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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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8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창세기 31:38-42
(31: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1: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31: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31: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31: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라반에 대한 항변은 정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복의 근원으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복음의 근원인 야곱이 복의 근원이 못되는 사람과 같은 레벨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라반의 주장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반은 지금 자신의 영역에 야곱이 들어온 것으로 여깁니다.
즉 라반은 야곱이 들어오기 전이나 들어오기 후에나 자기 것이 축나는 경우를 용납지 않겠다는 의식을 유지하는데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라반이 자신의 개인적 호신용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빔을 도적 맞았다는 것을 알고 7일 동안 야곱의 일행을 뒤쫓아옵니다. 이는 라반이 자기 소유성에 대해서는 끝까지 양보를 모르는 자라는 것을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자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정당한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항상 경제적 배경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래’ 또는 ‘합의’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집니다. 경제적 타협점에서 상호 논의가 된다는 것은 양쪽 다 바로 그런 관계선에서 자신을 규정받고 싶은 겁니다.
즉 인간이 자기 존재 규정은 타인과의 경제적 협상이 가능한 상대자라는 자리에서 성립되고 싶어합니다. 이는 곧 ‘내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서 ‘자기됨’을 유지하려는 겁니다. 이런 경제적 의식 바닥에는, 나의 노동의 대가는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가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서 정의로움을 생각합니다. 내가 타인에 대해서 정의로운 자라는 것은 나의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내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겁니다. 문제는 과연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 소유 의식에 입각한 존재성을 인정하시겠느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차례나 하나님께서 야곱과 라반을 찾아오시는데, 여기에 대해서 야곱이나 라반이 왜 하나님께서 일부러 찾아오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31:13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다시 돌아감’은 그 지역을 다시 방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벧엘을 떠났을 때의 야곱의 가진 언약에 대한 이해도가, 다시 돌아올 때는 참으로 ‘복의 근원’다운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있어 이처럼 시간적 간격을 두고 ‘돌아옴’이 성립합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런 ‘돌아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6-7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에 성도보다 하나님께서 뭘 해야된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지 성도가 요청해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즉시 하나님은 성도에게 있어 아버지가 되시고 천국을 유산상속 받듯이 받게 됩니다. 추가적으로 인간이 변해야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가 훌륭한 삶을 사는지 그 여부를 보고 천국행은 나중에 결정하겠다는 것도 없습니다. 전혀 시간적 간격이 없습니다.
반면에 오늘 창세기에서의 야곱은 ‘다시 돌아옴’이 성립합니다. 벧엘을 떠날 때, 분명 그는 복의 근원이고, 다시 벧엘로 돌아올 때도 복의 근원자 맞습니다. 하지만 떠날 때 그 야곱으로 돌아오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적어도 세상 사람과 다른 요소를 품고 돌아와야 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나 아버지인 이삭은 외부인이 그들을 함부로 했을 때 가차없는 저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애굽의 바로왕이 아브라함의 부인을 건드렸을 때에 그 집안에 큰 재앙이 떨어질 바로왕이 질겁을 하고 많은 선물을 아브라함에게 제공하고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그 뒤, 블레셋 땅 그랄의 추장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가정을 건드렸을 때에도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복의 근원인 야곱에 대해서 라반이 함부로 대해서 그다지 큰 기이한 재앙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아직도 야곱은 ‘언약이 제공한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반 사람들처럼 자기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얻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써먹고 있습니다.
즉 외삼촌이 나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주지 않았기에 하나님마저 내 편이 되어 삼촌으로 하여금 내 것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말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자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복의 근원자인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사무엘하 16:12에 보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타인으로 하여금 나에게 저주를 퍼붓는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는 그런 저주가 복으로 바뀌어지는 원칙이 가동 중이라는 겁니다. 복의 근원자는 결코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이 복의 근원을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라반같은 일반인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과거에 자신이 행동했던 그것을 원인으로 삼지만 복의 근원이나 성도는 과거에 자신의 행위에 따라 현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신들이 만나지 못한 미래의 결정이 원인이 되어 그 결정에 이끌리시는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은 그 미래의 하나님을 만나 제대로 ‘복의 근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세상의 죄가 자기 안으로 다 들어와 부풀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갑자스레 라반을 떠나게 하시고,(창 31:13) 라반은 이점에 대해서 격분케 해서 서로의 정당성에 대해 만나 따지도록 주선한 겁니다. 야곱이 현재 어느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신약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우수한 인물로 간주하도록 여생을 길게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세상 사람보다 조금도 더 나을 것이 없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세상을 더 살게 합니다. “이런 저도 구원을 다 받는구요”라는 감격은 십자가 피 앞에서 쏟아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안에 마음껏 죄가 들어와 부풀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자신의 과거 행적에 근거해서 구원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24강-창 31장 38-42절(야곱의 항변)1801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38-42절입니다. 구약성경 46페이지입니다. 창 31:38-42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오늘 본문 내용은 상당히 쉬운 내용이라고 얼른 보면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내용이 아니고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쉬운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설명하게 되면 무슨 요소를 빼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보고 가라고 했던 그 요소가 다 빠져나가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창세기 31장에 요셉이 야반도주하듯이 아무 상의 없이 가족 데리고 나왔을 때에 우리는 이것이 야곱 본인의 결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성경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창세기 31장 3절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나가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나가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무슨 요소를 빼야 되느냐 하면, 창세기 31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밤에 누굴 찾아오느냐 하면, 24절에도 나와 있지만,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도 찾아오고 라반에게도 찾아왔어요.
그 두 가지 요소, 하나님의 개입을 빼버리고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삼촌과 외삼촌의 만남이라면 방금 읽었던 이 본문 내용은 굉장히 쉽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외삼촌, 열 번이나 내 품삯을 위반해가면서 외삼촌 재산으로 다 빼돌렸잖아요. 고생은 나만 죽도로 했지요. 고생한 것 조목조목 알려드릴까요?” 하고 죽 오늘 본문에 나와 있어요.
“여름에도, 겨울에도, 낮이고, 밤이고, 조금이라도 외삼촌의 양을 내 것으로 넘기지 않고 외삼촌에게 손해가 가지 않도록 애를 썼습니다. 이 충성심을 외삼촌이 좀 알아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외삼촌이 나를 속여서 결혼을 두 번이나 하게 해서 14년 동안 봉사했고, 또 양떼를 위해서 20년 동안 봉사했는데, (42절에 보면) 그런 것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빈손으로 나를 쫓아내듯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수고의 값을 감찰하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거기에 대해서 외삼촌이 감동을 먹어서 “미안하다. 내가 사실은 너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내 딸과 인사나 하려고 찾아왔다. 네 것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경해석 반대로 하신 거예요. 왜 반대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밤중에 나타난 그 의의를 여기서 찾을 수가 없어요. 인사 안하고 헤어지라고 누구 부추겼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렇게 했으면 앞길이 평탄해야 돼요. 아무 문제가 없어야 됩니다.
야곱은 인사하면서 이런 저런 계산할 것 다 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그냥 나가라고 했기에 그냥 나갔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이 사단을 일으키고, 외삼촌은 7일 동안이나 ‘이제 너 죽었다.’ 하면서 따라왔고 만나서 하는 말이 협박을 했어요. 31장 29절에 보면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손에 있”다고 합니다. 죽여 버린다 그 말이지요.
“이게 어디서 못 배워먹은 버릇을……, 이랬지만 어젯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내가 안 건드렸다.” 야곱도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내 것 챙긴다고.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인사도 안하고 왜 이렇게 급하게 가게 했는지 그 이유도 의미가 없어지고요.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나타나서 건드리지 말라고 해놓고는 만나도록 주선하는 것, 그 의미도 들어갈 수가 없고, 그냥 인간 대 인간의 만남가지고 남자 대 남자의 의리 계산하는 것,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되어버리면 여기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복음을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거래와 합의에 의해서만 인간이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경제적 만남이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경제적 만남 빼놓으면 만날 이유가 없어요. 거래가 뭡니까? 만남을 통해서 거래가 성사되는데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냥 경제적 만남이에요.
“삼촌이 안주니 내가 알아서 챙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질 것 따지자는 경제적 만남으로 해서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챙겨서 자기 노동의 대가를 얻어서 헤어졌다고, 성경에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뭘 우리가 놓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급하게 가라고 할 때 13절에 “나는 벧엘이 하나님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돌아가라는 겁니다. 옛날 그 밤에 너에게 사다리가 내려와서 계시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본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돌아갈 때 이 몸, 이 정신, 사고방식 가지고 그냥 돌아갑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의 근원을 주실 때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부터 야곱이 뭔가 큰 착각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천사로 하여금 야곱을 지목했으면 지목해놓고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을 만나게 하는 것은 갔을 때의 야곱과 돌아올 때의 야곱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께서는 엄마의 고향에 보냈고 이제 “돌아와”라고 했을 때는 처음에 하나님을 만났던 그 인간형이 아닌 다른 인간형으로 달라진 상태, 그걸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상태가 되는데 있어서 라반과의 만남은 필수적인 겁니다. 라반과의 만남이 야곱의 인간성을 완전히 딴 인간으로 바꾸는 필수요건인 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내야 돼요. 라반을 안 만났으면 야곱은 전혀 하나님의 벧엘 값을 못하는 거예요. 벧엘은 하나님의 문이거든요.
인격체 자체가 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동하는 문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저주받고 아브라함에게 잘해주면 복을 받는 그것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42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아비멜렉 추장이 건드렸다가 대대로 혼나잖아요.
야곱도 동일하게 건드리면 혼이 나는데 지금 라반은 야곱을 열 번이나 건드렸어요. 아무 혼이 나지 않습니다. 아직 야곱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존재자가 되지를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점이 상당히 난해하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뭔가 돌아가는 것이 있어요.
처음의 인간과 달라지면서 돌아갑니다. 야곱이 대표적인 거지요. 야곱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고 복의 근원이면서도 뭔가 거쳐야 된다는 겁니다. 인생사를 거쳐야 돼요. 인생사를 거치면서 복의 근원답게, 정말 너 건드리면 혼난다고 할 정도의 존재자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존재자가 되려면 여기에 시간적인 요소가 꼭 필요해요. 많은 세월이 흘러야 됩니다. 야곱이 자신의 130년 인생살이를 이야기할 때 나그네인생 이라고 했잖아요. 그게 헛된 인생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와 제가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갈라디아서 4장 6, 7절의 말씀을 가만 보게 되면,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없어요. 어떤 시간요소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 말씀, 성령을 받아서 아바아버지라 불렀으니 이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잇는다. 네가 나에게 할 것도 없고 변화될 것도 없어요.
아버지를 안 부르면 구원 안 해준다는 그런 것도 없어요. 지금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그 원인제공을 어디서 하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성도에게 그냥 성령을 줘서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부르기 싫더라도 부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어요. 뭘 한 게 없어요.
성도입장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 천국을 내 나라로 상속받는 혜택까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받게 됩니다. 신약에 오면 시간요소가 없는 반면에, 어디서 무슨 짓들을 하든지 간에 묻지 않아요.
아들 됨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조립해서 뒤집어씌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안 그래요. 구약에서 야곱 같은 경우에는 뭔가 겪어야 되고 아직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다. 뭔가 겪어야 되고 숱한 시련을 당해야 되고 그만큼 세월이 소모되어야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고, 그러한 현상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구약 치우고 신약만 들여다보겠습니다. 신약 좋네. 성령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 오늘 죽으나 20년 후에 죽으나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면 참 편리한데요.’라고 될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그냥 쉽게 받아주는 이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쉽게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대가가 뭐냐?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바로 야곱의 경우입니다. 야곱의 경우에서 야곱은 지금 외부에서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계속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아가 계속 나와요. 대응할 필요가 없는데 계속 대응합니다.
상종할 필요도 없는데 계속 “나는 정당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잖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 쪽에서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고 구질구질한, 진짜 세속적으로 품고 있는 인간성이 그대로 라반을 만나면서 마구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가 훔친 것도 모르고 되게 큰 소리 쳤어요. “내 아내 집에 들어가 봤지요? 드라빔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잘못 한 것 없지요.” 하고 마구 삼촌에게 대듭니다. 이 야곱의 사고방식이 그야말로 생성인데요. 전혀 야곱 건드려 봤자 저주 안 받을 것 같아요. 왜? 똑같은 인간이니까. 자아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
지금 야곱이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벧엘로 다시 돌아오라 할 때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미래에 원인이 있어요. 야곱이 모르는 것이 뭐냐? 야곱과 라반을 비교해 봅시다. 라반은 항상 말을 할 때에, 네가 나에게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하는 주장의 정당성은 과거에 내가 이렇게 행했으니까 이 정도는 내가 대우받아야 되고, 이 정도는 그러한 처신을 해도 마땅하다는 식으로 과거가 원인이 되어서 지금의 결과와 결부를 시켜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오라고 할 때는, 그 벧엘에서 있었던 사건이 뭐냐? 야곱이 예상한 일이 아닙니다. 야곱이 예상하지 못한 일, 다시 말해서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천사가 자기에게 집중해서 복의 근원답게 해주겠다는 이것은 야곱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가 원인이 되어서 야곱으로 하여금 강제로 끌고 가는 구조가 되어 있어요.
복의 근원이 아니고 저주받을 인간들은 항상 과거에 자기가 행했던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의 잘남과 옳음과 자기의 정당성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셈이 됩니다. 그게 경제적 만남이에요. 그게 일상의 인간과 인간의 만남입니다. 그렇고 그런 만남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하게 이 세상 살면서 매일같이 경험하는 거예요.
양보할 것 양보하고, 타협할 것 타협하고. 그러나 야곱이 복의 근원되는 것은 양보 문제도 아니고 타협문제도 아니에요. 야곱이 복의 근원을 따낼 때는 형을 속인 거예요.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확정지어줬다는 말은, 로마서 9장에서 그 실체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창세전부터 야곱이 어떤 짓거리를 하든지 묻거나 따지지 않고 하늘 쪽에서 원인을 가지고 야곱을 일방적으로 천국가라고, 사랑받는다고 복의 근원으로 확정지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야곱이 인생을 살면서 뭐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라반 같은 똑같은 유의 인간으로 머물면 안돼요.
신앙생활 하면서 인간이 자기로부터 자기를 떨어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 나도 남에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이유 있다. 이게 문제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라반으로 하여금 갑자기 떠나도록 한 야곱을 쫒아오게 해서 만나게 하는 것은 “야곱아, 그런 식으로 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백날 돌아와야 소용없어요.
너를 쫒아오는 라반 사고방식이나 현재 네가 유지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복의 근원이에요? 이삭 같은 경우는 이렇습니다. 이삭은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서 따로 누굴 만나고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강제로 아버지가 자기를 묶어놓고 그냥 죽여 버린 거예요. 모리아 산에서 죽여 버린 겁니다.
상당히 죽음의 의미가 단출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전쟁에서도 혼났지요. 318명 가지고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죽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내 자식이 없어야 된다는 것, 자식 없이 살아야 되는데, 아내의 태가 죽었는데 거기서 애가 나왔다는 그것,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또렷하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경험하고 있어요. 신기하게 자기 몸속에 죽음의 흔적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에는 생성이에요.
야곱은 처음부터 죽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죽은데서 살아나고 없는데서 있다 하는 그 엄청난, 최종적인 복의 근원의 상태가, 지금 보통 인간하고 다를 바 없는, 아니 보통 인간보다 더 세속적인 인간하고는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외삼촌 집에 보냈지요. 보내니까 자기하고 만만치 않은 같은 급의 사기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외삼촌이에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뒤늦게 계산하자 하니까 외삼촌이 자기 양 다 빼돌리고 조카에게는 한 마리도 안주려고 수작부리는 것 봤지요.
같은 급이라니까요. 같은 친척이니까 같은 급이 되겠지요. 같은 급을 만난 거예요. 같은 급의 라반의 그 모습이 곧 제 2의 야곱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라반의 두 딸 보세요. 그게 복의 근원에 부합되는 여자의 모습입니까? 어떻게도 그렇게 dna가 자기 아버지를 딱 닮았는지 그 두 딸이 지고는 못살아요.
기어이 언니를 추월해서 남편 사랑 따내려 하고, 자식도 언니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쓰고, 처음부터 야곱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시녀까지 총동원시켜서 기어이 자식 낳겠다고 설쳐대는 것이 라헬부터에요. 라헬행동, 레아행동, 라반행동, 전부 다 과거에 내가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나에게 더 좋게 확보된다는 이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 사고방식 속에서 야곱은 죽음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복의 근원에 부합되지 않는 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 끊어져도 마땅한, 저주받아도 마땅한 죽음의 상태라는 것을 라반의 집에서 혹독하게 경험했고, 그러면서도 본인도 그 집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정신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이 두 번이나 찾아왔지만 그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빼놓고 이야기를 해요. 둘 다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내 것 내놔라” 하는 그 쪽에다 벧엘의 하나님을 써먹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만큼 노동했으니까, “오, 하나님이여, 제가 노동한 만큼 대가 못 받았으니까 오, 살아계신 축복의 하나님이여! 제가 노동한 대가만큼은 취해야 되지 않습니까?”에 언약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써먹을 정도로 정신머리가 그 정도밖에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멈추고 다시 신약의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줘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필요 없이 성령 받으니까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이제 천국 갈 날만 남았어요. 천국을 선물로 받을 날만 남아 있습니다.
신나지요. 기분 좋지요. 우리는 신약시대니까. 구약처럼 고생할 일 없잖아요. 그런데 이걸 생각해 봐야 돼요. ‘왜 우리는 야곱처럼 고생을 안 하고 그냥 구원받았지?’ 그 점을 생각해 보라는 말이지요.
‘왜 나는 착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고생을 왜 해야 되지? 그분이 고생할 분도 아닌데 왜 내 대신 고생이 되어야 내가 구원을 받지? 나도 고생할 용의가 되어 있고 나도 바르게 할 용의가 되어 있는데 왜 예수님이 내 대신 내 자리에 오셔서 수모와 모든 고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뭐지?’ 이걸 생각해 봐야 돼요.
그 이유가 창세기에서 밝혀집니다. ‘기분 좋다. 수월하다. 감사합니다. 끝’ 이게 아니라 ‘왜 나 때문에 다른 분이 고생해야 되지?’가 뭐냐? 복의 근원한테는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12절에 보면, 거기에 다윗이 나오는데 다윗도 야곱처럼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에게 어떤 중요한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구심점 놓치지 말라고 했지요. 제가 하는 말은 언약의 일관성을 놓치면 안돼요. 구심점은 일관성으로 채워져야 되고 그 일관성은 사무엘하 16장 12절에 나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다윗이 시므이에게 저주를 받아요. 시므이가 계속 야곱에게 이젠 권력도 없다고 함부로 욕을 합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저 시므이를 통해서 나에게 욕을 하게 한 것은 욕을 하면 할수록 그 저주가 복으로 전환된다는 겁니다. 이게 복의 근원자에게만, 성도지요, 복의근원자 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이상한 원칙이에요. 아주 기이한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나를 인하여 욕 얻어먹거든 이게 복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나오지요. 물론 ‘이것들아’는 없지만요.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간단하게 이겁니다. 야곱은 복의 근원되기 전에 자기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다 부풀어야 돼요. 그냥 돌아가면 안돼요.
사람이 자기가 죄 지을 수 있는데 그걸 그냥 참는다? 안돼요. 그것은 위선자 됩니다. 그것은 성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성령 주시고 그냥 데려갈 수도 있어요. 때가 되면. 그러나 그냥 안 데려가시는 이유는 계속해서 고무풍선에 바람 넣듯이 뭔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전부 다 내 안에 쓸어담아야 돼요.
그리고 그 죄가 어떻게 의로 변하는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구약의 야곱 같은 경우는 얍복강가에서 직접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를 봐야 돼요. 하나님이 어떤 입장에서 죄란 죄는 죄다 지어서 이제는 내 죄 때문에 무거워서 운신을 못할 정도로, ‘나 같은 인간은 뭐, 세상에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어.’라는 것을 살아생전에 다 경험을 해서…….
이걸 쉽게 말해서, 풍선에 바람 넣듯이 계속 사람을 만나야 돼요. 만나서 저쪽 인간이나 내 쪽 인간이나 우열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지저분하고 지저분한 인간, 누가 더 지저분한가, 그 정도로 죄를 전부 다 당겨서 풍선처럼 터질 듯이 키워줘야 됩니다.
이러면 갈라디아서 4장 6절의 그 말씀이 더욱더 고맙고 감사가, 그냥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고마움과 감사가 너무나 커지면서 가게 돼요. 어떤 분은 성경을 통독한다고, 성경의 전체구조를 안다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생각해 보세요. 성경공부 참석했다. 예배 참석했다. 뭘 챙기느냐 하면, 내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챙겨버리면 이것은 죄를 챙긴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잖아요.
이것은 맨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인간입니다. 야곱은 라반을 만나서 ……, 다음 시간에 나옵니다만 다시 언약을 맺어요. 이질적인 요소, 다시 말해서 전혀 복이 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야곱 속에 파급되어야 되고, 스며들어야 되고, 그것이 충만해야 돼요.
나는 정말 구제불능, 남들 못지않게 악랄한 존재,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면 천국 버려놓는다. 그런데 보내주셨다. 왜? 원인은, 내가 모르는 미래의 원인, 다른 말로 하늘의 원인이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이중적인 요소, 죄를 의로 바꾸시는 요소가 양쪽에 다 품어져 있을 때 이걸 가지고 야곱을 통해서 더욱 더 확대된, 더 심오한 의미가 담긴 복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 이삭의 하나님, 자기가 원치 않는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전달하는 것. 야곱의 하나님, 죄란 죄는 남들 못지않게……, 야곱의 이름 자체가 빼앗는 자, 속이는 자, 쟁취하는 자라는 뜻인데 그 이름에 걸맞게 야곱은 남들 못지않게 지고는 못사는 자기의 속내를 유감없이 팽팽하게 부풀려서 폭발직전으로 만듭니다.
그러고 난 뒤에 직접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의 그 본성 절대로 어디 안갑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달려들고 씨름합니다. 아,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4장 6절, 7절을 다시 봐야 돼요. 세상에 이런 인간, 아무것도 안 해줘도 되는 인간을, 아바 아버지를 직접 십자가로 마주보게 하시고 저 피가 더러운 너의 죄를 씻기 위한 깨끗한 피라는 것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이 구심점, 일관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세상 어떤 경우, 누굴 만나도 이 변함없는 사랑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보다 많이 알고, 많이 착한 것이 하나님 만나는데 유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옥 가는데 유리한 것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여, 천국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가 더 부풀어진다는 복의 원리를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