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3:1-5 / 재회

정인순 2018. 3. 28. 22:46

 

음성            동영상

 

 재회

2018년 3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33:1-5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33: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3: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33: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가 회피해서는 아니됩니다.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는 단회적이고 일시적인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모아서 자기 자아상을 구성하게 되면 그 성격도 오로지 ‘내 것 지키기’로 일관됩니다. 오늘날 모든 이들이 이런 자세로 살아가다 보니 그런 삶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야곱을 만나려고 찾아오신 겁니다. 그 만남으로 인하여 야곱은 달라집니다. 변화가 있는 만남을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 변화일까요?

그것은 일반 사람과의 만남에서 경쟁했던 관계로 인하여 형성된 자아상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즉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이기는 것이 곧 진정한 자기 자신을 계속 지켜내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 오해였다는 겁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지켜야하는지 그 실체도 모르면서 인간들은 무조건적으로,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타인의 것보다 자기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 보다 자기다움에 접근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신의 뿌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직접 만남에서 판가름납니다. 야곱은 그동안 자기라고 여겼던 바로 그것이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기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야곱은 ‘자기를 위한 일’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에 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이름에 관여하므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구원을 위해서 알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존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야곱’이름을 지닌 용도가 다 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없어져야 될 이름입니다. 야곱을 위한 야곱의 이름은 더는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이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해 온 것은 무엇일까요? 야곱, 곧 속이는 자 또 빼앗는자의 이름에 걸맞게 그는 살아온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복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야곱이 야곱답게 사는 것이 곧 축복을 유지하는 대책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복은 야곱의 이름이 삭제되는 것이었고 그 빈 자리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의 교체는 곧 인생의 주체 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야곱이 구원된다면 이는 곧 ‘없는 이름’, ‘없는 존재’의 구원이 아니라 그 야곱의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으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 안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통해 찾아오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에 있는 자신의 근원이요 자신의 뿌리입니다. 야곱은 혼자로서 야곱의 본질을 알 길이 없습니다. 곁에 누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근원은 창세기 25:24-26에 나옵니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비록 쌍둥이는 태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에서 둘이 나온 겁니다. 야곱은 자신의 근원성, 곧 하나님의 일이 형 에서와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지상에서 드러나고 계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둘이 되기 이전, 하나일 때가 바로 하늘과 땅의 접점지점입니다. 그동안 에서를 떼놓고 자기 존재만을 갖고 자신의 근원을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자만의 사고방식’에 와해시키고자 하나님께서 밤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곧 혼자만이 갖게 되는 힘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확연히 다르게 됩니다. 힘에 힘을 더하여 주위의 인물들을 처내는 식의 인생으로서는 자기에게 패배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야곱은 자기 외에 또 누구를 만나야했습니다. 그리고 힘으로 대결하는 구조가 아니라 도리어 희생정신으로 다가감을 압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 야곱에게 그런 식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3:10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밤에 자신을 찾아오신 그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이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 이름, 곧 자기 존재 자체를 박탈당한 야곱은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살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로서의 인생입니다. 이는 곧 더 이상 자신이 지킬 ‘자기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달라진 순간, 모든 복의 근원은 확정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전에 ‘야곱’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견지하는 생을 마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사태 종결을 뜻합니다. 앞으로 그 어떤 변화가 자기 생에 주어진다 할지라도 이미 확정된 복의 근원은 변동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의 몸을 통해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이런 겁니다. 인간이 더 이상 손댈 필요 없을 정도로 확정적이고 결정 난 사항입니다. 새삼스럽게 묻거나 답할 이유가 없는 사이가 사랑의 관계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리움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순서대로 자신과 아내를 배치해서 에서를 만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상에서 그런 식으로 본질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라는 아내와 요셉이라는 자신은 야곱언약에 준해서 ‘희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을 보고싶어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31강-창 33장 1-5절(재회)1803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3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50페이지입니다.

창 33:1-5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창세기 33장에서 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금 야곱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한다는 것, 사람이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고서는 죽어서 천국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천국 가기 전에 미리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복의 근원이었지만 야곱은 자식이 많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복의 증거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에서 자식이 많아지고 재산이 많아지고 그리고 라이벌 되는 형에게 이겼다는 그것을 복이라고 여겼던 그 자신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와장창 깨어지는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것.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복이라는 그것이 도리어 복을 가로막고 복이 아닌 것을 복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정면으로 하나님과 한바탕 다퉈야 되었던 경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게 됩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잘못되었고 자기 쪽에서 뭔가 잘못 생각했는데 그렇게 잘못 생각한 그것을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일부러 찾아오셔서 그 잘못된 것을 정상으로 돌려놓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 야곱은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달라진 경험은 없습니다. 에서는 끝까지 세상 사람이고 죽을 때도 세상 사람으로 마감됩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세상 사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고 그렇게 살아갔는데 에서는 세상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세상 사람으로 그냥 가버려요.

제가 자주 이야기했습니다만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에 있다고 해서 자동차처럼 땅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비행기의 용도가 아니거든요.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용도가 아니라 창공을 향하여 올라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땅을 떠나야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냥 떠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 그냥 떠나게 하지 않습니다.

딴 사람 되게 해서 떠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달라졌다, 변화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달라진다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런 것을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야곱은 가짜 이름을 갖고 살았던 겁니다. 인간은 이름이 필요 없는데 야곱은 이름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야곱이라는 이름은 ‘남을 속이고 빼앗는다.’는 이름이거든요. 자기가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저질러놓은 범죄, 오류,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빼앗아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왔던 것이 야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동시에 소위 자기 이름이라는 것이 없는 이름 없는 존재가 돼요. 내 이름이 없다는 말은 내가 따로 지킬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킬 것이 없다는 말은 이제는 경쟁이나 싸움이 마감되었다,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자, 인간이 천국가려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는가? 이 땅에서 경쟁대상이 없어져야 돼요. 이제는 누구하고 싸운다든지 누구와 다툴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다툰다는 것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다투거든요. 내 것 다치지 않고, 내 것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법인데 처음부터 내 것이 없으면, 내 이름이 없다면,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뜻이에요. 유령이나 귀신같은 존재입니다.

내 것이 상실되었어요. 빼앗겨 버렸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생명은 이 땅에 없고, 네가 가질 생명은 이 땅에 없고, 생명 안에 네가 놓여 있게 된다는 거지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간직되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너를 가질 때만 너는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내 것이라는 것을 가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모든 투쟁과 싸움과 경쟁은 내 것 때문에 생기는 거지요. 이 경쟁과 싸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그리고 염려라는 것도 생기고, 걱정도 생기고, 염려와 걱정만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공포와 두려움도 같이 따라옵니다.

‘어찌 할꼬, 어떻게 하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면 되지……?’ 이것은 자기 것이 있다는 거지요. 그 자기것 때문에 야곱은 살다보면 자기 것만 돋보이고 자기 것에만 자기 생각이 가득 차 있게 돼요. 나만 생각하고 나만 부풀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야곱은 알았어요. 내 곁에 누가 있어야 나를 안다는 겁니다. 내 곁에 누가 있어야. 나만 있어서는 나를 아는 것이 아니고 내 곁에 누가 있어야 되지요. 세상에, 야곱 같은 인간 그 곁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덮침에 비로소 자신이 진짜배기 나가 누군가를 처음으로 자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안다는 것은 내가 훌쳐내고, 쫓아내고, 내가 밀쳐내는 그러한 상대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곁에 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와 그 사람의 관계가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야곱은 생각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옵니다. 리브가는 아기를 못 낳습니다.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것은, 야곱도 없었고 에서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없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로 아기를 낳게 되었어요. 따라서 야곱도 없고 에서도 없던 그 시점에도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계획은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 이 지상에 구체화되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는 분명히 두 사람인데 태는 하나가 되지요. 이걸 쌍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서 쌍둥이가 태어나게 했는가? 그 대목 설명할 때 창세기 25장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되어 있어요.

나누인다는 이야기는 원래 하나였는데 하나에서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각각 갈라진 그들의 본래의 자리는 뭐냐? 하나에게 되돌아가야 비로소 알 수가 있어요.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것을 기뻐한 이유는, 자기가 진정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야곱이라는 이름, ‘속이는 자, 빼앗는 자’ 그 이름은 자기를 위한 이름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이 계획했던 그 계획에 담긴 내용을 위하여 자기에는 야곱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에서나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사랑받아야 되고 에서는 미움 받아야 된다는 그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계획,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그게 약속이거든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지상에 구체화되면서 자기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형 에서는 ‘붉다’는 뜻의 에서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렇게 부여받고 난 뒤에 그들은 한 태에서 나왔는데 한 태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태어났지요. 동시에 태어나면서 그들의 관계는 서로 싸우는 관계로 태어났어요. 사이좋게 얼싸 안는 관계가 아니고 싸우는 관계로 태어났습니다. 싸운다는 것은 이 지상의 인간세계의 형편을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지상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에 대항하고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이미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우는 채로 출산해야 될 두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과 에서는 한 가정의 쌍둥이가 아니고 전 인류를 대표하는 쌍둥이가 되는 겁니다. ‘야곱 쪽이냐, 아니면 에서 쪽이냐? 에서 쪽이냐, 아니면 야곱 쪽이냐?’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은 그 둘 사이에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이 지상의 싸움으로 끝나버리면 이 땅에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지상의 싸움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늘과 연계되어 있고 하늘과 관계되어진 싸움이 되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한 자는 자기의 본래의 자리를 유일하게 아는 자라야 그게 가능합니다.

자, 본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태가 하나였다는 거예요. 한군데서 나왔다는 겁니다. 한 군데서 두 명의, 그러니까 쌍둥이가 나온 거지요. 나올 때는 한 군데서 둘이 나왔는데 둘이 다시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이것은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없습니다.

이미 세상의 사람이 된다면 그냥 영원토록 세상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야곱이든 에서든 원래 자기의 근원과 끊어지고 단절된 존재가 됩니다. 야곱이란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아버리면 야곱은 그 이름의 주인공이 자기로서 중지가 돼요. 스톱, 멈추게 된다고요.

나는 속이더라도 이겼다. 그걸로 스톱이 되어버린다니까요. 그 점에서는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으로부터 나왔던 모든 일이 나라는 인간 쪽에서 스톱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왜 생겼으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야 되는지 그 비밀은 영원히 단절된 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줘놓고 그 야곱 이름을 취소시킵니다. 무효화시킵니다. 그러면 야곱이라는 이름은 없어지지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없어지면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라는 이름을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날 때 허락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분의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인간전체와 싸우는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야곱이 자기 이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야곱 쪽에서는 그 싸움이 끝났다, 종결되었다, 완결되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가 지킬 이름이 필요치 않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충실하게 야곱이 그 이름에 부합되도록, 합당하도록 그렇게 속이고, 또 속이고, 형에게 지지 않고 이기고, 삼촌도 속이고, 그런 기능을 충실하게 다 해놓고 속여서 얻은 그 모든 것을 축복으로 간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야곱의 이름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으로 하여금 현재 속이고 이겼던 이것이 종결된 상태가 아니라 내 이름이 삭제되는 이것이 종결된 상태에요.

내가 이름 없이 주님 앞에 죽는 자임을……, 죽는다는 말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는 거거든요. 내가 없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이름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는 그것은 이제는 나의 주어진 모든 주님의 기능이 완료되었다, 마감되었고 마무리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자기가 지킬 것이 없어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형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4백 명이 마중 나오지요. 3절에 보면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에서의 앞에 나아가는데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몸을 일곱 번 굽힌다는 것은 그 땅의 지배자에게 ‘전적으로 나는 당신에게 졌습니다. 예속되었으니 지배당해도 쌉니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왜 야곱이 그렇게 에서에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이미 모든 축복과 저주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결정 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자가 축복이고 하나님을 만나서 변하지 못한 자는 영원한 저주가 되지요. 그걸 야곱이 알게 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더 이상 자기가 지킬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 자기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일을 자기가 자기 이름으로 대항했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동안 내 이름으로 살았던 모든 화려한 활약상, 이제는 그 기능이 마감되면서 그 모든 승리는 주님이 회수해갔거든요.

야곱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잖아요. 속여서라도 이겨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생산된 것이 ‘이김’이에요. 마지막 하나님까지 이겨버렸어요. 남은 것은 이김이고 그 이김을 주님께서 회수해버린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지상에서 속이는 자로서 남긴 그 결과가 뭐냐? 결국 이겼다는 것,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는 그 이김, 그 이긴 자의 이름을 삭제시켜 버리고 그 이긴 자의 이름을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교체를 시켜버린 겁니다.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이게 ‘대신구원하심’입니다. 신약에서 대신한다, 대체한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해야 될 구원을 우리의 구원으로 허락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으로 우리가 추구했던 구원을 대신해줘 버린 거예요. 따라서 우리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답사 동영상에도 있는데요. 네모난 석재를 어떻게 옮겨서 성전을 짓느냐? 네모난 석재는 굴러가지 않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나무로 수레를 만들고 그 안에 네모나게 석재의 크기만큼 해놓고 네모난 자리에 네모로 각진 석재를 거기에 끼워버립니다.

끼우면 돌아가기는 바깥에 있는 동그란 나무 수레가 돌아가게 되면 덩달아 네모난 석재가 굴러가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지요. 이게 바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겁니다. 구원받으려고,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백날 애써도 구원이 안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자기 안에다가 집어넣어요. 예수님의 구원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예수님이 의인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의인되고, 예수님이 저주와 심판에서 해당이 되지 않으면 우리도 어떠한 죄를 지어도 저주와 심판이 우리한테 해당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야곱언약의 성취인 새언약의 효과, 신약의 효과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사람이 변화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우거든요. 십자가라는 것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다 이루었다.’를 앞장세우면 그 다음부터는 어째서 다 이루어졌는가, 어째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나의 다 이루심으로 되는가, 그걸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은 야곱의 이름으로서 이미 자기의 임무는 끝났어요. 속이는 임무는 끝났고 그 속임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가 승리, 이김이었고 그 이름을 주님이 가져가는 겁니다. 가져가는 대신 야곱은 죽지요. 야곱이 죽는다는 말은 야곱의 이름은 이제는 없는 겁니다. 임시적 이름이었어요. 한시적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한 내가 지킬 내 목숨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너는 죽었고”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말을 해야 하늘에 있는 생명이 부각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거든요. 영원한 생명을 다른 말로 하면, 이미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 마감되었다, 결정지어졌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에서 어떤 짓을 해도 변경되는 일이 없다. 이미 결정나버린, 하나님을 만나서 주어졌던, 성령을 통해서 얻어진 그 모든 것은 그 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이 사실은 변경되지 않고 변개되지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 이걸 전하라고 한 거예요. 행함에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가 되는 거예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함에서 믿음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행했던 것은 보다 근원적인 것, 본래적인 것, 원래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원래적인 것이 뭐냐? 태가 하나의 태, 하나의 태에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태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의 태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속성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저주요,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보여주는 인생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미움을 보여줄 인생이냐, 그것으로 양과 염소로 나누어지고, 좋은 고기 나쁜 고기로 갈라지고, 알곡과 가라지로 다 갈라지는 거예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을 봤잖아요.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야곱은 누가 뭐래도 우리처럼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가장 속일 수 없는, 정말 다급하고 진지한 일은 내가 살아야 된다는 사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안 되고, 살아서 이겨야 된다는 사실, 이것만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 그 자체라고 야곱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야곱의 진리는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존재해야 된다는 것, 내가 이 땅에 여전히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을 진정한 진리로, 부정할 수 없는, 누가 봐도 이것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확실한, 의심할 수 없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야곱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그게 바로 내가 아직도 근원을 알지 못하고 그 태어나고 난 뒤부터 출발한 오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처음부터 있었던 그 하나, 한 태를 잊어버리고 지금 나 여기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나의 적이 되고 원수가 되고 라이벌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야곱은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것은 바로 에서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가 있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지점에서의 본래적인 것은 뭐냐? 누굴 만나야 돼요. 바로 내 형, 형님, 우리 둘이 갈라지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를 만나는 그것이 내가 원래 출발했던 그 지점, 하늘과 땅의 접점 지점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절에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형님, 숫자로 우리 둘, 숫자로 2라고 하기 전에 1이었던 그 시절에 누가 우리로 하여금 한 태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만났던 하나님, 하나님품속에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 품속에서, 그 하나의 하나님에서 우리는 서로 쌍둥이로, 둘로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형님이나 나나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서는 둘이라는 관계가 하나가 되어서 그 하나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취지를 아는 것, 그것이 우리 본래의 자리였습니다, 라고 야곱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은혜’라고 말을 했는데 야곱은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의 일을 했던 사람이에요. 물론 그 과정에서 야곱은 땅의 사람이라서 자기밖에 모르는, 내 곁에 누가 필요 없고 오직 자기만 있으면 되는데 나만 있다고 해서 내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부러 찾아옴으로서, 너 혼자서는 너의 뿌리를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옆에 누가 있어야 돼요. 누가 있다는 그 관계,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보여준 사랑은 그거예요. 사랑은 종결된 관계, 완결된 관계에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태,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질문도 필요 없고, 답변도 필요 없고, 그 모든 말도 필요치 않은 그 관계가 사랑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지요. 말할 필요도 없어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누굴 그리워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는 이런 말을 통해서 야곱은 계속해서 그 때 헤어졌던, 낮이기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그 하나님을 그리워한다는 말이지요.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어느 영화 같은 일들이,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그리워하게 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생명이다, 죽음이다, 하는 것을 야곱은 뭘 로 설명하느냐 하면, 만나면 생명이고 헤어지면 그리움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소원이 뭐였는가? 사도바울은 사랑을 알았고, 은혜를 알았고, 사랑과 은혜를 아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 그리워하는 겁니다. 누구를? 거울 보는 것처럼 지금은 희미하나 그 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볼 때가 온다는 거지요.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잖아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안 믿는 사람조차 알고 있는 것이 있어요. 거울을 제거해버린 상태에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사도바울이 성령을 은사로 받았어요. 성령은 은사거든요. 성령을 은사로 받았을 때 특징이 뭐냐?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내 자리로 가기 위한 대기상태로 보는 겁니다. 후딱 떠나서 어서 내가 있어야 될 자리에 가는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여기 있다.’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파생된, 주님 때문에 생겨버린, 주님의 짝이 되는 그런 신부로서 간다는 것을 알아요.

홀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방식으로 그곳에 가는 거예요. 지금 잘난 내가 거기 가서 또 잘난 체 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내 곁에 누군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니까.

여러분은 몹시 그리운 사람이 있어요? 이 그리움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합니다. 이 사랑이, 그리움이. 사랑하는 대상이 없으면 자살해요. 자살을 왜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 아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나의 전부도 아니고, 근원도 아니고, 원천도 아니라는 겁니다. 내 원천은 따로 있고 나는 그분을 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게 야곱언약을 통해서 풀리는 겁니다. 이 대목의 원뜻이. 야곱은 이름이 없어요. 날라 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이미 자기로서는 임시적 기능으로서의 기능은 완료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만났으니 자기는 이미 복이에요. 그 복이라는 것은 복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신 분이 복을 갖고 있고 그 주신 복 안에 자기가 잠기어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는 그동안 움직였고 그동안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사랑이었고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움직였는데 움직인 모든 것이 자기 보기에는 남에게 빼앗고 속이는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의 기능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뿌리를 만나고 난 뒤에, 그 뿌리를 알고 난 뒤에는 그것을 완료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형한테 일곱 번 절하는 겁니다. 그리고 형 앞에서 사랑의 핵이 되는 것을 순서로 보여줍니다. 자식이 열한명이 있지만 제일 예쁘고 제일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으로부터, 진즉 내가 사랑했던 그 여인과 그 자식이 있는 것, 2절에 보면 라헬과 요셉을 제일 뒤에 두지요.

서열을 마련하는 겁니다. 제일 앞에는 종들의 자식, 그 다음차례는 레아의 자식, 제일 마지막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라헬과 요셉을 둡니다. 라헬과 요셉은 아버지가 받았던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둘 다 희생을 하는 거예요. 결국 희생을 해요. 라헬 희생해서 베냐민 낳았지요. 요셉을 희생해서 다른 형제들을 살리지요.

희생하기 전에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희생의 세월을 가게 했습니다. 이게 바로 야곱언약의 진수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로 가는 길이지요. 야곱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야곱의 이름은 힘으로 버티는 이름이었어요.

힘과 힘의 마주침으로서 이겨야 그것이 축복이라고 여겼던 그 시절의 야곱, 이제는 그 야곱자리에 힘이 아니고 희생이 이 땅에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는 사실, 누구에게도 희생해야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모습이 이 땅에 펼쳐지는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야곱은 그것을 완료된 상태에서 일곱 번이 아니라 백번이라도 절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형에게 드리려고 할 때 형은 안 받습니다. 안 받으니까 억지로 줘버립니다. 그리고 형이 나와 같이 살자고 할 때 야곱은 말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다고. 우리의 가는 길이 다릅니다.

야곱은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돼요. 야곱에게 내려왔던 그 사다리타고 야곱은 하늘로 가야 됩니다. 그동안 야곱은 에스컬레이터를 자기가 짊어졌어요. 그 무거운 것을. 이제 마지막에는 이미 결정되었어요. 에스컬레이터는 올라타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지난 살아온 세월이, 내 힘으로 내 것을 지키겠다는 그 모습, 힘으로 버텼기에 주님의 희생과 마주치면서 하나님은 무엇과 싸운다는 사실이 야곱을 통해서 드디어 공개됩니다. 주님은 힘으로 유지되는 이 세상에 자기 힘 지키려는 그러한 조건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복음이지 부활이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 희생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너는 너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네가 지킬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 아무것도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살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안 지켜도 되는 인생, 그게 바로 야곱의 인생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희생이 가득 담긴 구원받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뿌리를 모르고 태어난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찾아오니까 저희들 뿌리가 우리 안에 장착되고 우리는 뿌리를 증거 해야 될 주의 종으로 창세전부터 삼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이미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