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209b약2장1절(덮친 사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만약에 치매에 걸렸을 때 치매에 걸리면 아무리 믿음도 치매에 걸리면 예수도 모른다 할 텐데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겠느냐, 하는 그 문제.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치매에 걸렸다라는 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죄인 되었다. 바뀌면 돼요. 내가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구원받겠느냐, 하고 같은 말이거든요.
그런데 죄인 되었다는 말을 생각하느냐 하면 치매 걸린 현상이 내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구원이 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보충물이 돼요. 보충물. 보충물이라는 말은 팔 부러졌을 때 지지대 하는 거예요. 이걸 정형외과에서는 보철물이라 하지요. 보철물. 이빨 교정할 때 하는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정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하늘에서 낚싯대로 올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죄인 되신 거예요. 죄가 죄인을 죄 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뽑아내는 이게 보충물이 되는 겁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천벌이 없는 곳에는 천국이 없다고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천벌 치고는 약간 여유 있지만. 왜 여유만만한 생활이 천벌이냐 하면 자리가 수평적 자리거든요. 이 자리는 유럽에 가든 캐나다 가든 그게 천벌이에요. 천국이 아니잖아요. 이 자리. 옛날 노아식으로 말하면 물에 덮히는 곳은 다 천벌입니다. 그게 잘사는 동네든 못사는 동네든 결국은 물이 덮힌다는 말은 천벌 받고 있었던 거예요. 모양새가 한 쪽은 잘사는 천벌 이쪽은 못사는 천벌이지만, 어쨌든 천벌은 천벌이에요. 천벌이고 만벌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가 똑똑해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니 똑똑하냐, 안 똑똑하냐, 치매냐, 치매 안 걸렸느냐, 묻는 게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라는 것으로 들어오시는 “너, 죄인이야!” “니가 죄인이 아니고 죄 속에 니가 있는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니가.
그러면 내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죄 아닌 게 없어요.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서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요번에 강남모임에서 했지만, 주님이 보시는 관점의 죄가 있는데, 인간들은 인간들과 인간들끼리의 죄와 의를 나누게 돼요. 한 번 적어볼게요. 엉터리 죄지요. 엉터리 죄. 엉터리 죄가 2개입니다. 첫째는 뭐냐, 사람 대 사람의 비교. 비교해서 죄라는 것을 끄집어내고요. 두 번째는 뭐냐, 과거와 현재 지금과 비교해서 죄를 끄집어내요.
내가 옛날에는 참 착했는데 지금은 악하다. 개인적 시간적인 그런 차이를 통해서 죄, 의를 구분하고 내가 옛날에는 교도소가기 직전에는 악했는데 지금은 내가 고아원 방문할 정도로 착하다. 이러면 시간적 차이지요. 시간적 차이. 내가 착한 일하니까 착하고, 못된 짓하는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내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착하냐, 안 착하냐 가지고 선과 악을 따지는 거예요.
요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요. 이 이야기는 굉장히 난해하지만, 한 번 해봅시다. 자, 선악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이 보이는데서 나왔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지요. 그렇다면 아담이 생각하기를, 아담이 생각한 게 아니고 마귀가 또 그렇게 생각하지요. 마귀가 저걸 따먹으라고 하니까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저걸 따먹으면 악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걸 따먹으면. 선악과나무를 따먹지 말라 한 것을 따먹으면 악이 된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악마한테, 악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낮아요. 악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낮아요. 악마가 뭐냐 하면 따먹는 날에는 니가 뭐가 밝아진다고 했습니까? 눈이 밝아진다. 이건 뭐냐하면 니가 지금 눈이 침침하다는 거예요. 눈이 어둡다는 거예요. 눈이 밝아지고 자기 부끄러운 거 할 때도 눈이 밝아진다고 이야기했고 하지만, 어쨌든 니가 그걸 네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마귀는 이야기했느냐 하면 선과 악은 니 하기 나름이라는 입장에 악마가 한 생각을 같이 하는 거예요.
아담은 따먹으면 악이 되니까 안 따먹겠습니다. 나 따먹을 수 없어. 악마는 따먹으면 니가 눈이 열려서 선악 자체를 니가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리 이야기해요. 선악자체를. 참 이게 어려워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악은 누가 정하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이 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하나님이 정할 거 없이 니가 알아서 하면 된다, 는 쪽이에요. 니가 알아서. 선과 악을 위해서 니가 눈이 그 위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선과 악을. 니가 결정하고 니가 판단하면 되지 않느냐. 이건 뭐냐 하면 ‘자아의식’이에요. 악마가 인간에게 자아의식을 심어준 이유가 악마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다! 니도 니 결정을 니가 해야지. 니가 해야지 누구한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미 우리가 선악과 따먹어서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도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못 알아봐요. 선악을 알기 이전에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미 선악을 아는 자아가 있는 이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 알려만 주신다면 또는 보여만 주신다면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하는 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문제도 그렇고 죄짓는 문제도 그렇고 나한테 맡겨달라는 거예요. 나한테. 2장9절 봅시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만일 너희가 뭐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다 했어요? 뭐로? 외모지요. 또 보는 게 또 나왔어요. 2장 3절부터 죽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이게 전부 다 들어올 때에 눈으로 보고 하는 거예요. 야고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냐, 야고보 이야기가 하나님 뜻이지만, 선악과 따먹었을 때 그 때 아담의 심정을 그 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선악과 따먹을 때 나는 구경도 못했습니다. 발 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처음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은 뭐냐, 자아의식이었어요. 결정은 니가 내려라. 결정은 니가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은 결정을 내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속에 관한, 소속돼 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니는 선악과에 그 죽음에 소속돼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표현하는 제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는데, 쉽게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쁜 강아지를 이렇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강아지가 밖에 도망가지 않도록 염려하게 되잖아요. 어쨌든 강아지와 사이좋게. 그러면 강아지한테 “그래, 줄게, 줄게.” 이야기만 할 뿐이지 “강아지 너! 고구마 먹으면 쫓아낸다.” 이런 부정적인 명령을 강아지 앞에 들이 댈 일이 없어요. 같이 살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데 선악과가 이미 심어져 있는 인간이 들어왔거든요. 선악과가 심어진 에덴동산에 인간이 살았다는 말은 너라는 조건보다 선악과 원칙이 더 우선된다는 겁니다. 니가 강아지가 나한테 이쁘지만, 나는 우리 집에 와서 강아지보다 이 고구마가 더 중요해! 이런 뜻이잖아요. 그래서 이거 먹기만 하면 니는 더 이상 내 집의 강아지 아니다. 쫓아낸다. 이런 뜻이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은 인간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다. 말이지요. 악마는 그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악마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에게 반격하고 하나님에게 대드는 겁니다. 피조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창조주한테 끌려가지 않겠다는 그런 심보입니다. 그 심보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목사님,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하는데 구원을 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보충물, 아까 보충물 이야기했지요. 보완하는 것. 이 보충물이 반드시 있어줘야 하는 이유가 구원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선택에 맡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보충물 할 때는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율법으로, 신약에는 율법의 완성된 말씀으로, 우리를 죄를 유발시키는 거예요. 죄가 보충물 되는 거예요.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형제에게. 그 형제가 뭐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합격이 된 사람, 이미 구원이 된 사람에게 죄의 보충물을 계속 허락하시는 거예요. 보충물 주시는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하느냐, 아까 이것 때문에 제가 예를 들었는데 그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치매 다시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50년동안 신앙생활 잘 했는데 70이 되어서 치매에 걸렸다. 목사가 물어도 예수님이 누굽니까? 전혀 모릅니다. 아무 감각 없어요. 자, 이 사람이 구원 받겠느냐 하는 겁니다. 나이 70같으면 많지는 않지만, 치매 와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가족도 못 알아봐요. 예수님 알아 볼 리가 없지요. 예수님이 어느 동네 사람인지 몰라요. 이 사람이 구원받겠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신앙 좋다고 소문 난 사람이고 오직 주님만 위해 살겠다고 50에 다짐을 하고 다짐을 했던 사람인데 그 다짐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이럴 때 이 사람이 구원 받겠느냐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했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이야기해야 돼요. 치매에 걸렸다 하지 말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인 되었다고 이야기하자 이 말입니다. 이 사람만 죄인 된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죄인 되었어요. 그럼 이 사람은 무엇의 증인이냐 하면 죄인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치매에 걸릴 때만 죄인이 아니고 소급이라니까요. 소급. 지난 지가 50년 신앙했잖아요. 이게 치매현상이에요. 지는 주님께 헌신했는데 말짱한 정신으로 이게 죄의 현상이에요. 한 번 십자가를 알게 되면 소급해서 전부 다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고 회개한 것조차도 뭐가 되냐, 강의 설교 전부 다 뭐가 되냐 죄가 되는 겁니다. 아예 태어난 것부터가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따라서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치매 걸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되지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저는 치매 걸리면 치매는 싫어요. 치매 걸리면 주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싫어요. 이럴 수 있는 능력이나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태어났음. 자체가 이미 죄인 되기로 태어났음이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그 사람이 정신이 온전할 때 한 50대에 그냥 믿습니다. 헌신하는 이거 말고,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지금 내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죄라는 이름의 보충물이에요. 의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나라는 이런 50대에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요런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앞으로 치매 걸린 상태나 안 걸린 상태나 지금 이 상태에서 그대로 갇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주께서 의롭게 하신 다면 이미 온전할 때 정신이 온전할 때 성령 받아서 온전할 때 같으면 내가 앞으로 치매 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가 이미 확정이 된 겁니다. 앞, 뒤로 전부 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으로 생각했지만, 이걸 인류 전체 인간 전체로 보게 되면 처음에 에덴동산에 나무 두 나무가 있지요. 하나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중심에 있습니다. 중심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나무가 중심이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중심이 아니고 나무 중심입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중심이에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합치면 이게 예수님이에요.
결국 인간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그 당시 예수님 보면 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우리를 죄인 되게 하고 우리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합체하면 되는 거예요. 이걸 합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론상 되지만 이걸 실제화 되어야 돼요. 실제화 되기 위해서 아담에게는 뭘 더 해야 된다? 뱀이 오고 사탄이 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러면 말리던지. 전기 철조망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지. 우리가 죄 짓고 난 뒤에 하는 소리가 뭐냐, “아~ 그 때 안 그럴 걸.” 그러잖아요.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 태어나서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죄가, 나의 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돼요. 나의 의를 위해서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내 막사는 걸 굉장히 오해한 사람이 있는데, 막 살면 구원받습니까? 하는데 내 막사는 게 나의 의를 위해서 막 사는 게 아니고 주님만이 의인, 그리스도 의를 위해서 우리는 막 사는 관계 속에 얽혀있는 겁니다.
주님의 의 앞에서 막 안사는 인간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막 살았고, 막 사는 사람 중에서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보충물 되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진해서 등신 되어야 되고 바보가 되어야 되고 치매 환자가 되는 그게 뭐냐, 자진해서 가지만 사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는 거죠.
사람 눈에 의식하지 않고 사람한테 꿇리지 않는 그런 자유들 누리고 있지요? 야, 이거 생각해 보세요. 세상을 볼 때 다 복음적입니다. 그걸 발취할 수 있어야 돼요. 여자 검사가 성추행 당했다고 창원에 있는 여자 검사가 고발을 했다고요. 국민들이 모두 격분을 했어요. 검사계도 썩었구나, 검찰도 썩었구나. 격분해가지고 이참에 검찰 전부 바꿔라. 그리고 그 여자분에게 꽃다발 보내며 격려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난 뒤에 또 하나 검사가 8년 전에 부장 검사한테 성폭행 당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검사는 못 생겼어요. 자, 이게 문제에요. 지 입다 물면 선진 검사는 예쁘잖아요. 이쁜 거 나올 때는 못난 건 좀 가만히 있어야 돼요. 사람들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사람이 그 진리에 정의 노릇하는 게 아닙니다. 이쁜데 정의 노릇해요. 이쁜 것. 이쁜 검사는 나라의 보배거든요. 그걸 지가 함부로 건방지게 선배라고 해서 분노하는데 못 생긴 것은 건드려주는 걸 고마운 줄로 알아라. 이런 식으로 받거든요.
이 세상은 정의가 없어요. 이쁜 게 정의에요. 이쁜 게. 고은 시인이 뭘 하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고발한 시인이 예쁘냐를 봐요. 이쁘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작살난 거예요. 그런데 못 생긴 게 고은이 성추행이고 하면 저거는 출세하려고 일부러 들이대 놓고 꽃뱀 해놓고 뒤에서 딴 소리 한다고 어디 그 동네에서 출세하려하면 몸 하나 바쳐야지. 대번 욕이나 대판 얻어먹는다고요. 이 세상에 정의 있습니까? 정의가 어디 있어요?
옛날에 제가 미션학교 교사했잖아요. 그 때는 제가 따지는 게 아니었어요. 다 미션학교니가 교장부터 해서 교회 다니고 봉화 제일 교회 다니고 그 동네에 제일 크니까 다 다니고 교사들도 거기 많이 다니고 기독교 학교니까 예수 안 믿으면 교회 안 다니면 교사 안 시켜준다 해서 다 다니고 다니는 척들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데 회식한다고 술을 하는 거예요. 나보고 술을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냥 안 먹습니다. 하면 되는데 속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 예수 믿기 때문에 술 안 먹습니다.” 이래가지고 안 받았어요. 그 학교 들어 간지 6개월도 안 됐어요. 예수 믿기 때문에 나 술 안 먹겠습니다. 이건 성령의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그냥 아무 감정도 없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결국 술 먹는 저 인간들은 결국 교회는 다녀도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한 방에 다 들통 난 거예요.
그 검사들이 추행할 때 손모가지 밟아버려야 돼요. 작살내야 됩니다. 진짜 정의감 같으면. 이게 어디 영감쟁이가. 이리 되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걸 왜 안했겠어요? 출세 정도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뭐냐, 살아야겠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이 땅에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가 돼요. 이건 뭐냐하면 자기를 스스로 뭐로 본다?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의인으로. 모르지요. 이 이야기가 여러분한테 격분되지 않는 이유가 이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세상은요, 감추고 감춘 게 오히려 운동을 해요. 껍데기는 그냥 바다의 찰랑 찰랑 하는 물결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감추고 감춘 것은 힘입니다. 어떤 권세, 권력인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왜 아름답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했는가, 하는 고 문제가 될 수 있고, 또 뭐냐 하면 하나님은 평범하게 선악과를 만들어놨는데 마귀가 와가지고 아담을 부추기니까 갑자기 그 선악과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될 수가 있어요. 어쨌든간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이다 말이죠.
인간은 아름다운 것, 누가?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그것이 인간에게는 정의요, 진리입니다. 그 동네가 지옥입니다.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 되겠어요? 안 떠나야 되겠어요? 이 세상에 더 살려고 할 이유가 없지요. 이유 없어요. 사도들 다 일찍 죽었습니다. 일하고 다 죽었어요. 아무리 좋은 명분, 하늘나라 확장, 헌신, 백날해도 그 마지막에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 요거 마귀음성입니다. 마귀 음성이에요. 정말 여검사가 진짜 더러운 짓하게 되면 사정없이 밝혀야지요. 그래가지고 재판할 때 얼굴 벌개가지고 하게 되면 저 판사는 어제 밤에 뭐 있었나? 공부 한다고 엎어가지고 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변명들 하든지 말든지. 그럴 여자 검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가 요한복음8장에 나오거든요.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8장이 무슨 내용이었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이 아는 자유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죄인으로 살되 그 죄인으로 사는 것이 그게 자유인 것을 알아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을 수 있다가 아니라 “주여, 내가 죽어 마땅하군요.” 라는 사람이거든 돌을 던져라. 죽이고 그 던진 돌 가지고 그 다음에 니가 그 돌에 맞을 준비를 하라 말이지요. 그 돌을 누가 들고 왔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들고 왔거든요. 바리새인들이 들고 온 돌을 쳐라. 그리고 그 돌 가지고 이제 니가 맞아볼래? 이리 나온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한결같은 뜻은 뭐냐 하면 죄라는 이름의 보충물을 줘야 돼요.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의가 나와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그러면 목사님, 죄 아닌 게 뭡니까?” 죄 아닌 게 뭡니까? 아까 덮친 지붕이라 했지요.
덮친 지붕이라 했는데 덮친 지붕을 하늘의 은사라 했지요. 선물이라 했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신앙이 우리에게 온다는 말은 비둘기가 나풀 나풀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일으킨 사건이 나에게 덮쳤다 이리 보시면 이게 정확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사람이기 때문에 옛날 이천년 전 사건에 우리는 거기에 현장에 없었잖아요. 현장에 없더라도 성령께서 그 현장을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그게 십자가에요. 그 때 예수님 죽이려할 때 우리는 가표 안했잖아요. 왜?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때 있었던 상황을 우리에게 주는 게 우리에게 덮친 지붕, 아까 일반적인 의미의, 총체적 의미의, 전체적 의미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덮치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왜 죽으셔야 되지?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을 만 했구나! 라는 것을 그 관계성을 갖출 때 그게 그 사람에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뭐가 나오겠어요? 하나님의 의가 나오잖아요. 그걸 의의 증인. 그게 로마서6장 의의 증인이에요.
의의 증인을 만드는 방법은 내가 만드는 건 아니지만, 주께서 만드는 방법은 나로 하여금 죽어 마땅하고 죄인입니다. 라는 현상이 일어난 그 순간이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그것만 알게 한 현장이 아니고 뭐를 끄집어낸다? 주께서 여전히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는 현장을 매일 일상 가운데 그렇게 만들어 나가요. 한시도 한 틈도 빠짐없이. 모든 일을. 강아지 안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순간 순간이 하나님이 의인이시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수갑만이 우리의 몸을 채우고, 그 다음에 추운 혹한이 우리의 몸을 꼼짝 못하게 하지만, 그것보다 우리를 진짜 꼼짝 못하게 하는 거, 진리가 안에서 우리가 자유하는 것. 그것은 뭐냐 바로 신앙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죄를 가져가지 않고 죄를 의되게 하신 주님의 공로를 자기 공로를 주님이 자기가 가져가시는 겁니다. 그게 보충물이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절에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했지요. 제가 방금 읽은 것이 야고보서2장 3절의 말씀이지요. 자, 그러면 묻습니다. 야고보서2장3절이 성경책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은사가 돼요.
안 믿는 사람 같으면 그 이야기 들어봤는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니가 믿는 성경책 안에 있더라. 안 믿는 사람은 그리 되겠지요. 왜? 안 믿는 사람은 성경책하고 자기하고 별개에요. 성경책은 그냥 책일 뿐이고, 자기 현실은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믿는 사람은 성경 안에 있는 현실이 성경 안의 현실이 확대되어서 그 성경 안에 우리가 포섭돼 있지요. 들어가 있지요.
우리가 죽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대로 죽잖아요.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항상 마태, 마가복음에 보면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그걸 카이로스라 하는데 그 때가 되매 일이 일어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돌아보면 다 할 때가 되게 되매 하는 겁니다. 때가 되매. 나사로가 죽는 것도 때가 되매 죽어야 했고, 나사로가 다시 나흘만에 사는 것도 때가 되매 살아야 되고,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다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법이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고 외부에도 있지만, 우리 내부에 있다면 그 우리의 내부의 법을 누가 새겨줬습니까? 물론 여기서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새겨줬잖아요. 그럼 법을 새겨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고자 해서 우리에게 이 야고보서2장3절을 우리에게 새겨줍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새겨줄 때는 뭔가 얻고자 하는 게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아름다운 사람이 올 때는 “흥! 지가 뭐 잘났으면.” 이러다가 갑자기 교회에 거지 오게 되면 “아이~ 여기 앉으소서.” 이렇게 이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을 우대하고 잘 사는 사람이라고 우대를 특별히 안 해주고 그런 사람 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르렀어요.
법이라는 것이 2장9절에 나옵니다마는, 하나의 조항으로 묶어버리면 이걸 비록 지켰다할지라도 다른 법을 지켰다고 자동적으로 이게 그 효과가 전이되지를 넘어가지를 않아요. 되박이 이리 있으면 물을 부으면 물이 넘쳐서 이 작은 됫박에 또 넘치잖아요. 이리 되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부자에 대해서는 히히 뭐 잘났나? 이렇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대접했다 칩시다. 그 사람이 다른 법을 지킬 때 요 법을 지켰다고 해서 다른 법을 자동적으로 지켜지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법을 주게 되면 이 법이 내가 미처 모르는 모든 법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 왜냐 하면 법은 여러 개라도 지키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 담배피우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왜? 성경은 담배피우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담배피우라는 말 그 자체가 없는데. 성경에 인터넷게임 오래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 성경책은 인터넷게임 자체가 없잖아요.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한 게 그 질문이에요. 그런 뜻으로 질문한 건 아니지만, 그런 뜻으로 답변한 게 있어요.
누가 법을 지켰다고 했을 때, “성경에 나오는 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저의 답변은 그거에요. 법을 지켰다고 치는 순간 그 법에 대해서 새로운 법이 또 파생되어서 나온 거예요. 파생되어서. 친구하고 일본에 놀러간다. 그러면 총무 아닌 이상은 “야! 놀러가자.” 보따리 캐리어 끌고 놀러 가면 돼요. 하지만, 총무는 뭘 해야 됩니까? 1번 놀러간다. 3박4일로. 총무라는 사람은 같이 가면 돼요? 도대체 예약은 어디에 해야 되고 예약 차이를 인터넷으로 찾아봐야 되고 사람 연락해야 되고 차비는 지하철 연결은 어떻게 해야 되고, 따라가는 사람은 놀러간다 하지만 막상 일하는 사람은 하나, 하나 거기에 대한 모든 상세한 것, 예상되는 것, 만약에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챙겨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음식은 어느 쪽의 음식이 낫고 맛 집은 어디가 유명한가 그런 거 다 신경 쓰잖아요. 그지요?
그것처럼 법을 안 지킨 사람한테는 ‘그거 뭐 부자 같으면 너무 부자한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한테 하면 되지.’ 이렇게 하지만, 일단 이것을 해 본 사람은 이게 실행하게 되면 그 현장에서는 이것이 저만치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요. 가난한 사람, 부자를 나누는 기준부터 해가지고 이게 모호하기 짝이 없고요, 그리고 상대방을 대우한다, 대우 안한다, 그 기준도 너무나 일방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이에요. 일방적으로.
결국 이 야고보서2장3절 지켰다고 시도해보면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는가 하면 아까 집사님은 죄를 알기 위해서 이야기했지만 시작해보면 그냥 죄를 아는 게 아니고 지켰다는 그 한 순간부터 미흡함을 안다니까요. 미흡함을. 아, 좀 더 잘해줄걸. 좀 더. 그 때 가난한 사람에게 좋은 자리 있습니다만 했는데 자리 안내만 하지 말고 애는 몇 명입니까? 집은 어느 동네 삽니까? 충훈부에 사십니까? 차비라도 보탤 걸. 차비를 봉투를 할 때 만원을 넣을까, 이만원을 넣을까. 이것이 계속해서 이 성경을 보는 우리 마음에 나오는 현장을 주님께서 주선을 해준다니까요.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교회 뒤에 않아가지고 혹시 가난한 사람, 부자 이걸 살핀다고 될 일이 아니고 즉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집어넣되 집어넣어서 이 야고보서2장3절을 기억 한다 칩시다. 하고 막상 실행에 옮겨보게 되면 수십 가지의 수백 가지의 대책들이 계속해서 결정을 우리한테 요청한다 이 말이지요. 봉투에 만원을 넣을 것인가, 2만원을 넣을 것인가, 아예 자리만 안내해 주고 차비도 안 줄 것인가, 그런 문제. 심지어 어느 교회는요, 돈 500원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서초구 어느 교회. 소문나서 수원이고 서울 근방이고 노인들이 500원 받으려고 아침부터 줄서있어요. 500원 받으려고.
왜 천원주면 안됩니까? 자, 500원이 이웃사랑이 더 큰 이웃사랑입니까? 천원이 이웃사랑이겠어요? 천원이 이웃사랑이지요. 그럼 묻습니다. 천원이 이웃사랑이겠습니까? 사대보험이 이웃사랑이겠습니까? 사대보험. 사대보험은 교회에서 안 들어줘요. 왜 안 들어주는데, 교회가 예산이 모자라서. 예산이 모자라도 야고보서2장3절인데. 너희들 이야기했잖아. 교회의 모든 예산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나님이 예산 안 주는 거 보니까 아니네.
하나님이 야고보서2장3절하기 위해서 오는 노인네들 사대보험 들어주라고 돈 자금 마련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안 주셨다고? 그럼 기도가 모자라던지. 하늘에서 창을 들 열었던지. 너희들 교회가 아니던지. 사기꾼이든지. 뭐 그런 이유 있네요. 야고보서2장3절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 왜 안 도와주십니까.
이번에는 한 번 말을 바꿔봅시다. 말을 바꿔볼게요. 어떤 사람이 옷을 잘 입었는데, 야고보서2장3절해가지고 뒤에 앉은 집사가 옷 잘 입은 사람은 너무 친절히 대하지 마라. 흥! 하고 “저기 앉으세요.” “앞자리 앉지 말고 저 뒷자리 잘사는 사람은 뒷자리 앉으세요.” 이렇게 했다 말이죠. 이렇게 했는데 그 말 듣고 그 부자가 너무 감사하면서 “옷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우리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데서는 이런 대우 못 받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뒷자리까지 앉게 해 주시니...” 내가 한 게 아닌데 갑자기 야고보서2장3절을 누가 했어요? 그 사람이 겉모습이 부자라는 것만 알았지 그 속에는 완전히 마음의 심령이 얼마나 찢어지듯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니까 교회에서 가난하게 보이는데 이게 카드가 100장이 넘어. 검소하게 살지 실제로는 실제 사채업자. 그것도 모르고 이거 한다고 앞자리 했을 때 그 실수한 걸 야고보서2장 3절 어긴 것을 누가 이걸 책임지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결론 났지요.
야고보서2장3절은 이거 지키는 것도 뭐다? 하늘이 주신 수직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소급해서 알게 하는 거예요. 자,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다 지키게 하십니다. 어떻게? “나는 못 지켰습니다.” 하는 순간 야고보서2장3절은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키게 하신 거예요.
결론을 들으니까 결론이 너무 싱겁지요. 너무 간단하지요. 나만 죄인 되게 되면 안 지키는 말씀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형제를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야고보서3장16절 말씀. 그걸 지키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형제를 위해서 간 떼어주고 보증서주고 이래야 됩니까? 방금 이 결론 들어보니까 간단하지요. 형제 앞에 뭐라고 합니까? “형제여, 내가 바로 너와 못지않게 내가 죄인이다.” 그게 바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는 뭡니까? 니 잘났다. 내 잘났다가 아니고 둘 다 이렇게 못난 인간 만나게 해 주신 건 누구밖에 없다? 우리 주님 예수님밖에 없다. 할 때 여기 있든 멀리가든 뭐 어디가든 그건 정말, 이 승철이 불렀던 이런 노래있어요. <그런 사랑 없습니다.>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 없습니다. 정말 이 세상의 기적이에요.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이건 예의상이 아니고 겸손 떠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걸 느낀다는 것은 이건 하나님의 수직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이 무섭겠습니까? 안 무섭겠습니까? 세상이 무서워요? 안 무섭지요. 니 그럼 죽는다가 무섭겠어요? 안 무섭겠어요? 떠나려고 환장했는데 그게 뭐 무섭겠습니까. 바로 야고보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진도 좀 더 나가겠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야고보서에 쓴 이 모든 야고보이야기는 하나님이 필히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여기서 수직적으로 하늘의 은사가 옵니다. 하늘의 은사가 오는데, 우리가 하늘의 은사 받아서 우리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껏 모든 야고보서의 주석이 다 그런 겁니다. 주석들이. 해석들이.
자, 은혜 받았으니까 우리가 어떻게 한다? 행동한다.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행동해 봐라. 행동해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어떤 법을 지켰다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미흡하기 짝이 없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등신 같아. 못 지켜요. 우리가.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모든 말씀 지켜도 하나 어기면 다 어긴 게 돼요. 우리가 지금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 집사님 말대로 우리가 뭐 된다? 죄인인 줄 알지만, 현장에서 또 다시 뭘 느껴요? 내가 아는 죄인이 아니고 진짜로 내가 죄인이고 이 죄인을 진짜로 죄인을 깨닫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 주셔서 진짜로 내가 죄를 깨달을 때 세상의 어떤 것도 무섭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 5절 봅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되어있지요. 자, 여기 가난한 것이 연간소득이 얼마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거 없지요. 가난하면 가난한 거예요. 먹을 거 입을 거 없어서 가난하냐, 그런 문제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뭐냐하면 자신이 믿음이 있는 거 같으면 세상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어요? 안하고 싶어요.? 안하고 싶지요. 주님만 자랑하고 싶지요.
그러면 세상 사람이 남들이 돈 자랑할 때 자기는 자랑할 게 누구밖에 없습니까? 주 예수님밖에 자랑할 게 없지요. 그러니까 이건 심령이 어떻게 돼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되는 거예요. 가난이란 말은 이 세상에 대해서 그 어떤 기대를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한 상태. 포기 안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포기하게 된 주님께서 손대서 포기하게 된 상태가 가난이란 상태입니다.
집에 수백억이 있어도 괜찮아요. 수백억이 있어도 괜찮다고요. 우리 외손녀가 지갑에서 돈을 딱 끄집어내면서 휙 버려요. 돈하고 상관없다 이 말이거든요. 아직 돈 좋은 줄 몰라서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나는 돈 없이 산다. 저는 그렇게 억지로 해석을 해요. 아~ 저런 어린애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돈은 몰라요. 곶감주면 미칩니다. 아이, 좋아~~
이 세상에서 돈이 있든 없든 간에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출세라든지 성공,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성공하면 교만하기 때문에. 성공 안 해도 교만할 수 있는데 남들이 성공했다고 하는데 교만 안할 수 있겠어요? 누가 와서 나를 바닥으로 짓밟지 않으면 인간 안 됩니다. 누가 와서 나를 인간 취급 안할 때 개 취급할 때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주께서 보낸 천사입니다. 그게 야곱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 말씀하고 더 안하겠습니다만, 5절에 보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뭐를 유산 남긴다? 뭐를 상속으로 남깁니까? 무슨 나라?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주는 거예요. 얼마나 아버지 고맙습니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상속을 해준다는 거예요.
진짜 좋은 아버지는 죽을 때 티 나거든요. “큰 아들! 집 니 가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둘째아들! 땅은 니가 갖고” 그걸 4자로 기쁜 소식이라 하고 두자로 복음입니다. 그것 때문에 특히 며느리는 그것 때문에 신경 쓰잖아요. 아~ 가기 싫은데 가는 이유가 그 마지막 멘트 그거. 그리고 또 그 영감님 부인은 초친다고요. 유서 쓴 것도 없는데 “아버지께서 요번에 도장 찍고 주민등록 썼고 다 적어 놨다. 이건 공증 받았다.” 있지도 않은데 해가지고 자식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자주 찾아오라고 협박 공갈치는 거예요.
상속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걸 받을 자격이 됩니까? 뭐했다고? 뭘 잘했다고 상속 받아요? 그것도 상속받는 나라가 어디 부동산 어떻습니까? 저쪽입니까? 아니지요. 영원한 나라에요. 영원한 나라. 약속한 영원한 나라를 약속으로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있는 이상은 세상에서 꼴찌하나 중간쯤 하나 일등하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니들이나 그런 헛된 짓 많이 하라 말이죠. 니들이나.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요걸 더 추려보겠어요. 제일 마지막으로 정리한다면,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자유입니다. 내일 일을. 내일을 기대감이라고 했는데 이걸 바꿔보겠어요.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지 마세요. 마태복음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은 내가 내 관여가 통하지 않는 날이 내일이에요. 누구 누구 올 것이다 했지만 보세요. 누구 누구 온다는 건 늘 왔지만, 빠질 때는 빠질 수도 있잖아요. 다른 분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내일 장담 없어요.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웃는 소리했지만, 결혼할 때부터 이미 이혼하고 결혼하면 된다고요. 왜, 내일 일은 모르니까. 그 모습하고 사이가 좋다. 그건 미리 당겨서 기대감 가질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든지, 그런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하루, 하루 삶이 니가 구상한 삶이 아니고 이 예수님을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나가는 덮친 사태기 때문에 니가 거기서 니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니까 주신 것만 받고 믿음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사는 거 말씀에 비쳐보니까 엉망진창이고 남한테 안 지려고 성공적인 삶 살려고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