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35강-창 35장 16-20절(오른손의 아들)1804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장 16-20절입니다. 구약성경 54페이지입니다.
창 35:16-20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성경에서 평범해 보이는 가정문제가 여기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유일하게 이 우주의 모든 비밀, 창조의 비밀과 마지막의 비밀, 천국의 비밀, 지옥의 비밀, 모든 신비로운 것이 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는 성경을 펼치지요. 그런데 그 비밀의 출처가 어디냐, 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그 출처를 곡괭이 들고 파낼 수가 없습니다.
그 출처는 하나님 쪽에서 주의 깊게 심도 있게 일을 일으키는 특정지점이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의 어떤 특정지역에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비 꼬인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든지, 기괴하게 생긴 기암이 있는 그곳에 우주의 신비가 있다든지, 또는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진 곳에 우주의 신비가 있다든지, 또 ‘전설에 고향’에 나오는 것처럼 옛 부터 효험이 있는, 자녀를 낳게 해준다든지,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지점, 그런 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것을 전설로 또는 전통으로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그곳에 제사 지내는 그런 풍습들은 줄곧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자기 지역 내에서는, 옛날에 우리 조상이 여기서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이 경험하지 않은 앞으로 될 미래의 모든 운명까지, 우주의 운명까지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원천의 지점, 그것은 인간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주장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에 와서 인간들은 그야말로 자본의 시대에 살지요. 시장경제의 원리로 살기 때문에 인간 하나하나가 스스로 다른 사람의 소모품, 이 자본의 사회의 엇비슷한 소모품으로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다가 소모되고 죽고, 자식 낳고 또 살다가 소모되고, 소모되기 위해서 밥 먹고 사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입장에서는 전부 다 개별성들이 강조가 돼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그러다보니까 우주의 중심이라든지 그런 소리를 하게 되면 이상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사는 것에 급급해서 우주의 비밀은 어떻게 되느냐, 세상은 누가 만들었으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천국과 지옥은 과연 있느냐, 하는 그런 거대담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둘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지요.
관심사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투자한 것에만 몰두하는데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점점 세월이 가게 되면 자기 몸도 닳아집니다. 소비되고 소모되지요. 가치도 뚝 떨어지고. 그래서 결국 이 우주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이게 결론이에요.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다 같이 모르니까 아쉬운 것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의 비밀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친히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점이 어디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약속을 지상에 떨어뜨릴 때, 주입시킬 때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부부를 통해서 그 사실을 공개하십니다.
부부라 하지만 흔한 부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름이 야곱과 라헬입니다. 이 부부 이야기가 흔하디흔한 다른 부부와 같은 부부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언약을 가지고……,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주의 비밀이지요. 언약을 가지고 그 부부에게 찾아옴으로서 부부에게 일어난 그 일과 이 우주의 근원, 모든 진리의 원천을 주님께서는 관련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야곱의 부부 이야기를 통해서 몰랐던 이 세상의 비밀, 하나님의 비밀, 우주의 비밀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발생시켰느냐?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기를 임신했는데 그 아기를 낳을 쯤 되어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산파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리를 듣고 라헬은 아기와 자기 목숨과 맞바꿔진다는 것을 감 잡았어요. 죽기 전에 이름을 지었습니다. 베노니라고 했어요. 베노니의 뜻은 ‘슬픔의 아들’이다. 슬픔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듣고 아기 아빠 되는 남편 되는 야곱이 그 이름을 그냥 죽은 자의 소원이라 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문제인데 야곱은 어떤 의도인지 이름을 바꿉니다.
베노니라는 이름대신에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베냐민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비밀을 그냥 순하게 알려주게 되면 인간들이 그걸 곱게,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는 처지 같으면 이런 이름 바꾸기라는 번잡스런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요.
이름이 처음부터 하나였고 끝까지 이름이 하나였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질서와 땅의 질서가 그렇게 격돌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뜻과 그걸 구체화해야 될 지상의 뜻이 서로 대치된다면 하나님의 뜻과 그리고 그것을 잘못 이해하는 세상의 뜻 사이에서 변개가 일어나야 돼요. 수정이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 수정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을 언급합니다. 수정을 통해서, 바꿔치기를 통해서. 그러면 여기서 무엇에서 무엇으로 바꿔지느냐가 굉장히 관건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어떠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개입했다. 그로 인하여 인간들은 어떠함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어떠함을 하나님께서 순순히 받을 수 있는 바탕은 되지 못했다.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그 어떠함이 개조가 되고, 사실은 파괴지요, 파괴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새롭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때 이 지상에 날라진 하나님의 뜻은 완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해야 될 일은 인간의 뜻은 무엇이며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수정된 그 결과로 나타난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이었는가? 그 두 가지 내지 세 가지를 우리가 파악해야 됩니다. 첫 번째는, 라헬이 죽어가면서 아들 이름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것은 부부가 성립돼야 아들이 생기지요. 부부가 아닌데 여자 혼자 애를 낳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부부라는 것이 왜 맺어졌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성경말씀은 인간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근원과 대치가 되는, 대조가 되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인간세상이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마귀가 개입했습니다. 마귀가 개입해서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인간과 그리고 그것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잘못된 인간성이 범죄하고 난 뒤에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부부였고 나중에는 어떤 부부가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하고 난 뒤의 부부의 모습이 나오는데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한 그 부부의 모습과 어떻게 보면 조금 달라진 것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달라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자기의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서 옷을 만들어서 자기의 수치됨을 가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것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수치스러운 이유가 돼요. 벌거벗었다는 것이 수치를 유발하는, 수치가 발생되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께서 옷을 입혀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벌거벗은 채로 있었어요. 창세기 2장 끝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되어있거든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간이 그 다음부터는 부끄러워서 가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치가 일어나지 않는 인간을 만들었고 수치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 벌거벗음을 가릴 필요가 없겠지요. 인간이 옷을 처음 만들 때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옷을 만들었어요. 가린다 이 말이지요. 처음에 인간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았느냐 하면, 인간이 벌거벗었지만 에덴동산 전체의 부합되는 요소가 남자와 여자가 옷을 입지 않아야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에덴동산 전체, 보기에 심히 아름다운 그 동산 전체가 아름답게 유지되는 조건 중 하나가 결코 인간에게 스스로 자기를 위한 옷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 벌거벗어야 된다는 조건이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미 에덴동산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범죄하고 난 뒤에 그들 자신이 창조의 근원을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창조의 근원을 가리고 있으니까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비근원이고 하나님께서 이 창조의 근원을 위해서 창조했는데 인간은 그것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입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라헬이 죽으면서 아들을 낳고 난 뒤에 ‘슬픔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슬픔의 아들이니까 슬픔이 일어나게 하는 자식은 아들이 되고, 그 아들을 보면서 슬퍼하는 자는 라헬이 되겠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슬퍼하는 거예요.
라헬이 자식 낳으면서 뭔가 기대한 것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안 죽는 조건하에 자식을 낳아야 그게 슬프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라헬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은 자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나는 슬프고, 자식은 태어나는데 내가 죽기 때문에 슬프다는 겁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왜 죽는 것이 슬프지요? 왜 죽는 것이 슬픕니까? 모든 있음의 세계를 죽어서는 안 된다는 그 의지가 강력하게 지금 붙들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죽으라는 그 지시가 그들에게 슬픔의 요소가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왜 죽는 것이 슬프냐? 딴 기쁨을 인간들이 쥐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있음, 여기 있다는 겁니다. 있는 것이 죽으니까 사라져 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있어야 되는데 있는 것이 자식도 못보고 사라지고 죽어 없어지니까 그게 슬프다는 겁니다.
그런데 슬픔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부부가 한 몸이니까 라헬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옆에 있는 남편에게도 같이 그 속성이 결합되어 있어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남자로부터 시작했어요. 남자로부터 시작해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은 한 몸이 된다 했는데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때 그 한 몸 되고 난 대표자를 누구로 세웠느냐 하면, 남자에게 그 대표권을 줬습니다.
주도권을 남자가 쥐고 있는 거지요. 여자라 하는 것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그런 예가 마태복음 18장 25절에도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어떤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돈이 없어서 빚을 못 갚겠다고 하니까 채권자가 강요하기를 “갚을 돈이 없다고? 없으면 네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아.”라고 강변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아내라 하는 것은 남편의 소속이 되어버려요. 남편의 소속이 되면 여자는 단독적으로 대표자가 되지 못하고 남자가 대표자가 되고 그 대표의 부속존재로서 여자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부부가 한 몸이라도 대표자가 남자가 되기 때문에 그 자식도 여자의 자식이 아닙니다. 바로 야곱의 자식, 남편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내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니까 이 있음의 세계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그게 전부 다 슬픔으로 변했다고 라헬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보통 가정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된 가정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이 우주의 비밀과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과 장래의 모든 것이 완결될 때 나타나는 그 진리까지 언약 안에 함축 되어서 지금 이 부부를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이 가정에서 뭐가 들춰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이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들춰지는 겁니다. 들춰보니까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 하면, 애를 낳았는데 그 애를 낳으면서 엄마가 죽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죽게 되었을 때 라헬이 대표적으로 말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아이는 누구의 아들이냐, 슬픔의, 슬픈 우리 가정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이 나옴으로서 우리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하면, 있음이 곧 슬픔으로 있는 그러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했을 때, 언약이 주어졌을 때 파악되는 사실입니다. 이게 근원적인 것이고, 원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있음, 모든 있다는 것, 의자, 사람, 개, 고양이, 돌멩이까지 모든 있음은 하나님이 개입할 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이게 슬픔을 자아내는 요건으로서 거기 있다는 겁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냥 정상이 아니다,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모든 있음은 하나님의 언약과 대치되고 반대되는 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땅히 슬퍼해야 될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렇게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슬퍼하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까?
예수님도 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고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다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냥 전부 다 슬퍼해야 마땅하고 고생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고 그냥 슬프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슬프냐? 그 이유가 그 뒤에 이름이 바뀌면서 나옵니다.
슬픈데 왜 슬프냐? 있음 자체가 슬픔을 자아낸다. 왜 있음 자체가 슬픔을 자아냅니다. 이름이 바뀝니다. 이름을 누가 짓느냐 하면, 죽어가는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야곱이 이름을 지어요. 베냐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참 어렵지요.
우리가 아는 오른손은 사람의 몸체 중 일부가 오른손이지요. 누구의 아들 같으면, 몸체 전체가 다 드러난 상태에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면면이 다 노출된 상태가 되지요. 그런데 여기서 오른손이라 하는 것은 몸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 전체 가운데 일부가 오른손이에요. 왼손에 대비되는 오른손.
몸의 일부를 가지고 오른손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무슨 기능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 아들을 낳게 한 몸 전체 가운데서 오른손이 하는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출현되어야 될 아들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설명도 이렇게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어떻게 있음으로 인하여 슬퍼해야 될 그 있음의 아들이 어떤 연유로 오른손의 아들로 전환되어야 하는가, 그 과정이 더 난해하겠지요?
오른손의 아들을 더 확실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지나고 출애굽기 15장 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순다. 여기에 베냐민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오른손의 아들은 이 지상에 대해서 원수를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고,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악된 원수를 공격해서 부수는 그 기능을 완료시킬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나 여기 있다, 하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을 하나님의 원수로서 규정하시고 그 원수에 대해서 쳐부수는 기능을 품고 나타나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 했을 때 누구누구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를 지칭하거든요. 하나님의 개입으로 라헬이 죽어가면서 모든 있음에 대해서 슬픔이 자아내는 있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슬픔을 자아낸다는데 거기에서는 무슨 이유가 밝혀지지 않느냐 하면, 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슬퍼해야 되느냐의 그 이유가 안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름을 슬픔의 아들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의 아들로 바꿈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상이 되는 그 모든 것이 슬퍼해야 될 모든 있음들은 슬픔이 나와야 마땅하다, 라는 사실을 베냐민을 통해서 베노니를 설명해 주는 겁니다.
같은 아들이지만 베냐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뭐냐? 이 땅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감추기 위한 원수의 작용, 악마의 작용이 벌어지고 있기에 너희들은 마땅히 고생하고 마땅히 슬퍼해도 너희는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베냐민이라는 이름을 여기서 거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지상에 직접 자기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등장은 언약을 통해서 등장하고 그 언약을 통해서 등장하는 그 가정은 남자 중심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여자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친다는 대목이 단박 떠오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남자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고 남자가 대표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여자의 의견과 남편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라헬이 더 이상 남자의 지배권에서 벗어나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 모든 있음은 남자로 대변되는데 그 남자가 주도권을 쥐는 거기서 이제는 언약이 자유롭게 빠져나가면서 전에 있던 남성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마음껏 고발하면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너희들은 슬픔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고발하면서 그 언약이 남성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눈치 빠른 사람은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하나는 뭐냐, 동정녀 마리아 임신한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세상은 아무리 여자가 애를 낳아도 그 이름은 남자의 소유로 다 전환되고 맙니다. 그런데 동정녀 마리아, 남편 없이 태어난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생한 마리아는 남자에 의해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임신했고 그래서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모든 남성의 세계에서 언약이 자유롭게 빠져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과 모든 것을 장악했다는 것은 그 아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 아니라 언약에 반대되는 강한 연결고리로 묶여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지요.
인간 대 인간은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그 보이지 않는 힘이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반언약적인 요소지요. 악마의 힘이지요. 하나님의 원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에덴동산에서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되는 그 원천과 원리를 범죄하고 난 뒤에는 남성의 세계로 대변되는 그 악마가 모든 있음을 장악해서 꼼짝마라, 하고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여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마리아에서 자식을 낳을 때 남편 없이 자식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어떤 악마의 힘으로도 붙잡아놓을 수 없다는 것이 확연해졌어요.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올 때의 그 양상이 뭐냐? 사람들 보기에 ‘아이고, 안됐다. 슬프다.’ 이런 뜻이에요.
결국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있음의 세계에서는 있음의 세계가 전부에요. 거기서 죽어버리면 사람은 애통하고, 애석하고, 안됐다, 측은하다, 불쌍하다, 이렇게 평가를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잡혀서 십자가 지고 갈 때에 길가에 섰던 예루살렘의 아줌마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막 울었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아주머니들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있음이 깨어질 때, 있음이 파괴될 때 우리는 세상 끝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때 세상 끝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프면 세상 끝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어질 때,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났을 때,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와서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을 비극으로 보고 슬픔으로 보는 겁니다.
그게 라헬이 고백한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을 때 남편과 여자가 하나였는데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으로 남편 따로 아내 따로 되고 말았어요. 라헬의 의견 따로 그리고 남편 된 야곱의 의견이 따로 되었습니다. 이게 따로 될 수가 없어요. 하나기 때문에. 그러나 언약이 주어짐으로서 따로 되고 단순히 따로 되는 것이 아니고 뭐가 하나 등장하고 그것을 뒤바꾸는 작업을 언약이 내리게 되는 겁니다.
베노니라 하는 것은, 엄마가 죽었는데 자식이 태어났다. 그걸 좋아할 엄마가 어디 있습니까? 마땅히 슬프지요. 그런데 여기서 왜 슬프냐를 봐야 돼요. 원래 있어야 좋은 것인데 있는 것이 없어지니까 그것이 슬프고, 살아야 좋은 것인데 산 것이 죽었으니까 그것이 슬프다는 겁니다.
그 발상이 지금껏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진리를 꾹꾹 누르고 있던 악마의 사고방식이었던 겁니다. 세상에 엄마 없는 자식을 낳으면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방문하는 모양새라고요. 남들 보기에는 엄마는 죽고 애한테 좋을 리가 있겠어요? 엄마 없이 태어난 애인데 기가 찰 거지요. 누가 봐도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말합니다. 비극적이라고? 하나님이 오실 때 그렇게 오신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그걸 비극으로 본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감추고, 하나님의 창조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반대되는 그런 성향.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쟁을 감행하시는 겁니다.
오른손의 아들, 전쟁을 치르는 하나님의 기능을 머금은 아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쳐주면 되지 않느냐? 모든 여자는 남자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베냐민이라는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또는 다른 말로 해서 이 우주의 원천은 인간이 아무리 찾을 라야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야, 개입해서 특정한 부부가 갈라져서, 있음이 갈라지고 분열되어서 그동안 원천을 가렸던 그 있음이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어떤 그분이 등장합니다. 그 분, 메시아는 이 세상에 없는 분이에요. 찾을 라도 찾을 수가 없는 분입니다. 익명적 존재입니다. 모든 있음으로 인하여 감추어진 존재,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인간 쪽에서 찾아낸다고요? 그래서 믿겠다고요? 찾고자 시도하고 믿어보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첫 번째, 찾아오시면, 그 다음에 내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있음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그래서 나는 이 땅에 슬퍼해야 마땅함을, 베노니가 마땅함을 깨닫고, 그런데 그 베노니가 마땅한 그것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그 슬픔의 아들을 천국백성이라고 규정을 하고 합격을 시켜주는 기쁨을 제공할 때 그 절차가 언약이 찾아온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절차입니다.
내가 여기 살아 있음, 그냥 있음 자체는 주께서는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키는 그 작업이 주님이 우리보고 하는 작업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뭘 해도 아담이 아담으로 돌아오고 남자가 남자로 궁극적으로 환원되듯이 내 있음에서 출발한 모든 것은 다시 있음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그리고 있음을 안 빼앗기려고 해요. 그런데 안 빼앗기려고 하는 그것이 정말 숨겨진 이 진리를 극구 감추고, ‘우주의 진리라는 것은 없어, 없어. 이런 것은 없어. 내가 밥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해.’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뭔가 꾹꾹 누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인간들의 힘을 이겨냅니다. 원천적인 힘이 나오는 그 지점, 그 지점은 야곱에게는 야곱언약이지만 지금은 새언약, 십자가 새언약, 예수의 살과 피로 세운 새언약, 십자가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존재는 주님에 의해서 파괴되어야 마땅하고 그 파괴된 현장에서, 우리가 죽어 마땅함의 현장에서 떠오르는 것은, 모든 있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달리 말해서 이 땅에 와서 죽었던 분을 위해서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그 의미를 주신 언약과 우리가 하나가 되면서 예수님의 신부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유도 모르는 채 인생 자체가 외롭고 슬프다고 한탄하고 그리고 불평하고 짜증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원천, 그 가치를 내가 살아있음으로 모독하면서 그것이 나쁜 짓이고 죄가 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여, 우리 안에 계시고 남들이 알지 못하지만 함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