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7:38-40 / 이삭의 저주

정인순 2017. 10. 4. 22:16

 

 

이삭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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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10월 4일                       

 

본문 말씀: 창세기 27:38-40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27: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인간들의 상당히 이성적으로 움직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하면서 어느 한 자식에게 축복을 했다면 다른 자식에게도 당연히 거기에 합당한 축복을 내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비록 아버지에게 착오가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의 권위로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합니다. 본래의 의도를 펼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서의 주장은 인간들 보기에 무리가 요구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라는 에서의 탄식 속에는 뭔가 사태가 확정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축복이 지닌 성격은 ‘확정적’이다는 겁니다. 완료적입니다. 수정 불가능하며 더 추가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축복의 성격이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의 외침과 거기에 대응하는 이삭의 저주를 통해서 저주가 어디까지나 축복을 위한 종속관계에 놓여 있음을 이해합시다. 즉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복이고 누구를 위한 저주란 말입니까?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주보다는 축복을 선호하는 내부의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축복과 저주의 조건에 대해서 벌써 본인 위주로 제작에 나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따로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합해서 같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저주 아닌 것이 축복이요, 축복 아닌 것이 저주입니다. 인간 나름대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것은 은연 중에 자기에게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 옳지 않고 축복이 임하는 것이 옳은 사태라는 것은 스스로 지지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이 지정하고 만들어낸 조건이 원인이 되어 세상이 돌아가기를 고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명확하기 위해서, 일단 우리가 불신자라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뿐입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부인해도 ‘나 여기 있음’만큼은 가장 확실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나’를 죽어서 좋은 곳에 보내기 위해 ‘신’을 구상하게 됩니다.

여기에 참고도서로 ‘성경’이 동원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신의 이름과 활동사항과 사건과 성질들을 규합해서 ‘신 만들기’를 시도합니다. 즉 신을 인간 자신이 조건 짓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만든 신을 내가 믿는 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축복과 저주라는 것이 이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하기’로 새로이 등장하는 겁니다. 즉 창조는 말씀의 선언적 성격의 발화물입니다. 예를 들면, 그림의 경우, 그 안에 그려진 사과를 보면서 우리는 ‘사과’라는 단어와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말하기’란 그림처럼 이미 대응 지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가 스스로 지시체를 창조해내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출몰하는 겁니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하기’에 의해서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19-20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천지는 모두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마지막 때에는 완료적 차원에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에 조금도 차질이나 결함이나 오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조건은 ‘결과적’으로 조성된 조건입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 ‘결과적 조건’을 실시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구상한 조건을 원인이 되어 그래서 거기에 합당한 결과가 생기기를 고대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의 자세입니다. 왜 축복이 하나뿐이어야 하느냐고 대듭니다. 이런 대듦은 곧 자신이 구상한 조건을 왜 고려해주지 않느냐는 반발입니다.

에서의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단면입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한 축복은 없음습니다. 저주를 경유해야 축복에 이릅니다. 인간의 선행적 조건은 선과 악을 토대로 구상한 겁니다. 즉 선하면 축복받고 악하면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에서와 같은 심보로 살기 때문에 축복에 대드는 저주적 본성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가 개인들마다 소유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결과적 조건에 준해서 봐서 모든 인간들은 다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인간에게 축복은 어림도 없는 욕심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예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에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같이 주어집니다. 그 증거가 로마서 9:11-13에 나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세상은 예수님의 속성에서 나온 말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펼쳐진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어떤 말씀으로도 자신의 구원 달성하기 위해 용도로 삼아버리는 저주스러운 본성을 발휘합니다. 이는 곧 ‘저주받음’에 합당한 성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 성질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장자됨을 드러내십니다.

곧 애초부터 야곱을 ‘큰 자’로 만들지 않고 ‘어린 자’로 태어나게 하신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자기가 잘되기 위한 결과를 위해 인간쪽으로 구상해내는 모든 아이디어가 하나님에 의해서 뒤집어지고 뒤바뀌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은 오직 예수님만이 축복임을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곧 예수님만이 ‘예스’가 되는 식으로 세상을 흘러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외는 모두 어두움이요 저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의 완료됨을 모르는 것이 다 저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에서 ‘아니요’를 유도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8강-창 27장38절-40절(이삭의 저주)1710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38절-40절입니다. 구약성경 39페이지입니다.
 
창 27:38-40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 대목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주하는 대목입니다. 저주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상당히 궁금해 합니다. 저주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 있을 때 저주라고 할 수 있는가? 보니까 이게 아우하고 관계되어 있어요. 저주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저주다, 고생한다, 그래서 저주가 아니라 어떤 특정분과의 연관성에서 그가 볼 때에 그와 같이 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38절에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라고 되어 있는데 에서가 본인도 모르는 채 십자가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이 에서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고 말았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적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누리는 그 위상에,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다 저주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하면 축복은 완료요, 저주는 미완료입니다. 축복은 느긋함이고 저주는 안달 남, 계속해서 몸부림치는 거예요. 느긋함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진 거예요. 이게 축복이고 저주라 하는 것은 그 위치에 이르지 못한 모든 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느긋함이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 하나 안에 들어올 때 더 이상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느긋함이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거지요. 그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저주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축복과 더불어 함께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제 입으로 저주가 뭐냐, 또는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면, 다 가지지 못한 상태, 이미 완료된 것이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래서 39절에 보면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그러니까 기름진 땅에서는 너의 주소, 거주지를 찾을 수가 없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하늘의 이슬이 내리는 그 지역은 너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계속해서 뭐냐 하면, 오직 하나뿐인 그대, 그런 노래도 있습니다만, 오직 하나뿐인 그 위치, 그것은 안정되어 있는 반면에 너는 늘 불안정하게 떠돌아다닌다는 말이지요.

40절에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없으니까 칼을 휘둘러서라도 빼앗아야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늘 결핍되어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저주됨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싶으냐, 그러면 네 아우를 보라는 말이지요. 네 아우와 확연하게 다른 처지에 있다는 것을 네가 알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 네가 언젠가 그것을 벗고자 한다면 그 멍에를 벗을 때는 있을 것이다. 에서가 세운 나라인 에돔이 있어요. 열왕기하 8장 20절에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약간 어려운데요, 이 어려운 것을 설명을 해 봅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과 저주를 던지잖아요. 그림을 보게 되면 그림 속에 사과가 있고 우리가 그 그림을 보는 자라면 그 그림속의 사과와 내가 생각하는 사과하고 일대 일의 지시체가 그림에 딱 박혀 있어요. ‘사과? 알지. 그림 안에 사과 있네.’

사과라는 지시체하고 내가 아는 사과하고 일대 일 대응이 됩니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림하고 달라요. 말을 한다는 것은 없는데서 그 지시체를 새롭게 생산하는 겁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라고 말을 했거든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말하는 순간 창조는 말씀의 선언적성격의 발화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선언을 해버리는 겁니다.

선언을 하게 되면 그 선언한 성격대로 실제로 없는데서 새롭게 발생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말씀이라 하면 어려우니까 쉽게, 하나님의 선언적 말하기. 예수님의 말하기. “네가 교회의 반석이 되리라.” 이렇게 말하기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익히 아는 것이 아니고 “없어, 없어. 그런 것은 없어.” 그런데 “어? 생겨버렸네.” 이럴 때 “도대체 누가 이렇게 생기게 했지?” 그게 선언적인 거예요.

주님이 선언한 대로 세상은 그 결실물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축복 저주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상한 축복 저주가 아니고 축복한다, 저주한다는 그 말에 의해서 없던 축복 새로 생기고 없던 저주 새로 생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꾸려나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흐르는 것이 아니고 출몰하는 거지요.

교회로 출몰하는 거예요. 귀신 출몰하듯이. “여기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아주 어렵게 말하면 뭐냐?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언어의 문법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문법의 예를 들면, 모래위에 남겨진 개미발자국, 그게 하나님의 문법이에요.

모래위에 남겨진 개미발자국. 그 개미가 하나님의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의 세계를 구성하는 문법이라면 인간의 입장에서 누가 그걸 눈치 채겠습니까? 인간의 언어라 하는 것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도록 소통하는 것, 자기한테 필요한 언어만 언어인 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왜 하는가?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은 뭐냐?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의 결과물이고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말씀이라고 하면 어려우니까 그냥 말하기, 하나님의 말함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 말함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세상은 이미 성격상 두 개의 성질로 되어 있어요. 축복과 저주로 되어 있는데 어떤 인간치고 저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늘 에서도 화가 나는 이유는, 나는 축복을 원했었다는 거예요.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에서를 불러서 “네가 뭘 원하지?” “나는 축복을 원합니다.” “네가 축복이 뭔지를 사전에 알았느냐?” “알지요. 내가 잘되는 것.”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네가 잘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축복된 말을 던질 때 그게 축복”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너는 네가 마음속에 생각한 그것을 가지고 축복이니 저주니 그렇게 했는데 그 조건은 어디서 나왔는가? 에서 본인의 조건이에요.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조건은 본인이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원인적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이미 이 지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하기의 결과물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뭘 배제하느냐 하면, 내가 원한다는 것, 내가 기대하고 내가 계획하는 모든 조건은 완전히 주님 앞에 배제당하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지요. 능동적으로 내가 무엇, 무엇을 하고 싶다는 이것은 나의 계획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에서의 모습이에요.

“나는 에서보다도 야곱을 좋아해요. 야곱이 복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 복을 원합니다.” 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는 그러한 절차는 없어요. 우리 쪽에서 축복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무엇을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저주를 경유해야 됩니다. 왜 저주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저주라 하는 것은 내 조건에 맞는 결과물일 거라고 기대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나 좋으라고 있는 세상일거야, 라고 시도했다면 우리의 마음과 에서의 마음이 일치되는 겁니다. 에서가 열심히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든 이유가 뭡니까? 저주받으려고 했어요? 복 받으려고 했지요. 아버지가 말을 던집니다. “에서야,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하면 너에게 복을 줄게.” 할 때 그 아버지 이삭도 에서도 전부 다 하나님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하면 축복은 보이지 않고 저주만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은 전부 다 저주입니다. 그래서 불로써 멸망당하거든요. 꼭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 이야기를 해야 이 세상에 대해서 손 놓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불로 타버릴 겁니다. 저주에요. 저주에 놓여있을 뿐 축복은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아담이 죄를 지었기에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뿐이에요. 축복은 넘보지 마세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축복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그러니 야곱도 마찬가지고 에서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축복에 대해서 논의하고 사전에 기대했다는 것은 사전에 몽땅 하나님께 속아 넘어간 거예요.

하나님은 축복의 미끼를 던져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자신에 어떤 존재인가를 발각되게 만들었습니다. 대들게 만들었고 반항하게 만들었습니다. 축구에서 비겁한 것은, 심판도 경기의 일부라 하는데, 지고 난 뒤에 심판 때문에 졌다는 것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남자답지 못하고 좀 비겁해요. 그런 축구팀 보면 좀 비겁하지요.

졌으면 진 것이지요 뭐. 심지어 5대 빵으로 져도 심판 때문에 기분 나빠서 졌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모습이 에서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오늘날 자기 인생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감상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항상 뭔가 불평을 갖고 있어요. “내가 이러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하는 식으로.

“내가 이런 꼴 보려고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주님이 심판을 잘못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욥도 마찬가지였고요. “하나님이 무슨 행정 처리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장부 다시 한 번 보세요. 이상하네, 정말.”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래요. 축복이라는 것은 우리한테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조건을 걸었어요. 힘들게 살지만 나름대로의 일부의 축복과 그리고 저주를 내가 따로 조건 짓겠다고. 그래서 인간은 축복과 저주를 무엇과 결부시키는가 하면 선과 악으로 결부시킵니다. 선하면 축복 악하면 저주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악마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겁니다. 그것 속이라고 하나님께서 마귀를 일부러 이 땅에 퍼트린 겁니다. 욥기에 나오듯이. 선악 그 자체가 이미 저주입니다. 이미 알아버린 선악에서 바르게 살면 되지. 그런 구질구질한 핑계대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돼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떤 인간이냐 하면, 자꾸 조건을 만드는 인간이고 그 조건은 우리가 선과 악에 기초해서 그래도 일말의 저주를 벗어나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는 뭔가 불안정한 과정 속에, 미완료 속에서 헤엄치고 있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축복이라 하는 것은 이미 완료된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예수 안에서 완료가 되고 말았어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패스, 또는 예스, 일 참 잘되었다, 멋있다, 끝내준다 정말, 멋지게 잘되었다, 그런 이야기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완료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종말이라 하는데 종말이라 하는 것은 손을 털어버렸어요. 더 추가적으로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아요. 재림은 그냥 나타남이지 추가된 행위가 아닙니다. 재림은 주님의 영광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재림이라 하지 새삼스럽게 일을 벌이시는 것이 아니에요. 더 추가해서 보탤 것도 없어요.

인간이 선악이라는 자기조건에 미쳐가지고, 안달 나서 이렇게 설치고 저렇게 설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스스로 도 닦고 혼자서 울고불고 온갖 것 다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팔짱끼고 “뭐하니 너 지금? 지금 뭐하고 있니?”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믿음이 뭡니까? 행함을 안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행할 필요가 없기에 그래서 구원은, 믿음은 은혜로 주는 거예요. 선물로 주는 거지요. 우리의 몸부림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외침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선물로 준 거예요. 선물로 주니까 뜯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손댈 필요가 없어요. 완제품에 왜 그리 낙서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인간은 맨 날 거기에, 은혜에 낙서를 합니다. 오늘도 선했다, 오늘도 악했다, 거기에 자기 조건을, 낙서를 하는데 이 조건은 주님 홀로, 아까 본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예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스스로 조건을 만들었어요. 주님 스스로 조건을 만들었는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결과적 조건이에요. 이미 주님은 결과로 다 드러난 그 조건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이밉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님이 속성에서 나온 조건이기에 주님 안에는 저주도 있고 축복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주와 축복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딱 붙어서 있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축복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 빼놓고 몽땅 다 저주로 만드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만 예스가 되기에 나머지는 다 ‘노’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여, 십일조 가져왔습니다.” 노! “제가 꽃꽂이를 했습니다.” 노! “제가 천명을 전도했습니다.” 노! 오직 그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홀로 하신 그 결과적 조건에 비해서 원인적 조건으로 들이밀기에 주께서는 노! 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주께서 결과적으로 완성했는데 새삼스럽게 네가 전도하고 네가 헌금을 해버리면 그것은 결과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 밖에 안돼요.

“주님, 보니까 십일조가 빠졌네요. 제가 십일조를 해서 마저 채우겠습니다.” 이런 짓은 악마가 부추겨서 하는 거예요. 축복이라 하는 것은 안식이고 누리는 겁니다. 더 할 것도, 보태거나 뺄 것도 없어요. 요한계시록 보세요. 더 빼거나 더하면 천국에서 제거해버린다는 거예요. 천국은 축복이잖아요. 축복은 그 자체가 완료잖아요.

그런데 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38절 봅시다.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다시 말해서 두 개가 복이 있을 수 있고 저주를 없앨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는데 지금 에서는 뭐냐 하면, 이미 완성된 결과를 보지 못하고 어떤 축복을 새롭게 구성해야 되는 것처럼, 완료인데 미완료적인 축복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해서 따내는 식의 축복을 생각하는 거예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다, 예배참석하면 복 받습니다, 바르게 순종하면 복 받습니다, 이게 전부 다 저주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저주의, 저주스러움의 발화물이에요. 그냥 악마의 외침이라고 보면 돼요. 악마의 목소리, 악마의 혓바닥이라고 보면 돼요. 38절이 참 어려워요.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이것을 제가 결론적으로 이렇게 설명했지만 결론을 안 들었다 치고 이 본문을 설명해 봅시다.

그러면 누구 말이 설득력이 있느냐 하면, 에서 말이 설득력이 있어요. 아버지 자식이 두 명밖에 없는데 아버지가 누구는 복주고 누구는 저주할 권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 같은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실수 했잖아요. 실수를 해서 복이 저쪽으로 갔다면 이미 준 복을 회수할 수는 없고 “그래. 너도 복 받아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게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합당한 말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해석할 때는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가 신자라고 보지 말고 불신자라고 봅시다. 항상 우리는 성경 볼 때, ‘내가 바닥이다.’ 한다면 이 성경 보기 전에 가장 절실하게 있는 것은 ‘나’가 있어요. 내가 제일 먼저 있어서 만지면 손에 만져지잖아요. 아무리 안 믿는다, 안 믿는다 하지만 진짜 믿을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이것만큼은 내가 부인할 수 없어요.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장래에 잘되기 위해서, 죽어서 좋은데 가기 위해서, 또는 심적으로 안정화를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신, 하나님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내가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만들 필요가 있지요. 만드는데 참고 도서가 성경입니다. 성경 가지고 여기 나오는 여호와도 가져오고, 거대한 신학체계를 이루는 겁니다.

박용기니 그런 사람들처럼. 여호와를 가지고 신학체계를 만들어가지면 심적으로 안정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좋은 말은 다 뽑아가지고 신학체계를 갖췄으니까. 이게 바로 제가 이야기하는 나를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조건이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축복했다. 오케이. 하지만 예수님만 축복하지 말고 나도 같이 축복하게 되면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믿겠습니다.

자, 축복은 예수님이 주셨고 그 다음차례는 나다. 내가 축복을 어떻게 받을래, 라는 것이 제가 설교 내내 이야기한 미완료요, 미완성이요, 그게 악마의 사고방식이요, 그게 에서의 외침이라 그 말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어야 됩니까? 하나님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말 하려고 목회 참 오래했다. 하나님은 없어요. 왜? 내가 여기 있는 이상은 하나님이 없어요.

내가 여기 있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 삼위일체, 성령, 복음, 좋은 것 다 끌어 모아서 신학체제를 세워보세요. 마귀적발상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이 왜 있어야 되지요? 결국은 나만 여기 있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것이 우리의 속일 수 없는 근원적인 우리의 본성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저주받아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복 받아라. 이미 조건은 우리 쪽에서 갖추고 있는데요. 조건을 이미 우리 쪽에서 갖추고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내가 만든 조건대로 세상은 움직여라. 그러면 그 하나님을 내가 믿어줄 용의가 되어 있다. 그게 불신자잖아요. 그러면 교회 나오는 사람도 뭐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있겠어요? 이것을 한 방에 깨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결과적지시가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요,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난 안하렵니다.”가 나와요.

이것은 아무나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돈 오백원 줘야 가르쳐 주는 건데요.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게 되면 “하나님, 저 그거 안하렵니다.” 하는 말이 나와요. 반드시 주님의 완료가 오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그 순간 나의 음흉한 미완료속성, 성격이 팍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내 자존심 때문에 그거 안하렵니다. 나 그거 거부하겠습니다.”

밤에 잠이 안올 때가 있지요. “주님, 저 오늘 잠 안자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선언적 성격이 뭐냐? “잠 자! 잠 자 인마!” “예” “나는 오늘 밤에 밤샘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계획이지요. 능동적입니다. 주님은 “잠 자!” “예” 그래서 자는 거예요. 주님의 모든 지시는 반드시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나 그 일 안하겠습니다.”

이게 하나의 짝꿍이 되어서,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등장합니다. 이게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해석법이에요. 모든 제자들은, 설마 그럴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항상 그래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고난 받고 죽으리라.”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말씀, 예수님의 속성에 의해서 저주밖에 없어요. 저주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자기 나름대로 조건 지워서 저주냐 축복이냐를 본인이 결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임해버리면 저주의 속성이 노골적으로 탁 튀어나옵니다. “주님, 이거 내 계획 아닌데요? 이런 식으로는 인생 못살겠는데요?” 반항기가 탁 나오지요.

“예수님, 제가 받을 복이 이것뿐입니까?” 이런 거요. “저 사람은 착한데. 저 사람이 지옥가면 주님 보기에 굉장히 아까울 건데.” 이런 것. 에서는 인류의 단면입니다. 소시지를 끊어버리면 단면이 나오잖아요. 모든 인류를 끊어버리면 에서의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여, 이 저주 나는 싫습니다. 안 받겠습니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나는 따로 조건 지워진 나의 세계관, 현실관, 내 인생관 따로 꼬불쳐 놓았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할 때 욥이 그것을 유감없이 보여줬지요. “나는 이 짓 안하겠습니다.” “해!” “예” 그건 정말 성령세례 받았어요. “안하겠습니다.”를 거쳐서 “예” 그래서 저주와 축복이 떨어지지 않고 결합되어 있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안의 속성이 이 세상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축복 없는 저주가 없고 저주 없는 축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성을 그대로 세상에 깔아놓아 버린 거예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어떤 축복이라는 것도 애초부터 기대하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아예 후벼 파듯이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거든요. 자, 그러면 주님의 작전이 뭐냐? 이게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데요. 주님이 결과적으로 어떤 조건을 만들었다 하는 것은 이게 누구자격이냐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이걸 만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스스로 결과적 조건을 일방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어려운 것인데, 이런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데 좀 참아야 돼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11절을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이걸 제가 어렵다고 했는데 어려운 점을 말씀 드릴게요. 우리가 이 본문을 이야기하게 되면 ‘아, 주님께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창세전에 결정했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 이해를 할 때 뭔가 빠진 것이 있어요. 아까 분명히 원칙을 말씀드렸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여, 이런 식으로 하면 나의 존재는 뭐가 됩니까?”라는 본성이 이 말씀이 주어지는 순간 같이 따라 나와 줘야 돼요.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뭐가 됩니까? 인간의 존엄성은 뭐가 됩니까? 인간이 기계입니까? 로봇입니까?” 이런 것이 따라 나와야 돼요. 그 다음 구절은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러면 우리는 시다바리입니까?” 딱 이렇게 나오거든요. 다시 말해서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이 주님 앞에서 아주 웃음거리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완료 앞에서 나의 어떤 시도도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나무라는 식으로 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모든 인간은 아담 속에서 저주밖에 없고 축복은 감춰져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뭐냐?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되어 있거든요. 이게 ‘네가 아우를 섬긴다’ 하는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렵다는 말이 뭐냐?

그러면 처음부터 주님께서 야곱을 큰 자로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야곱을 맏이로 하고 에서를 차자로 만들어버리면 그것은 왜 안 되는데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야곱을 사랑하기로 했다. 이것이 완료된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했다. 이게 완료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조거지운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여기서 ‘아, 야곱은 구원받았구나. 에서는 저주받았구나.’ 하는데 그 해석은 안 된다고 제가 말씀드립니다. 왜냐?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이야기해야 되지 “나는 구원받았대. 너는 저주받았대.” 구원론으로 미끄러지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론이 될 것 같으면 뭐가 문제냐 하면, 그러면 애초부터 야곱을 맏이로 했으면 중간에 아무 껄끄러운 것도 없이 깔끔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게 구원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론인데,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예수님을 어디서 증거 하느냐 하면, 인간에 의해서 밉상 받고, 인간에게 배척당하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십자가라는 언약, 십자가라는 완전히 전복된, 거꾸로 된 복음, 거꾸로 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함이지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는, 큰 자가 큰 자고 어린 자가 어린자라는 그것이 확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를 이 땅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축복은 빛이고 저주를 어두움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요한복음에서 그렇지요. 이 말은, 축복과 저주는 개인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의 사적인 문제해결용으로 축복과 저주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여, 컬컬하고 답답합니다. 축복해 주옵소서.”라는 말을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왜냐하면, 축복과 저주가 개인용이 되어버리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서 거꾸로 된, 정상이 아닌, 미친자라는 것이 들통이 안나요.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지요. 인공지능 가지고 설교하면 안 됩니까, 하는 질문이 우리교회에 올라와 있어요.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답변을 했어요. 인공지능으로 설교가 가능해요. 인간이 인공지능하고 바둑도 두었잖아요. 모든 데이터를 조합해서 아주 은혜롭게, 쉽게, 예화까지 사용해서 하면 은혜롭겠지요. 문제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데이터를 모아도 그 수집한 설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하는 설교가 죄라 하는 요소는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가 원인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설교하니까 복 주세요, 하는 거래가 반드시 형성되어 있어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빙빙 돌다가 결국은 자기증거에요. 나 잘남의 증거입니다. 이런 성격을 누가 단면으로 보여주는가? 에서가 이것을 단면으로 보여주라고 에서로 하여금 결국 뒤처져야 될 인간을 주님께서 인간들을 속이기 위해서 에서를 맏이로 딱 당긴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에게 속아 넘어간 겁니다. 그 속인자가 야곱이고 야곱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이름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모든 인간을 다 속여 버린 겁니다. “너는 선악 안다고 해서 그 선악 자체가 저주인 것을 인정안하지? 내가 확 끄집어낸다.” 완전히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개인용도로 하지 말고, 본문이 창세기 28장인데 요한복음 1장까지 딱 끌어당겨버리면, 아하, 축복과 저주는 개인소유용이 아니고 그 사람의 위치, 지금의 자리 자체가 어두움이냐? 그러면 저주고, 빛이냐? 그러면 복인데 문제는 빛은 감춰져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빛으로 왔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오늘날도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있지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령세례 받은 거냐? “주님, 이것까지 해야 됩니까?” “해!” “예” 처음부터 예, 가 아닙니다. “주님, 이런 인생 나는 더는 못삽니다. 나도 처박힐 대로 처박혀서 더는 못 처박히겠습니다.” “처박혀!” “예” 은연중에 내 구원욕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다가 한방 먹은 거예요. “이미 네 인생의 결과는 확정되었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축복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이 왜 저주일 수밖에 없는가, 그게 남아 있는, 다음시간에 할 야곱의 사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이기주의고 개인주의인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마저 나의 소유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잘났다, 나 잘났다, 를 증명하려고 마귀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실은 주님 앞에 속았습니다. 이제는 속은 채로 십자가 앞에 나타나서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한 용도로 쓰임을 받는 것이 바로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