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무엘상

27강 / 사무엘상 8:1 (부름) / 170627

정인순 2017. 6. 27. 22:55

 

 

음성1      

 

녹취:이미아

  

대전-27강 사무엘상 8장 1절(부름)

20170627-이 근호 목사

1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을 받았죠. 사무엘이 늙으매 그 뒤에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자식들이 사무엘 같지를 않아요.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아요. 이거는 성신의 효과가 자식에게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전달되지를 않아요. 아버지가 훌륭하다고 해서 자식이 훌륭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은 이미 혈육을 완전히 개무시 하고 주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혈육을 개무시 해요. 그런데 성신 받은 자는 사무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무엘은 성신 받았다, 이러면 안 되고 사무엘을 둘로 나누어야 해요. 사무엘은 혈육이 정상이다. 이게 정상이에요. 근데 그동안 일한 것은 성신의 덕분이죠.

성신의 덕분이니까 사무엘을 인간이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대단하다!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을 훌륭하다,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들 수상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인간들이, 같은 쓰레기 속에서 좀 괜찮은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는 겁니다. 같은 쓰레기인데, 우리보다 좀 더 나은 쓰레기다 싶으면 이렇게 내놓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영웅이 등장한다면, 그 영웅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구원해 줄 어떤 영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역시 쓰레기니까, 인간이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인간이 요청한 그들을 받지를 않아요. 그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에게 지도자를 주시옵소서! 사무엘 같은 지도자를 주시옵소서!”라고 그들이, 인간 쪽에서 먼저 요청한다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버리느냐 하면 같은 인간은 옆에 있기 때문에 주고받고, 주고받는 게 가능한데, 하나님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처분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쉽다고 해서 쪼르르 쫓아오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버거운 거예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거예요. 감당하기 힘들면 인간이 유지하고 있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할 때, 아쉬울 때 보험처럼 전화 한 통이면 쪼르르 와가지고 도와주고 이러면 좋겠는데, 인간이 요구한 영역밖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찾아오면 찾아오고 가면 가고, 우리 인간 말을 안 들어요. 우리 인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짜증스러운 거죠. 하나님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는 거죠. 하나님만 생각하면. 제물은 받아 챙겨놓고 막상 어려울 때는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안 도와준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부담이 되는 것은 귀찮은 거예요.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잘라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라낸다는 것은 곧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하나님 말씀을 안 듣겠다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꾸려가겠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간섭받고, 누구한테 주시당하고, 누구한테 심판당하고, 하는 그런 것은 내 자유에 침해하는 걸로 생각해서, 아예 당신은 당신, 나는 나, 따로 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 아들들이 말을 안 들어요. 3절에 나와 있죠.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게 뭐냐 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이 도와주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멋져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철수하게 되면 인간본성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무엘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사무엘이 늙고 죽고 난 뒤에는 둘로 나누어져요.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처음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생각이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게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있는 이유가 버겁고 힘든 이유가 있어요.

젊은 애들이 오토바이 타잖아요. 오토바이를 고를 때, 마법이 들어가 있는 오토바이로 잘못 골랐어요. 오토바이를 탔는데, 뭔가 귀신 들린 오토바이를 골랐다고 칩시다. 그럼 보통 오토바이는 뭐냐 하면 내가 타고 싶을 때 조종하면 가고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데, 동화책이나 만화책에 이 마법 같은 오토바이가 있다면, 이거는 누가 주인인지 누가 오토바인지가 구분이 안 되고, 타고 싶을 때 꿈쩍도 않고, 내리고 싶을 때 못 내린다면 오토바이를 얼마나 팔고 싶겠어요? 내 돈 주고 내가 샀는데 오히려 내가 그 오토바이 종노릇하고 노예가 된다면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겠어요?

제가 오토바이를 예로 든 이유가 모든 인간의 육체가 인간에게는 오토바이 같은 것입니다. 마법 걸린 오토바이에요. 인간이 자기육체를 골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키가 얼마고, 우리 가정이 어떻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오토바이를 탔는데, 그 오토바이를 타면서 생겨난 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아를 생각하면서 남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의 끓어오르는 욕구와 욕망과 우울함과 성질남, 화딱지...이런 것들은 성난 오토바이를 다루는 것처럼 우리가 주인노릇을 하지를 못해요. 평생 그렇게 끌려갑니다. 어른들이 옛날에 뭐 교수했느니, 뭐 인테리어기술자니, 뭐 고급공무원이니, 그렇게 했어도 나중에 치매 걸려 경계선 가까이 가보면요.

자존심만 있고, 몸은 개판이고, 몸은 안 따라주고, 자식들 앞에서는 품위유지하고 싶고, 돈은 없고, 지저분하게 살기는 싫고, 그러면서도 옛날 고전선비기질은 남아있고, “이리 오너라!”하는 기질은 남아있고, 돈은 하나도 없고. 부모자식 간에 돈 없으면 그거는 선비고 뭐고 없습니다. 돈은 꽉 쥐고 있어야 돼요. 돈이 없는 순간 천덕꾸러기기 됩니다. 뭐 아버지고 뭐고 없어요. 과거는 필요 없어요.

그러니 그 자괴감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자괴감이? 젊을 때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했습니다. 절제할 것 절제하고 자기관리 철저히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나는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직생활 하면서 쓸데없는 뇌물 받지 않고, 자식들 보기에 아버지다운 모습으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아주 장렬하게 희생하듯이 그렇게 보여줬는데, 근데 지금은 지 몸도 하나 간수 못해가지고.....,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거는 너무 심하죠. <미친 오토바이>라고. 인간은 미친 오토바이에요. 그리고 오토바이를 내가 골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남자 되고 싶은데 여자 되고, 여자 되고 싶은데 남자 되고, 이렇게 골라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미친 오토바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자꾸 내 육체가 문제라고 하는데, 내 육체가 문제가 아니고, 이 자아가 문제에요. 자아가.

이 자아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육체뿐인데 육체에서 자아로 올 때, 우리는 곱게 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뭔가 관여하는 어두운 힘이 있어요. 어두운 힘. 암흑이죠. 어떤 어두운 힘이 있는데, 이 힘을 성경대로 하면 욕심, 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욕망. 욕심이 있습니다. 항상 정돈되어 있는데 찢어버리는 것. 정돈된 내 마음을 찢어버리는 것.

날씨가 구름이 좀 끼었다 하면 내가 아무리 견뎌도 우울해지는 거예요. 갑자기 슬퍼지는 것. 이유도 몰라요. 행복 하고 싶은데, 행복하기 위해서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는. 근본적으로 이 어두운 힘이 있다는 것이, 이게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하면 지금 형편에 내가 자족하면서 ‘이거는 행복이다. 내가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돼!’라고 마음먹더라도 그 마음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이정도면 만족해.’라고 하는데, 뭔가 그 순간에 ‘아니야. 뭐가 더 있을 거야.’라는 것에 마음이 휘감기게 돼요. 우리가. 자식이 와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엄마! 또 전교에서 1등 했어.”라고 해요.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엄마! 또 1등 했어.” “그래, 수고했다. 잘했다. 그러니까 내 자식이지.”라고 막 기뻐해야 하는데, 그 순간 딱 듣자마자 ‘기껏 이게 내 행복의 다야? 기쁨이 꼭 이런 것인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게 다일까? 뭔가 더 남아있을 것 같아요.

이걸 가지고 “욕망의 잉여”이라고 합니다. 여분의 것. 근데 그 여분의 것은 이미 아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점에 도달되게 되면, 찔끔찔끔 줄 생각도 안 한 그 잉여부분이 딱 그 지점에 도달되게 되면 이게 나로 하여금 지금의 행복을 와장창 다 깨고 완전히 우울로 바꿔버려요. “엄마! 이번에 전교 1등 했어.” “그래. 수고했어. 참 기뻐.” 근데 이게 몇 시간 가지를 않아요. ‘글쎄, 이것이 다인가? 결국 내 사는 마지막 기쁨이 이걸로 끝인가? 아니야. 분명히 더 있을 거야.’

그럼 자식이 “엄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야. 안 좋아하기는 내가 왜 안 좋아해? 좋아하지.” “근데 별로인 것 같아?” “아니야. 잘했어. 수고했어. 다음에도 1등 빼앗기지 말고.” 그런데 이 미친 오토바이가 또 나라는 속도를 높이네. 나는 그걸 뒤따라가기 위해서 헉헉거리며 허겁지겁 숨이 막히고. 근데 이게 집에 있으나 교회가나 마찬가지에요. 신앙생활 한다고 이런 것을 못 이깁니다. 미친 오토바이가 교회에 간다고 멀쩡합니까? 안 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평생을 어떤 괴물한테 항상 당하고만 사는 존재가 돼요. 끌려가는. 끌려가고 당하고만 사는 것. 이걸 어렵게 말하면 일치를 원하지만 다시 잉여, 여분의 것, 나머지가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일치를 깨버리고 방해하고 또 끌어당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한테 많은 혜택을 입었잖아요. 입었기 때문에 사무엘한테 늘 감사하고 있어요.

근데 사무엘한테 혜택을 입었다는 그 단계, 계단이 있거든요. 그 단계에 딱 들어서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무엘의 그 자식은 적어도 사무엘보다는 우리에게 더 많은 여분의 것을 줘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더! 더! 더! 미친 오토바이입니다. 내가 오토바이를 다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다 헛방이라고,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종교생활, 신앙생활 다 헛방이에요. 아무 소용없어요. 뭐 신앙생활 한다고, 누가 뭐 도 닦았다고, 행복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한 구석에는 텅 빈 마음이 있어요. 낭만을 위해서, 뭔가 낭만을 위한 여분의 것이 또 있어요. 어딘가 모르게 텅 빈 그 구석에 의해서 항구의 외딴 다방에 앉아가지고 쌍화차 주문해서 마시고 있는 겁니다. 짙게 화장한 마담하고 쓸데없는 한담(閑談,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나눔. 또는 그러한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이 여분의 것 앞에서 우리가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고, 항상 덜 떨어진 인간, 내 신체가 발휘하는 욕망에 비해서 나는 항상 뒤따라가는 거예요. 형이 자전거 타고 달리면 동생은 “형! 같이 가!”하고 뒤따라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누구의 동생인데, 그 놈의 형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사실. 미지의 X에요. 미지의 X.

평생을 그렇게 끌려가듯이 사는 거예요. 미지의 X에게. “형아!” 하고 같이 가자고 하는데, 형은 계속 앞장서 가요. 달그림자처럼. 따라가면 저만치 앞서가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종교라는 것이 소용없다고 했는데 그럼 성경은 왜 봅니까? 성경은 그 미지의 X가 있잖아요. 우리를 평생 괴롭히는 욕망. 욕망을 가운데 두고 하나님과 인간이 이렇게 대치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위에 계시면 가운데 X가 있고 아래에 인간이 있고.

근데 교회에 와서는 이 X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X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거예요. 이걸 중보자라고 보는 거예요. 중보자. 나의 모든 괴로움과 소망은 하나님 사이에 오신 중보자에게 기도하면 우리의 모든 행복과 행운이 주어진다. 중보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왔어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죠. 진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쪽에서 왔다고요. 이걸 사무엘에서 보면, 사무엘에게는 성신이 되는 겁니다. 성신은 하나님 쪽에서 왔어요. 하나님 쪽에서 왔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 모든 것은 X한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 여기 X를 메우기 위해서 인간이 신을 찾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우상 삼위일체. 우상 예수. 우상 하나님. 우상 성령.

인간이 자기 원하는 그 잉여를, 여분의 것을 메우고자, 신의 은혜와 은총으로 메우고자, 그래서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내가 처분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주인공으로 내가 유지하기 위해서, 미진한 것을 하나님에게 채움 받고자 찾는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입니다. 금송아지.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질문을 해봐야 해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난 뒤에 백성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부지런하게 움직였어요. 움직일 때, 그들은 미지의 X를 위해서 움직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친 오토바이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뭐라도 해야 해요. 뭐라도.

나이 60에 퇴직했다. 퇴직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합니까? “이제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두 번 다시 일하나 봐라.”라고 이렇게 나오거든요. 김을수 집사님처럼. 월요일에 퇴직했거든요.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거예요. 이능우 집사님이 아무것도 안 한다고 주장하다가 3개월만인가, 6개월 만에 다시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안한다? 인간은요, 절대로 아무것도 안 할 위인이 아니에요. 미지의 X가, 그 미친 오토바이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니까요. “형님아! 어디가?” 하고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따라가게. 등산가고 놀러가고 백날 해봐야, 한 달 내내 가면 지겨워서 못해요.

뭔가 나의 나다움을 가족들에게, “이 아빠 안 죽었어.”라는 객기, 오기, “아빠 봐! 아빠 끝까지 옛날 아빠잖아. 지속되잖아? 그 동일성이. 그때 존경받았으면 여전히 존경받는 것이 유지돼야 돼. 포에버,FOREVER! 영원히!” 아빠가 뭔가 그게 하고 싶은 거예요. 한 6개월 이래 놀고. 딸이 바깥에 가서 말아먹고, 지 처갓집 말아먹고, 노래방해서 말아먹고, 하는 족족 말아먹고.

지난 1년 동안 1억 투자해서 망한 업체가 14,000개나 돼요. 1억 투자해서. 우리 동네에서 가게 세우면 말리고 싶어요. 안 되는 거 알아요. 분명히. 그런데 양품점하고 식당하고, 하거든요. 내 돈 같으면 말리는데 남의 돈이니까 그냥 있는데. 왜 하느냐,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집에서 놀면 뭐합니까? 각 집마다 미친 오토바이가 다 있는 거예요. 아내는 빨리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하지. 나가서 뭐 할 건데? 탑골공원이나 그런 것은 서울에 있지, 대전에 그런 데가 있습니까?


우상은, 금송아지를 섬겼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섬긴 거예요. 자기 자신을. 여기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바깥으로 발현되고 표현된 거예요. 미지의 X를 실체화시킨 겁니다. 미지의 X가 안 보이니까 답답한 거예요. 그러니까 미지의 X를 내 마음에 들도록 내가 손질하는 겁니다. 목각하는 것처럼. 쇠와 동과 나무를 깎아 만든 이런 것처럼. 그 깎아 만든 것이 퇴직하고 난 뒤에 파리바케트에요. 그게.

여기의 X, 우상은, 진짜 하나님은 내가 요청해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버거워요. 우리가 감당을 못한다니까요. 감당을. 가족끼리 살다가 촌에서 시어머니 한 번 와보세요. 감당이 안 되는 이유가 남편은 내가 골랐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잖아요. 딸 셋 있고 방 두 개에서 사는데, 남편이 지 맘대로 결정해가지고, “어머니 내가 모신다.” 그것도 6남매 막내아들이 와서 그러니까 난리가 났잖아요. EBS에 나와요. 이주민의 고부갈등, 그런 게 나와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못 견뎌서 다시 예산인가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그 남편은 아내한테 허락도 없이, 아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고 외국인이거든요. 아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했느냐? 그 남편, 아내, 그 미친 오토바이가, 어머니한테 효도하는 그게 미친 오토바이라니까요. 나는 자식으로서의 자기의 정당성, 뭔가 효도를 해야 하는데 미진해. 효도를 못했다는 그 아픔이 있는 거예요. 그걸 부모님을 모심으로써, 그 아픔을 메워줌으로써 나는 온전하게 되고, 나는 나답게 행복한 나, 나는 누구 앞에 큰소리 칠 수 있는 나,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이다, 라고 이제는 외칠 수 있는 나를 만드는데,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 어머니는 뭐냐, 아들이 자기우상 섬기는데 재료로 끌어당긴 거예요. 빌미로 끌려 들어온 거예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인생 뭐 있어요? 인간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기존교회에서 행함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 각자 신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다 다르고 예수가 다 다르고 다 달라요. 각자 우상이니까.

그 우상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우상이고, 나하고 대화가 되는 우상이고, 내가 조절할 수 있고, 줬다, 뺏었다, 밀당 하는 우상을 원하는 거예요. 그럼 그 우상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면 되는가, 자기 행함을 집어넣으면 되죠. 어떻게? 십일조 받아 쳐 묵고, 주일성수 받아 쳐 묵고, 선교했다 하면 칭찬해주고, 봉사하면 이쁘다고 30배 복 주고. 그런 내용으로 채워진 예수를 사람들은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섬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예수 안에는 자기 잘남을 흔쾌히, 흔쾌히 받아줘 가지고 복주고자 이미 계약이 성립된 거예요. 계약이. 계약이 뭐냐 하면 일반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너와 나 계약할 때 내 행함 집어넣고 네 행함 집어넣고, 그렇게 계약하잖아요. 하나님도 계약을 그렇게 하는 줄 알아요.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 집어넣고, 하나님이 착하다, 복 줄게, 라는 약속 집어넣으면 그게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그렇게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아는 계약은요,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찢긴 살이에요. 제가 알기에는 그래요. 피가 예수님이 자살해서 낸 피가 아닙니다. 우리가 떠밀어서, 밀쳐서 죽였던 피에요. 그게. 그 피 안에 뭐가 있느냐, 니들의 가짜 우상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증거물이 바로 유일한 하나님과 우리가 통하는 계약, 언약이라니까요. 십자가 복음이에요.

이렇게 복음을 전해도, “그래도 십일조 해야 안 됩니까?” 라고, “그래도 주일성수는 해야죠?”라고 자꾸 이런 식으로 엉뚱한 질문,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질문이라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자의식 범위를 못 벗어나요. 초등학교 1학년이 삼각함수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답답해서 하는 겁니다. 그 답답하다는 말은 내가 구축하고 있는 자의식의 퍼즐이 잘 안 맞는다는 거예요. 퍼즐이.

제가 오후설교에서 했죠. 계란껍질은 깨지라고 있는 거라고 했죠. 이 우상이 깨져야 돼요. 우상이. 우상이 깨져야 된다고요. 미친 오토바이로 끌려와놓고는 하나님보고 이거 처리하라는 거예요. 미친 오토바이로 끌려와서는. 우리 신체를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이게 럭비공 같아서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동그란 것 같으면 예상이 되겠는데, 럭비공은 같은 우리는 절대로 예상이 안 됩니다.

주일 낮에도 그런 예를 들었지만, 남편하고 처갓집에 가서 장모님을 섬길 때, 남편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엄마 앞에서는 친밀한 부부처럼 온갖 연기를 다 해놓고는, 이제 친정 문 나오면서부터 잔소리가 시작이 됩니다. 당신은 왜 일을 해치우는 식으로 왜 건성으로 하느냐는 겁니다. 뭐냐고 물으면, 그 말투가 뭐냐는 거예요. 말투가. 진정성 있게 해주라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보세요. 남자의 진정성하고 여자의 진정성하고 달라요. 왜? 신체가 다르기 때문에, 둘 다 미친 오토바이기 때문에, 같은 오토바이 아니에요. 남편은 최선을 다했는데, 아내는 자기의 뜻에 영 못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영원히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니하고 나하고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나는 나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죠.

성경을 보는 이유는 바로, 우리는 자꾸 여기에서 신이라는 것이 우상인줄 몰라요. 그냥 신은 다 같은 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우상인줄 모르고. 그래서 자꾸 좇아가면서, 그 신을 향하여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쏟아내거든요. 그 행위가 신 앞에서 어떻게 돼요? 뭉쳐지고, 뭉쳐지고, 자꾸 뭉쳐지겠죠. 그래서 옆에 사람이 내가 이렇게 종교생활, 신앙생활 한 어떤 결과물을 비난하고 그러면 우리는 왈칵 화가 나버리는 거예요. 이런 신을 만드는데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것에 흠집을 내버리면 이거는 나 자신에 대한 공격이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우상을 깨지 못하기 때문에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을 또 보냅니다. 보내게 되면, 이 덩치, 자신의 행위가 뭉쳐진 것에 하나님이 보낸 성신의 사람이 깔리게 만들어요. 피를 보게 만들어요. 피를 보게 만들어놓고, 그리고 그들이 한 모든 계획은 완전히 파멸시키고 무산시키고 맙니다. 완전히 다 깨트려버려요.

내가 만든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의 누에고치 안에서 포근하게 안고 자는 이 우상적인 현실상을, 주께서는 고난 받은 분을 침투를 시켜서 완전히 깨트려버립니다. 계란이  껍질을 깨듯이 깨질 때, 인간의 망상들이 다 깨지면서 시커먼 본래의 미친 오토바이에 올라타 있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죠.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없기 때문에 그때그때 성급하게 새롭게 조립되고 조작되는 겁니다. 그 현장에서 계속 조립되는 겁니다.

그럼 어제하고 오늘은 왜 고요한가? 오늘의 조립된 자아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어제의 자아가 오늘의 자아와 일치된다고 내가 재편집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재편집에. 그럼 그것이 자기한테는 어제하고 오늘이 동일하지만, 그것을 감시하는 눈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이웃과 가족과 친구, 타인의 시선들이에요. 남들은 알아요. 니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는데, 본인만이 몰라요. 본인만이.

자기는 한결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절대로 한결같지 않아요. 가만히 따져보세요. 절대로 한결같지 않습니다. 갈수록 성질이 더 더러워져요. 갈수록 예민해지고 민감해지고 성질이 더러워져요. 졸혼이 왜 괜히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이라고 여길 때, 이거는 에로스 사랑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정으로 산다고 했죠. 앞에 하나 더 붙이세요. (우)정. 결국 부부는 우정으로 사는 겁니다. 우정인데, 이 우정이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우정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한쪽이 죽는다는 것은 차라리 나도 따라 죽겠다고 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한 몸 된 의식이에요. 비장한 각오로. 하지만 우정은 상대방이 미리 부재하고 내 곁에 당신이 결손, 없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살아요. 미리 각오하고.

“당신이 떠난 후에는 연금만 남는다.” 뭐 이런 식이죠. 우정은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는 연금만 남는 것이죠. 당신이 떠난 빈자리에 연금만 주어지는 것이죠. 살아 있을 때, 빨리 빌딩이라도 자기 이름으로 옮겨놔야 해요. 왜냐하면 친구사이기 때문에.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수월치 않다면, 이 계획이 들통이 났다면, 졸혼이죠. 길게 살아봐야 소용없는.

이러한 우정의 관계가 부부뿐만이 아닙니다. 자식과의 관계에도 됩니다. 오늘 본문처럼. 자식을 볼 때, 처음에 애 낳을 때는 애가 없으면 못 살아요. 에로스죠. 하지만 나중에는 자식이 나를 떠난다는 것. 언젠가는 자기 색시만나고, 자기 남편 만나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부모하고 한 몸 된 것을 떠난다. 이것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죠. 그것을 부모는 각오를 해줘야 합니다. 각오를 해줘야 해요. 각자 자기들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가든 말든 해야 돼요.

이 각오를 했을 때는 저쪽에서 이쪽을 뜯어먹으려고 달라 든다 말이죠. 자식이 오게 되면 자식 앞에서 돈 있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따로 이것은 넘보지 못하도록 조치를 다 해줘야 해요. 어차피 인간은 남의 영혼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여력이 없어요. 남의 영혼. 아무리 자식한테 퍼줘도 자식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고마워할 줄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내 욕망도 다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보여주기 위해서, 사무엘이 떠난 후에는 본래 그들이 여망했고, 본래 미친 오토바이들이 부르릉~하면서 노렸던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제는 우리가 다룰 수 있고 우리가 처분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걸 사실은 사무엘 자식한테 요구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사무엘 자식들은, 여기 3절에 보면 자식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행위를 따르지 않고 뒤에 뭐가 나오는데요,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급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뇌물을 받았다 이 말이거든요.

왜? 성신이 사무엘로 끝나버립니까? 그럼 아버지가 믿음이 있다면 자식들이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깁니까? 교회는 나와 주죠. 그래야 아버지가 갖고 있는 재산을 자기가 아주 공손하게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전혀 그거 아닙니다. 아버지의 믿음이 유전적으로 전달된다든지, 상속될 수 있고, 세습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믿음이 자식한테 전달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버지 자체가 성신이 올 자격이 못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버지한테 만약에 성령이 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권한이지, 아버지의 권한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그 아버지의 자식인데요?” 이렇게 나서면 안 돼요.

그러면 아버지한테 믿음 주고 나한테는 믿음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그게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줄 자 에게는 주고 안 줄 자 에게는 안 줍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런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나는 살고 싶은데, 나는 구원받고 싶은데, 왜 남들한테 주는 믿음을 왜 나한테는 안주냐 이 말이죠. 그렇게 하면 내 인생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완전히 빼앗기잖아요. 근데 빼앗기면 되잖아요.

이게 지금 2000년 기독교의 제일 큰 문제입니다. 주도권을 주님한테 빼앗기는 것이 싫은데,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예수 믿으면서도 내 인생 주도권을 내가 꼭 쥐어야 내 마음이 편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미 복음에서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마귀가 들어있는 거예요. 근데 그 이야기는 제발하지마세요. 제발. 그 말만큼은 제발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나는 내 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에, 마귀 안 오도록 성경보고 기도했기 때문에, 마귀가 나한테 올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너무 차분하고 바르게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한테 전적으로 복종이 되고, 주님이 주신 이 인생을 감사함으로 받기가 싫은 거예요. “이거 주님이 주셨지만, 아닙니다. 이걸로는 내가 성이 안 찹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으니까 더, 더 주시옵소서.”라고 이유 없이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의사를 보여주는데, 그 의사가 뭐냐 하면 이런 하나님보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교회 찾아가고, 그런 설교 찾고.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설교. 내가 잘한다, 잘한다, 라고 희망을 북돋아주는 설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복음. 그거는 저주 받을 복음인데, 저주 받는 그거는 나중문제고, 지금 당장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껍데기를 벗기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벗기지 말라고 담요에다가 솜이불 덮고 계속 겹친 데다 또 겹치고 겹치면서 자기 자신은,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자기 자신은 안 들키기를 원하는 겁니다. 원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힘이 더 센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덮은 솜이불 뜯어내고, 담요 뜯어내고, 다 뜯어내고,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니보고 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상하죠. 뭔가 해야 된다는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악마의 음성인데, 진짜 주님은 하라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어요. 그리고 찾아오시는 분은 주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오늘 첫째 강의의 진짜 제목입니다. “부름” 정월대보름 부럼 말고. 불러준다. 콜링,calling. 불러주시는 거예요. 불러주실 때, 어떻게 부르느냐, 죄인 된 자를 부르는 겁니다. 실패자를 불러주시는 거예요.

그게 에스겔에 보면 나오는데, 한 번 찾아봅시다. 제가 자신이 없는데요. 제가 점점 미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그래요. 하여튼 에스겔 13장 전체다가 뭐냐 하면, 그들은 내가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이야기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재앙을 받고, 에스겔 14장 23절을 읽어보세요.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내릴 때에, 이것이 그 당시에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섬겼어요. 적들이 왔을 때에 마르둑 신이 오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말할 것은 마르둑 신이라고 할 때, 이것을 여호와로 커버하는 거예요. 여호와로 이기고자, 요새 이야기로 하면,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에요.

그런데 누가 이기느냐 하면 바로 마르둑 신, 바벨론 신이 이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완전히 여호와 믿는 것으로 멸망당해요. 그러면 그들은 여호와 믿음이 아님을 완전히 폭로 당한 게 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에스겔 16장 63절 보세요.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거든요. 다 행한 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구원해주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근데 우리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말을 건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복 주겠습니까? 저렇게 하시면 복주겠습니까?”라고 자꾸 우리가 말을 하는데, 주께서는 그런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세리처럼,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스스로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하신 자의 모습입니다.

부끄럽다는 말은 이 말이에요. “어쩔 수가 없었군요.” 내가 이 집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 키를 이 만큼 크게 한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이미 주도권은, 전에는 주도권을 주님께 억지로 주는 척 했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주도권이 주님한테 넘어간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넘어간 것에 대해서. 이제는 콩 내놔라, 팥 내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라 하는 것은 주께서 기도를 시작할 때만 기도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시작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개입이 돼야 기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고, 다 쓸데없는 말이에요. 쓸데없는 말. 주님의 일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거든요. 복음과 관련되어서 니가 결과적으로 구원되었다는 그 소식통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그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어떻게? “주께서 이렇게 피와 살로 새 언약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따로 이 욕망과 이 우울증을 회복하겠다고 쓸데없이 내 만족을 위해서 했던 이 것이 다 헛짓입니다.”라는 말로 진정성 있는 기도가 펼쳐지는 거예요. 이것도 부끄럽고, 저것도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고, 모든 게 다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에서 자기를 칭찬해주고,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고, 위로해주고 하는 많은 사람들, 그게 위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면 그걸 간절히 구하지만, 만약에 주위 사람들이 다 칭찬해주게 되면 이제 그것도 시시해요. “고마해라! 많이 묵었다.” 그것도 짜증나요. 왜냐하면 없을 때는 그것을 마저 채워주면 굉장히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두 번, 세 번 위로가 오게 되면 식상하다고 하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아내들이 남편들한테 경상도 남자들처럼 사랑한다고 말도 잘 안하고 무뚝뚝하게 하냐고 해서 “그래? 그럼 내가 사랑해 줄게.”라고 하면, “그만해라! 됐다. 이제는 사랑도 귀찮다.”라고 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미지의 X가 자꾸 나로 하여금, 인생이 자꾸 허해지고, 허한 곳으로 몰아세우기 때문에 그래요. 그때 되면 우리는 온갖 괜찮은 행함을 동원해가지고 빨리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고 예수 이름으로 빌고 헌금하는데,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정작 해봐야 이게 전부 누구 일이냐 하면 내 일이 되거든요. 내 일이.

그래서 오늘 본문 사무엘상 8장을 보면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이 누구의 일이다? 내 일이 아니고, 너희들이 각 이스라엘을 너희들 나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런 수작을 벌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차버린 게 된다 이 말이죠. 이제는 하나님한테 다룸 받기가 싫고, 내 나라기 때문에, 내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관리하고 우리들이 다루겠다는 거예요. 이게 마음이 편해요.

그러면, 우리 마음 편한 대로 한다면 절대로 예수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이 편한데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우상이고 가짜입니다.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정말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주님 앞에 노골적으로 다 노출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아무리 나에게 착한 일을 뒤집어씌워도, 절대로 나는 착한 존재가 원래부터 안 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는 제대로 건강검진 받아가지고 딱 실체를 알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인도하는 주의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자기의 우상 앞에 절하지 않죠.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나를 날마다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한 나는, 우상이 안 되지만,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당기는 것은 백퍼센트 우상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