님께서 욥에게 한 이야기를 제가 여기서 잠깐 그 비슷한 취지로 언급한다면,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도 밭에 자라는 들풀의 소리가 있어요. 여러분, 밤에 자라나는 식물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나는 자고 있는데. 저 들판의 곡식은 자라고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시편19편에서는 그 소리를 무슨 소리냐 하면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의 소리라 하는 거예요. 침묵의 소리하니까 사이먼 & 가펑클 노래가 생각나네요. The sounds of silence 침묵의 소리.
그게 침묵의 소리에요.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서로 통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 빼놓고. 인간은 왜 거기에 못 들어갑니까? 보편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부터 시작하니까. 자기 자족.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나 밖에 없어요. 개별자부터 나와요.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자폐증환자로 만들어놨어요. 자폐증환자로. 교회 교인이 10명이다. 자폐증환자 10명이에요. 20년 나오다보면 목사가 뭐라고 하면 목사님 저 보고 이야기했지요? 지금 이런 이야기하니까 기억납니다만, 어느 오후 설교할 때 어떤 예를 들면서 제가 예를 들면서 마음이 편합니다. 왜냐 하면 이 예에 해당되는 경우가 지금 현재로서는 우리교회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누가 하나 걸리면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했지요?” 이리 나오기 때문에 마침 그게 없기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이리 이야기를 제가 앞에 서술을 크게 달아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싹쓸이 염원을 누가 방해하고 있느냐 하면 아까 개별자 했지요. 이 개별자에서 나온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도덕’이라 하는 거예요. 도덕. 이 도덕이 싹쓸이 염원을 방해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리 이야기했지요.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한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기도를 연거푸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걸 참 용납을 해주신다면 기도하겠습니다. 어떻게 의인을 악인과 더불어서 멸망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 창세기18장에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도덕적 관점이에요.
개별을 하나, 하나를 개별자로 보자 말이지요. 그러면 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보다 덜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착한 사람은 착한 식으로 취급해야 되고, 악한 놈들만 처벌해야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한 거예요.
이건 2000년 기독교 신학가운데 이런 문제가 계속 나와요.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악이 횡횡하느냐, 악이 승리하고 의인이 패배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변호할 수 있는가, 그걸 변호론이라 합니다. 신을 변호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하고 할 수 있느냐. 라고 계속 궁금해 했어요. 광주 사태 일어났을 때 성당이나 운동권 목사들이 다했잖아요. 감리교 목사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한 전두환의 악마 같은 짓을 자기 시민을 죽이는 이걸 왜 하나님은 기분의 하나님입니까? 혀 짧은 하나님이에요? 그 순박한 광주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재판 없이 변호인 없이 고등법원 대법원 없이 어떻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이걸 왜 하나님은 방치하십니까? 신에 대한 변호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의인은 의인대로, 문제가 결국은 어디서 된 거예요? 지금 뭐가 문제에요? 착한 사람 따로 있고, 악한 사람 따로 있다는 거죠.
그런데 야고보서2장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뭐가 돼요? 범법자가 되지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위에서 헬리콥터로 총을 쏘든 지진이 나서 20만 명이 죽든, 땅이 갈라져서 죽든, 세월호에 빠진 애들 중에서 교회 다니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그 애들이 같이 물고기 밥이 되던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토 달 수 있다? 없다? 토 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시작을 우리는 정상이라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악마에 의해서 인간을 조진 인간인데, 그래서 천국가려면 악마에서 더럽게 만들어진 인간을 처음사랑가지고 그게 바뀌어져야 돼요. 붕어빵 구울 때 그냥 한 쪽만 구우면 시커멓게 타잖아요. 가끔 두 바퀴 돌고는 한 바퀴 다시 돌려줘야 마침맞게 익잖아요. 뭔가 뒤집어져야 돼요. 육이 영이 되어야 된다 말이죠.
그 변화는 누워 있는 인간이 알아서 뜨거우면 뒤집는 게 아닙니다. 고기보고 알아서 돌아서겠지. 그건 안돼요. 60년대 개그 합니다. 지가 뜨거우면 돌아눕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밭에 식물 자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고, 하늘의 별 보면서 주의 자비하심을 시편145편입니다. 자비하심을 느끼는 것이 누가 그런 게 있겠어요. 그것도 가끔은 미국 가서 별을 봐야 미세먼지 없는데서 봐야 그게 보이지. 한국에서 오늘도 미세먼지 가득 있는데 그게 보이겠어요?
왜 그걸 못 보게 합니까. 개별자는 내가 잘되어야 된다는데 온 신경을 다 쏟아 붓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잘난 편안한 행복한 내일을 앞두고 내가 관심사를 지금 엉뚱한데 두면 안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주의 긍휼을 잃어버리고 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악마의 수작인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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