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5:27-34 / 장자권

정인순 2017. 8. 23. 22:07

 

 

장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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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8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25:27-34

(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25: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25: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육의 세계에서는 출생 순서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먼저 난 자가 장자요 그 다음 자식들은 아무리 용을 쓰고 장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곧 ‘먼저 남’이란 존재에 콱 박혀있는 거라서, 그 존재에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장자됨’에는 변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장자의 변동’을 획책하는 자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과 형 에서의 만남은 그 원천이 아버지 이삭의 위상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 위상은 다름 아닌, ‘약속의 자식’입니다. 이 ‘약속의 자식’의 특징은 두 가지 요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는 ‘없는데서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죽은데서 살아나는 요건’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자식’의 특성이 그 이후의 진척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양상이 바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우는 양상입니다. 보통 가정에서는 ‘행복한 가정’의 모델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부모 계시고 아들하나, 딸 하나가 이상적이죠. 그런데 이런 가정이 행복하는 결정적 조건은 바로 가족끼리 싸움이 없고 생각이 통일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참으로 바른 하나님의 계시가 지상에 드러내기 위해 설정된 가정은 ‘안 싸우는 가정’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가정’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인간들이 고대하는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마귀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죽은 데서 살고’, ‘없는데서 생겨난’ 그 약속의 내막은 이 지상에서 같은 혈육 사이에서도 갈라놓은 형식으로 나타남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육은 결코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한 채로 수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 진행은 이러합니다. 에서는 육적인 본성에 충실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먼저 났다는 그 존재 자체로 ‘먼저 났음’은 확정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즉 ‘맏이’라는 것이 ‘먼저 태어난 서열’과 결정났다 는 겁니다.

‘큰 오빠’와 ‘커다란 오빠’는 엄연히 다릅니다. 아무리 왜소해도 먼저 태어난 것으로 ‘큰 오빠’가 확정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달리 봅니다. 맏이 결정에 관한 싸움은 아직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희한한 사고방식입니다. ‘먼저 태어남’이 변경될 수 있다니요?

야곱은 움직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 움직임에 에서가 종속되기를 바랬고, 에서는 아예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을 마감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견해는 이러합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헤밍웨이의 소설이 있습니다. 한때 유명했던 어부였지만 이제는 퇴물이 되어 한탄 늙은 노인이 된 할아버지에게 마음에 한 꼬마가 “할아버지는 아직도 대단한 어부로 행세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의욕을 부추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어부’는 기능에 관한 겁니다. 반면 ‘노인’은 그저 일반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기능’과 ‘존재’를 분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있어 ‘맏이’는 존재에서 딱들어붙어있는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도리어 존재를 존재케하는 기능으로 보는 겁니다. 즉 존재에서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는 곧 ‘육’에서 진정 ‘약속의 자식’이 되는 길을 모색케 합니다. 그러나 야곱도 역시 ‘육의 발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존재’가 ‘기능’을 소지, 혹은 소유하므로서 존재가 약속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즉 ‘맏이’ 기능이 형에게서 떨어져나와 ‘나’라는 존재에 달라붙을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소유개념’이 육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버지 이삭이 품고 있는 ‘약속의 기능’에 합치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은데서 살아나고’, ‘없는데서 있게 되는’ 이 과정은 육은 항상 제거와 부정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육과 하늘의 약속이 결합되는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 겁니다.

어쨌든 야곱은 형 에서를 유도해서 존재와 기능을 분리합니다. 그 분리시키는 방식은 ‘장자권’을 상품화시키는 겁니다.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란 소유자의 희생이나 노고가 아닙니다. 구매자가 있느냐로 확정됩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고등어와 옥수수가 상품으로 나왔을 때, 어부는 고등어 잡는다고 소비한 시간과 위험한 환경이 돈으로 환산되어 팔리기를 원하고, 농부는 자신이 재배한 옥수수 안에서 땡볕에 장시간 수고한 육체적 아품이 가치로 담기기를 원하지만 실제 가격은 구매자가 있느냐 여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구매자로 나섭니다. 팥죽 한 그릇과 떡을 돈으로 지불할 용의가 되어 있다고 형에게 제의합니다. 형 에서는 존재에 딱들어붙은 존재의 속성이라고 여겼던 ‘장자’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존재가 굶어죽게 된 마당에 존재 유지가 급선무였던 겁니다. 즉 ‘맏이’의 기능은 단순히 에서에게는 소지하고 있는 기능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는 곧 오늘날 사람들이 육적인 존재를 가지고 마구 구원에 관한 정보를 소지하는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온갖 귀한 말씀을 갖다붙여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 자신의 육을 위해 사는데는 변함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을 위함이지 인간을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육은 끈진 김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육을 죽거나 없음으로 되돌아가도록 허용하지 않고 악착같이 붙들게 마련입니다. 야곱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형에게서 ‘맏이’를 빼앗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졌다는 그 ‘맏이 기능’이 자신의 육을 모조리 도육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계면활성제인 비누가 때를 빼는 원리는, 물과 친한 요소와 기름과 친한 요소가 다같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이스라엘’로 이 세상에 오실 ‘맏이’ 되시는 분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의 요소와 ‘의인’의 요소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육인 인간에게 소유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육을 육되게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맏이됨’만 증거케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의 괴수로서 예수님에게 건짐받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드러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02강-창 25장 27—34절(장자권)1708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5장 27-34절입니다. 구약성경 34페이지입니다.

 

창 25:27-34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지난 시간 23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지상에서 어떠한 진척사항을 보이는가,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진척사항을 보이는 그 모습이 가정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정이라 하는 것은 육신과 육신의 관계로 엮여 있지요.

 

보통 가정에서는 모델이 있어요. 어떤 시대든 모델이 있는데, 아빠 있고 엄마 있고 애들이 있지요. 옛날 같으면 애들이 한 대 여섯 명. 요새 같으면 둘, 아들 하나 딸 하나. 상당히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둘 만 낳아 잘 기르자, 하지요. 아빠와 엄마가 있고 애 둘 있다. 사진 찍을 때도 균형이 맞아요.

 

문제는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찍을 때는 조건이 있어요. 절대로 우리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조건이 모델의 필수조건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가정이고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가정, 그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새롭게 조성된 가정은 가족끼리 내분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 내분이 일어나요. 이것은 혈육사이에 내분을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 사이에서. 네 원수는 집안 식구라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혈육의 끈끈한 정,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것, 내 몸에서 자식 낳았으니 이것은 최우선적인 것이 내 자식이다. 따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내 자식을 위해서 내 몸 하나 바칠 요량이 되어 있는 것이 부모들의 영원한 육적본성이거든요.

 

육적으로 굳어지고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육에서 갈라짐이 생긴다는 이것은 우리 인간들 보기에 절대로 이상적인 모델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이 이삭의 가정처럼 되게 하옵소서. 왜냐? 이삭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계시를 받아서 가정이 쪼가리 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 땅에 나타난 진짜 계시의 가정과 평소에 육으로 둘둘 무장되어 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이 어떻게 되어야 되고……” 하는 그 가정모델하고 전혀 모델이 맞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어디에 가까우냐 하면,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복한 가정, 하나 된 가정, 늘 웃음꽃이 피고, 형제간에 싸우지 않고, 부부간에 싸우지 않고 화평한 가정, 그 가정을 모델로 굳혀 버렸어요. 그렇게 굳혀 놓고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 책임지세요.” 이렇게 나오니 이것은 다른 하나님이지요.

 

전혀 하나님에 관심이 없고 자기 육적인 본능에 충실한 기도를 교회 다니면서 해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아신다면 우리 가정 말고, 내가 기대하는 내 가정 잘되는 것 말고, 그걸 포기하고, 주께서 계시로 결합한 가정은 우리 앞에서 어떤 식으로 등장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등장하는 가정의 내막을 계시와 결합해서 계시를 뽑아내는 그 첫 번째 시작은 뭐냐 하면, 이삭이 약속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 네 식구가 이삭의 가정이거든요. 약속의 가정이라는 말이지요. 약속의 자식으로서의 위상은 그 가정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느냐를 알면 됩니다.

 

자, 그러면 지난 시간에 했던 것을 다시 복습해보지요. 이삭의 약속의 가정이라 하는 것은 없는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았다는 그 두 가지의 요건을 충족해야 돼요. 이삭이라는 위상은 없는데서 생겼고 죽은데서 살렸다. 그러면 거기에 글자 하나씩 더 붙이면 확실해지지요. 육에서 없었는데 약속 때문에 주께서 발생시킨 자식이 이삭이다. 이게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식이다.

 

그 다음에, 그 이삭이 육으로 죽어야 하는데 양을 수풀에 준비해서 다시 살렸다. 육으로서는 일치감치 아버지가 잡을 때 죽어서 제물로 바쳐져야 되는데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양, 여호와이레죠,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살아난 그 정보, 그 계시의 정보내용이 합류된 그것이 약속의 자식의 위상이 되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약속의 내용을 그렇게 잡게 되면, 만약이 아니지만 만약에 이삭이 자식을 낳는다면 이러한 두 가지 위상이 자식 대에서는 어떻게 펼쳐지겠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아주 특이하겠지요. 정말 특이할 겁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이 두 가지 요건이 그 이삭의 자식 대에서는 어떤 새로운 양상으로 우리에게 펼쳐지겠느냐 그 말이지요.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했다, 라는 그 눈에 확실하게 보였던, 이삭의 젊은 날에 있었던 그 일, 이제 이삭은 늙었고 그 내용이 자식 대에 왔을 때 이삭은 그것을 보고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육에서 영의 나라 가는 것은 달라지지 아니하면 안되는 겁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달라지는가? 달라져야 될 최종지점은 어디며 뭐부터 달라져야 되는가를 우리가 모를 뿐이지 무조건 육에서 태어난 사람은 달라져야 됩니다. 두 가지의 절차가 필요해요. 없는데서 있게 하는 노선을 밟아야 되고, 죽은데서 살리는 노선을 밟아서 그것으로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어려운데 구체적으로 하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 달라짐의 목표지점에 가 있는 사람이 야곱이고 출발지점에 있는 것이 에서라 보면 돼요. 에서에서 야곱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이삭은 하나지요. 이삭은 하나지만 이삭이 이삭1, 이삭2, 이 둘로 나눠졌다고 보면 돼요.

 

이삭은 중첩되어 있으니까. 어떤 글자를 보면 어지러울 정도로 겹쳐져 있는 것이 있어요. 칼라인데 인쇄를 잘못해서 파란색 빨간색이 중첩되어 있지요. 겹쳐진 것을 보게 되면 녹색인데 나중에 보면 파란색과 빨간색이 겹쳐져 있어요. 인쇄가 어설프게 되어서 그렇지요. ‘아, 빨간색과 파란색이 겹쳐졌구나.’

 

그러면 이삭의 요소는 야곱요소와 에서요소가 겹쳐진 거예요. 자식을 통해서 아버지가 갖고 있는 합류된 구원의 계시를 보다 더 윤곽 있게,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정리돼요. 야곱은 움직이고 있고 에서는 멈춰있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쪽이 어느 쪽이냐? 야곱이 움직여요. 에서라는 형은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진 자의 여유? 느긋해요. 이미 장자가 되었잖아요. 설칠 필요가 없어요. 이미 가졌기 때문에. 에서는, 장자라는 이 요소가 나라는 존재에 결합이 되어버리면 죽을 때까지 그 두 개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본 겁니다.

 

이게 모든 육에 속한 인간들의 선입감이에요. 좀 우스운 예가 되겠습니다만, 큰 오빠하고 커다란 오빠하고 구분하셔야 되겠지요. 덩치 큰 오빠하고 큰 오빠하고 다릅니다. 제일 먼저 태어난 오빠가 큰 오빠고 둘 째 오빠인데 덩치가 크다고 해서 큰 오빠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미 서열상 먼저 태어났으면 장자라는 것은 그 존재에 팍 박혀있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각은 달랐어요. 헤밍웨이 소설의 제목이 <노인과 바다>입니다. 그 내용을 보게 되면, 그 노인이 한 때 잘나갔던 어부였는데 늙었어요. 늙어서 이제 어부 일을 못합니다. 동네 꼬마가 놀립니다. “할아버지는 한 때 어부였다는데 못 믿겠어.”

 

그 소리 듣고 약이 올라서 바다에 나갑니다. 커다란 다랑어 하나 잡아 오지요. “나 아직 안 죽었어!”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자, 어부라는 것은 기능이에요. 그래서 자기는 이 기능이 자기존재와 결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까 어부에서 탈락하고 그냥 평범한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기능과 존재가 뚝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노인에 불과해요. 이제 어부가 아니에요. 지금 야곱은 뭐냐, 이 맏이라는 것이 존재에 꽉 박혀 있어서 한번 박히면 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맏이라는 것이 하나의 기능이 되어서 그냥 걸쳐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이런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계시 안 받으면 몰라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기능이 우선이 아니고 자기가 육이니까, 태어났다, 출생했다, 존재했다, 존재하는 내가 어떻게 뭘 하면 천당 가느냐, 자기 존재를 계속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삭이라는 존재, 약속의 존재는 뭐냐 하면, 그 기능이 존재를 박탈시켜 버려요.

 

떼버립니다. 존재를 없애버려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육적 인간도 들러붙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로마서 3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유대인들의 착각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에다가 율법을 실천, 순종하게 되면, 물론 오늘날 교회가 다 마찬가지지만, 나라는 존재가 그것으로 인하여 율법화 된다고 생각하고 말씀화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존재가 더 윤택해지고 내 존재가 질적으로 더 향상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 말씀을 쥐고 있는 분 진짜 맏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너는 말씀에 들러붙을 자격이 안 돼.”라고 우리를 삭제할거라고 어느 인간이 생각하겠습니까?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 착해지고 선해지고 회개도 많이 해서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생각하지 점점 탈락되고 내 존재 자체가 엷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우리교회 엠프 사주신 분이 아마존에서 25년 동안 선교하다가 돌아가신 허운석 선교사님입니다. 그 선교사님의 두 번째 책이 나왔어요. 그 남편 되는 김철기 선교사가 책을 냈는데 제목이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에요. 이게 투석(dialysis)이에요. 뺄 것 빼고 들어갈 것 들어가는 겁니다. 반투막에다 고분자 물질과 저분자물질을 갈아치우면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게 이삭이 품고 있는, 이삭이라는 존재가 품고 있는 그 기능입니다. 장차 올 예수그리스도의 기능이 이삭 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삭이 그걸 몰라요. 왜? 이삭은 육이기 때문에. 약속은 갖고 있지만 약속이라는 기능보다 자기라는 존재가 우세하다고 본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괜찮은 것, 고상한 것, 하늘의 것을 소유하고 소지할 수 있는 그만한 능력, 그런 장악력이 내 육적존재에 있다고 착각한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걸 생각해봐요. 한국에 있던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갔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 존재의 덩어리가 커져요. 왜냐하면 일가친척이 한 마을에 살고 동창생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어려움 당할 때 정으로 도와주고 심심하고 외로워서 전화하면 쫓아와주고, 찾아가면 놀아주고 그것이 돼요.

 

그런데 그분들이 어떤 계획이 있어서 희망을 품고 백인과 흑인들이 섞여 사는 그 미국에 갔다 합시다. 그분들이 살아가는 그 열의와 마음가짐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내가 이 넓은 땅에서 버티려면 그저 힘을 소지하는 그 방법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힘이라는 것은 다 돈이지요.

 

악착같이 힘이 되는 돈을 벌어서 자립하는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마음가짐이 나중에 어떻게 되겠어요? 나라는 존재는 소유의 중첩으로 오늘날 나란 것이 있다는 거예요. 소유와 소유.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날름 소유하려고 덤벼든다는 말이지요.

 

괜히 미국에 있는 사람들 욕하는 셈이 되어버렸는데. 뭐든지 좋은 것, 십자가 좋으면 십자가도 소유하고, 성령이 좋으면 성령도 소유하고, 하여튼 내가 스스로 살아가는 이것이 몸의 제 2의 천성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뭐든지 소유하려고 해요. 꽉 찰 때까지. 얼마나 긴장되겠어요? 내가 소유한 것 누가 빼앗아 갈까봐서 얼마나 근심하고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 근심걱정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소유로 인하여 내가 산다는 이것이 자꾸 굳어지게 되면 거기서 근심걱정귀신들이 계속해서 오기 마련이에요. 오히려 귀신을 불러요. 쓰레기 있으면 날파리가 들끓잖아요. 날파리 끓고 있는 곳에 가 봐요. 거기 쓰레기 있다니까요.

 

본인들이 긁어모으려고 하는 것이 쓰레기인데 쓰레기 모아놓고 내가 인간되었다, 구원되었다, 이거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어딜 봐서 쓰레기인가? 힘과 힘에서는 쓰레기가 아니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쓰레기에요. 탈탈 전부 다 털어내야 될 거라는 말이지요. 은혜 받은 것, 방언한 것, 기도해서 부자 된 것, 전부 다 쓰레기거든요.

 

야곱은 형을 보고 생각하는 거예요. “형, 너는 결코 그 맏이라는 기능을 소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 이렇게 본 거예요. 아주 형을 개무시 해버렸어요. 전쟁 안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야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뭐냐, 야곱은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합니다.

 

야곱의 잘못은 뭐냐 하면, 그 맏이를 자기가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설교 어려워지는데요. 걱정이 됩니다. 이삭이 갖고 있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이삭 본인도 잘 못 느끼는데 갖고 있는게 뭐냐? 죽은데서 살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겁니다. 이삭은 어쨌든 간에 자기 몸이, 육이 살아 있으니까 자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약속의 자녀다,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이삭이 달라져야 돼요. 이삭이 존재에 머물지 말고 이삭을 그렇게 만든 원래의 기능을 행사하는 그분,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삭이 만나야 돼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자기 아들 대에 와서 야곱과 에서의 전투와 전쟁, 투쟁, 다툼, 밀고 당기는 사이에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기능을 이삭이 발견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자식 둘이 태에서부터 싸우는 자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자식을 통해서 아버지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삭에서 태어난 야곱과 에서 그 두 사람 다 육적이에요. 맏이가 되는 것은 아직까지 결정 안 지어졌다는 말이지요. 내가 빼앗을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야곱의 이러한 발상은 에서나 이삭이나 리브가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빼앗을 것을 빼앗아야지 이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어렵지만 참고 들어주세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상품은 동등한 매개체에 대해서 매매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고등어 한 마리하고 옥수수 한 자루하고 바꾼다 할 때 숫자 가지고 바꾸지를 않아요. 옥수수 한 자루라라도 고등어를 한 자루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 가치를 정할 때 고등어는 얼마짜리, 옥수는 얼마짜리 돈으로 매매를 해버려요.

 

돈으로 일단 환산을 한다고요. 고등어가 5천원, 강냉이도 5천원이라면 숫자에 관계없이 막 바꿀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격이라고 해요. 그 가격은 가치를 돈으로 표시한 것인데요, 그 가치는 어디서 정하느냐? 옥수수를 힘들게 얻은 시간과 노동의 땀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고등어를 잡는 어부의 바다에서의 위험, 고등어 잡는 노하우, 그런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결정이 돼버려요. 마르크스가 발견한 사항입니다. 사용가치는 소용없다. 교환가치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이것이 그대로 오늘 본문 설명하는데 적절해요. 왜 적절 하느냐 하면, 지금 에서가 자기가 갖고 있던 맏이라는 것을 뭘 로 보느냐 하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상품으로 보는 겁니다.

 

본문 31절에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사고파는 것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것이지요. 시장의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원래 주인이 상품을 소유한다, 소지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상품을, 이 찬송가를 소지한다 할 때는 찬송가가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 내가 우선 중요하고 그 다음에 찬송가존재에요.

 

그러니까 에서는 자기라는 존재가 중요하고, 이 육이라는 존재가 중요하고 이걸 빛내기 위해서, 나 자체가 잘되기 위해서 이 장자라는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냥 갖다 와서 배가 고프다는 말이지요. 배가 고파서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 장자라는 소유물이 중요하냐 아니면 내가 중요하냐 할 때에 항상 장자라는 것은 나에게 예속된 거예요.

 

내가 유일신이에요. 내가 중요하게 되면 갑자기 장자는 하나의 배경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가 누굴 좋아하게 되잖아요. 좋아하면 그 사람이 유일신이 돼요. 내가 좋아했던 것은 배경으로 빠져요. 배경으로 빠지고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확 부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평소에는 두루두루 좋아해요. 그러나 정말 다급할 때, 내 목숨, 육이 위태로울 때, 살인강도가 올 때, 나는 나부터 지키는 거예요. 이게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그 약속의 자녀의 위상에 안 맞는 거예요. 안 맞으니 이게 육이 되는 겁니다. 그 육은 이삭에서 나왔어요.

 

이삭은 중첩되어 있어요. 이삭에서 야곱 나오고 이삭에서 에서 나오는데 일단 에서고 야곱이고 지금은 둘 다 육이에요. 그렇지만 야곱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야곱은 움직인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움직이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만나는 데까지 움직여서 예수 그리스도 만나고 나서 스톱이 돼버려요.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 될 때 스톱이 돼버려요. 야곱에서 이스라엘 될 때 그 과정이 오늘날 우리보고 너라는 육이 천국 가려면 그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그 절차, 코스라는 말이지요. 그 코스가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덮씌워야 되고 우리가 거기에 적용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다. 그 가정 누구 가정이냐? 내 가정이다. 그러면 묻지요. 본인의 존재가 중요합니까, 가정이 중요합니까? 아무 일 없을 때는 나도 중요하고 가정이 중요해요. 그런데 본인 개인에게 어떤 위기가 왔을 때는 가정이라는 것은 내가 키우고 소지한 거예요.

 

내가 어려울 때는 이 가정을 시장의 상품으로 내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얼마나 천재적인가 보세요. 에서가 평소에 ‘나는 맏이다.’ 장자권이라는 것은 장자가 몽땅 다 가지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장자가 다 가지고 차자는 장자 밑에서 머슴살이하게 되어 있어요.

 

에서가 ‘맏이로 이왕 태어난 것 아무리 따라와서 어쩔 수 없어.’ 라고 이미 확정된 것으로 여유를 부릴 때에 야곱은 살살 약을 올리는 겁니다. 유도해서 그 둘 사이를 떼놓는 거예요. 네가 맏이라고 자랑해도 나는 너 다 안다는 겁니다. 뭘 아는데?

 

‘너는 진정 맏이의 의미를 몰라. 너는 네 몸뚱이가 더 중요하잖아. 네 몸뚱이 치장하고 그거 과시하기 위해서 맏이 자랑하는 거야. 정말 맏이라면 너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해야 되는데 너는 그런 것이 없어. 그래서 너는 맏이에 부합되지 않는 존재야. 네가 갖고 있으면 안 돼. 내가 뺏을 거야.’ 하고 노렸던 거예요.

 

그래서 사냥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야곱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도 정말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간단하게 실험을 해보면 되지요. 우리 형이 지금 인천에 있다고요. 그 형이 소주를 좋아하는데 술이 없다. “소주 줄 테니 이제부터 내가 맏이 할래.” 그러면 “그까짓 거(내가 이미 맏인데)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하고 술 먹을 거예요.

 

우리 형이 술을 좋아한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요. 예를 든 겁니다. 말을 조심해야 돼요. 팥죽을 주고 맏이와 교환했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상품이 된 거예요. 여러분, 맏이가 상품이 돼요? 세상에 그런 수가 있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계시에만 있는 거예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에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면서, 나는 저 사람 모른다, 난 저 사람 저주한다는 말을 미리 예고한 것 같아요. 육에 하나님의 그 구원의 기능이 달라붙느냐 그 말입니다. 육이 살아 있는 한 안 달라붙어요. 뭐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다고요?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합니까?

 

붙을 데 붙어야지 이게 안 붙어요. 내 육에 예수가 안 붙어진다니까요! 그냥 믿는 척 하고 있지요. 주문 외웁니까? “예수 믿습니까! 랄랄라랄……” 그것은 주문외우는 겁니다. 남묘호렌게쿄 주문외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도대체 내가 뭔데 예수를 믿어요? 절대 예수 안 믿어요.

 

전도하는 것이 문제에요. 전도는 주님이 하시지 우리가 못합니다. 전도할 것 없어요. 타고나야 돼요. 구원받는 사람은 타고났지 전도해서 새사람 되는 경우가 없어요. 절대로 어떤 상품도 내 육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요.

 

야곱이 팥죽을 준비한 것은 “형아, 네가 생각하기는 네가 아무리 맏이라 해도 너에게 맏이라는 존재는……” 쉽게 말해서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너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이 붉고 뜨거운 팥죽 한 그릇보다 더 못한 가치야. 이 인간아!” 그걸 드러낸 겁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참 우리 식구 가운데 그런 식구 있으면 참 좋겠어요. 이게 계시 받은 가정입니다. 오냐 오냐, 하고 무조건 내 자식이니까 싸고도는 것, 그것 이상적인 하늘나라 가는 모델 아닙니다. 완전히 까발려야 돼요. 오늘 어떤 분이 하나님의 뜻인지 때를 맞춰서 질문을 해줬는데 “육이 뭡니까?”라고 질문했기로 제가 십자가마을에 답을 올렸어요.

 

자기가 태어나면서 알게 된 기존의 가정과 자기가 결혼해서 낳은 자기자식과 그리고 자기의 신체,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 있으면 나오라고 해요. 없어요. 온통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가정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사람들은 이 가정을 위해서 예수까지 믿으려고 덤벼들어요. 그게 에서에요. 그게 바로 약속의 자녀가 아닌 거예요. 이게 종교에요.

 

제가 방금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예수 못 믿습니다. 지금 야곱이 불가능한 일을 한 거예요. 그러면 야곱은 예수 믿었는가? 야곱집도 육이에요. 장자자리 뺏어봐야 야곱은 장자 아닙니다. 야곱은 나중에 진짜 장자한테 걸려서 야곱 자체가 홀라당 다 빼앗길 때 그 때 야곱은 장자임이 드러나지요.

 

제가 분명히 단언했습니다. 육에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십자가가 못 붙어요. 떨어집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계명활성제라는 것이 있어요. 이걸 두자로 ‘비누’라 합니다. 계면이라는 것은 고체와 고체, 액체와 액체, 액체와 고체사이의 두 상태가 다른 그 경계를 계면이라고 하고요.

 

활성제라는 것은 뭐냐 하면, 비누 같은 경우에는 앞부분에는 친수성(물에 친한 분자구조)으로 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소수성(기름에 친한 분자구조) 물하고는 거리가 먼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때를 어떻게 벗기는가? 섬유질에 때가 있다면 때는 물기와 기름기로 엉겨 붙어 있는 겁니다.

 

비누가 거품이 되어서 딱 앉아요. 그래서 물 친한 것은 물과 붙고 기름과 친한 것은 기름과 붙어서 문질러 버리면 이것이 떨어져 나가지요. 따라서 육에서 영으로 달라지려면 누가 개입하느냐?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삭에게 주신 그 계시가 야곱에게 달라붙어야 돼요.

 

이게 맏이의 기능입니다. 맏이의 존재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장차 신약 때 오시는 거예요. 마지막 신약 때 예수님 오시고 그 기능이 앞당겨서 지금 이삭 가정에 오신 거예요. 계면활성제로, 비누로 오신 거예요. 의인이면서도 죄인으로서 오셔서 죄인에 들러붙어요. 죄인에 들러붙는데 들러붙는 그분에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주님의 기능이 있어요.

 

아버지한테 대신 다 저주 받아야 될, 아버지하고 유일하게 아들관계입니다. 우리는 마귀자식, 육이에요, 육. 육에게 달라붙어서 떼 내게 되면 야곱은 떨어지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데 그게 이름이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의 육에다 맏이의 기능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삭도 그렇게 생각했고, 엄마 리브가도 그렇게 생각했고, 에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네 식구가 다 문제에요. 지난 시간에 네 식구가 다 문제가 있다 했잖아요. 그 때 너무 함축해서 잘 이해가 안됐겠지만 지금 풀이 합니다. 네 식구가 다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누가 살리는가?

 

야곱이 그 세 식구를 다 살려요. 에서는 야곱에게 종속된 사람입니다. 나중 된 사람이에요. 먼저 되었다는 것은 야곱이 먼저 된 것이 아니에요. 야곱에게 찾아온 비누 같은 기능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네 식구의 먼저 된 자인 거예요. 그래서 야곱부터 먼저 엎드리지요. 하나님의 사자에게, 얍복강가에서.

 

여러분, 비누 붙어 있지요? 비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문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육이 등장해요. 자 마지막 이 말씀 드리고 마칠 텐데 육이 뭐냐? 내가 소유한 것으로 내가 산다는 것. 십자가도 소유하고, 성령도 소유하고, 삼위일체도 소유하고, 좋은 것은 다 소유해서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 그게 얼마나 하나님의 계시를, 십자가를 모독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살아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오직 그리스도만 남아야 돼요. 오직 그리스도만 남으면 나는 뭐가 되는가? 그리스도가 떨어내는 때가 돼요. 더러운 때, 그게 사도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내일 할 일을 예언할게요. 내일 죄 짓습니다. 왜? 육이기 때문에.

 

죄가 뭡니까? 몇 번째 합니다. 죄가 뭐냐? 괜찮은 것을 소유함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함으로서 내가 산다는 이것이 바로 육이에요. 이 종교성, 이게 육입니다. 비누는 우리의 모든 그 죄를 다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계시가 떨어졌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이 구체화작업에 저희를 집어넣어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주시는 주님이 아니고 뜯어가는 주님인 것을 이제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