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건너기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17년 7월 16일 본문 말씀: 신명기 27:1-8
(27: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7: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27: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27: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27: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27: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의 지시는 누구 들어도 인간들이 다 수행해야 될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 그 어느 말씀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지켜서 팔자 고쳐보려는 그런 심보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에 의한 본래의 취지에 해당됩니다. “그래, 너는 네 밖에 모르지. 그래서 천국을 가? 어림도 없지”가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자기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덥석 무는데 것으로 인하여 공개당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련의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이 과정을 전적으로 이스라엘에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은 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상에서 하실 과성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태국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마사지를 해줄 때, 올 서비스를 해주는 것처럼, 몸이 가뿐하게 된 결과에 대해서 관광객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주물려서 생긴 결과라고 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천국이란 곳은, 인간이 자신을 관리해서 생긴 몸이 되어 들어가는 곳도 아니요 하나님과 협상해서 들어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은, 자기가 꼭 들어가야 될 이상적인 목표로서의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은 실제로 있는 천국과 부딪치게 됩니다. 이 부딪침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해놓으신 겁니다.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천국부적응적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기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조차도 모르고 덥석 말씀을 붙들고 순종해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획득하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기어이 약속의 땅에 합당한 인간으로 바꾸어놓으십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즉 “나는 의로우니 나를 힘들게 하거나 죽여서도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일 진행 앞에서 인간의 사정이나 심지어 사명까지도 소용없습니다. 그것마저 제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걸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모조리 믿음의 내용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들로 자신의 본내용을 채우고 다닙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소개하게 되면, 인간들은 그 계획을 자기 힘으로 달성하려고 덤벼들 것이 뻔하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상상하게 되는 것이, ‘자기로 인하여 성사된 구원관’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이러한 인간적 요소를 처리해줍니다. 어떻게요? 죽여버리는 겁니다. 제사장의 제사기능이 산 사람에게도 접수해서 제사장이 벌리는 그 ‘죽음의 기능’ 속에 합류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물 속에 함몰되어 죽어버린 자들이기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즉 인간은 물 속에 못삽니다. 갑자가 요단강이 범람했다는 것은, 어느 인간도 산 채로 약속에 들어가도록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범람한 요단강 물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장소는, 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있는 그 지점이 아니라, 제사기능이 발휘되고 있는 언약 안입니다.
제사장과 붙어산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통해서 발휘되는 그 기능 속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6:14의 말씀을 설명해주는 바도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가 십자가 안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 십자가 기능성은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도는 십자가 능력에 삼키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요단강이란, 실은 백성 전체와 상대할 문제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성립하시려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독수리 날개를 업어서 홍해바다를 건너갔다는 말씀처럼 (출 19: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째 ‘삼키는 형식’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은 ‘전체’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개별자들이 모인 그 ‘전체’를 염두에 두시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만을 상대하시고 그 안을 ‘전체’라고 보시는 겁니다.
마치 요나가 큰 고기 물 속에 삼킴을 받았기에 다시스로 가는 그 방향성과 그리고 오로지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그 관심사가 돌이켜져서 원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니느웨 성 앞 바다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요나의 관심사는 여전히 자기에게 집중했지만 하나님의 지속적인 간섭으로 요나는, 자기 인생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삼킴을 당한 처지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요단강 건너고 난 뒤의 율법’라는 취지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자기 죽음 후에 말씀이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그 담긴 실제적 기능을 거침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홍해 건넘의 예를 통해서 보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서 홍해길로 이끄셨습니다. 그 바닷가에서 백성들은 자동적으로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자기 관심사를 충족시킬 전능자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할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자기에 대한 생각, 자기 관심사를 버리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홍해에 오기 미리 바닷길을 열어놓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 내부에 들어 있는 그것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추어주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아는 것만을 믿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더 살아보겠다는 고집과 집념에 불과합니다. 믿음이란 어린아이같이 자기 걱정을 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놓여진 이 상황 자체가 주님의 계획을 위함이 자신을 위함이 아닌 환경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지를 파악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미아
142강-신 27장 1-8절(요단강 건너기)1707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7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 할지니라”
방금 읽었던 이것이 하나님의 설교인데, 하나님이 친히 설교하시고 지시하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기가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자기가 자기에게 말씀 주시고 그 말씀이 완료되도록, 완성되도록 해놓고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저는 태국을 안 가봤습니다만, 태국에 가면 태국 마사지가 올 서비스 마사지라는 거예요. All services massage. 고객은 그냥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서비스를 다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관광객이 태국에 가서 마시지 받고 난 뒤에 “어깨 참 좋아졌어.” “왜?” “내가 나를 주물렀거든.” 근데 내가 나를 주물렀다는 이런 말이 일체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주무른 것이 아니고, 올 서비스니까, 태국 마사지사가 처음부터 다 해줬으니까, 갑자기 뭐 뼈가 풀리고 몸이 편하다, 라는 그 모든 공로는 태국 마사지사에게 가겠지만, 물론 돈 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 함께 있는 자리를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하시는 모든 계획이나 모든 지시를 하나님 쪽에서 준비하시고, 그것을 스스로 추진해나가시는 겁니다. 누워있기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아니, 누워있는 것도 못합니까?
사실은 그 누워있다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어려운 일이, 불가능한 일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어려워요. 그냥 사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교회 교인들 보게 되면, 우리교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만, 일반교회를 보게 되면 제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임진왜란 때 원균이란 사람이 삼백 척의 배를 완전히 작살내고, 그래서 원균 집안이 이완용이처럼 대대로 욕을 얻어먹는데, 원균이 나라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근데 원균 밑에 배설장군이 이왕 질 것 배 열 두 척을 빼돌리자 해서 빼돌렸어요. 거북선은 아니고 판옥선이라고 하는데. 빼돌려놓고 자기는 아프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서 쉬는 거예요. 왜? 전쟁하든 말든 내 몸이 아파 잘못하면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탈영병이죠. 근데 그 탈영병이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이 이기지를 못했어요. 배가 다 부서진 줄 알았는데 열 두 척의 배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선조한테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라고 했어요.
이 말은 비록 하나님께서 나를 망가지게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있으니까, 이것가지고 종잣돈을 삼아가지고 투자하게 되면 다시 내 인생이 부활되지 않을까, 다시 회복되지 않을까를 시도하는 것. 저는 하여튼 미워죽겠어요. 교회에서 제일 미운사람이에요. 끝까지 망했는데 기도해서 되살아났다든지, 갑자기 안 하던 십일조를 해가지고 복을 30배 받았다든지, 이런 경우는 어쩔 땐 진짜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성경말씀은 올 서비스라니까요. 진짜 같이 태국에 한 번 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뭔가 해볼까가 아닙니다. 힘을 빼는 거예요. 그냥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알아서 요리하실 거예요. 집밥 백선생이 요리 하실 겁니다. 냉장고를 부탁하면 그 안에서 알아서 요리 할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요. 왜? 천국은 백퍼센트 주님의 솜씨여야만 하기 때문에. 백퍼센트 주님의 솜씨여야 합니다. 주님의 솜씨.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 내용이 약간 복잡하게 섞여 있어요. 섞여 있으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2절에도 나오고 4절에도 나오는데, “요단을 건너거든”이래 나와요. 요단강을 건너거든, 이런 뜻이거든요. 이 본문 말씀을 보는 인간들은 어떤 느낌을 받느냐 하면, 이걸 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 요단강까지 가게 되면 요단강이 나올 거고, 그 요단강 건너가게 되면 이제 약속의 땅이다.’라고 이렇게 생각들을 했습니다. 우리가 봐도 그렇게 보이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그 현장에 가봐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말씀을 애당초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요단을 건너라고 하니까 강 건너면 되는 줄로 알았죠. 딱 요단강에 가보니까 못 건너게 만들었어요. 성경 27장에서는 건너라고 되어 있는데, 막상 그 현장에 도착해보니까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었습니다. 이거는 홍해하고 똑같아요.
주일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홍해를 건너야 되는데 홍해는 건널 수 없는 곳이에요. 그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인간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 분명히 모든 서비스를 다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집사님이 기도하신대로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구원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그냥 막사세요. 그냥 막사시면 됩니다.
근데 막살면 되겠다고 하는데, 그 막사는 것이 어려워요. 절대로 막 안 살게 되어 있습니다. 조심조심하게 살게 되어 있어요. 근데 조심하는 인간들은 아직도 어디에 미련이 있느냐 하면, “아직도 저에게는 열 두 척이 배가 있습니다.”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단 한명도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딱 왔는데, 홍해에 오기 전에 걱정하지 않게 홍해를 딱 열어놔야 하지 않습니까? 오기 전에. 사전에. 왔는데, 완전히 홍해를 건너지 못하게 되어 있다면 뭐 어쩌란 말입니까? 뭐 어쩌라고? 천국 가자는 이야기입니까? 가지 말자는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복음내용의 핵심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천국을 가면 안 돼요. 우리가 가면 안 되고, 우리는 주님한테 삼킴을 당해야 합니다. 삼킴을 당한다는 말은 거기서 몸부림을 쳐봐야 주님께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흥! 웃기고 있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나 협상이 되고 타협이 돼버리면 내 행동의 여부에 따라서 천국 넣어주고 안 넣어주고, 가 돼버립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계약, 언약의 상대자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돼버려요. 나하기 나름에 따라 천국 가고 지옥가고, 이래 돼버립니다. 중간에 뭐가 빠지느냐, 언약의 중보자가 확 빠져버려요. 중보자가 빠져버리면 이게 불교가 돼버리는 겁니다. 교회는 있는데, 안에는 불교신자 다 만들어놨어요. 오늘날 교회가. “예수 믿으면 됩니까?” “예. 믿으세요.” “십자가 믿으면 됩니까?” “믿으세요.” 뭐 그게 무슨 믿음이에요? 그건 행함이죠. 지금 하나님하고 거래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삼킴을 당한 대표적인 것이 요나입니다. 요나는 가는 방향이 달랐어요. 어디냐, 지금의 스페인, 스페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으로 가라고 했어요. 니느웨 성은 지금의 이라크에요. 이라크내지는 이란 그 근처입니다. 방향이 다르다는 말은 그 요나 선지자의 관심사가 딴 데 있었어요. 뭐냐 하면 니느웨 성 사람들이 죽든 말든 자기는 자기한테 관심을 두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나한테 관심 두는 자가 천국을 간다? 이런 인간을 천국에 넣어줄 리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도 자기한테 관심 둘 게 뻔하기 때문에.
그래서 상담이라는 게 주로 자기한테 관심을 두고 오거든요. 자기한테 관심 두는 자체가, 사실은 주님의 관심사하고 점점 더 멀어져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갔을 때에 홍해가 다 갈라져있으면 되는데, 열리지를 않았어요. 그러니 원망할 수밖에 없죠. 그게 제가 아침에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 안에 괴물이 있는 거예요. 괜찮은 나를 주께서 쪼개버립니다.
쪼개버리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는 몰랐는데 내 안에 아주 단단하게 들어가 있어요. 나의 모든 영혼을 장악하고 있어요. 이 괴물이라는 게, 이 저주받을 요소들이 들어있어요. 그 저주받을 요소들이 놀랍게도 윤리고 도덕입니다. 놀랍게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이 천국에 못 갈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나쁜 짓 하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돼! 누가? 내가. 이게 사단이 나게 하는 거예요. 이게 화근이에요.
사람이 뭐 나는 겁 없다, 나는 대장부다, 나는 담대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기 행동에 제일 움츠러들고 조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행동을 내가 잘못하게 되면 이번 주에 어떤 저주나 불행이 찾아올까 싶어서 마음이 쪼그라들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 교회를 안 나왔다면, 이번 주에 내 가정이나 자식한테 아주 큰일이 있는데 내가 그만 태만해서 주님한테 소홀히 함으로 주님이 나를 징계해서 쳐내버리면 나는 그걸 어느 세월에 그걸 다시 회복하고 보상받을까, 라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뭐냐, 열한시 예배인데 열시 반에 미리오고, 요새는 일찍 와도 걱정이 돼요. 집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 이렇게 일찍 오는 것은 사전에 조치를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다 이 말이죠. 올 서비스가 아니라 내가 나를 손대겠다고 하는 겁니다. 손보겠다고 하는 거예요. 어떤 하자가 있는 데를 고치겠다는 거예요. 잘못된 데를 고치겠다는 거예요.
통째로 다 잘못되었는데, 지가 일방적으로 나는 성질이 급한 게 문제고, 설교할 때 톤을 올리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보면 또 높아져있고, 그것만 고치면 되는데... 어떤 분을 서울에서 만났는데 저한테 하는 말씀이 발음이 안 좋다고 해요. 뭐라고 답변해야 하는지, 이 수준에 발음까지 좋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가 발음이 안 좋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것이 문제에요.
그래서 항상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 행동과 자꾸 연결시켜서 문제가 되거든요. 죽을 때까지 선악과가 작동을 하니까. 이걸 고칠 수가 없어요. 고칠 수가 없으면 그냥 누워있으면 돼요. 마사지하는 사람 앞에 누워있으면 되는데, 못된 게 까분다고 고칠 수도 없는 게 어떻게 회복해보겠다고 설치면서 내가 원하는 자아상, 이상자아상을 만든다고 환상을 꾸고 한다 이 말이죠.
홍해 건널 때 하나님께서 물 위를 걷게 했으니까 이제는 그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들 뒤에서 뭐가 들려오느냐 하면 바로의 군대가 추적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으로 못 오게 만들었어요. 지금 홍해를 건너가는 노인들과 아이들의 속도와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마차소리의 속도를 봐서는, 이거는 홍해 가운데서 마주쳐 몰살당하게 생겼어요. 그렇다면 모세의 입장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을 가지고 홍해에 당도한 애굽 군대의 앞을 막아서, 마치 안개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자, 여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진작 알려주지. 진작. 좀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근데 진즉에 알려줘 버리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믿는다는 행함으로 살아가야 돼요.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을 종합해서 믿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 그만큼 잘났다는 소리밖에 안 돼요. 교인들이 목사한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걸 알고 믿으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라고 뷔페에서 맛있는 음식 골라잡듯이, 접시에다 구원받을 요소만 채워달라는 거예요. 뭘 담아 집에 가서 삼키면 구원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믿고 있는 그것이 통째로 아무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또 다시 믿을 것을 그 현장에 새롭게 추가시켜 주시는 겁니다. 선교사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사명이 있다.” 주님께서는 개인적인 사정을 안 봐줍니다. 소용이 없어요. 그 사람의 사명을 찢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사명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그거는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에요. 내 사명마저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걸 없애도 안 되고, 있어도 안 되고, 어떡하란 말인가? 요나한테 큰 물고기를 준비했습니다. 지금 요나의 사명이 뭐냐 하면 스페인 쪽으로 가지 말고 니느웨 쪽으로 가야 돼요. 가는데, 콜택시를 누가 친히 준비했느냐 하면 주님이 친히 준비했어요. 그 콜택시의 이름이 고래에요. 큰 물고기, 택시에 탑승시켜서 육지에 도착해서 토해내니까 톡하고 나온 그 자리가 가야될 그 자리에 온 거예요. 그럼 그걸 요나한테 진즉에 알려주지. 그래야 물에 빠지더라도 걱정을 안 할 텐데, 풍덩 물에 빠졌을 때 자기는 사명이고 뭐고 죽는 줄로 알았어요.
요나가 물에 빠진 그 체험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지금 요단강을 설명하는데 이만큼 걸렸어요. 요단강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을 주의 믿음의 능력으로 우릴 죽이는데, 숨 끊어지게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자기한테 신경 뚝 끊으라고 그러한 택시를 보내주는 거예요. 그럼 요나는 뱃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주님 생각했는가, 천만의 말씀이에요. 요나는 뱃속에서 자기생각 했어요. 아마 코가 많이 길어졌을 거예요. 피노키오처럼.
피노키오가 요나에서 따온 것 아닙니까? 고래 뱃속에 있는. 하여튼 지독히도 아버지 말을 안 들어요. 피노키오라는 동화가 사실은 끔찍한 동화에요. 백설 공주도. 원래 동화들이 끔찍합니다. 순화시켜서 애들 용으로 재편집한 거지요. 실제 동화는요, 특히 은하철도 999라는 것은 자기 엄마를 죽이고, 이거는 뭐 괴기만화에요. 그걸 순화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방송을 안 하는데. 근데 사실 이 세상의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억압되어 있는 겁니다.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어린애한테는 진실을 진실 되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애의 동화의 특징은, 어린애가 동화를 보면서 ‘내가 가족을 위해 일해서 밥 먹고 살아야 된다.’라는 이런 생각이나 걱정을 안 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어린애들의 동화의 특징은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외부에서 다 살려줘요. 백설 공주도 말 타는 왕자가 오잖아요. 신데렐라도 괜찮은 왕자가 와서 다 해주죠. 인어공주도 왕자가 와서 말을 하도록 사람을 만들죠. 대부분 왕자네요. 이게 뭐냐 하면 어린애들한테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개척해야 될 세상이 아님을 갖게 하는 거예요. 어디에선가 공주가, 왕자가 온다는 그러한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겁니다.
누구든지 어린애 같지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그 신랑한테 모든 것을 삼킴 당하면 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 지가 어떤 생활을 하던 간에, 그 애가 자기 집에서 어떤 행동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되면 우리 엄마, 아빠가 산다는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그게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 이걸 해서 한 달 오백만원 벌어 엄마, 아빠를 호강시켜야지, 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를 않아요.
물론 특이한 애들도 있습니다. 천문학 연구하고 맨날 지구 돌아가는 그것만 연구해가지고, 혜성이 와서 지구와 충돌이 일어나면 우리는 다 죽는다는 것이 걱정이 돼가지고, 무려 반평생을 천문학에 종사한 일곱 살짜리 애가 있어요. 영재발굴단에 나왔어요. 반평생을 천문학에 매진했다고 자기 입으로 했어요. 나는 반평생을 천문학에 보냈다고. 몇 년 동안? 삼년동안. 혜성이 오게 되면 죽으니까 이걸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고 걱정이 되는 거예요. 물론 아이큐가 150, 160이나 되는 이런 특이한 애들 말고, 보통 애들은 그냥 지가 즐기는 대로 살면 되는 거예요. 지가 즐기는 대로. 왜? 아빠, 엄마가 다 책임져주니까. 이런 마음이 아니면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요단강 못 건너갑니다.
자, 마지막으로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요단강을 건너서”거든요. 그럼 요단강을 건넜다면, 제가 말한 대로 올 서비스가 있다면 주께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요건이 뭐냐 하면 평소에 내가 나한테 관심 두는 것을 뚝 끊는 계기가 있어야 돼요. 그 두 가지 요소를 다 요단강에서 보여줍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데 갑자기 안 나야 될 홍수가 났어요. 저 위로부터 홍수가 났어요.
원래 건너려고 했던 곳 말고 저 위에 가서 건너라고 해서 갔는데, 위에 갔는데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나, 특히 여호수아는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추가적인 지시가 옵니다. 진작 이야기하지. 절대로 진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시험당할 즈음 돼야 피할 길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 본인이 테스트해서 자기가 해결하는 것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셜록홈즈 라는 유명한 추리소설에서 그 탐정이 수사하는 방법의 원칙이 있어요. 그 집에 개가 있는데 개가 짖지 않았다는 거예요. 개가 있는데 짖어야 될 개가 짖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수사하는데 하나의 포인트가 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복음 전하는데 적용시켜보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면 복음을 안다는 사람은 있는데 짖지를 않아요. 이거는 뭐냐 교회고 뭐고 올ALL, 전부 썩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썩었다는 겁니다.
에스겔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가지고 나가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거든요. 참 이런 점이 성경에서 굉장히 어려운데요. 에스겔 이전에는 망할 쯤 돼서 안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방법이라면, 에스겔이나 이사야에서나 예레미야에서는 망하게 해놓고, 망한 가운데에 있는 그 안에 안 망하는 요소를 포함시켜버리는 방식으로, 같이 떠내려가는 방식으로, 거기에다 딱 담아두는 거예요. 다니엘 같이. 에스겔, 예레미야.....,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보호하사 내가 원하는 이 환경을 보전하소서.”가 삑(☓), 그게 안 되게 만들어요. “환경이 좋으면 나도 주께 영광 돌리겠습니다.”가 삑(☓), 그게 안 되게 만들어요. 환경 따로 나는 따로. 따라서 니가 믿을 만한 모든 요소들을 다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오직 주께만 관심사를 돌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요단강 건널 때에 제사장이 거기에 들어가죠. 제사장을 앞장세웁니다. 9절에 나오는데요. “모세가 레위제사장들로 더불어” 그러니까 요단강에서 갑자기 왜 홍수가 났느냐 하면 너희들은 제사장이 없으면 거기 들어가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근데 이 제사장의 기능이 뭐냐, 다른 사람들은 주춤주춤하는데, 제사장은 뭘 다루는 사람이냐 하면 매일같이 어린양을 잡고 죽음을 다루는 사람이었어요.
죽음을 다루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다루면 그 죽음처럼 그 죽음에 삼킴을 당해서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자기를 죽이는 그 죽음이 제대로 된 영생의 공간이라는 것을 제사장은 앞장서서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도대체 이게 영적 세계가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십자가가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그곳이 바로 내가 사는 곳이에요.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는, 세상 안에서 볼 때 나는 죽은 자에요.
그 십자가는 내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왜? 소유하면 행함이 되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현재 나와 함께 있음을 가끔은 깨우치게 하는 난감한 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 난감한 사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내가 믿는 도끼에 내가 찍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은 자기가 도끼 들고 자기를 찍지 마세요. 그건 객기입니다. 그건 불교에요. 그러지 마세요. 그냥 막사세요.
막산다는 이 ‘막’자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춘천 막국수 할 때 쓰거든요. 춘천 막국수는 누르는 대로 그냥 빠지게 되어 있어요. 이번에 TV에 나와서 봤어요. 아, 저렇게 무조건 누르면 누르는 대로 구멍에서 막 나오게 되어 있구나. 아, 저게 막국수구나. 아, 내가 설교 참 잘했네. 누르면 누르는 대로 그냥 막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듯이, 저게 막사는 거구나.
주께서 하시는 올 서비스입니다. 그냥 눌러버릴 때는 우리 안에서 그냥 괴물이 막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걸 통해서 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의 방향을 트는 겁니다. 내가 누구한테 삼킴을 받는 상태에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제사장한테 삼킴을 받은 거예요. 제사장에게. 제사장이 바로 우리의 어른입니다. 애들이 많은 제사장 가정에서. 그 분이 앞장서서 언약궤 메고 있으니까 갑자기 물이 뚝 끊어졌죠. 그 다음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발을 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에 들어갈 때 있었던 것이 올 서비스라면, 그럼 약속의 땅에서 벌어질 모든 상황도, 그쯤 경험했으면 이것도 올 서비스라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되는데, 그들은 거기 가서 필요한 새로운 시험을 당합니다. 이유가 뭐냐, 칩 라인이 아직 예수님까지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의 실체로 드러날 때까지 이스라엘 중에 그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에 육신이 말씀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천국을 이룬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이론상으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서는 우리가 아직 멀었습니다. 매일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당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의 무슨 죄 때문에 피를 흘렸는지, 그래서 우리가 용서가 되었는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