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송민선
180강-신 33장 12절(베냐민지파 축복)201804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마다 할당된 축복이라고 그렇게 보여 지지요. 근데 이 할당된 축복이지만 그 지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약에 이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가 날라 갔다면 그 지파에게 주어진 복도 같이 날라 가 버려요.
그래서 말이 열두 지파지 사실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죠. 바로 레위 지파가 그런 식인데, 레위지파가 배후에서 열두지파를 전부다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근데 그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 제사 앞에서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범죄 한 사실이 드러나야 돼요.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범죄 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각 지파에게 맞도록 제시된 율법이 있을 거예요. 그 율법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읽었던 12절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방금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이 왜 이게 축복이냐 하는 것을 레위지파를 경유해서 그들은 알아야 돼요. 왜냐면 그들이 오해하기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주님이 친히 보호하시잖아”라고 이렇게 생각할 주 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무엇이 날라 가 버리느냐 하면 열두 지파라는 그 생각, 소속감이 없어져 버리고 단독적으로 ‘우리가 하나의 지파만 있어도 우리는 복 받는다’라는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레위지파도 날라 가 버리는 거죠.
“거봐, 우리 복 받았잖아. 하나님의 예언이 그걸 이야기 해주잖아” 하나님의 예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고, 그 다음에 “그를 날이 마치도록”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토록 계속해서 보호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자기 어깨 사이로 처하게 하신다” 어깨 사이로 처하게 하신다는 것은 꼭 껴안아 준다는 거예요. 껴안아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친히 보호하시는 모습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베냐민 지파에게 이렇게 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것을 여러분에게 특별히 주어졌다고 한다면 여러분 얼마나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나 이 복 받아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내 지파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한 절대로 와해되는 법은 없다’라고 그렇게 장담을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지파가 사사기 20장에 와해됩니다. 사사기 20장에 와해되고 사사기 20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하나가 다 날라 가 버려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어떤 불량배들이 있었는데 그 불량배들이 남의 여자를 건드려도 너무 심하게 건드렸어요. 밤새도록 겁탈해 가지고 새벽에 보니까 죽어 있어요.
그래서 그 남편 되는 베들레헴 레위 사람이 화가 나가지고 ‘하나님이, 주님이 계신 나라에서 이런 범죄가 용납되는 거 자체가 이거는 옳지 않다. 절대로 용납하지 마라’해서 열 두 토막을 내요. 사람 시체를 열 두 토막을 내서 그것을 택배로 다 보내버립니다. 모든 지파에게.
택배로 보낸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자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걸 누가 이야기 했냐 하면 레위지파인 그 사람이 했어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하는 역할이 뭐냐 하면 바로 열두 지파에 있는 지방에 가장들을 수시로 모아서 레위지파가 스승이 되어가지고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입니다.
그런 가르치는 역할이니까 이런 사태가 선생님이니까 선생님 집안에 이러한 범죄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걸 기회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새롭게 돌아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보낸 거죠.
그래서 그걸 보고 분개해가지고 사사기 20장에 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20장 1절에 딱 나오잖아요. 이걸 이스라엘 안 가보면 무슨 뜻인지 모르거든요. 가봤단 말이죠. 저는. 그 홀몬산부터 어디까지냐 저 밑에 브엘세바, 아브라함의 여정을 알게 해주는 그 동네까지 전체 이스라엘이 격분해서 모든 사람은 미스바에 모여서 베냐민 지파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다.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겁니다. “너희 땅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 알아서 처리해 달라”라고 하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베냐민 지파가 자기 내부에 청년들이 그런 나쁜 짓을 했을 때 알아서 처리를 해버리면 되는데 그들은 결속을 굳게 하고 단결을 해서 싸우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범죄를 비호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지파 건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놓고 사사기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이 그 당시 왕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왕이 없으니까. 왕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입장만, 자기 정당성만 주장한다는 말은 각자 각자가 스스로에게 왕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왕 역할을 해야 할 그 지파가 제대로 왕 역할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 왕 역할 해야 될 지파가 뭐냐, 레위 지파거든요.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레위 지파가 이거는 자기 역할 못하고 떠돌아다녀요. 밥벌이 하려고. 밥벌이 하려고 떠돌아다니는 그런 지경에 있습니다. 참 이런 게 어려운 데요.
만약에 우리가 어떤 가정에, 또는 어떤 회사에 신학교 출신이 거기에 입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장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신학교 출신의 사원에게 자기 하는 일 말고 추가해서 일을 맡길 가능성이 많아요. 뭐냐 하면 “너는 신학교 나왔고 우리보다 말씀을 잘 알고, 네가 사정상 우리 회사에 입사했으니까 우리를 위하여 아침에 예배를 드려주거나 아니면 특별히 기도를 해주면 좋겠다. 거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수당은 더 줄게.”라고 할 가능성이 많지요.
그러면 그 회사에 입사한 신학생이 기도 할 때 ‘이 회사 망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각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왕 노릇하기 때문에 내 회사 잘 되기 위해서 기도 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 있지요, 학교에는 교목 있지요, 병원에는 원목 있지요, 군대 가면 군목 있지요. 전부다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회가 아주 엉망이라는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는 것은 잘 하는 짓인가.
그건 잘한 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베냐민 지파에게 그런 사례가 있다는 것은 다른 지파도 똑같이 다 범죄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건 하나 일으켜 놓고 그 사건에 대해서 잘잘못을 따지겠다고 나서는 다른 지파가, 그러니까 열한 지파의 연합군이 베냐민 지파, 작은 지파에게 두 번씩이나 큰 패배를 당하게 합니다.
“네가 베냐민 지파를 칠 자격이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른 열 한지파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그제야 하나님의 왕 됨을 인정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이 전쟁을 계속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님, 교회를 계속 할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회사 같으면 “이 회사를 할까요? 그만 둘까요?” 와 똑같은 겁니다. “이 몽고 간장 130년 전통인데 계속 할까요? 그만 할까요?”와 똑같은 거예요. “유한양행 그만 둘까요?”와 똑같아요.
물어 볼 때 그렇게 물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왕 아님을 인정하는 샘이 된다니까요. 우리 교회 문 닫을지 말지를 매주 모여서 생각해야 돼요. 매주 모여서. 계속 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일인지, 내가 지금 교회 나오는 게, 우리 교회 잘 되기 위해서 나오는 지를 늘 상, 매일같이 봐야 해요.
‘그러면 교회 문 닫고, 회사 문 닫고 좋다. 그 다음에는 뭐 할꼬?’하면 그 다음에는 여러분 가정 문 닫아야 해요. “이혼 할까요? 말까요?, 이 자식들 하고 헤어질까요? 말까요?” 매사에 있어서 여호와의 왕 되심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이 축복은 받았다고 해서 받은 당사자가 이 축복을 형성해 가고 이루어 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축복이 베냐민만의 축복이 아니고 베냐민이고 뭐고 서로 결속되어 있어서 베냐민 지파 하나가 만약에 날라 가 버린다면 베냐민 지파의 이 축복마저 날라 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제라는 것은 이걸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하는데, 레위 인의 피를 나눈 형제인데,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이 뭐를 이야기 하냐면 “너 없으면 나 없고, 나 없으면 너도 없다”라는 전부다 하나의 왕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진 축복이지 나만 따로 잘 되기 위한 축복은 없어요. 주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뭐냐,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부다 하나의 이웃이 되는 겁니다. 전부다 하나의 이웃이 되요. 여기에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다음에 나온 말이 “그분의 곁에 안전히 거한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베냐민 지파에게 특징적으로 이것이 주어진 이유가 베냐민 지파는 독자적으로 살지를 못합니다. 유다 지파 곁에서 사는데 그 유다 지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성전이 나와요. 하나님의 성전.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하나님의 계신 곳에서 나오는 유다 지파, 또는 유다 언약 다윗 언약에 의해서 베냐민 지파는 아주 작은 지파인데, 작살나고 난 뒤에 세워 졌으니까 얼마 안 되는데, 유다 지파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중에 둘로 나눠지는데, 남쪽 이스라엘과 북쪽 이스라엘로 나눠지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이고 남쪽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하나 더 보탠다면 시므온 지파에요. 여기서 신명기 33장에 보면 여기 유다지파, 레위지파,..등등 여러 지파가 성경에 쭉 나오죠. 그런데 하나의 지파가 여기에 없어요. 시므온 지파가 없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뭐냐, 이렇게 유다 지파 속에 폭 싸여 있습니다. 나주에 보면 시므온 지파,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가 전부다 하나로 폭 싸여 있는 거예요. 그런 형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를 통해서 너희들은 누구의 혜택을 입고 복을 받는 가를 드러내죠.
그런데 이 축복을 오늘날 구약 말고 신약에 와서 이 “주님 곁에서 안전히 거하고” 하는 이것은 어떻게 주어지는 가?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베냐민 지파가 따로 우리교회에게 전해주는 게 아니고 이게 어디로 가냐 하면 모세의 축복이 이스라엘을 통합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축복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축복의 성과가 그 이스라엘의 왕, 여수룬의 왕께서 그걸 다 이루십니다.
이루시고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이 담긴 내용을 그대로 신약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제공이 됩니다. 이 축복이. 그러면 신약 성도는 뭐가 되냐 하면 열두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약 성도가 열두 지파에 속하게 된다면 “우리는 시므온 지파입니까? 베냐민 지파입니까? 유다 지파입니까? 어디에 속합니까?”라고 할 때에 신약의 성도 자체가 교회 자체가 열두 지파에 전부다 공히 포함되어 있어요.
이 말은 모세가 열두 지파에게 주는 모든 축복은 바로 우리에게 공유하라고 준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는 왜 이 축복을 주지 않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은 받는 당사자가 본인이 행사해서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고, 유지 하는 것이 아니고 이건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전에 있던 이스라엘은 이 축복에 의하면 그들은 율법적 기능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 겁니다. 망하게 되면 더 이상 그들은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티가 나 버렸어요. 들통이 났어요. 그렇게 들통 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무효가 되느냐?
무효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속에 이스라엘의 모든 축복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어요. 담겨 있다가 신약에 와서 자기 백성에게 그걸 다 토해 놓고 그들에게 다 적용을 시킵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신약 속에 성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전달되는 절차를 보여 주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신약에 성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 보다 실제로 이야기 하는 게 더 쉬운 데요.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의 기적과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기적에 차이점이 있어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귀신을 쫓아내고 하면서 이렇게 기적을 보여줘요.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적에 특징이 뭐냐 하면 멀쩡한 사람을 병들게 해서 고칩니다. 멀쩡한 사람을.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요한이 쓰면서 더 포괄적으로 쓰시는 거예요. 어떻게 포괄적으로 썼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복 주시는, 옛날에 율법을 통해서 갖고 있던 그 복을 우리에게 한꺼번에 복을 쏟아내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병 들린 사람만 혜택 받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이 주시는 혜택을 입어야 된다는 겁니다. 입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멀쩡한 사람도 뭐가 되어야 하냐면 병든 자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특징은 병든 자나 멀쩡한 자나 전부다 병든 사람이에요. 사람이 병 들었으면 병명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병명이 나와야 되는데 병명을 몰라요. 요한복음은 병명을 일괄적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모든 것은 어둡다. 끝. 어두운 것이 병명입니다.
개개인을 보지 않아요. 개개인에 따라서 무슨 병세 무슨 병세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병명이 어둡다는 거예요. 소경된 자도 날 때부터 자기 죄 때문에 소경된 게 아니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도 멀쩡했다가 죽었어요. 전부다 멀쩡한 자와 병든 자가 차이가 없어요. 모두 다 어두움 속에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와요. 사마리아 여인인데, 이거는 사마리아 여인을 누가 봐도 멀쩡합니다. 누가 봐도 멀쩡해요. 왜냐 하면 몸이 건강하니까. 머리도 안 아프고 건강하거든요. 건강하니까 룰루랄라 노래 부르면서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왔어요. 이 장소가 뭐냐 하면 바로 세겜입니다. 이거 찍어 왔거든요. 야곱의 우물을.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목숨 걸고.
세겜이 원래 어떤 곳이냐 하면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모세의 무덤이 있고요. 그 요셉의 무덤지역 거기가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아무튼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올 정도로 누가 봐도 멀쩡해요. 동네 아줌마라니까요. 아주 정상적이에요.
정상적인데 주님께서 뭐라고 보느냐 하면 완전히 인간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비정상으로 만들 때, 그때 여인이 14절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듯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인으로서는 금시초문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속에서 생수의 물이 나오지 아니하면 너는 정상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당신을 정상으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속에서 영생하는 샘물 안 나오면 그거 사람 아닙니다.
그거 살아도 소용없어요. 정상인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정상인이다. 하나님이여, 율법 주시옵소서. 우리가 정상인 입장에서 지키겠나이다.’이렇게 해서는 우리가 정상인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말씀만 주시면 지키겠나이다’ 해서는 정상인 안 돼요. 먼저 후벼 내는 게 있어야 돼요. 후벼 내는 거. 먼저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의 해석으로, 우리 해석 말고, 주님의 해석입니다. 제가 물어 볼 테니까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고 나서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에게 형량을 몇 년 때리겠습니까? 살아온 인생에 대해. 우리 착하신 권사님은 “그냥 집행 유예로 해주세요. 빼내주세요.” 이럴 거고, “한 3년만 살면 얼추 내 행동한 거 그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3년 사는 것은 군대 생활 3년 한 걸로 퉁 쳤다고 칩시다.” 이래 나올 수도 있는 거고.
조폭하면서 사람들 때려죽이고 아주 못된 짓 했다면 “20년 적당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평소에 자기를 측정하고 있고 판결내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말은 안 해도. ‘내가 내 운전하는 그 성질 봐서는 이번 달 한번 긁히는 것은 인정해 준다.’ 하는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판결을 내리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 판결을 주님께서는 그 판결의 수위를 높여 버리는 겁니다. 속에서 영생하는 물이 안 나오면 네가 너한테 내리는 판결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무효가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 합니다. 너의 남편을 데려오라고. 갑자기 남편 데려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없다고 했거든요. 입 싹 닦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지금 기준이 뭐냐 하면 네 속에서 생수가 나와야 네가 천국 가는 정상인이라는 기준 정해놓고 남편 데려오라고 하니까 그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내 앞에 있는 타인에게 이야기 할 때에는 나는 그런 식으로 판결을 내리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버텨 왔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 하지만 너는 남편이 다섯 있었잖아. 지금 그는 너의 남편이 아니니 너의 말이 옳다”라고 이야기 해 버립니다. 따라서 더 이상 감출 것은 전무 한 거예요. 이 말은 네가 스스로 판결내리는 식으로 예수님만이 간직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완성, 편안히 영원토록 주님에게 보호받고 사랑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천국에 산다는 베냐민적인 축복을 나 같은 인간 따위가, 나 자신을 좋게 보는 사고방식 가지고는 그 복이, 축복이 내 것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 건 축복을 주는 방법은 오직 세례입니다. 세례는 일방적이죠. 성령 세례입니다. 지금 이 여인이 주님에게 받는 것은 뭐냐 하면 물 뜨러 왔다가 받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 세례 받으면서 그 와중에 뭐가 예수님 앞에 다 들통 나느냐 하면 평소에 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옹호하듯이 나를 변호하듯이 억지로 버티는 식으로 ‘그래도 저 사라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잖아요. 아직도 나에게 양심이 있어 가지고 예수님 성품답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런 면면은 있잖아요.’하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늘 평가하고 좋게 보는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리심 산에서 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라는 식으로 또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되도 않는 방식을 또 내봐 버렸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멀쩡한 사람을 들쑤셔놔요. 멀쩡한 사람을. 병 들지도 않았고, 귀신들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요. 일상이 굉장히 평범해요. 튀지도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당연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그 속에 계속해서 영원토록 나오는 성령의 생수는 없어요. 그게 문제예요.
아까 예배시간 전에 우리 장로님과 집사님이 이야기 하는 것이 다 들리는데 영천에 또 누가 나온답니다. 경찰대학 나온, 그리고 정치가 또 누구 나오고, 또 드라마 보면 사람들 나오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볼 때에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안목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저 드라마에 나오는 저 배역을 받은 사람은 과연 속에서 성령이 나올까?’ 성령이 안 나오죠? 그저 극히 평범하고 보통 사람 나옵니다. 보통 사람 대 잘 사는 여자, 보통 사람 대 잘 사는 재벌, 구두집 하는 아저씨와 옛날에 좋아했던 여자인데 돈이 많고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는 어떤 여자. ‘같이 삽시다’라는 드라마에 보면 나오잖아요.
세상에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흔히 우리가 보던 인간들이에요. 옆집에서 만나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 나누는 모든 사람들인데 그걸 만약에 성령을 받고 보게 되면 ‘저 사람이 혹시 성령의 움직이는 우물인가’하면서 이렇게 보자 이 말이죠. 성령이 나온 사람인가? 안 나와요.
그렇다면 거기 안 나오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뭐 통분하고 있습니까? 저는 경찰대학 나온 사람보다 성령 받은 사람이 영천에 다음 선거 나오길 바랍니다. 아마 나오자마자, 나오지도 않겠지만, 지옥에서 대장질해서 뭐 할 겁니까? 소유권이 없잖아요. 세상에서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나요.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 더 나은 사람, 우리보다 더 뛰어난 사람, 나한테 잘 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성령의 샘솟듯이 나오는 사람을 우리가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그 사람은요 하나님이 친히 꼭 안아주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베냐민 축복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것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평가는 간단해요. 지옥형. 5년, 10년 형이 아닙니다.
‘나는 천국 못가면 인간 아니야’라는 평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평이 나온다는 말은 이제는 내 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주신 그 축복된 의, 받았던 그 주님의 의 때문에 주님 증거하며 산다는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축복의 적용입니다.
모세의 축복의 적용이 신약에 와서 요한복음 4장에서 튀어 나오는 거예요. “신 봤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축복에 성취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나는 예수님 알았다는 주님이 누구신지에 관심 있는 그런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성령으로 보지 아니하면 그렇고 그런 똑같은 세상 옛날 알고 지내는 세상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되는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고생했으며,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분통을 터트리셨으며, 주님께서 어떤 비정한 각오로 말씀을 하셨는지 저희들 납득되게 하시고 이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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