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b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거룩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하늘이거든요. 같은 하늘일 경우에는 다른 곳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요. 같은 지붕 아래 방이 다르듯이. 같은 하늘을 두 자로 거룩이라 하거든요. 거룩에서 희생이 와요. 만약에 인간이 자기가 거룩해져서 하나님 만나려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희생이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십자가 없이 인간이 신이 찾아버리면 그게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 주고, 인간이 말씀 지켜서 영광 된다.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십자가 없는 하나님 영광은 그것은 마귀가 지어낸 거예요.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마귀가 찾아왔잖아요. 와서 뭘 자꾸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이야기해요. 평소에 악마가 인간들에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경말씀을 계속 던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유대사회를 지배하면서 성경말씀 하나로 한 통속이 된 그 방법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성경말씀 지켜봐라, 성경말씀 지켜봐라. 그런데 예수님이 성경말씀 지키는 것은 희생이 빠지고 지키는 게 아니고 희생에 초점이 모아지는 성경해석이에요. 희생이 희생답게, 희생이 꼭 필요한 이유를 드러내기 위한 말씀 지킴이에요. 희생 없이는 거룩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고히 하는 그 성경말씀.
그러면 희생이 필요한데 희생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바로 죄인이 없는 희생은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거룩은 희생을 통해서 밑에 뭘 남기느냐 하면, 죄인을 남기는 겁니다. 죄인이 희생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거죠. 그런데 세상은 희생이 없으니까 인간이 희생 없이 하나님께 나가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 그럼 제사 드리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가 지냈으니까 이건 희생이 아니고 본인의 행함이 되고 성과가 되는 겁니다. 종교적인 노력이 돼버려요. 애씀이 되고 할 때 자기 딴에 순전하고 진실 되게 경건하게 거룩하게 제사 드리고 헌금했지만 이 모든 것이 희생이 아니고 자기 의가 돼요. 노력한 만큼 혜택을 얻게 된다고. 그것으로 들이미는 거예요. 하늘나라 들어가겠다고. 오늘날 교회가 이런 짓하고 있잖아요.
십자가 자리에 교회 유지하기가 들어간다니까. 십자가 들어갈 자리에, 희생이 들어갈 자리에 우리 노력의 집대성이 들어간다니까요. 우리의 열성과 우리의 돈 모음의 집대성이 들어가잖아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출애굽기 32장에 그들이 금가락지를 빼니까 뭐가 나왔더라? 우상이 나왔잖아요. 그 우상을 여호와라 했어요. 여호와를 섬기는 방법은 우리의 노력을, 정성을 집결하게 되면 그게 여호와가 받아주는 거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법에 보면 희생법, 제사법이 있어요. 플러스 십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죄를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해서 희생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죄 사함의 현실성이에요. 이 세상을 울산을 울산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울산이지만 여기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시면 돼요. 날아다니는 죄 사함의 능력을 붙잡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입장에서 붙잡아야 되느냐 하면, 내가 말씀에 의해서 죄인인 것을 아는 입장에서 죄 사함을 잡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 사람의 운명을 확정돼버려요. 이 말은 세 번, 네 번, 더 이상 시험 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합격통지서 손에 쥐었다 이 말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미래가 확정되었다는 말은 인생이 어떻게 롤러코스트를 타더라도 그건 전부 다 사소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확정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코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눈물짓고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점심 때 이번에 누가 점심 값을 내느냐 할 때 많이 하는 게 뭐냐 하면, 사다리 타기하잖아요. 꽝, 한 푼도 안 내는 자리를 미리 봤다면 아무리 복잡하게 선을 몇 개나 이리저리 그어놔도 결국은 합격이란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눈치 빨라서 안 게 아니고 성령께서 선물로 줄 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입시키는 겁니다. 칩 새기듯이 우리한테 담아버려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죠.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이루었다가 오게 되면 그 사람만이 성도고, 그게 성도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성도는 무엇이 성도 아닌 게 성도 되려고 애쓰는지 눈에 다 들어와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그걸 자유이 영이라 합니다. 이미 율법에서 자유가 된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율법에 매인 사람들의 꼬락서니가 다 보인다니까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저따위 설교하는지 다 들어온다니까요. 무슨 꼼수를 쓰고 있는지 다 보여요.
“여러분, 교회 안 오시면 구원 없습니다.”이 소리를 왜 하는 데요? “여러분, 가정은 지키면서 교회는 왜 안 지킵니까?” 이 소리를 왜 합니까? 제가 주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 잘 돼서 주님 잘 되는 법이 없어요. 그런 법을 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뭔 뜻이냐 하면, 교회 없다, 에요.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교회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유적지 됐어요. 없어요. 거기 교회 없어요.
두아디라 교회,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터키 남서부에 에베소 교회로부터 해서 일곱 교회가 되거든요. 에베소 교회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겁니다. 밧모 섬에서 1년 6개월 동안 있다가 죽었다.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세운 교회가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있고 벌칙은 없는 교회에요. 그래서 서머나 교회가 유명한 교회죠. 모르는구나.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겠다는 것.
여러분, 죽도록 충성해서 구원 못 받아요. 죽도록 충성한 교회 없어졌어요. 죽도록 충성해서 구원받은 교회 없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너희들의 교회 세워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가 주어진 겁니다. 교회를 잘 다독거리고 잘한다고 해서 그래서 구원방법은 애초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실습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지함,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 내부에 속해있는 악마적인 본성, 육적인 본성을 교회를 통해서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교회 안 나옵니다.” 교회 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말 잘해야 됩니다. 교회 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 없습니다. 교회 나와도 구원받은 사람 없고. 왜냐하면 어차피 실습이 있어야 되니까. 교회 나오는 실습, 안 나오는 실습, 어쨌든 간에 지옥 실습이에요. 우리는 실습 없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걸 의로 간주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의로 간주해요. “주여, 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을 자기 의로 간주한다니까요. 자기 잘남의 요건으로 장부에다 적어요.
5월 4일. 날씨 맑음. 오늘 난 죄인임을 회개했다. 5월 5일 연휴가 오기 전에 나는 죄인임을 회개했다. 내가 생각해도 얼마나 착한지^^ 이렇게 쓴단 말이죠. 물론 그런 것은 의도적이 아니고 자발적이기 때문에 쓰시되 그게 바로 교회 생활이에요. 그런데 그 교회로 구원받지 못한다니까요. 그게 내일 되면 교만을 가장한 겸손인 것을 알아요.
다시 정리한다면, 안에서 올라오는 거룩은 없습니다. 거룩은 위에서 내려오는데 위에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 오고 희생을 뒤에 붙이고 앞에는 율법이야기를 합니다. 율법 뒤에는 희생이 붙어있어요. 이것을 피로 새긴 법, 피로 새긴 말씀으로 볼 수 있어요. 신약에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의 원칙이 구약부터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법으로 돼있지만.
희생을 통해서 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드러나요. 자기 본성은 자기 의로움을 모아서 하나님 의의 나라에 합세하려는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을 인간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악마적 본성이 누구나 모든 사람에게 다 들어있습니다. 룰렛처럼 회전하는 붕어빵 굽는 기계 있잖아요. 하나하나 들춰보세요. 다 안에 앙꼬 들어있어요.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절대자라는 절대 의식이 다 들어있어요. 결국 나만이 제일 귀하고 귀한 것은 나밖에 없음이 다 들어있어요. 이런 품성으로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그게 자기 나라지 천국입니까? 자기 나라에요. 자기 고집이 그렇게 센 데 천국 가서 촛불집회하려고? 말이 안 되잖아요. 교회 와서 하는 행실로 어딜 가요? 천국 간단 말이죠? 있을 수 없는 거죠.
교회가 이미 하나로 확정돼있고 그 확정된 교회가 인간들이 자기 의로 세우는 교회와 얼마나 차이 나는 가를 실습시키기 위해서 교회라는 걸 자연적으로 구성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지 돈 있으면 교회 있어요. 그러나 돈만 없으면 교회 없어집니다. 진리입니다, 이거.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돈 있는 가정은 가정이 유지돼요. 그러니까 돈 없으면 가정이고 뭐고 다 없어집니다. 뿔뿔이 다 헤어져요.
이 세상은 돈이 기초가 돼있습니다. 교회가 돈 좀 있으면 교회가 즐거워요. 그러나 교회가 빚지면 즐겁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도 즐겁지 않아요. 왜? 돈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 부동산이 그만큼, 교회 머릿돌이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 부동산이에요. 부동산 있는 교회가 될 때 사람들은 헌금 부담 없이 교회 오게 되고 개척교회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부동산 때문이에요.
그만큼 인간의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가 절대자인데 얼마나 이상한 사랑이 왔으면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게 될까요? 도대체 그 사랑이 뭐기에?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기에. 모든 인생의 짐이 다 날아갈까요?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은 바로 희생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5절부터 나옵니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는 방법이 6절에 나옵니다.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이게 무슨 내용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화목 제사를 모세를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화목 제물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지상에서 어떤 방해 없이 어떤 저지선을 뚫고라도 펼치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펼쳐진 것을 거룩이라고 이야기해요. 담요를 잘 때는 펼치잖아요. 돌돌 말린 거룩을 확 펼치면 이불이 되듯이 돌돌 말린 거룩이 화목제물로 보면 돼요. 희생이 들어있어요. 왜 번제나 속죄제, 속건제, 소제도 아니고 화목제냐. 화목제는 제일 마지막 완성 다섯 번째로 화목제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의가 된다고 돼있고 요한일서에도 그렇게 돼있어요. 모든 제사가 마지막 화목제 드리면 마감이 된다.
화목제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감사하는 게 있고, 그 다음에 서원제가 있고, 낙헌제가 있어요. 차이가 뭐냐 하면, 감사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것밖에 없는 일들만 일어났다는 인정, 거기에 대한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제사가 화목제로 끝난다는 말은, 제사으 마지막이 감사와 고마움으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희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거둬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떤 나? 천하의 죄인을 거둬주셔서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화목제 빠져버리면 죄의 자책에 시달리겠지요. 우울증 걸려요. 신자인 것 같아, 아닌 것 같아? 계속해서 시달리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완벽해야 신자다울 수 있는가? 계속 본인이 본인을 점수 매기고, 본인에게 벌주고, 때리고, 나무라고 결국 자기 처벌에 치어 사는 거예요. 나는 완벽을 원하는 데 또 다른 나는 완벽치 못한 나.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왜? 내가 나한테 쫓기고. 정신분열, 찢어질 것 같아요. 화목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둬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라니까. 십자가는 결국 화목제의 완성이라고 보면 돼요. 나중에 속건제가 되지만.
두 번째 서원이란 것은, 과거에 서원한 게 있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뤄주셔서 감사하는 게 서원제에요. 그리고 낙헌제는 자원해서 들이는 것, 마음에 원해서 드리는 것. 이렇게 세 종류의 화목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감사했던 제물은 그 날 당일에 다 먹어야 돼요. 그런데 서원제나 낙헌제는 그 날과 그 다음 날 제물을 다 소비해야 돼요.
이 말은 19장 6절에 나오는데,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라는 것은 감사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두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기 때문에 그 고마움이 하루치로 완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서원제나 낙헌제는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본인이 맹세했고 본인이 자발이 들어가니까 인간 요소가 개입되지요. 하나님+인간 요소니까 이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 일째 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첫째 날에도 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나를 위해서 나를 목표로 살 필요 없고 둘째 날, 셋째 날에도 나를 목표로 없는데 만일 제물이 삼 일까지 가버리면 이틀째 제사가 끝난 입장에 삼 일이 되게 되면,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서 살 거야, 라는 것이 삼 일째부터 서서히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첫째 시간에 나를 생각하게 되면 뭐가 안 된다고 했어요? 거룩이 안 되지요. 자기 거룩 챙기기에 바빠서. 그래서 삼 일째 제사에 집중하고 제사의 구성요소가 끝나고 난 뒤에 또 남은 게 있으면 나의 생존을 계산하게 되고 나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 되는지 자기 생존 위주로 벌써 제물을 이용할 수가 있어요. “남았으니까 이것 먹고 더 살아야지.” 그렇게 되면 관심사가 주님에 대한 관심사가 서서히 자기 관심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원래 화목제에서 제물을 먹는데 제물도 세 가지가 있어요. 화목제가 복잡해요. 첫째는 하나님 몫이 있어요. 두 번째는 뭐냐? 제사장 몫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화목제물을 드린 신자의 몫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몫과 신자의 몫 사이에 제사장이 가져갈 몫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 만남에서 무엇이 필수요건이냐 하면, 제사장의 요소가 들어가야 됩니다. 제사장과 연계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연계 안 되지요.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희생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거룩을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거룩에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거룩을 이루는 과정에 본인이 잊어버려야 되고 잃어버려야 돼요. 거룩에 푹 잠겨버려야 돼요. 멀쩡하게? 아니에요. 천하의 죄인으로서 잠겨버려야 돼요. 전에 아포가토 이야기했잖아요.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넣는 걸 아포가토라 하는데 뜨거운 커피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들어간다고 제가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능우 집사님이 그게 맞는지 실험을 해보니까 안 녹아들어간다는 거예요. 그건 뜨거운 커피를 적게 넣어서 그렇지요.
나라는 덩치는 예수님의 피 안에 녹아들어가야 되죠. 그래야 예수님 피를 증거하지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게 있어요. 너희들이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름도 성도 몰라도 괜찮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만 알란 말이죠. 옛날에 잘 나갔다, 통장이 50개다. 그런 과거가 나를 채울 게 아니고 아포가토처럼 녹아서 예수님 피 안에서.
그걸 없애란 말이 아니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피, 희생 없이 어떻게 내가 살겠느냐? 그 가치를 비교해보란 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은 것과 꼬이고 꼬인 내 인생과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의 피 앞에서 꼬이고 또 꼬여도 괜찮아요. 내 인생 꼬이는 것은 전부 다 사소한 문제입니다. 꼬이면 자르면 되지, 뭐. 풀 필요 없어요. 꼬이면 꼬인 대로 죽으면 주님 품 안에 가면 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남은 문제는 그게 사소한 문제라는 거예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소한 거예요. 미세먼지, 몽고의 황사, 전부 다 사소한 문제에요. 김정은과 회담한 것. 김정은과 회담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사소한 것에 목숨 걸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뭘 먹느냐? 하나님께서 입이 있어서 뭘 먹는 게 아니에요. 화목제물은 염소는 안 바쳐요. 소와 양을 바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콩팥과 양의 꼬리부분을 받습니다. 받는데 하나님께서 입을 벌려서 먹는 게 아니고 냄새를 흠향하세요. 그 냄새를 맡으면서 향기로운 냄새를 먹는 거예요. 그러면 냄새가 나도록 해야지요. 제물을 제단에서 태워야 되겠지요. 태운다는 것은 재가 되는 거예요.
갑자기 윤시내 노래가 생각나네. 윤시내 노래에 사랑이 불꽃이 되어 한 줌의 재가 되지요. 불꽃을 태우리라, 하잖아요. 없어지잖아요. 주께서 냄새를 맡는 거예요. 우리가 날마다 죽기를 원하는 거예요. 죽는 냄새를 주께서 흠향하시는 거예요. 잘난 것, 못난 것 다 태우면 의미 없잖아요. 의미 없음을 안다는 그것을 주께선 원하는 데 그 모델이 예수님 달린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음을 인정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주님은 탕자를 더 좋아합니다.
거룩이란 내 것을 내세우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드립니다. 이건 뭐냐? 막 사시라 이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자기를 조작하지 마세요. 막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어진 환경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막 살고 싶어도 몰아세우는 데 어쩔 거예요? ktx 안에서 막 세요. 하지만 기차는 달리거든요. 기차 안에서 백날 까불고 물구나무서고 어떻게 해도 어느새 도착했는데, 바깥으로 못 나가는데. 그걸 예수 안, 성령 안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 안. 갈라디아서 6장에선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하죠. 확정돼있다는 겁니다. 이미 합격한 상태로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은 지옥의 실습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율법을 쥐고 있는 남들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습을 보세요. 그 모습이나 내가 사는 모습이나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거예요. 나도 저랬었지. 나도 지금 저러고 있지. 나도 나밖에 모르지. 그런데 웬 떡이냐, 이 말이죠. 똑같이 가야 되는데 저 사람처럼 지옥으로 가야 되는데 왜 못 가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사랑은 이유 없어요. 주님께서 너를 구원하는 건 내 마음이야. “아, 주의 마음이었군요.” 이것이 예수를 증거하는 거예요. 막 살라 해도 짜증내고. 막 사시라니까요. 춘천 막국수 뽑아내듯이 그냥 막 사시면 돼요. 막 살다 진짜 막 가면 어떻게 되느냐? 막 가도 ktx 안인데, 뭐.
제사장 몫은 가슴살과 뒷다리입니다. 가슴살은 요제, 흔들어 드리는 제사고 뒷다리는 거제, 하늘로 높이 치켜드는 제사에요. 요제와 거제는 이 제물은 바쳤다고 너희들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경로가 바뀐다는 겁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이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이 제사장이니까. 희생자가 희생해서 구원될 자의 삶속에 장악해서 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과 결부, 다 연결시키도록 하는 겁니다.
여자 분들이 편물할 때 같은 모양을 계속 반복시키잖아요. 성도의 인생은 어떻게 다양하든 간에 그 모양새는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하는 거예요. 다양한 변화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자신이 제물이기 때문에 태운다고 자살하지 마시고, 우리가 제사장 아니잖아요. 그건 제사장에게 맡겨야지 성질난다고 자살하고 목매달고 왜 그럽니까? 그러지 말고.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자살해도 죽음을 모른다고. 죽음이란 성령을 통해서 알지 자살 열 번 한다고 죽는 걸 알지 못해요. 안 죽어도 죽음이란 걸 미리 알아요. 우리 죄 때문에 죽는다는 걸. 아파서 죽는다, 병들어 죽는다, 물에 빠져 죽는다, 그건 죽음이 아니에요.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죄 때문에 처벌받는 게 아니고 죄 때문에 죽어요. 따라서 지금 멀쩡하게 살아도 우리는 죽어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성경 하나도 빈말 없어요. 그걸 이해하려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실습을 통해서 이해해야 되지 지식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시험치고 난 뒤에 다 잊어버려요. 시험 칠까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분 인생이 있는 겁니다. 내 잘남을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게 아니고 네가 어떻게 되든 너를 구원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은 가슴살과 뒷다리를 먹는데 이게 맛있어요. 좋은 것은 제사장한테 갑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릴 때 바로 희생에 주목해서 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사장 기능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실은 안 보이지요. 제사장 기능이 하나님이 시킨 거니까. 그러면 화목제는 제사장이 기쁘게 먹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쁨의 여파에 의해서 기쁨이 밀려와서 나머지 부분을 신자들이 먹는데 하루와 이틀까지만 먹고, 감사제는 하루로 끝나야 되고, 서원제와 낙헌제는 이틀까지나 사흘에는 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내는 데 우리가 강제로 참여됐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에 사도 바울의 명령과 권면들이 있고 성경에 모든 게 하라와 하지 말라고 기록된 것은, “너, 구원된 자 맞지.”라고 확인차원에서 주신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을 보면서 하나둘 장착하면서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를 붙드는 그러한 본성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이번 주 교회 청소 나 혼자 다했는데 토요일쯤에 괜찮은 일 있겠지, 그런 것. 특히 아까 서원제 같은 경우에 레위기에는 서원제가 있지만 신약 마태복음 5장에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 했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말은 아예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가 있어요. 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레위기 27장에 보면 나오는데 사람이 제물로 서원하지만 사실은 사람 자체가 제물로 보는 겁니다. 사람을 제물이라 할 때 사람 자체를 태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돈으로 계산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라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 세 로 이십 세까지는 남지이면 그 값은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레위기27:1~7)
이 말이 뭐냐? 제물을 인간이 드린다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제물이라면 우리 몸을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제물이고 제사자이에요. 제물 되신 예수님의 완성도, 완성상태가 약속으로 자기 백성 속에 들어옵니다. 그게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원리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줘버려요.
예수님의 제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 같이 짝을 이루게 돼있습니다. 모든 게 어설퍼요. 모든 게 세속적이고 세상적이에요. 모든 것이 나 위주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목말라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물 좀 주소. 민주화에 목말랐어요? 인간은 왜 목마릅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왜 목말랐어요? 먹어도, 먹어도 만족치 못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문제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몸에 문제 있는 거예요.
벌어도, 벌어도 10억 있어도 모자라, 20억 있어도 모자라. 교인수 백 명도 모자라고 천 명도 모자라고. 만 명 되도 모자라요. 자꾸 모자라요. 죄 지어도 또 죄 짓고 싶고. 뭔가 문제 있어요. 남북이 평화 회담하니까 이제는 요구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개성공단, 금강산, 근처에 땅 사놓은 사람, 이제는 욕망에 욕망이 계속 나와요. 갑자기 사는 보람이 확 바뀌어버렸어.
그러니까 우리 값을 우리가 언제 벌어서 그 값을 치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했어요. 고린도전서에 너희 몸은 값을 치루고 산 거예요. 우리가 내 값을 안 치렀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일한 자에게는 삯을 주지만 일한 것도 없는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이게 구약을 떼놓으면 이해가 안 돼요. 철저하게 구약처럼 우리를 몰아붙여야 돼요. 해보란 말이죠. 몇 세겔, 60세겔, 5세겔 바치면 하나님이 받으십니까? 그렇게 바친 사람들 망했는데. 안 되겠지요.
그래서 화목제물은 거룩을 위해서 둘둘 감게 있는 거예요. 화목제물 드리고 그 다음에 뭐냐? 8절에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라고 돼있지요.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9절에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그래서 밭이나 과수원에 다 거두지 않고 남겨뒀다. 남겨둔 그 사람이 화목제물 아까워서 먹었다. 끊어져요, 안 끊어져요? 끊어지지요. 9절은 지켰지만 8절을 못 지켰잖아요.
주님께서 어떻게 계산하느냐 하면, 8절을 못 지킨 자가 9절을 지킬 수가 있느냐, 이 바보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네 과수원에 다 따지 않고 지나가는 나그네 배고플 때 먹으라고 남겨뒀을 때 마치 우리는 9절을 지킨 양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결국은 어느 것도 지킨 적이 없는 사람이 돼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항상 지킨다는 그 대목에 대해서 요 근래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치매 걸리면 난감하다는 겁니다. 치매 걸린 사람이 요양병원에 가면 자기 이불이 있는데 욕심이 나서 옆에 할머니 이불을 잡아당겨. 자기 이불 위에 덮는 겁니다. 그럼 옆에 할머니가 이불 달라고 하면 그때는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어떻게 하느냐? 이불 하나 더 줘요. 젊을 때 천심이었습니다.
또 아는 사람의 어머니는 연세가 92이에요. 정신이 맑아요. 문제는 대전 저쪽에 수천 평 땅을 갖고 있어요. 이제는 자식들 잡아당깁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만약에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나중에 돈 없는 거예요. 천심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만한 나이 돼서 재산 좀 있으면 자식들 그런 식으로 밀고 당기고 하겠습니까? 그게 부모로서의 자존심, 날 무시하지 말라고 억지로 기어이 끌고 가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본심이 오죽 더러웠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했겠어요. 우리는 아직 그렇게까지 막 가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주님과 거래하는 거예요. 착함으로. 성의를 표했습니다. 헌금 이만하면 많이 하는 겁니다. 바쁜데 교회 많이 나와 주는 거예요. 자꾸 밀고 당기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는 주님에게 정성을 유지하고 있고 신앙이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얼추 75%정도는 지킬 요량 있다고, 어디 협상합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입니다.
9절을 다시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할 때 ‘너’는 바로 희생 속의 너에요. 거룩 속의 너입니다. 현재 잘난 내가 아니라 내가 어쭙잖게 동냥하는 게 아니고 희생 속에서 할 때 우리는 뭐냐? 주인이 누구냐 하면, 희생하신 분이 주인이 되고 그 희생하신 분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조건 하에 우리는 구원받은 거예요. 결국 9절의 말씀은 누가 지키는가? 예수님이 지키고 우리는 예수님이 지켰다는 혜택을 입은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역할로 9절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지켰고 우리는 그 지킴의 열매로서 혜택을 입는, 구원받지 못할 자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10절도 충분히 이해되지요.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그러면 우리는 포도원 하면서 열매를 다 안 따요. 안 따면 옆에 사람이, “아이고, 집사님은 믿음도 좋지. 그 귀한 열매를 다 따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주다니.” 그러면 우린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나라면 몽땅 다 땁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아주 명확하죠. 너희는 도적질하고 있으며 속이고 있으며 서로 거짓말하고 있음, 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항상 희생과 결부돼야 돼요. 화목제와 결부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16년 동안 도적질 안 했다면 16년 지난 그 다음 날 도적질할까요, 안 할까요?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되면. 도적질하지 않으면 위급할 상황이 되면 몰래 하게 돼요. 몰래 하다가 자신이 붙으면 나중엔 공개적으로 하고 대범해지고. 큰 도적질하면 작은 건 취급도 안 하잖아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뜻인데 그게 우리한테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도적질하고 안 하고는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고 결심하는 거예요. 그리고 도적질이다, 아니다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대한항공 가족이 밀수한 것은 도적질 아니에요. 그들에게는. 그러나 서민들이 하면 밀수에요. 그들은 다만 밀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거죠. 항공사니까. 그건 도적질 아니에요.
내가 무슨 전문 밀수꾼이냐. 그냥 가방, 초콜릿 몇 개 가져왔는데. 큰 금괴 덩어리 안 가져왔다고 나오거든요.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내는 세금이 얼만데. 우리가 먹여 살리는 직원들이 몇 만 명인데. 항상 양으로 말해요. 선한 게 많으면 어지간한 악은 눈감아 달라는 거예요. 이건 거룩이 아니죠. 만약에 대한항공 그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합시다. 그 교회 기도하고 난리도 아닐 거예요. 왜? 그들이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그 사람이 감옥 가면 헌금이 안 나오고 교회가 안 되고 교회가 안 되면 하늘나라가 안 되고 악마만 좋아한다고 그렇게 가르칠 것 아니냔 말이죠.
십자가 자리에 교회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게 사탄의 일인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악이 우리가 실수나 능력이 부족해서 악이 되는 게 아니고 악이라는 구체적인 독립적인 실체가 있어요. 우리가 그것과 결탁돼있어 문제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 절대성, 자기 잘남 이것은 선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그걸 듣기 싫어한다는 본성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그것이 바로 근원적인 죄라고, 그게 거룩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거룩한 상대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주께서 홀로 다 지키는 말씀인줄 몰랐습니다. 한 다리 걸치고 두 다리 걸쳐서 내 것 만들면 우리 것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비현실적인 몸짓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