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룻기

(룻기1:15~18) 나오미의 하나님

정인순 2017. 6. 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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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남희

룻기 1996 (3)

이근호     

 

본문말씀: (룻기1:15~18) 나오미의 하나님

(1: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우리 보기는 모든 세상은 똑같은 사람인 줄 알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때에 겉모습 가지고 나누는 줄 알지만 겉모습 가지고 나누는 것이 아니고 가는 방향을 가지고 두 종류로 사람을 나누고 있습니다. 15절 보면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그런 방향을 가지고 자기가 믿었던  알고 있던 신, 자기가 생각했던 신, 자기가 섬겼던 그 신, 하나님 그 하나님 쪽을 향하여 자기가 생각했던 사고했던 자기가 구상하고 있던,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그 희망 사항대로 그 신을 따라서 사람은 방향이 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이란 두 종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굉장히 많은데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고 했습니다. 찾는 사람도 적을뿐더러 또 길이 협착하고 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개의 길이 같은 결과를 유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생의 어떤 길이든 같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 오늘 날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서 배우는 그러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인생은 자기가 결정한 대로 해라 하지만 그 결과는 동일하다. 산으로 올라가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니 것만 옳다고 고집 피우지 마라. 그건 독선이다. 다양하게 가자. 다양하게. 각각이 자기 취향에 맞으면 되는 거야. 취향대로 살아라. 이것이 오늘 날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서 현대 과학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뭐, 이쪽은 옳다 인정하자. 그 쪽만 옳지 말고 내 쪽도 옳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자. 그래서 스스로 대화가 통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도모스(?) 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대화를 통해서 역사는 발전 한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르다 하는 것은 각각 자기중심으로 보았을 때는 모두 옳기 때문에 그것을 통틀어서 모두 다 옳다고 이야기 해 주자 이 말이지요. 그르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협력만 하면 항상 더 좋은 것은 산출된다고 이렇게 이야기 하자 이 말입니다.

제가 옛날 이솝 이야기 우화, 이솝의 동화가 있습니다. 염소 두 마리가 서로 길에 매여 있는데 주인이 심리적인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 사료를 양쪽으로 갈라놓았습니다. 둘 다 서로 가까운 사료를 먹으려고 둘 다 가까운 사료를 차지하려 하니까 둘 다 줄을 당겨 가지고 둘 다 못
먹습니다. 둘이 잠시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만 서로 반짝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습니다. 둘이 같이 가까이 한 통속이 되어 가지고 왼쪽에 있는 사료부터, 먹이부터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저쪽에 당신 쪽에 가서 같이 먹으면 두 개의 먹이를 다 먹은 거니까 둘 다 이익이 아니냐. 저는 그것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지금도 무릎이 좀 아픈데, 허 진짜 지혜구나. 훌륭하다. 저렇게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 I can do it! 난 할 수 있다 그것을! 아, 그렇게 되는 구나. 그래서 우리 2002년 월드컵도 마치 그러한 지혜를 짜내어서 서로가 잡아당기지 말고 같이 먹고. 여러분, 그걸 저는 예수 믿기 전에는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아, 그렇게 하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겠구나, 막히는 일이 없겠구나. 그것이 바로 진리고 지혜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룻기 1장 15절부터 벌써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네 길로 가라 이거예요. 나는 내 쪽 길로 간다. 사람이 두 길로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동서 가운데 한 쪽이 더 신장이 작다든지 한 쪽이 더 인생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둘 다 지금 같은 입장 이예요. 둘 다 시아버지 잃은 입장이고 둘 다 졸지에 남편 세상 떠난 그런 대상이 되는 과부가 되어버린 그런 난처한 입장입니다. 그렇기에 환경 때문에 사람이 서로 같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 말입니다. 환경 때문에...

군에 가서 예수 버린 사람도 많지만 군대 가서 더욱 더 주님을 가까이 알게 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중고등부 때 교회에서 총무하고 학생회장 해 가지고 대학 가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 숱하게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있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교회 욕하고 유리창 깨고 하다가 대학 들어가 예수 잘 믿는 그런 사람들도 많다곤 하지만 가끔 없다 싶으면 하늘부터 툭 튀어 나와요. 그러니 환경에 따라서 사람이 변한다 하는 것은 이것은 많은 철학자 루소나 그런 사람 얘기 했지만 그건 믿지 맙시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점지된 사람, 선택된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법입니다. 넓은 길 좋아요. 다 압니다. 우리가 넓은 길 가면 편하다는 것을 어느 놈 몰라요? 다 알아요. 알면서도 좁은 길로 기어이 가야 되겠다, 머리들이 밀고 좁은 길 가야 되겠다. 나는 영생의 길 포기 못한다, 영생의 길로 직행해야 되겠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는 남이 가지지 않은 뭔가가 들어 있어요. 뭔가가. 남이 가지지 않은 것, 남에게 해독하지 못 하고 남에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뭔가 이 세상에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이 세상의 공장에서 생산해내지 못하는 그 뭔가, 하늘에서 받은 덩어리가 각 심성 속에 마음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겠죠. 외부 사람들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돌았구나, 미쳤구나! 니 봐라, 같은 너 형님 봐라. 형님은 시어머니 팔자보고 야 이거 내 인생 조지겠구나, 그래서 여기서 내 인생 다시 한 번 팔자 고치자 그래서 다시 자기 고향, 자기 신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난처한 입장에 처한 룻은 왜 돌아가지 않습니까? 왜 돌아가지 않는 겁니까? 도대체 룻은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알았으며 자기 시어머니의 일생을 통해서 형님 되는 동서가 발견하지 못한 그 무언가를 발견한 거예요. 그 뭐냐? 그 무언가가 무어냐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16절에 나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따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 15절에서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그들 나름 대로의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서는 오르바라 하는 이름의 동서는 그 쪽 백성과 그 쪽 하나님의 길을 고수했고 여기 룻은 뭔가 새로운 것을 가졌는데 그것은 뭐냐,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새로운 하나님으로 바꾼 거예요. 하나님을 바꾼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바꾼다는 것이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편 바꾸는 것도 어렵고, 아내 바꾸는 것도 되게 어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자체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인생은 종쳤다는 겁니다. 나는 실패의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나는 넓은 길로 갔고 멸망의 길로 갔고 저주의 길로 갔고 심판의 길로 지금까지 나는 지옥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지옥 가는 길이 지옥 가는 길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런 사람이 흔한가. 드물어요. 드물어요. 또 경건한 겁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여러분 세상 바깥으로 나와 봐요. 아무 문제없어요.

저도 가끔 서울에 갑니다만, 서울에 11시, 새벽 1,2시 이래보면 창가에 문 열고 보세요. 쓰레기 더미예요. 엉망진창 이예요. 술꾼들 토해 낸 사람들, 희한한 사람들, 비틀거리는 사람들, 야경꾼들, 도둑놈들, 뭐 굉장히 많은데 새벽 5시만 되면 아무 일 없어요. 노란 옷 입은 청소하는 사람들이 그 청소 다 해줍니다. 국민들 세금에서. 새벽 5시부터 아침에 출근한다고 쌩쌩, 한강변을 달리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러한 성실한 직장인들이 신기롭게 어디서 나왔는지 새벽 짐 싸고 나와서 달리고 한 쪽에서는 조깅하고 한 쪽에서는 자전거 타고 있고 한 쪽에서는 어~어~ 강변 가에 체조한다고 있고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모든 만사가 정말 잘 되어가고 있는, 앞으로 선진 조국을 내다볼 수 있는, 2002년도 월드컵이 있는 그걸 보고 지옥 간다고 얘기할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문제가 뭐가 문제가 있어야 지옥 가지. 아무 문제없는데.  훌륭한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하여 삼부 요인은 무슨 전부 다 정상적인데 그것이 어떻게 지옥 가는 겁니까?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의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그 나라와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란 것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가 통용되는, 그런 법칙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원래 만들었다는 세상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겁니다. 딴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혼내준다는 거예요. 언젠가 작살낸다는 겁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이 직접 지금 만들어주신 천국을 그 낙원을 나는 들어가고 싶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인생을 사는 것은 더 이상 청산해야 되지요.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아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구나. 부활해서 어디 가서 살았지? 그 분이 어디 가셨지? 부활해서 옳지, 하늘나라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따라서 같이 부활해서 하늘나라 가고 싶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 되는 그 피를 바르고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금 당시 그렇게 얘기할 수 있고 그 당시에, 룻 당시에, 룻 때 무슨 예수님이 나타났습니까? 그러니 룻 당시에는 도대체 룻이 무얼 보고 부활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예요. 여러분들은 하나도 안 중요하겠지만, 자고 있으니까 그렇겠죠... 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그럴 때 무얼 보고 자기 입장은 지금 죽느니 사느니 하는 그런 난처한 입장인데 요즘 같이 여자 혼자 살면서 식당 밥이나 해 주고 하면 될텐데, 그것도 얼마나 죽을 맛입니까? 힘들어 못 살거든요. 그것 말고 뭔가 진정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무얼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 16절 끝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 이게 중요하죠. 어머니의 하나님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를 다루었던 하나님, 어머니를 우리 시어머니를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는 하나님이니까 진짜 하나님이 틀림없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우리 형님 하나님은 가짜란 겁니다. 우리 형님, 우리 동서되는 하나님은 가짜고 그건 하나님 근처도 안 가고 하나님도 아니고, 진짜 하나님은 우리 시어머니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하나님만이 정말 제대로 된 하나님이고 내가 나 죽어서도 만날 수 있는 진짜배기 하나님, 그 자체의 하나님이다 그것을 확신했습니다. 룻은 분명히 알았어요. 그러니 지금 먹고 사는 문제 신경 안 씁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고 우선되는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것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건 나중 문제고, 룻은 나를 심판하실 분이 누구이고 그리고 동시에 나를 구원하실 분이 누군가를 동시에 분명히 알고 살아간 거예요.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 사람이 방황하게 돼요. 청소년처럼 영원한 사춘기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보면 예수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소위 임원진에 해당되는 회계, 총무, 부회장 임원진에 해당되는 세 사람이 뽑혀가지고 대표로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그냥 산 이예요. 그냥 돌멩이 산인데 올라가니까 예수님이 졸지에 변화되어 가지고 하늘나라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하고 엘리야하고 모세, 죽었던 귀신들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뭐 깜짝 놀랬지요. 그 초라했던 예수님이 갑자기 변해서 해 같이 빛나는데 얼마나 그 옷이 빛나는지 우리 박사교회 성가대 하얀 옷은 이것은 유도 아닙니다. 며칠 째 빨지를 않아서 이건 유도 아니고 진짜 세탁을 못할 정도로 너무너무 희게 변했다 이거죠. 그게 중요한 거죠. 한 번 보고 시시하게 끝나버리면 이건 영화게요. 중요한 것이 음성이 구름 사이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야, 제 목소리로 하니까 영 실감이 안 나는데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듣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돌봐야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 날 낳으시고 뭐 어머니 날 왜 이렇게 나았습니까? 나 왜 재벌 집에서 안 태어나고 왜 이렇게 고아로 났습니까? 이런 쓸데없는 남 탓, 조상 탓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 나 왜 전방 가고 후방으로 안 빼노 이런 쓸 데 없는 소리 할 필요 없어요.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저의 말만!

방황 끝났어요. 방황 끝났습니다. 예수님 말만 듣고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영생의 일입니다. 인생이 초조할 이유 없고 어떤 반석 위에 푹 이렇게 잠기는 것처럼 마지막 최종 지점에 와 있는 거예요. 너는 저의 말만 들어라. 알겠나? 이 자식아 하고 귓 떼기 퍽! 예, 알겠습니다. 예수님 말만 들을께요.

예수님 말만 듣고 살면 그 예수님께서 얘기했던 모세와 엘리야와 찬란했던 그 영화로운 변화산상, 그럼 거기 참여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을 그 영광스러움이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만 듣고 사는 그 사람에게도 같이 공유되는 것이고 참여되는 거예요.

그 산 위의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에 베드로가 산 밑으로 안 내려가려 했습니다. 안 내려가려고. 거기다 초막 셋을 짓고, 요새 말로 하면 기도원 세 개 짓고 뭐 이런 거죠. 초막 셋을 짓고 안 내려가려 했습니다. 안 내려가면 우리는 박사교회 동네에서 박사동 와촌리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박사교회 교인들, 장로님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내려가서 전해야지.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이미 알고 밑에 내려가서 정했습니다. 어떤 수난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잘 것 없는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살다보면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사랑할 때 있고 미워할 때 있고 헤어질 때 있으면 만날 때가 있는 겁니다. 지금 서OO 씨도 어느 교회 전도사로 가 있지만 우리교회 전도사 하던 정OO 성도도 성가대 있다가 대구 어느 교회로 갔지만, 갔나? 또 온네이 그걸로 끝나서 언제 올지 모르는 거예요. 어딜 가도 변화산에서 한데 모이면 돼쟎아요. 변화산에서. 천국에서 한데 모이면 될 꺼 아닙니까? 헤어져도 만나게 되어있고 만나도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혼해도 언젠간 만날 걸 알면 서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어이 미안스러워라.

그러니 중요한 것은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우리 시어머니를 이렇게 제대로 찾아 왔던 그 제대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자기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시어머니를 나한테 붙여준 것은 다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서 거기 장사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자 그렇다면 룻이 어머니를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보통 한국 교회에서 또 한국 교회 얘기 나오면 분위기 이상해지죠.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데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소개하는데 모든 일이 잘 되고 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금메달 따고 성적 올라가고 좋은 대학 가면 이건 축복의 하나님이고 그렇지 못하면 운전면허 여섯 번 떨어지고 또 되면 그건 저주의 하나님인줄 이렇게 생각하고 하는데 이게 바로 거짓된 하나님, 잘못된 하나님을 한국 교회는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전도 한다고 총동원주일인데 어떤 전도를 하냐면 마귀 전도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뭔지 모르면서 전도한다고 난리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게 아니예요.

20절에 나옵니다. 한 법 봅시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나오미라 하는 것은 1번 희락, 마라라 하는 것은 2번 괴로움이다 말이죠-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이 시어머니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나오미라는 것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즐거움. 김희락, 또는 정즐거움, 박기분좋다 뭐 이렇다 말이죠. 이름대로 운명이 바뀌어 지라고 좋은 이름 짓잖아요. 김승리, 이기자 그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는 나오미, 항상 즐거운 인생이 되어라 이렇게 이름 지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전능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즐거운 나를 ‘마라’, 괴로운 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걸 누가 봤습니까? 한평생 곁에서 누가 봤습니까? 룻이 자기 남편 잃어 가면서 자기 시아버지 목숨 빼앗겨 가면서 시어머니 모습을 본 거예요. 시어머니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룻은 주의 깊게 봤습니다.

자,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그런데 양식 구하기 좀 어렵다고 살기 좀 어렵다고 자기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 나라 와서 살았다 이 말이죠. 야, 저러면 안 되는데. 저거 징조 안 좋은데, 저렇게 마음대로 하나님 버릴 수 있는가. 저 가만 있으면 진짜 하나님이 아니지. 이리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편 죽이고, 아들 둘 다 죽이고 결국에는 완전히 빅3 과부 세 사람만 달랑 남았다 이 말이죠. 그리 서로 쳐다보면서 신세가 보통 처량한 신세가 아닙니다. 과부라 미안합니다. 다른 말로 미망인. 미망인 세 사람 남아 있어요. 어느 깐느 갈 것도 아니고 이러한 농사 질 사람이 있습니까? 뭐 먹고 삽니까? 요즘 같으면 공장이라도 있지만. 뭐 어떻게 거기서 살 수 있습니까? 뭐 개를 키우겠어요? 뭐 힘이 있어야지. 그런 가운데서 룻이, 자기의 룻의 형님 되는 오르바는 아이고 이거 못 먹고 살겠다. 아이고 뭐 저 양반 따라가면 큰 일 나지. 그래서 자기는 자기 사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시어머니 따라가지 않고 자기 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어요. 어떻게 저 약속의 땅을 버렸다 해가지고 저 시어머니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가. 그렇다면 약속의 하나님은 진짜배기 약속대로 수행하시는, 뒤 끝없이 수행하시는 약속 되는 하나님이다. 그러니 그 약속의 하나님에 의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하나님. 여호와, 이삭을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삭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같은 막벨라 굴에서 장사되어서 언젠가는 이 땅에 사람들의 죄가 없어지고 다시 부활하나다는 것. 다시 영생을 얻는다는 것. 그걸 계속 시어머니가 알려줬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시어머니 말에서 나온 하나님과 시어머니의 운명을 저렇게 만든 하나님과 일치되는 거예요. 같은 하나님이다 이 말 이예요.

그렇다면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러니까 시어머니 죽는 곳에 나도 함께 죽겠습니다. 시어머니가 이 이방 나라까지 온 것은 나를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보는 거예요.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 자체를 보면 재주가 비상한, 뭐 카터필드처럼 마술을 잘 하는, 못해내는 것이 없는, 꽃이 여기 시들어버렸어요. 이거 원래 이번 주일까지 가야되는데. 얍! 하면 꽃이 생기는 이런 재주를 벌이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 무슨 뜻이냐 사람은 자신의 말을 어떤 방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대로 반드시 시행되는 그걸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예요. 약속의 땅을 버린 자는 반드시 망해서라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 말 이예요.

좁은 문으로 가거라 그러면 거기 영생이 있다. 이 말씀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둘로 본다. 하나님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간다. 이건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한 자체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것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이럴 때 인생의 방황 끝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요새 너 교회 다닌다면서?” “그래 교회 다닌다” “그런데 너 왜 다니니? 뭐 교회 다니면서 이익 본 거 있니?” “없다” “없는데 너 뭐하러 다니니?” “그래, 난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믿어지네” “친구야-너는 안 모자라는데- 너 앞으로 나한테 친구라 하지 마라” “너는 안 믿어 지는데 나는 믿어진다” “왜 그런가 설명해봐” “설명 못하는데...” 설명 못하지만 집에 불이 나고 정전되고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니 그 지경되어도 예수 믿나?” “그래 이 지경되어도 예수 믿는다. 그런데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말씀의 실현 단계다. 이것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뭔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데 뭔가 들어있는 믿음,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룻의 어머니 다시 말해서 나오미로 하여금 즐거운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사람으로 만들어낸 그 놀라운 전능하심이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그 슬픔의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이 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게 만드는 그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자꾸 환상 속에 있어요. 지난 시간에도 얘기 했지만 자꾸 엉뚱한 가상적인 아름다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 현실 때문에 하나님은 저 쪽 편에 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넓은 길을 좋아하고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줄을 잡아당깁니다. 아~ 우리는 아프죠. 아프지만 아파가면서도 땡겨 가면서도 뭔가 설명 안 되면서도 가는 곳이 뭡니까? 좁은 문이고 영생이 기다리고 있는 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님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시킨 그 하나님을 믿읍시다. 한국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 받는 하나님을 믿지 맙시다. 한국 교회 목사가 가르치는 하나님을 믿지 맙시다. 어떤 장로가 하나님 믿어서 큰 재벌 되었다는 것 믿지 맙시다.

대구에 어떤 주택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 되신 전도사에게 대들다가 부도났어요. 부도나서 16억 수표 돌아왔는데 지금 못 갚아 줬습니다. 어디 감히 주의 종을 대듭니까 (웃음) 어떤 장로 복 받고 어떤 장로 재벌 되고 그거 믿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고 그 분이 부활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숫자 초라해도-십자가가 늘 초라하지요-초라하지만 좁은 문, 영생이 있다는 그 말씀대로 실현되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 말씀이 실현되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고 든든한 가운데 남은 여생을 마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되게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내 꿈 이루어지고 내 원풀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바로 갓 바위를 믿는 세상적인 하나님인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진짜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만들고 넓은 문보다 좁은 문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사오니 주여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것을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