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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강, 225강) 인생이란, 본향 180313

정인순 2018. 3. 14. 08:14

224강       음성           동영상


 

225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미아

 224강-YouTube강의(인생이란)180313-이 근호 목사

 

224강, 제목은 ‘인생이란’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모든 자기 생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끝이 오기 전에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남아있는 대목을 무시한 거죠. 끝까지 가봐야 인생을 아는데, 인생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죠. 죽은 상태가 아니고.

 

그럼 죽고 난 뒤에 인생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드라마에서 중반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혹시 실수를 해서 마지막 회를 다 봤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드라마를 보는데 재미가 없어서 못 보죠. 시시해진다니까요. 그리고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게 나중에 반전이 있다고 미리 알려주면 그 사람도 그 드라마를 보는데 재미가 없잖아요.

 

성경에서 인생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분만이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우리는 누구를 존중해야 되겠습니까? 아직 인생이 남아있는 옆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겠어요? 인생을 다 끝내고, 인간의 인생에 대해서 평가할만한 그런 심판주의 의견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말씀을 따라야 되죠.



이 성경말씀에서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조성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은 이렇다, 라는 그 개념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 좋아라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하시는 거기에 맞추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해서 살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에 보게 되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나와 있죠. 그런데 장사를 해서 이익을 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서 아시는 우리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격려를 해주실까요? 아니면 후원을 해주실까요?

 

그 다음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격려도 하지 않고 후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그야말로 초치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님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 어떻게 도와주시렵니까? 제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라고 우리는 묻죠.

 

마치 점쟁이 집에 가서 부채도사한테 “내 일이 잘 되겠느냐? 못 되겠느냐?”라고 이렇게 궁금해서 묻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시점부터 그 나머지 모든 인생의 끝 날을 전부 다 뭐로 보느냐 하면 ‘내일’이라는 개념 안에 다 집어넣어요. 내일에.

 

내일은 모레도 내일이고 십년 후에도 내일이고 백년 후에도 내일이 되는 거예요. 내일을 모른다는 것은 전체를 모른다는 말이고, 인생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을 니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목표가 설정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기 위하여 장사를 해볼까? 어떻게 살아볼까? 라는 이야기가, 발언이 나온다는 말은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인생이라는 것은 안개와 같아서, 안개라고 하는 것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거예요. 소멸되는 거예요. 소멸되기 위해서 잠시 있는 겁니다. 잠시 있다고 해서 있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잠시 있더라도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뭐 어떻게 시원하지 않습니까? 기분 좋죠? 갑자기 삶의 무게가 확 달아나죠?

 

둘이 싸운다는 말은, 부부가 싸운다는 말은 없어질 안개끼리 싸운다는 말이에요. 부부가 이혼했다는 말은 안개가 안개끼리 이혼한 거예요. 이게 인생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주님! 인생이 무엇입니까? 알려주세요.”가 아니라, “너희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뭔가 있고 그걸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데 없어질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13절에서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리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해서 모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근데 그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이야기다 이 말이죠. 과거. 과거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회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은 무의식적이지만, 그걸 회상할 때는 무의식이 아니고 의식으로 변해요. 의식으로 변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것은 조작이 가능해요. 편집과 조작과 위반과 거짓과 오버와 구라죠. 거짓말. 거짓말이 추가가 되는 것이 회상입니다. 현재에 자기 자신을 의미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위해서 부풀어지는 요소까지 의식에서 해요. 의식세계에서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런 회상을 하면서 기억창고에서 필요한 것만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유기체가, 인간의 몸이 자기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그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자기 방어체제. 근데 그 자기 방어체제가 이게 어설퍼요. 이게 완벽하게 조작이 안 돼요.

 

그래서 자기 방어체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새나가서 말을 안 듣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꿈이라고 이야기하고, 트라우마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근사하게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데, 그 포장지가 군데군데 구멍이 났어요. 그래서 원치 않는데, 어릴 때 받았던 그 마음이 상처가 도져서 욱하는 성질로 자신의 혼돈스러움과 괴물스러움을 타인에게 가하게 되죠. 타인에게 가하는데 여의치 아니하면 자기 자신에게 타격을 가하는데, 그 결정적인 타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분 좋은데 자살한 것 봤어요? 너무 기분 좋아서 자살합니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근데 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자신의 지금 능력으로 자기의 아픔을 다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정답을 내 쪽에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근사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거예요.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잠시 나타나 소멸될 수밖에 없는, 잠시 등장한 환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내가 조성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주께서 몰아세운 겁니다. 몰아세운 이유는, 몰아세운 주님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소멸시킬 그 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소멸될 인생이지만 누가 만들었다? 주께서 만들었다는 것을,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224강-YouTube강의(인생이란)180313-이 근호 목사

 

224강, 제목은 ‘인생이란’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모든 자기 생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끝이 오기 전에 인생을 논한다는 것은 남아있는 대목을 무시한 거죠. 끝까지 가봐야 인생을 아는데, 인생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죠. 죽은 상태가 아니고.

 

그럼 죽고 난 뒤에 인생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드라마에서 중반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혹시 실수를 해서 마지막 회를 다 봤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드라마를 보는데 재미가 없어서 못 보죠. 시시해진다니까요. 그리고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에게 나중에 반전이 있다고 미리 알려주면 그 사람도 그 드라마를 보는데 재미가 없잖아요.

 

성경에서 인생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분만이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우리는 누구를 존중해야 되겠습니까? 아직 인생이 남아있는 옆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겠어요? 인생을 다 끝내고, 인간의 인생에 대해서 평가할만한 그런 심판주의 의견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말씀을 따라야 되죠.



이 성경말씀에서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조성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은 이렇다, 라는 그 개념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 좋아라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하시는 거기에 맞추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해서 살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에 보게 되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나와 있죠. 그런데 장사를 해서 이익을 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서 아시는 우리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격려를 해주실까요? 아니면 후원을 해주실까요?

 

그 다음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격려도 하지 않고 후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그야말로 초치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님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 어떻게 도와주시렵니까? 제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라고 우리는 묻죠.

 

마치 점쟁이 집에 가서 부채도사한테 “내 일이 잘 되겠느냐? 못 되겠느냐?”라고 이렇게 궁금해서 묻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시점부터 그 나머지 모든 인생의 끝 날을 전부 다 뭐로 보느냐 하면 ‘내일’이라는 개념 안에 다 집어넣어요. 내일에.

 

내일은 모레도 내일이고 십년 후에도 내일이고 백년 후에도 내일이 되는 거예요. 내일을 모른다는 것은 전체를 모른다는 말이고, 인생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을 니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목표가 설정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서 이익을 보기 위하여 장사를 해볼까? 어떻게 살아볼까? 라는 이야기가, 발언이 나온다는 말은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인생이라는 것은 안개와 같아서, 안개라고 하는 것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거예요. 소멸되는 거예요. 소멸되기 위해서 잠시 있는 겁니다. 잠시 있다고 해서 있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잠시 있더라도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뭐 어떻게 시원하지 않습니까? 기분 좋죠? 갑자기 삶의 무게가 확 달아나죠?

 

둘이 싸운다는 말은, 부부가 싸운다는 말은 없어질 안개끼리 싸운다는 말이에요. 부부가 이혼했다는 말은 안개가 안개끼리 이혼한 거예요. 이게 인생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주님! 인생이 무엇입니까? 알려주세요.”가 아니라, “너희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뭔가 있고 그걸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데 없어질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13절에서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을 보리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해서 모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근데 그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이야기다 이 말이죠. 과거. 과거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회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은 무의식적이지만, 그걸 회상할 때는 무의식이 아니고 의식으로 변해요. 의식으로 변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것은 조작이 가능해요. 편집과 조작과 위반과 거짓과 오버와 구라죠. 거짓말. 거짓말이 추가가 되는 것이 회상입니다. 현재에 자기 자신을 의미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위해서 부풀어지는 요소까지 의식에서 해요. 의식세계에서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런 회상을 하면서 기억창고에서 필요한 것만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서 유기체가, 인간의 몸이 자기 방어체제의 일환으로 그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자기 방어체제. 근데 그 자기 방어체제가 이게 어설퍼요. 이게 완벽하게 조작이 안 돼요.

 

그래서 자기 방어체제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새나가서 말을 안 듣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꿈이라고 이야기하고, 트라우마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근사하게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데, 그 포장지가 군데군데 구멍이 났어요. 그래서 원치 않는데, 어릴 때 받았던 그 마음이 상처가 도져서 욱하는 성질로 자신의 혼돈스러움과 괴물스러움을 타인에게 가하게 되죠. 타인에게 가하는데 여의치 아니하면 자기 자신에게 타격을 가하는데, 그 결정적인 타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분 좋은데 자살한 것 봤어요? 너무 기분 좋아서 자살합니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데,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근데 그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자신의 지금 능력으로 자기의 아픔을 다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정답을 내 쪽에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근사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거예요.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잠시 나타나 소멸될 수밖에 없는, 잠시 등장한 환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내가 조성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주께서 몰아세운 겁니다. 몰아세운 이유는, 몰아세운 주님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소멸시킬 그 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소멸될 인생이지만 누가 만들었다? 주께서 만들었다는 것을,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