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남희
룻기 1996 (2)
이근호
본문말씀: (룻기1:6~10) 돌아오는 길
(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1: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1: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11)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1:12)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현실이라는 게 있지요. 그 현실을 둘로 나눈다면 즐거운 현실과 괴로운 현실로 이렇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내 뜻대로 그 통용되던 현실이 있는 반면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그런 실제 같은 현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왜 알 수 없는가? 그것은 우리가 어려운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에 사실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고 실패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재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란 것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세계만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 하며는 자꾸 자기 망상만 자꾸 키우는 그러한 비현실적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괴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 자기 현실이 자기 뜻대로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그 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속에 이미 품고 있는 망상 때문에 그런 거짓된 환상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한테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 무엇을 해야 되느냐,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만 되는지만 생각하면 될 텐데 사람이 욕심이 많아 가지고 이거하고 난 뒤 나한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자꾸 미리 예상하고 미리 자꾸 염두해 두다 보니까 일하기 전부터 온 몸이 초조해지면서 불안해지면서 일은 일대로 잘 되지 아니하고 결과도 역시 좋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까도 얘기했지만 망상이라고 보고 싶어요. 어릴 적 꿈 또 지금의 꿈, 미래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꿈들, 그 꿈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차라리 꿈이라고 여기면 될 텐데 그것은 있지도 않은 가공의 세계고 그것은 실현 될 수도 없는 세계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자꾸 거기에 욕심을 갖고, 애착을 갖고 거기에 미련을 갖고 거기에 자기가 꿈꾸는 헛된 망상에 매달리다 보니까 지금이 소홀해지고 지금 내가 해야 할 행복을 몽땅 다 빼앗기게 되는 거예요. 이게 이점이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다 이 말입니다. 참으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지금 내가 뭐할 거지? 이거부터 해야 되겠다, 다른 소리 하지 말고 그 현실에 파묻혀서 열심히 살아가면 될 터인데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꾸 꿈들을 만들어 내고 머릿속에 키워내고 그 허황된 꿈들이 내 시간을 잡아먹고 내 정력을 다 소진하게 만들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어떤 가정에 남편이 죽고 자식 둘 다 죽었습니다. 이미 자식 둘은 장가를 보냈는데 장가보낸 자식들이 둘 다 죽고 남은 자식이라 할 수 있는 두 며느리, 짐이 될 수 있는 두 며느리만 달랑 남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시어머니 되는 자기 자신, 이름이 나오미고 그 다음에 오르바, 룻이라는 두 며느리 셋 이만 달랑 남아있는 그런 현실이 닥쳐왔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실패했다, 비참하다, 참담하다, 아이고 속상하겠네, 누가 봐도 그 얘기를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성경에 이 말씀이 들어있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 보니까 남편을 잃었구나 아이구 않됐다 자기 아들 둘 다 죽었네...아이구 이거 참 안 됐구나 그걸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바로 사실은 내가 들어가야 될 현실인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거는 현재 나하고 해당 안 되는 것으로 철조망을 치고 아예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구 재수 정말 없는 이런 인간이 다 있었네 아이구 않됐다. 그러나 나한테는 상관없지 우리는 자꾸 그렇게만 생각하시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남편 죽고 두 아들 죽은 이 상황이 바로 사실은 우리 전부를 끌고 들어가는 그러한 현실입니다. 왜 우리는 이 현실을 기피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환상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안 끌려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으로 우리를 자꾸 몰아넣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그 말씀이 이루어내는 그 정황으로 자꾸 이렇게 늪에 빠뜨리는 것처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에서 난처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의 입장이 되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있어요. 제가 하나님을 이야기 했는데 제가 참 답답한 것이 무어냐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이겁니다. 내 꿈이 사라진 그 이후에 하나님 모습이 어떤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 꿈이 사라지고 난 그 이후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포부가 있지요? 그 포부가 와장창 깨지고 난 뒤에 “야야”하고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우리 미리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이예요. 지금 내 꿈이 성취되고 있는 가운데의 하나님은 이것은 망상적인 하나님입니다. 이건 가짜 하나님입니다. 잘못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요거 챙기고 믿을께요, 저거 이루고 믿겠습니다. 저거 획득하고 난 뒤에 잘 믿겠습니다. 그거는 가짜 하나님입니다. 엉터리 하나님 이예요. 진짜 하나님은 내 꿈이 무너지고 난 뒤에 그 때 ‘메롱’하고 간섭하는 하나님, 내 꿈대로 않되 가지고 난처하게 있고 남 앞에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앉아 있는 아이구 이제 어떻게 살까하며 주저앉아 있을 때 그 때 나타나 가지고 무릎을 치는 ‘음 참 안 됐네. 야야, 니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노’하고 약 올리는 식으로 우리 곁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이예요. 우리가 그럴 때도 ‘아이고, 주여’ 하고 만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여러분들이 지금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제가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다음 중 어느 쪽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실제 만날 수 있는지 실제에 접근할 수 있는지 제가 문제 내겠는데 첫 번째 경우 여러분들이 지금 박사교회 뒤에 전경들, 경찰들이 와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수용소, 저 백두산 수용소에 다 집어넣는다. 이제부터 강제 노동시킨다. 가족끼리 다 뿔뿔이 헤어지게 만든다. 예수 믿는 죄로 사형시키고 노예시키다가 굶어 죽인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살려줄게.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인다 이러면 모르긴 몰라도 우리 교회에 삼분의 이는 순교를 각오할 겁니다. 정말입니다. 왜? 우리교인들이 신앙이 좋은 게 아니고 오기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이거 순전히 자존심입니다, 자존심. 내가 지금까지 믿은 거 포기하면 과거에 내 자존심 어떻게 되나 이래서 삼분의 이는 믿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온 데로 모든 남자는 깡패가 되어가지고 감옥소 갔다가 나왔고 모든 여자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온 것처럼 간통하다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그것도 오리발 못 내밀 정도로 현장에서 잡혀왔습니다. 그럴 때 교회 나올 수 있는 사람? 우리 교회에 없습니다. 왜? 자존심이 말이 아니거든요. 지 자존심이 뭉개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존심이 너무나 다 노출된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 믿을 사람 나와 보라 그래요. 없어요. 없는데 뭔가 순교한다하면 순교에서도 자기가 나대니까, 자기 빛이 자기 영광이 드러나니까 이왕 죽는 김에 까짓것 한 번 죽지 뭐. 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 번 죽는 건 마찬가진데 뭐. 이래가지고 있지만 자기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해놓고도 교회, 하나님이여,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요한복음8장에 나오는 그런 여인처럼 내가 간통하다 걸린 여인처럼 스스로 인정하고 순복하고 다른 사람이 소문을 다 낸 입장에서도 주여 하고 울면서 또는 웃으면서 주님의 손을 만질 사람이 과연 우리 가운데 몇 사람 되겠습니까? 그것이 잘난 게 있을 때는 교회 문 당당하게 차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집안에 무슨 수치스럽고 남한테 소문나고 남한테 안 좋은 소리 들을 것 같으면 교회 발을 끊는 그런 교회를 많이 보게 됩니다.
한 쪽은 내 꿈을 달성하고 난 뒤의 하나님이고 아주 멋있는 멋쟁이, 신사 하나님이고 한 쪽은 나를 우습게 망쳐버리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더라 이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다시 이야기 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내 꿈이 다 달성되지 않을 때 그것도 내가 웃음거리 되고 만 뒤에 나타난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현실로 보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벌거벗기신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것을 하나의 현실로 보자 이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부르짖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이 불렀던 그 하나님, 그래서 부활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부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부활시키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날 때, 우리가 위대할 때 부활시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남에게 내세울 게 있을 때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는 죽어질 수밖에 없는 우스꽝스러운 위치에서도 우리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을 왜 여러분들이 거부합니까? 왜 인정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하나님, 수치스러운 가운데서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부활시키는 하나님을 왜 믿지 않습니까? 왜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가 스스로가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합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미 라는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저는 참 두고두고 생각합니다. 여기 13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 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여호와의 손이 어떻게 했다 구요? 나를 치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뺨을 때렸다 이 말이지요. 이 못난 여자야 하고 나를 때렸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쳤는데 아직도 너희들은 나를 의지할게 있다고 나를 따라오겠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오미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얘들아, 너희 하나님 믿어라. 봐라 내가 하나님 믿고 이만큼 잘 됐잖아.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성공 했잖아. 봐, 하나님 믿고 이렇게 내가 위대해 졌잖아” 그런 것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날 이렇게 못난 여자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진짜 나의 하나님인데 너 그만 나한테 희망 걸지 말고 팔자 고치고 각기 자기의 남편 찾아 떠나지 뭘 나를 따라 다니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오미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지금 웃으면서 갔던 길이 지금 울면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자 지금부터 제가 어째서 이렇게 나오미가 두 자부를 보내야 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두 자부와 이 시어머니는 이제 여자만 남았습니다. 옛날에는 어떻게 생각하면 옛날에는 남편 없이는 남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자가 혼자 남으면 얻어먹는 거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워낙 힘이 없기 때문에 농사지을 수가 없어요. 땅이 여자한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반드시 남자를 만나야 됩니다. 지금 나오미에게는 남편, 남자라는 게 없어요. 남자라고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그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희 남편을 새로 찾아라 말이죠. 너희는 남편을 찾아서 팔자 고쳐 가지고 밥 먹고 살아가야지, 아무 희망 없는 나를 뭐한데 따르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새로운 하나의 현실이죠. 지금 이 현실에 대해서 너희들은 새로운 현실 찾아 가라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두 자부가 하는 말이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1절에 보니까 나오미가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예요. 옛날 풍습에 형수가 자기의 남편을 잃으면 그 다음 누구하고 결혼하게 되어 있냐하면 시동생하고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죽은 시동생과 결혼해서 그 아내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여자가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남편이 있어야 여자는 살아갈 수 있거든요. 홀로 사는 여자들한테는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시동생은 마누라가 두 명이냐? 그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생각입니다. 결혼을 안 한 총각 시동생하고 결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시동생이 하려 하는가, 네? 새 것하고 하려고 하지 무슨 중고하고 무슨 맛으로 결혼할까 하겠지만, 그래가지고 거부하다 하나님께 벌 받아 죽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유다의 아들입니다. 오난이라 그러죠. 그러니 왜 그러냐하면 자식을 낳아도 시동생하고 형수하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게 시동생 자식이 되는 게 아니고 죽은 형의 자식으로 옮겨갑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삼촌이라 불러야 돼요. 그런 슬픈 운명을 지녀야 돼요. 날 때부터. 미워도 다시 한 번 96 비슷하게 되어 가지고. 아빠라 부르지 말고 삼촌이라 불러야 돼요. 슬픈 운명을 지고 태어나는 거예요. 그 자식들이 그러니 내 자식을 눈앞에 보이는 채로 빼앗기는 거예요. 그리고 삼촌은 졸지에 씨받이가 되는 거예요. 형의 자식의 대를 잇게끔 자기가 이용당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서라도 반드시 맏아들의 가문을 잇고자 하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어요.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뜻을 정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이 세상에 영원히 남길 바라거든요. 그런데 그 맏아들은 계속 존속 되어야 됩니다. 만약 그 맏아들이 대가 끊기면 그 집안은 저주받은 집안이 되어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 된다 그런 결정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엘리멜렉 가정은 남편 죽었지요, 자식 둘 다 남자란 남자는 다 몰살했거든요. 그러면 여자만 남아 있는 입장에서 이제는 그 가문은 완전히 저주받은 가문이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그 나오미는 자기한테 왔던 그 여자로 하여금 다시 재가해 가지고 팔자 고쳐 가지고 한평생 먹고 살도록 조치해 주고 자기는 이미 하나님이 버린 사람인데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그래요. 처음부터 다시 하나님 만나서 새로 시작하려 하니까 너는 저 네 집으로 가거라. 지금 남편 구해 가지고 아들 생산한다 할지라도 어느 세월에 그걸 기다리겠느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그러니까 지금 이제 와서 새로 남편 들여 가지고 자식 낳으면 그건 시동생 되겠지요. 그 시동생이 한 살 두 살 네 살 돼 가지고 나중에 스무 살 되어 가지고 결혼하면 서른 살 나이 차 나고 사십 넘은 형수와 결혼하려 하겠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가문은 이제 끝장났다는 겁니다. 희망 없다는 거예요. 희망 찾아서 먹고 살 길 찾아서 너 먹고 살 길 찾아서 네 고향으로 가라. 나 따라오지 말고. 나는 이제 하나님 만나러 갈 테니까 너희는 너희 남편 만나러 가거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오늘 날 우리의 신앙을 한 번 봅시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얘기 했습니다. 그 꿈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해서 소유가 나를 먹여 살리는 꿈입니다. 항상 꿈은 소유와 관련되어 있어요. 직장을 가진다든지 어떤 지위를 가진다든지 어떤 재산을 가진다든지 땅을 가진다든지 남편을 가진다든지 모든 소유라 하는 것은 내가 먹고 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의 현실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훌륭한 현실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나오미하고 두 며느리 사이에서 차이가 납니다. 오르바는 현실을 현실로 보았어요. 시어머님이 맞습니다. 예, 시어머니 그동안 정이 그리워서 같이 가고 싶었는데 가라고 하면 제가 가지요 하고 14절에 보니까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쫓았더라’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다시 자기 팔자 고치러 자기 밥 먹고 살기 위해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가고 룻은 어떻게 했습니까? 룻은 새로운 현실, 나오미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 그 시어머니에게 떨어진 현실을 자기의 제 2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희망 없는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진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우리를 때립니다. 어떤 식으로 때립니까? 우리가 소유 없는 상황, 소유가 없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현실 속으로 우리의 팔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자꾸 우리를 끌고 가고 늪으로 인도하고 있어요.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은 우리가 소유를 끊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돈벌이 할 것, 돈벌이 안 하려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진짜 현실은 뭐냐? 아무 것도 없는 하나님께서 손을 치셨던 그 현실이 하나님 진짜 살아계신 현장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그랬냐 하면 십자가 지시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그 현실이 하나님이 나타내신 유일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 현실 속에 들어가야 돼요. 우리가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현실을 우리가 생각을 해 줘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나올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집안에 대해서 걱정 끊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집에 불이 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소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찾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함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을 한 번 가져보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저녁에 왔습니다.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중간에 “하나님 오늘 밤에 푹 자고 내일 건강하게 깨어나게 하옵소서”그렇게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 오늘 밤을 내가 마지막 밤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내가 기르던 자식과 남편과 아내와 모든 현실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현실이 지금 이 순간 기도하는 현실이 되게 하옵소서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참된 기도예요.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오늘 밤으로 내 인생 종쳤다 이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만 하나님이 여러분과 만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순간만...
그러니 우리가 룻기를 배우기 전에 생각했던 하나님은 전부 다 가짜였고 엉터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리개 감이었고 우리가 이용하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관공소에 계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편리를 도와주는 어떤 공무원이라든지 아니면 은행 직원들 아니면 골프장에 있는 상냥한 아가씨들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나오미가 하나님께 매 맞는 그 현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순간적으로나마 0.1초 라마 모든 것이 끊겨진 상태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 이 말입니다. 못 들으신 분들 위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는가? 우리가 0.1초라도, 0.1초 너무 깁니까? 좋습니다. 양보합시다. 0.01초, 0.01초라도 모든 것이 왕창 다 날아간 상태에서만 하나님은 그저 잠깐 나타났다가 아유 내 자식 하면 하나님은 뭘 바래하며 도망간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다 치워버렸을 경우에서만 그 현장에 나타내십니다. 만약에 하나님 나타나는 현장에 우리 자식을 놓는다든지 그 자리에 내 남편을 갖다 놓는다든지 내 아내 갖다 놓는다든지 현재 내 재산과 내 지위라는 것 갖다 놓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은 그 곳에 오시지 않습니다. 왜? 못 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망상, 잘못 생각한 현실이거든요.
“하나님, 제가 지금 남편이 있습니다. 이 남편이 지금 과장으로 진급을 했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게 웬 떡입니까? 나는 이제 과장 부인이 되었습니다. 아이구, 이 기쁨 주여 제가 감사 헌금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망상이라 말입니다. 망상... 그것은 나오미가 매 맞은 현실이 아니예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하나의 헛된 망상 같은 현실 속에 지금잠기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찾아올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기에 안 갑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하나님, 제 남편이 과장이 되었습니다. 주여, 과장이 아니라도 저는 남편을 사랑하겠습니다. 아니, 남편이 없다 할지라도 주님만을 사랑 하겠습니다” “과장 남편!” “왜?” “당신은 멋지게 남으세요. 나는 하나님 찾아 가겠습니다” 남편이 있다가 “여보, 당신 왜 그래?” “당신은 모압 과장해서 잘 먹고 잘 사시오. 딴 여자 만나서. 난 당신 없어도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그럴 순간에만 그걸 머릿속에 계산 하면서 기도할 때만 하나님 나타나시고 하나님 만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현대인에게 하나님 만난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스쳐 지나가는 거. 이것을 지금 룻기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 종합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며느리입니다. “얘 아가, 너희 지금 어디가고 있냐?” “네 고향에 돌아갑니다” “야 이리 오너라” “어머니 무슨 말씀입니까?” “야, 너그 희망 없다” “압니다” “가거라, 나는 하나님에게 매 맞은 여성이야. 나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야. 하나님이 나를 쳤어. 내 남편 죽고 나 때문에 내 자식 둘 다 내 앞에서 다 죽었잖아. 이런 팔자 어디 있겠니. 세상에... 그러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는 남편 찾아 가라. 나는 내 하나님 찾아 갈란다” “어머니...” “그래, 울지 말고 가거라” 하고 오르바는 입 맞추고 갔고 그런데 룻은 그 하나님이 쳤다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나오미의 현실을 룻은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제가 자기 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같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 이예요. 하나님의 기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한평생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장담 할께요. 저나 여러분이나 한평생 자식 없으면 못 사는 인간들이고 남편 없으면 못 사는 인간들이고 아내 없으면 못 사는 인간들이고 땅 떼기 없으면 우리는 못 사는 인간들입니다. 맞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 이거 인정합시다.
하지만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가 하면 한 순간만이라도 아까 0.01초라고 했죠? 0.01초 만이라도 이것 없어도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돼. 순간적으로 잠시만 그런 미친 생각, 잘못된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 때가 유일하게 하나님이 여러분 찾아 온 그 순간입니다. 방문하는 순간이라 이 말입니다. 그게 현실 이예요. 그게 전에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심판하신 순간과 동일한 순간이라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이야기 하면서 마지막에 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을 내가 본 것처럼, 지금은 내 남편 없고 내 자식 없고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이런 수치스러운 나이지만 죄 많은 나지만 간음하고 그리고 난 죄 많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부활 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없더라도 죄 많은 나를 수치스러운 나를 부활시키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그 순간만 접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 순간만...
다만 목사로서 희망 사항이 하나 있다면요, 이건 하나의 욕심인데 듣고 그냥 흘려버리세요. 이 0.01초가 한 1년 뒤에는 1997년도에는 하루 1초로 늘여지고, 98년도에는~ (30분22초, 여기까지만 녹음되었기에 녹취가 완성되지 못한 점 양해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