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2:7-10 / 없는 제물

정인순 2017. 6. 14. 21:58

 

 

 

없는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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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17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2:7-10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영생이라는 것은 오래 길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어떤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인 이삭과 아브라함은 바로 이 영생의 체계에 초청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이들의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숨겨진 천국의 구조가 펼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지 이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진정한 모습을 직접 아브라함에게 찾을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다가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시험의 직접적인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이 될 ‘어린 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고 싶어하지만 거기에 비해 아브라함의 시험은, 아브라함 자체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성하려는 시험의 일부가 되는 개입되는 겁니다.

이삭은 본인이 시험 치는 자로 나섭니다. 이는 자신이 시험을 통과할 주인공으로서, 시험 뒤에도 그대로 성공자로서 살아남기를 원했던 겁니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해내는 자로 계속 남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나와”

즉 불도 있음입니다. 나무도 있음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없음’입니다. 이삭이 기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불과 나무도 어린 양 까지 모두 ‘있음’으로서 갖추어져서 그 ‘있음’을 가지고 치르는 제사를 통과해서 이 시험 이후에도 본인들이 계속해서 ‘있음’으로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어린양이 결핍되어 있으니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는 겁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의심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그 자체가 이미 시험에 걸려든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즉 왜 내가 기대한 시험문제가 아니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왜 아브라함은 사전에 “사실은, 내 아들아. 네가 제물이란다”라는 말을 아들에게 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이번 시험이 ‘있음’이 주도권을 쥐는 시험이 아니라 ‘없음’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 ‘없음’이 블랙홀과 같은 작용을 하면서 모든 ‘있음’을 끌어당기는 구조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알지 못하고 그 ‘없음’이 중심되는 세상에서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두 부자(父子)는 ‘없음’이 부르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삭같은 사고방식에서 아브라함 같은 사고방식으로 전환되지 아니하면 ‘없음’ 중심으로 구성되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삭’의 의심부터 논리를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이해되는 시험이란, 본인의 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즉 “주님이여. 제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시험과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순종하는 나의 존재를 죽어서라도 저 천국까지 이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식입니다. 인간의 의미란 자신이 질문을 던질만한 분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수립되는 겁니다. 질문하는 자로서 해답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으로서 그분으로부터 의미있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으로 스스로 자부합니다.

이것은 곧 ‘법 준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법을 준수하게 되면 나는 법 준수자로 인정받겠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 법 앞에서는 모두 헛사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이미 인간을 가두어놓고 그 어떤 의미도 저주로 바꾸어버립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법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법을 아무리 준수하고자 하여도 자신들이 저주받는 자로 확인될 뿐입니다.

‘나의 있음’은 그냥 있음이 아니라 ‘저주받을 자’로 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자체가 이미 시험에 빠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시험이란 보다 인간들의 근원적인 형편을 폭로케 합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시험에 참여하게 만든 것은 구원을 결정짓는 근원적인 시험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6-7에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악마가 그동안 인간들에게 부지런히 시도했던 그 ‘시험 통과하기’의 궁극적인 한계까지 담겨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오기가 있습니다. 이 오기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극한까지 끌어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 지점을 악마가 선점에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시험을 관장합니다.

즉 “이러이러하게 말씀대로 살면 곧 시험 합격자”라는 그 잣대를 악마가 이미 제정해서 꾸준히 인간 세계를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험을 악마는 광야에서 예수님 상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시험’에 대해서 악마가 제시하는 바로 그 시험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통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시험이라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마태복음 27:46에 나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곧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만이 유일하게 시험에 통과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빼놓고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통과된 시험의 성격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있음’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의미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