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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성의 문제 (마 24장 24절-28절) 대전- 96강
이근호
2018년 1월 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24-28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마태복음 24장 24절부터 봅시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 노선이에요. 인간들 노선이 아니고, 노선이라는 말은 과거에 과거를 해석했던 그 해석이 지속되는 것을 노선이라고 하지요. 과거에 세상을 보던 안목이 그냥 지속되는 것.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노선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아까도 얘기 했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어디에서 찾아야 되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구약에서 찾아야 되요. 요한계시록의 해석도 그렇게 되야 합니다. 인간의 노선에는 결함이 있어요. 어떤 결함이냐 하면 어떤 단계가 되게 되면 그 단계를 자꾸 완성으로 보려는 경향들이 있어요.
아까 작은 산들을 이야기 했지요. 그 정상에 올라가면 이거면 됐다는 자족하고 만족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그 만족에 대한 판정도 본인이 내리잖아요. 이것은 뭐냐하면 본인이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 됐어!~하고 그것을 일단 자기 뜻대로 되니까 자기 노선이 확인된 거에요. 예를들어 군악대에 지원해서 시험을 봤다고 한다면 시험 치는 의도가 있었고 불합격 되려고 하지는 안잖아요. 군악대에 시험에서 합격할 때 뭐도 같이 따라가냐 하면 결함도 같이 따라가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군악대에 가서도 새거든요. 항상 결함이 계속 따라 다닌다는 말이죠.
외면상 외형적으로 볼 때 뭔가 성취하려는 느낌이 들잖아요. 성취하게 되면 뭔가 결함이 해소된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현실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 몸에서 나와요. 자기 몸이 원하는 것. 욕망에 의해서 이거든요. 인간이 자기의 미래상을 상상한다면 그 사이에 뭐로 연결 되냐 하면 주문, 주문이라는 것은 스스로 언어를 동원해서 계속 최면 거는 것을 주문이라고 하지요. 그런 최면에 능력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겁니다. 교회에서의 제일 유명한 주문은 뭐냐하면 주여!~이지요. 주여!~주여!~자꾸 하게 되면 자기 최면에 걸려버려요. 그렇게 하고 뒤에 붙이는 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손녀도 아멘을 하는데, 그렇게 해놓고 믿습니다!~믿습니다!~하는데 이렇게 주문하게 되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하나의 현실로 구체화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기지요. 이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큰 겁니다. 그런 신념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환상임이 드러날 때가 바로 믿음이 있는 겁니다. 신념은 어디에 해당되냐 하면 행위에 해당되거든요. 그런데 만약 이 신념을 믿음이라고 하게 되면 믿음이라고는 하지만 행함에서 도출된 거에요. 자기 행함에 정신일도 하사불성(情神一到 何事不成)이라 정신만 하나로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에요.
왜 이렇게 되야 됩니까? 질문 자체가 성림이 안 되는 거에요. 무조건 하면 된다. 조폭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하면 된다는 거에요. 군대에 가면 많이 듣게 되는데 안되는 게 어디 있어! 무조건 하면 된다에요. 전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노선은 인간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이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거에요. 주루룩 쏟아 놓는 겁니다. 역사라는 판에다가 하나님의 확정된 언약을 쏟아 놓는 겁니다. 마치 고추 농사 짖고 가을 철에 햇빛 따스할 때 길가에 펴 놓고 고추를 주욱 붓잖아요. 저녁 되면 거두고 주욱 부어버리는 겁니다.
부을 때 붓는 모든 내용을 역사 판에 붓기 때문에 역사 판에서는 뭐가 기다리냐 하면 언어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언어가 기다리기 때문에 오류가 역사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욱 쏟아지니까 언어는 언어인데 결함 있는 인간들이 접근하려면 단절이 일어나야 되요. 해석 불가에요. 해석 불가가 일어나는 겁니다.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되요. 해석이 성립 안 되는데 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미래를 예상 하느냐? 사실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인데 인간들은 미래라고 해요. 바로 우리의 해석 안 됨을 통해서 왜 해석이 안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너 자신에게 물으라 다시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우리가 뭐가 문제인지 어떤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뜻인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거에요. 한번 말씀대로 네가 조립을 해봐라! 왜 조립이 안 맞는지를 픽셀(이미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이 네모 모양의 작은 점들을 '픽셀(Pixel)'이라고 한다)이 안 맞아 떨어지는 거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러면 그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인간의 이해가 중심에 있고 인간의 이해는 인간의 몸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노선을 이해하겠다는 노림이 뭐냐 하면 나의 몸의 유지와 연속성이에요. 연속성이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천국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언약의 성취에서 나와요. 그런데 이 말은 우리 몸에서 천국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예수님의 몸은 인간에게 살해당한 몸이거든요. 인간에게 죽임당한 몸이에요. 누가 믿었으리요가 되거든요. 예수님의 몸은 인간도 이해 못할 저게 메시야의 몸이야? 할 정로로 이해 안되는 몸의 연속성 때문에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의 나라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 이데올로기와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 자기의 몸을 천국까지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하는 거에요. 안 끊어 지고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면서 골인 지점까지 그대로 몸이 골인 테이프 걸고 그냥 천국에 골인하고 싶은 종교적 욕구에 의해서 인간의 몸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인간과 노선이 다른데 그 몸 가지고 백날 가봐야 지옥에 풍덩 빠져요. 몸 자체가 다른 몸이 되야 된다고요. 그 몸을 가지고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 라고 물었던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 그 몸을 가지고 천국에 어떻게든 가보겠다고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육은 육의 노선에서 그냥 머물러요. 똑같이 비행기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안에 엔진이 고장 났다 그러면 이 비행기가 활주로에 있다면 온종일 활주로만 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정상 비행기는 활주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이용해서 공중으로 뜨잖아요.
고장난 비행기는 떠보지도 못하고 육에서 육으로 끝나는 거에요. 활주로에서, 이건 비행기가 아니고 자동차이지요. 다른 예를 들면 엘리야의 시체가 없지요. 엘리야가 양성한 제자들은 자기 스승의 시체를 찾겠다고 사흘 동안 찾아 헤맸습니다. (왕하 2:15-18)엘리사가 이야기했어요. 찾지 마라 시체 없다. 그럼 어디 있냐?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거에요. 그런데 이런 예가 인간들의 몸에선 없어요. 분명히 죽으면 시체 있는 것이 상식이다는 거죠. 이 말은 엘리야의 몸이 너희와 똑같은 몸 인줄 아느냐? 다시 말하면 천국에 가는 몸은 (몸+언약)이라는 조건이 붙어요.
언약이 (천국)갈 수 없는 몸인데 갈 수 있는 몸으로 바꾸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에요. 나중에 신약에서 언약의 내용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혼자서는 갈수 없는 엘리야의 몸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마태복음 7장에 변화산에서 모세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팩트입니다. 사실이에요. KBS뉴스엔 안 나오지만 사실이에요. 뉴스에선 세종 병원 불 난 것만 나오지만 사실이에요.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이 몸 가지곤 안 된다는데 이 몸에선 내 욕망이 있고 내 식대로 내 중심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나 좋은 쪽으로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몸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거에요.
모든 것이 내 원하는 대로 돼야 됩니다라고 고집부리는 몸 가지고는 이런 육적 욕망을 가지고는 못 들어가는 곳. 노선 갈아타기를 해야 되겠지요. 내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타야 되요. 왜? 그곳은 아들의 나라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멀리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가까이 오니까 아들의 나라에요.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 삶 가운데 가까이 있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선 전부 멀리 있는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이게 부처인지 하나님인지 분간이 안돼요.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 뭘 했느냐가 중요하지 멀리 있는 하나님이니까 교회 예배당이 제단인줄 알고 거기다가 뭐 바치고~뭐 바치고~마치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처럼 떡 바치고 뭐 바치듯이 목사는 제사장인줄 알고 자기가 앞에서 가운 입고 설쳐 대고 그런데 가운은 왜 입어요? 복장을 왜 그렇게? 마치 선 무당 있지요. 박수 무당 옷 입듯이 모습이 딱 무당이에요. 춥다고 개량 한복 입는 것은 좋은데 뭐가 특별한 행사 할 때 저는 이상히 보여요. 무슨 환경 운동하나? 사회단체인가? 이상한 생각이 들거든요. 감리교 이런 쪽에서 뭐 한복 입는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튀어 보려고 계룡산에서 도 닦고 내려왔나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신부와 수녀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복장부터 고쳐야 되요. 중도 아니면서 수녀는 머리에 뭘 씁니까? 자기가 마리아도 아닌 것이 신부도 마찬가지이고 뭐가 사회 집단에서 독특하게 튄다는 것은 그 만큼 남을 의식 한다는 거에요. 주님만 아시면 되지 왜 남에게 티를 내야 됩니까? 전부 장사 속이거든요. 신부들 보세요. 바닥에 팔 벌리고 엎드린 다고요. 밟고 싶어요. 무슨 짓이에요. 엎드려서 헌신의 표시인가? 전부 눈에 보이려는 거에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믿음은 너무 가까워서 못 알아보는 것이에요. 믿음인지 죄인지 자랑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처럼 너무 같아서 못 알아 봐야 되요.
그런데 믿음이 자랑 거리가 되면 결국 자기 자랑이잖아요. 인위적 거룩, 인위적 경건 이것은 이렇게 한 이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경건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는 거에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저쪽에선 뭐라고 하냐 하면 목사 됐으니까 술 먹고 담배 피우자? 왜? 주님은 안 경건 했으니까 이건 무슨 연출입니까? 왜 연출을 해요? 사람들을 꼬시려고 하지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성도는 주님이 정하신 거에요. 꼬신다고 오는 것은 전부 가짜에요. 100% 가짜입니다. 안 오면 말지 자기 양도 아닌데 자기가 애 달아서 그럽니까? 안 오면 말지, 자기도 못 들어가지요. 방금 이야기가 24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예수님이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나의 나됨은 이미 빈 백지에 설명서 붙여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거짓)메시야로 가득해요. 인간들이 상상하고 원했던 기대했던 메시야가 한 두 마리가 아니라니까요. 그 짐승들이, 그들 사이는 연속성을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딱 보면 알아보는 메시야가 한 두 마리가 아니에요. 짐승이니까, 인간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기준점이 있잖아요. 그것에 인간들이 혹하게 마드는 요소를 모아 모아서 자기 몸에 걸치고 등장하는 겁니다. 적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인물이 있지요. 누구냐 하면 네 문을 바라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허경영.
허경영이라는 인물을 제가 주의 깊게 봅니다. 뭐냐하면 정치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치가 종교화 될 때 밑천도 별로 안 들이고 자기 팬들을 꽉 잡을 수 있는 요소를 허경영이 보여 줍니다. 두 종류의 팬이 있는데 하나는 청년들과 하나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이들이 혹하는데 보여 지는 게 연속성으로 이어지면서 특이한 도약을 보여주는 거에요. 주욱 가다가 점프해서 가는 것, 이것은 어지간한 사람은 가능한 거에요. 그것을 허경영이, 적 그리스도가 보여 준다는 것이지요. 답답하고 컬컬한 마음을 교회 부흥회 하면서 해소해 보자! 거기에 부흥사가 누가 오겠습니까? 허경영이 같은 인물이 오는 거에요.
그런 인물들은 대중들이 뭐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컬컬하고 답답한 심령이니까 뭐가 미흡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아까 결함이 있다고 했지요. 결함과 미흡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요. 결함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미흡이라는 것은 부족한 것이지요. 미흡이라는 것은 채우기만 하면 온전함이 되고 잘못된 것은 채운다고 하면 잘못을 유도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말씀의 완성이 어디로 가야 됩니까? 메시야이끼 때문에 십자가 즉, 버림받음으로 가야 되요. 버림받으려면 버리는 자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버린 자들이 바로 거짓된 메시야를 갈구했던 사람들이 몰려서 벌을 받아야 되요.
세상의 연속성이에요, 이어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 승천한 뒤에 이 세상의 속성은 예수님의 안목으로 다시 평가 받아야겠지요. 연속성이 평가 받아야 하는데 그 평가의 기준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몰려서 어떤 사람에게서도 호감 받지 못하고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모든 사람들의 부정에 의해서 홀로 죽었다라는 평가에 연속성을 인간의 미래상으로 말씀으로 때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주님의 말씀과 합치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미래상을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이야기 한 거에요.
네가 이 말을 분석하려면 해 봐라! 되는 가? 사람들이 분석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지간히 간격을 좁혀 보려고 분석해요. 안 되는 것을 왜 하겠어요. 하리수라는 사람이 남자인데 여자가 됐다. 염색체는 남자인데 보통은 재수 없어 하는데 하리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구요. 무슨 의도겠습니까? 자기도 여자 되 보려 하는데 선임자들, 여자 되려 하는 아까 말할 미흡함이 있는데 바뀐다고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세상이 하번 확 바뀌면 하는 사람들이 한번 여자로 살아 봤으면 내 인 생이 확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겐 (하리수가)메시야 같은 존재 이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일이 헛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삽자가로 말미암아 본격화 된 거에요. 정말 주의 말씀대로 남은 역사가 앞으로 꽉꽉 채워 질 거에요. 주님의 예언대로,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알아 봤다? 못 알아 봤다? 못 알아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후에도 역시 못 알아 봐요. 말씀을 못 알아 봐요. 그러면 누가 알아보느냐? 예수님이 왜 죽으셨나를 성령 받은 사람은 뒤 돌아 서서 말씀을 알아보는 겁니다. 24-25절 말씀을 어떤 취지에서 하는지 사람들은 못 알아봐요.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냐? 사도들이에요.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성령 받은 사도들, 성령 받은 성도들만 이 말씀을 알아봅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하면 현상을 알아보는 게 아니고 주어진 현상과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해서만 관련성을 갖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해보면 지금 이 해석이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통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할 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자체가 잘못이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고 너희는 그럴 자격도 안돼!를 분명히 하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놓고, 메시야를 죽일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갖은 세상 속에서 살아놓고 네가 뭘 더 기대해?
망할 수밖에 없는 일원 중에 하나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메시야가 왔을 때 메시야가 하시는 말씀하고 우리의 이야기하고 매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안돼는 거에요.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속 굳히기에 들어가요. 예를 들어 봅시다. 26절에“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여기서 사람들이 누구에게 말한다고 했습니까? 너희지요. 여기서 너희는 그 당시 제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도 정신없어요. 예수님을 긴가민가 하는데 성령을 받아야 되지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가 되게 되면 이미 이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그리스도인가 보다 메시야가 광야에 있다고 한다면 “이게 어디서 사기 치려고? 어디서 허경영이 같은 인간 데려다 놓고 사기 치려고?”뻔히 아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어떤 식으로 다녀 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다른 메시야에게 현혹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현혹 안 되지요. 그 메시야를 목사라고 해봅시다. 그 목사가 여러분 기도 하면 복 받습니다라고 할 때 현혹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현혹 될 리가 없지요.
26절을 계속 보면 광야에 있다 하여도~ 유인한다는 말이죠. 다음에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광야의 반대말이 골방이에요. 골방은 기도하고 광야에서는 떠벌이고 유명 인사되고 골방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 유명 인사를 포기 한다고 해서 메시야입니까? 수련회 때 이야기 했지요. 나는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문둥병 혼자의 발을 씻었습니다라고 떠벌이는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돈 내놔라! 이지요. 이것을 제가 요번에 책을 내는데 거기에 관람료라고 표현 했거든요. 괜찮은 영적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관람료나 시청료를 내라는 말이에요. 아니면 그런 소리 할 이유가 없어요.
내 사람이 되라는 말이거든요. 내가 당신들 대신 혼자 고생하니까 내라는 말이에요. 초대 교회를 보면 A.D 200년경에 60m짜리 기둥 위에 올라가서 기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기어 올라갑니까? 옛날 메시야 흉내를 내고 있는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모든 말씀은 어디서 나왔다? 구약에서 했던 메시야 들을 모방 질을 하는 거에요. 티내며 모방 질을 하는 거에요. 왜 그러는 거에요? 사람들이 결핍을 느끼고 있으니까 우리와 달리 사는 어떤 경건과 거룩의 고수들이 없나? 찾는다는 자체가 이미 십자가 지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성령을 안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안 믿기 때문에 마귀가 그 영혼을 마음껏 유인 할 수 있고 갖고 놀 수 있어요. 허경영처럼.
위대한 대통령 없나? 대통령이 왜 필요 합니까? 사는 만큼 살다 가면 되는데 괜찮은 대통령이 어디 있어요? 골방의 반대말은 광야입니다. 인간의 내면적으로나 위대한 사람이나 외형적으로 위대한 사람? 둘 다 가짜라는 말이죠. 둘 다 가짜라는 말은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는 니가 가짜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이 가짜가 되는 겁니다. 누구만 아는 겁니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 인 것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만 주여! 저도 가짜입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만 가짜 메시야에게 안 넘어 가겠지요.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알면 저 (대통령, 자칭메시야)목사도 분명 가짜이거든요.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은 저를 포함해서 어느 목사도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짜 이거든요. 내가 가짜인 것처럼 너도 가짜이다 이 말이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이잖아요.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아무도 믿지 마라라는 음성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면 같은 형제들은? 형제들은 믿는 게 아니에요.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 믿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면 다 준다했으니 그 사람에게 다 주면 안되고 반드시 경유를 해야 되지요. 형제에게 빼앗겨야 되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현제라고 해서 다 주면 안되요. 둘 다 못 믿을 사람인데 주께서 붙여 줬다는 것은 똑같은 인간들 끼리 만나서 뭐를 생산해라? 죄를 드러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경유가 드문 대요. 성도 끼리 결혼 할 수 있어요. 둘 다 성령 받아 결혼 하는 예가 거의 없어요. 둘 다 가짜이든지 둘 다 성령 받아 결혼 했다면 이혼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둘 다 이혼 한 상태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둘 다 안 믿고 결혼했기 때문에, 이혼은 왜 생기나? 믿고 결혼했기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내가 미쳤나! 내가 너를 믿게! 그저 이용하려 했어!”이러면 이용하려 했던 죄가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빼먹고 빼먹을 것이 없으면 갈라서면 되요. 뭐 있어요? 이게 결혼이에요. 뭘 기대해요? 메시야를 죽인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뭘 기대합니까?
주께서 그런 사람을 붙여 줬다는 말은 은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은퇴하면 별로 빼먹을 게 없어요. 신문에 투고를 하나 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인데 제목이 신과 싸우기인데 내용이 친구를 배신한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너도 나를 이용하려고 했잖아! 그런 내용인데 친구를 배신 한다고 너무 양심에 가책 받지 말고 상대방도 나를 이용하려고 친구 아니가! 한 거에요. 이런 것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친구입니다. 성령 안에서 왜냐하면 주님이 죄도 없으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전부 끄집어내기 위해 우리의 친구 위치로 찾아 오셨잖아요.
내가 너희의 친구이다라는 말은 나에게는 못 할 소리해도 돼! 친구 아니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유일한 친구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용하기 때문에 친구도 아니에요. 진짜 친구는 다 받아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거에요. 예수님만한 친구는 없어요. 그러니까 친구 없다고 너무 외로워 하지마세요. 속을 다 드러내고 내가 어떤 짓을 한다는 것을 다 아시고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만 있으면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해도 괜찮아요. 다하면 들을 토닥입니다. 제가 이렇게 사기를 쳤습니다. “걱정 하지마! 친구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했어!”
모든 책임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다 돌려요. 제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하면“내가 바람피우게 만들었어! 걱정 하지마!”제가 음주 운전을 해서 고속도로에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면 “걱정 하지마! 그때 차가 서로 우연히 만나도록 한 것, 내가 타이밍 맞춰서 졸음 운전하게 만들었어!”이런 말을 세상 사람들에겐 말하지 마세요. 죽이려 할 겁니다. 영화 밀양에서처럼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의 가치와 자존심을 위해서 예수를 믿었으니까 그런 경험마저 우리에겐 없겠습니까? 있잖아요. 있을 때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친구야! 걱정 하지마! 네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잘못 된 예수 상을 내가 집어넣었다.”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바닥으로 내려놓습니다. 바닥으로 내려지면 우리는 구원 될 자격도 없는데 성령이 와서 그 깊은 바닥까지 탄식하며 모든 만물은 주를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을 네가 왜 모르냐를 타박하시며 우리를 일깨워 줄 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노선이 서로 연결이 안 되는 데 동의가 안 되는 얼굴들인데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수족관에 물은 누가 채워 줬습니까?라고 했는데 우리가 수족관에 있는 고기라면 수족관에 물은 누가 채워 줬습니까? 주님이 채우셨잖아요.
햇빛과 공기는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받은 겁니까? 수족관에 모든 물은 주님이 채워 줬잖아요. 모든 만물은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셨잖아요. 이런 것을 우리가 기도해서 얻었습니까? 기도 안하면 햇빛 안 주고 그렇습니까? 기도해서 얻은 게 아니고 그냥 주신 거에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는 말이죠. 우리에게서 우리가 손 떼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그냥 수족관에 물고기처럼 되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어요. 왜 이렇게 못 살아 갑니까? 그야말로 똥 배짱. 정말 이런 자유를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만에게 해꼬지 한 것, 너무 짊어지게 되면 우울증 걸립니다.
다음 27절 봅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자!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입니다. 이것을 누가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아무도 못 봐요. 아무도 볼 수 없게 오는 거에요. 또 이걸 모르고 본다고 카메라 두 대 설치하고 하늘 쳐다보고 하는데 인자가 올 때를 계산하고 있다고요. 그것은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믿겠다는 선입견은 예수님이 오심과는 연결점이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미 올 때 아하! 우리 모르게 오셨구나! 어느 정도로? 번개가 번쩍하는 식으로 아무도 모르게,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라고 하면 성령 받았으면 지금도 세상 모르게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편한데 꼭 내 눈으로 확인해서 메시야를 붙잡으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굉장히 섭섭한 거에요. 나에게는 미리 알려 주시지,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게 하지 왜 그냥 오십니까? 저를 못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섭섭해 하는 거에요. 혼자 그렇게 일을 다해 버리시면 우리도 좀 보탠 것이 있어야 할 텐데 28절에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여기서 주검이라는 것은 시신이 있는 곳에만 뭐가 모인다? 독수리가 먹을 게 있어서, 독수리는 거짓 종교인들.
너희가 시체이기 때문에 독수리가 뜯어 먹을 게 있는 가 싶어서 우글대고 오는 거에요. 목사나 신부들이나 중들 이런 사람들이죠. 왜 이런 사람들을 지목하느냐 하면 바로 그들이 스스로 도약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죄인지이만 그중에서도 죄가 엷게 없어진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죄인. 상대적으로 다른 인간들은 죄 많은 죄인,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누가 복음 18장에서 이야기 했지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점프, 도약했다 이 말이죠. 기도하고 고생 많이 했다는 거에요. 신학 공부해서 점프하고 도약했다는 거에요.
(누 18: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누 18: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도약해서 목사나 할까? 성도나 할까? 는 아무도 이야기 안하는데 목사나 할까? 또는 권사나 할까? 권사가 되면 남편이 장로가 되야 하기 때문에 일단 남편을 장로로 만들어 놓고 장로급이나 목사급으로 남편을 키워볼까? 성도만 되면 돼요. 성도는 일방적으로 성령이 와야 성도가 되요. 요청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부른다고 성령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건 마치 성령을 돈 주고 사려는 마술사와 같은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미흡함을 채우면 온전한 줄 알고 자꾸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 한 그곳에는 독수리 같은 것이 모일 뿐입니다. “내 눈을 바라봐!”자기가 공중 부양하고 한다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이슈화 시키는 것. 화제 중심에 서는 것. 그것을 논객이라고 합니다. 별로 할 일도 없으면 남을 씹어서 돈 버는 재주를 갖은 것. 케이블 TV에 보면 많이 나옵니다. 도올 김영옥 이런 사람들. 인문학 강좌하는 사람들. 격을 띠우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둘 다 시체이다 하시죠. 이것을 죽음의 보편성이라 합니다. 저주의 보편성. 이미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전부 시체입니다. 자기가 시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알지요. 내 육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 몸은 주님 앞에서 대들고 까불고 교만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 피만 바라보고 십자가 용서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지 못한 언약을 다 이루신 그 분 앞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립니다. 사랑이지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하겠나이다하고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리는 거에요. 그런 것을 강아지에게 배워냐 해요. 강아지가 주인을 만나면 특징이 있어요.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사료를 주고 잘해주면 다 맡겨 버려요. 번지 점프 할 때처럼 번지 점프의 좋은 점은 위로 안 올라간다는 거에요. 반대로 떨어지기만 한다는 겁니다. 떨어지지 뭐!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다 시체이니까!
시체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요. 죽는 것 밖에 할 게 없어요. 검사들이 오이는 데 검사외전에서 여자 검사가 선배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할 때 그 옆에 같은 검사들이 한 둘이 있었다는 게 아니에요. 8년 전 이야기에요. 그 때 왜 옆에 검사들이 가만히 있고 이 여잔 왜 그 때 이야기를 안했느냐? 라는 질문은 8년 후에 할 질문이에요. 8년 후에 그런 질문을 할 만한 힘을 가졌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8년 전으로 돌아가야 되요. 8년 전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그 인간이나 여자나 같은 인간이에요. 이것은 비겁한 복수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돼요. 인간은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재되어 있는 보복일 뿐이에요. 그 때 이야기 안하면 영원히 이야기 하지 말아야 되요. 그리고 높은 자리가 탐이 나서 그래요. 탐욕은 우상 숭배이다. 그 여자는 지금 우상 숭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오를 자리까지 말 안 들으면 못 가니까 꾹 참으면 그 자리까지 가겠지 라고 그때 이 여자의 마음은 이런 거였어요. 그러면 지금 그 마음이 아니라면 그 때 상황은 끝난 거에요. 지금 성추행 하면 지금 고발해야 하듯 마치 사람들을 현혹 시키면 안돼요. 이것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 성도는 지난 것을 복수하지 마세요. 그 때 주와 함께 있으면 내가 무슨 말 할 것인지를 성령을 통해서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밀어버리면 우리는 연속성에 있거든요. 날마다 죄는 끊어져야 되요. 죄가 어떤 성과를 넘어 버리면 죄가 아닌 게 되어 버리니까 죄는 성과를 낼 수도 없어요. 모든 성과는 예수님이 은혜로 주신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수족관의 물은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열심히 해서 햇빛 얻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냥 주시는 거잖아요. 주께서 주심의 연속성을 유지 하려면 나는 주시는 은혜에 전혀 기여 하지 못했음을 날마다 인정해야 되요. 스스로 내가 잘나서 오늘 하루도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되요.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성추행을 하거든 주께서 성추행 당하게 하셨고 나는 아니요라고 말 할 수 있는 낮아진 자리에 있음을 확인 하라고 아니요라고 이야기하고 지난 후에도 아니라고 한 것을 자랑 질 하지도 말고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신 거에요. 그래서 인생은 절대 후회해선 안되요. 그 때 그 수준에서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작은 봉우리 산 하나 정복 했다고 자랑 질 하는 것. 그런 미련 한 짓도 주께서 죄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순간순간 승리했다고 까부는 짓도 한번 해 봐야 되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 천지가 주님을 쫓아 낸 세상인데 뭐를 더 기대 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세상을 겁을 내고 할 말 못하고 그런 비겁한 모습인 것을 날마다 확인 됩니다. 주께서 입을 열어 이야기 하게 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자기 의가 되지 않게 하시고 자랑 질이 아닌 주께서 내 자신을 깨닫게 하시는 기회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