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1-4 / 이삭의 아내
이삭의 아내
이근호
녹취:오용익
96강-창 24장 1—4절(이삭의 아내)1707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4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0페이지입니다.
창 24:1-4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성경에서 유념해서 봐야할 것은, “……은 아니고”가 “……이다.” 그 앞에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냥, 네 아들 이삭을 위해서 베필을 찾으라고 하면 될 텐데 “……은 아니고”가 3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라고 한 다음에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 아니고 ……이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뜨기 위한 조건입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뜰 때는 이 땅은 아니고 하늘로 가야 되잖아요. 비행기가 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땅에서부터 출발하니까, 땅을 박차야 되니까 땅과 분리되고, 땅의 사람은 되지 말고, 이런 것이 성경에 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것이, 땅이 뭐가 문젠데, 땅이 뭐 그리 말썽인데, 땅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 있기에 주께서는 이 땅을 거부하고 하늘의 사람 되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땅, 세상, 환경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해요. 가나안 족속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라고 했는데 가나안 땅은 구약 내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방인의 딸 중에서는 택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벌써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이방인 아닌 사람을 구분짓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 44장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방인들은 천국 못 간다는 그 말입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저 하늘에 있는 곳, 멋진 하나님의 궁전, 그런 식으로 천국을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방금 읽었던 에스겔 44장 9절의 요소가 빠져 있는 것이 돼요.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기에 얼마나 멋지게 사실까? 그 하나님이 격에 맞도록 화려한 그 하나님의 성에 우리가 합류하면 너무 좋겠다. 그래서 그 천국에 가야지.’라고 한다면 뭐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빠져있어요.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방인은 못 간다는 겁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에 하나님이 만들어준 인간 같으면 다 넣어주시는 것이 우리 인간입장에서 참 좋으신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겠는데 저 하늘에서부터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런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 천국은 인간이면 다 간다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맞는 인간만 간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조건 없이 저 하늘 저 좋은 곳이라고 우리가 생각했다면 우리한테 문제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너무 성급하다든지 너무 욕심이 많은 겁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하나님 쪽에서 조건을 걸었는데 우리 쪽에서는 조건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조건에 의해서 재조립이 되어야 되고 다시 구성돼야 돼요. 천국이 있다고 우리가 상상만 해도 기쁘지만 그렇게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에 천국이 있다는 그 생각조차도 뭔가 잘못이고 바뀌어야 될 요소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스겔 44장에 보면 이방인의 특징이 뭐냐? 할례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국 가는 조건은 할례 있는 자만 들어간다, 그게 제시되어 있지요. 그러면 할례라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들어봤다 할지라도 할례행할 맘도 없고, 나는 살던 대로 그냥 살래, 하는 사람은 천국 못갑니다.
이미 천국의 조건이 이 지상에 말씀으로 주어졌으면 그 말씀을 따라야지요. 자기 희망사항을 윽박지르듯이 밀어붙일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우리 고집대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할례 행하지 않는 이방인 천국에 못 간다. 그렇다면 그 할례 안에 뭐가 들어 있겠는가?
천국을 가고 못 가고를 결정하는 요소가, 속성이 거기에 들어 있겠지요. 들어 있는 그 속성이 할례언약의 말씀을 통해서 이 땅에 구체화되고 실제화 되는 증거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이 누구한테 최초로 주어졌느냐 하면 아브라함가정에 최초로 주어졌습니다.
그 때 할례언약과 동시에 이스마엘,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 그 집안의 남자는 다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아브라함 가정은 여타의 가정과 다른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복잡해지는 겁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다르다는 거예요. 똑같이 코 있고 눈이 있는데 사람이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르냐?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냐? 이쪽은 천국가고 저쪽은 지옥 가는 인간으로 구분 짓는 요소를 천국 가는 가정에서 찾아봐라.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이성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때에, 그렇다면 그 특이한 요소를 가진 아브라함이 늙어서 죽잖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서 늙어 죽는다는 말이지요. 늙어 죽어버리면 “이 사람이 도대체 뭘 봐서 천국 간다고 주장하는 거야? 시체한번 파봐.” 이럴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늙어 죽으면 다 썩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할례언약, 천국 가는 요건, 조건을 후대에 어떻게 연결시키느냐하면, 자식을 통해서 연결시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서 나온 자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요소가 확장되어서 전개되는 거예요. 진척이 있다는 말이지요.
먹는 물 가두어놓은 곳을 수원지라 하지요. 물 가두어놓은 댐과 각 가정 사이에는 지하로 수도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공사하다가 말아버리면 아무리 수돗물 틀어도 물 안 나오거든요. 파이프가 끝까지 연결될 때 수도꼭지 돌리면 물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할례언약, 천국의요소인데 아브라함 가정의 자식을 통해서 그 파이프를 연결하는 공사를 하는 겁니다. 그 자식이 특수한 자식이에요. 아버지가 특수한 아버지라면 거기서 나온 자식도 특수한 자식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특수하다고 했는데 그 특수한 요소가 뭐냐 하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구하는데 이방인 족속중에서 아내를 구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 앞에 이삭은 자식입니다. 수도파이프 이야기할 때 아버지 아브라함, 아들 이삭, 이미 아들이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연결공사는 끝인데 또 무슨 공사가 남아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이런 점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건데요. 아브라함 되기 전에 아브람 때 그 때는 아내 이름이 사라가 아니고 사래였습니다. 사래하고 아브람이 결혼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의 요소가 없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방인이나 아브람이나 똑같은 입장입니다. 천국이 있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그렇고 그런 가정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거든요. 언약이 개입되면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했듯이 사라가 죽는 자리가 막벨라 굴이에요. 여기가 집결소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여기에 다 집결해요. 십자가에 집결하듯이 다 집결합니다. 사래가 사라로 바뀌면서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두 개의 층, 아브라함의 이중성인데 그 두 개의 층을 노출시키는 기능이 사라를 통해서 밝혀지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둘 있다는 것, 남들 보기에 본처와 첩 이렇게 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두 개의 언약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는 지옥노선, 수도파이프가 지옥으로 연결된 것, 하나는 천국으로 연결된 것.
인간은 중립지대에 있다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지옥 갈 사람을 지옥 갈 사람으로 분류를 시키고 천국 갈 사람을 천국 갈 사람으로 분류를 시키는데 그 분류시키는 지상의 구체적인 작업과 그 요건들을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가정을 인정하면 복이 있고 아브라함가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하는 거예요.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가정에서 이미 저수지처럼 모아져 있어요. 담겨져 있다는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인데 아내가 둘이 되었어요. 아브라함 요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의 요소가 둘 다 중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 그냥 이웃집 아저씨로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하고 똑같은 아저씨에요. 그것은 신체를 갖고 있는 육적인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지요. 나중에 생식기가 할례 되어 있다는 그것뿐이지요. 생식기가 할례 되어 있어도 그 키에, 그 몸무게에, 우리하고 똑같은 신체를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신체조건을 봐서 어딜 봐서 뭐가 중첩이 되어 있어요? 특이점이 없어요. 없는데 아내가 둘이었고 아내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중첩된 요소가 각기 분리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등록을 해요. 모든 여자는 결혼하게 되면 남편에게 등록이 됩니다.
남편에게 등록이 되는 동시에 남편의 모든 것을 아내가 간파하게 되어 있어요. 지난 부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만든게 아니고 처음에는 달랑 한 사람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강의현장에서 제가 목사님들에게 물었어요.
아담이 사람일까요, 남자일까요? 그 질문을 한 거예요. 처음에는 아담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 아담은 사람이 아니고 남자가 된 거예요. 아내가 남자에게 등록이 되면 그 아담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달랑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면 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해요.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다. 아담.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하나로서 완전해야 되는데 거기서 여자가 나왔다는 말은, 완전한줄 알았는데 완전한 인간에서 또 한사람이 튀어나왔어요. 그러면 둘 중에 누가 완전하냐는 말이지요. 둘 중에 누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둘이 한 몸이 될 때 그 숨겨진 완전함이 이제는 파생되는 겁니다.
남자 여자의 관계로 완전함이 늘어진 거예요. 이해되는지 모르겠는데 계속 해 봅시다. 아담이 그 자체로 완전한데 그 완전함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고 완전해요. 완전한데 그 완전하다 그 1이 2가 된 겁니다. 2가 완전한 거예요.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그 완전함은 뭐냐? 남자와 여자사이의 관계가 완전함이 되는 겁니다. 그 완전함은 나중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죄짓고 난 뒤에 남자의 죄지음까지 커버가 되는 완전함이 여자 쪽에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와 이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부산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그들이 뭘 놓쳤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쫓겨나서 지상에 왔을 때 그들이 뭘 놓쳤는가 하고 제가 물었을 때 얼른 답변들을 못해요. 뻔한 거잖아요. 생명나무 과실을 못 먹게 되었잖아요.
생명나무 과실을 못 먹는데 여자의 이름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부족해도 완전함은, 인간을 창조한 그 창조의 원천은 계속해서 완전함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완전한 원천과 교류가 계속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대구에 사시다가 서울로 이사 가게 되면 서울로 이사 갔다고 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별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대구에 있어도 창세전에 완전함과 교류가 되어야 되고 서울로 이사를 가더라도 그 완전함과 교류가 되어야 되고 나이지리아에 이민 가더라도 완전함과 교류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수직적으로 주님의 창세전의 그 원리, 창세전의 생명의 원리와 교류할 생각은 안하고, ‘서울에 왔으니 나름대로 또 살아야지.’ 혹은 ‘영국에 이민가면 영국에서 다 잊어버리고 살아야지.’ 그저 수평적으로 이동했으니까 저쪽과 상관없다 하는데 주님께서는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것은 의미 없어요.
수직적으로 대구에 있을 때는 어떻게 살았고, 서울에 있을 때는 어떻게 살았고, 영국에 가서 어떻게 살았고, 항상 원천과 교류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이 개입된 하나님의 원천과 교류가 계속 되고 있는지를 묻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주어졌다는 말은 원래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창조의 원리를 계속해서 아브라함가정을 향하여 계속 쏟아 붓고 있는 거예요.
그로 인하여 사라라는 개념자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두 가지 개념이 있거든요. 하나는, 사라는 아기 못낳는 여자고 하갈은 아기 낳는 여자거든요. 아기를 낳는 여자, 혈통적으로 유지가 된다. 아기 못낳는 여자, 혈통적으로 유지가 안 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아브라함 속에 중첩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편에게 등록하기 때문에. 그냥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의 여자에요. 남자의 여자라니까요. 여자는 홀로 여자가 아니고 누구누구의 여인이에요. 여자는 홀로 등록이 안돼요. 남자가 있어야 등록이 돼요. 등록을 함으로 말미암아 남자는 착각해요. 저 여자는 내 소유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자로 하여금 여자를 자기 온전한 소유라고 착각하는 남자의 착각을 완전히 갈아 부숴버립니다. 남편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이, 남편! 이리와. 너 한 가지 요소가 들어있어,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어?” 묻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가 “무슨 소리야? 나, 남자야! 나 가스통 들고 가는 남자, 남자다운 남자, 의리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야. 남자는 이 가정의 가장이고 너는 나에게 복속되어 있고 예속되어야 될 여자에 불과하고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이렇게 하거든요.
여자는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혈통, 신체, 육, 육 하나뿐이라면 지옥갑니다. 당신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당신의 혈통적 가문을 이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라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남자라면 이 남자는 여자덕분에 구원받습니다.
할례라는 것,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혈통으로 나지 않은 자식의 태어남을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착각을 해서, 내 자식이다, 내 후손이다, 내 15대손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모든 족보의 이름은 남자에게 등록이 되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잖아요. 모든 이름은 남자로 등록되는데 남자가 등록해서 낳은 자식이 혓바닥이 둘로 갈라지듯이 둘로 갈라져야 돼요. 그 갈라질 때 들어가는 특이성이 뭐냐 하면, 그 등록된 여자의 아내가 특이성이 있으면 그 남자는 비로소 여자덕분에 구원을 받는, 다른 말로 하면 생명덕분에 흙이 영생을 얻는 거예요.
하와라는 생명이 아담이라는 흙을 영생의 나라로 가게 만든다는 말이지요. 여자의 후손이 뱀을 이겨서 소위 남자의 으스댐, 건방짐, 그런 것을 묵사발 만들어버려요. 지금까지 본문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아기 못 낳는 여자 사래가 있었다. 그 이야기라면 그 다음에 오늘 24장부터는 뭐냐 하면, 이삭에게 역시 아기 못 낳는 여자가 들어가야 돼요.
리브가가 불임여성입니다. 마치 자기 시어머니가 불임여성인 것처럼. 아기를 못 낳는다는 이것은 혈통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끊어져야 돼요. 혈통을 끊어버리는 여인이 등장해야 됩니다. 아기 못 낳는 여인이 등장해야 돼요. 그래야 구원받을 남편들이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약속을 받았지만 대를 이어서 어떻게 약속을 전할까? 옳지 수도파이프처럼 나는 죽지만 내 자식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이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내 혈통, 자손을 통해서 대대로 이어지니까 그 시대마다 구원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경우에는 남자혈통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혈통 그 때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그 사태가 하나의 요소들로 세팅되어서 그 세팅 자체가 반복돼요. 아브라함은 남자다. 그런데 그의 여자가 아기를 못 낳더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혈통을 이어서 나님의 약속대로 내 자식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할까 싶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라고 했더라.
그러면 내 자식은 없네. 자식이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거예요. 나는 네 혈통적인 자식은 천국 못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 육으로 태어났지? 그러면 천국 못 간다. 육으로 난 것은 천국에 못 간다.”
방금 제가 죽 이야기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보세요. 그 사람들은, 모든 인간은 똑같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영 인정을 하지 않아요. 사실은 아브라함도 그러고 싶어요. 다른 사람과 똑같고 싶고, 사라도 똑같고 싶은데 하나님이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신체를 갖고 있고 육을 갖고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게 되면 자기신체가 보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밖에 믿을 것이 없어요. 그것이 당연한 상식에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 말고. 그 몸은 안 된다는 거예요. 내 눈에는 거울 앞에 선 내 몸밖에 안 보이는데 이 몸의 행함으로 안 된다면 천국은 아무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인간적 입장에서 갈 수 없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없다고 간주하는 겁니다. 맞아요. 그 세계는 없어요. 하지만 그 세계가 있음을 나타냄과 동반해서 이 지상에서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 나라 저기 있다. 오너라.”가 아니라 그 나라는 없는 나라인데 그 나라는 없는 것과 네 자식이 없는 것과 나란히 없는 사태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자식이 생기거든 그 자식만이 갈 수 있는 나라가 내가 아는 상상의 천국이 아니고 정말 계시는 천국을 이렇게 연결시켜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내가 생각하는 내 육체 말고 하나님이 볼 때 이 육체에 더 뭔가 플러스가 있다고 느껴지게 되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구원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느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했습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을 테스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테스트 한 거예요. 어떤 점에서 그런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모리아 산에서 번제를 드릴 때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장작 준비하고, 칼 준비하고, 불 준비하고, 자식 준비하고, 다 했는데 빠진 것이 있었어요. 그 빠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빠진 것이 수풀 속에 갇힌 수양입니다. 그것은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테스트 받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내가 예상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이고 이방인들이에요. 내가 믿을만한 것은 내 육체에서 나온 거예요. 이방 불신자들, 지옥 갈 사람들은 자기가 뭐가 빠졌는지를 몰라요. 내가 무엇에 무지한지를 몰라요.
아브라함이 아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일에 어떤 점이 무지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있지요. 이것은 내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그 무지에요.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몽땅 믿어봤자 그것은 믿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을 믿게 될 때 그게 믿음이에요.
내가 예상 못한 것을 믿게 될 때 그게 믿음이에요. 항상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도할 때는 예상 밖의 일을 벌여서 인도해요. 예상한 것은 비켜가고 예상하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제공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무지상태로 몰아넣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불신자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천국가고 자기가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게 아브라함에 담긴 의미에요. 사람이 많이 알게 되면 행동할 것이 없어요.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면 결혼 못합니다. 따지다가 결혼 못하고 40넘어 50 다돼요. 결혼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결혼하는 순간부터 없던 결혼이 새로 생긴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이렇게 무지로 몰아세웠다는 자체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어버려요.
자기 자신을 믿어버리면 그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고 아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자기의 육체에 대한 자기부인이 안돼요. 자기단절이, 육체의 단절이 안돼요. 더 여분의 것이 와야 돼요.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여분의 것이었습니다. 네 혈통 아니고, 라는 말을 하면서 그 뒤에 나타난 자식이 이삭이에요.
이삭에게도 똑같은 경우가 닥칩니다. 이삭의 아내는 이삭으로 하여금 네 자신이 복의 근원 아니오, 라고 지목할 불임의 여성을 만나야 되는데 그 여성은 없습니다. 그 여성이 없다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에요. 모릅니다. 어디 있는지 모르고 아브라함에게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환도뼈 언약이라고 하는데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자기 종에게 가라고 합니다. 없는 여자 찾으러 가라는 거예요. 있지도 않은 여자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그때 만나라. 있지도 않는 여자, 그런 여자 없습니다. 우리는 드라마의 뒤를 보니까 “리브가 있잖아.”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의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이미 모리아 산에서 제사드릴 때 믿음이라는 것이 뭔지 알았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무지를 믿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일반인들은 그것이 안돼요. 보통 사람은 모르게 되면 없는 것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익히 알고 있는 것, 안다는 범주 안에서만 골라서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언약이 개입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창조전의 원천과 교류하고 있어요.
그 교류가 현장의 아브라함에게는 무지의 상태로 등장하는 겁니다. 만약에 수풀에 양이 잡혀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잡을 때 시늉만 했을 거예요. “다 준비되어 있거든. 그냥 하는 척이나 하면 된다.” 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자기 믿음을 몽땅 다 보여줬습니다. 진짜 칼 들고 죽이려 했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 아브라함이 단절된 아브라함이에요. 그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단절된 아브라함입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자식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그 이후에 여분의 것, 내 것으로 못함을 앎과 동시에 등장한 것, 주께서 뭔가 준비했기에 더 이상 내가 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그 사실을 동시에 알려주는 겁니다. 이 방식이라면, 이 방식이 나는 늙어죽고 내 아들에게 이어진다면, 내 아들의 아내에 대해서는 주께서 친히 수풀의 양처럼 주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이지요.
준비하는데 어떤 여자인지는 아브라함은 몰라요. 그리고 이삭도 몰라야 되고. 이삭도 모르고 아브라함도 몰라요. 사람이 안다는 것은 전부 과거의 체험을 지금의 현재에 편집한 기억의 창고의 추억들에 불과해요. 과거가 아니고 지금 재편집하고 거기에 편집만 합니까? 수정하고 현재의 자기존재를 긍정하는 요소에 부합하도록 조미료 쳐서 엉터리 역사를 만듭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편성이라 하는데 인간의 보편성이라 하는 것은 개별자가 의미를 가지기 위한 일방적 역사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의미가 있기에 일방적 역사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를 찾는 것을 하나의 역사로 보신다면 그것은 잘못보신 거예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예상한 역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맡겼어요. 그래서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한 겁니다. 뭐라고 맹세했는가? 2절에 보면,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여호와라 하는 것은 현재 나를 나 되게 하신 그 여호와가 너와 함께 동행할 것이다.
“나는 집에 있을게. 그러나 주께서 너와 함께 동행할 것이다. 이 언약대로.” 이 언약은 아버지의 소원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뭘 기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들을 위해서 배필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있음에 필히 나에게 일어난 세팅된 사태, 세트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지속적인 그 다음 행보인 거예요.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게 된 거예요. 그 모습이 뭐냐? “나는 네 아내에 대해서 무지하다.” 내가 믿는 것은 나의 예상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찾아온 주님의 약속대로 시행되는 것을 사후적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오늘 설교 줄거리가 이렇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불가능성을 이제 뭘로 연속시키는가, 만남의 불가능성. 이삭의 배우자에 대해서 늙은 종이 일체 조건을 걸어서는 안돼요. 그래서 순적히 만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순적히, 라는 말은 저에게 아주 굉장히 깊이 박혀 있는 내용이에요. 상견례 할 때 우리 사돈이 “이 만남은 아주 순적하게……” 교회에 아주 열심이거든요. 분명히 교회에 열심히라고 했어요. 그래서 들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신랑신부를 순적히 만나게 해주셨다고 해가지고 그 ‘순적히’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왔는데 이제야 제가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순전히, 는 이 세상에 없어요. 따라서 그 순적히, 에서 우리는 손을 떼야 됩니다. 나를 위한 나의 의미, 나에게 의미를 주는 ‘순적히’를 주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우리는 창조의 원천과 교류가 되어야 돼요. 교류가 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두가지의 요건속에서 우리자신을 봐야 돕니다.
“주여, 저는 육으로 지옥가야 됩니다.” 항상 이것이 전제돼야 돼요. 내가 죽을 때까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나만의 역사, 나만의 스토리, 나 위주의 드라마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나의 연속성을 꿈꾸고 있는, 늙어죽을 때까지도 그것밖에 없는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그 작업이 지금 영생을 주시는 작업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영생을 주고 또 주고 또 주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죽어 마땅함이라는 느낌이 계속 일어나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첩된 거예요.
하나 버리고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내 속에서 있어야 돼요. 그래서 기도할 때 제가 했잖아요. 현재의 내가 앞으로 뭐가 될까, 하는데 지금 이 모습이 나의 완전한 모델이에요. 왜? 중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에 어떤 역경이 있고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지옥갈 수밖에 없는 신체를 가지고 이렇게 다듬고, 저렇게 다듬고,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갖다 버릴 쓰레기거든요.
그 쓰레기를 쓰레기 되게 하게 하신 능력이 이미 신자기 때문에, 성도기 때문에 마음껏 분리할 것을 분리하는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우리소관이 아닙니다. 내 인생 어떻게 될 것인가, 미리 알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 무지를 계속 유지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한 세상인 것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까, 어떻게 살까, 라는 생각자체가 정말 저주받을 생각 그 자체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것을 알게 하신 그 주님의 능력이 이미 영생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또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