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30:25-31 / 야곱의 독립

정인순 2018. 1. 3. 21:34

 

 

야곱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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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8년 1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30:25-31

(30: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30: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30:28)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30:29)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30:31)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야곱의 독립’은 결코 개인적인 삶의 터전을 따로 소박하게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그동안 라반의 영역 자체를 하나님께서 충분히 이용하도록 의도적으로 야곱 자신을 그곳에 보냈다는 ‘언약 수행’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차원입니다. 당연히 헤어지는 마당에서, 지난날에 일어난 모든 것에 대한 의미 청산과 관련해서 주도권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자기 집에 취직한 부하 직원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독립을 선언했어도 거기에 필요한 재물에 대해서 제신이 제공하는 형식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달리 말해서. “나 야곱은 외삼촌의 너그러운 배려 하에서 20년이나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태도를 유지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이 외삼촌을 보는 입장은 그게 아닙니다. 무려 20년이나 내가 열심히 일해 주었기에 변변치 않았던 삼촌의 재산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그 늘어난 그 몫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다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외삼촌은 야곱에게 10번씩이나 삯을 변경하면서까지 오로지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노동력 착취를 지속해 왔다고 봅니다.

따라서 야곱의 입장에서 이런 억울한 사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당연히 개입해주셔서 야곱의 정당한 몫을 찾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외삼촌 명의로 되어 있는 이 재산을 야곱의 노동에 합당한 양만큼 돌려받을 것이냐 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 쪽에서 삯을 정하되 욕심 많은 외삼촌이 “얼씨구나” 하고 반길만한 조건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 조건은 다름 아닌 양과 염소의 분배 양에 대해서 현재를 기점으로 새롭게 출발시키자는라는 겁니다. 즉 많이 가진 쪽과 빈약한 양에 불과한 바로 이 불공평한 분배를 개시점으로 해서 독립할 때까지 줄곧 이어져나가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 야곱이 20년 동안 노동한 것은 0가 됩니다.

이 조건에 대해서 외삼촌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양과 염소의 피부에 특이점을 갖고 있는 양과 염소는 야곱이 갖기로 한 조건인데, 가축의 털의 형질에서 얼룩과 점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우성이 아니라 열성인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은 가축을 키워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라반과 그 아들들도 오랫동안 양과 염소를 키워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열성인자를 가진 영과 염소가 우성인자를 지닌 양과 염소보다 더 많아질 일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는 겁니다. 막상 이 계약이 성사되고 난 뒤에 여지없이 외삼촌 라반은 속임수를 쓰기 시작합니다.

야곱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기 싫어서 점박이 양이나 얼룩무늬의 염소들은 따로 뽑아서 자기 아들에게 맡겨서 멀리 치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멀쩡하고 대다수 차지하는 점없는 양과 염소를 맡겼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양과 염소를 가지고 자기 몫이 될 점있는 가축으로 변경시켜 버립니다.

나무껍질을 벗겨서 양이나 염소들이 물 먹으려 올 때에 그것을 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새끼를 낳을 때, 우성보다 열성이 표현형으로 등장하는 양과 염소를 대량으로 출산시켰고 그리고 그 양과 염소는 라반이 가져갈 양과 염소보다 실하고 튼튼한 가축으로 길러내었습니다.

이 속임수와 속임수의 대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은 근원자로서 지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성취가 엄마인 리브가의 고향 동네를 통해서 실시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지상에 실현되면서, 언약 안에 담긴 내용이 야곱에 와서 더욱 깊어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잉태치 못한 태에서 기적으로 자식이 태어나는 내용이 언약의 구체성으로 증명이 되고, 이삭의 경우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언약의 내용으로 드러나지만 야곱의 경우는, 언약 속으로 들어올 자들이 이 땅에서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 연연하여 지속적으로 남의 것을 속이는 양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즉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받은 ‘복의 근원’으로서 자기 것을 따로 챙기는데 하나님께서 적극 가담하고 도와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양보없이 추진하게 해주신다고 여긴 겁니다. 자기를 속이려는 외삼촌에 대해서 야곱은 역으로 외삼촌이 속아 넘어가도록 구미가 당긴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의 허가가 난 것으로 이해합니다. 외삼촌은 야곱 자신보다 더 불의해서 이 많은 재산은 본인이 갖도록 자신을 복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속임수에는 속임수로 맞받아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속임수에 하나님마저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생각한 그 복이 언약을 위한 복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야곱을 위해서 언약을 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야곱이 남들로부터 속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먼저 속이는 식으로 자기 몫을 빼돌리는 이 행위는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언약의 사람을 속이는 것을 반영합니다.

마치 유전에서 열성 형질이 우성 형질에 감추어져있다가 언젠가는 그 열성 형질이 기존의 우성형질을 제키고 표현형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의 이치는,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겁니다. 하지만 언약의 세계에서는, 부모는 자식의 담고 있는 그 속성의 표현형으로 미리 현실화된 자들입니다. ‘

즉 아직 없는 것이 부모를 통해서 미리 나타나도록 자손의 언약 형질이 나뉘어 갖게 되는 겁니다.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성질을 미리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함’입니다. 속임을 당해서 ‘억울함’하다는 것은, 내가 나의 것을 지키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인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이 자신을 속이고 또한 자신이 남을 맞받아쳐서 속여서,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나를 생존케 하는 바로 그 방식이 오실 메시야에게는 속임수가 되고 메시야를 억울한 피해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야곱은 야곱에서 벗겨지고 뜯겨져 나가야 합니다. 생존과 축복을 원하는 야곱은 진짜 언약적인 야곱을 가리는 우성형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억울함을 형성하기 위해 메시야께서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못하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이로서 야곱마저 라반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힘들게 하는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힘으로 육에서 영으로 넘어설 수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1강-창 30장 25-31절(야곱의 독립)180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25-31절입니다. 구약성경 44페이지입니다.
 
창 30:25-31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라반이라는 사람은 야곱의 외삼촌이지요. 그동안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일군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 입장과 야곱의 입장, 그 두 입장을 다 생각해야지만 이 본문이 이해가 됩니다. 외삼촌 입장에서 외조카 야곱은 자기 집 노동자로 취직하러 온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입장에서는 밤에 사다리를 통해서 자기에게 언약을 내려주신 그 하나님의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엄마 리브가의 동네에 하나님께서 경유하게 하셨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엄마의 동네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부러 보낸 이유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축복한 그 내용이 엄마동네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사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리브가와 이삭 사이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하고 자기 형 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장자냐 하는 그 문제,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복의 근원이냐 하는 그 문제는 인간들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에게 이미 결정을 내린 거지요.

그렇다면 복의 근원으로 결정만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길을 친히 이끄시고 인도한다는 사실까지 아울러 야곱은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야곱은 외삼촌의 생각과 달리 이 동네를 자기에게 주어질 축복이 구체화되는 현장으로서 하나님이 거기에 집어넣은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쉽게 해서 주도권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라반은, 너는 우리 집에 취직하러 왔다, 그렇게 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한 그 축복, 자식 낳는 것과 재산이 번성하는 것, 그 둘 다를 엄마 리브가의 동네에서 그 성취를 보게 되고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로 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생각이 드디어 구체화되는 것이 뭐냐? 야곱이 떠나고자 할 때 외삼촌이 야곱에게 품삯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요.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고생한 것에 대해서 품삯을 주겠다고 했을 때 품삯을 주는 쪽이 갑이 되고 받는 쪽이 을이 돼요.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반대로 뒤바꾸어 놓습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는 못하지요.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식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품삯을 정하면 내가 줄게, 라고 할 때 하나님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는 알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본문 31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32절에 자기가 먼저 조건을 걸어요.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이렇게 되는데 대해서 외삼촌은 어떻게 생각하시니까, 라고 제안을 했어요.

제안을 했는데 이 제안에 대해서 외삼촌이 상당히 좋게 생각한 겁니다. 왜 좋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런 제안을 처음 야곱이 왔을 때 정한 것이 아니고 지금 야곱이 독립하기 위해서 그동안 20년 고생한 삯을 한꺼번에 달라고 하는 그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그 조건을 제시한 겁니다.

양은 원래 하얗잖아요. 하얀 것 중에서 특이하게 검거나 점 있거나 아롱진 것을 따로 뽑아낸다면 외삼촌이나 야곱이나 목축하는 입장에서 뭘 아느냐? 양 쳐보면 대다수는 하얀데 그중 몇 마리 정도가 아롱진 것, 검은 것이 나오고 염소를 쳐봐도 보통은 시커멓지요. 그중에서 얼룩덜룩한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은 몇 프로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라반도 목축하는 입장에서 뻔히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이런 조건을 제시했을 때 외삼촌이 선뜻 수용할 거라는 것을 뻔히 안 겁니다. 유전학에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성과 열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짐승이나 생물이나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거든요. 염소의 털을 예로 들면, 색이 검은 것이 대다수인 이유가 검은 형질이 우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성이란 우월한 특성이이지요.

가끔 털이 얼룩덜룩 한 것은 소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걸 열성이라 하는 겁니다. 우성이 대다수 나타나고 가끔은 열성이 나오는 겁니다. 우성과 열성이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그걸 대립형질, 대립유전자(allele)라고 하는데 대립유전자가 처음에는 양 같으면 하얀 것, 염소 같으면 시커먼 것이 다 나와요.

그런데 이게 그 다음 대에 가게 되면 숨어 있던 것이 일부 거기서 나와요. 숨어 있는 열성형질이 그 중 한 마리는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한 마리당 대립형질이 다 있는데 우열의 법칙에 의해서 우성이 나오고 열성이 감춰진 거지요. 그 감춰져 있는 것이 그 다음 대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1865년도에 멘델이 완두콩 재배하면서 조사를 해보니까 처음 대에서는 100프로 우성만 나오고 그 다음에는 3대 1로 열성이 하나가 나오는 겁니다. 형질이 두 개가 되면 9:3:3:1로 나오는 것을 완두콩 가지고 실험을 한 겁니다. 이걸 실용유전학이라 하는데 유전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유전학가지고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정도 유전학 같으면 라반도 이미 알고 있어요. 백날 해 봐야 네 것이 얼마 안 된다는 것. 라반이 외 조카 볼 때 ‘바보 아니야? 얼룩덜룩한 것 얼마 안 돼. 그 정도는 내가 양보하마.’ 물론 속으로 ‘바보같이!’ 반반 나누자는 것도 아니고 얼마 나오지도 않는 것을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 무슨 수작인가 하겠지만 오케이, 한 거예요.

그래놓고 외삼촌이 너무 심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그 나머지 얼룩덜룩 한 것마저 안주려고 야곱도 제켜버리고 자기 소 떼 중에서 얼룩덜룩한 것을 야곱에게 주지 않고 자기 아들들에게 다 줘버렸어요. 한 마리도 줄 마음이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야곱과 자신의 목축지의 거리를 사흘길이나 떼놓았습니다.

36절에 나와요.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야곱에게는 얼마 주지도 않고 야곱에게 가야할 아롱진 것이나 점 있는 것마저 다 빼돌린 겁니다. 나중에 야곱이 “아롱진 것, 점 있는 저것들 내 거잖아요.”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봤지? 네 것 하나도 없잖아. 잘 봤지?” 그러면 야곱이 뭐라고 하겠어요? “분명히 몇 개 있었는데?” 이미 자기 아들들에게 다 빼돌려놓고 야곱에게는 조금도 안주는 겁니다. 그걸 누가 아느냐? 그걸 야곱이 사전에 알고 있었어요. 라반이 철저하게 자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라반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조건을 그렇게 제시한 겁니다. 왜? 그래야 쉽게 수락할 것이기 때문에. “거의 다 삼촌 것으로 하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 37절에 보면,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그 때에 양떼는 다 하얗지요. 염소는 새까맣고.

그런데 양떼가 물을 먹을 때 눈으로 보도록 껍질 벗긴 것들을 두면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그 말이지요. 현대 유전학에서는 이걸 분석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31장 10절에 보면 그렇게 희한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렇게 하도록 다 시킨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이 가진 토실토실한 양떼에 얼룩덜룩하고 점 있는 것, 아롱진 양들에 반해서 교미가 절로 일어나게 해서 자기 양떼를 늘려간 겁니다.

비실비실한 것들은 무늬가 없는 새끼를 배게 만들고 튼실한 것들은 다 무늬가 있게 만든 거예요. 야곱의 목축업 노하우라고 단순하게 보면 안돼요. 그런 노하우는 라반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실용적 유전학에서 사람들이 경험상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수한 거예요.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라반이 자기를 속이고 있고 그 속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린 조치는, “속인 자를 또 속여 버려라.” 속인 자를 또 속이는데 그 절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라반이 자기에게 삯을 주는 것을 거부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라반이 갑이 되어서 야곱에게 삯을 주는, 라반이 주도권을 쥐는 것을 야곱이 자연스럽게 거부하도록 만들어야 돼요.

그러려면 누가 봐도, 라반도 목축업 하는 사람이니까, 누가 봐도 목축 하는 사람의 경험상 돌아올 것이 별로 없는 조건을 라반에게 제시함으로서 라반으로 하여금 거짓말 못하게 하는 지경으로 몰아넣고 그것을 야곱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하고 자기는 빠져버립니다.

야곱이 자기의 품삯을 받는 이 절차, 주고받는 이 분위기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속이고 빼앗는다.’는 분위기가 엷게 채색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야곱에게 왜 하나님께서 라반을 속이게 했는가? 여기에서 깊은 의미가 시작됩니다. 라반의 동네는 야곱 자신의 엄마 동네에요. 엄마는 누구의 아내인가? 야곱의 아버지의 아내겠지요. 당연하지요.

그러면 야곱의 아버지가 누구냐? 이삭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누구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된 복을 자손을 향하여 전수하는 책임을 가진 자고 그 이삭의 임무중 하나는 전수해야 될 축복의 근원을 지정해야 될 사명을 가진 자, 아버지에요. 그런데 그 복, 하나님이 주신 그 언약된 복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삭이 앞장서서 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언약완성은 뭐냐?

그 언약된 사람의 부인되는 여자 쪽에서 언약을 실제적으로 성취하는 조건이 언약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한 거예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아내 사래가 사라로 바뀌는 여자 쪽에서의 역할이 주도적이에요.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니까 그 원리가 계속 언약을 통해서 이 지상에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이 하나님께 복의 근원되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복을 부여받아야 되는데, 그 자식이 많아지고 재산이 증식되어야 되는데 그 역할은 이삭 쪽이 아니고 이삭의 부인되는 리브가 쪽에서 이루어져야 돼요. 그러면 리브가의 동네가 어디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리브가의 동네에 야곱자신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엄마 리브가의 고향동네에서 일을 할 때 속임수로서 완전히 가득찬 동네분위기를 하나님께서 형성시켜 놓아요. 이것은 뭐냐? 야곱이 복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엄마와 공모해서 형을 속였잖아요.

그러면 야곱이 부여받은 언약의 내용가운데 속임이 없이는 언약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속여서 빼앗음이 없이는 언약이 성취되지 않는다. 이삭 같은 경우에,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데서 있게 했어요. 애 낳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삭을 낳았다.

이것은 언약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조건, 태가 없는데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어머니가 계셔서 이 지상의 잉태치 못하는 어머니에서 태어나게 하는 조건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이삭은 죽었다가 다시 얻어야 되는 조건이 새롭게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잖아요. 그 조건이 추가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없는데서 태어나야 되고 그 다음에는 죽은데서 살아나야 언약이에요. 야곱에서 추가되는 것은 뭐냐 하면, 속임이 없이는 언약백성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언약백성은 속여서 살 수밖에 없는 육적인 모습을 구원의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죄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의롭게 만들어내는 내용이 언약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누가 누굴 속이는가? 누가 누굴 속이는가에 있어서 속인다는 그 사실만 있고 누가 누굴 속이는가는 아직까지 미확정된 상태에요. 왜냐하면 등장인물이 세분이거든요. 하나는 라반, 또 하나는 야곱, 또 하나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구원하려면 하나님은 야곱한테 정상적으로 “너는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야곱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죄 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속이고 야곱은 하나님께 속임을 당하고, 그래서 속임을 당한 그 억울한 모습 자체가 야곱을 통해서 오실 하나님이 지상에서 당하는 하나님의 본모습이며 그 본모습을 야곱을 통해서 잉태해 내는 거예요.

굉장히 복잡해요.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진짜 야곱이 따로 있는데 야곱을 뜯어내는 겁니다. 야곱이 속이는 것, 하나님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야곱이 그런 활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야곱은 본인의 생존, 본문대로 하면 본인이 이제는 자립해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 모은 재산가지고 나만의 인생으로 이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본인의 욕망과 욕구 때문에 외삼촌을 역으로 속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야곱으로 그냥 방치하지 않아요. 야곱의 그 속임수를 통해서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게 되면 야곱의 생존과 속임수 뒤에, 그 밑에 감추어진 것이 있어요. 아까 양과 염소 새끼 이야기할 때 우성과 열성이야기 했지요.

열성은 항상 감춰져서 나타나지 않아요. 유전학에서 그 감춰진 것을 유전형이라고 하고 드러난 것을 표현형이라고 합니다. 감춰진 것이 있는데 그 감춰진 것은 야곱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야곱이 누굴 감추고 있는가? 야곱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야곱이 감추고 있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간단히 이야기해서 보통 유전이라는 것은 뭐냐? 자식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반대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닮아요. 아직 나타나지 않는 그것이 아버지에게 미리 분배되는 겁니다. 아직 없는 것이 아버지를 통해서 조금씩조금씩 나타나는 겁니다. 그 형질이.

야곱의 자손이 야곱을 구원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구원하고, 이삭의 자손이 이삭을 구원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담의 자손이 아담을 구원해요.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언약에 의해서, 인간의 개입이 아닌 언약의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나타날 최후의 메시아가 앞서 있던 모든 언약의 선조들을 일괄 건져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나타났을 때 모세와 엘리야도 그런 입장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지요.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까? 언제 별세하십니까?” 별세 이야기를 했다고요. 인간의 유전학으로서는 이 사실을 알 길이 없지요.

그렇다면 속이고 빼앗는다는 이 말은,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흔히 욕심을 내면서 내가 살기 위해서 빼앗아야 되겠다, 혹은 살기 위해서는 속여야 되겠다는 이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에 하나님이 같이 속임수로 끼어드는 겁니다. 끼어들어서 야곱으로 하여금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을 우두둑 뜯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뜯어내는 작업을 하게 되면 진정한 속임수를 가진 분은 야곱도 아니고 라반도 아니고 속임수를 가지고 이 땅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감춰진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감춰진 겁니다. 속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속였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누구한테 속임을 당했다는 것, 계속해서 31장을 보게 되면, 야곱이 외삼촌에게 호소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삼촌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했건만 삼촌은 계속해서 품삯도 제대로 안주면서 저를 속였잖아요.”라는 투로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내 몫은 내가 찾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말로 자기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했다는 말은 결국 억울하다는 겁니다. 야곱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뭐냐? 이 땅에 억울함이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될 자를 억울한 곳에 집어넣어요.

사람을 억울한 곳에 집어넣게 되면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 갖은 노력을 다한 그것이 다 허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목적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육과 영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육과 영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야곱이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의 힘으로, 본인의 속임수를 써서는 육에서 영으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요. 나는 살고 싶은데 삼촌한테 속임을 당해서 품삯도 못 받고 그저 밥이나 먹고 살 듯 그렇게 살았다.

흔히 정박아들 길에 서 있으면 꾀어서 새우 잡이 배 태우거나 염전이나 소 키우는 농장에 데려가서 실컷 이용해 먹고 정부에서 주는 장애인보조금마저 다 빼앗잖아요. 그런 식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상당히 야곱입장에서는 억울하지요. 억울하기 때문에 야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삼촌에게 돌아간 내 몫을 되찾게 해주옵소서.”

야곱이 상당히 정당한 것 같이 보여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런 생각을 집어넣은 이유가 뭐냐? 그렇게 삼촌에게서 모든 재산을 얻고 삼촌의 두 딸을 통해서 열 두 아들, 아직은 열 한 아들이지만, 열 두 아들을 다 얻었을 때 ‘나의 이런 상태가 복된 상태며 복된 상태로 나는 영적세계, 구원의 세계, 하늘나라에 그대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야곱이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야곱이 하나님에게 속임을 당한 대목이에요.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교회 나왔다. 주께서 교회 나오게 하셨다. 예수 믿게 하셨다. 예수 믿게 하셔서 이제 구원받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 믿게 하셔서 구원하셨으니 이 몸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야곱이 오해한 것과 똑같은 오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나를 이중으로 생각해서 앞에 구원받겠다는 나를 뜯어내 버립니다. 뜯어내 버리면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고 내가 뜯겨나가는 그 과정 속에서 내가 구원받아야겠다는 이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분이 있어요. 희생을 당한 분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인 겁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육에 있는 인간이 자력으로 영으로 넘어갈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 할지라도 그 인간이 영적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인간은 뜯겨 나오고 그 인간 뒤에 숨 막히듯이……, 그러니까 삼촌이 야곱을 속인 것이 아니고 삼촌 야곱 둘 다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속임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들이 자기를 속이도록 속임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야곱사이에 개입하신 겁니다. 오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안 끼어들면 야곱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나는 삼촌을 이겼다.’

그런데 사실은 삼촌을 이긴 게 아니에요. 누가 이겼는가? 창세기 31장에 보면, 뒤늦게 라반이 야곱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요. 목축의 노하우, 일반사람들이 모르는 그 목축의 기술을 야곱은 알아서 비실비실한 것들은 다 자기에게 넘기고 실한 것들은 다 빼앗아갔다고 억울해 하면서 라반이 따라옵니다.

따라올 때 하나님께서 삼촌을 말리지요. 생각해 보세요. 야곱은요,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들어요. 처음에는 야곱이 속이니까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고 했고, 이번에는 삼촌이 야곱을 죽이려고 덤벼든 겁니다. 이것은 삼촌이 야곱을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삼촌이 야곱을 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자기재산 빼앗아가니까 죽이려고 했지요.

삼촌이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듯이 겉으로는 보이지만 야곱 안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오실 하나님이 함께 있어요.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요.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도록 하나님이 유도하신 거예요. 마치 내 인생은 생존해서 밥 빌어먹고 살아야겠다는 그 욕구 앞에서는 전부다 진짜 하나님은 그 욕구를 들어주지 않는, 나를 속이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요.

“내가 이렇게 교회 와서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 생존이 이렇게 위태하고 내 것을 왜 빼앗아갑니까?”라고 분노를 유발케 하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지금 야곱을 앞장세워서 그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 일을 벌이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요소가 있어요.

34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드라빔은 라반의 동네에서 믿는 신상이에요. 그 신상을 안장 위에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버립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따라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말리기 때문에 재산은 내가 안 가져가겠는데 그래도 내가 섬기는 신을 그렇게 가져가면 돼?” 야곱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금시초문입니다.”라고 했어요. 이게 중요해요. 야곱은 남자거든요. 남자를 주께서 배제하시고 여자를 통해서 야곱언약을 이룹니다.

만약에 이거 안 되면 야곱이 갖고 있는 자식들이며 재산 다 날라 갑니다. 그런데 야곱의 본처 라헬이 뭐라고 속이는가? 속임이 또 나오지요. 라헬이 약대 안장에 그대로 앉은 채로 “내가 지금 월경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그걸 보고 “그러면 할 수 없지.” 하고 다른 곳을 찾다가 그냥 돌아갑니다.

결국 야곱의 재산과 처자식을 지킨 자는 야곱이 아니고 야곱의 아내 라헬이 소위 야곱의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지킨 겁니다. 레아도 아닌 본처 라헬이. 일 마무리는 여자가 다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어느 누구도 진짜 하나님을 못 알아보는 겁니다.

왜?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 하나님은 인간 본인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본조건으로 걸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존에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도용하는 인간들을 속여 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맞춰주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하나님께 속았네.” 하잖아요. 속았다는 말은 그만큼 인간의 터무니없는 욕구와 욕망 때문에, 그 속임수 때문에 피해 입은 분으로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야곱의 후손, 메시아가 돼요. 어느 누구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그 하나님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영과 육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이 영적으로 옮기는 것은 기존의 그 야곱이 아니라 야곱을 뜯어내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을 주께서 영적나라로 통하는 언약의 사람으로 성취를 시키는 이 작업가운데서 리브가의 동네 라반과 야곱의 욕심이 맞물려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는 기능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인간가운데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에 막혀서 피해자가 되는, 억울한 아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그분이 바로 십자가진 주님인 것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