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2 /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의 시험
이근호
녹취:오용익 90강-창 22장 1-2절(하나님의 시험)1705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하는 일이 계속해서 지시형식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는 것, 시험했다 할 때 시험받는 당사자는 살짝 기분 나쁘려고 합니다.
‘저를 그렇게 못 믿겠습니까? 그렇게 지켜봤으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잘 따르는지 뻔히 알면서도 또 시험 쳐서 그 여부를 살피시렵니까? 이렇게 저를 못 미더워 해서 무슨 동업을 하겠습니까?’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시험에 탈락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롭게 세분화시켜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언약,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합당하지 못하고 위배되는 자들이 어떤 종류, 어떤 성질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이 지상에 나타내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계속해서 합격자와 불합격자, 아브라함을 가지고 그 분류작업을 지속시켜 나가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개인구원문제에 관해서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속되는,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일관되어 있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게 되면 아브라함이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같이 행동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탈락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한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남은 역사를 어떤 원칙을 세우시면서 계속해서 끝까지 밀어붙이는지를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어떤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가 얼마나 깊은가? 그냥 호수물은 잠잠하게 있으니까 얼마나 깊은지를 모르지요. 그런데 호수가 얼마나 깊은 지는 놀러왔던 사람이 큰 돌을 호수에 풍덩 던져보는 겁니다. 일종의 시험인 거예요. 풍덩, 하고 소리가 크게 나면 깊네, 라고 해서 새삼 그 깊이가 정리가 되겠지요.
아브라함언약으로 구원받는다. 우리는 구원에 그만 매료되어서 “나 아브라함언약 믿습니다. 아브라함 믿습니다.” 아브라함을 두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하니까 아브라함을 믿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인 것을 인정합니다, 하는데 그 아브라함에다가 큰 돌을 던져보는 거예요.
풍덩! 그러면 겉으로 건성으로 봤을 때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믿음과 아브라함이 시험을 경유하고 난 뒤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갖고 있는 깊이가 너무나 다르겠지요. 주님께서 계속해서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주님의 지속적인 일, 절차 중의 하나가 오늘 아브라함에게 시험하는 과정에 우리가 도달했습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데 시험의 내용이 뭐냐가 중요하겠지요. 무슨 문제를 냈는데 아브라함이 거기서 문제를 어떻게 풀고 통과했는가,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문제를 냈느냐 하면, 존재가 번제로 바뀌는 문제를 낸 겁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아들 있지?” “예, 있습니다.” 있음, 존재지요. 그런데 그 존재가 번제가 되어버리면 번제로 드리는 순간 소멸해버리고 맙니다. 존재가 무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있음은 계속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없어지기 위해서 잠시 있게 된 것을 네가 믿느냐, 잠시 있다가 소실되고 소멸되고 사라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을 네가 믿느냐, 이게 시험문제입니다.
있음이 목적의 끝이 아니고 있다가도 없어짐, 없어짐이 존재의 이유가 되고 이 땅에 태어난 의미가 되는 겁니다. 없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없어진다면 무엇도 없어지는가? 오늘 본문에서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요.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면 무엇도 없어지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도 없어져요.
있음이 어떤 대상을 믿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잖아요.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는 소리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나와서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을 없애버리면 무엇도 없어지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는다는 그 믿음도 없어지는 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이 사라져야 될 믿음인 것을 네가 믿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할 때에 그 믿는 당사자가 주체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거든요.
본인이 믿으면 그 믿음이 유지되려면 나는 계속해서 있어줘야 되지요. 계속해서 있어줘야 있을 때마다 믿음이 생기고 또 있을 때마다 믿음이 생기는데 주님께서 만약 “너를 없애라.”라고 한다면 내가 없어지는 동시에 내가 그동안 믿은것도 소실되고 날라가 버리지요.
그러면 내 있음에서 나온 그 믿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왜?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진짜 믿음은 뭐냐 하면,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흔적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믿음, 있는 내가 점점 더 없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해야 될 그 믿음, 그 믿음이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니 어렵게 들리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잠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잖아요. 그 예수님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 그 말입니다. 잠시 있었다. 어, 있네. 사라졌다. 사라졌네. 뭘 남겼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 남겼다.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라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언약이 있고 예수님은 그 언약의 완성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설교 다시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탈락자가 어떤 유의 사람들인가,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연속적으로 일거리를 맡기신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삭이 있는 것을 그냥 없애버리라 했다면 집에서 약을 먹일 수도 있고,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번개탄 피울 수도 있고, 비닐봉지를 씌울 수도 있고, 사람 없애는 방법은 가지가지거든요. 절벽에서 뒤에서 떠민다든지.
그런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번제로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그저 막연하게 죽는다. 이삭이 죽는다, 이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멀리 모리아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집에서 칼로 죽여도 되는데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모리아산에 가서 그 다음에 번제로 드려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로 드리든지 어떻게 하든지 존재가 죽는 것은 일반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죽이는 방법을 왜 지정해주시느냐 그 말이지요. 그냥 죽이지 말고 번제로 드리되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 말고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려라. 모리아 산이란 나중에 예루살렘 근처의 산을 모리아산이라 합니다.
예루살렘 근처의 모리아산에서 죽여라, 라고 특별히 규정해서 지시하는 이유가 뭐냐?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맑습니다. 그런데 우산 챙겨서 나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 펴는 사람은 바보지요.
인간이 하는 모든 믿는다는 것, 행동하는 것은 지금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고히 지키려고 의도에서 나온 믿음이고 그 믿음에 따라서 행함도 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함을 추적해 보게 되면 내 존재를 사수하고 키우고 지키려는 믿음에 의해서 인간의 행동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 그 믿음은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 왜 번제로 번제를 드려야 되고 그것도 왜 모리아 산에 갖다 바쳐야 되는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차피 없앨 자식이라면 집에서 그냥 죽일 수도 있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내 것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나오는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시험하시는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경외해라.” “예, 하겠습니다.” 간단한 문제지 그것을 굳이 테스트 할 문제는 아닌데…….
하나님의 경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경외가 되려면 반드시 테스트를 경유해서 경외가 될 때 하나님의 판정을 제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본인이 믿는 자라면, 성도라면, 자기가 자기에게 테스트 하는 그것이 과연 합당하냐는 말이지요.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자기에게 문제 출제도 안합니다.
항상 자신은 합격하는 사람으로 나오도록 문제를 본인이 출제하면 그것은 제대로 된 테스트가 될 수가 없지요. 그러면 테스트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테스트의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을 한데 모아놓은 데가 있습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입니다. 19절에 보면,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식으로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는데 그 믿음의 증거가 뭐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합격점을 받은 믿음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본인이 본인을 스스로 측정해서 낸 문제가 아니에요. 아브라함 본인이 ‘하나님이 지켜보시는데 내가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티를 내지? 옳지. 내가 나에게 문제를 내야지. 옳지.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려야지.’
이렇게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을 스스로 옳다고 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문제를 출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믿음의 시작은 뭐냐? 출제를 어느 쪽에서 하느냐?
하나님 쪽에서 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내는 그 문제가 인간이 스스로 ‘나는 내가 구원받는 사람 되어야 되고, 내 존재가 연속되어야 되고, 내 존재는 소멸되면 안 되고, 나는 이 존재를 가지고 천국까지 가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해야지.’라는 모든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문제를 내는 겁니다.
내가 믿음의 테스트에 합격해서 이 몸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지, 라는 식으로 마음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출제한 시험에서 불합격되는 겁니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 우산 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산을 펴면서 이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미쳤다고 할 겁니다. 믿음은 그런 미쳤다고 하는 것,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가라. 단 십분 만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일주일 가도 못갑니다. 가당키나 합니까? 안되지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시험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결코 믿음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어떤 인간도 믿음이 없다. 어떤 인간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 한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떤 인간에게서도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는 믿음, 아브라함이 가질 수 있는 그 믿음은 어떤 원칙에 준해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데, 우리가 아주 알기 쉬운 같은 믿음의 원칙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맑은 날 우산 펴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이 본문 때문입니다. 방주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데 지금 노아가 만들었어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 방주를 두고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로 삼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했으니 방주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에,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할까? 좋은 수 없나? 옳지. 방주를 만들어야지.’ 노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 만들기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주어진 그 믿음 하나하나가 나에게 예상이 되고, 예측이 되고, 내가 믿을만한 믿음 같으면 전부 다 헛방입니다. 그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것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테스트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떠냐 하면, 항상 뒤돌아봅니다. 뒤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은 자기가 구상하거나, 예측하거나, 예상하거나, 미리 짐작한 일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어졌던 재료들이고 사건들이고 상황들이라는 것을 사후적으로 믿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죽일 때 나는 밥이나 먹고 살다가 죽는데, 그것을 곱게 죽은 것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번제로 만들어서 죽이는 그 원칙에 입각해서 평생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처럼 존재가 사라지는데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번제로 만들어서, 그것도 모리아산에서 드리는 번제화 시켜서 없애는 방식으로 믿는 자의 인생을 주께서 이끄시고 인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걸 미리 알게 되었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그것을 미리 안 거예요.
뭘 미리 아느냐? 주님께서는 나에게 언약을 보냈고 그 언약에 준해서 나를 언약사람으로 만드는데 어떤 식으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서는 내가 도저히 감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받아들인 거예요. 따라서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 하는 이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내가 왜 바치는지 모르고, 이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내가 짐작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주님의 지시 안에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이 아브라함 손에 의해서 성취되지는 않는다는 이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주께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계속해서 어떤 지시를 내린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시키는대로 한 거예요. 대단한 믿음으로 보이지만 대단한 믿음이 아니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바치러 가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서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왜? 평소에 자기의 모든 일도 자기가 구상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은 약속 안에 있으니까. 열심히 집안 청소하면서도 이 집안청소가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평소부터 믿은 거예요. 내가 미장원에서 머리 하는 이것도 주께서 주신 믿음의 테스트에요.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시켰느냐, 계속 테스트하고 있는 겁니다.
파마하고 죽으라는 그 말이에요. 파마하면서 네 존재를 소멸시키라는 말이지요. 너는 없어지기 위해서 잠시 있으니까. 이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든 언약에 결부되어 있는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나는 사라져가고 있다. 무엇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언약계획을 내 몸을 통해 발산하면서 나는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니 특별한 기적이 아니고, 그냥 입이 심심한데 껌이나 씹을까, 하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껌 하나 씹는 그것도. ‘화장실에 가고 싶네.’ 이게 기적이 되는 거예요. 일상생활 전부가 기적이 되지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 일상생활이 주의 일이 되는 이유는, 내가 나를 믿는 것, 내가 한 것을 내가 믿는 것, 그것과의 투쟁, 그것을 염두에 주고 테스트, 시험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겁니다. “너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을 믿었지? 이번 결과가 네 행동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네가 믿지?” “아닌데요.” 그러면 합격이지요.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거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원칙, 살아 있는 자를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번제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한 번 번제는 영원한 번제입니다. 성도 자체가 이 땅에 번제로 가야 돼요. 왜? 죽어가고 있으니까.
그냥 죽으면, 자살하면 왜 번제가 안 되는가? 그 이유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다시 한 번 읽어드리면 ““또 여러 형제가” 성도지요, “(성도가) 어린 양의 피”라고 되어 있어요.
어린양은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끝까지 어린양으로 시작해서 어린양으로 마감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시작부터 끝까지가 번제에요. 존재가 무존재로,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어린양으로 변모되어서 사라지는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번제의 모양새로 사라지는 거예요. 어린양이 세상죄를 지고 가는 번제인 것을 드러내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 모리아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지시한 그 산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원칙이거든요. 그 원칙이 예수님보가 2천년 앞당겨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삽입되었다고 봅시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인생 가운데서 누구 인생을 벌써부터 드러내느냐 하면, 어린양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인생을 아브라함 자기 인생가운데서 보여주는 지시를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은 그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앞으로 오실 그 분의 인생을 내가 앞서서 미리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같은 언약이기 때문에 같은 원칙이 서로 통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히브리서 2장 18절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이 시험받았고 예수님이 받은 시험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자기백성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대목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예들을 보게 되면, 참 엉터리 예들이 많아요. 불도 심한 집에 시집가서 교회 나가는데 머리카락 다 쥐어뜯기고, 그럴 때마다 그 새댁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붙들면서 하는 소리가 “이게 악마의 시험인데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 그러니까 끝까지 시험을 감당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렇게 예를 들어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가 자기 믿음을 자기가 유지하려는 식이고 이것은 아브라함의 테스트에서는 탈락자에요. 아브라함의 시험의 취지는 네 믿음을 포기하라는 거예요, 네 믿음을! “주여, 제가 이렇게 주를 믿습니다.” 하는 그 ‘믿습니다’ 를 포기하 폐기처분하라는 말이지요.
그 ‘믿습니다’ 배후에 자기존재가 있거든요. 믿음을 만드는 것, 그리고 믿음을 유지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진짜 믿음이냐 하는 것은 끝에 번제로 마감되느냐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마지막에 번제로 마감되면 그 믿음과 그 믿음의 유지가 주님께서 손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나 여기 믿음대로 멀쩡하게 살아 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고 마귀가 준 믿음이에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 “내가 아들 바치고 드렸습니다.”가 그 믿음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아요.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겁니다.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줄로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나에게 바치라고 해놓고 바친 이삭을 도로 살리시는 장차 내 대신 어떤 분이 오신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는데, 내 아들을 죽이고 그리고 나를 죽이시는데, 아들을 바치라는 말은 그 아들을 사랑하는 내 사랑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의 아들사랑이 주님의 언약의 일관된 일에 훼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믿음, 나의 사랑, 나의 소망 모두 다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거예요. 왜? 나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은 내 존재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나한테 소환되기에, 내가 도로 가져오기에 그렇습니다.
“주여, 이렇게 믿었으니 복 주세요.” 항상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있는 입장이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없애줘야 하는데 그냥 없애버리면 지옥갑니다. 어떻게 없애는가?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장차 오실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소스를 뿌리듯이 줘버립니다.
줘버리게 되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다 같이 죽어가면서 번제의 형식, 장차 오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바쳐질만한 번제의 형식으로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도 사라지고 이삭도 사라지고 야곱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언약만 남아요.
예수님이 어린양이라는 그 사실만 남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런 믿음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해놓고 내세운 그 예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해서 정탐꾼을 숨겨준 그 예, 또 하나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예.
이것을 가지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풀이하게 되면,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어떤 행함 인자를 본인의 아이디어로 끄집어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내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일방적으로 꾸려나가는 번제되라고, 어린양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등장해서 살라고 주께서 주신 사건의 다발이고 이어짐이라는 고백이 나오지요.
그게 바로 믿음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 믿음이 더 세냐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이삭의 믿음이나 아브라함도 주인공이 아니고 이삭도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런 것은 다 잘라 내버려야 돼요. 남는 것은 주께서 그들 안에서 일했다는 그것만 남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질이 문제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죽든지 살든지 주를 위해서 살고.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안에 장착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제물이 되도록, 번제물이 되도록 조치를 해 나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사는 모습은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생각해요. ‘내일 영화 좀 보러 갈까?’ 이런 식으로. ‘내일 장독 청소 좀 해야 하는데.’ 자꾸 미리 당겨서 생각해 버려요. 미리 당겨서 생각해 버리면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오늘 죽으면 안돼요.
‘6월에는 딸내미 시집보내야 되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시집보내기 전에는 내가 죽으면 안돼요. 시집가는 것을 내 눈으로 봐야 돼요. 그러면 그 순간 번제라는 것이 날라가 버립니다. 번제는 날라 가버리고 “주님, 딸 시집갈 때 날씨 좋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믿음을 방해하는 악마의 믿음인 것을 티를 내게 하시는 겁니다.
이세상 교회에서 말하는 모든 믿음은 악마가 조작해주는 믿음이에요. “여러분이 믿으면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것을 훈련하고 생산해내고자 열심히 기도들을 하지요. 기도하면 믿음이 생기는지 알고.
그렇게 하면 무엇이 강화되느냐 하면, 죽어도 좋다가 아니라 이렇게 믿음을 키웠으니 좋은날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좋은 날을 놔두고 기도하다가 굶어죽으면 억울하잖아요. 억울하지 않기 위해서도, 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이면 도 내일 내가 계속 살아남아야 돼요.
이것은 자기가 주인공 되는 거예요. 자기가 주인공 되는 것은 배후에 악마가 시킨 사고방식이 아니면 그런 생각이 안 나거든요. 악마는, 항상 네가 주인공이고 네가 믿음의 장부라는 거예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험케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발적으로 믿음을 내놓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믿음은 주께서 받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믿음만 받습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적으로 주어졌다는 증거가 뭐냐? 로마서 4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아들 바치는데 땀을 얼마나 흘렸다고요. 제가 그 때 부들부들 떨었습니다.”라는 자기 행함이 나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 안에서 아브라함 본인의 행함을 차버리고 준비된 하나님의 어린양의 행함이 자기로 하여금 이곳까지 이끌었다는 그 믿음이 이 세상에 천국갈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이라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소멸되기 위해서 잠시 태어났는데 우리의 목숨에 대한 집착력이 얼마나 강렬한지 하나님 앞에 거래하듯이 바칠 것 바치고 챙길 것 챙기겠다는 악마적인 믿음을 믿음이라고 우겼습니다. 이제는 우리 생각나지 않고 주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는 고백만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