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7:8-14 / 아버지 속임

정인순 2017. 9. 20. 21:41

 

 

아버지 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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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27:8-14

(27: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27:9)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27:10)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27: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27: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27: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27: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구원받을 사람은 죽어서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의 땅의 생활도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해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첫 번째 아담의 후손이라서 뭐든지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본인에게 실익이 되고, 본인의 단독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성향으로 마음이 가게 마련입니다. 성경 전체로 볼 때, ‘동행’이란 ‘보이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인간 존재’ 뿐입니다.

따라서 이 인간 사회란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매사가 이어지고 진행되는 것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외가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은 축복을 내릴 조건을 단독적으로 자기 취향에 맞게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건이라는 것을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축복은 장자 에서에게 주도록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축복 조건’이라는 것은 실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구색맞추기에 불과합니다. 사냥해서 얻은 고기를 별미로 받으면 그것을 이유삼아 복을 내리겠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기를 잡아오는 이는 이미 아버지 이삭은 점찍은 놓은 에서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추가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축복권은 이삭이나 에서의 입장에서 이미 확정난 겁니다. 조건이라는 것도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 조건을 가지고 둘째 아들 야곱과 아내 리브가가 도전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특이한 점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이삭에 있어 축복조건이란 그저 형식 갖추기에 지나지 않고 본 내용은 아닌 겁니다.

본 내용은 ‘무조건 첫째 아들 에서에게로’입니다. 하지만 리브가와 둘째 아들 야곱은, 아무 것도 아닌 ‘형식’을 통해 내용 바꾸기를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아버지 이삭의 결심 자체를 문제 삼는 시도입니다. 즉 축복수요가 아버지 단독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유보되어야 될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 단독으로서 항상 미확정적 사항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삭이 이 속임수에 순순히 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속임에 속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원상복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즉 이삭은 자신의 사전 고집을 아들의 속임수에 의해서 포기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자신의 결심이 좌절되어 마땅하다는 점을 아들의 속이는 사건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아버지같은 감히 확정된 아버지 결심에 속임수도 도전한 그 자식에 대해서 더 혹독한 저주를 퍼붓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원해 아버지의 진정성이 줄곧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자신의 축복권자로의 권한 포기해버립니다. 이는 자신의 진정성이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축복받기로 된 야곱에 의해서 거꾸로 자신이 그냥 축복 주는 대행자로 자진해서 전락해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이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신이 하나님을 꾸준히 속여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를 통해서 타인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자기’를 스스로 자기를 살릴 책임자로 여기는 그 ‘자기’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기본 심성은 ‘이와 살아있으나 무조건적으로 실익을 챙기면서 더 살아야겠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동행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삶이 최종 목적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엄마 리브가와 함께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은 평소에 잘 안하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평소 심성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혼을 그 거짓말 안에다 다 집어넣은 겁니다. 즉 거짓말을 하지 않던 순간이라도 그 내면에는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하여!’가 꾸준히 발동하고 왔던 겁니다.

따라서 야곱은 새삼스럽게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면서 지니고 온 기본 심성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아들 야곱을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겁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이전부터 이삭 자신이 야곱과 주위사람과 하나님을 속여왔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무조건 살고 보자’는 정신은 모든 인류의 진정성입니다. 하지만 진정성이란 결코 진리가 이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진정성이 ‘거짓’임이 들통 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가짜 현실을 떠나, 가짜에 막혀 있는 진짜 현실로 넘어가는 경계막까지 인도함을 받는 경우를 가진 겁니다.

따라서 속지 아니하면 구원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속아야하고, 내가 믿은 하나님으로 속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내가 정합니다. 하지만 그 타인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부터는, ‘타인이 규정한 나’로 새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이삭의 가정은 ‘수순’ 문제를 다룹니다.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한 맏이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고, 그 끝을 위하여 시작이 있는 겁니다. 첫 번 아담의 맞은 저편에서는 ‘마지막 아담’이 계십니다. 첫 번 째 아담은 독자적으로 의미를 챙길 권한 없습니다. ‘마지막 아담’과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따라서 아버지 이삭은 자기에게 거짓말은 한 야곱에 의해서 비로소 자신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최후의 인물’과 동행해야지만 성도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속아넘어가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함’을 근거로 진리냐 비진리냐를 판정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주받는 겁니다. 저주란, 다른 현실을 맛보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거짓된 이 현실이 실제로 거짓됨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거짓됨으로 인해 예수님의 진리가 거짓말 취급 당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십자가는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소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고, 복음에 대해서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6강-창 27장8절-14절(아버지 속임)1709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8절-14절입니다. 구약성경 37페이지입니다.
 
창 27:8-14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누가 봐도 아들 야곱과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가 협의를 해서 아버지를 속이는 대목입니다. 아버지는 경품을 걸었고 그 경품의 조건은 맏아들 에서에게 가야될 조건인데 그 조건에 해당되지도 않는 둘째아들이 맏이에게 일방적으로 넘겨주는 아버지의 축복을 갈취하는, 가로채는 이야기죠. 아버지를 거짓말로 속였다는 그 대목입니다.

누가 봐도 아들이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 성경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겁니다. 원래 인간들의 이 땅에서의 시간개념이 뭐냐 하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라고 되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반대로 바꿉니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어야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의 끝은 항상 하늘나라에요.

그리고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 1장부터 땅의 이야기입니다. 칠일 만에 땅이 창조되었어요. 천지의 창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창조했다는 것은 없어요. 이 지상의 하늘 말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창조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된 것이 되니까 그런 말은 없겠지요. 그래서 끝을 위해서 이 지상에 시작이 있는 겁니다.

시작은 끝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순서를, 수순을 바꿔야 되는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속인 것이 아니고 아버지 이삭이 사태를 악화시켰어요.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히려 아들을 속인 것이 됩니다. 복을 줘야 될 자가 누군지를 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일단 일을 저질러 봤어요.

자기가 사냥한 별미를 좋아하니까 자기출발점을 자기시점에서 하게 되면 아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것 뒤집어야 됩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감히 아들이 아버지를 속이다니’ 이렇게 이해하거든요. 그게 아니고 지금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 때문에 사람 되는 겁니다.

아들 야곱이 안 속였으면 이삭은 지금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뻔 했어요. 진리는 나중에 나타나거든요. 믿음도 그렇게 진리는 나중에 나타나요. 마지막 때 나타나는 겁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와 선지자로 했던 그 모든 말씀이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서 정답, 진리를 이 땅에 드러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러니까 끝부분이 정답이고 초기부분은 그만큼 정답과는 먼 겁니다. 정답에서 그만큼 더 희미한 거예요.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발상의 전환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은 후에 있는 것이 앞엣것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는 거예요. 이삭이 아브라함을 살리고 야곱이 이삭을 살리고 요셉이 야곱을 살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택한 백성을 다 살리는 겁니다.

아담은 처음에 나타났지만 예수님은 어떤 아담인가? 마지막에 나타나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해요. 마지막 아담이 처음 아담을 살리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왜 중요한가 하면, 인간의 모든 의식은 뭐냐? 내가 일단 살아 있으니까 이유도 모르고 내가 존재하니까 무조건 계속 살아 있어야 되겠다는 그 일념만 하나의 엔진처럼 헐떡거리면서 가동됩니다.

“살아야지, 살아남아야 돼, 살아야 돼.” “왜 사시는데요?” “모르겠어.” 그것은 몰라요. 살아야 되고 더 살아야 된다는 그 이유를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것으로 근거를 제시하는데 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당겨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마땅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 있어야 됩니다.

첫 번째 있는 모든 아담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한테는 금지의 법이 없지만 첫 번째 아담한테는 금지의 법이 있어요. 다 아시다시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인간 만들어놓고 금지의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금지법과 결부된 인간 아담인데, 금지법이 없는 인간은 나중에 와요.

초창기 아담은 금지법의 테두리 안에서 놀아야 될 인간이에요. 그래서 첫 번째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 되는 겁니다. 비유가 되고 은유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독자적으로 온전한 의미를 다 챙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누구와 견주어야 의미가 발생되지 혼자서 열심히 살았다고 해서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의미를 다 꿰뚫었다, 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내 의미와 가치는 누군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될 때 비로소 나는 “저분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났구나.” 하고 추후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야 되는 겁니다. 동행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거든요. 동행이란 말은 홀로 가는 것을 동행이라 하지 않습니다. 동행이란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을 동행이라 하잖아요.

신약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역시 동행입니다. “주가 함께 하신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갈 때 주와 함께 있었어요. 폭풍이 이는 배 안에서도. 이게 동행이라는 말이지요. 동행이라는 말은, 동행을 했으면 한쪽은 보이고 한쪽은 안 보이는 쪽이에요. 안 보이는 분과 보이는 사람과 같이 동행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자꾸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기는 겁니다.

그럴 때 성도는 보이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분은 소개하고 증거 하라고 주께서는 성도와 함께 동행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가 어떻게 된 시대인지 소위 성도라 하면서도, 교인이라 하면서도, 신자라 하면서도 동행하시는 주님을 자꾸 떠밀어버려요. 떠민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을 안 봐요. 성경도 안보고, 동행하는 분과 대화하는 것을 기도라 하거든요. 기도도 안 해요.

그저 남들이 혼자 사는 것이 부러워가지고 ‘아이고 나는 언제나 저 사람처럼 되나.’ 생각해 보세요. 이건희 회장이 동행합니까? 정주영 회장이 동행했던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굉장히 부러워하지요. 혼자 사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잖아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혼자 살고 싶습니까?

나중에는 자식도 귀찮고 친구도 귀찮고 마누라도 귀찮고 다 귀찮아요. 자기 몸도 하나 간수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귀찮아요. 누구 찾아오는 것도 귀찮고 그래서 왔다가 가면 더 반갑고. 사람이 타고난 게 이미 범죄를 했기 때문에 누가 나를 지적질 하는 것을 굉장히 못 견디고 분노를 느낍니다. 옳은 이야기라도 누가 지적하고 잔소리하는 것을 싫어해요.

이것은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있는 본문을 보게 되면 이삭의 특징이 딱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축복을 줄 때 어떤 동행자도 없었습니다. ‘축복 누구한테 줄꼬?’ 본인이 결정해요. 본인 느낌대로, 자기성질대로, 자기 취향대로 그냥 축복 주겠다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몰아붙입니다. ‘보자. 큰 아들한테 주자.’ 그런데 큰 아들에게 주는 이유가 있어요.

큰 아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별미를 잘 만들거든요. 음식을 잘 만드니까 큰 아들에게 몰아주기로 작심을 했어요. 아무에게도 물어본 적 없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나중에 동행자를 발견하지요. 그 동행자가 누구냐? 야곱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동행자를 발견하는데 그 동행자의 발견이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나를 속이는 분으로서 하나님같은 역할을 한 아들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은 야곱의 거짓말의 피해자인가? 절대로 아닙니다. 야곱이 거짓말 함으로서 그는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게 되는 행운아가 됩니다.

아들이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속아 넘어가도록 조치를 해주셔서 비로소 이삭은 내가 일방적으로 알았던 현실 바깥으로 구원,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속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속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성이 있다고 봅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인간은 매 순간 진지합니다. 매순간 진지한데 어떤데 진지하느냐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나에게 실익이 올까? 실익이 있으면 나에게 사는데 더 도움이 되겠지. 따라서 내가 밥 먹고 사는데 있어서는 양보도 없고 긴장을 하게 되며, 거기에 대해서 정신 바짝 차리며 진정성 있게 살아갑니다.

내 목숨에 위해가 가해진다든지, 내 목숨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고 거기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저는 진정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진정성을 뭘로 번역하느냐 하면, 이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는데 이익이 되고 실익이 되니까 그것을 진리라고 철두철미하게 확보하고 살아갑니다.

더 쉽게 이야기할게요. 교인이 교회 나올 때 뭐가 진정성이냐 하면, 이 성경 내용이 진정성이 아니에요.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간에 모든 인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따지지도 않고 밥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이 진정성만큼은 내가 죽을 때까지 양보 못하겠다는 일념가지고 살아가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 그런 것은 다 스스로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이삭한테 거짓말하기 이전에 모든 인간은 진정성 있게 이미 하나님께 거짓말을 퍼부으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모든 인간이. 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진리가 아니에요. 진정성이에요. 어떤 진정성? 남이 죽든 말든 나만큼은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이것보다 더 절실한 현실감이 없어요. 가장 중요한 현실감은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그게 현실감입니다.

사람이 종교생활 하려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종교생활 열심히 하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없습니다. 종교생활 그게 뭔데요? 하나님 섬기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도 이 몸뚱이가 더 살아야 되겠다는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없어요. 이것을 살리기 위해서 종교생활, 신앙생활하고 예수 찾고 부처 찾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말 치는 거예요. 이삭은 독단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결정도 독단적으로 했어요. 이삭만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야곱도 이삭 자식이거든요.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에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리브가하고 야곱이 아버지 앞에 거짓말을 치는데, 야곱이 거짓말 안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다고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방금 설명했잖아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잘되고 자기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돌아오는 것이 가장 우선이에요. 그렇다면 야곱이 여기서 거짓말을 했다는 말은 평소에 거짓말 안하는데 이 대목만 거짓말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힘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서 자기의 진정성, 내가 무조건 장자 되고, 살아야 되겠고, 이득을 얻어야 되겠다, 혼신을 다해서 자기 인생에 거짓말의 이름으로 다 투자를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때로는 거짓말 하고 때로는 거짓말 안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거짓말이에요. 그 이름이 야곱이에요.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이 누구 아들이다? 이삭의 아들이에요. 이삭은 자식을 낳아봐야 자기의 본성을 알아요. “내속에서 저런 것이 나왔어?” 맞아요. 내속에서 저런 것이 나왔다는 말은, 저런 것이 내 안에 들어 있었다는 말은, 아버지마저 속이는 그 본성에 이삭은 그냥 껍데기를 덮어씌운 겁니다.


야곱 너나 아버지인 나나 전부 다 하나님 앞에 매일같이 입만 열면, 입 안 열어도 마음 자체가 속이고, 속이고, 속이는 세상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이는 목적은 뭐냐? 나의 실익, 실제적인 이익, 그 실익의 목적은 뭐냐? 묻지도 말라는,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이것이 진정성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양보해서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시급하고 우선입니다. 종교는 나중이고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에요. 신앙, 교회 20년 다녔다, 30년 다녔다, 목사 되었다, 장로되었다, 그것은 의미 없어요. 70, 80, 세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연세가 많을수록 본색이 노출되지요. 옛날 젊을 때는 잘도 꾸몄는데 이제는 꾸밀 힘이 없어요.

그것이 벗겨지니 짐승적, 동물적 본성이 그대로, 전에는 띄엄띄엄 노출되었는데 이제는 노출의 시간이 길어져서 많이 노출되는 겁니다. 입만 떼면 위선이고, 거짓이고, 실제로는 자기자신을 좋아하면서 주님 좋아한다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대고, 찬양하면서 해대고, 설교하면서 해대고, 설교 들으면서 해대고, 기도하면서 해대고.

성경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야곱이나 이삭이나 하나님 찾는 대목이 없어요. 아까 한 동행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동행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이 동행인데 인간은 동행은 진정성이 없어요. 보이는 내가 중요하니까, 보이는 내가 갑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나중이니까.

보이는 인간과 내가 어떻게 축복권, 상속권을 빼내는가, 아주 진솔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까짓 거 거짓말 그게 무슨 대수냐 그 말이지요. 실제로 나에게 이익이 온다는데. ‘내게 이익이 되지만 하나님 보기에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나중에 빼앗기고 난 뒤에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지금 에서의 문제점은 그가 거짓말을 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점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에서는 자기가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누구한테 속아 넘어가지 아니하면 지금 자기가 구성하고 있는 이 현실이 현실의 전부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현실에서는 모든 현실구성이 내가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그 위주로 구성하다 보니 그 현실구성에서 내가 실수를 했다는 느낌을 못 받습니다.

된 통으로 안 당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삭은 야곱으로부터 된 통으로, 결정적으로 거짓말에 당했어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야곱의 거짓말로 인하여 내가 알고 있던, 이삭이 알고 있던 현실, 그 바깥에 진짜배기 현실이 따로 있다는 그 경계의 막, 가짜 현실을 진짜 현실로 알고 있는 그 가짜현실과 그 뒤에 가짜 현실 때문에 막혀 있던 진짜 현실을 가름하는 그 경계선까지 야곱의 거짓말로 인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삭은 야곱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 때 야곱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그는 동행자를 얻은 거예요. “이 괘씸한 둘 째 아들. 내가 너를 가만둘 줄 아느냐? 네가 아버지를 속이다니. 네가 그렇게 나를 속인다고 해서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마음가짐, (다시 말해서) 맏이 에서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이 결심을 내가 변할 거라고 본다면 네 착각이야. 너는 더 못됐으니까 한번 당해봐라.” 이삭이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에요.

인간적인 생각 같으면 그렇게 나와야 맞잖아요. “이게 나쁜 짓을 하다하다 이젠 아버지까지 속여? 이게 겁이 없이 아버지를 물로 보나? 너 한번 된통 저주받아 봐라.” 그렇지 않아도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그걸 걱정했어요. “엄마! 이런 식으로 속이다가 내가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겠습니다.” 리브가가 말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맡기고 무조건 속여라.”

이 대목에서 보통 인간들이 납득이 안 되는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철딱서니 없는 그 마누라하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 눈이 좀 어둡다고 해서…… 정말 제가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야기 찬찬히 해 봅시다. 분명히 제가 아버지 이삭이라면 맏이에게 모든 것을 다 줍니다. 올인 합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가 안 되는가 하면, 맏이는 목소리가 컬컬하다, 맏이는 털이 많다, 그런 조건, 나는 별미 원한다, 그것도 염소고기 말고 산에서 사냥한 짐승으로 만든 별미 원한다, 그런 조건을 줬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이 조건이 중요한 겁니까, 아니면 내가 맏이한테 이유도 묻지 않고 또 조건이 달라지든 상관없이 그것도 묻지도 않고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맏이한테, 맏이한테, 맏이한테 다 준다는 이 결심이 중요한 겁니까?

그 결심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내 마음에서, 아버지 마음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그 결심은 중간에 어줍지 않게 그 조건을 위장해서 고친다 할지라도 결심이 바뀐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사나이로서 결심을 했으면 누가 그 조건을 위조했다 할지라도 결심이 바뀌면 안 되고 오히려 그 인간들을 벌줘야 되지요. 이게 우리네 상식이잖아요.

야곱이 거짓말을 해서 이삭한테 복을 따냈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본문을 다시 생각해야 돼요. 이삭이나 야곱이나 에서나 리브가나 이 네명 다, 뜻은 하나님의 축복을 아들에게 준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그들이 아는 현실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정에 끌리는 쪽에 자기재산을 주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게 내 마음이니까. 아버지 마음이니까. “왜 맏이한테 주려고 합니까? 맏이가 이방여자하고 결혼했는데.” “내 마음이다. 내가 주겠다는데 네가 왜?” 이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독단적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이삭은 타자, 남, 내가 있고 내가 남에게 주게 되면, 나 여기 있고 내가 주고자 하는 남은 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속임을 당했어요. 하나님의 뜻이지요. 속임을 당하고 부터는 내가 결정지은 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이라고 한 거기서부터 다시 나를 재조명하고 다시 돌아봐야 된다는 겁니다. 나는 에서를 내 결심, 내 의지, 나의 옳음, 나의 진정성 입장에서 내가 너에게 줄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가게 하셔서 야곱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입장에서 나는 과연 누구냐를, 타인의 눈에서 다시 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이삭은 부여받은 거예요.

찬찬히 설명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닌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거짓말에 이삭이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말씀이 육신이 되게 되면 성경의 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 거짓말에 우리가 속아 넘어갈 때 우리는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진정성은 누구 위주다? 나의 사는 것 위주에요. 내가 잘되는 위주에요. 그래서 우리는 믿고자 할 때도 이모저모 따져서 될 수 있는 대로 안속아 넘어가는 방법으로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십자가는 어리석은 거예요. 십자가는 미련곰탱이, 미련한 거예요.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한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은 이 땅에 오게 되면 전부 다 거짓말 치는 것이 되는 거예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 그것을 믿으라고?” 이런 투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들이 신실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로 하겠느냐.

개역성경 번역으로는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런 뜻이에요. 인간의 불충실함이 실질적으로 신의 충실함이 내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율법위반이 인간의 진정성한테는 불의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 사는 것을 위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거냐 할 때 이 땅 어떤 인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까지.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못 믿어요. 왜? 출발 자체가 내가 잘되어야 되겠다는 그것이 나한테 진리고, 불의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성실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내가 나를 보존하고, 사수하고, 나를 지키는 이것이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나에게 주어진 나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동행입니까? 그게 바로 처음인간의, 범죄한 인간의 보편적속성입니다. 바보 등신되면 되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지혜로운자 되려고 하고 어리석지 않으려고 하고 똑똑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만들잖아요. 왜 지혜로운 자가 지혜롭습니까? 지혜를 갖겠다는 그 목적이 뭡니까?

내가 나를 살리겠다는 내 의무에 내가 충실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지금 만져지는 내 몸뚱이를 천국까지 집어넣겠다는 나의 일념을 내가 지금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이 에서고 이것이 야곱이 오기 전까지 이삭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 이삭을 사랑하시잖아요. 너무나 이삭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에서 난 야곱이 아버지를 된 통으로 거짓말 쳐버립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이삭이 구원받지 않는 이삭 같으면요, “네가 감히 아버지를 속여? 네가 그렇게 흉내 낸다고 형에게 줄 축복을 ‘어이구, 잘했어요.’ 하고 너에게 줄성 싶으냐? 너 나를 잘못했어. 나는 한번맏이에게 주겠다면 그대로 주는 인간이야. 네가 네 어미와 합세해서 나를 속이면 내 성질만 더 돋우었을 뿐이야. 너 한번 저주받아봐라. 잘됐다. 이 참에 저주받아라.”

사실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야곱이 이것을 걱정했지요. 그런데 리브가는 믿으라는 거예요. 축복권이 동행이라는 겁니다. 이삭이 혼자 내린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이삭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전략이라면 하나님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원래 에서는 장자권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썼으니까. 먼저 태어난 마당에 신경 쓴다는 그게 더 이상하지요.

먼저 태어나서 이미 장자로 확정되었는데 그 수순이 바뀔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수순이 바뀌어야 돼요. 맏이가 나중 되고 나중이 맏이 되는 겁니다. 시작이 있어서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을 위하여 시작이 있는 겁니다. 땅을 위하여 하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위해서 땅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있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바뀜이 우리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거나 그거나 똑같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평소에 우리가 주님이 주신 선물로 나의 뒷통수를 치면서 거짓말로 다가온 진리를 복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나에게 실익이 있다고, 유리하다고 내가 잘못해석한 그것을 내가 믿습니다, 했던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조건하에 믿었던 거예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에스더입니다. 에스더라는 여인이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될 때에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호강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죽음의 자리였어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지만 야곱이 거짓말 쳐서 복을 따냈으면 그 복이 야곱을 살리는 복이 아닙니다.

야곱은 거짓말함으로써 그 거짓말이 야곱으로 하여금 죽게 만들어요. 목숨 붙어 있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목숨 끊어져서 죽는 그 죽음 말고, 목숨은 멀쩡해서 심장이 뛰고, 머리는 정상으로 돌아가는데 이미 죽었다는 판정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죽음을 하나님 만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만날 때 주님이 내 주가 되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을이 되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위신 바꾸기, 수순 바꾸기, 나중 오신 마지막 아담이 지금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믿을 수 없었는데, 우리는 그것이 거짓말 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고 다른 현실에서 넘어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지를 우리가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교회라는 그 업체운영하면서 사람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온갖 현혹되는 말로 천국 보내주는 여행사역할 하면서 살아온 것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성령이 오실 때 그 모든 것이 거짓이고 조작이고 위선이고 마귀짓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