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19: 7 / 거룩의 발생 / 180504

정인순 2018. 5. 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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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취:한윤범

20180504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거룩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9장 하겠습니다. 레위기 19장을 훑어보게 되면 특정 율법에 대해서 강력하게 강조하는 게 아니고 이 율법, 저 율법을 섞어놓은 느낌이 들 겁니다. 하나의 율법을 지키면 그 다음 율법을 왜 지켜야 되는지 이것 안 지키면 어떤 처벌 받는지 그렇게 돼야 되는데 전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율법과 사소하게 느껴지는 법이 같이 섞여져 있어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자기가 지킬 만한 법은 지키되 아주 지키기 힘든 것은 나중으로 미뤄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공부할 때 쉬운 것부터 먼저 하고 그걸 발판으로 삼아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면 문제 푸는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게 되죠. 내가 이 정도는 되는구나. 율법은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내가 이 정도 레벨의 율법은 지키는 데 이 정도는 아직까지 멀었다고 자기 스스로 독자적으로 자기 가치를 측정할 만한 그러한 기회를 레위기 19장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반한 것이 된다는 구절이 있지요. 야고보서에 나오는데 우리 일상적인 법 감정과 법 준수하는 습관과는 전혀 맞지 않아요. 법이 백 개 있는데 그중에서 70%만 지켜도 반은 넘어섰잖아요. 반을 넘어서면 누가 봐도 법을 안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법을 지키겠다는 성의 표시가 충분하게 된 걸로 보거든요.

70개나 지켰으니까 30개 안 지켜도 70개 지킨 걸 생각해보자. 그러면 저울에 달아볼 때 지킨 것이 훨씬 많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지킨 70개가 있는 이상은 봐주는 요소들이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법을 볼 때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보게 되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나님은 일체 용납하지 않아요.

일 년이 52주인데 50주 교회에 나왔습니다. 2주는 빠졌어요. 오다가 타이어 빵꾸나서 빠지고, 오려고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못 왔다. 어쨌든 간에 두 번 빠졌단 말이죠. 이걸 하늘나라 재판관에게 가게 되면 이건 교회 나올 생각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라고 물을 때 이건 50번이나 나왔기 때문에 있는 사람으로 쳐주는 거예요. 2번밖에 안 빠졌으니까. 성의를 표해도 절대적일 정도로, 퍼펙트에 가까운 예배출석 성의를 보여준 게 됩니다.

그래서 50번 나온 것을 사람은 기억하고 있어요.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양심에 가책 같은 걸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신이고? 52번 다 나오게.”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 자체가 율법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잘못된 접근이란 걸 알아야 돼요.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인 것을 티내라고 율법을 준 게 아니에요.

그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는데 제가 두 가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두 그림의 차이점이 뭔지 보시기 바랍니다. 군에 진지가 있지요. 어떤 지역에 토치카가 있어요. 1번 진지와 2번 진지 사이가 연결돼있습니까? 연결 안 돼 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법을 대할 때 1번 정복했고, 그 다음에 2번도 지키고, 3번 지키고, 4번 지키고. 하나하나 정복해나가는 식으로 법을 지키게 되면, 그 지키는 사람 마음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1번 지켰으니까 이게 의가 되겠지요. 자기 의 또는 자기 정당성 보장이죠. 2번까지 했으니까 추가적으로 자기가 더 정당하죠. 만약에 옆에 있는 어떤 집사님이 1번만 지켰다면 그 사람보다 곱빼기로 착한 거예요. 법 감정이 법 인식이 그런 겁니다.

그래서 교회 교인들은 우리 교회 목사님은 몇 번까지 지켰을까 생각하는 거죠. 그 교회 목사님은 맨날 성경보고 맨날 기도하니까 토치카를 70개, 80개 우리가 따라 붙을 수 없을 정도로 지켰기 때문에 교인들은 목표가 생긴 거예요. 내가 지금은 직장 다녀서 못하는데 퇴직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따라다니면서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그동안 뭔가 미흡했던 거예요. 직장 다니면서. 일요일도 교대근무 때문에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성경도 잘 모르겠고. 뭔가 미흡한 미진한 부분을 본격적으로 퇴직했으니까 마저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연세가 많아서 잠이 온다는 게 문제지만. 빠릿빠릿하질 못해. 젊을 때는 돈 번다고 시간 다 보내고. 머리가 안 돌아가서 문제고. 시냅스가 뇌세포가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는데 연결이 안 돼.

이런 법 감정, 모든 것은 결국 허접스럽게 내 안에 마음의 창고가 허하느냐, 아니면 충실 하냐? 충실하면 영광이고 허하면 주께 영광을 많이 못 드려서 천국 가도 좀 미안하게 부끄럽게 구원받지 않겠느냐는 이런 사고방식이 있는 거예요. 이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에요. 토치카 이런 방식 아닙니다. 그럼 무슨 방식이냐? 이런 방식이에요. 어떤 논에 줄을 그어놨어요. 1번, 2번, 3번, 4번이 다 인접해 있습니다. 전부 붙어있어서 2번 하다가 17번에 갔다가 1번 하다가 56번에 가고. 이건 마음대로 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같은 지면 또는 같은 지형, 더 구체적으로 같은 요구사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 우리 젊었을 때 제가 스무 살 무렵에는 티비 잘 없어서 영화관에 많이 갔거든요. 만약에 6개월에 영화를 10편을 봤다면 10편이 다 똑같아요. 왜냐하면 다 신성일, 김지미에요. 엄앵란이 나와요. 그리고 어떤 영화를 봐도 내용이 똑같아요.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나 문희 나오는 영화를 보나 윤정희 나오는 영화나 전부 내용이 비슷해요. 그러다 80년대 쯤 되면 그 어느 영화나 내용이 똑같아요. 촌에서 올라와서 미싱하거나 유흥가에 팔려서 거기서 재벌 남자 만아서 살다가 다 망했는데 책 사주면서 공부 뒷바라지 했더니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부잣집 여자와 사귀니까 차버리고. 어느 영화를 봐도 같은 내용, 같은 요구사항이라니까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거룩이라 합니다. 다섯 개 하면 더 거룩 되고 두 개 하면 덜 거룩 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율법이 백 개라면 하나를 지켜도 거룩이고 99개를 지켜도 거룩이 안 될 수가 있어요. 그리고 하나를 지켰으면 거룩이잖아요. 그 하나가 두 번째 지켜도 동일한 거룩이고 세 번째 지켜도 동일한 거룩이에요. 세 배의 거룩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거룩이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진지 논리와 다르지요. 다른 거예요. 이걸 어떻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지 생각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큰 돌에 한 번 맞으면 죽습니까, 두 번 맞으면 죽습니까? 그것도 10층에서 떨어지는 돌에. 큰 돌에는 한 번 맞아도 머리 깨지고 두 번 맞아도 깨져요. 율법은 그걸 만나는 순간 머리 깨지라고 준 법이에요. 부서지라고 준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십자가를 돌에 비유해요. 십자가는 우리 머리에 떨어져서 우리 머리를 박살내는 거고, 자빠지면 엎어지면 돌이 와서 부딪치고 우리가 깨지고 돌이 날아와도 우리가 깨지고. 이래도 저래도 깨지는 것은 우리란 말이죠.

사람들이 왜 말씀이 안 들으려 합니까? 안 깨지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교회에 안 와요? 안 깨지려고 교회 안 오는 거예요. 멀쩡하게 살려고. 멀쩡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멀쩡하게 되면 자꾸 자기 정당성, 자기 의가 누적이 된다는 겁니다. 갈수록 깨지는 게 아까워서 못 깨요. 그동안 공들인 게 있어서 안 깨져요. 그래서 이러한 심리를 갖고 있으니까 흔히 어떤 설교에도 복음 나오는데 뭐. 이런 식으로 기피해버려요. 복음의 내용은 몰라요. 정보 하나 추가한 것을 복음으로 알 고 있어요.

살아온 인생 자체가 더 살 가치도 없는데 왜 자꾸 꾸역꾸역 살아, 하고 오함마로 머리를 치는 게 복음입니다. 복음 안 들으면 살려하고 복음 듣게 되면 안 살아도 되네,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런 즐거움이 아무한테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더 이상……. 왜 살려고 하느냐 하면 자기가 아까워서 살고 싶은데 복음에 부딪쳐서 자신이 깨져버리면 더 살아봐야 무가치한데 더 살면 뭐하냐는 어떤 편안함이 생겨요. 느긋함이 생기고 갑자기 마음의 무거운 짐 같은 것이 사라집니다. 살아봐야 인간 아닌데 왜 살지, 왜 살려고 하지? 여러분, 그게 더 낫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 게 낫지 않아요?

사람이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목표가 생깁니다. 이것보다 더 괜찮은 존재, 이것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는데 내가 지레 포기할 순 없지, 라는 오기 같은 것, 야심 같은 것이 생기면 그 사람의 근육은 굳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생긴 게 오십견이라는 거예요. 어깨에 힘들어가서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요. 자기가 잘난 것을 뽐내기 위해서 살아가게 되면 마귀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과제를 줘요.

개 경주할 때 그냥 달리라 하면 안 달립니다. 개 앞에 먹잇감을 달아요. 개는 트랙 보고 달리는 게 아니고 자기 앞에 아른거리는 먹잇감을 빨리 쫓아 잡으려고 달리잖아요. 마귀가 주는 과제는 개 경주와 같아요. 그걸 달성 안 하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앞에 달아요. 이번에 금식 안 하면 나는 의로운 사람 아니라는 것을 금식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금식을 따라잡는 데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의로움은 나보다 먼저 약 올리는 식으로 항상 내 앞에 앞서 달리고 있습니다. 못 따라잡습니다.

따라잡았다고 쳐도 그걸로 끝입니까? 또 있어요. 하루에 성경 석 장 읽고 주일에는 다섯 장 읽어서 일 년에 다 읽었다. 끝입니까? 마귀가 이야기하기를 네가 얼마나 믿음이 태만했으면 석 장만 읽느냐. 다른 사람은 다섯 장 읽는데. 그래서 사탄과 천사가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성경을 한 장 추가한다, 아니다? 지가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헌금을 천원을 더 한다, 안 한다? 수입이 얼마기 때문에 지난해까지 헌금을 십만 원했다. 그런데 올해 퇴직해서 수입이 없는데? 그러면 수입이 없으니까 오만 원으로 삭감? 그러면 속에 있는 천사가, “그러면 안 되지.” 천사인지 마귀인지 구분도 안 돼. “십만 원하다 오만 원 하면 그 오만 원의 다섯 배의 손해가 매달 주어져도 오만 원 할래? 네가 전에는 자발적으로 했는데 그 자발성이 떨어졌나? 믿음이 떨어진 거야?” 이렇게 내부에서 악마인지 천사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이 호소하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래요? 십만 원하면서 오만 원만 할 걸, 하면서 계속 십만 원하니까. 자발적 오만 원+비자발적 강요 오만 원. 이게 무슨, 지가 함정을 판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악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상식 또는 인식 덩어리가 악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이라고 해서 독립적인 실체가 따로 있는 겁니까? 현재 분위기가, 내가 이런 짓하면,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적어도 믿음 있는 사람처럼 살아야지.”라고 혹시 누구한테 들키게 되면 또는 라이벌이라든지 누가 나를 주목할 때 “저 사람 요새 믿음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 기도도 빨리 끝내고. 전에는 대표기도를 5분 하더니만 2분만 하고.” 그렇게 그런 것 측정하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타인이니까 그 타인이 한 것과 자기를 항상 대조하며 살게 돼있어요.

그래서 교회 분위기에 항상 휘둘리게 돼있고 같이 밀치고 밀리게 돼있어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가 나를 지배하는 거예요. 김정은은 천하에 악마 덩어리라고 하다가 김정은 사랑해요. 이게 뭐예요? 줏대도 없고 완전히 분위기 타는 거예요. 결국 악하다고 하는 것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타인들의 보편적인 이념이 나를 악하다 할 때 악한 것이냐, 아니면 악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있느냐? 악이란 독립적 실체를 악마라 합니다. 악마가 실제로 있느냐는 겁니다. 어느 쪽이냐 말이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죠. 뱀 나오죠. 사탄 나오잖아요. 적그리스도 나오고 악마 나오죠. 그런데 성경에는 악마가 나오는데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악마에 신경 쓰는 게 아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평가하느냐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잖아요. 따라서 그걸 커버하는 방법은 계속해서 내 신앙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티를 내는 식으로 하고, 교회 한 번 빠지면 변명 열두 개 정도 동원시키면 되니까. 선이 빠진 부분은 더 나은 다른 선으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보충해야 되는가? 그래야 유지가 되니까.

결국 인간의 생각이란 단순해요. 뭐냐 하면, 과거 생각이 현재를 구성하는 배경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어제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뺄 것인가, 더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생각이에요. 어제 없는 오늘은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제의 연속성으로 오늘에 이른단 말이죠. 그러니 이건 인간이란 그 당시 분위기 또는 대세에 휩쓸리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줏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제일 무서운 것은 남들의 시선이에요. 남보다 무서운 게 없어요. 악마고 예수고 하나도 안 무서워요.

평소에 내가 과거로부터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어제 만났던 그 사람이 오늘 만났을 때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걸 제일 심도 있게 제일 다급한 문제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경우에 이혼이란 것이 가슴 아파요. 처녀 결혼과 이혼 후 결혼과는 천지 차이거든요. 과거가 있는 것과 생판 처녀로 결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이혼하고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고 있는데 전 남편이 손님으로 와 보세요. 분위기 어떻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그나마 전 남편 혼자라면 괜찮은 데 새 여자와 함께라면?

도대체 이 세상은 누구 눈치 보며 살아가는 거예요?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가 도대체 뭐예요?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성경? 무슨 되도 않는 소리에요. 무슨 성경이 날 구성합니까. 복음? 이 세상이란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 인간들이 오늘 레위기 19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경을 봐도 3번은 지켰고 4번은 지켰고 5번은 좀 이상하고. 해볼까요?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나오니까 이번 어버이날에 가게 되면 경외하는 것에 해당되니까. 왜 그게 경외함에 해당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어버이날에도 안 찾아보니까. 그 사람과 대조할 때 나는 경외하는 쪽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거예요. 전부 남들과 대조하며 살아가니까. 그리고 내가 2017년 작년에는 부모님을 다섯 번 봤는데 2018년에 퇴직해서 열 번 보고 있으니까 나는 과거를 배경으로 깔았을 때 곱빼기나 경외하는 거니까 3번은 그냥 넘어가자. 지킨 걸로. 3번 진지는 지킨 게 되는 거예요.

거기다가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니까 주일로 바뀌었으니까 주일에 대충 열 번에 세 번 정도 빠지니까 70%. 70%는 우수한 성적이거든요. 50보다 많으니까 지킨 걸로 치고. 4번 되면 신이 나요. 왜? 절에 안 가니까. 갓바위 안 가니까. 헛된 우상을 섬기지 말라하니까 아무리 봐도 집에 제사 안 드리지요. 부처한테 안 빌지요. 점 안 치고 딸래미 결혼할 때 궁합은 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초에 토정비결도 안 봤으니까 봐도 재미로 보니까 4번에 대해선 우수한 점수가 나온단 말이죠. 교회 다니고 난 뒤에는 아예 이런 것 안 했으니까. 달 보고 빌지 않았으니까.

3번 우수, 4번도 크게 우수. 5번 봅시다. 너희는 화목제물 드리고. 무슨 뜻이에요. 화목제물 드리되 열납되도록 드리고? 예배 시간에 졸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6절에 보면, “그 제물을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말이죠. 이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넘어갔지만 3번, 4번, 5번 되었으니까 6번 하나 빠져도 75% 아닙니까? 점수로 75점이면 이 바쁜 세월에 괜찮은 것 아니겠어요?

9번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이건 거의 95점 맞아요. 왜? 요새 안 그래도 마트에 살 것 많은 데 집에 냉장고에 유통기한 지난 게 우유부터 해서 한두 개가 아닌데 구태여 남은 이삭까지 주울 이유는 없거든요. 특히 울산은 잘 산다하니 99%. 악착 같이 이삭까지 줍진 않으니까. 여유 있으니까요. 요새 굶어죽는 사람 있습니까. 9번은 지켰네.

그 다음에 10번도 지켜요.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줍는 것도 힘들어. 허리 아픈데 뭘 그것까지 주워. 그때는 이건 새들이 먹든지 다른 사람들이 먹든지. 10번은 거의 백 점이에요. 11번 봅시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이런 건 뭐.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11번 이게 문제네. 하루에 300번 이상 거짓말해요. 입만 떼면 거짓말하고. 특히 부부 사이에는 더 많이 하고.

지금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전혀 이해 못하고 이런 식으로 하나 지키고 자기 착함에 내가 얼마나 내가 우수한지 그렇지 않아도 알고 있지만 말씀을 통해서 더욱 더 확인받겠다는 식으로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고. 이거는 진짜 돌 열 개 맞아 죽어야 마땅해요. 하나님이 원하는 건 거룩입니다.

결국 거룩입니다. 거룩이 뭐냐? 나를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생각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지요. 하나는 생각하는 머리가 율법에 의해서 박살나든지, 로마서 3장에 나와요. 모든 율법에 우리는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자라요. 더 좋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대 앞에선 난 되게 작아져. 작아질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없어져야 돼요. 사랑의 특징은 이유가 없다는 데 있어요. 이유 있는 사랑은 거래지 사랑이 아닙지다. 이유가 있으면 안 돼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사귈 때 저 남자/여자와 사귀면 행복하겠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럼 사랑이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강제적으로 의도적으로 평소에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은 판단을 하거든요. 잘 들어봐야 돼요. 사람이 판단할 때 판단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선택이 있어요.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 다음 세 번째에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뭐냐 할 때 결정과 판단을 의도적으로 내가 회수하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과 안 사겨. 저 사람 미워.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할 때 선택도 같이 날아가면 애초부터 사랑한 게 아니고.

나 저 사람 싫어, 하는데 계속해서 떠오른다든지 잊지를 못할 때 이건 이미 내 선을 넘어선 거예요. 누가 좋아진다는 것은. 내가 저 사람과 살면 어떤 이득을 얻고. 이것은 선택에 내 욕구와 욕망이 관여되어 그렇단 말이죠. 결정을 스스로 깨고 판단을 깨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든지 또는 이민을 간다든지 또는 같은 교회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간다든지 그렇게 내 눈에 띠지 않는 강제로 헤어질 상황이 될 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멀어지게 되면 처음부터 이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냥 잠재된 욕구가 작용한 겁니다.

그런데 미국 이민 가도 눈에 안 보여도 몸은 따로 있지만 같은 하늘에 있잖아요. 언젠가는 돌아와 줘요. 같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며 지울 수가 없어요. 그리워서. 이건 병 수준이에요. 병은 본인이 선택해서 걸리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도 병입니다. 사랑이 왔다는 것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이건 고통이에요. 고통스러운 사랑, 이 사랑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권한 밖에서 움직이는 내가 판단한 것 이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우거나 없애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신약에서 성령의 오심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믿지 마세요. 왜 자꾸 제가 막 사세요, 예수 믿지 마세요.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대부분이 가짜니까 그래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시도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착해야 되고 얼마나 성경적 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는 흥정이라는 차원에서 계속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이런 가짜를 그냥 방치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가짜는 제발 그만하세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 따라다녀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어떤 재미없는 일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고난 온다고 전부 다 예수 버리게 돼있단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요.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거든요. 원래 촌에서 거름 졌으면 장에 가면 안 돼요. 거름은 밭에다 부려야 된다니까. 거름을 지고는 밭에 가야 돼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지옥 가니까 거름 지고 지옥 가요. 같이. 다 지옥 가니까 다 넓은 길로 가니까 자기도 분위기에 따라서 그쪽으로 휩쓸려야 되는 것처럼, 어떤 의무감처럼 그 사람들과 같이 아니하면 내 인생이 불행해질 것처럼 거름 지고 장에 가는 거예요. 가끔 교회 와주고 후딱 저쪽에 장에 가고. 거름 지고 장에 가면 똥 냄새만 풍깁니다.

성령께서 주실 때 우리 속에 담긴 것은 천국 가라고 담긴 것이지 지옥 가라고 담긴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성령 받은 사람도 세상을 따라가고 싶어 해요. 인간이니까. 하지만 대단히 어색해요. 이제 대화가 안 된다니까요. 안 믿는 사람과도 대화가 잘 되던데요? 이상해요. 안 믿는 사람과 소통이 될 리가 있어요? 위선하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율법이란 내가 하나하나 정복해가는 게 아니에요. 3절 지켰다. 4절 지키자. 19장 5절, 6절, 7절. 이렇게 하나씩 정복하고 지켜서 레벨 올리고 제자 훈련하듯이 3단계. 4단계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19장 같은 경우에 옆에 나란히 있어요. 중요해 보이는 율법이나 사소해 보이는 율법이나 바로 옆에 있어요.

사소한 것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7절 누가 읽어보세요.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하나님께서 미용기술까지 가르쳐주는 겁니까? 굉장히 사소해보이잖아요. 용모에 대해서 사람들이 털 관리, 자기 수염 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굉장히 그게 …….

그런데 12절 봅시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것보다 8절에 보면,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 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 간다는 이야기인데 거룩한 백성에 합류되지 못한다는 뜻인데요. 이 말씀과 27절 말씀과 한 지면에 붙어있단 말이죠. 8절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지키는데 27절,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이걸 만약에 안 지켰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95점 쯤 됩니까? 빵점이죠.

왜? 거룩이 나왔으면 아까 이야기한 것 쉽게 합니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27절을 봐도 주님을 사랑해야 돼요. 그러니까 법을 지켰다는 게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지킨 주인공이 내가 부각이 되니까. 나 3절 지켰다. 누가? 내가. 4절 지켰다. 누가? 내가. 5절 지켰다. 누가? 내가. 그런데 옆에 사람이 7절은 못 지켰네. 그래도 3절, 4절, 5절 지켰으니까 나에게 못 지켰다고 하지 마. 난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나 지켰어. 또다시 내가, 내가, 내가가 계속 살아있게 돼요. 내가 살아있으면 판단하게 되고 결정하게 되고 선택하게 돼요. 그러면 그건 자기 거룩, 자기 사랑이지 주님의 거룩이나 주님의 사랑이 아니란 말이죠.

오늘날 세상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던가요? 심심해서 기독교방송 본 적 있잖아요. 장경동 같은 코미디언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재록 같은 사람들 어떻게 가르쳐요? 세상에 있는 큰 교회 목사들 어떻게 가르치던가요? 여러분, 보이스피싱입니다. 보이스피싱을 그냥 걸리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 자기 것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걸리는 겁니다. 내 것 내가 지켜야 된다. 금융원에서 내 돈에 무슨 문제 있다고? 그럼 내 돈 지켜야지. 그래서 나온 게 보이스피싱에 걸리잖아요.

평소에 교회 가면서 평생 동안 지킨 내 의가 있어줘야 하늘나라 심판 받을 때 그걸 내밀면 천국에 합격한다는 그런 세상적인 악마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 교회라는 보이스피싱에 여지없이 말려든 거예요. “여러분, 그것 못하면 벌 받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처벌받습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수염 끝을 손상하면 죽어요. 머리 가를 둥글 깎으면 죽는다니까.

11절에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도적질하면 집행유예나 징역 5년 살거나 벌금 무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는 죽는다니까요. 왜? 도적질하면 갚아주면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 나의 거룩을 뽑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지면이고 지역이라 했지요. 일차원적 평면에 붙어있어요. 그러면 성도에게 뭘 하냐? 평면에서 초월을 끄집어내야 돼요. 평면에서 하나를 지키면 같은 평면의 면적이 되잖아요.

제가 국민학교 때 먹은 급식 빵이 있어요. 옥수수 빵 줬어요. 냄새가 구수해요. 당번이 가져오면 선생님이 나눠주는 데 가난한 집 아이는 두 개 준다고요. 다른 아이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이지만 할 수 없어요. 반장 같으면 세 개 먹어요. 세 개 먹었다고 되는 겁니까, 맛있게 먹었다고 되는 겁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이걸 주는 것은 배불리 맛있게 먹으라고 준 거예요, 한 개 먹으라고 준 거예요, 두 개 먹으라고 준 거예요? 맛있게 먹는 것은 하나, 둘이라는 양적 변환이 의미가 없지요. 율법을 하나 지키나 둘 지키나 의미 없다니까요.

율법을 준 것은 돌에 부딪칠 때 뭐도 부딪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의를 만들어서 만들어진 의로 천국을 뚫겠다는 이것이 박살나는 그 기쁨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어떤 율법을 지키더라도 단 하나를 지키더라도. 로마서 3장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따라서 모든 인간은 모든 율법을 못 지키기 때문에, 같은 말로 예수님만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야 돼요? 옆에 있는 김 집사, 박 집사와 비교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비교할 때 예수님처럼 못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모든 사람이. 목사고 장로고 간에 어떤 인간도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님처럼 믿음이 없어서 없어 보인다고 하는데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해요. 못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들으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내가 또 나타나서 내가 예수를 믿어줘야 돼요.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잊어버리게 돼요. 개코나 이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만 모아놨구나. 평생 교회 다니면 하나님께 영광되지도 못할 그런 뼈다귀만 모으고 있었던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은 우릴 해골로 본다고요. 이건 에스겔 3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짝 마른 뼈 같이 봐요. 뼈에 말씀이 담길 때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안목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안목이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칠칠맞게 이빨에 고춧가루나 끼고, 이러한 무례한 예의에 어긋나는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랑하는 사람한테 화낼까요, 등신 같이 웃을까요? 등신 같이 웃지요. 나한테 관심 있는가봐.

여러분,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지적질을 해도 그 지적질 자체로 굉장히 반가움으로 다가서야 결혼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랬는데 얘 낳고 난 뒤에 각 방 쓴다고요? 내가 소중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이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건 행운입니다.


10분 쉽시다.

 

 20180504b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거룩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하늘이거든요. 같은 하늘일 경우에는 다른 곳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요. 같은 지붕 아래 방이 다르듯이. 같은 하늘을 두 자로 거룩이라 하거든요. 거룩에서 희생이 와요. 만약에 인간이 자기가 거룩해져서 하나님 만나려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희생이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십자가 없이 인간이 신이 찾아버리면 그게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 주고, 인간이 말씀 지켜서 영광 된다.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십자가 없는 하나님 영광은 그것은 마귀가 지어낸 거예요.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마귀가 찾아왔잖아요. 와서 뭘 자꾸 이야기하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이야기해요. 평소에 악마가 인간들에게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경말씀을 계속 던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유대사회를 지배하면서 성경말씀 하나로 한 통속이 된 그 방법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성경말씀 지켜봐라, 성경말씀 지켜봐라. 그런데 예수님이 성경말씀 지키는 것은 희생이 빠지고 지키는 게 아니고 희생에 초점이 모아지는 성경해석이에요. 희생이 희생답게, 희생이 꼭 필요한 이유를 드러내기 위한 말씀 지킴이에요. 희생 없이는 거룩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고히 하는 그 성경말씀.

그러면 희생이 필요한데 희생은 뭘 의식하느냐 하면, 바로 죄인이 없는 희생은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거룩은 희생을 통해서 밑에 뭘 남기느냐 하면, 죄인을 남기는 겁니다. 죄인이 희생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거죠. 그런데 세상은 희생이 없으니까 인간이 희생 없이 하나님께 나가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 그럼 제사 드리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가 지냈으니까 이건 희생이 아니고 본인의 행함이 되고 성과가 되는 겁니다. 종교적인 노력이 돼버려요. 애씀이 되고 할 때 자기 딴에 순전하고 진실 되게 경건하게 거룩하게 제사 드리고 헌금했지만 이 모든 것이 희생이 아니고 자기 의가 돼요. 노력한 만큼 혜택을 얻게 된다고. 그것으로 들이미는 거예요. 하늘나라 들어가겠다고. 오늘날 교회가 이런 짓하고 있잖아요.

십자가 자리에 교회 유지하기가 들어간다니까. 십자가 들어갈 자리에, 희생이 들어갈 자리에 우리 노력의 집대성이 들어간다니까요. 우리의 열성과 우리의 돈 모음의 집대성이 들어가잖아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출애굽기 32장에 그들이 금가락지를 빼니까 뭐가 나왔더라? 우상이 나왔잖아요. 그 우상을 여호와라 했어요. 여호와를 섬기는 방법은 우리의 노력을, 정성을 집결하게 되면 그게 여호와가 받아주는 거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법에 보면 희생법, 제사법이 있어요. 플러스 십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죄를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해서 희생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죄 사함의 현실성이에요. 이 세상을 울산을 울산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울산이지만 여기에 죄 사함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시면 돼요. 날아다니는 죄 사함의 능력을 붙잡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입장에서 붙잡아야 되느냐 하면, 내가 말씀에 의해서 죄인인 것을 아는 입장에서 죄 사함을 잡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 사람의 운명을 확정돼버려요. 이 말은 세 번, 네 번, 더 이상 시험 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합격통지서 손에 쥐었다 이 말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미래가 확정되었다는 말은 인생이 어떻게 롤러코스트를 타더라도 그건 전부 다 사소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확정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코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눈물짓고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점심 때 이번에 누가 점심 값을 내느냐 할 때 많이 하는 게 뭐냐 하면, 사다리 타기하잖아요. 꽝, 한 푼도 안 내는 자리를 미리 봤다면 아무리 복잡하게 선을 몇 개나 이리저리 그어놔도 결국은 합격이란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눈치 빨라서 안 게 아니고 성령께서 선물로 줄 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입시키는 겁니다. 칩 새기듯이 우리한테 담아버려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죠.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이루었다가 오게 되면 그 사람만이 성도고, 그게 성도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성도는 무엇이 성도 아닌 게 성도 되려고 애쓰는지 눈에 다 들어와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그걸 자유이 영이라 합니다. 이미 율법에서 자유가 된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율법에 매인 사람들의 꼬락서니가 다 보인다니까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저따위 설교하는지 다 들어온다니까요. 무슨 꼼수를 쓰고 있는지 다 보여요.

“여러분, 교회 안 오시면 구원 없습니다.”이 소리를 왜 하는 데요? “여러분, 가정은 지키면서 교회는 왜 안 지킵니까?” 이 소리를 왜 합니까? 제가 주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 잘 돼서 주님 잘 되는 법이 없어요. 그런 법을 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뭔 뜻이냐 하면, 교회 없다, 에요.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교회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유적지 됐어요. 없어요. 거기 교회 없어요.

두아디라 교회,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터키 남서부에 에베소 교회로부터 해서 일곱 교회가 되거든요. 에베소 교회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겁니다. 밧모 섬에서 1년 6개월 동안 있다가 죽었다.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세운 교회가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있고 벌칙은 없는 교회에요. 그래서 서머나 교회가 유명한 교회죠. 모르는구나.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겠다는 것.

여러분, 죽도록 충성해서 구원 못 받아요. 죽도록 충성한 교회 없어졌어요. 죽도록 충성해서 구원받은 교회 없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너희들의 교회 세워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가 주어진 겁니다. 교회를 잘 다독거리고 잘한다고 해서 그래서 구원방법은 애초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실습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지함,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 내부에 속해있는 악마적인 본성, 육적인 본성을 교회를 통해서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교회 안 나옵니다.” 교회 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말 잘해야 됩니다. 교회 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 없습니다. 교회 나와도 구원받은 사람 없고. 왜냐하면 어차피 실습이 있어야 되니까. 교회 나오는 실습, 안 나오는 실습, 어쨌든 간에 지옥 실습이에요. 우리는 실습 없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걸 의로 간주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의로 간주해요. “주여, 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을 자기 의로 간주한다니까요. 자기 잘남의 요건으로 장부에다 적어요.

5월 4일. 날씨 맑음. 오늘 난 죄인임을 회개했다. 5월 5일 연휴가 오기 전에 나는 죄인임을 회개했다. 내가 생각해도 얼마나 착한지^^ 이렇게 쓴단 말이죠. 물론 그런 것은 의도적이 아니고 자발적이기 때문에 쓰시되 그게 바로 교회 생활이에요. 그런데 그 교회로 구원받지 못한다니까요. 그게 내일 되면 교만을 가장한 겸손인 것을 알아요.

다시 정리한다면, 안에서 올라오는 거룩은 없습니다. 거룩은 위에서 내려오는데 위에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 오고 희생을 뒤에 붙이고 앞에는 율법이야기를 합니다. 율법 뒤에는 희생이 붙어있어요. 이것을 피로 새긴 법, 피로 새긴 말씀으로 볼 수 있어요. 신약에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의 원칙이 구약부터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법으로 돼있지만.

희생을 통해서 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드러나요. 자기 본성은 자기 의로움을 모아서 하나님 의의 나라에 합세하려는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을 인간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악마적 본성이 누구나 모든 사람에게 다 들어있습니다. 룰렛처럼 회전하는 붕어빵 굽는 기계 있잖아요. 하나하나 들춰보세요. 다 안에 앙꼬 들어있어요.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절대자라는 절대 의식이 다 들어있어요. 결국 나만이 제일 귀하고 귀한 것은 나밖에 없음이 다 들어있어요. 이런 품성으로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그게 자기 나라지 천국입니까? 자기 나라에요. 자기 고집이 그렇게 센 데 천국 가서 촛불집회하려고? 말이 안 되잖아요. 교회 와서 하는 행실로 어딜 가요? 천국 간단 말이죠? 있을 수 없는 거죠.

교회가 이미 하나로 확정돼있고 그 확정된 교회가 인간들이 자기 의로 세우는 교회와 얼마나 차이 나는 가를 실습시키기 위해서 교회라는 걸 자연적으로 구성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지 돈 있으면 교회 있어요. 그러나 돈만 없으면 교회 없어집니다. 진리입니다, 이거.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돈 있는 가정은 가정이 유지돼요. 그러니까 돈 없으면 가정이고 뭐고 다 없어집니다. 뿔뿔이 다 헤어져요.

이 세상은 돈이 기초가 돼있습니다. 교회가 돈 좀 있으면 교회가 즐거워요. 그러나 교회가 빚지면 즐겁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도 즐겁지 않아요. 왜? 돈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 부동산이 그만큼, 교회 머릿돌이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 부동산이에요. 부동산 있는 교회가 될 때 사람들은 헌금 부담 없이 교회 오게 되고 개척교회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부동산 때문이에요.

그만큼 인간의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가 절대자인데 얼마나 이상한 사랑이 왔으면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게 될까요? 도대체 그 사랑이 뭐기에?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기에. 모든 인생의 짐이 다 날아갈까요?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은 바로 희생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5절부터 나옵니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는 방법이 6절에 나옵니다.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이게 무슨 내용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화목 제사를 모세를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화목 제물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지상에서 어떤 방해 없이 어떤 저지선을 뚫고라도 펼치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펼쳐진 것을 거룩이라고 이야기해요. 담요를 잘 때는 펼치잖아요. 돌돌 말린 거룩을 확 펼치면 이불이 되듯이 돌돌 말린 거룩이 화목제물로 보면 돼요. 희생이 들어있어요. 왜 번제나 속죄제, 속건제, 소제도 아니고 화목제냐. 화목제는 제일 마지막 완성 다섯 번째로 화목제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의가 된다고 돼있고 요한일서에도 그렇게 돼있어요. 모든 제사가 마지막 화목제 드리면 마감이 된다.

화목제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감사하는 게 있고, 그 다음에 서원제가 있고, 낙헌제가 있어요. 차이가 뭐냐 하면, 감사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것밖에 없는 일들만 일어났다는 인정, 거기에 대한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제사가 화목제로 끝난다는 말은, 제사으 마지막이 감사와 고마움으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희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거둬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떤 나? 천하의 죄인을 거둬주셔서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화목제 빠져버리면 죄의 자책에 시달리겠지요. 우울증 걸려요. 신자인 것 같아, 아닌 것 같아? 계속해서 시달리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완벽해야 신자다울 수 있는가? 계속 본인이 본인을 점수 매기고, 본인에게 벌주고, 때리고, 나무라고 결국 자기 처벌에 치어 사는 거예요. 나는 완벽을 원하는 데 또 다른 나는 완벽치 못한 나.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왜? 내가 나한테 쫓기고. 정신분열, 찢어질 것 같아요. 화목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둬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라니까. 십자가는 결국 화목제의 완성이라고 보면 돼요. 나중에 속건제가 되지만.

두 번째 서원이란 것은, 과거에 서원한 게 있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뤄주셔서 감사하는 게 서원제에요. 그리고 낙헌제는 자원해서 들이는 것, 마음에 원해서 드리는 것. 이렇게 세 종류의 화목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감사했던 제물은 그 날 당일에 다 먹어야 돼요. 그런데 서원제나 낙헌제는 그 날과 그 다음 날 제물을 다 소비해야 돼요.

이 말은 19장 6절에 나오는데,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라는 것은 감사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두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기 때문에 그 고마움이 하루치로 완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서원제나 낙헌제는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본인이 맹세했고 본인이 자발이 들어가니까 인간 요소가 개입되지요. 하나님+인간 요소니까 이틀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 일째 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첫째 날에도 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나를 위해서 나를 목표로 살 필요 없고 둘째 날, 셋째 날에도 나를 목표로 없는데 만일 제물이 삼 일까지 가버리면 이틀째 제사가 끝난 입장에 삼 일이 되게 되면,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서 살 거야, 라는 것이 삼 일째부터 서서히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첫째 시간에 나를 생각하게 되면 뭐가 안 된다고 했어요? 거룩이 안 되지요. 자기 거룩 챙기기에 바빠서. 그래서 삼 일째 제사에 집중하고 제사의 구성요소가 끝나고 난 뒤에 또 남은 게 있으면 나의 생존을 계산하게 되고 나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 되는지 자기 생존 위주로 벌써 제물을 이용할 수가 있어요. “남았으니까 이것 먹고 더 살아야지.” 그렇게 되면 관심사가 주님에 대한 관심사가 서서히 자기 관심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원래 화목제에서 제물을 먹는데 제물도 세 가지가 있어요. 화목제가 복잡해요. 첫째는 하나님 몫이 있어요. 두 번째는 뭐냐? 제사장 몫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화목제물을 드린 신자의 몫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몫과 신자의 몫 사이에 제사장이 가져갈 몫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 만남에서 무엇이 필수요건이냐 하면, 제사장의 요소가 들어가야 됩니다. 제사장과 연계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연계 안 되지요.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희생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거룩을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거룩에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거룩을 이루는 과정에 본인이 잊어버려야 되고 잃어버려야 돼요. 거룩에 푹 잠겨버려야 돼요. 멀쩡하게? 아니에요. 천하의 죄인으로서 잠겨버려야 돼요. 전에 아포가토 이야기했잖아요.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넣는 걸 아포가토라 하는데 뜨거운 커피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들어간다고 제가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능우 집사님이 그게 맞는지 실험을 해보니까 안 녹아들어간다는 거예요. 그건 뜨거운 커피를 적게 넣어서 그렇지요.

나라는 덩치는 예수님의 피 안에 녹아들어가야 되죠. 그래야 예수님 피를 증거하지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게 있어요. 너희들이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름도 성도 몰라도 괜찮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만 알란 말이죠. 옛날에 잘 나갔다, 통장이 50개다. 그런 과거가 나를 채울 게 아니고 아포가토처럼 녹아서 예수님 피 안에서.

그걸 없애란 말이 아니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피, 희생 없이 어떻게 내가 살겠느냐? 그 가치를 비교해보란 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은 것과 꼬이고 꼬인 내 인생과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주님의 피 앞에서 꼬이고 또 꼬여도 괜찮아요. 내 인생 꼬이는 것은 전부 다 사소한 문제입니다. 꼬이면 자르면 되지, 뭐. 풀 필요 없어요. 꼬이면 꼬인 대로 죽으면 주님 품 안에 가면 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남은 문제는 그게 사소한 문제라는 거예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소한 거예요. 미세먼지, 몽고의 황사, 전부 다 사소한 문제에요. 김정은과 회담한 것. 김정은과 회담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사소한 것에 목숨 걸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뭘 먹느냐? 하나님께서 입이 있어서 뭘 먹는 게 아니에요. 화목제물은 염소는 안 바쳐요. 소와 양을 바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름과 콩팥과 양의 꼬리부분을 받습니다. 받는데 하나님께서 입을 벌려서 먹는 게 아니고 냄새를 흠향하세요. 그 냄새를 맡으면서 향기로운 냄새를 먹는 거예요. 그러면 냄새가 나도록 해야지요. 제물을 제단에서 태워야 되겠지요. 태운다는 것은 재가 되는 거예요.

갑자기 윤시내 노래가 생각나네. 윤시내 노래에 사랑이 불꽃이 되어 한 줌의 재가 되지요. 불꽃을 태우리라, 하잖아요. 없어지잖아요. 주께서 냄새를 맡는 거예요. 우리가 날마다 죽기를 원하는 거예요. 죽는 냄새를 주께서 흠향하시는 거예요. 잘난 것, 못난 것 다 태우면 의미 없잖아요. 의미 없음을 안다는 그것을 주께선 원하는 데 그 모델이 예수님 달린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음을 인정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주님은 탕자를 더 좋아합니다.

거룩이란 내 것을 내세우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드립니다. 이건 뭐냐? 막 사시라 이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자기를 조작하지 마세요. 막 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어진 환경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막 살고 싶어도 몰아세우는 데 어쩔 거예요? ktx 안에서 막 세요. 하지만 기차는 달리거든요. 기차 안에서 백날 까불고 물구나무서고 어떻게 해도 어느새 도착했는데, 바깥으로 못 나가는데. 그걸 예수 안, 성령 안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 안. 갈라디아서 6장에선 십자가 안이라고 이야기하죠. 확정돼있다는 겁니다. 이미 합격한 상태로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은 지옥의 실습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율법을 쥐고 있는 남들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습을 보세요. 그 모습이나 내가 사는 모습이나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거예요. 나도 저랬었지. 나도 지금 저러고 있지. 나도 나밖에 모르지. 그런데 웬 떡이냐, 이 말이죠. 똑같이 가야 되는데 저 사람처럼 지옥으로 가야 되는데 왜 못 가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사랑은 이유 없어요. 주님께서 너를 구원하는 건 내 마음이야. “아, 주의 마음이었군요.” 이것이 예수를 증거하는 거예요. 막 살라 해도 짜증내고. 막 사시라니까요. 춘천 막국수 뽑아내듯이 그냥 막 사시면 돼요. 막 살다 진짜 막 가면 어떻게 되느냐? 막 가도 ktx 안인데, 뭐.

제사장 몫은 가슴살과 뒷다리입니다. 가슴살은 요제, 흔들어 드리는 제사고 뒷다리는 거제, 하늘로 높이 치켜드는 제사에요. 요제와 거제는 이 제물은 바쳤다고 너희들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경로가 바뀐다는 겁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이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이 제사장이니까. 희생자가 희생해서 구원될 자의 삶속에 장악해서 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과 결부, 다 연결시키도록 하는 겁니다.

여자 분들이 편물할 때 같은 모양을 계속 반복시키잖아요. 성도의 인생은 어떻게 다양하든 간에 그 모양새는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하는 거예요. 다양한 변화 가운데서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 우리가 거기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자신이 제물이기 때문에 태운다고 자살하지 마시고, 우리가 제사장 아니잖아요. 그건 제사장에게 맡겨야지 성질난다고 자살하고 목매달고 왜 그럽니까? 그러지 말고.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자살해도 죽음을 모른다고. 죽음이란 성령을 통해서 알지 자살 열 번 한다고 죽는 걸 알지 못해요. 안 죽어도 죽음이란 걸 미리 알아요. 우리 죄 때문에 죽는다는 걸. 아파서 죽는다, 병들어 죽는다, 물에 빠져 죽는다, 그건 죽음이 아니에요.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죄 때문에 처벌받는 게 아니고 죄 때문에 죽어요. 따라서 지금 멀쩡하게 살아도 우리는 죽어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성경 하나도 빈말 없어요. 그걸 이해하려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실습을 통해서 이해해야 되지 지식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시험치고 난 뒤에 다 잊어버려요. 시험 칠까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분 인생이 있는 겁니다. 내 잘남을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게 아니고 네가 어떻게 되든 너를 구원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은 가슴살과 뒷다리를 먹는데 이게 맛있어요. 좋은 것은 제사장한테 갑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릴 때 바로 희생에 주목해서 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사장 기능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실은 안 보이지요. 제사장 기능이 하나님이 시킨 거니까. 그러면 화목제는 제사장이 기쁘게 먹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쁨의 여파에 의해서 기쁨이 밀려와서 나머지 부분을 신자들이 먹는데 하루와 이틀까지만 먹고, 감사제는 하루로 끝나야 되고, 서원제와 낙헌제는 이틀까지나 사흘에는 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내는 데 우리가 강제로 참여됐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에 사도 바울의 명령과 권면들이 있고 성경에 모든 게 하라와 하지 말라고 기록된 것은, “너, 구원된 자 맞지.”라고 확인차원에서 주신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을 보면서 하나둘 장착하면서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를 붙드는 그러한 본성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이번 주 교회 청소 나 혼자 다했는데 토요일쯤에 괜찮은 일 있겠지, 그런 것. 특히 아까 서원제 같은 경우에 레위기에는 서원제가 있지만 신약 마태복음 5장에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 했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말은 아예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가 있어요. 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레위기 27장에 보면 나오는데 사람이 제물로 서원하지만 사실은 사람 자체가 제물로 보는 겁니다. 사람을 제물이라 할 때 사람 자체를 태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돈으로 계산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라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 세 로 이십 세까지는 남지이면 그 값은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레위기27:1~7)

이 말이 뭐냐? 제물을 인간이 드린다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제물이라면 우리 몸을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제물이고 제사자이에요. 제물 되신 예수님의 완성도, 완성상태가 약속으로 자기 백성 속에 들어옵니다. 그게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원리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줘버려요.

예수님의 제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 같이 짝을 이루게 돼있습니다. 모든 게 어설퍼요. 모든 게 세속적이고 세상적이에요. 모든 것이 나 위주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목말라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물 좀 주소. 민주화에 목말랐어요? 인간은 왜 목마릅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왜 목말랐어요? 먹어도, 먹어도 만족치 못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문제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몸에 문제 있는 거예요.

벌어도, 벌어도 10억 있어도 모자라, 20억 있어도 모자라. 교인수 백 명도 모자라고 천 명도 모자라고. 만 명 되도 모자라요. 자꾸 모자라요. 죄 지어도 또 죄 짓고 싶고. 뭔가 문제 있어요. 남북이 평화 회담하니까 이제는 요구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개성공단, 금강산, 근처에 땅 사놓은 사람, 이제는 욕망에 욕망이 계속 나와요. 갑자기 사는 보람이 확 바뀌어버렸어.

그러니까 우리 값을 우리가 언제 벌어서 그 값을 치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했어요. 고린도전서에 너희 몸은 값을 치루고 산 거예요. 우리가 내 값을 안 치렀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일한 자에게는 삯을 주지만 일한 것도 없는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이게 구약을 떼놓으면 이해가 안 돼요. 철저하게 구약처럼 우리를 몰아붙여야 돼요. 해보란 말이죠. 몇 세겔, 60세겔, 5세겔 바치면 하나님이 받으십니까? 그렇게 바친 사람들 망했는데. 안 되겠지요.

그래서 화목제물은 거룩을 위해서 둘둘 감게 있는 거예요. 화목제물 드리고 그 다음에 뭐냐? 8절에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라고 돼있지요. 이런 말씀을 보게 되면, 9절에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그래서 밭이나 과수원에 다 거두지 않고 남겨뒀다. 남겨둔 그 사람이 화목제물 아까워서 먹었다. 끊어져요, 안 끊어져요? 끊어지지요. 9절은 지켰지만 8절을 못 지켰잖아요.

주님께서 어떻게 계산하느냐 하면, 8절을 못 지킨 자가 9절을 지킬 수가 있느냐, 이 바보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네 과수원에 다 따지 않고 지나가는 나그네 배고플 때 먹으라고 남겨뒀을 때 마치 우리는 9절을 지킨 양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결국은 어느 것도 지킨 적이 없는 사람이 돼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항상 지킨다는 그 대목에 대해서 요 근래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치매 걸리면 난감하다는 겁니다. 치매 걸린 사람이 요양병원에 가면 자기 이불이 있는데 욕심이 나서 옆에 할머니 이불을 잡아당겨. 자기 이불 위에 덮는 겁니다. 그럼 옆에 할머니가 이불 달라고 하면 그때는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어떻게 하느냐? 이불 하나 더 줘요. 젊을 때 천심이었습니다.

또 아는 사람의 어머니는 연세가 92이에요. 정신이 맑아요. 문제는 대전 저쪽에 수천 평 땅을 갖고 있어요. 이제는 자식들 잡아당깁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만약에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나중에 돈 없는 거예요. 천심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만한 나이 돼서 재산 좀 있으면 자식들 그런 식으로 밀고 당기고 하겠습니까? 그게 부모로서의 자존심, 날 무시하지 말라고 억지로 기어이 끌고 가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본심이 오죽 더러웠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했겠어요. 우리는 아직 그렇게까지 막 가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주님과 거래하는 거예요. 착함으로. 성의를 표했습니다. 헌금 이만하면 많이 하는 겁니다. 바쁜데 교회 많이 나와 주는 거예요. 자꾸 밀고 당기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는 주님에게 정성을 유지하고 있고 신앙이란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얼추 75%정도는 지킬 요량 있다고, 어디 협상합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입니다.

9절을 다시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할 때 ‘너’는 바로 희생 속의 너에요. 거룩 속의 너입니다. 현재 잘난 내가 아니라 내가 어쭙잖게 동냥하는 게 아니고 희생 속에서 할 때 우리는 뭐냐? 주인이 누구냐 하면, 희생하신 분이 주인이 되고 그 희생하신 분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조건 하에 우리는 구원받은 거예요. 결국 9절의 말씀은 누가 지키는가? 예수님이 지키고 우리는 예수님이 지켰다는 혜택을 입은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역할로 9절을 봐야 되는 거예요.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지켰고 우리는 그 지킴의 열매로서 혜택을 입는, 구원받지 못할 자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10절도 충분히 이해되지요.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그러면 우리는 포도원 하면서 열매를 다 안 따요. 안 따면 옆에 사람이, “아이고, 집사님은 믿음도 좋지. 그 귀한 열매를 다 따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주다니.” 그러면 우린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나라면 몽땅 다 땁니다.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그 다음에 11절 봅시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아주 명확하죠. 너희는 도적질하고 있으며 속이고 있으며 서로 거짓말하고 있음, 라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항상 희생과 결부돼야 돼요. 화목제와 결부해야 돼요. 만약에 우리가 16년 동안 도적질 안 했다면 16년 지난 그 다음 날 도적질할까요, 안 할까요?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되면. 도적질하지 않으면 위급할 상황이 되면 몰래 하게 돼요. 몰래 하다가 자신이 붙으면 나중엔 공개적으로 하고 대범해지고. 큰 도적질하면 작은 건 취급도 안 하잖아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뜻인데 그게 우리한테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도적질하고 안 하고는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고 결심하는 거예요. 그리고 도적질이다, 아니다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대한항공 가족이 밀수한 것은 도적질 아니에요. 그들에게는. 그러나 서민들이 하면 밀수에요. 그들은 다만 밀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거죠. 항공사니까. 그건 도적질 아니에요.

내가 무슨 전문 밀수꾼이냐. 그냥 가방, 초콜릿 몇 개 가져왔는데. 큰 금괴 덩어리 안 가져왔다고 나오거든요.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내는 세금이 얼만데. 우리가 먹여 살리는 직원들이 몇 만 명인데. 항상 양으로 말해요. 선한 게 많으면 어지간한 악은 눈감아 달라는 거예요. 이건 거룩이 아니죠. 만약에 대한항공 그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합시다. 그 교회 기도하고 난리도 아닐 거예요. 왜? 그들이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그 사람이 감옥 가면 헌금이 안 나오고 교회가 안 되고 교회가 안 되면 하늘나라가 안 되고 악마만 좋아한다고 그렇게 가르칠 것 아니냔 말이죠.

십자가 자리에 교회가 들어가 있으니까 그게 사탄의 일인지 몰라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악이 우리가 실수나 능력이 부족해서 악이 되는 게 아니고 악이라는 구체적인 독립적인 실체가 있어요. 우리가 그것과 결탁돼있어 문제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 절대성, 자기 잘남 이것은 선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그걸 듣기 싫어한다는 본성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그것이 바로 근원적인 죄라고, 그게 거룩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거룩한 상대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주께서 홀로 다 지키는 말씀인줄 몰랐습니다. 한 다리 걸치고 두 다리 걸쳐서 내 것 만들면 우리 것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비현실적인 몸짓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