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5:21-26 / 열 둘 아들

정인순 2018. 5. 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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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둘 아들

이근호
2018년 5월 2일                  

 

본문 말씀: 창세기 35:21-26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35: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35: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35: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35: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라헬이 죽고 난 뒤, 더 이상 야곱의 자식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자식은 언약적 짝이 되는 에서와의 대결 상태에 의해서 생겨나야 하는 ‘언약적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에서와 싸워서 복을 따내듯이 그런 식으로 경쟁했던 이 육적인 속성을 지닌 아내들의 존재가 곧 자식의 생산으로 이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자식들 단계에서 야곱의 육이 이어진 겁니다. 이들 육적인 자식들이 언약 사람으로 달라지는데 있어 더 이상 야곱이 할 몫은 없습니다.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인 빌하와 통간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야곱은 아무런 조치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이제 야곱에게 내려준 언약은 아들과 아들들 사이에서 새로운 양상을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언약과 연속성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뜻을 언약에 담아 내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언약이 수립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아브람의 육의 소산에서 나온 이스마엘은 언약을 성립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자식, 곧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언약의 자식인데 그 내용은 곧 ‘죽음’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양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지상에 구체화됨을 나타납니다. ‘죽지 아니하면 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살 생각을 먹지 말아야 할 존재가 육이라는 겁니다.

이 점을 당연히 12아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야곱같은 경우에,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했던 바가, 얍복강에서 밤에 찾아온 천사에 의해서 무참하게 부정당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경험이 야곱의 아들들 사이에서 발생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12명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12가 1이 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육에서 영이 되려면 개별자를 지칭하는 1은 용납되지 못합니다. l2가 1이 되려면 12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관계가 개입되어야 합니다. 즉 비록 야곱의 12의 아들들이 각자 자신들의 인생을 살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야곱언약’에 철저하게 예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특정 개인이 야곱언약의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다 혜택을 입으려고 그들 12명은 하나의 원리에 묶여야 합니다. 그러나 육이란 오직 자기 자신을 절대시하는 속성을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태어나기에 육이 영이 된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야곱이 받았던 그 언약은 어떤 식으로 이 열두명의 자식들을 하나의 ‘이스라엘’로 묶어낼까요?

그 원리를 알기 위해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의도적으로 12명을 뽑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규정하는 12라는 숫자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의 이해 하에서 통용되는 그런 12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12라면, 이는 언약 밖의 있는 자들이 구원에 추가될 경우에, 12가 마감되는 숫자가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13,14,15라는 식으로 구원된 자의 숫자를 추가시키는 것은 성경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언약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이 이 12라는 구원 숫자에 끼어들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12는 그대로 12로 충족됩니다. 이는 곧 12라는 숫자가 사람 수를 겨냥한 숫자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언약의 일, 곧 새언약으로는 모든 언약을 완성시키는 그 기능을 겨냥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12제자 중에 한 자리가 빠졌을 때, 성령님께서는 기어이 그 빠져 있는 자리를 마처 채워 12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이 때 빠지고 들어가면서 밝혀진 자리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의 새언약 완성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야곱 언약의 원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내부에서 나중에 아들들의 시기심에 의해서 희생되는 아들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는 야곱언약이 아들들 가운데 그 자체적으로 언약이 운용된다는 말입니다. 곧 요셉입니다. 억울한 요셉이 자신을 억울케 한 다른 형제들과 부모를 살려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야곱언약을 받은 야곱 본인은 요셉은 곧 ‘죽은 자식’, ‘잃어버린 자식’이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독자를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버지와 그 아들의 관계를 되풀이해서 재현됩니다. 자식이 죽거나 잃었다는 말은 곧 아버지로의 자격이 상실됨을 의미합니다. 자식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라는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바로 자식 잃은 아버지의 자리가 언약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원리는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무엘하 12:23에 보면,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적 죄를 가시화시키시는 그 개입을 하나님의 언약의 진행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희생된 그 언약적 자식이 있는 곳에 지금은 갈 수 없는 나다”는 겁니다. 육과 영의 철저한 단절성을 다윗은 밧세바를 만나면서 알게 된 겁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가정을 파탄내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정당성을 사수하는 그것이야말로 전에 미처 알지 못한 자신의 근원적 죄였던 겁니다.

다윗은 알았습니다. 언약은 죽음, 그것은 그냥 일반적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등장되는 언약에 의한 죽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상활동인 것을 압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만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같이 버림받아야지만 개별적 육에서 영으로 이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8:22-23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는 먹지를 못했습니다.

즉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육됨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종교적 욕구에 불과합니다. 이는 따로 1을 고수하는 바가 됩니다. 이것은 언약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계속 따로 절대화하여 유지하려는 버팀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훼방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을 구원으로 여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가동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36강-창 35장 21-26절(열둘 아들)1805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장 21-26절입니다. 구약성경 54페이지입니다.

창 35:21-26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지난 시간에 라헬이 죽음으로서 경쟁상대가 사라졌지요.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그냥 낳는 것이 아니고 라헬이 언니와의 경쟁관계를 통해서 자식이 생산된다는 이것은 야곱이 그냥 야곱이 아니고 야곱에게 경쟁상대가 되는 짝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형 에서였습니다. 누가 들으면 가정사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지만 단지 가정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두 국민이, 두 민족이 오직 그 두 사람으로 인하여 새롭게 의미를 지니고, 영원한 창조의 비밀을 갖고 서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인류가 두 조각난다는 사실이 야곱과 에서라는 짝을 통해서 보여집니다. 그것을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언약에 담겨 있습니다.

언약에 담겨 있으면서 그 언약이 이 지상에 구체화될 때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인류가 두 개의 질로 나눠집니다. 두 개의 양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양쪽 반반씩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두 개의 질서, 또는 두 개의 연결될 수 없는 단절된 영역으로 영원히 갈라서게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약을 안 믿으려고 해요. 언약을 믿게 되면 자신이 평생 수고하고 노력하는 그것이 무용지물이 되기에 그게 싫은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질, 언약 말고, 내가 내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꾸려가겠다는 그 성질이 바로 에서, 버림받는 에서의 성질인 것을 주님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도 같은 성질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야곱도 같은 성질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에서에게 없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야곱에게 찾아왔고 야곱은 밤에 그 천사를 직접 만났습니다.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은, 내 인생이 나를 위한, 내게 의미 있게 작용되는 언약이 아니라 나를 오히려 이용하고, 나를 통해서 정작 언약의 주인공은 등장한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그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철저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야곱이 알듯이 오늘날 우리도 알아야 됩니다. 야곱이 야곱언약을 받았다면 오늘날 성도는 그 언약의 완성인 새언약의 증인으로서, 새언약을 위해서 증인으로 쓰이는 인생으로 다뤄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 창세전에 기정사실로 확정된 거예요. 내가 애쓴다고 해서 내 인생 달라질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약이 갖고 있는 그 창조전의 비밀은 야곱을 통해서 슬금슬금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합니다. 원치 않게 두 명의 아내를 통해서 야곱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아내 두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야곱의 자식들을 이 땅에 뿌려놓았습니다.

그 자식들 하나하나에 서로에 대한 질투심이라든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겠다는 지극히 육적인 요소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 어미의 그 자식이기에. 따라서 이러한 언약의 원칙은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와 그리고 하갈, 이 두 요소에 의해서 따로따로 자식이 주어졌는데 하나는 이스마엘이었는데 그 자식은 버림받습니다. 또 하나의 자식은 이삭이었는데 이삭이라는 자식은 없던 자식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리를 야곱에게 적용시키면 야곱의 두 아들들은 전부 다 이스마엘같은 자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제 이스마엘같은 자식에서 이삭같은 자식으로 어떻게 변모하는가? 그것은 야곱이 손을 떼에 될 문제입니다.

더 이상 야곱이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뀜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요소가 우리 가정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의 요소에다 자기에게 덮치듯이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의 요소처럼, 야곱 같은 열 두 아들을 이제는 이스라엘 같은 없던 분이 동행함으로써 이스마엘처럼 버림받아 마땅한 육적인 열 두 자식들을 이삭 같은 천국의 백성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이 이제는 새롭게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에 오늘날 성도라 하는 것은 나 구원 따냈다, 천국 따냈다, 가 아니라 철저하게 육에서 영으로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하나님의 십자가의 영 되시는 성령에 의해서 이 세상에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증인으로 살도록 요구받는 인생을 사는 그들이 바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의 사람을 신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무슨 소리를 듣게 되었느냐 하면, “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죽은 아내 라헬의 여종인 빌하와 르우벤이 통간했다는 이야기를 야곱이 듣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조치도 내리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이제는 야곱의 시대가 갔고 야곱의 아들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한 죄는 야곱이 자식에게 물려준 육적인 요소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육과 언약의 만남이 야곱 이후에 자식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양상으로 언약 자체적으로 갖고 있던 속성들을 지상에 쏟아내고 있는지를 이제는 우리가 볼 차례입니다.

육적인 것을 영으로 바꾸시는 그 언약의 작업이 이제는 야곱라인에서 야곱의 자식 라인으로 전달, 전이가 돼요.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과 아들들 상호 사이에서 어떻게 이러한 육적존재일수밖에 없는 야곱의 자식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자식들로 변모하는가는 이제 야곱으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손을 떼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알고 있어요. 자기의 열 두 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스케줄 따라 태어난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열 두 아들은 비록 숫자가 열 둘 이지만 하나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언약으로 하나로 묶여 있지요.

언약으로 묶여 있다고 할 때 하나같이 행동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육적인 인간들은, 형제간이든 부모자식간이든 간에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육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전체 하나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 앞으로 그들이 알게 되느냐 하는 그 추이를, 그 진행과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는지를 우리가 지켜볼 필요가 있지요.

일단은 언약적으로 결속되어야 돼요. 언약적으로 결속되고 그 결속된 언약에서 개인적인, 나밖에 모르는 그 인간들과 하나로 그것을 묶어내는 언약과의 힘겨룸, 작용, 이런 것이 계속해서 파악되는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요셉이 희생함으로써 열 두 아들이 하나로 결속 되는 겁니다.

요셉이 희생했을 때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자식을 잃어버린 거예요. 요셉은 죽은 자식이 되는 겁니다. 열 두 명이 아니고 열 한 명이 되는 거지요. 요셉은 짐승에 물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형님들의 안부 체크하려 갔다가 밉상 받아서 형들이 어떻게 했든지 간에 야곱의 생각 속에는 요셉은 없는 자식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이에요.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은 언약적 처지에 놓여 있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거예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 내 자식이 없어졌다는 것은 곧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기의 속 내부의 화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속성이 구체화된 것이 자식인데 그 자식이 죽어 없어졌다는 말은 곧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원천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내가 천국 가겠다, 내 행함으로 내가 구원 받겠다 하는 그 나가 십자가 앞에서 죽어 사라지게 하는 그것이 언약의 실현상태입니다. 실현된 상황이지요.

성경공부해서 구원 받겠다 하는 이것은 언약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니까. 선교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것도 언약이 아닙니다. 주의 뜻이 아니에요. 마귀 뜻입니다. 왜냐하면 선교하는 당사자인 내가 살아 있어야 되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나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는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준 거예요. 이미 우리가 있으나마나 죽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준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언약적관계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 있어서나 야곱에 있어서나 언약적관계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버지만 있으면 안 되고 아들만 있으면 안 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동반해서 언약 속에 등장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 있어서 독자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으로 주신 그 아들이 아브라함에게 죽어 없어지는 아들의 관계로서 자기 아버지의 위상을 갖게 됩니다.

자식을 잃어버려야 이것이 나도 잃어버린 동시에 두 사람의 그 잃어버림 사이에서 없는 언약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 죽고 동시에 자식이 없으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 자식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겠어요, 자식이 없어서, 아들이 없어서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 입장, 나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것을 내가 상실해야 되고, 그런 경우에만 육의 아버지 혹은 육의 자식이라는 그 모든 지형, 육의 지판이 통째로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육에서 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육 자체가 찢어져야 돼요. 육 자체가 사라져야 됩니다. 언약이 투입되지 않으면 육이 없어지지 않아요. 육에서 하는 것은 뭐든지 육이 되는 겁니다. 육에서 헌금하고, 육에서 전도하고, 육에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이 모든 것은 육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거예요.

참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공부 한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뭘 위한 성경공부인지, 뭣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되는지. 그 정보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성경공부 백날 하고 성경 천 독을 해봐도 천 독한 나, 성경 공부한 나가 되어버리면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육의 행위가 되지요. 자기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요.

온천지 성경공부는 다 쫓아다니고. 그래놓고 돌아오는 것은 나는 멀쩡히 살아 있고. 그게 무슨 효과입니까? 자기 잘남의 증인밖에 안되는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아버지 됨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육이지요. 잃어버림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지요.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아버지가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을 이 지상에서 잃어버리듯이 동일한 잃어버림으로 그들을 잃어버림에 참여시킵니다.

여기 아들의 숫자가 12, 열둘인데 여기서 열둘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서로서로 헤아리는 그 숫자의 12가 아닙니다. 인간 사이에 서로 통용되는 그 숫자 12가 아닌 이유는 에베소서 2장 12절이 근거가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지금 이방인들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방인들의 특징은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열 두 지파에 속하지 않은 거예요.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래서 둘로 하나를 만들었다(14)고 했습니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12라면, 또는 14만 4천이라면 이미 이스라엘로서 12가 확정되었고 다 충족되었어요.

그러면 더 이상 추가될 수 있는 경우, 13, 14, 15라는 숫자는 여기서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12가 이스라엘로 꽉 차버렸는데 이방인들이 또 끼어들면 이것은 12가 아니고 17, 18, 19, 20, 이런 식으로 늘어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여기서 12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헤아리는 숫자 12, 또는 14만 4천이 아니에요.

그 12라 하는 것은 없는 하나를 끄집어내는 근거가 되는 12,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한 몸이 될 때 그 한 몸은 그냥 한 몸이 아니고 이 지상에 야곱언약에 의해서 미리 등장된 숫자 12를 근거해서 비로소 하나로 형성되게 하는 그 12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니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지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열두 명을 뽑습니다. 열두 명을 뽑을 때 우리는 무엇을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이 열두 명이 각자 열두 명입니다. 개성도 열두 가지고 성격도 열두 가지고 타고난 상황이나 지문을 조사해도 열두 개의 지문이에요. 각자 개별적인 인간들입니다.

그 인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열두 명을 택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마시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그 열둘의 사이를 묶어버립니다. 성령 받으면 이미 그들은 죽은 자가 되어버려요.

열둘을 묶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와 더불어 죽을 때 그 하나하나가 죽게 됨으로써 하나하나가 죽게 된 그 원리가 야곱언약이기 때문에 그들은 열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열두 사도 중 한 사도가 배신했는데 하나님께서 제자 말고 다른데서 배신하게 하지 않고 하필이면 주께서 택한 열둘 중에서 하나를 배신케 한다는 것은 그 12라는 숫자가 갖고 있던 내부적 속성, 십자가와 부활의 언약적인 능력 없이는 그 12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빠진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언약적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언약의 완성을 모르기 때문에 빠졌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열두 번째 사나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사람을 집어넣지요. 그게 맛디아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열둘을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열둘이 각자 노는 것이 아니지요. 열둘이 하나같이 움직이는데 그 하나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열둘을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죽은 자의 활동, 죽은 분의 언약활동이 계속해서 열둘을 고집하게 됩니다. 12라는 언약의 열둘을 고집한다는 것은 12를 하나 되게 하는 언약적 원리 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정시키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해야 돼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이 죽은 것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살아서 어떻게 복 받는가를 교회가 설교하면 안 되고 복이 오든, 집안이 어떻게 되든 인생이 어떻게 서글프게 되든 관계없이 너는 이미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자기 인생을 새삼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그 자체가 비언약적이라는 겁니다.

성도가 살아 있는 이유는 언약, 새언약의 완성을 증거 하기 위함이지 남들처럼 괜찮은 자기인생을 뽐내기 위해서 교회 다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이 만큼 성공했다. 예수 믿어서 우리교회 부흥되었다. 그런 것을 증거 하려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14만 4천이 나오는데 그게 12 곱하기 12곱하기 천이에요. 12와 12, 그리고 완전수 천, 12와 12로 완전하게 자기 백성으로 이미 확정된 자는 오류 없이, 실수 없이 반드시 주님께서 다 건진다는 겁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12곱하기 12, 이것은 언약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거예요. 오직 새언약의 활동만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새언약이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신약 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내 잔을 마시라고 해서 쓴잔을 같이 마신 사람은, 내 살과 내 피, 마지막 유월절만찬에서 예수님과 같이 떡을 뗐던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될 자들이고 그들만을 언약으로 묶어내고 그 언약으로 묶어 낸 오순절 성령, 그 성령세례를 이방인도 받게 되면 그들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묶어내는 신약적작업이 구약 때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펼쳐지느냐 하는 거지요. 그러려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야 되는데 육에서 영으로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육은 반드시 죽어야 돼요. 육은 죽는데 그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죽음을 언급한다고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다윗언약,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에 보면 야곱언약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까 야곱언약에 대해서는 언급했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는 이미 죽은 자고 그 죽은 자가 없는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야곱언약을 완성하게 됩니다. 열 두 아들은 요셉덕분에 하나가 되는 언약적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지파가 주어짐으로 요셉의 위상, 희생자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그 희생이라는 의미가 열둘을 하나로 묶어버립니다. 그래서 육에서 영으로 전환되는 거지요. 이와 같은 일이 다윗언약에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죄짓게 만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지요.

다윗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늘 본문 창세기 35장 11절 보겠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야곱을 통해서 많은 국민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나와 봤자 하나하나 개별자에요. 하나로 묶는 제도, 형식이 뭐냐? 그 뒤에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백성들을, 그 수많은 사람을 하나로 묶는 왕이 등장하는데 그 왕이 등장하는 언약을 다윗언약이라 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백성들은 다윗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답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합니다.

그 죄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 대해서 음욕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욕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보다 더 깊은 구석에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 자제할 대상이 아니지요. 욕망이 이깁니다. 욕망대로 움직였고 욕망대로 움직이면서 또 다시 등장한 것은 자신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 하나 살해해야 돼요.

그래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완전히 우리아가정자체를 파탄 내 버렸어요. 하나의 가정을 자기의 잘남을 커버하기 위해서 파탄내고 말았습니다. 시편 51편에서는 우리아의 죽은 것을 주께서 꺾으신 뼈라고 합니다. 다윗은 미필적 고의에 위한 살인으로 우리아를 죽여 버리고 그 아내를 뺏다시피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삼고 그 둘 사이에 임신이 되어서 자식이 나왔습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들으면 바람피운 어떤 가정의 불상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같지만 이 자체가 언약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시고, 죄를 지어야 되고, 그 죄를 겨냥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이 어떻게 실제로, 현실적으로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애가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그 애 일주일 만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는데 결국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사무엘하 12장 23절에 한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아이가 죽어갈 때 금식할 때와는 달리 애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은 멀쩡하게 자기 업무에 복귀합니다. 그렇게 하니 신하들이 이상하게 여깁니다. 낙담하고 후회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멀쩡하게 계십니까, 라고 하니까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저에게로, 나는 저 죽는 내 자식에게로 가지만 저 자식은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알려준 바는, 내 죄로 말미암아 희생된 자는 저쪽으로, 하나님께서 저쪽으로 넘기고 그리고 이쪽에 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저쪽과 이쪽을 단절시켜 놓고 다윗 쪽에서는 다윗 나름대로 했던 행세의 결과를 마음껏 보여줘야 될 하나님의 그 다음순서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갈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육으로서는 그 죽은 자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그런 뜻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다윗은 자기자식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뭘 아느냐? 그 자식을 잃어버림으로서 이미 하나님이 자기구원을 개시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무가치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는 거예요. 이 땅에 내가 아무 쓸모 짝이 없다는 것, 헌금하고 기도해도 아무 쓸데가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처리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고 있는 중이라는 증거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18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2절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버림받지 아니하면 단절된 저쪽 세계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버림받은 그 자식의 모습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사실은 다윗이 자기모습을 찾은 거예요. 내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그 모습, 내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서 그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된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 안에서, 언약의 실제화속에서 미리 당겨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알려준 겁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그것만이 현실이라고.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야곱 아들들의 시대에 와서 아들과 아들의 갈등과 경쟁 속에서 요셉이 애매하게, 억울하게 형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사실, 물론 팔려 나간거지요, 팔려나가나 살해당하나 ‘형들을 귀찮게 하는 너는 꺼져버려. 죽어버려. 없어도 돼. 너는 소용없어.’라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림받은 자의 상황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제는 우리가 알게 됩니다.

야곱에게 준 야곱언약은 야곱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야곱이 잃어버린 자식, 죽어버린 그 자식을 통해서 야곱언약은 성취가 되는 겁니다. 요셉을 통해서. 그 야곱은 아브라함이 장사된 막벨라 밭의 굴에 들어가지요. 요셉의 유골도 나중에 약속의 땅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세겜땅에 요셉의 무덤이 있는데 요셉의 무덤이 약속의 땅에 있다는 말은 언약이라는 것이 애굽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은 요셉의 뼈가, 죽은 자의 뼈가 살아 있는 요셉의 자식들을 애굽에서 빼내는 야곱언약능력을 실증적으로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 이후에 솔로몬이 나오는데 다윗의 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 왕이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야곱의 허리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이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나님의 성전을 보존하는 일을 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열왕기상 8장 20, 2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여기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언약궤는 솔로몬성전의 핵심부분에 들어갑니다. 엔진부분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천국이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그분은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이름이 어디에만 있는가, 언약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요. 그게 솔로몬 당시에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은 언약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계시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은 자기가 창세전에 계획한 언약만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언약만, 새언약만 증거해야 돼요. 언약과 새언약만 증거해야 돼요.

언약과 새언약을 증거 하려면 우리는, 이 육은 잃어버려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그 과정, 잃어버리는 그것을 통해서 주께서 준비된 언약 되시는 분과 하나 되는 혜택을 입는 거예요.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 함께 사는 세상, 그것을 가지고 아들의 나라,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갓바위에 빌듯이 “하나님, 제 성의껏 다 드릴 테니 복이나 주세요.”라는 이 기복신앙은 교회를 10년 다니나 20년 다니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십자가 피 흘렸음을 날마다 확인해야 돼요. 10년 다니고, 20년 다니고, 목사나 장로가 되어도, 내 행한 만큼 복주세요, 내 행한 만큼 잘 되게 해주세요, 나 잘되게 해주시고, 내 교회 잘 되게 해주세요, 라는 이러한 기복신앙은 백날 해봐야 세상 끝날 까지 없어지지 않아요.

내 것 잘 되려고 인생 살아가잖아요. 그게 바로 육의 모습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이 희생했다는 생각은 안하고 희생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어요. 자기만 잘되면 돼요. 자기만 자기가 지키겠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밖에 없고 주의 이름은 없지요. 주의 이름은 언약이 실현되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이 언약이고, 언약이 있는 곳이 성전이고, 성령이 임하면 우리 몸이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의 주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주께서 언약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태어나면서 오직 자기만 챙기는 육의 속성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그냥 방치하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영을 주셔서 그 육을 버려야 그것이 바로 주님이 성전이 됨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을 통해서, 육을 가지고, 육을 버리지 않고 영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만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