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1:11-13 / 귀향

정인순 2018. 1. 1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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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이근호
2018년 1월 10일                  본문 말씀: 창세기 31:11-13

(31: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31: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다윗의 몸에서 인간 죽음의 이유도 나오지만 인간 구원의 근거도 나옵니다. 다윗의 몸은 비록 죽어 무덤에 묻혔지만 ‘다윗의 자손’이란 구원자가 그 몸에서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입은 모든 이들의 몸은 육과 양의 대립적 속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는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가라고 지시합니다.

벧엘이 있는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할아버지가 살던 땅에요 아버지가 살던 땅입니다. 또한 야곱 본인이 태어난 땅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귀향조치가 천사에 의해서 시작이 된다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은 천사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회의하다가 갑자기 “이쯤해서 천사의 의견도 한 번 들어봅시다”는 식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를 배제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의견교환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거기서 형성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같이, 천사가 야곱에게 말한 진위를 감히 상식선에만 머무는 우리들이 온전히 해석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직접 천사를 만났던 야곱의 그 후의 행적을 통해서, 상식과 맞지 않는 대목을 골라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지시한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히 “네가 태어난 고향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들릴 겁니다. 요즈음 지역으로 말하면 터키 지역에서 이스라엘 지역으로의 이동이 됩니다. 이 이동은 먼 거리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 정도라면 구태여 천사의 말에 심오함을 따질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15-16에는 달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본문에서 두 개의 본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의 귀향입니다. 육이 태어난 곳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과연 언약을 받았다는 그들의 위상은 그런 육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란 이 세상에서 건전하는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입성해야 될 자들입니다. 그냥 땅에서 가진 몸으로 살다가 죽어 그 몸 그대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인식에서 영적 인식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육적 인식으로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가짜입니다. 자기 몸 하나 편하기 위한 노림수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원과 복음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병원이란,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잠시 의사 앞에 빌려주어서, 그래서 의사가 자신의 몸을 고쳐주게 되면, 그 몸을 다시 의사에에서 되돌려 받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의사 앞에 자기 몸을 맡기는 그 순간에도 인간은 그 몸이 자기 몸이라는 의식이 계속 지속됩니다.

문제 이런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 게 문제가 됩니다. 세상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내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면을 병원 같은 기능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여기고 목사를 찾아 개선된 정신으로 갖추고자 잠시 상담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즉 목사는 자신의 정신을 고쳐 천국에 들어주는 영적 의사같은 기능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적으로 보면, 이것은 사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자신의 몸도 아닌 것을 자기 몸인양 불법점유를 하고 있는 겁니다. 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복음은 여태껏 잘못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회개하고 원래 주인에게 드리면서 자기 소유됨을 포기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되돌려 받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자기에 대해서 큰 오해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 땅에 있는 자가 ‘하늘의 본향’으로 간다는데 어떤 식으로 갈까요? 그것이 이 땅에서 자신이 죽되 오로지 언약에 의해서만 죽는 자만이 언약에 의해서 하늘에 도착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언약 안에 언약의 완성자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의 완성자에 의해서 같이 죽은 자에 한에서만 언약의 정한바 같이 부활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언약에 의해 죽는'다는 것은 평소의 일상도 언약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천사의 말은 그냥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일상에 한시도 쉬지 않고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으로 하여금 육적인 요소와 영적 요소가 같이 만들어지게 합니다. 육적인 요소란 곧 법적인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받는 자는 그 말에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만의 소박한 자기 공간 안에 그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자기 홀로만의 즐거움을 채워놓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기 만’의 원칙이 외부 침입에 흔들리게 되니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 호의에 의해서 가만 있을 수 없어 예의상 마지못해 응대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상 밖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만들어 전체적으로 예전의 삶의 스타일로 원상복귀하는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상대방은, 자신의 애정적 고백으로 인해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자가 자기로 인해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는 역시 마음의 번뇌를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인간 관계의 모순입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될까요? 그것은 매사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런 자기 정당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적인 정당성은 곧 저주의 심판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저주와 심판을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주를 뚫을 수 없는 축복은 축복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적 속성은 이런 겁니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언약이 자식 속에서 완성태로 나타나면서 그것이 ‘일방적 긍휼’에 근거해서 제시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당성이 아니라 사랑할 자만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두 가지 속성을 내뱉고서 그에게 미리 주어진 천사의 예언에 이끌리어 고향으로 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야곱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 과정 속에서 무엇이 저주의 상황과 축복의 상황을 유발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 속에서 무조건적인 긍휼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2강-창 31장 11-13절(귀향)1801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46페이지입니다.
 
창 31:11-13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성경에 천사가 나오지요. 천사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지금 인간들이 성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천사 없이, 천사를 고려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천사가 와서 야곱에게 이야기한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접근하기가 굉장히 난해합니다.

우리에게 형성되어 있는 상식이라는 것은 하나님 빼고, 천사 빼고, 성령 빼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판하겠는가, 평생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형성시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같은 죄인, 어설프기 짝이 없는, 다 같이 결국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 인간들의 이야기를 하도 듣다보니 그것이 상식이 되고 말았지요.

이러한 상식가지고 상식에 매이지 않는 천사의 지시를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의 어떤 변화를 촉구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은 천사하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평소에 친구하고 전화하지요. 친구하고 전화해봐야 둘 다 상식선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자기식구들이나 아는 사람하고 상식선에서 이야기해 왔을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이야기할 때는 판을 뒤집는다 하지요. 우리가 같은 인간들 수준에서 놀던 그 판은 천사가 와서 완전히 깨고 뒤집습니다. 차이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일을 몰라요. 미래를 몰라요.

그래서 이번 수련회강의에서는 고려의 변수가 작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이야기할 때는, 천사는 인간이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이 봅니다. 물론 천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천사는 다 본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천사는 변수까지 고려해서 다 본다. 확정된 정답이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래서 야곱의 경우는 언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천사가 미리 알고 있는 야곱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 야곱의 이야기는, 상식선에서 살고 있는 그 야곱이 그 야곱의 이야기에 따라가는 형식으로 야곱의 인생이 끌려갈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만 쳐다보느냐 하면, 천사의 내용이 뭐냐, 그것을 우리 쪽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서 해석할 것이 아니고 우리하고 똑같은 야곱이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그 행로가 우리의 상식선에서 얼마나 어긋나게 가고 있는가, 얼마나 다르게 가고 있는가를 우리가 살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 마음 자세가 중요한 이유가,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은 상식선에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수 요셉이다. 친척들도 내가 다 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다른 사람보다는 더 많이 고려했겠지만, 신기한 것을 많이 감안했겠지만,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는 겁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가신 길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던 그 보편적인 상식과는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치되는, 생각도 못하는 반대의 길로 갔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할 때 그냥 촐랑촐랑, 따라가면 되는 줄로 알았어요. 십자가 진다고 하니까 ‘죽을 때까지 따라가야지’라고 한 겁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던 그 상식을 가지고 예수님 가는 데까지 끝까지 가보면 결국 예수님 가신 길이 다른 정도가 아니에요. 정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너희들이 실력으로, 너희들이 갖고 있던 상식, 경험과 체험으로는 반대편에 갈지언정 내 쪽으로 절대로 올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천사가,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는 순간, 이것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요. 육의 인식과 영의 인식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네가 아느냐, 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육의 인식과 영의 인식.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 몸 죽어서 죽은 몸으로 간다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육의 인간에서 영의 인간으로 달라지지 아니하면 죽어도 못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꾸 하늘나라 쳐다보고 가고자 하는데 하늘나라 쳐다봤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육의 인식, 인간의 상식에서 성령이 주신 인식으로 달라진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가 중요하거든요. 이런 점에서 병원과 복음이 확연히 차이 납니다.

또는 병원과 복음으로 교회의 차이점이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병원은요, 자기 몸을 의사한테 맡겨서 무엇을 기대하느냐하면, 아픈 몸이 깨끗한 몸으로, 또는 치료가 된 몸으로, 더 좋아진 몸으로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내 몸을 잠시 의사한테 맡기고, 주사를 놓든, 물리치료를 하든, 뭘 하든, 맡기고 치료가 끝나면 다시 도로 ‘내꺼다.’ 돌려받는 이게 병원이에요.

사람들이 돈 주면서 병원을 찾는 이유가 그것인데 사람들이 병원을 찾을 때 그다지 거부반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정말 필요한 거다, 의사선생님 고마워요,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그 상식과 인식을 어디다 적용시키는가 하면 교회 목사한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목사님, 이 몸 가지고 천국 못 가는데 저한테 상담해주든지 안수를 해주든지,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있다니까 저를 위해서 엘리야같이 기도를 대신 해주든지 해서 나로 하여금 더러운 몸이 천국 갈 수 있는 깨끗한 몸으로 바꿔주시면 아낌없이 십일조, 각종헌금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인간 나를 뜯어고쳐 주옵소서. 담배 끊게 해주시고, 술도 끊게 해주시고, 망나니 인생 개과천선해서 새사람 되게 해주면 목사님에게도, 하나님께도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목사한테 나오는 태도를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상상되는 예수님한테 그대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병든 몸으로 나왔습니다. 정신적으로, 영혼적으로도 완전히 망가진 몸인데 주께서 고쳐주시며, 치료의 광선을 주시며……” 치료의 광선이라는 게 말라기 3장에 나와요. 그래서 어떤 목사는 교회 이름을 ‘광선교회’라고 지었어요. 병 고치는 전문교회라고 이름을 광선교회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 문 닫았어요.

치료해주는 영을 주시면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하는데 이것은 여전히 치료 후의 그 몸도 내 몸이고 치료 전의 그 몸도 내 몸이니까 내가 아주 괜찮은 분 이용해서 도로 괜찮은 내 몸으로 주인노릇 하겠다,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천국을 가겠다는 겁니다. 의외로 제가 보기에는 99.99퍼센트에요. 순복음도 그렇고 한국에 있는 모든 교인들 사고방식이.

병원의 의사를 대하는 태도나 목사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동일해요. 망가진 지난 과거의 내 인생 주님께서 이제 괜찮게 보상해 주신다면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습니다, 하는 식이에요. 이거 참, 어떻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의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너무나 아니거든요.

복음의 교회는 내것을 도로 찾는 것이 아니고 나를 포기하게 만들어요. 처음부터 네 것 가져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내 것이었어.” 네가 불법 점유하고 있었던 거예요. 불법점유. 마귀한테 꾀어가지고. 불법점유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소유권 없어요. 태어날 때 이렇게 태어나라고 본인이 본인한테 옵션 집어넣은 적 없습니다.

눈 색깔은 어떻고, 쌍커플은 있고 없고, 그런 것을 본인이 본인한테 요구한 적 없어요. 구원은 하나님이 현재의 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가 상담해서 그 사람 스스로 결심해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믿게 구원받겠습니다.” 이런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은 어떻게 하느냐? 목사가 할 일이 뭐냐? 병원의 의사는 그 사람을 가지고 치료를 하지만 목사는 치료가 아니고 목격자입니다. 치료는 누가 하느냐 하면, 그 사람 주변의 환경에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신, 또는 천사들이 그 사람을 작용하고 있는데 대해서 목사는 말씀으로 그것을 설명해 주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지금 이렇게 인도받고 있습니다.” 목격자, 또는 설명해주는 사람. 뒷북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당신 인생을 이렇게 끌어왔는데 지금 성경말씀에 보니 지금 정상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누가? 목사가? 아니에요. 목사가 이끄는 것이 아니고 현재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께서 여러분을 지금 이쪽으로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 당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당신은 누굴 증거 해야 되느냐 하면, 이미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니까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래도 내 몸은 지금껏 상식선에서 내 것이라고 우겼다는 그 내 것이라는 소유, 내 몸을, 내 인생을 내 인생이라고 우격다짐으로 붙들고 있겠다는 그것과, 정말 성도라면 성령께서 “놔! 안 놔? 놓으란 말이야. 네 인생 없어. 네 인생 애초부터 없었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인생이라는 다툼, 내 잘남의 증인이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분이 나를 계속해서 매일같이 손대고 있고 이끌고 있다는 증인이냐, 그 싸움, 그 간격에 대해서 목사는 성경을 가지고 설명해주는 겁니다. 뭐가 육적인 자기해석이고, 이런 것들이 육적인 자기해석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의 해석입니다, 라고 끄집어내 주는 거예요.

다윗의 몸이 하나지만 거기서 육이 나오고 영이 나왔지요. 다윗에서 영이 나온다는 것은 다윗의 자손이 나온다는 뜻이고 다윗에서 육이 나왔다는 것은 육적인 왕들이 나왔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에게도 세상에서 나오는 모든 인간상식이 성도 몸 안에 응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 몸에서 보여주는 육 전체는 곧 그가 속하였던 모든 인간세상의 상식을 날마다 토해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은 천국에서 살아야 될 성도의 새로운 사고방식이 이미 그 사람 속에 작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를 다 성도는 알아서 어느 것이 육이고 영이라는 그것을 목사님을 통해서 설명 들으면서 ‘아, 저런 것이 육으로 나왔고, 주님께서 이렇게 해서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예수님이 나를 날마다 죽이고 주님의 그 하신 일이 나에게서 계속 발생되는구나.’ 그 하신 일을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 원리로서 오늘 본문을 해석을 해 보자는 말이지요. 13절에 보면,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이 긴 문장을 두자로 줄이면 ‘귀향’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딱 보니 귀향이네요. 고향 돌아가는 거니까, 벧엘로 돌아가는 거니까 거기서 무슨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이 따로 나올 것이 있습니까? 딱 보니 자기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건데 거기서 무슨 육적해석과 영적해석이 갈라질 것이 있습니까?” 하는데 히브리서 11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자기 고향 벧엘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같은 성경 히브리서 11장 15절에서는 야곱은 자기 태어난 그 장소가 본향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네 상식을 또 비틀어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 야곱은 천사한테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구나.’ 해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 야곱이 그 야곱 그대로 가버려요. 도중에 달라진 야곱이 발생되지를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이 몸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의 상식과는 달라요. 우리가 일평생 몸에 철저하게 인식했던 상식이 있잖아요. 그 상식하고는 달라요. 그 상식을 육의 몸이라고 하고 그 상식과 다른 것을 영의 몸이라고 제가 일단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영의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육이 뭔가를 알아야 되잖아요. 육의 상식적인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모순점이 있는데 그 모순점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 이 말이지요. 굉장히 간단한 상식인데 말씀드릴게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것을 참지 못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흔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사랑합니다, 라고 했을 때 듣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저 사람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 되고 뭔가 거기에 합당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중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옳다,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따로따로 살거든요.

따로따로 산다는 말은, 개인적인 삶, 개인적인 생활공간을 따로 구축해요. 자기만의 삶을 따로 만든다, 이 말이지요. 그것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해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자기가 자기만의 사는 즐거움과 재미, 그것을 사수하고 있는데 요청하지도 않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해버리면 이것은 내 삶에 침범을 받는 거예요.

침범을 받으면 그 사람의 뭐가 흔들리느냐 하면, 지금까지 나는 나만을 위해서 소박하지만 나름대로의 행복을 꾸리고 있는데 외부의 침입자가 생겼으니까 이게 굉장히 불편한 거예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순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갑자기 불편을 느끼는 것을 본인이 느끼게 돼요.

모순점이 뭐냐?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 사랑해서 그 사람이 귀하고 아끼고 싶어서 사랑했다고 했는데 나의 이 사랑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게 된다면 이게 바로 모순이 아니고 뭐냐, 이 말이지요. 이게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듯한 얼굴인데, 남녀가 결혼을 했잖아요.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한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계속 하나로 가요. 왜? 몸뚱이가 자기 것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든지 뭘 하든 여전히 나를 위한 결혼이고 나를 위한 남편이에요. 자식이 있어도 오직 나뿐이에요. 남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해서 “여보, 당신을 사랑해.” 그러면 아내가 “뭐 또 맛있는 것 해달라고? 뭔 소리야?” 이렇게 되지요. 자기는 순수하게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갑자기 당황스럽게 되고 안 해도 될 요리를 한다고 하다가 손을 베이고 흐트러지게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이 흐트러지는 것을 내가 어떻게 가슴 아파서 봅니까?

그리고 내 사랑이 상대방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에 내 사랑이 상대방을 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몰락하게 만든 원인자가 내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육적인 모순입니다. 제 이 이야기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대로 예수님한테도 해당됩니다.

“나, 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뭘 해달라는 말입니까? 뭘 어떻게 해달라고요. 이번 수련회 핵심은 그거였어요. 주체는 실체와 합치되지 아니한다. 주체는 내 중심이에요. 세상의 모든 대자연은 예수님중심입니다. 이게 같아질까요? 여기서 억지가 생기고 무리가 생겨요. 안 같아집니다. 안 같아지는데 욕심을 부립니다.

“주여, 주여!” 기도하면서 나만을 위해서 세상 돌아가게 하자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억지가 어떤 용어냐 하면, ‘기상이변’이라는 용어입니다. 미국 북동쪽 기온이 체감온도 영하 69도에요. 그런데 그 때 호주의 서부가 영상 47도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 눈이 40센티 왔어요.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기상이변’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상식이 이렇게 건방을 떨어요. 대자연은 이변 없습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고 충분히 그럴만한 입장에 있습니다. 대자연이 인간에 맞춰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줄 의무가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건방진 거예요? 대자연은 천사가 쥐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작용하고 있어요.

천사가 인간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의 건방이 도가 넘었어요. 기상,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이변’이라는 거예요. 절대로 이변이 아니에요. 가장 자연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겁니다. 태어났습니까?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예요. 왜 죽이십니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

진짜 답답해서 설교를 못하겠네. 아, 참! 어디서부터 틀린 정도가 아니고 다 틀렸어요.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다 틀려먹었어요.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기 때문에 하나도 맞는 게 없어요. 다 틀려먹었어요, 사고방식들이. 왜 대자연이 나라는 주체에 맞춰야 됩니까? 왜 독감은 없어야 됩니까? 독감 a, b, c형 나타나라.

삐딱하면 전부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어요. 그래서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멀리 있는 하나님하고 코앞에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요. 다시 히브리서 가봅시다. 히브리서 11장 15절에 보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이 말은, 야곱은 두 종류로 나눠지는데 야곱이 아무런 변화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그 야곱은 지옥 가는 야곱이에요.

야곱이 고향으로 가면서 달라져야 돼요. 뭐냐 하면, 아하, 내가 태어난 벧엘, 내가 태어난 그곳이 바로 고향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고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 가느냐? 히브리서 11장 15절부터 다시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여러분, 무슨 수로 땅에서 중력도 못이기는 인간이 슈퍼맨도 아닌 게 하늘에 올라갑니까? 신앙생활 한 3, 40년 한 목사나 장로님한테 묻고 싶어요.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은? 질문 간단해요.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은 뭡니까? 3,40년 성경 백독한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집사님이나 장로님이나 혹은 목사님, 땅에 있는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이 뭐지요?”

모릅니다. 몰라요. 정답 알려드리겠습니다. 땅에서 죽으면 돼요. 땅에서 죽는데 고정된 원리원칙에 의해서 죽어야 돼요. 죽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지옥 가는 사람도 죽이고 천국 가는 사람도 죽이는데 죽이는 원리가 달라요. 한쪽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면 그 언약에서 누가 기다리느냐 하면, 이미 먼저 와서 우리를 받아주려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자기백성 죽인 것을 바구니에 담아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방향으로 얼싸안고 하나 되어서 성령세계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그걸 가지고 ‘연합’ 또는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가 있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야곱 같은 경우에는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야곱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돼요.

“갑자기 아버지라는 용어를 목사님은 왜 사용하십니까?” 물으시면, 예수님께서 이 땅 제자들에게 오실 때 늘 이야기한 게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요한복음 16장 5, 6절에 보면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그 전에 수십 차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께로 간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하실 때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오늘 본문 창세기에서 야곱은 야곱의 인생가운데서 아버지가 만들어져야 돼요.

아버지가 만들어진다는 말은, 야곱의 아버지가 누구냐, 이삭이거든요. 야곱이가 돌아가면서 이삭의 언약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요. 이 몸 가지고 아버지 얼싸 안아봐야 소용없어요.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그 언약이 야곱의 일생일대기를 통해서 만들어져야 된다 그 말입니다. 마치 성도의 일대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부에서 나타나야 되듯이.

자, 야곱은 홀로 홀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 이게 분리가 돼야 돼요. 뭐냐 하면, 이 세상 상식이죠,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 내 몸은 내 것이다.’ 하는 그것과 ‘아니야. 내 몸은 아버지에게 주신 그 언약의 것이야.’라는 것으로 분리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교회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천당 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변화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이 세상사람 상식으로 보기에는, 너는 너 혼자밖에 없다는 그 상식을 뒤엎어버리고, 본인들 생각에 ‘나는 나밖에 없다.’는 그 상식을 뒤엎어버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작용이 나와야 돼요. 예수님의 작용이 나와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작용이 나오는 것과 우리가 그대로 나오는 것과의 그 차이를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 당연히 알아야 되지요. 내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까 같은 모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저 사람에게 저렇게 사랑을 하고 잘 했을 때 나는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저 사람을 힘들게 만든다면 나는 사랑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사람을 오히려 망치고 미워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구나.’

자, 이러한 세상적인 상식에서의 모순이라고 했는데 이 모순이 무슨 모순이냐 하면, 자신의 정당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법적인 모순이에요. 법적인 모순. 더 쉽게 해보겠습니다. 내가 예수님한테 이렇게 헌금을 했는데 이 헌금한 것에 대해서 “네가 헌금했다고 기억하고 있지? 내가 분명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잖아. 네가 헌금하면서 죄 짓는 거야.”

‘맞아. 또 헌금하면서 죄를 지었어. 그런데 내가 교회에 필요해서 헌금하고 싶은 것은 성령께서 하게 하셨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하게 하신 이것이 내게 불의한 일로 되돌아온다면 나는 정당하냐? 정당한 것이 불의한 것이 되었으니까 내가 정당한 일을 했을까, 불의한 일을 했을까?’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결국은 뭐냐?

나는 어떻게 해야 정당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의인이 됩니까, 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안 되십니까? 자기 행동을 해놓고 반추하는 것, 자꾸 그것을 따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육적인 상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랑이 뭐냐? 사랑은, 한마디로 “놀고 있네. 내가 언제 너의 정당화를 굳히라고 했으면 그런 것을 요구한 적이 있더냐?” 무조건 적인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는 거예요. 내가 행동을 잘했을까, 못했을까, 못했을까, 잘했을까, 이제는 그것 좀 벗어나면 안 되나?

사람이 육적인 것이 뭐냐 하면, 어떤 일이 잘못 꼬여서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분명히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벌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날씨가 갑자기 춥다. ‘내가 부모를 덜 섬겼구나.’ 심지어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버스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출발했을 때 ‘아하, 내가 오늘 아침에 어머니한테 섭섭하게 대했더니만 하나님이 벌을 줬구나.’ 이게 바로 지옥 갈 법의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저주를 통과하지 못하는 성도는 천국에 못갑니다. 저주도 못 이기면서 무슨 천국을 가요. 저주의 압박감, 그리고 심판의 압박감도 통과 못하면서 그게 성도입니까? 그걸 성도라 할 수 있어요? ‘에라, 모르겠다. 내 인생 아니고 주의 인생이니 알아서 하겠지.’ 그게 바로 저주와 심판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것을 복음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두 가지 다. 이게 육이고 이게 영입니다.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왜? 그것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그 사람을 다루는 몫이기 때문에 목사가 구원해주지 못해요. 설명은 해줄 수가 있어요. 수련회 참석을 안했는데 차가 긁혔다. 그럴 수 있거든요.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아, 수련회 참석할걸. 참석을 안했더니 차를 타고 가다가 눈 길에 미끄러졌다.’ 또는 수련회 참석을 하기는 해서 너무 좋았는데 끝나고 나서 눈길을 가다가 다른 차와 박았다. ‘세 번째 시간에 졸지 말고 제대로 필기하면서 들을걸.’ 자꾸 자기정당성을 포기 못하는 것. 그것도 통과 못해가지고, 그것도 뚫지 못해서 무슨……, 어디를 가요?

천국은 어떤 동네인지 압니까?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거예요. 내 뜻이 아니고. 개판이 되든지,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이었고 아버지의 뜻과 소원이 개입되지 않은 적이 단 0.1초도 없었습니다. 내가 무식해서 법적으로 모순된다, 내가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만 주께서 그것마저 통과하게 해주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그 피, 그 피사랑, “나 너에게 요구하는 것 없다. 내가 내 피 줌으로서 그 피로 너는 구원받는다.” 이 말이에요.

그게 바로 이 땅 말고 보이지 않는 하늘에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할 것은, 다음 시간에 하게 되지만, 야곱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냥 쉽게 돌아가지 않지요. 라반이라는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다 들춰내요. 야곱이 가면 야곱이 홀로 조용하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양쪽에 육은 무엇이며 영은 무엇인가를 갈라내면서, 그것을 구분 지으면서 야곱은 그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야곱이 양쪽을 낱낱이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거예요. 성도가 가는 곳에 육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그것이 드러나듯이 야곱이 가는 곳에, 야곱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세움으로 말미암아 야곱과 어떤 차이가 나는 것들은 전부 다 지옥의 모습이고, 육의 모습이고, 그 가운데서 야곱은 자기가 가야될 본향이 아, 아버지가 알던 그 언약의 하나님, 그쪽으로 내가 달라져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의 위상이 이와 똑같이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그마한 일을 해도 따지면서 자기 정당성을 찾으려고 하고 벌벌 떨면서 심판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 모습, 어찌 이 모습이 천국 가는 모습이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바로 이것들이 내가 나타낼 수 있는 죄라는 사실을,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