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4:l0-12 / 순적한 만남

정인순 2017. 7. 19. 21:58

 

 

순적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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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7월 19일               본문 말씀: 창세기 24:l0-12

(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24: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24: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24: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24: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24:15)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색시감을 찾아가지만 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동승하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기획하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종이 가면서 열어젖히는 일들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일관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관성이란 바로,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게 하시는’ 원칙입니다. ‘이삭 색시감의 없음’은 필히 ‘이삭 있음’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즉 이삭이 이 세상에 애초에 인간의 머리에 없던 인물이기에 그 절차를 그의 색시감도 같이 밟아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없음’이 ‘없음’으로 확인되는 과정을 통해서 왜 이 세상은 ‘죄로 죽어 마땅한 세상’임이 같이 들추어지게 됩니다.

역사 속으로 언약이 역사 속으로 투입되는 양상은, 항상 역사의 시작을 개시한 첫 사건을  연관이 있습니다. 그 첫 사건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 범죄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남자가 배제되고 여자와 뱀이 주역으로 들어서게 됨을 감안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그 뒤, 여자를 남자에게서 나오게 하시므로서 남자 홀로 ‘온전함’을 구성할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자가 범죄한 그 영향이 남자까지 이르러 결국 남자는 흙(아담)이 됩니다. 남자에게 내려준 영원한 운명은 ‘흙’으로 환원되는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 첫 사건 이후, 인류 역사의 주역은 온통 남자들 차지입니다.

세상의 남성의 세계입니다. 역사도 남자의 이름으로 진행됩니다. 여자는 그저 이 남자의 세계에 예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지상의 대표자격인 남자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계속 흙이 됩니다. 하지만 남자에게 예속되어 함께 죽어야 될 여자는, 그에게 부여된 ‘생명’이라는 이름답게 ‘죽음 속에 생명’이 나오는 터전이 됩니다.

이로서 ‘언약에 맞는 여성 구하기’는 순전한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들이 예상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일관된 언약의 하나님의 일이 이 죽음의 세계에서 그 활동성을 드러내어주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역사란 ‘보편적’입니다.

모든 이 세상의 개인들은 이 거대한 역사의 덩치 안에 일개 부분일 뿐입니다. 같이 시간 따라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면 과연 어떤 식으로 그 특징을 드러낼까요? 장마 철에 폭우가 시내 번화가를 덮쳤다고 봅시다. 그러면 맨홀 속으로 쏜살같이 장마비가 맹렬하게 휘감겨 빨려들어갈 것입니다.

흔히들 역사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은 언약의 맨홀 속으로 세상의 모든 만사가 다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에베소서 1:10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역사에는 중심이 따로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물들은 바로 그 중심을 위하여, 그 중심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첫 사건을 잊지도 않으셨고 놓치지도 않으신 겁니다. 도리어 그 첫 사건을 줄곧 견지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모든 남성 위주의 세상이 그 자체가 이 세상이 절망적으로 종말임을 나타나는 증거로 작용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한 아들을 낳는 식으로 역사는 이어지고, 모든 여자는 그 남성의 세계를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하다고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가 같이 죽게 되는 구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여자는 남자 밑에 들어가면서 남성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지속되는 첫 사건’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늙은 종을 통해서 새삼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은 곧 아브라함의 모든 가족의 존재가 육으로부터 차단되었음을 반복해서 알려줄 것입니다. 이점은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성도의 육은 육의 부모로부터 물러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죽음’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불현듯 성도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고 가정해봅시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은 육에서 시작해서 육 속에서 맴돈다면, 하나님 나라하고는 전혀 무관한 행함에 불과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는 이 세상이 가지고 온 육체의 기능이 눈에 보이는 육적 세계를 위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록 눈으로 보기에 육으로 보이지만 이 거대한 보편성의 찢어버릴 종말의 기능을 나타낼 새로운 육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기로서는 차단’되어 있지만 그래서 도리어 ‘주님의 것’으로는 가능할 수가 있는 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속 끌고오시는 그 ‘첫 사건’에 합류시키고 참여시키는 그런 몸이 된 것입니다.

첫 사건이란 곧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이유는 곧 죄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되게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그 현장이 곧 유일한 생명과 의가 돋아나는 지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하여 한 모든 것이 결코 나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거나 손상을 끼치는 일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의를 행한다고 구원에 유리한 것도 아니요 죄를 지었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도 아닌 그런 신분으로 새롭게 첫 사건 요원으로 가담되었음을 알게 된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자기가 하는 행위가 자기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입히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일을 벌리시는 분이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늙은 종이 기도한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일관성으로 계속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예측이나 예상으로 하나님의 일에 협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그 어떤 예상이나 기대마저 배제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첫 사건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시는 이유는 그 사건 안에서 인간은 죄인으로 역할하기 때문입니다.

첫 사건의 입장에서 불 때, 세상은 벌써 종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순수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더럽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을 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죄를 죄되게 하시는 그 차단과 거절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으로만 돋아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닥을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97강-창 24장 10—15절(순적한 만남)1707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4장 10-15절입니다. 구약성경 30페이지입니다.

 

창 24:10-15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약대를 성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있고 자기 할 일을 종에게 맡겼습니다. 이 늙은 종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일을 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냥 아브라함의 일로 보이지만 이 종도 제대로 알았어요. 12절에 보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일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를 안다는 거예요. 인간의 일은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순전히 하나님께 속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상황 상황을 구성을 해줘야 돼요. 그러면 이것이 인간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전투기가 푸른 창공을 날아갈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비행기가 먹구름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 먹구름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의 작은 비행기가 되어서 그 먹구름 속으로 쑥 들어가지요. 그러면 그 비행기는 온통 그 먹구름 속에 푹 잠겨서 싸이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이거 제일 아닙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우리 주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냈다면 제가 비록 종이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아브라함의 종인 나에게도 함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왜? 어차피 아브라함과 자기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그 일을 종에게 그대로 지시를 했을 거예요. 그러면 그 종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보는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예측불가하다는 것, 우리가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평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그 원리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이 종에게 들이닥칠 일, 아까 먹구름이라고 했는데 그 구름의 구성 원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원리의 연장선에게 견지되고 지속되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은 아브라함의 종에 있어서는 일단은 없습니다. 없는 사람이에요.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게 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아직까지 안 만났으니까 없는 겁니다.

 

왜 없어야 되는가? 만약에 있게 되면 인간 쪽에서 찾아다니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뭘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예측력으로 짐작을 하게 되고 인간의 상상이 보탬 되고 가미가 되면 이것은 순전하게 백 프로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의 협력체제가 되어버려요.

 

지금 이삭의 아내 만나러 가는데 이삭 자체가 원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천사 세 명이 나타나야 비로소 생기는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 전까지는 없는 거예요. 없다는 말은 인간이 넘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입장에서는, 일관된 하나님의 일이라면 내 쪽에서는 못 찾는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만들어주실 겁니다. 마치 누구처럼? 이삭처럼. 그래야 이게 짝이 맞으니까.

 

이삭도 없는데서 생기고 그 부인도 이삭의 격에 맞도록 없는데서 생기도록 해줄 때 그 이삭과 그의 아내, 그 일에 관여된 아브라함의 종, 그리고 아브라함, 몽땅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일, 아브라함언약에 의해서 없는데서 집단적으로 새롭게 형성되어 나가는 가족이 될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네가 잘나서 천국 가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너를 새사람 만들어줘서 천국 가냐,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답변해야 될 내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천국 갈지 알았어, 이렇게 되면 안돼요. ‘내가 천국간다는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도저히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저는 저를 천국 간다고 늘 예측을 했는데 그렇다면 저는 탈락입니까?’ 슬그머니 이런 걱정이 될 테지요. 그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 들더라도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는 일을 만들어줍니다. 나는 분명히 천국 갈 거야, 라는 생각이 지워지는데 언제 지워지는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참 웃긴다. 나 같은 인간이 그 거룩한 곳에 합류가 되다니 이것은 천국 욕보이는 짓이다. 이럴 수 없습니다.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사태가 유발 될 때 우리가 어디서 어디로 구원받았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내 구원을 위한 성경책이 아니고, 너는 이 자리였는데 주님께서 구원받지 못할 자리에 있는 너를 언약 속으로, 천국 속으로 넣었다는 그 과정을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나 같은 인간도 구원받았네? 어째서? 어떻게?’ 성도의 사는 목적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이것은 말도 안 돼. 터무니없는 일이야.’ 그런데 그 터무니없는 일이 생겨서 나를 강제로 집어넣는 것은 너 혼자 잘 먹고 잘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터무니없이 나타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출몰했던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내 쪽에서 구원이 취소가 안돼요. 예측했으면 취소가 됩니다. 그리고 치매 걸리면 취소가 되는데 이것은 치매가 걸린다든지, 정신병 걸린다든지, 어떤 경우라도, 교도소에 열두 번 갔다 와도 취소가 안 됩니다. 왜? 시작하신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시작하신 분이 주님이기에 그 시작한 것을 주님이 알아서 마무리하는 그 과정 속에서, 교도소를 열두 번, 열세 번 갔다 올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내가 어떻게 하다가 교도소에 간다는 그 문제는 상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심각하고 진지한 것은 우리의 원천으로 깔려 있어요. 원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순수한 사람일수록 더 더러운 법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성도로 하여금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뭘 보여주는가? 어차피 이 세상은 처음부터 종말이었다. 아무도 구원될 자격 없었다. 내가 뛰어드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구원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차피 이 세상은 종말을 품고 있습니다. 종말을 품고 있으면 어떤 자만 이 하나님의 종말됨과 구원됨을 알려주는가 하면, 종말적인 삶, 종말적인 처우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이야기한 성도에게만 해당되거든요. 성도가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나는 착하다, 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구원의 합격선에 이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런 것도 모르고, 더욱 더 순수하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점점 더 그 사람은 천국과 멀어지고 지옥으로 가까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순수할수록 더럽습니다. 그래서 “에이, 더러운 인간들.” 이걸 천국에서 보면, “참 순수한 인간들.” 반대로 이해하면 되고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아이고 더럽기도 하지.”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이 지상에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 항상 하나님은 첫 사건, 첫 번째 사건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기억에서 빼지 않아요. 늘 그것을 되풀이하거든요. 첫 사건이라 하면, 없는데서 만들어내는 창조도 되겠지만 또 인간의 인간에 관한 첫 사건은 범죄한 사건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사건을 하나님은 이미 예상을 했어요. 지금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이 대목이 하도 어려워서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먼저 아담을 만들어놓았어요.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것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에서 여자가 나왔어요.

 

아담에서 여자가 나왔으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면 안되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범죄하고 난 뒤에 여자는 남자에게 등록이 되면서 여자는 여자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남자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남자 없는 여자는 의미가 없어요.

 

왜? 처음부터 남자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여자가 있으니까. 그리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여자에게 벌을 내리되 남자의 지배, 통치를 받도록 했어요.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름이 이상하게 되어버렸어요. 인간을 대표하는 남자가 흙이 되어버리고 남자 밑으로 쑥 들어가 버린 여자의 이름이 생명이 되니까 이게 무슨 취지냐는 말이지요. 아담의 이름을 본인이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었어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이름대로 운명이 될 것이라고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그 이름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을 때 무슨 이름으로 구원받는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거든요. 주님께서 책임지겠다는 것이고 보장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의 도장을 이마에 박았다는 겁니다. 너는 어떻게 되어도 너의 작품이 아니고 주의, 예수님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한 작품이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자역할은 남자로 하여금 흙이 되도록 하는 역할이지요. 남자에게 여자가 등록되어서 복속되었는데, 나는 당신의 여자요, 했는데 남자를 흙으로 만드는 거예요. 죽여 버리는 겁니다.

 

제가 험한 이야기를 했지만, 뭔가 남자는 여자마저 차지했기에 자신이 온전하다고 착각을 했는데 그 온전함이 시들시들해져갑니다. 그러면 남자에 속한 여자도 같이 부실해져서 흙이 되어야 되는데 원래 여자가 남자한테 들어간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첫 번째로 선악과 따먹은 쪽이 여자기 때문에 그래요.

 

첫 번 사건을 하나님이 놓치지 않는 겁니다. 첫 번 사건, 사건의 전모가 남은 역사를 통해서 계속 전개되도록 계획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잡아간 겁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지는 것 같지만 남자에게 온전히 예속되면서 남자의 허점을 완전히 다 드러내고 노출시켜 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가 사람의 대표자니까. 사람이란 이렇게 남자가 대표하는데 남자가 부실하다. 곧 사람이 부실하다. 사람한테는 의지할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고 희망도 끊어라. 이 사실을 여자가 전부 다 폭로해버립니다. 믿을 놈 없다는 그 말이에요.

 

분명히 남자가 여자를 맡았으면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믿을 놈 없어요. 의지할 것을 의지해야지. 이 소리 듣고 결혼조차 안하려고 하면 곤란한데, 의지할 것을 의지해야지. 여기서 하나님의 첫 사건은 여자와 그리고 뱀, 둘 사이의 관계지 남자는 빠지는 겁니다.

 

남자가 허물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첫 번째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이 나서고 설쳐대 봐야 그것은 다 백전백패, 마귀에게 다 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마귀에게 진다는 말은 사람에게 속한 여자도 반드시 마귀에게 지게 되어 있는데 다 패배한 그 자리에서 하와라는 그 이름대로 생명이 거기서 시작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죽음에서, 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하나님의 구원이 나오는 하나님의 원래 품어 있던 계획이 인간의 범죄사건을 통해서 제대로 펼쳐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어요. 죄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 사건을 여러분이 이제 아셨으니까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되니까 남자가 이 땅의 주인공이에요. 그러면 남자가 하는 일은 뭐냐? 역사의 책임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죽 나오지요. 모든 인류의 역사는 남자 이름으로 계속 전개되고 이어져 나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남자 이름은 흙입니다. 흙이든 말든 남자는 계속해서 아들을 낳고 또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를 이어가게 되는데 그게 하나의 보편성이 됩니다. 기관차 계속 이어붙이기 하듯이 계속 죽 이어나가면 그 전체가 보편성이 돼요. 그 보편성의 주인공들은 남자들이에요.

 

교회 처음 나왔다 하면 보는 책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1장 펼쳐서 보자 했는데 지겨워서 못 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누구를 낳고 ……”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없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족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은 남자입니다. 남자는 역사라는 보편성을 낳아요. 그런데 군데군데 보편성 속의 개별성, 특수한 개별자가 있어요. 개별자, 여자가 등장해요. 남자는 흙이 되어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남자,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지요.

 

겉은 남자이름을 하고 속은 여자가 희생적으로 방향을 틀어줘요. 방향을 틀어주게 되면 지옥갈 남자의 족보가 여자의 후손덕분에 천국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든요. 아브라함은 남자고요. 예수님도 남자거든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실제로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마리아에요.

 

마리아가 누구하고 동침해서 낳았느냐 하면, 아무도 동침한 자가 없어요. 아무도 동침한 자가 없이 예수님이 태어났다 하니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거참 신기하다. 하나님의 기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이것은 뭐냐 하면, 보편성이 새로운 특수한 개별성한테 패배당한 겁니다.

 

기존의 보편성은 마리아가 품고 있는, 마리아 안에 들어 있는, 여자의 후손이지요, 후손을 중심으로 해서 그동안 역사가 흘러들어온 겁니다. 쉽게 해서 역사라 하는 것은 흘러간다고, 시간이라는 것은 흘러간다고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어떤 특정지점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배수구에 물 빨려 들어가듯이. 이번에 청주에 2백 밀리 비 왔잖아요. 맨홀 안으로 물이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지요. 모든 시공간은 특정지점을 향하여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소용돌이치면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합니다.

 

목욕탕에 말썽꾸러기 애를 데려갔는데 그 애가 장난을 치다 빨려 들어가서 죽어버린 사건들이 여러 번 있잖아요. 물 빼는 배수구에 발이나 머리카락이 들어가 버리면 죽는 겁니다. 그리스도라는 하수구에 온 역사가 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북한 핵개발이나 트럼프인지 뭔지 전부 다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빨려 들어간다는 말은 거기서 새로운 빨아낼 수 있는 능력이 개별자에서 솟구쳐 오른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요.

 

세상에 아브라함 같은 체중에 신장을 가진 남자들은 많아요. 인간들 보기에는 아브라함이나 나나 다를 것도 없이 똑같아요. 똑같은 그것을 보편성이라 합니다. 똑같은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그것을 특수한 개별자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진리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빨려들어가고 또 솟구쳐 오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장차 하나님이 그 형상으로, 그 양상으로 이 땅을 방문하기에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분이 있는 곳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빨려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누구지? 저 사람 나사렛 예수. 저분이 소문났다며? 귀신 쫓아내고 병도 고쳤다지? 우리 한 번 따라가 보자. 설교 들어보자. 저분이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아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 먹였다지. 참 신기하다. 우리의 왕으로 삼자. 따라가세.”

 

이것은 예수님을 특수하다고 보지 않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있는데 좋은 관계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여기 있고 우리 여기 있으니까 예수님하고 좋은 관계 이루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높은 자리 앉는다는 그것이 성령받기 전의 제자들의 일상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현재 이 역사는 역사대로 흐르는데 거기에 예수님 오셨기에 합세하면 좋은 나라 만들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안 되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절단된 것을 몰라요. 성도라 하는 것은 자기존재에 대해서 차단되어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그 출신성분과 내가 구원받는 출신성분과 달라야 돼요. 이게 차단되어서 끊어져 있어야 돼요.

 

종교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음에 종교생활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종교마저 차단되어야 돼요. 그것마저 소용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또는 아브라함의 종 이 세 사람 다 뭘 찾고 있느냐? 하나님이 만들어준 역사의 배구수를 찾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지금 자기의 상태는 여전히 역사 속에 있고 보편성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아는, 아버지가 나를 낳았고 나는 자식을 낳았다는 이 보편성의 구조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이고 그걸 대체할 만한 새로운 천국의 엮임, 천국의 구조가 새롭게 발견되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발견되는가? 발견될 수가 없지요. 주님께서 순적하게 관여해야 되지, 어디 있나 보자, 해서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쉽게 설명해 봅시다. 그냥 길을 다가 불현 듯 ‘나는 대한민국사람의 일원이다.’ 어렵게 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보편성가운데 그 보편성을 구성하는 한 사람이 나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하늘나라 못 간다. 이것은 나이면서도 다른 나가 될 경우에만 대한민국을 떠나서 천국 간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르게 되면 그 사람은 기존의 부모로부터의 자기자아와 차단된 사람이에요.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자기의 원천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또는 3장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첫 사건과 관련지어서 가담하게 된, 그 사건에 끼어들게 된 그런 존재기에 그렇습니다. 표정 보니 다시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보통 역사는 중립이거든요. 중립에서 새로움이 안 나옵니다. 중립은 그렇고 그런 거예요.

 

냄새도 없고 색도 없고 그냥 그런 거예요. 따라서 역사라 하는 것은 지나가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이 역사가 마지막에 끝나고 주님이 오시려면 처음부터 중립적인 역사 속에 누군가 뛰어들어야 되는 겁니다. 뛰어드는 그것이 뭐냐? 첫 사건이 과거로 날라 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뛰어드는 겁니다.

 

그 첫 사건이 그대로 뛰어들 때에 그 사건에 말려든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았다, 가 아니라 첫 사건의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그 역할을 보게 되면, 이삭은 무슨 역할이냐 하면, 흙이 되는 역할이고 그 만나야 될 부인은 여자의 후손의 역할이 되는 거예요.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줘야 아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나 아브라함 종이나 이삭, 이삭은 알지요. 아, 저 리브가가 시집을 오는 것은 리브가 본인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브라함 종의 입장에서 봐서는 하나님의 일에 리브가가 말려든 거예요.

 

그리고 그 리브가의 일은 자기가 되고 싶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첫 사건을 운반하는 운반체로 작용하게 될 거예요. 첫 사건의 특징은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 이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 일에 말려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편성에 말려들어서 주의 일에 의해서 어떤 배역을 맡은 사람에 있어서는 본인이 나이가 50이 되든 60이 되든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요, 본인이 교도소를 열두 번 들락거려도 아무 의미 없고요, 그 사람은 특수한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언약적인 일을 드러내는 특수한 일을 할당받은 거예요. 배당받은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제가 그런 일을 할당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는데 몰라요. 그것은 모르고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순적히 알려줄 거예요. 어떤 식으로 알려주느냐?

 

내가 지금껏 교회 다니면서 봉사한 것이 끊어지지 않는 내 존재에서 나온 헛짓임을 아주 짧은 순간에 불현 듯 알게 만들어요. 아, 내가 착한 일 했고, 심지어 내가 남에게 해코지를 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힌 그 흔히 말하는 죄라는 것, 내가 행한 죄, 내가 행한 의, 그 자체가 주의 일에 의미가 없어요.

 

이미 끊어진 껍데기가 하나마나 무의미한 것에 불과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껍데기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되 그 껍데기하고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일과 동반해서 가도록 일을 벌이는 겁니다. 늘 24시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24시간, 대부분은 뭐냐 하면, 내가 행동 똑바로 했으니까 복을 받겠지, 내가 그 때 실수를 했으니까 벌 받을 준비 해야지, 이런 선악적사고방식이나 주의일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를 않아요.

 

더 쉽게 해서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생산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잘해도 죄, 심지어 죄져도 죄, 죄인 되게 하신 그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지금 내 안에 주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쳐다보는 순간 내 사적인 개별자의 고민은 사라지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어떤 행동을 잘했지, 못했지, 라는 그런 모든 것이 다 쓸데없다는 것, 그래서 순간적으로 날라 가버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함께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요. 이 사실을 이삭이 압니까? 이삭은 약간은 짐작하지만 다는 몰라요.

 

그러면 리브가는 압니까? 리브가는 아예 몰라요. 그러면 뭐냐? 이삭과 리브가는 좀 더 살아야 돼요. 아브라함은 일찍 죽고 이삭과 리브가는 좀 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의 예측, 예상,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위 남자로서 내가 이 땅에서 꿈꿀 수 있는, 내가 구상할 수 있는 모든 보편성, 우리 인간들 보기에 유일한 현실에서 나도 살아남아야 되겠습니다, 하면서 꿈꾸는 모든 계획들이거든요.

 

“그래서, 살아남아서 어쩔 건데?” “뭐, 살아남지요.” “그래서?” “그렇다 뿐이지요. 그러면 행복하겠지요.” “왜 행복해야 되는데?” “글쎄요. 그냥 행복 하고 싶네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첫 범죄한 사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삭이 없는데서 태어났다는 것과 자기하고 별개의 사건처럼 되어버려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지금 내가 하는 이 짓이 내가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차단된 새로운 나라는 것을 깨우치게 만들지요. 설교하는 내가 참 어려운데요. 이렇게 합시다. 대구의 서쪽에 가면 고속도로 하고 일반도로하고 중앙분리대로 구분되어 있어요.

 

뻔히 보면서도 국도로 빠지거나 혹은 고속도로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차단막을 설치해 버립니다. 차단막을 설치하면서 이 세상을 같이 달리게 만들어요. 한쪽은 언약에 속한 사람, 모든 시간과 모든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빨려 들어가는 그쪽 삶을 사는 사람으로 살게 만들고, 한쪽은 그냥 지옥가는 사람, 남자 중심으로 살고요.

 

그런데 그것이 각기 두 사람 같으면, 지옥 잘 가라, 이러면 되는데 그게 내 안에서 이미 동시에 중앙분리대가 들어 있어서 항상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앞으로 이삭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렇고 리브가 인생도 마찬가지고, 야곱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나온 거예요. 처음부터 야곱이 이스라엘을 품고 있었지만 때가 되면 야곱은 야곱대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따로 분리해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을 맺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삭을 없는데서 만드는 식이 아니면 절대로 성도 아니에요. 천국에 못갑니다.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는, 아버지가 날 낳는 육에 속한 그것은 아담에 생각한 현실이고 죽으리라, 죽으리라,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보편성이에요. 그 속에서 생명을 어디서 찾겠는가? 생명을 찾는 방법은 주께서 생명이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의 사건을 성도 안에서 일으켜 버립니다.

 

일으켜 버리면 그 사건은 ‘내가 잘되어야지. 나는 구원되어야지. 나는 복 받아야지.’ 이런 입장에서는 도저히 예측이 안 되는 식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만들어요. 별개에요. 나 이렇게 착해서 천당 가야지, 이런 식은 아니에요. 막상 구원을 받고 보니 앞으로 잘하나 못하나, 옛날에 못했으나 잘했으나 전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새롭게 구성된 그 역할중의 하나를 우리가 할당받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세대를 볼 때 뭘 보는가? 이 세대 자체를 주님과 같은 시선으로 봅니다. 이 세대는 끝났다. 그러면 이미 끝난 세상에서 인간들이 끝이 아니라고, 흙이면서도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을 그냥 구경, 관람하시면 되는 겁니다. ‘저 인간 저렇게도 살아보려고 악바리로 기도하는구나.’ 이렇게 구경하고 관람하시면 되는 겁니다.

 

아주 여유가 있어요. 당당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내가 기대하는 나를 주께서 박살을 내버립니다. 나의 포부, 나의 희망, 나의 기대를 전부 다 부숴버려요. 부숴버리면 “왜 이러십니까?” 하는 그 죄적인 발상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이 없는데서 있게 했다는 것이 체험되게 만들고 죄를 알아야 하나님의 의인이라는 사실, 말로가 아니라 정말 절절할 정도로 느끼게 만들어요.

 

‘아, 의인이기에 죄를 알게 하시는구나.’ 이것은 죄를 더 짓는 문제가 아니에요. 죄를 더 짓는다고 해서 의를 더 잘 아는 것이 아니고, 죄 짓고 안 짓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 이 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이 땅을 살게 하셨구나.’ 문제 되게 쉬운데. 문제가 되게 쉽거든요.

 

문제가 되게 쉬운데 그놈의 내 야망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문 열어도 못들어간 거예요.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멋있게 들어가려고. 훌륭하게 들어가려고. 뭔가 성공했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들어가려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끊어버리고 생소한 나, ‘내가 그걸 믿다니. 십자기 피로 끝났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안 받아.’라는 그 생각이 우리한테도 계속해서 생소한 그 짜릿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하나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계획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마저 우리가 이용해서 내가 성공하고 잘 되어보려는 이 악마적심성이 또 다시 우리 속에서 죄의 형태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주여, 그것마저 주의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