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의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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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12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30:1-8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30: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0:3)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30:4)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30:5)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30:6)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30: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30:8)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야곱은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과 공통된 운명으로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의 효과는 아내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이라는 자리는 허수아비가 되는 셈입니다. 언약의 내용이 여자로부터 주어지는 이유는, 창세기 3:15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실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언약으로 인해 구세주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짝이 되는 사단도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이 사단은 하늘에서 내려올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땅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구세주가 오지 않는다면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있어 사단은 ‘없는 존재’입니다.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이 세상에 언약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야곱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떼로 야곱에 일생에 집중해서 작업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야곱에게서 언약적 징후를 드러내는 가정사를 갖게 됩니다. 메시아적인 요소와 더불어 사단적인 요소도 등장됩니다. 그 사단적인 요소가 바로 ‘육적 요인’입니다. 언약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점을 해석하게 되면, 참으로 정상적인 일상의 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일의 기반에는 자식생산이 있습니다. 대를 이어가는 가운데 세상의 역사도 같이 진행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차분하고 안정적인 개체수를 유지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자식의 존재가 인류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면, 자식이 없는 집안은 신으로부터 밉상받은 집안으로 낙인 찍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존재의 연속성을 보장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인간이 자식을 가짐으로서 자신들이 불멸의 노선으로 갈아 타는 셈이 된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면살수록 초라해지고 볼품없이 됩니다. 따라서 현 자기 존재를 놓고 볼 때에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숨을 거두게 되면 이내 몸은 뻣뻣해집니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재료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아성을 자식의 생명에다 이전시키려고 합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식입니다. 따라서 자식이 많다는 말은 복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곧 이 세상에서는 힘으로 복과 저주를 가름합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자식의 유무로 복받은 여자 여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라헬은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습니다. 이는 언니 레아가 낳은 4명의 자식과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언니가 상대적으로 기가 살고 동생 라헬은 언니를 보면서 약 오른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남편은 언약이 겨냥한 인물인 것을 감안해야 했습니다.
언약의 남편은 자식을 낳아도 육적인 자식이 아닌 다른 자식을 낳은 인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적 아내로부터 얻은 자식은 일체 참된 언약 자식으로 간주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7에 보면,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머니’가 세상 어머니하고 다른 자식을 낳아야지만 그 자식이 천국갑니다. 참된 복이란 세상에서의 힘 경쟁하고 무관합니다. 그 이유는 언약은 이 지상의 죄를 겨냥해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중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인간의 근원은 죄를 떠난 자리가 아니라 그 죄짓는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만나고 십자가의 피를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래 자리, 즉 죄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 모습이 언니 레아에게서가 아니라 라헬에게서 나타나게 합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나름대로 자식을 많이 갖겠다고 남편에게 강권해서 종의 여자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언약의 강림으로 인해 인간의 죄된 근원을 보여주는 겁니다. 육이 자식이란 육과 육의 만남으로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약속의 자식은 육을 차단시킨 상태에서 ‘하늘에 어머니’를 두고서 그 자식으로 태어난 아들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관계는 야곱이 ‘언약 받은 자’이기에 나타난 원리입니다. 이 언약으로 인하여 힘으로 평가받는 일상적인 이 인간 세계가 실은 ‘육적 세계’라는 것이 폭로됩니다. 즉 사람들이 열심히 자기 자식을 지키는 평범한 자리가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피를 쏟으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구체화하면서 ‘자식’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이유는, 자식이란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식이 있는 곳에 그 부모도 주목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의 세계는 모든 자식들이 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우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헬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니에게 지기 싫은 겁니다. 자신이나 언니나 모두 남편 야곱의 언약적 입지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임여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언약의 아내들은 하나님쪽으로 맞바람처럼 던져주시는 자식을 태어나게 할 뿐입니다. 마치 동물원의 맹수라는 사자나 호랑이가 친히 자신들이 사냥한 고기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사들이 던져넣어주는 고기로 연명하듯이 언약의 사람의 자식도 이와같습니다.
그 자신의 내부에는, 과연 약속의 여인으로부터 출산된 자식인지, 아니면 약속의 아내가 아닌 종으로부터 난 자식인지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집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약속의 메시야는 필히 사단을 불러내기 때문입니다. 즉 사단의 존재가 이 인간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들이 보는 세계가 ‘실제 세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어떻게 살려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하든 죽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이러한 진실을 오늘도 가리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지 말고 약속의 현실성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7강-창 30장 1-8절(라헬의 자식들)1712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43페이지입니다. 창 30:1-8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자식경쟁에 이렇게 나선다는 이것은 사람 대 사람으로만 비교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여자, 레아와 라헬은 자신의 남편의 특수성을 지금 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남편이 누구냐? 야곱이고, 야곱은 이미 사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천사가 언약을 가지고 야곱에게 집어넣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장식하고 있는 겁니다.
그 언약의 전철, 야곱에게 언약이 오기 전에 언약은 어떤 공식, 어떤 원칙을 가지고 지상에 펼쳐지는가를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창세기 16장에 1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 때는 이름이 사라가 아니고 사래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인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일종의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행자.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아브라함은 참 대단한 존재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라고 생각하겠는데 그 가정사를 보게 되면 일반가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생산치 못했다는 16장 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언약을 받아야 될 아브라함의 아내가 언약 때문에 아기를 못 낳는 여자, 불임여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 세상에서 자식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힘에 의해서 생산된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벌집 폭파하듯이 언약의 남편, 남편에게 주어진 언약 때문에 사래의 자궁을 폭파시켰다, 이렇게 보면 돼요.
아기를 못 낳는 여자를 통해서 만약 아기가 생기게 되면 이것은 그냥 아기가 아니고, 육에서 나온 아기가 아니고 언약과 관련된 자식, 하늘의 하나님의 뜻이 듬뿍 담겨 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영하는 핵심내용이 포함된 자식을 이 지상의 언약의 사람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참 쉽습니다. 동물원에 사자가 있지 않습니까? 동물원의 사자나 호랑이는 동물원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양식을 자기가 챙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갇혀 있는 입장에서 본인이 사냥해서 본인의 먹잇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자와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에게 닭고기가 주어지고, 소고기나 염소고기가 주어지는 것은 사육사가 고기를 그 앞에 던져주지요.
그렇다면 언약의 사람은 누가 사육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늘에서 닭고기 던지듯이 사육하고 있는 반면에 언약이 없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알아서 사냥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언약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지요. 맞바람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맞바람 불어주듯 자식을 던져버리는 겁니다. 자식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왜 언약의 가정에서는 마치 동물원이 사자 소유하듯이 하나님이 준비해서 자식을 던지는 이유가 뭐냐? 언약이 이 지상에 오게 되면 언약은 어디를 찾아가느냐 하면, 죄를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자기 죄부터 의식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에 있어서 선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그 존재하는 것을 죄, 악이라고 여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지요.
말씀이, 언약이 찾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죄 있는 육신, 로마서 8장 3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 있는 육신을, 죄를 찾아가요.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중력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냐, 아니면 중력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느냐. 인간이 중력을 벗어나면 죽어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말이지요.
중력이 있는 곳이 가장 자유로운 곳이에요. 그러면 인간의 발목잡고 잡아당기는 곳이 어디냐?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되려면 의를 행하면 안 되고 죄를 찾아가야 돼요. 죄로 복귀되어야 됩니다. 나의 근원, 나의 죄 됨은 어디서 나온 죄가 나로 하여금 죄 덩어리 되게 했는가를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찾을 줄을 몰라요. 마귀가 인간을 붕 띄워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아담을 찾아갔을 때 약속이 있었어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나는 죄인이어야 마땅합니다.”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공중의 풍선처럼 전부 다 붕붕 떠서 다닙니다.
자기 잘난 재미로 살아요. 마귀가 바람을 넣어서 그래요. 인간을 풍선처럼 사용해서 바람을 후, 하고 넣어놓으니까 이게 붕붕 뜨는 거예요. 애가 풍선 좋아할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풍선 주니까 얼마나 좋아하는지. 붕붕 뜨니까 자아가 공중으로 뜨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라.
허세라 하지요. 허풍, 연말 되면 허세, 허풍이 얼마나 심합니까? 그것 때문에 대목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발목이 가벼워요. 조금만 좋은 것 있으면 그것을 극대화시켜서 남에게 자랑질하기 바쁩니다. 보통 드라마나 소설, 세계 문학을 보게 되면, 문학이라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했듯이 카타르시스, 사람 속의 울화를 확 풀어줘야 그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거든요.
인간의 울화가 뭐냐 하면, 세상이 정의로워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재미나는 영화, 재미나는 드라마는 나쁜 짓을 한 인간을 작살내는 영화, 드라마도 나쁜 짓 할 때마다 박살을 내는, 그래서 ‘정의는 살아 있다.’ 그것을 실제 현실로 우리에게 각인시키는 드라마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위로받을 것은 뭐냐 하면, 정의는 살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국가를 욕하면서도 국가를 의지하고 국가를 믿고 기대하는 이유가, 그 국가가 억울하게 한 것, 그리고 악한 놈들을 박살내주는 최종적인 힘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군함도>라는 영화에 보면 조선 사람들이 일제에게 서러움 받거든요. 설움 받는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라가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나라 없는 이 조선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조선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정말 철야하면서 기도했어요. 집회하면 10리, 20리 걸어와서 꽉꽉 들어찼습니다.
오늘 이 분위기하고 달라요. 꽉꽉 찼습니다. 한 맺힌 것이 많아서, 정의의 하나님, 우리의 한을 풀어주는 하나님, 선한 편에 서서 악을 퇴치하고 박살내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거예요. 옛날부터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교회에 많이 갔습니다.
그만큼 여자들이 남자한테 많이 당한 거예요. 남자는 악한 인간들이고 여자는 악한 인간들에게 힘없어서 당하는 착한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의가 살아 있고, 악을 박멸하고, 부수고……, 그런 드라마 보면 일상의 모든 피로가 풀리지요. 그런데 아침 드라마 이런 것, 제가 잘 안보지만 슬쩍 보면, 악한 기간은 너무 긴데 나중에 책벌하는 시간은 너무 짧아요.
나중에 결말에 보면 감옥에 가지도 않아요. 기껏 정신병동에 가서 혼자 횡설수설하면서 끝납니다. 자 문제는 뭐냐? 그 정의롭다는 것, 그 선한 쪽이 악을 이긴다는 것, 결국 선과 악을 누가 정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이 땅에서의 힘이 곧 정의입니다. 힘 가진 자가 정의에요. 있는 자는 정의로워서 있고, 없는 인간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벌 받아서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 같은 경우에 어떤 청년이 지나가는데 소경이에요. 제자들이 잘 되었다 싶어서 막 씹듯이 이야기합니다. “저 청년은 자기 죄 때문에 소경되었습니까, 부모 죄 때문에 소경되었습니까?” 아예 저 인간은 우리보다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요. 본인뿐만 아니고 가문 대대로 심어버립니다.
이게 보편화되고 그 보편화된 정신이 제자들에게 다 스며들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런 분위기가 스며들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힘이 하나님의 복으로 환원되고, 힘이 하나님의 복의 증거물로 되고, 그래서 힘 있는 자는 착한 일을 많이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착한 일을 하면 언젠가는 힘을 가진다.
그런데 지금 힘이 없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나는 악한 쪽에 속하기에 이것이 억울하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남자 쪽에서는 사회적인 힘입니다만 여자 쪽에서는 힘이 뭐냐? 자식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없어요. 억지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자식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을 갈아타게 해주거든요.
환승해줍니다. 나는 늙어서 점점 흉측한 몰골로 바뀐다 할지라도, 나의 젊은 모습이 다 사라지고 늙어빠져서 이렇게 간다 할지라도 자식이나 손자가 팔팔하게 되면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침에 피곤해서 누워 있더라도 손녀가 빼꼼히 웃으며 다가오면 피로가 확 풀리지요. ‘그래, 저 얼굴이 연속적인 나의 얼굴이다.’ 나의 부활체에요.
자식 셋 낳았다. 또 낳고. 넷 낳았다. 또 낳고. 다섯 낳았다. 또 낳고. 왜 자꾸 낳습니까? “자식 키우는 것이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게 아니고 계속 나오는 그게 자신의 부활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다 하지만 살다보면 죽을 때는 즉각 죽어요. 죽고 난 뒤에는 이내 몸이 뻣뻣해집니다.
의미?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숨만 거두면 몸이 갑자기 뻣뻣해지는데요. 사지도 억지로 펴야 되고요. 바짝 마른 뼈처럼 되거든요. 이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의미, 의미,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는 없어요. 밥 먹고, 잠자고, 살고,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기계지요.
기계한테 무슨 의미를 붙입니까? 의미가 있다면 기계 같은 곳에서 생명이 나왔다는 자식한테 의미가 있을 뿐이에요. 자식 없는 사람들한테는 속상한 이야기지만. 조카라도 예뻐하고 양자 들이고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언니는 자식을 네 명 낳았어요. 그러니까 언니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얼레리꼴레리! 나는 네 명, 너는 제로.’ 이래요.
이건 뭐냐 하면, 네 명의 자식이 있다는 말은 너보다 네 배 이상, 그 이상으로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여자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남편으로부터 이렇게 네 명의 언약의 자식을 얻었다는 거지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는 너는? 사랑 좋아하네. 사랑은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널 사랑 안하네.’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소리 칠 건더기가 없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해야 여러분이 실감이 납니다. 만약 여형제만 다섯 있는 어떤 가정이 있다면 큰 딸 자식 다섯 명, 둘째 딸 네 명, 셋째 딸 세 명, 넷째 딸, 두 명, 막내 없음. 명절에 모여서 서로 자식 자랑들, 피아노, 수시모집……, 이렇게 하다가 막내 동생만 보이면 ‘쉿, 조용히 하자.’ 위로한답시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아이고, 저 막내는 죽으면 어쩔라고. 자식도 없는데.’ 아까 제가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죄를 찾아간다 했지요. 자식이 네 명 있다 할지라도 레아는 결코 그 언약을 보여주는 아내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언약의 내용이 확연하게 드러난 신약에 보게 되면 갈라디아서 4장 26,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의 어머니가 계신데요. 꼭 안 상홍 같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잉태치 못한 자는 땅에서 잉태 못하게 만들었어요. 땅에서 자궁을 폭파시켜 버립니다. 땅에서 잉태를 못하게 만든 이유가, 땅에 있는 어머니는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이 아니고 무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애를 낳아야 아프지 애가 없으니 아플 것도 없지요.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끼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남편을 끌고 들어와서, 나는 이 남편 때문에 자식 네 명 낳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라헬은 남편이 있으면 뭐합니까? 남편이 있어도 자식이 없는데.
그런데 라헬은 스스로 ‘나는 언니한테 졌다.’ 이 복의 경쟁, 힘의 경쟁에서 졌으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분노하고 화가 난다는 것. 화가 나서 남편한테 자식을 낳게 하라고 동침을 요구했을 때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야곱이 도리어 화를 내요.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당신의 남편이 나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참에 생각의 폭을 넓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언약을 언약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언약이 어디로 찾아가느냐 하면 죄 있는 곳으로 찾아가요. 언약이 죄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는 말은,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가 어느 정도 죄인인가, 어느 정도로 육인가를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 다가오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자식은 있어야겠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이런 약속은 있는데 아기를 못 낳으니까 거기서 인간의 근원적인 본래의 자리, 죄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가 되는데 그게 뭐냐? 시녀, 종을 통해서 자식을 낳겠다, 해서 하갈을 가지고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에요.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지상의 어떤 가정의 자식을 통해서 언약을 구체화시킵니다. 언약이 지상에 나올 때 왜 자식을 통해서 하느냐, 왜 그냥 사람이 아니고, 특정 남자도 아니고, 특정 여자도 아니고, 왜 자식이냐? 자식이라는 단어자체가 뭘 끌어오느냐 하면, 그 아버지가 누구고 엄마가 누구냐를 유발시키는 개념이 자식이라는 개념이에요.
자식개념은 ‘태어났다, 나 여기 있다.’가 아니라 ‘누가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부모와 자식과의 그 관계에 주목하게 만드는 개념이 자식개념입니다. 따라서 진짜 이 우주의 중심은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성부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기 독생자를 보내는 절차가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 언약을 지상에 구체화하는 데는 소위 힘 있는 자, 가진 자, 행세하는 자에게 오지 않아요. 없는 자, 폭파된 자, 힘자랑에서 밀린 자, ‘얼레리꼴레리’라고 조롱받는 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그게 인간의 본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무의 자리보다 더 작은 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시녀를 통해서 자식을 낳은 것도 언약의 자식이라고 인정해주세요.”라고 여기에 시녀가 나옵니다. 시녀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원수가 드디어 역사 속에서 해 떠오르듯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힘 자랑이 되어버리면 누가 힘이 세냐, 누가 뒤처지느냐, 누가 앞서가느냐, 마라톤 하듯 그것만 보이잖아요.
그러면 힘의 양, 힘의 다수로 결정되어버리면 무엇이 나타나지 않느냐 하면, 사탄이 안 나타나요. 악마라는 개념, 영어, 국어, 수학에 악마가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영어, 수학, 국어, 사회, 과학은 누가 힘을 많이 가질 거냐에 필요한 지식들이기 때문에, 정보이기 때문에 사탄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탄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으면,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짝을 맞춰 등장할 뱀의 후손 사탄이 등장하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에 사탄은 없는 존재가 돼요. 사탄이 없는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실재세계라 합니다. 그러면 실재의 반대말이 뭐냐? 진실이거든요. 사탄이 있는 것이 진실의 세계에요.
실재세계의 인간의 눈에 사탄은 없고 진실의, 진리의 세계에서는 사탄이 있어요. 진실은 실제에 가려져 감추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비유로서 이야기를 하지요. 감추인 것을 드러내게 함이라.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 그 보이지 않는 힘이 보이는 힘 때문에 가려져 있어요.
과학이 왜 악마적이고 과학이 왜 잘못되었느냐? 그것은 보이는 것만 계산해서 이 땅에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 땅에 사탄은 없다. 사탄이 없다는 말은 곧 하나님도 필요치 않다. 이 땅에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에너지, 힘이다. 잘난 사람만 잘 살면 된다.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끝!
그러니 어느 교회 가든지 그 교회 설교를 보세요. 힘을 주는 설교를 하는 교회, 그리고 교인들로 하여금 본래의 자리,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사탄의 약속에 휘말려 살아왔음을,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는 교회, 어느 교회가 참된 진실의 교회입니까?
교인수를 자랑하는 교회와 예수님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는 그 예수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 어느 교회가 진실인 겁니까? 힘을 전하게 되면 인간은 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저쪽은 자식 네 명? 난 하나도 없는데. 안 돼. 기도해야 돼.’ 이러잖아요. 그것도 안 되면 ‘나는 불임여성이니까 첩이라도 들여서 힘자랑에서 밀리지 않도록 하겠다.’ 이런 것들이 인간 속에 감취어 있는 사탄의 욕망의 요소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를 찾아갔는가? 신이 되는 것은 사탄의 약속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하면, “네 죄를 알렸다.”에요. 이게 바로 언약을 받았던 다윗이 시편 51편에서의 고백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함으로서 다윗 땡 잡았어요. 비로소 내가 선택해서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선택 이전에 다른 선택이 주어진 겁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육하는 동물원의 사자에요. 주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사료로 주면 우리는 그 아들을 뜯어먹음으로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왜? 예수님과 같은 죄의 동기생이니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서 다니실 때 그들은 풍선같이 부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고 기적 행하고 귀신이 나갈 때는 자기들도 같이 우쌰, 우쌰, 했지요.
사탄의 본능을 인간은, 육은 숨길 수가 없어요. 나는 대단한 분과 함께 있는 자라고 생각했고 그 제자들 중에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탄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짝을 이루어서 2인 1조가 된 거예요. 이 세상을 언약의 세계로 만들었어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네가 남보다 앞서리라, 그 유혹을 누가 배격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배격 못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이기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세상을 견뎌야 돼요. 그게 가짜인 것을. 비록 내가 원하는 가짜지만 가짜는 가짜에요. 그게 사실이에요. 현실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취직 잘되고, 예수 믿는다고 누가 돈 주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수입 증가되고 그런 것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병 낫고 그런 것 없어요.
하지만 예수 믿는 것은 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사육하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이 던져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완성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수모를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라헬은 언약의 여자, 진짜 야곱이 사랑하는 여자기 때문에, 언약에 충실하기 때문에 옛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와 같이 최초로 같은 길에 접어듭니다. “시녀 나와! 어이, 하녀 나와!” 하녀의 이름이 뭐냐 하면, ‘빌하’에요. 빌하 나와, 해서 남편에게 강권합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사래도 그렇고 오늘 본문 창세기 30장에서도 그렇고, 이게 남성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자가 주도해요. 이게 뭐냐?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통해서 사탄이 드디어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어요. 언약에서는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흙의 자손이 아니에요. 생명의, 하와의 자손이라는 말이지요. 여자의 자손이지요. 그래서 남자는 여기서 완전히 추락하는 겁니다.
나이 60넘어 70가까이 되면 남자는 돈 못 벌고 추락하지요. 연말 때 추락하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디 가서 새 달력 하나 못 얻어오는 것.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 새 달력 얻는 법 알려 드릴까요? 새마을금고에 돈 5만원 넣으면 달력 하나 줍니다. 얼마나 신세가 처참합니까?
주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의 언약을 지상에서 죄의 판으로, 아예 죄가 넘치는 판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특히 여자들은 자식이잖아요. 자식 키우는 것, 밥 먹이고 토닥거려서 잠재우고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그 영토가 예수님의 피 흘린 영토입니다. 여자가 자식 키우는 일상이 우리 하나님이 피 흘린 일상이에요. 같은 장소에요. 일치되는 겁니다.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자란 자식에게 정신 팔려 있고, 하나님 아버지는 내 아들이 거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거기에 주목하고 있고요. 라헬은 지금 정신없이 언니하고 남편의 사랑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어요. 얼마나 설움 받았으면 남편인 야곱에게 자식 낳게 해달라고 이야기했고 야곱은, 그 남편을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성을 지어보라는 식으로 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 쪽에서 맞바람 부는 거예요. 그냥 던져주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의 여자들은 뭐냐? 우리끼리, 육과 육끼리 하면 자식이 나온다는 겁니다. 자식 생깁니다. 하지만 그 자식은 많은 자식이에요. 많은 자식의 엄마는 지상에 있는 종년의 자식입니다. 그것은 지옥 갈 노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지옥으로 빠지는 언약이에요.
종의 노선은 율법의 저촉을 받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를 흠뻑 머금고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그러한 노선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멸망의 길은 찾는 이가 많고, 넓은 길이고, 생명의 길은 좁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걸 네 자로 이야기했지요. 집단자살이라고. 이 세상 모든 사고방식이라고.
집단자살을 배후에 사탄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우리네 과학적인,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는 사탄은 아예 없는 거예요. 사탄은 아예 없어요. 악마는 없어요. 힘만, 힘의 다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 힘을 가진 것을 정의라 하고, 힘없는 것을 벌 받아서 약한 것이라고 봐서 그것을 저주라고 봅니다.
사람은 각자 가진 자기 자신을 선으로 보기 때문에, 어서 이 지상에 정의가 바다같이 넘치기를 위해서, 꼭 아모스나 호세아 빌려다가 외치면서 촛불집회 하고 있어요. 누구를 위한 정의입니까? 사탄을 위한 정의를 부르짖고 있어요. 소위 기독교 신학교가, 교회가! 고객들이 원하니까요.
정말 의는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피투성이 된 그 분, 일부러 죄를 찾아오신 그 분이 정의에요. 그 관계가 아버지 아들관계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없습니다. 그 진리는 왜 그렇게 모르는가? 현실에 가려져 있으니까, 우리 실재에 가려져 있으니까. 그저 과학적인 실재만 찾는 거예요.
그 실재는 인간을 살리는 힘이 있어요. 인간을 살리는 것은 사탄의 일이고 인간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교회, 죽으려고 와야지요. 죽을 자리가 내 자리에요, 죽을 자리가! 산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현혹된 거예요. 악마에게 현혹되어서 ‘오늘도 살아봐야지. 밥 먹고 살아봐야지.’
밥 먹고 살 이유, 의미가 뭔데? 가만 보니 의미가 없거든요. “내 새끼 먹어야지.” 그 새끼 지옥 가는데요. 야곱은 언약 받았습니다. 언약 받았는데 두 아내가 불임여성이에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천국 가는 자식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태어난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특별혜택을 입어서 언약이 장착되어 있다는 증거물로 태어난 자식 외에는 언약의 나라 천국으로 못갑니다.
이걸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무슨 수로 증명합니까? 증명할 길이 없어요. 과학, 의사, 법률, 모든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보세요. 사탄의 존재와 언약의 실정에 대해서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언약 받은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비로소 오늘 본문이 이해가 됩니다.
아, 라헬이 실수를 하고 있고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라헬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라헬은 언약의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 라헬의 시녀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내부적인 갈등과 충돌과 오류와 결함을 야기 시킵니다. 육에서 나온 열 두 자식은 온전한 이스라엘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언약의 두 여인이 우리 현실의 실정을 그대로 보여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힘자랑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이 육의 마음을 언약을 통해서 노출시켜 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잘못된 실정가운데서 기적적으로 하늘나라로 올려 보낸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주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