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34강-창 35장 9-15절(허리)1804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장 9-15절입니다. 구약성경 53페이지입니다.
창 35:9-15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방법, 복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쪽에 다가와서 결합되는 것이 복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오실 때 그냥 빈손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복을 가지고 왔고 그 복을 받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에서 아무것도 제공된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라 하는 것은 복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나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상당히 이질적이에요. 이질적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이 세상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되는 겁니다. 찾아 볼 수 없는 것.
그래서 복을 받았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 받은 것을 설명할 때 설명해주는 그 복 받은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룰 때와 똑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야기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던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 그 죄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 이동하는 것이 죄에요. 땅에 있는 것이 땅에서 그냥 이동하는 것.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말, 이 모든 것은 전혀 하늘의 이질적인 것이 없습니다. 있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을 자리 이동하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배치하는 그러한 양상들이 죄라는 거지요.
예를 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교회 안의 교인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있는 거니까, 교회 밖에 이미 있는 거니까, 그 있는 사람을 교회 안에 있게 해 놓고 교회 부흥되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죄를 짓는 겁니다.
이질적인 요소가 아니에요. 새로운 요소가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끌어 모으는 것이 죄가 되지요. 아까 이야기한 도적질 같은 것이 그렇고요.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우상숭배도 마찬가지고. 내가 알고 있는 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타인의 것, 내가 알고 타인의 것을 내가 알고 있는 나에게 위치를 이동시켜서 가져오는 것, 그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죄의 예를 들게 되면, 뭔가 탐이 나는데 지금 나에게는 없는데 남의 것이 탐이 나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처럼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것을 갖게 하옵소서.” 벤츠를 타게 해 달라는 식의 것이지요. 고급아파트라든지.
그런 것을 기도할 때 그게 죄가 되지요. 그 내용이 이미 있는 것을 나에게로 이동시켜 달라는 것, 나에게도 그것이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교류되는 이 전체가 죄가 되는데 그러면 죄가 아닌게 뭐냐? 이 세상에는 죄가 아닌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아닌 것은 뭐냐? 이 세상에 없는 거지요. 무엇이 없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그 사람을 신자 만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설교로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득을 하는데 그 의식자체가, 마음가짐 자체가 저 사람을 신자 만들겠다고 시도한다면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자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어야 돼요. 교인들이야 많지요. 그러나 신자, 성도는 처음부터 없는 겁니다.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등장하면서 언약이 없는데서 신자를 생산해 내지요. 신자 만들기, 성도 만들기는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의 숙제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수 없는데 교회 온 저 사람을 신자 만들어야지, 하고 시도하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교회는 있지만 신자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있다면 신자도 같이 거기서 생겨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미 야곱을 통해서 언약이 주어졌다면 신자가 없을 라야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했거든요.
여기서 야곱은 철저하게 수동적 위치에 있습니다. 자기가 왕을 만들고 자기가 국민들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나오게 하지요. 어디서 나오는가? 나오는 위치가 있어요. 야곱의 몸에서 나와요. 허리라는 것이 몸이 일부거든요. 야곱의 허리에서 국민이 나오고 왕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의 허리에서 국민이 나오고 왕이 나온다는 말, 여기서 야곱이 몇 명이냐 하면, 야곱은 두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한 명이에요. 야곱은 달랑 한 명입니다. 이름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이스라엘 이름이 한 명인데 한명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다수가 나와요. 한 명에서 다수가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의 몸은 뭐냐 하면, 언약적속성이 배출되는 지점으로 야곱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허리에서 나온다 하니까 아주 쉬운 예가 있어요. 막대커피 중간에 탁, 부러뜨리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커피와 설탕과 프림 섞은 것이 나오지요. 허리가 두 동강으로 부러지는 것처럼.
허리에서 나온다. 허리에서 나온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원래 자식을 낳을 때 여자의 자궁에서 나오지요. 태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아니고 남자를 대표해서 이야기할 때는 남자의 허리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7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이렇게 ‘아브라함의 허리’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허리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의 일부로 지칭되지만 이 허리부분이 남성의 힘을 사용하되 그 남성의 힘이 장작 팬다든지 물 긷고 농사짓는 데 쓰이는 힘이 아니고 자식을 낳는데 관여하는 남성의 힘, 그것이 허리라고 표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허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그 한 사람, 이름을 바꿔놓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 그 사람의 허리에서 많은 왕들과 국민들이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이름이 안 바뀌었으면 많은 국민과 왕이 나올 리가 없지요. 그러면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인간들 생각은 그래요. 이름을 바꾸지 말고, 이름을 바꾼다는 귀찮은 일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야곱이 태어날 때 이스라엘로 하면 되는 거지요. 야곱으로 했다가 이스라엘로 이름 바꾸는 귀찮은 일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하게 되면 바꾼다는 그런 과정, 필요치도 않는 과정이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야곱이라는 이름을 주고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것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관여한 그 사건이 이 땅에 없는 이질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생산하는 원리가 된다는 겁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 적용되는 그 원리가 없으면 오늘날에도 어떤 누구도 신자가 아니요 그 누구도 성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 바뀌는 과정을 다 고스란히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평생을 다루었던 인물이 있지요. 그건 바로 야곱입니다. 9절에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밧단아람은 하란을 의미하는 것이고 오늘날 터키의 북쪽이지요.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복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이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야곱이 받았다, 가 아니라 그 복으로 인하여 야곱이 하나님 뜻대로 다루어지는 대상자가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옳은 것이고.
쉽게 이야기해서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한자가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발산하고 하나님의 구원되는 절차와 원리를 평생토록 표출해내는 인간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가지는 자가 아니라 표현해야 될 사람이에요. 어떤 표현? 이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 이질적인 것은 하나님이 와서 그 사람을 다루었기 때문에만 나오는 요소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한테는 이것은 설득하는 용도가 아니고 약 올리는 용도지요.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성도되었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약 올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안했는데 천국 갈 리가 있나? 분명히 착한 일을 했으니까, 예수 믿는 착한 일, 교회 섬기는 착한 일, 목사님 섬기는 착한 일, 착한 일, 착한 일, 그게 모여서 경건이 되고, 그게 거룩이 되고, 그래서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거기에 더 보태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과 회개와 참회와 기도와 헌신과 헌금과 전도와 선교와 각종 모임과 예배참석, 성경공부 등등 이런 것이 모였으니까 너를 구원했겠지.’라고 그들이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죄 지은 인간이 능히 할 수 있는 똑같은 일에 불과한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만 성도가 되었다는 이것은 이미 처음부터 인간의 죄 된 행위가 추가가 됨으로 그것이 거룩이라는 것, 성도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그 원리는 이미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나 통하는 원리에요.
그건 누구한테나 납득이 되고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떻게 해서 당신이 성도되었습니까?”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니지요.” 이렇게 답변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신자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성도 되겠다, 신자 되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꾸며낸 가짜 성도고 가짜 신자기 때문에 이게 소망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기대의 대상, 우리의 목표가 되고 마는 거예요.
이 세상 살다 끝나면 저 너머에 천국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 세상 저 너머에, 너머에, 너머에, 그 너머에 가도 천국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죽고 그 너머에 천국이 있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죄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돌출하는 겁니다. 쑤시고 예상 못하게 돌출되어야 되는 것이 천국이에요.
마치 헬리콥터가 산 정상에 착륙하게 되면 흙먼지를 팍 일으키지요. 그 순간 헬리콥터만 보이고 나머지 흙먼지에 의해서 나무가 있고 산 있는 풍경이 안 보이는 것처럼 언약이 헬리콥터처럼 오게 되면 그 순간 없는 요소가 등장하면서 세상은 전부 다 보이지 않는 것이 돼요. 없는 게 된다고요.
그 대표적인 예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내릴 때 거기에 천사가 롯의 가정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성에서 나가되 절대로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왜 뒤돌아봐서는 안 되느냐 하면, 뒤돌아보게 되면 뒤돌아서 보게 된 그 세계가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거든요.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천사의 약속에 의해서 떠나야 될 그 자리는 없는 세계에요. 보이지 않는 없는 세계입니다. 심판 대상인 소돔과 고모라 마을에서 떠나야 될 세계는 아예 없는 거예요. 있는 것들은 다 죄니까. 없는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없는 세계에 도달했거든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없는 세계가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떠난 이 자리에서 뒤돌아보면 그 세계는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없는 세계에 미련 두고 돌아본다는 것은, 그 사람은 몸은 떠나 있으나 마음은 전혀 떠나지 않은, 파괴되어야 되고 심판되고 멸망되어야 될 그 사람이기 때문에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약속의 천국에 동행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천국은 없고 천국 속에서는 이 땅은 죽은 세상이고 없는 세계에요. 있음과 없는 세계 사이에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아예 대화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따라서 설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목회를 안해야 돼요. 하겠다는 자체가 지금 뭔가 꿍꿍이가 있어요. 교회 한 번 키워보겠다는 속셈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법당이고 절간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절간이에요.
인간을 설득해서 신자 만들고 성도 만들겠다는 것은 일체 성경에서는 허용된 적 없고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름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면 될 것을 야곱이름 주고 그 다음에 야곱 그 이름이 전부가 아니고 야곱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이름이 달릴 때 야곱 이름은 어디 있느냐? 없는 겁니다. 야곱 이름으로 살 때 이스라엘 이름은 어디 있느냐? 야곱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이스라엘이라니, 그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없는 거예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있음 자체가 있음의 한계가 되는 거예요. 있음이 전부가 되고 있음 바깥에 없는 것은 누굴 만나도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은 기도 대상도 되지도 않아요. 천국 있다는데서 상상한 세계가 천국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아들의 나라, 이 모든 것이 내가 있음을 전제로 해서 거기서 연결된 나라기 때문에 내 있음이 날라 가버리면 그 세계도 같이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또 다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천국은 없다. 그리고 지옥도 없다. 세상 사람들 생각이 맞는 거예요. 어느 놈이 가 본적이 있나, 그 말이 맞는 거예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 거예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데 가기는 어디에 갑니까?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요? 없는데요?
자, 그러면 이 이름이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야곱아, 정신 차려라. 야곱아, 부탁한다. 제발 내 말에 순종해 다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은 어디까지나 수동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수동성이 아니고, 지난 강남강의에서 했는데 ‘관계적수동성’이라고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인간에게 충분하게 자유를 주면서 그 자유가 수동성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자유의지를 준 거예요.
자유의지를 줬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범위, 이미 정해진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자유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래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유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갇혀진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라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할 때 그 진리 속에 갇힌 그 상태가자유가 되는 겁니다.
진리 속에 갇혔다는 말은 신약의 요한복음에서 보면 사랑 속에 갇힌 거예요. 사랑 속에 갇혔다는 말은 더 이상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내가 내 걱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지요. 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이미 내가 있는 것이고 아는 겁니다.
있는 것, 아는 것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거든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뭐냐?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이 매일 이상해요. 매일 같이 이상해요. 매일 같이 신기하고. 매일 같이 고맙고, 매일 같이 감사하고, 매일 같이 찬미가 되고, 매일같이 신나고, 매일같이 가볍고.
한 게 없는데요. 만일에 두 개를 해서 성도가 되었으면 다음에는 세 개를 요구할 거니까 이것은 불안불안하지요. 그 다음에 네 개를 못하면 탈락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한 개도 바친 적이 없거든요. 둘은 물론이고 백 개를 바친 적도 없어요. 아무것도 안 바쳤어요. 그냥 관계적 수동성입니다.
주께서 설정한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와서 우리를 덮쳐서 우리로 하여금 수동형 인간으로 바꿨습니다. 수동형 인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몸은 아는데 내게 주어진 그 이름은 내 몸으로 성취가 불가하다는 것. 왜 불가한가? 이미 그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완료성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인간은 무슨 행동도 항상 미완료를 낳아요. 착하면 좀 더 착해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착함이고 기도를 해도 두 시간 했다면 한 세 시간은 해야 될 것을, 이렇게 항상 여지를 남기고 미완료로서 다시 이해되는 행위가 우리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주의 이름은 우리가 고칠 수도 없고 변경도 안돼요.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스라엘이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그 이름이 확정되면 그 확정된 기능은 그 기능을 부여받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나의 미완료가 처분해야 될 숙제가 아니에요. 이미 이름 자체가 스스로 갖고 있는 완료된 성격이 이제는 이스라엘 야곱의 몸을 통해서, 허리를 통해서 좍좍 나오지요.
주의 약속대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은 자기가 복을 유지하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고 복이 발산되는 장소지요. 복이 발산되면서 야곱은 세상을 보는 안목, 관점이 언약관점으로, 언약위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활발하게 있어도 그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언약바깥에 나가면 무조건 죽은 세상이에요. 언약 안에 들어설 때만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어딜 봐서 인간이냐, 라는 말을 한 거예요. 인간을 보면서 언약 안에서 인간을 보는 것,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십자가 바깥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달라요.
십자가, 언약 바깥에서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면 나를 살리는 십자가가 되어버립니다. 나는 죽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어여쁘게 여겨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원하는 그런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것은 뭐냐? 흔해빠진 구원론이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를, 내가 구원되면 그게 완성인 줄 알고 있는, 이것은 이미 내가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것은 천국에서 거부하는 죄가 되는 거예요. 모든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구원받고 싶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시면 천국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돈이나 나중에 넉넉하게 주세요,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기존교회는 교회 중심이에요. 언약중심이 아니에요. 자기의 정성이 모인 그 교회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교회 없이는 구원 없고 교회 있으면 구원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게 아니에요. 현재 있는 것은 아무리 명칭을 바꾸고 아무리 개선을 해도 있는 나는 뭘 해도 저주받을 것이고 천국 못갑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 가는 것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나는 미완료니까, 이름이 가요. 그 이름이 완성된 이름이거든요. 그 이름이 나를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용하지요. 우리 허리에서. 새로운 이름을 적용받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흘러나오도록 작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내용이 야곱 같은 경우에 뭐냐 하면, 국민이 나오고 왕이 나오는 거예요. 국민, 왕, 공통점이 있어요. 이게 개인이 아니고 다수라는 겁니다. ‘우리’가 돼요. 나에서 우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변형된 나에서 우리가 나와요. 그러면 변형되면서 야곱은 이미 자기의 야곱 됨을 포기를 해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신자를 만들어버리면, 나에서 우리가 나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고 내 솜씨가 되어버려요. 고구마전도, 여리고성함락, 전도 왕 이런 것 있잖아요. 복면가왕처럼. 전도왕이라는 이것, 내가 있음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나 있음으로 회수가 되기 때문에 내 영광이 되어버려요.
전도를 해도, 뭘 해도 내 영광이 되고 우리교회의 영광이 되어버리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라 하는 것은 내가 죽은 상태에서 죽은 내가 사용되다 보니까 나오는 우리인데 그 우리의 원본은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완성된 이름이라는 말이지요. 그 완성된 이름에 결부되는 분은 한분밖에 없어요.
그 분이 누구냐? 이스라엘 이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그리스도 영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보셔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한 분에서 많은 다수의 백성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왕부터 등장하는데 왕국이 없는 왕으로서 오셔서 이제는 그 왕으로부터 새로운 왕국이 벌어지는데 그게 예수님 오실 때 홀로 오셨거든요, 홀로 오셔서 홀로 죽고 난 뒤에 혼자의 혼자만을 변치 않고 그것을 완성으로 봐가지고 이 지상에 있는 자기백성들의 미완성과 대조를 시키고 비교를 시키는 겁니다.
모자란 너냐, 완성된 나냐, 어느 것을 믿을래, 라고 우리한테 성령으로 묻는 겁니다. “네 기도를 믿을래, 내 기도를 믿을래?”를 묻는 거예요. “너의 헌금을 믿을래,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했던 그 희생제물, 피를 믿을래?” 어느 쪽이냐를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미완성과 미완료를 스스로 인정하게 되지요. 그 인정 자체가 완료됨을 더욱 더 증명하기 때문에, 그 완료에서 나온 미완료기 때문에 미완료가 모여서 완성을 증거 하게 되는 거지요. 이게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고 난 뒤에 바뀌게 하시면서 주께서 계속해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축복의 기능입니다. 이게 축복이에요.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지요.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면서 그것은 무엇을 대체하느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다수, 그런 자들은 언약 바깥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행함 자체가 죄가 되고 죄의 결과 그들은 죽음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 입장에서는 지금 이런 이야기가, 자기 행함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구원이 된다는 이 이야기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완성된 이름이 없는 사람과 자기 이름을 계속 고수하면서 내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사람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미 죽을게 없기 때문에 그들 눈에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죽을 게 없기 때문에 성도는 이미 산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살았다는 용어 하나 가지고도 언약적 안목, 언약적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언약 바깥에서 보느냐가 성경개념이 완전히 다 달라요.
성경을 천 독 만 독해도 이 안목이 안 바뀌면, 주님의 언약의 상대자가 되지 못하면 성경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겠나이다, 천국이나 보너스로 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했을 때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그 원리는 곧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그냥 편하게 구원시킨다, 라고 하지만 그게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대한 심판 작용입니다. 새삼스럽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죄지어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 받기 위해서 언약밖에 있어야 되고, 죄를 지어줘야 된다는 관계적수동형으로 그들도 그런 식으로 다루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이라는 것은 심판이 없는 구원은 없어요. 심판과 구원이 같이 병행되게 되어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언약이 왔다는 것은 구원만을 위한 언약이 아니고 구원과 더불어 심판도 같이 병행해서 주님께서 야곱에게 주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이 비로소 밝혀집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축복한다는 이 말은 동일한 기능이 한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예수의 완성된 기능으로 그들에게 찾아가게 되면, “맞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구원될 수 없는 미완성된 존재가 우리의 행함은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하는 그 고백이 아주 기쁨으로 자유를 만끽하면서 스스럼없이 마음껏 나오는 겁니다.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으로 절대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소망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임을 발각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언약의 완성된 양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가 되어 오늘날도 그대로 완성된 형태로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구원을 해주셨사오니 이러한 놀라운 것을 설득용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으로 마음껏 세상 사람을 향하여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