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신명기

신명기 28:45-48 / 저주의 표적

정인순 2017. 9. 17. 18:06

 

 

저주의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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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9월 17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45-48

(28: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28: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28: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적’이나 ‘감계’라는 말은 모두 ‘징후’, ‘증거’, ‘기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이미 하늘에서 저주조치는 결정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 저주’의 징표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서 실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내려고 하는 투쟁과 그것을 뚫고 기어이 저주시켜버리시는 하나님의 힘 겨룸이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감히 하나님의 저주를 저지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결국 헛된 일로 마감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입장에서 절망적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저주를 모면하려고 하다보니 ‘저주의 표적’으로 작용하는 넓은 취지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면적인 저주 실시는, 곧 축복의 전면 실시를 몰고 오는 신호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주와 축복을 오직 율법을 준해서만 실행하십니다.

이 말은 곧 만약에 ‘저주 아래’에 있지 아니하면 저주가 주어질 근거조차 없다는 게 됩니다. 발상의 전환을 하시기 바랍니다. 삼천갑자 동박삭이 이야기를 떠올라봅시다. 저승사자 동방삭을 잡아간 저승사자 삼년고개에서 일부러 1000번도 더 넘어진 삼천갑자 동방삭이는 3,00천년을 살고도 더 살았다고 합니다.

한 번 넘어지면 3년 밖에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얼마나 낙담했겠습니까? 하지만 3×1=3 이지만 3×2=6이 됩니다. 즉 인간들이 율법 앞에서 즐겁게(?) 낙담하면 되는 겁니다. 백 번을 어기고 천 번을 어기고 만 번을 어기는 겁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처음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까이 갑니다.

그렇다면 게으려거나 성의가 부족해서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즉 애초부터 ‘표징’이요 ‘증인’으로서 그들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면 사용당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축복이라는 것도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제공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축복이 없는 걸까요?

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이 나오시는 겁니다. 즉 ‘인간 속에서 나오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상상한 하나님은 아예 없었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혼인을 하시겠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

왜 혼인이 필요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로마서 7:1-4에서는 율법에 입각한 혼인법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남편이 있는 이상, 신부는 철저하게 혼인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받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게 되면 신부는 더 이상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새로 혼인한 그 남편이 율법을 완성했다면 이는 곧 ‘신부의 율법 위반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인간에게서 나온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신랑의 위치에서 활동하는 방법으로 성립됩니다. 그 신랑은 일방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며 따라붙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요한 일서 4:10)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은 구약 아가서에 잘 나와있습니다. 왕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쫓아갑니다. 죽음 속으로 사라져도, 죽음보다 더 큰 사랑으로 꺼집어내어 자신과 혼인시키겠다는 겁니다.

이 끈질긴 사랑은, 창세기 2장에서,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존재했다는 원칙을 따릅니다. 즉 여자가 남편감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고릅니다. 여자는 남편의 확정된 신분과 가치와 영광을 공유할 뿐입니다. 아내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의 아내임’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율법 완성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한 부부가 나옵니다. 남자 이름은 ‘나발’이요 여자 이름은 ‘아비가일’입니다. 결국 남자 ‘나발’은 다윗에 의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죽게 되고 아내 아비가일은 즐겨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왜 나발이라는 자가 저주를 받는가 하면, 율법을 구체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라 다윗 일행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약 400명과 더불어 사울왕에서 쫓기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힘이 없는 무리를, 계산적인 나발이 후대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 아비가일은 달랐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쓰시던 분은 현 권세를 쥐고 있는 사울왕이 아니라 쫓겨다니는 다윗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남편 몰래 다윗과 그 일행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 도왔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나발에 대한 분노를 거두고 하나님을 믿는 그녀의 신앙을 칭찬했습니다.

남편 나발이 죽고 난 뒤에,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을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반된 태도를 통해서 남편 쪽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 아내 쪽은 ‘지혜롭다’고 평 듣게 됩니다. 이 상반된 태도를 나타낸 계기는 이들 부부에게 다윗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은 골리앗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낭패’ 속에서 ‘해결책’이 같이 드러나는 식으로 사랑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런 사건은 인간들이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의 유발은 모두 인간에게서 태어나신 하나님 덕분입니다. 그분으로 인해, 사랑이란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반대로 자기에게도 지킬 사람으로 전환되게 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의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구의 아내인가를 분명히 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51강-신 28장 45-48절(저주의 표적)1709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45 - 48절입니다. 구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아멘’소리가 갑자기 확 취소됐는데, 지금 계속 저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주 이야기는 그만, 그만, 그런 부정적 결과는 그만, 그만 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마음이 편치 못하니까 그냥 넘어 갑시다” 하겠는데, 발상을 한번 전환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골짜기 넘어가다가 넘어졌거든요. 거기 옆에 사람이 “당신 3년밖에 못 산다” 했습니다. 그 순간 굉장히 절망적이었습니다. 근데 계산해 보니까 한번 넘어지면 3년, 두 번 넘어지면 6년, 또 넘어지면 9년, 이건 뭐, 몸만 건강하면 영생까지, 천년도 살겠어요.


 


“네가 말씀을 안 지킬 때에 저주 받는다” 할 때에 우리는 발상을 전환해 봅시다. 저주 조항이 이미 제시 되었다는 거예요. 이미 저주 조항이. 그러면 무엇에 준해서 저주가 온다는 그 사태를 우리가 미리 파악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저주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저주가 없는 거예요. 이거 완전히 땡 잡은 발상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 부을 때는 근거 없이 저주를 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율법을 통해서 저주를 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율법 밖에 나가면 저주가 올려도 저주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주님의 하신 일의 일관성입니다. 율법을 위반해도 해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의. 내가 율법을 위반해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사실은 그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 이야기 하고 싶어서,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 유포를 시켜 오신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위반자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위반자가 된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꼼짝없이 저주 아래 갇히게 되는 겁니다. 저주 아래 갇히게 된다면 우리는 뭐만 요청하고 뭐만 기다리면 되느냐 하면 ‘주님이여, 율법으로 저희들을 다루지 않는 방식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는 결코 없습니까?’ 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것도 머리 좋은 사람만 들지만. 뭐냐 하면 율법을 완성 시켜 버리면, 더 이상 두 번 다시 우리한테는 율법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그 관계를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었는데, 그 관계가 이사야에 보면 처음 나옵니다.


 


“나는 너와 혼인했다”라고 나와요. “이스라엘에 나, 니 남편이데이~, 나는 너의 남편이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아내와 남편 관계라는 것이 처음으로 이사야에서 등장하는 건데, 아내와 남편 관계를 의미 있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는 지금 우상과 결혼관계에 있다고 먼저 그들로 하여금 개판 치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개판 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고 난 뒤에, “니가 지금 바알하고 결혼했는데 이제 부터는 나와 결혼 하자” 해서 주님께서는 자기가 남편으로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해 버려요. 그렇게 되면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이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성경이. 참 희한하죠? “니가 만약에 남편하고 결혼을 했을 때에 너는 일단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혼인법에 매어있다”는 겁니다. 혼인법에 매이기 때문에 남편이 있는 관계에서는 간음 법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간음 법에 어긋나면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적용받기 때문에 이혼계약 관계없이 우리는 저주 받게 되어있어요. 이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만약에 죽었다면 더 이상 남편 법에, 혼인법에 얽매일 필요 없지 아니하느냐고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해요.


 


요번 토요일 날 결혼식이 있어서 제가 주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광주에서 해요. 그 유명한 십자가마을의 악한(?) 그분의 따님이, 김을수 집사님 따님이 결혼을 하는데, 연관이 되면 좀 많이 들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분이 그 전에 내 놓은 게 많아요.


 


그 주례에 이 본문을 가지고 해볼까 이런 생각했는데, 아내와 남편 간에 법, 이렇게 남편이 살아 있으면 남편은 법을 요구하게 되고 아내는 그 법을 따라가게 되는 데 문제는 이겁니다. 한 발자국 가게 되면 남편이 두 발자국 물러나요.


 


“자, 이만하면 제가 아내 값을 하지요?”라고 하며 다가가면 남편이 “그 정도로 되겠어?”라고 하며 두발자국 물러나요. 백지영 노래에 그런 가사 있어요. ‘한 발자국 다가가면 두 발자국 물러서고’ 이렇게 하다가 “아이고 못 지키겠네” 이러면서 멈추면 같이 멈춰요.


 


“내가 성경말씀 이정도 지키면 지켰다고 해 주세요”하면 “그것 가지고 되겠어?” 하고 벌써 틈이, 간격이 생겨버려요. 아무리 따라잡고 따라잡아도 율법은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계속 율법관계에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이 방법을 해결해서 이 저주에서 벗어 날거냐?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모습을 보여주시는 데, 그 율법의 완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율법에 매어 있는 사람에게서 톡 튀어나왔다 하면 좀 곤란하지만, 사람 몸에서 율법의 완성 태가 튀어 나와 버린 거예요.


 


사람에게서.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던 하나님이에요. 그런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예 없었던 겁니다. 그런 하나님 없어요. 분명히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거 맞는데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한 그 문제 대해선 인간들은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은 인간 속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사람 속에서 나온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건 율법을 가지고 나온 하나님이에요. 같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나온 하나님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새로운 혼인관계에 들어서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미 우리한테 더는 율법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 하나님이에요.


 


따지기는 하지만 율법에 책임지라고 하지 않는 괜찮은 남편을 만나는데 그 남편의 영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 방금 제가 설명한 로마서 7장 1절에서 4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기가 차지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신명기 28장의 저주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 신명기 28장 저주를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주신다’ 하면 우리는 결과만 겁내요. ‘안 돼, 안 돼, 나 저주 받으면 안돼’ 여기 보면 저주가 엄청나죠. 처참하게 망가집니다. ‘나 망가지면 안 돼, 망가지려고 대통령 된 거 아니잖아’ 이러고 있는 데 가만히 보니까 그 저주가 율법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거예요.


 


아,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된 어떤 분과 내가 혼인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혼인을 하려면 한번 혼인 했다가 헤어지고 이러면 안돼요. 온전한 혼인이 되려면 아내가 “혹시 남편 돼 주시렵니까?” 이러면 온전한 혼인이 아니에요.


 


왜냐면 여자가 남편을 선택하는 것은 창세기 2장에 어긋납니다. 남편이 먼저 있고 일방적으로 그 남편을 위해서 배필 자로 여자가 붙거든요. 그래서 여자가 남편을 고르는 법은 없습니다. 그 아마존 강에 있다는 여신이면 모르지만,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아내를 일방적으로 아내를 삼으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율법주고 율법을 완성한 내용이 소위 지혜 문서라 해서 구약에서 전도서, 잠언, 시편, 그리고 나온 게 ‘아가’가 나옵니다. 아가서가 나와요. 아가서의 내용은 스토커입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완전히 개무시 하는 겁니다. 상대방 의사를 완전히 무시해요.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니가 죽어? 내가 죽음까지 따라 갈게’ 그겁니다. 요번 토요일 날 제가 주례를 하는데 주례준비를 벌써 하고 있습니다. 주례내용이 대충 이렇게 될 거예요. 또 이렇게 해놓고 이렇게 안 할 가능성이 많지만 이렇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혼자 살 때는 나 지키기 위해서 상대방을 찾았는데 이제 결혼하고 난 뒤에는 내가 지킬 사람이 있음, 내가 지킬 사람이 있다는,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지켜주는 사람으로 내가 존재할 때, 그게 참된 부부라는 겁니다. 좀 상당히 이상적이죠.


 


도저히 비현실적으로 들릴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이 보고 싶은 이상 죽을 수 없어~ 당신이 살아 있는 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나는 죽을 수가 없어’ 더욱더 비현실적이죠. 더 심하게 해 볼까요? ‘당신이 직장에 갔다, 나는 살림한다, 그런데 당신의 그 그리움이 나의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이다’ 나 같으면 이런 주례 안합니다.


 


나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총각 처녀 시절이라면, 그대 쳐다보는 그 재미로 보람으로 죽을 수도 없어요. 죽으려면 같이 죽든지. 이것이 먼저 누구에게 제공되느냐 하면 아가서에 보면 이게 하나님부터 먼저 제공 되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요한1서 4장에 나온 이야기잖아요.


 


우리는 건성으로 그냥 넘어가지요. 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이게 율법이 폐기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의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위반해도 구원을 받는 이유는 율법을 임시적으로 줘 놓고 율법을 자체적으로 폐기하면서 “거봐, 니 쪽에서 나를 찾아다닌 게 아니잖아. 니 쪽에서 나를 믿어서 사랑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잖아. 확실하잖아.


 


율법에 갇혀서, 율법대로 하면 너는 나를 사랑할 수 도 없어. 율법에 의하면. 율법의 저주에 의해서. 그렇다면 너한테 둘러치고 있는 그 율법을 내가 사랑의 완성으로 벗겨낼게. 벗겨 낼 때 공짜로 안 벗겨. 법은 그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값을 치루는 데 그 값을 내가 치러줄게.” 이게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 아닙니까.


 


말만? 말만이 아니죠. 피죠. 피. 팩트니까. 피 흘림이. 피 흘림이 그거예요. 과학이 발달하고, 뭐 농업이 발달하고, 뭐 정치가 발달했지만, 그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미흡함과 미흡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줘요. 계속 미흡한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거를 못하는 겁니다.


 


인간의 과학과 이 모든 것은요. 여러분 쇠창살, 그 방범창 있죠? 어느 뉴스에 보니까 아이들이 불이 났는데 못 빠져 나왔어요. 방범창 때문에. 자, 방범차이라는 것은 용도가 뭐냐 하면 외부에서 오는 것을 내 쪽에서 지키기 위해서 방범창이 있는데, 막상 내부에서 불이 일어나니까 못 빠져 나오는 하나의 지옥불이 되고 만 거예요.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이태리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이름도 어려워요, 퍼추올라화산인가? 화산이 터졌어요. 화산이 터졌는데 화산에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일가족 세 명이 화산에 빠져 죽었어요.


 

왜 빠져 죽었는지 보니까, 하여튼 아들들이 참 버릇없지. 출입금지라고 분명히 되어 있는데, 그 어린 아이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아요.


 


‘나는 소망한다. 금지된 것을’ 이러면서 출입이 금지 되니까, 꼭 선악과 먹은 티를 내죠. 출입이 금지 되니까 뭐가 있어서 그렇게 출입이 금지 되어 있는 가, ‘한번 보자’ 하면서 아들이 먼저 갔어요. 그걸 보고 부모가 뒤따라갔다가 다 같이 빠져 죽었어요.


 


이게 뭐냐, 인간은 육이라는 굴레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주님사랑, 예수님사랑, 어데 거짓말을. 자기 자식사랑, 지 자식이 최고입니다. 말 안 해도. 제가 인천의 녹매교회, 녹매 교회가 뭐냐 하면 녹차 +매실. 구득영 목사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어요.


 


자식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고. “인간은 교회오고 기도하고 뭘 해도 전부 다 자식을 위해서 하고 혈연관계보다 더 끊을 수 없는 것 중 최고입니다” 라고 하시니까 참석하신 어떤 분이 “예, 아멘, 그렇습니다.”하고 동의 했다고 합니다.


 


동의한다고 하시니까 목사님 표정이 달라졌어요. “동의 할 쨉이 못 되는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그 분이 결혼을 안 하셨어요. 결혼을 안 했으니까 예수님 최고가 되는 거예요. 결혼도 안했지, 강아지도 안 키우지, 예수님 만 쳐다보고 사시는 분이에요. 그분이.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고 자기자식 최고라고 한다더라 하니까 속에 화가 난거죠. 그래서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했는데 목사님은 자식이 3명이 있어요. 이거는 본인이 지금 예수보다 중요한 게 3명이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이야기 안한다 이 말이죠. 무슨 수로 그 쇠창살을 뚫고 나오겠습니까? 집에 불이 나도. “내가 대신 지옥 갈게”할 정도로 자기 자식위주인데.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빠져나올 생각하지 말고 아예 빠져 나올게 없어야 돼요.


 


뭐 빠져 나올게 있어야 죄를 짓지. 죄 지을 게 없을 정도로 이미 우리 주체가 자립성이 날아가 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참 이게 좀 어려운데, 시간이 좀 지났지만 중요하니까 합시다. 젤 중요한 거니까.


 


어떤 행동을 할 때, 주님께서 만든 행동이거든요. 주님께서 만든 행동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는 거고요, 제가 그걸 말씀드리려고 한 게 아니고, 거기에다 뭐냐 하면 인간에서 신이 나왔다 하는 그것을 그 사건 안에 담아 버리면 낭패되는 일과 동시에 해결책이 그 안에 같이 나온다는 겁니다.


 


낭패되는 일과 해결책이. 그러면 낭패되는 일을 이렇게 묘사하면 되죠. ‘낭패되는 일은 제가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예상한 결과가 아닙니다. 어찌 할고. 주여 이러시면 안 되죠. 저는 감당 못 합니다’ 이게 낭패예요. 그런데 그 낭패를 주신 것이 뭐냐 하면 해결책이 거기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예가 여기 사무엘상 25장 17절에 나와 있는 데,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2명의 사람이 나오고 그 둘은 부부관계입니다. 하나는 아비가일이라는 지혜로운 여성이고요, 또 하나는 이름도 이상한데 나발이라 합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남자라고 되어있어요.


 


남편은 어리석고 여자 아비가일은 굉장히 지혜롭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봐서 어리석은지 어디를 봐서 지혜로운지 분간은 안 되잖아요. 두 부부는 어리석고 지혜로운 거 모르는 데, 여기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가면서 400명의 건달하고 같이 쫓겨 다니는 중이에요. 그런데 400명이 같이 뭉쳐 다니니까 얼마나 식사, 숙소, 부대비용이 많겠습니까?


 


그 다윗이 어떤 다윗이냐 하면 골리앗을 이겼던 ‘사울은 천천 이오, 다윗은 만만’이라는 어떤 공적을 이루어서 그것 때문에 밉상을 받아가지고 계속 추적당하고 현상금 걸려가지고 쫓겨 다니는 입장에 있습니다. 굉장히 억울하지요.


 


근데 다윗이 쫓기다 쫓기다 어디까지 왔냐면 나발이라는 집까지 온 겁니다. 거기 와가지고, 이제는 진짜 거지꼴이 됐지요. 그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나발 그 사람을 보고 “우리 400명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뜻이 있어서 이렇게 고난 받는데, 주님 때문에 고난 받는데 좀 도와주세요.”하니까 그 나발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요새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조폭 건달들 많다고 하더니만 니들이 그렇구나, 내가 아무리 부자지만 너한테는 한 푼도 못줘.”라는 식으로 완전히 크게 무시를 해 버렸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저주라는 게 구약과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저주라는 것이 어떻게 저주라는 결과를 낳는 지를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아비가일이라는 아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거 큰일 났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은 곧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의 완성과 결합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이 바보 같은 우리 남편이 “어디서 건달이 껄떡거리고 까불어? 한 푼도 못 준다. 요새 그런 사람들 많은데 너한테는 한 푼도 못 준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이것은 다윗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가정을 치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사무엘상 25장 38절에 보면,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이 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발을 친 겁니다. 하나님이.


 


“목사님, 율법 지켜서 축복받고 율법 안 지켜서 저주받는 거 아닙니까?” 그건 초창기고요, 그 율법 속에서 율법의 완성태가 함께 지금 동행하고 있거든요. 율법을 지키자 말자가 아니라, 이미 용서해 주기로, 사랑해 주기로, 하여튼 사랑의 증표가 이렇게 마련이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감계’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게 징조, 증후, 징표라는 뜻이고, 그 다음에 ‘표제’라는 말이 신호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의 신호, 증상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저주가 있는 곳에, 낭패죠, 낭패가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해결책이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로 멸망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하실 구세주도 함께 보내신 거예요. 함부로 저주 이야기를 내뱉는 게 아닙니다. 저주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저주 이야기를 누가했는지 한번 보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저주 받는가 축복 받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내 자리가, 내가 어느 편에 섰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율법 지키고 말씀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나는 어느 편에 서야 되요. 어차피 우리는 율법 못 지켜요. 한 발짝 다가서면 저만치 두 발짝 멀어지고, 이게 안 된다니까요.


 


남을 비판하지 말아요. 우리는 비판하는 자체가, 비판 안 한다는 것이 비판인데, 도저히 우리 입장에서는 이 율법을 못 지키는 겁니다. 맹세하지 마라했는데 모든 성경말씀은 못 지켜요. 그래서 아비가일은 어떻게 했는가, 우리남편이 너무 바보 등신 같아서 주를 못 알아 봤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해가지고 그 종들을 전부다 배불리 먹였습니다. 남편 몰래 다 해줬었어요. 하고나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어요.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뭐냐, 이미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 될 사람은 이미 지혜로운 영을 그 여자에게 준거예요. 줘서 사태파악을 하게 하는 겁니다. 사태파악을. 결국 저주라는 것은 우리 힘으로 저주 안 받으려고 한다고 저주 안 받는 게 아니고, 저주 받을 자와 복 받을 자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는 데 그럼 우리 할 일은 뭡니까, 목사님?” 우리는 징후와 증상, 깃발, 신호만 되면 됩니다. 저분이라고, 내가 사는 이유는 저분이라고, 저분이 내 남편이라고. 창세기 2장에 잃어버린 남편이 저분이라고. 그것만 하면 되요.


 


제가 저분, 저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멀리 봉화를 갔다고요. 봉화를 갔는데, 아내하고 식사를 했는데, 돼지 불고기인가 하는 숯불에 구워먹는 그걸 먹고 있는데, 여러분들 봉화, 봉선하면 잘 모르지요. 완전 골짜기입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뭐라 하느냐 하면 “아주머니, 저분 주세요, 저분.” 그때, 잃어버렸던 수십년 세월이 한꺼번에 추억이 쫘악 밀려오면서, 이 저분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릴 때,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때의 생각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어요.


 


여러분, 젓가락을 경상도 말로 ‘저분’이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추억과 싸웁니다. 잃어버린 38선, 36년 저분의 세월, 이제 저분(젓가락)의 세월은 잊으시고 저분만 바라보는 세월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위반해도 해체되지 않는 의를 사랑으로 전달해 주시니 이 전달의 모습이 우리 주님의 작품으로 그대로 노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