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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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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8년 1월 1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1:30-37
(31: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31: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1: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1: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1: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1: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1: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라반이 아무리 야곱을 추격해도 따라잡을 수는 있으나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는 곧 야곱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한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개입하셔서 구체화 시켜 나갑니다. 아브라함 때나 이삭의 때는, 복의 근원인 언약사람을 함무로 건드렸다가 그들에게 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즉 복의 근원자는 저주의 발생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 때에 와서 언약은 어떤 더 깊은 내막을 보여주게 될까요? 그것은 야곱의 라반의 만남에서 드러나듯이, 인간 정신 세계의 한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편에 서 있는 야곱의 가족은 외삼촌 라반의 만남에서 기존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바로 ‘속임수의 승리’입니다. 훔치는 것과 속이는 것은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나쁜 짓으로 간주됩니다. 나쁜 짓은 필히 저주로 이어지고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신의 정의로움이라고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은 실제로 언약에 속한 가족을 만나면서 오류임이 드러납니다.
즉 그동안 인간들은 언약을 알지 못한 채 자체적인 선과 악의 논리로서 정신세계를 형성시켜 왔습니다. 이들 비-언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의 보존이었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수호신이라는 양상으로 최종 귀결됩니다. 당연히 이런 정신 환경 속에서 라헬이 커왔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드라빔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과연 딸 라헬에게도 역시 소중한 신으로 작용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판정은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결국 라반의 신은 딸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드라빔이 라헬의 소유가 되도록 후원했다는 결론이 납니다. “아버지의 신을 훔칠 수 있다” 생각을 라헬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훔친다’는 분명 나쁜 짓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나쁜 짓’을 허락하십니다. 이는 앞으로 라헬 가정이 나타낼 세상은 기존 세상에서 탈주해서 생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드라빔의 세계를 갖고 도주했다는 말은, 이 탈출을 통해서 언약의 위상은 기존의 신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언약이 없는 정신세계에서 감금되어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충분히 그런 세계의 정신과 신을 농락해도 되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라헬과 한 부부이면서도 사태파악을 일방적으로 정리하면서 외삼촌 앞에서 “우리 집안의 그 누구도 외삼촌의 물건을 가져 온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야곱에게는 거짓말도 없고 도적질도 없는 겁니다. 실제로는 아내가 도적질에다가 아버지를 속인 거짓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 형편인데도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도적질과 속이는 쪽이 당당하게 최후 승리하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내막을 언약을 통해서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결코 언약의 세계는 이 세상은 그 어떤 공통요소도 없고 동질성도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반대적 성향으로 이 세상에 작용합니다.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은 언약쪽에서는 “아니오”가 되고, 이 세상에서 “아니오”는 언약쪽에서는 “옳아요”가 됩니다. 둘 중에 누가 미친것일까요? 이 점은 출애굽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함부로 건드리면서 재앙이 주어지듯이, 야곱 언약의 산물인 히브리인들을 애굽이 건드리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애굽나라는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평소에 살던 대로 하던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비해 자신들이 저주받아야 합당한 상대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약이 꿈틀거립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통해서 애굽인들의 신을 농락합니다.
애굽의 신들은 대자연의 안정성을 근거로 마련된 겁니다. 그 안정적이라고 간주되는 대자연에 흔들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강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가 밥상까지 올라오고, 이가 미세먼지처럼 들끊고, 파리가 난무하고, 밭에 독종이 임해서 밭에 내놓은 가축들은 다 죽고, 하늘에서 죽으라고 우박이 떨어지고, 온 애굽 천지가 메뚜기 세상이 되고, 갑자기 멀쩡했던 태양이 사흘 동안 사라지고, 그리고 애굽인들 가정의 모든 맏이 아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살합니다.
바로 그런 일이 ‘히브리 탈출기’가 됩니다. 즉 애굽의 정신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이 탈출과정에서 히브리들은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즉 구원이란 과정입니다.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들의 정신 세계에 구멍을 어떤 식으로 뚫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정신을 역으로 지적하시면서 구멍을 냅니다. 그들의 반격은 곧 그들의 정신세계의 한계, 곧 그들 세계에 납득되고 통용되는 신입니다. 그들의 신적 인식에 의해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는 10가지 재앙은 ‘자연세계’가 미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인간들이 미쳤다고 봅니다. 자연의 돌발적인 변화는 그만큼 인간의 기존 세계가 저주의 세계임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자연세계는 다음과 같은 온순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 언약과 기존의 인간 세계의 만남은 상충되는 기준으로 대치됩니다.
원래 언약을 받은 야곱의 분노와는 달리, 언약에 있어 야곱의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언약가족을 도와주는지는 라헬이 알고 있습니다. 즉 무엇을 훔쳐야 하고 어떤 식으로 거짓말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지조차 전혀 양심의 가책이란 없습니다. 바로 그 양심으로부터 탈출이요 도주가 되게 하는 것이 언약의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영적 세계란 이처럼 정신 세계의 막다름마저 정면돌파하여 구멍을 뚫어야 보이는 세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가 기존 인간세계의 산물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3강-창 31장 30-37절(라반의 추격)180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30-37절입니다. 구약성경 46페이지입니다. 창 31:30-37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쌔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 말씀은 흔히 보게 되는 일상적인, 조카네와 삼촌네의 갈등, 기싸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이 조카네가 보통 조카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고 그 시대의 복의 근원으로서 작용하는 조카, 야곱집입니다. 복의 근원의 위력이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은 이미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벌써 하나님께서 그 영향력을 보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조카 롯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은 다 불 가운데 멸망했지만 롯만은 거기서 건져냄을 당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렸다가는 그 대국 애굽의 바로왕 집안이 거덜 났고 아비멜렉 지역의 작은 나라들도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그 집안이 임신을 못하고 태가 닫히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이 복의 근원이지요. 그 사실을 이삭도 알고 야곱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복의 근원자가 자부심을 갖는 것은, 보통 세상 사람들은 사람하고 상대하지만 복의 근원은 하나님의 직접관리 하에 놓여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이 복의 근원자를 건드린다는 것은 누굴 건드리느냐 하면, 참, 겁 없이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 돼요.
이런 복의 근원의 후손들, 야곱의 후손들이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열 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열두지파로 구성된 히브리인을 바로의 나라가, 애굽나라가 건드렸더니만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나라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일어난 거지요. 세상 나라의 결집력이라는 것은 대단하거든요.
그 힘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강력한 위협감을 줄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힘으로 작용하고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2절에 보면 야곱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기를,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외삼촌이 섬기고 신봉하는 그 신을 본문 34, 35절에 ‘드라빔’이라 되어 있어요. 드라빔이라 하는 것은 그 당시 토착민들이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칠 때 사용했던 작은 우상 같은 겁니다. 다룰 수 있는 우상. 그런데 외삼촌이 지금 떠나가고 있는 야곱조카네를 급히 뒤 따라와서 “다른 것은 되는데 왜 내 신을 훔쳐가느냐, 라고 하니까 야곱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그 삼촌의 신이 우리한테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그냥 죽이소서.” 이런 강력한 자신감을 드러낼 뿐 아니라, 단순히 자신감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가족이라도 자기를 수호하는 신을 건드리면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할 정도로 이 드라빔은 외삼촌 라반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야곱의 언약이라는 것,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실제 야곱과 더불어서 그 시대에 반영되었을 때에 그 시대가 어떤 속내, 내막이 들춰지느냐에 주목해야 됩니다. 언약을 갖고 있는 사람을 건드리면 다친다.
그 정도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랬어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만났을 때 아비멜렉이 겁을 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언약을 건드리고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을 건드리면 다친다, 저주받는다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왜 그들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가, 까지 언약과 상대했던 그 상대자의 본질이 구체화되고 내막이 깊이 있고 더 노출되는 그런 작용도 이 언약이 수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이유 없이 저주받는다, 가 아니라 ‘저주를 받을 만하니 저주받는구나.’ 하는 그 내막도 같이 노출되는 겁니다. 언약이 가는 곳에. 이러니 저주받지, 그런 게 등장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이야기하기 전에, 구약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주라고 이야기하고 신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주인입니다. 만유의 주니까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주의 나라와 주의 나라가 아닌 나라, 악마의 나라죠, 주의 나라와 주의 나라 아닌 나라가 무심코 마주했을 때, 만났을 때 서로 섞여서 어떠한 현상들을 보여주느냐, 를 가지고 ‘아하, 언약이 없는 세상은 이런 내막을 갖고 있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언약과 언약 아닌 것 둘이 맞닥뜨렸을 때 언약을 만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흔히 평온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가 자기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내부가 들통이 나는 그런 계기가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 과정을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말씀 드리는 것이 좋지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언약이 없는 세계에서는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이야기해요.
30절에 보면,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삼촌이 야곱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 네 집에 가는 것은 좋다마는, 말리지 않는다마는 어찌 내 하나님을, 내 신을 도적질 하느냐? 왜 내가 신봉하는 신을 도적질했느냐?”라고 이야기했을 때 자, 제 삼자가 봤을 때 라반이 하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우리는 아무도 안 가져갔습니다.”하는 야곱의 말이 맞는지, 어느 쪽이 맞느냐?
이것은 삼촌 주장이 맞아요. 맞고 야곱은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하여튼 틀린 말을 하는 거예요. 언약이 없는 세계에서는 언약이 없이 통용되는 세계에서의 그 진리라는 것, 참이라는 것, 옳다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안의 세계에 들어오면 모조리 그게 오류고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세계지요. 라헬은 아버지의 신, 드라빔을 도적질한 것만이 아니에요. 수색과정에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도적질하고 아버지의 것을 속임으로서 비로소 이 라헬이 속한 세계, 다시 말해서 야곱의 본처, 야곱의 세계는 언약이 없는 세계에서 적용되는 옳음과 그름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아주 특이한 세계가 됩니다.
훔쳤으니까 도적질이고 속였으니까 사기지요. 그런데 그 사기질과 도적질이 언약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이고, 그게 옳은 행위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 없는 세계에서 어찌 그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야곱의 가정은 부부사기단이에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땅에서 바르게 살면 그 바르게 산 것이 천국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야곱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해요. 야곱언약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 영적세계, 진짜 주님의 세계를 모르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인간의 언약 없는, 그러니까 지옥 가는 세계지요, 사탄이 지배하는 악의 세계에서 천국을 상상할 때 기껏 그 정도로 상상하는 겁니다. 그들은 신을 만들어내고 그 신 앞에서 나름대로 자신을 반듯하게, 경건하게, 거룩하게,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왜? 바르게 사는 그것이 복을 유발하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바르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 하는 그것이 오류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옥 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지금 라헬은 어느 세계에 속하느냐? 언약의 세계, 언약 편에 속한 식구입니다.
그 식구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라반의 가족을 떠납니다. 라반이 뭐라고 하느냐? “왜 도주하느냐? 왜 도망치느냐?” 그렇게 된 거예요. 도주한다는 이것도 잘못된 말이에요. 그들 보기에 도망치고 도주하는 것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떠났으니까. 재산은 챙겨서. 인사도 없이 갔거든요. 20동안 같이 살아놓고 인사도 없이 갔다는 말이지요.
도망이나 도주라는 것은 그들 기준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거거든요. 그런데 언약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도주에요. 구원은 탈출입니다. 사람들이 구원, 구원, 천당, 천당, 영생, 영생 하지만 절대로 사람들이 구원될 수 없고, 영생 얻을 수 없고, 천국갈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여기서 도망쳐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탈출하는 즐거움이 없어서 문제에요. 왜 탈출하는 즐거움이 없느냐 하면, 지금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지금 자기가 생각하는 이 삶이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해서 분명하고 제대로 된 기준을 지니고 있으니까 자기 자신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온 대로 살 수밖에 없기에 살아온 것에 대해서 자기정당화를 갖고 있거든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결론은 내가 옳다는 겁니다. 이것은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그 조시로 죽 가요. 그냥 보조 맞춰서 죽 간다고요. 그런데 언약이 와버리면 ‘착한 사람 건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깨끗한 사람, 나쁜 짓 안한 사람 천국 가겠지?’ 아니! ‘더러운 사람 지옥 가겠지?’ 아니!
이것은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도발적이라, 도발적인 기준이 같이 결합이 됩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신을 훔칩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정신이에요. 그 정신을 훔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정신을 훔친다는 말은 그걸 훔칠 수 있는 위상과 위치, 만약 그런 특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상대방의 정신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상대방의 정신에 말려들지 않는, 더 위에서 그 정신을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육신의 노예는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되어서 육신의 노예는 될 수 있지만 언약의 사람은 이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정신의 노예가 될 수가 없어요. 언약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그 정신을 농락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 언약이에요. 이것이 출애굽에 나옵니다.
자꾸 출애굽을 언급하는 이유는,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열 두 지파가 출애굽사건의 주요 핵심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나중에 요셉까지 나옵니다. 요셉까지 나오는 이 열 두 지파 이름을 출애굽 1장 1절에서 왜 거론하느냐? 언약밖에 있는 이방민족, 야곱의 가족이 아닌 자들이 옛날 아브라함과 사라를 건드렸다고 혼쭐났잖아요. 이삭의 아내를 건드렸다가 아비멜렉이 혼쭐났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언약의 핵심체인 이 야곱의 가족들을 거대한 제국 애굽이 건드렸다가 혼쭐 나는 겁니다. 그냥 혼났다고 하면 안돼요. 복의 근원이 등장하게 되면 그 세계의 비언약적 요소, 저주받을 이유나 타당성들이 하나 둘 씩 노출되는 겁니다. 출애굽은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렸다. 네가 남들 보기에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그 속에는 야곱의 언약 들었다.” 그 야곱의 언약이 뭐냐? 그걸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곱의 언약이 뭐냐는 거예요. 야곱의 언약이 뭐 길래 단독적으로, 내부적으로 언약의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쪽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정신의 집대성이고 막다른 정점이에요. 그쪽의 신을 함부로 다룬다는 것은 그쪽의 정신의 한계를 다 노출시키는 겁니다. 너의 정신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그 정신의 외형체, 외형물, 다시 말해서 정신의 얼굴, 그 정신의 얼굴이 드라빔이라는 물체입니다.
그 물체를 라헬이 훔쳐왔어요. 그냥 조용히 떠나면 되잖아요. 또 친정집의 비싼 물건들도 많았을 것이잖아요. 딸은 친정에 오면 좋은 것은 다 가져가잖아요. 홈쇼핑으로 택배 배달시키고. 좋은 것도 많은데 정신의 외형물체, 그 드라빔을 왜 가져가느냐 그 말이지요. 이게 라헬이 언약편에 속한 식구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에는 한 식구였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차등이 나는, 차이나는 두 개의 정신이 이제 분리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도입니까? 몇 명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분이 성도에요? 성도라면 세상 정신의 눌리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 육체의 노동의 대가는 줄 수 있어요. 그래야 돈을 버니까. 하지만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다는 이것은 전혀 성도답지 않은 겁니다.
정신을 뚫어야 영이 되지요. 정신의 한계선에 도달해야 거기가 바로 영의 세계, 언약의 세계, 영생의 천국이 마중 나오게 되어 있거든요. 정면 돌파해야 돼요. 세상정신에 대해서 구멍을 뚫어버려야 돼요. 총 쏘듯이 구멍 뚫어 버려야 돼요. 아예 귀순해야 됩니다. 성경 이야기가 뭡니까? 출애굽기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거든요.
스토리가 있기에 출애굽기를 사람들이 즐겨봅니다. 보고 한 마디씩 들 하는데. 출애굽기를 본 사람은 누구나 다 이야기해요. 모세가 함께 있는 히브리백성을 바로왕이 안 보내줬다가 하늘에서 열 재앙이 떨어져서 난리도 아니었고 혼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로의 아들부터 모든 장자가 다 죽었다. 그제야 “나가거라!” 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다.
보통 그렇게들 이야기하거든요. 본 사람은 다 그렇게 이야기들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왜 갑자기 열 가지나 대자연의 변동이 일어났느냐를 생각해 보세요. 애굽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멀쩡한 해가 사라지고, 갑자기 메뚜기 떼가 오고, 어떻게 지팡이가 뱀이 되며, 강물이 어떻게 피가 되며, 개구리가 밥상까지 올라오게 되며, 미세먼지처럼 이가 온 천지에 들끓고, 온천지에 파리가 들끓고, 독종으로 들에 있는 가축들이 다 죽고, 겨울도 아닌데 우박이 떨어지고, 건강하게 지내던 족보를 이을 맏이가 다 죽어버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대자연이 미쳤다고 이야기 하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대자연이 미친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미쳤다. 너희들의 세계가 미친 거예요. 너희들의 세계가 미친 것에 대해서 주님의 나라에서 그들을 다루는, 대항하는 방법은 뭐냐? 그들 보기에 미친 대자연의 변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에 자연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난다면 그 자연은 어떤 모양새냐? 이사야 65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게 대자연이 미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탄적인 요소, 사탄의 정신머리가지고 살아가면서 자기는 정상이래요. 모든 인간들은 날 때부터 그런 것을 교육받습니다.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것은 이제 야곱의 가족을 통해서 보여줄 거예요. 도둑질 한 것이 도둑질이 아니고 사기 친 것이 사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나라에서 착하다, 의 극한지점이 하늘나라의 착함이 아니고 세상나라의 그 착함과 어짊과 친절함과 배려가 전부 다 구멍 뚫려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과격함 앞에서. 주님의 과격함, 선지자의 과격함, 야곱의 가족의 과격함에 의해서 숭숭 다 구멍 뚫려야 돼요. 성도십니까? 그렇다면 세상 정신에 같이 맞춰주려고 하지 마세요.
구멍을 뚫어야 돼요. 정신을 정면 돌파 하지 아니하면 영적세계의 공기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세계는 구경도 못합니다. 세상의 정신이 뭡니까? 착하게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이거잖아요. 이게 인간정신의 막다른 길이에요. 그것밖에 없어요. 내게 어느 쪽이 유리하냐, 그것만 따지는 거예요.
왜? 진짜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기 것 잃을까봐 벌벌 떠는 겁니다. 이 라반의 입장에서 드라빔이라 하는 것은 딸자식보다 더 귀한 거예요. 자기를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거니까. 언약 없는 세계에서는 딸자식 사랑, 부모사랑, 하지만 전부 다 나 위주에요. 나 우선이고, 나 부터에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라헬을 통해서 사기와 거짓말, 그리고 도둑질을 했지요. 도둑질을 했다. 어디서? 라헬이 성장해 온 아버지의 가정, 친정집에서 아버지가 뭘 중요하게 여기고 딸자식보다 뭘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그것을 아주 겁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훔칠 수 있다는 것은, 언약가족이 갖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특권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 여기에 매여서 벌벌 떨고 있었지? 이 드라빔이라는 신, 사람은 겁 안내면서 이 신 앞에서는 벌벌 떨고 있었잖아. 내가 그 신을 우습게 여기면서 한번 다뤄봐?’ 하고 훔쳐온 겁니다.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훔쳐왔다는 말은 이제는 아버지의 정신세계에 더 이상 속한 딸이 아닙니다, 하는 고백, 고백정도가 아니라 선언입니다.
자, 그러면 이 작업에 대해서 누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관여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관여했거든요.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언약은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다. 그 하나님이 개입하면서 뭘 들통 내느냐? 인간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32절을 다시 보게 되면,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라고 한 것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삼촌이 섬기는 드라빔이라는 것을 야곱도 알고 있어요.
삼촌은 자기가 드라빔에 의해서 그저 목숨을 부지한다, 겨우 연명한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야곱도 마찬가지고, 라헬도 마찬가지고, 그 신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은, 야곱이 아는 언약의 세계만이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는 그 죽음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와서 도착하는 자리가 야곱의 세계, 야곱언약의 세계라는 거예요.
언약의 세계에 가려면 기존의 그동안 나를 통치하고, 나를 지배하고, 나를 벌벌 떨게 했던 그 정신세계에 구멍을 뚫어야 된다는 그 이야기에요. 본인이 뚫을 수가 없고 주님이 뚫어주지요. 새언약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니까 십자가로 구멍을 뚫어주는 겁니다. 구멍을 뚫어주면 먹구름 사이에서 푸른 하늘이 보이듯이 비로소 숨통이 보이는 거예요.
아, 영적세계가 저기 있구나. 그동안 두 겹, 세 겹, 천 겹, 이 먹구름 같은 정신세계,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정신세계, 이 세계, 선악의 세계지요, 착하게 살아야 복이고 천당 가서 좋은 자리 앉는다는 그 세계, 나쁜 짓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그 세계, 그 세계를 우리는 계속 꾹꾹 누르면서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누르면서 그게 전부인줄 알고 너도 그렇게 하고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동안 아비멜렉이나 바로왕은 언약의 사람을 대할 때 언약의 실체를 대하지 못하고 ‘저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니까 내가 잘해주면 복 받겠지.’라는 기존의 자기정신에 통제받던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언약의 사람,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을 대했던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 와서 예수님한테 정성들여 빌고, 예수님한테 돈 바치고, 예수님한테 충성하면 복 받아서 천당 가겠지, 그게 꾸준히 이어오던, 자기가 못 벗어나던, 탈출 못했던, 도주 못했던, 구원되지 못했던 정신세계에요. 언약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결국 자기가 실컷 예수 믿었다 해도 거기서 나올 한마디는 그것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여, 내가 그 다지 나쁜 짓 안하고 살았잖아요.” 이게 라반의 세계에요. 나쁜 짓 하라고 그렇게 해도 기존의 악마, 신이 그걸 못하게 만들어요. ‘너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그것 때문에. 그래놓고 독감 비난하고, 대자연의 이상기후를 비난한다고요. “자연이 미쳤어.” 이러고 있다고요.
네가 미친 것은 모르고. 대자연은 천사 말 듣고 주의 말씀 듣습니다. 인간들이 미쳤어요. 다 같이 미쳤기 때문에 미친 줄도 몰라요. 미친 줄도 모르기 때문에 미친 자들 안에 예수님이 오니까 누가 미친 자가 되느냐 하면, 귀신들린 자라고 예수님을 미친 자라고 간주해서 그 따위 예수는 죽여도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래놓고도 여러분이 예수를 압니까? 예수를 알아요? 뭐 어떻게 예수를 섬기고 있습니까? 기존의 방식대로? 성의 다하여? 착하게 살면 예수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의 방식은 이중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는, 훔쳐라. 그리고 속여라. 네가 속이는데 내가 도와줄게. 그 방식이 뭐냐 하면, 34절입니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러니까 아버지의 신이 딸의 궁둥이 아래 깔려 있는 수준밖에 안 되는 겁니다. 세상 모든 철학과 과학이 성도의 엉덩이 밑에 깔려서 “이거 가짜다” 하는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내용들이 세상 철학과 과학이에요.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게 자기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처럼, 그게 자기의 전부인 것처럼, 그런 사고방식으로 교회 와서 성경을 백독 했다니, 천 독 했다니, 그래서 자기의 의로움을 따로 챙기고 뽑아내는 식으로, 내가 평생 동안 쌓아놓은 의가 천국을 뚫을 것이라는 대착각 속에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정신을 뚫고 통과한 사람은 세상정신과 반대로 살아가요. 그 반대로 살아가는 그 태도, 그게 자유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너희들은 통과할 수 없는 그 죽음을 이미 우리는 통과했다는 거예요. 죽음마저 통과했던 그 넉넉한 영혼, 자유로운 영혼. 우리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 세상을 향하여 써먹어야지요.
세상이 우리를 건드리면 그들은 지옥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더 티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언약을 잘 못 이해하고 다른 예수로 해버리면 그것은 예수가 아니라 자기를 지켜달라는 개인적인 드라빔이 되어버려요. 껍데기는 예수인데 포장 뜯어보면 드라빔이 들어 있어요. 우리 가족 잘되고, 나 잘되고.
용감한 라헬이 속여도 참 잘 속여요. 남편을 대리하거든요. 남편의 이름이 속이는 자거든요. 야곱의 대리자로서 라헬이 멋들어지게 속였어요. 그 남편의 그 여자라. 부부사기단. 도둑질도 마음대로 하고, 사기도 마음대로 치고. “아버지! 여기 없어요. 미안합니다.” 자기가 깔고 앉아놓고서.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언약을 모를 때의 정신세계를 농락대상으로 보는 이 넉넉한 영혼, 자유, 이것은 이미 기존세계에서, 착한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그 사탄의 협박과 공갈을 이미 찢어버리고 통과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혹시 반대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주님 앞에 책망 받을 일이 아니었습니까? 주의 뜻도 모르고, 주의 뜻을 빙자해서 내가 자신의 훌륭함과 우수함을 떠벌이는 식으로 자기의를 누적하는 식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엉터리 세계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경계를 뚫고 영의 세계, 언약의 세계에 십자가 안으로 들어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