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출애굽기

출애굽기 20:10 / 비개별적 구원 / 111202

정인순 2011. 12. 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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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11202a 울산강의-출애굽기 20장 : 비개별적 구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20장 10절부터 봅시다. 지난 시간부터 십계명에 대해서 하는데 십계명 할 때 제일 잘못되게 해석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십계명을 잘못되게 해석하는 것인가? 십계명을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지키겠다면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십계명, 하나님 말씀에는 항상 조직으로 돼있거든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홀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몰고 오는 세계가 구조적이다. 구조로 만들어서 주님께서 오셨거든요. 주님께서 올 때 주님 옷 같은 것 만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주님께서 뭘 소개합니까? 내 옷 만지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내가 몰고 오는 천국이라는 구조, 예수님이 몰고 오시는 천국이라는 세계를 이해해야 된다 말이에요.


이게 구조니까 쉽게 하나의 ‘상자’라고 봅시다. 다시 할게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내가 개별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만지면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어떤 구조를 몰고 오신 거예요.


이 구조를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의 상자처럼 생각한다면, 왜 예수님께서 구조로 오시느냐 하면, 우리 개인이 생각하기를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인간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속해 있는 어떤 박스가 있어요. 육의 구조. 인간도 구조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큰 구조 속에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지 자기가 단독적으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그런 권한이나 자격이라는 게 없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다는 말은 어디서 잘못 되었느냐 하면, 내가 속해 있는 구조는 따로 있고 나는 거기서 따로 행동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몸이란 자연과 교류하게 돼있어요. 대자연과 나는 따로고 나는 햇빛도 필요 없고, 물고 필요 없어. 나는 공기 같은 건 안 마셔도 돼. 나는 뭐든지 내가 알아서 내가 해.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늘 공급받고 있는 혜택을 받고 있고 만약에 이 동네에 전염병이 돈다면, 바이러스에 취약한 것이 인간의 몸이거든요. 암세포한테 취약하잖아요. 암세포한테 본인이 이기질 못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원하는 나 이전에 이미 어떤 집단화돼있습니다. 그 집단 중에 한 요소, 집단 중의 일개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 말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뭘 지킨다 할 때 이게 나의 성질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익혀왔고, 배워왔던 인간들의 사고방식이겠어요? 나만의 사고방식이겠습니까? 인간들이 익히 아는 사고방식이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람들이 익히 아는 사고방식이에요.


십계명 지켰다고 개별적으로 구원받는 그런 경우는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교회역사를 보고 성경해석하면 전부다 십계명을, ‘너는 안 지키지만 나 혼자 지켜.’ 자꾸 자기 혼자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십계명을 지키면 그 지킨 값으로 구원받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그런 인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거지들이 보통 옛날에는 다리 밑에서 살았잖아요. 거지들끼리 자기 딴에 세수하고 비누칠하고 깨끗하게 해봐야 거지 옷 입고 시내 나가서 버스 타고 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동네에서는 깨끗한 축에 든다 이 말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깨끗하나, 본인이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너는 어디서 나왔어? 다리 밑에서 살다 왔구나. 그러면 너는 저쪽 거지 동네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배웠던, 그가 알았던 모든 행세, 사고방식은 전부다 거지의 일부로서 비춰 나오게 돼있습니다.


십계명은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인간 전체가 십계명 볼 때 어떤 계명이냐? 이것 하려고 십계명 줬는데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전체 구조를 알지 못하고, ‘주여,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고 나서봤자 그것은 거지가 고급 호텔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자기 딴에 반듯하게 하고 냄새 적게 한다 해봐야 같은 거지끼리 살았던 흔적들이 녹아있기 때문에. ‘목욕 좀 하고 오소. 옷 좀 갈아입고.’ ‘그래도 우리 동네에선 내 옷이 제일 깨끗한데.’ 이런 말은 안 통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뭐라 합니까? 로마서 10장에. 자기 의로 구원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우리들끼리는 옆 사람보다 자기 의가 나은 건데 하나님 구조에 봐서는 자기 의란 육의 구조 안에 나타난 하나의 흔적이고 뾰루지라.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십계명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계명이 아니고 언약이라 하죠. 언약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 전체와 나, 하나님 나라 전체와 협약한 게 언약이에요. 개별자가 아니고. 그래서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뭐가 필요한가? 나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십계명을 구현하려면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집단이 필요하고, 단체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란 말이 뭔 뜻이에요? 이웃이 없으면 그 일이 안 되죠. 혼자 산에서 도 닦으면 이웃이 없잖아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억울하게 죽었던 부모의 자녀들, 고아와 과부들, 전쟁 통에 죽었던 사람의 아내들, 나그네 이런 사람들을 유발시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고 그들과 함께 있다. 너희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라.’


이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인간의 구조를 하나님의 십계명 아래의 구조로 바꾸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개인에서 구조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구조가 구조로 언약 맺어져 전체적으로 바꿔지는 것, 구조 전체가 달라지는 식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개인구원은 성경에 없어요. 이런 이야기조차도 세상 교회에서는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이죠.


예를 들어서 공자, 맹자 이야기를 해봅시다. 공자 이야기, 맹자 이야기 그 하나만 봐도 맹자가 이런 소리했겠어요?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만 극락에 간다. 이런 소리 했겠습니까? 아니죠.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 집안이 잘 된다 하죠. 왕에게 충성하면 나라가 잘 되죠. 그러면 가족이라든지, 국가라 하는 것은 구조입니까, 개인입니까? 구조잖아요.


그게 옛날 동양에서는 통했어요. 동양에서는 나는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라고 아예 전제가 깔리잖아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 공자, 맹자가 젊은 사람한테는 안 통하지요. 부모가 간섭하면 가출할 생각을 먼저 하는데. 가정이 어디 있어요,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 마음에 안 들면 뉴질랜드나 미국으로 대번에 이민 가잖아요. 이걸 근대주체사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근대주체사상이 언제 그렇게 시작되었느냐 하면, 옛날에는 신분으로 얽매였어요. 네가 속한 신분에 네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걸 신분사회라 합니다. 종은 종답게, 군주는 군주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이것 자체가 뭘 규정한 거예요? 신분은 운명이고 확정적이잖아요. 그게 신분사회에요. 상놈은 상놈답게, 양반은 양반답게.


그런데 십자가운동 일어나고 난 뒤에 그때부터 땅에서 나오던 돈을 무역을 통해서 개인이 돈을 축적함으로 말미암아 신분보다 돈이 우선 된 거예요. 자본주의 시작이 십자가운동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이야기해요. 그건 대충 맞는 이야기라고 보고. 자본이라 하는 것은 잉여, 과잉이 돼야 되고 하나 먹고 하나 파는 것은 자본주의 안 됩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남아도는 게 돼야 돼요.


남대문시장에서 땡처리 할 때는 무조건 한 장에 천 원이랍니다. 왜냐하면 장사란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 때 이윤이 남는 것이지 한 장 팔아서는 이윤이 안 남거든요. 무역이란 많이 해서 잘 되면 떼돈 벌고 못 되면 폭삭 망하는 식으로 발달하게 되면 농지를 통해서 밥 먹고 하는 것과는 게임이 안 돼요.


그러면 신분사회에서 개인사회로 바뀌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속해 있는 나라나 신분이나 계급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인주의로 점점 발달되는 거예요. 옛날부터 있었지만.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만 해도 사실 오늘날처럼 개인주의 아닙니다. 십계명을 누굴 위해서 지키는 거예요? 이스라엘 공동체,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십계명을 오늘날 21세기에 십계명을 지키라 하면 사람들이 이걸 개인적으로 지키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지켜서 ‘헤헤 나는 구원받지. 너는 못 지켰지 나 혼자 구원받지.’ 이런 개인적인 구원으로 십계명이 거론되니까 해석자체가 얼토당토 않는 해석이에요.


다시 이야기하면 예수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나 혼자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 이런 것은 애초부터 없어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몰고 온 그 구조적인 세계를 네가 인정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은 구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개인은 구조에 못 들어가요. 구조가 와서 받아주는 겁니다. 어떤 구조에 들어가려면 이쪽의 구조가 단체로 들어가게 돼있어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제 말의 결론이 궁금하죠. 그러면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는다는 이런 쪽이 되잖아요. 단체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새순교회 교인들 전부 모아서 다 같이 ‘하나, 둘, 셋 우리 예수 믿습니다.’ 하면 단체로 구원받습니까? 그런 식으로 할까요? 단체로 구원받는다며? 개인은 안 된다며? 그러면 대충 마음 맞는 사람들 모아서, ‘하나, 둘, 셋 믿습니다.’ 하면 그 사람들만 넣어주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면, 바로 성령이 오게 돼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백 사람이 되던, 천 사람이 되던 한 성령을 마신 사람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개별적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하나로 집결시킨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게 아니고 반드시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개인적인 자격으로 예수를 믿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들은 하나의 형제니라, 너는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의 지체니라’ 해서 배당을 줘요. 어떤 조직의 하나의 역할과 배당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우리가 개인적인 자격이 아니고 어떤 조직의 배당을 받게 되면 실패가 없어요. 오늘 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어요. 인생에 실패가 없다니까. 왜냐하면 역할에 불과하니까.


어떤 사람은 재벌이고 어떤 사람은 막일하는데 둘 다 성령이 와서 같은 주를 섬기면 부자는 본인이 부자이고 싶어서 부자 된 게 아니고 부자라는 역할을 맡은 것이고, 거지나 노숙자는 막노동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둘 다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니까요. 실패가 없기 때문에 인생에서 실망이 사라져요.


눈이 발 더러 쓸데없다는 소리하지 말라했지요. 하지만 발 된 사람은 눈이 부러운데 어쩝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것은 배당받은 은사기 때문에 그런 것 되려 하지 말고 네가 어느 자리에 있던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전부다 한 형제가 되고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개인이 구원받는 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에게 주님께서 너는 참 이스라엘인이라 하죠. 이게 공자, 맹자 같으면 네가 참 군주라고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는 참 이스라엘인이라 했어요.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화답하며 하는 말이, 이스라엘 같으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천사든지 왔다갔다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어떻게 아십니까?’ ‘네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온 게 아니고 하늘나라를 구조적으로 몰고 왔고,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 자격으로 똑똑 열어주세요 하면 안 되고 구조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된 이스라엘이 천국에 합류하는 식으로 구원된다 이 말이죠. 개인 자격이 아니고 집단 자격으로 집단의 일원이로서 자기의 역할을 배당받으니까.


목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구원과 상관없고, 직업도 상관없고, 장애자냐 건강하냐 이것도 상관없고, 남녀노소 관계없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전부다 그리스도의 한 형제가 되고 거기에서는 어느 자리에 있던 그것은 실패라든지, 실망스럽다든지, 탈락이라든지 이런 게 성립이 안 돼요. 그것이 바로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취지입니다.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은 개별 행동했지요. 여리고 성을 누구한테 주느냐 하면 개인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주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이스라엘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나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똑같지요. 나는 나이고 싶지 내가 누구한테 소속되는 것은 싫다는 거예요.


제가 요즘 책 쓴다는 신경이 날카롭고 약간 힘든 구석이 있는데 제목은 일단 [교회는 미신이다]라는 책을 쓰면서 그 안에 이런 게 들어있어요. 큰 교회는 생명이 희박하다. 교회가 크게 됐다는 말은 복음을 안 전했다는 말이거든요. 복음을 안 전했으니까 구원받기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면 작은 교회가 유리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작은 교회는 모여 있으면 사람의 악취가 지독해요. 누구 하나 생리현상 하면 다른 사람은 다 코를 막아야 돼요. 그만큼 작은 교회는 눈에 띄게 돼있어요.


‘집사님 이번에 청소인데 누구 빠졌는데 대신 하렵니까?’ 작은 교회는 되는데 큰 교회는 이게 안 되잖아요. 큰 교회는 누가 왔나, 갔나. 성가대 봉사하라는 소리도 없고 뒷자리에 앉았다가 쇼 구경하고 가도 뭐라 그러는 사람 없고, 두 달 만에 와도 관심 두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희박해서 큰 교회가 좋은 이유가 사람과 부대끼기 싫고 나는 나란 말이죠. 내가 알았던 한국교회 복음은 어디든 나 혼자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교회에다 적용시키면 큰 교회 가서, ‘네가 뭘 시켜도 나는 말 안 들어. 하여튼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 편한대로 희박하더라도 자기 편한대로 교회 등록하면 구원받겠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그게 편하게 지내는 거예요.


새순교회도 250억 들여서 교회 지어보세요. 교인들 많이 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간섭 안 하고 말씀만 전해도 교회 안 떠납니다. 왜? 간섭 안 하니까. 이래놓고도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나는 소속 없어요. 나는 나일뿐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나고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그걸로 구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나와 있는 모든 기적과 말씀들은 내가 소속돼있는 내 뒤에 뿌려져 있는 이 세계와 모든 사상과 모든 삶의 원칙이 정반대로 완전히 달라요. 나는 인간 중에 통용하는 거기에 습관이 들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하늘나라에 속했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인간은 어디에 속했다? 땅에 속했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거예요. 개인적으로 하는 말은 없어요. 땅에 속한 개인이죠. 땅에 속한 습성으로써 예수를 믿으라니까 그 믿음은 하늘에서 주신 믿음이 아니고 땅에서 사람들끼리 믿던 믿음을 그대로 하늘나라 구조에다 억지로 적용시키려하니까 이게 오류고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을 해석할 때 첫 번째 계명 앞에 있는 전문이 중요해요.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인도해낸 하나님이죠. 그래놓고 십계명을 줬잖아요. 그렇다면 십계명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줬기 때문에 십계명 모든 계명에 애굽은 무엇이며, 약속의 땅은 무엇이냐 그 차이를 말씀하기 위한 십계명이 되는 거예요. 동의 안 해요?


모든 계명의 해석에 개인적으로 지킬게요. 개인적으로 거짓말 안 할게요. 개인적으로 도적질 안 할게요. 이거는 말이 안 돼요. 그런 해석은 안 통합니다. 하나의 예를 봅시다. 20장 15절에 보면, 도적질 하지 말라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 해석 어떻게 할 겁니까? 옳지 담 타넘고 남의 물건 훔치지 말아야지. 하잖아요.


열왕기하 11장 2절 누가 읽어보세요.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보세요. 여기 도적질 나왔지요. 지금 아달랴라는 못된 이방 우상을 섬기는 여왕이 손자들을 다 죽였는데 그때 고모가 요아스 왕자를 몰래 빼돌리죠. 그런데 십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며. 그렇다면 십계명의 모든 계명은 개인적인 양심상 어떻게 지키느냐가 아니라 어느 구조를 보여주는


그러니까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은, 너는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너무 논리가 갑자기 비약했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도적질을 해서라도 절대로 애굽으로 돌아가서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와 그 은총과 놀라운 역사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게 십계명 전체 이야기다 이 말입니다. 쉽지 않습니까? 참 쉽잖아요.


‘간음을 해서라도 절대로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란 말이야.’가 간음하지 말란 뜻이에요. 이것 책 내야 되는데 충격이다. 거짓말하지 말라 했는데 거짓말 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굽니까? 기생 라합, 민족과 국가의 배신자.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일본 앞잡이를 숨겨준 것과 똑같아요. ‘천황폐하 만세’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나라는 일본한테 점령당해도 싸다는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 사람 또 있어요. 요새 수요일에 하는 유명한 선지자 예레미야. ‘우리는 바벨론에 잡혀가야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뭐라고 공격했어요. ‘이 배신자여,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여.’ 같은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이스라엘을 구조적으로 쥐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이라 할 때 예레미야는 그게 아니고 언약적인 이스라엘을 지키는 하나님이다. 그게 뭔데? 바벨론한테 멸망당해야 돼. 왜 그래야 되는데? 언약은 말씀대로 안 살면 필히 저주받게 돼있는데 저주받는 걸 봐서는 잘 저주받았다고 하는 사람만이 남은 자,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한 이야기죠. 나 같은 인간은 벌 받아 싸다는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이 말이에요. 결국 마지막에 가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는 그 이야기라니까요. 자기 의와 자기 잘남과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 지키고, 그것 해서 개인적으로 의를 모아서 그것으로 천국으로 가려고 들이대는 자료로 삼으려고. 말도 안 돼요.


십계명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니라. 우리는 로마서 3장을 달달 외우면서도 막상 십계명에 들어가서 해석하려 하면, 이걸 사적으로 괜찮은 의로움을 축적하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고. 부자 청년이 십계명 지켰다 했잖아요. 부자 청년이 십계명 지켰다고 우길 때 결국 주님 만나고 난 뒤에 근심하고 돌아갔지요. 왜 돌아갔습니까? 부자는 자기 개인 구원을 위해서 십계명 지킨 거예요. 예수님이 몰고 온 하늘나라 구조를 전혀 이해 못한 거예요.


처음에 예를 들었잖아요. 거지끼리 살면서 저 거지보다 나라는 놈이 좀 낫기 낫지. 이것으로 천당 가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의와 거룩은 그런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얻어지는 의가 아닙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사야 쯤 되면 하나님 만나도 기 안 죽을 것 같은데 실제로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 만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했잖아요.


진실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나 스스로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다 무모하고 그것이 안 되는 짓인 것을 비로소 알 때 내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집단적으로 몰아넣고 집어넣어주고 내 영 말고, 내 양심 말고 다른 분의 영이 나한테 덮쳐줘야 내가 그분의 소유란 입장에서, 역할을 배당받은 입장에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개인적인 자격으로는 안 됩니다. 개인적 자격으로 하려 하면, 너는 절에 가라. 나는 교회 갈게. 너는 성당 가고. 가족 셋인데 하나는 천주교, 하나는 기독교, 하나는 무교 또 하나는 기독교 핍박하는 사람 골고루 짜여 있으면, 어떤 사람은 다섯 개를 다 믿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것이나 걸려라.


출발지가 뭐냐? 나는 나기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나이기 위한 그런 좋은 나라가 어디 있을까? 나를 인정해주는 그런 나라는 없을까? 그런 나라 없습니다. 천국에 지금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해주는 그런 나라는 없어요. 그래서 제가 글 하나 썼잖아요. [나 천국 안 갈란다] 예수님한테 전부 몰리고 나는 천국 카메라 하나도 못 받고. 그럼 나는 심심해서 못 산다. 나는 나 때문에 즐거운데 천당 가서 예수님만 환호하고 호산나 하면서 전부다 예수님만 높이는데 나한테는 동아일보, KBS에서 카메라 들이대지도 않는데 있으나마나한 존재인데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그래서 유럽에서 천국에 안 가려는 사람들 많아요. 심심하다고. 천국이 심심해서 못 살겠다고, 권태로워서 못 간다는 거예요. 그래도 지옥이 낫다는 거예요. 아등바등 싸우는 재미라도 있잖아요. 하여튼 지 마음대로에요. 성경을 전혀 몰라요.


인간들의 의견을 들어서 교회를 운영하니 그 교회가 민주주의 교회지 천국의 교회겠습니까? 항상 성경을 해석할 때는 세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첫째,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느냐? 나라는 피조물이 영광에 관심이 있느냐? 두 번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냐? 진짜 천국이 뭐냐? 구원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사실은 다 같은 이야기지만. 사람은 평소에 자기 영광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은 생각도 안 하고. 사람들은 교회 온 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은 교회 자체가 구원해준다니까 그냥 등록만 하면 구원이 되는 줄 알고 있고. 이 세 가지 다 안 돼요.


그렇다면 성경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애굽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평생토록 살면서 온몸으로 그걸 느껴야 돼요. 애굽이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고 실망만 안겨주는 세상이라는 것을 평생 사시면서 온몸으로 체득을 체험을 해야 돼요.


자식 믿다가 자식한테 실망당하고, 남편 믿다가 남편한테 실망당하다고, 아내 믿다가 실망당하고, 목사 믿다가 실망당하고. 하여튼 온갖 것 다 당해봐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나 좋으라는 천국이 아니고 그저 예수님만 좋으면 그걸로 충분한 그 나라가 천국이라는 것을 내가 깨지면서 그걸 느끼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애굽에서 죄에서 건져낸다 할 때 애굽과 약속의 땅 중간에 뭐가 있었습니까? 중간에 있는 것은 오직 죽음밖에 없었어요. 이스라엘 전부다 몰아넣고 애굽 사람들은 저 산 밑에 놔두고 오늘밤 2시 45분에 죽음의 천사가 와서 집집마다 방문해서 맏아들 다 죽이는 것, 통곡소리 나는 것 네가 지켜보고 너는 박수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요. 이렇게 구원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왜 그렇게 안 했어요? 너는 구경만 해라. 내가 저쪽을 다 칠게. 그렇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 가정마저도 뭘 발라야 돼요? 자기들 대신 집안에 키우는 일년 된 비실비실 넘어가는 것 말고 진짜 흠 없는 사랑스러운 식구 같은 어린 양을 잡도록 돼있어요.


이것은 마치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같으면 도끼 들고 잡았을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누굴 잡습니까? 이삭을 잡잖아요. 그것도 누구 손으로? 번개 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죽인다 말이죠. 우리 같으면 차라리 내가 대신 죽을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죽는 것은 자기 죽는 것보다 더 지독한 죽음이에요.


제가 지난 주일아침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사람이 죽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무섭다. 죽으면 눈 감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안 무서워요. 하지만 살아 있으면서 생생하게 눈 뜨고 있으면서 내 귀한 것들을 잃어버릴 때 이건 환장합니다. 차라리 죽고 난 뒤에 잃어버리지 이거는 생생하게 눈 뜨고 있는데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을 만끽해야 된다는 이것, 보통 고통이 아니잖아요.


볼펜 하나 잃어버려도 사흘 간다는데 자기 아들 잃어버리면 그것도 내가 죽일 때, 아브라함이 산 위에 번제 바칠 때 산 위에 올라갈 때는 자기 아들과 올라갔지만 내려올 때는 혼자 내려올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다음 해에 혼자서 지낼 것은 생각 안 하겠습니까. 인간은 미리 생각하기 마련인데요. 기가 코도 안 찰 거예요. 그 귀한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이다니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너무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넘어올 때 그냥 넘어오지 않습니다. 죽여서 넘어와요. 죽여서 넘어오면 그 살아있는 이스라엘 장자는 누구 소유입니까? 그 집안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 소유가 돼요. 예수님께서 값을 주고 샀다고 할 때 이 말이 농담이 아닙니다. 진짜 값 주고 샀어요. 더 이상 내 몸에 속한 내 것은 없어요. 시계까지 전부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 상 아니고 성경 상. 다 주님의 것이에요.


사실은 우리는 백 날 해도 내 것이잖아요.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사실은 성경 상 실제적으로 주님의 것 사이의 괴리, 그 거리 간격을 혹독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안 죽이고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고집 부려봐. 네 고집이 너를 힘들게 할 거야.’ 계속 그 간격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죽어나는 거예요. 또 실패했구나. 또 실망했구나. 그런데 성경은 실패고 실망이고 없다 했잖아요. 그것은 하나의 역할인데.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반드시 죽음을 거치고 오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것 같은데 억울한 죽음이 아니고 이 죽음은 어린양, 하나님과 함께 죽었던 죽음으로서 우리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쪼개서 우리 안에 예수님 죽은 것 들어있으면 그 사람 구원받은 거고, 예수님 죽은 게 없으면 그 사람은 지 혼자 사는 사람이고. 살다가 교회에서 오락하다 지옥 가는 거죠.


그래서 나 같은 인간도 예수님 죽으심으로 구원받았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세워야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나 같은 인간은 영광을 가리고, 천국에도 못 가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누구 때문에? 천국 못 가는 내가 나 때문에 천국 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영광을 가리는, 내 영광밖에 모르는 내가 알아서 영광 돌렸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구원도 안 되는 내가 스스로 잡아당겨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죠. 그러면 이러한 나를 분명히 규정한다는 것은 이미 이것을 해내신 어린양이 계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바로 이런 점을 항상 기초로 해야 된다는 말이죠. 모든 계명에는 애굽이 들어있고 약속의 땅이 들어있는데 그 안에는 죽음을 통해서만 간다. 그리고 십계명 모든 계명 안에는 바로 새로운 땅, 약속의 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시는 거예요. 애굽에서 볼 때 반인륜적이고, 애굽에서 볼 때 도둑놈이고, 간음죄고, 부모를 때려죽인 것이고 그렇지만 그런 짓을 하면서도 약속의 땅에 보냈다 이 말이죠.


부모를 공경하라 해놓고 예수님께서 뭐라 합니까? 누구나 부모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했잖아요. 왜 앞뒤가 달라요?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합니까? 헷갈리게.


다윗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누굴 만났을 때에요? 목욕했던 여인을 만났을 때에요. 그것도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 부인은 맨날 옷 벗고 있어도 몰랐어요.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다윗은 빼도 박도 못해요. 그 노선에서 자기가 자의적인 힘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곳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몰아넣으니까 결국 그 속에서 간음죄, 살인죄 다 저질렀지요. 심지어 그 남편까지 죽였잖아요. 요즘 시민법정에 세우면 15년 형입니다.


그럼 15년 형 받아서 교도소에서 뭐 하겠습니까? 맨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단 말이죠.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나는 사람한테 죄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 한 게 맞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간음죄에다, 살인죄에다, 교도소 소란 죄에다 나중엔 정신병자까지 돼요. 이런 정신병자가 애굽 같은 세상에서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구원 못 받는다는 게 주의 뜻이란 말이죠. 우리가 거의 정신병자 수준 돼야 돼요.


이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왜 어렵지 않느냐? 이게 벗어나려고 하니까 어려운데 그냥 맡기시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내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힘든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 힘든 일을 왜 그렇게 합니까?


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그 이유를 찾으면 아주 쉬워요. 모든 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 가리죠. 하나님의 영광을 언제 생각합니까? 월요일에 생각합니까, 화요일에 생각합니까? 천국 생각 안 합니다. 교회 와서 ‘목사님, 교회 왔습니다.’ 하고 웃고 집에 가면 그만인데 무슨 천국을 생각해요. 교회 온 걸 천국으로 대신 때워달라고 요구할 판인데 천국을 왜 가요. 지금 세상에서 좋은 게 많은데. 맨날 천국은 생각 안 하고 이 땅을 더 좋아하고. 구원은 관심도 없고. 그런 인간으로 몰아넣으시는 그분을 성령을 통해서만 너 같은 인간을 일부러 그렇게 했거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사는 게 얼마나 편합니까?


자기를 위해서 도적질하려니까 그렇게 힘든 거예요. 얼마나 근육을 단련해야 가스배관 탑니까? 어떤 PD가 가스배관 타봤어요. 1층도 못 올라가요. 그걸 5층, 6층 올라가서 빼내는 것 보세요. 대단한 달인입니다. 우리는 다른 식으로 돈을 빼먹잖아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넣으신 거예요. 주께서 구원받으라고 가스배관 타고 올라가게 하신 겁니다.


이 말이 세상사람, 경찰관한테 이해가 되겠어요? 왜 올라갔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말이 됩니까? 도적질하러 올라가놓고. 도적질하지 말라는데 주께서는 도적질하면서까지 하랍니다. 천당 가랍니다. 이게 사실은 말이 안 되거든요.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원인에서 출발해서 결과를 봐야 되는데 결과부터 해놓고 원인을 정당화시키니까 말이 안 된다 이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해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네 속에 있는 모든 죄를 다 끄집어내는 결과부터 출발해서 이미 구원받았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어째서 너는 내 피 아니면 구원이 안 될 존재였던가를 되짚어가면서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이스라엘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이것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이미 홍해에서 어린양으로 해서 동행하잖아요. 이스라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그 속에 언약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언약이 있는 채로 그 다음부터는 이방나라, 애굽, 에돔, 모압, 암몬에 막 굴려서 얼마나 너희들이 그들과 친화적이고 그들의 세상을 원하고 있고, 다시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려하고 있고, 이걸 낱낱이 면면을 다 보이고 결국은 유다가 바벨론한테 잡혀가는 그런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는 속에 예레미야를 집어넣고, 에스겔을 집어넣고, 인자를 집어넣어버리죠. 그리고 그걸 교회라 하는 거죠. 교회란 망해도 산다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가 동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구조적으로 그들은 하나의 배당받은 역할을 하면서 구원받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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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b 울산강의-출애굽기 20장 : 비개별적 구원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에 20장 6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 하거든요. 성경에서 ‘까지’라는 말은 거기에서 스톱 된다는 말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뜻의 ‘까지’에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는 말은 저쪽 가서 멈춘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이쪽의 범위를 넘어서서 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말은, 인간이 지키던 안 지키던 관계없이 이런 경우가 있다는 말이에요. 인간이 못 지키면 인간 대신 하나님이 지키든지 어쨌든 간에 말씀대로만 되거든요.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시는 그런 상황이 옵니다.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혜택은 이미 줘버렸어요. 약속은 걸어놓고, 로또 보세요. 아무리 떨어져서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무도 없다고 취소할 수는 없는 거고 주의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계명 지키면 구원받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안 되고 주님으로만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그 세계가 천국이란 거죠.


천국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고, 말씀대로 되게 되면 이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 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냥 돌아서서 천국 못 가고 말씀 속에 들어가서 천국을 가야 되는데 말씀 속에 들어가 보니까 저 천국은 정말 우리가 못 들어가는 나라고 우리가 달성할 수 없는 나라인 것을 발견한 거예요. 이걸 통과하면서 결국 우리는 죽고 또 죽고 또 죽어야 돼요. 매일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소용없고, 베드로가 그냥 순교한다고 구원 못 받거든요. 베드로는, 너는 죽어도 안 돼. 내가 너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면 와서 너를 데려가면 그때 구원받는 거예요. 네가 죽던지 관계없이. 우리가 죽는 것은 여기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말씀이 우리에게 저주케 하면 저주받아야 되고, 언약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안 되는 자를, 죽은 자를, 없는 자를 있게 하시고 살려내시는 주님이 이 속에 뛰어들어요. 어린양이. 뛰어들면 어린양의 자격으로 다 이룬 의인의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애굽이라면 이쪽은 약속의 땅이고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십계명을 받은 광야의 모습이란 말이죠. 광야가 그냥 텅텅 빈 곳이 아니고 말씀을 본격적으로 제공하는 기간이 광야에요. 우리는 말씀을 하나도 지킬 수 없음을 기쁘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어떤 목사가 와서 ‘말씀 지키세요.’ 하면, ‘우리는 못 지킵니다.’ 하고 나가떨어지란 말이죠. ‘미쳤나. 도대체 뭐야? 무슨 이런 동네가 다 있어.’ 너나 말씀의 행함, 성령의 열매를 맺으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믿으면 안 되고 예수를 믿어야 돼요.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란 말은 나 혼자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고맙게도 너도 못 지키고, 나도 못 지키고 집단적으로 못 지키기고 구조적으로 못 지켜요. 왜?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키는 구조에서 나왔던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지키겠다고 나온 부자 청년 같은 경우에 주께서 돌려보냅니다. ‘가세요. 집으로 돌아가세요. 오지 마세요. 얼쩡거리지 말라고. 너나 십계명 잘 지키고 지옥 가세요.’ 보내버리고, 못 지키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하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주께서 그들과 동행해서 못 들어가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어려운 게 애굽 땅에 천국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이게 안 보인다는 게 제일 애로사항이에요. 천국이 보이면 우리는 좀 될 수 있는데 천국이 안 보이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걸 통과하는 게 아니고 자꾸 우회, 십자가 벗어나서 내가 원하는 천국으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 천국은 바로 풍요의 세계입니다. 풍요의 세계란 현재 나한테 아쉬운 것을 채워주는 세계로 생각하고 천국 가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애굽과 자기가 생각하는 풍요의 나라의 연결고리는 뭐냐 하면, 여기는 바로 행함이 동원돼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내 나름대로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할 테니까 내 나름대로 행했던 선한 것을 근거로 내가 원하는 풍요의 세계에 넣어주세요.’ 하는 식으로 나갈 때 하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이게 바로 우상 노선이에요.


바로 내가 원하는, 애굽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식의 천국을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진짜 개입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반된 우상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가고자하는 나라는 우상의 나라, 지옥에 가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으로 치닫는 이 사람들에게 언약 쪽으로 몰아넣으려고 해요. 몰아넣는데 가만있으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 고난 받는 사람, 핍박받는 사람, 애매하게 수난 받는 사람들이 있어야 됩니다. 이 역할을 출애굽기 20장에 모세와 아론 등 이런 사람들이 해줘요. 백성들이 원망할 때 누구한테 원망합니까? 모세한테 원망하죠.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느냐 하면, 이 세계는 그들에게는 안 보이고 그들이 원하는 세계, 풍요의 세계, 지 잘난 세계 여기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세계의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버리면 떡을 달라할 때 만나였고, 고기를 먹고 싶다 할 때 메추라기를 집어넣죠. 만나와 메추라기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또 물 달라 할 때 그냥 물을 주는 게 아니고 반석에서 물을 주죠. 반석, 만나, 메추라기에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어서 출애굽 당시의 그 상황이, 구조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내내 그 구조를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모색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풍요의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천국에 가게 되는데 만약에 언약을 벗어나서 자꾸 이쪽으로 가버리면 천국에 못 가고 악마가 만들어놓은 풍요의 세계에 그들은 추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원리입니다. 늘 순간순간에 언약에 있는 내용을 여기다 쏟아 붓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이 모형이 나중에 구체화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약에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정리하면, 우리는 그 세계를 모릅니다. 누가 아느냐? 우리와 함께 계신 십자가 지신 분은 그 천국을 유일하게 알고 계신 거죠. 따라서 천국에 갈 사람 같으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시시때때로 생각나게 만들어서 내가 잘나고 훌륭하게 된다는 이런 세계 말고 주님의 공로가 드러나는 그 세계로 이 노선에서 가도록 늘 조종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이게 성령의 열매라 하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출애굽기 계명들을 봅시다. 모든 계명 안에는 애굽이 들어있고, 약속의 땅이 있다. 약속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만 아신다. 모세도 몰라요. 모세도 모르기 때문에 반석에다 두 번 쳐서 못 들어갔잖아요. 약속의 땅은 여호와만 아시고 애굽은 인간들이 안다. 인간들이 알기 때문에 애굽에서 애굽으로 항상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10절에 봅시다.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육일 동안 일하고 칠일에는 안식하라. 쉬라고 했죠. 그러면 육일 동안 일했기 때문에 하루 쉬는 겁니까? 어떤 학자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너무 힘든 것을 아시고 특별히 하루를 편히 쉬는 날로 사랑으로 줬다는 거예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일 일하고 하루 쉬는 걸로 하지 마시고 아예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돼요. 그게 얼마나 쭈욱 안식하잖아요. 왜 일을 복잡하게 하는지 몰라.


이 안식일의 뜻은 뭐냐 하면, 육일 일했다고 하루 쉬는 게 아니고 하루 쉰다는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육일 동안 일하게 하는 겁니다. 육일 동안 일한다는 것은 일함과 안식일, 일 안함. 그러면 살리는 것은 내가 일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일 안함으로 살게 된다는 것.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이 날 일 안 함으로 말미암아 이 날을 일하게 하시는 동력이 돼요. 원인이 된다고. 아까 했잖아요. 결과로부터 거꾸로 원인이 되는 거예요. 세상에선 원인에서 결과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인간들의 결과라고 하는 그것을 이미 완료시켜놓고 거기서부터 뽑아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이게 물탱크인데 물탱크 있고 물탱크에서 호스를 사용해서 물맛을 보게 한다는 겁니다. 결국 물탱크 속에 들어가게 되죠. 이미 물탱크 상황을 완료돼있고 그 일부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거예요. 이미 완성된 안식일이기 때문에 거기서 복을 받아서 육일 동안 사는 겁니다. 7 그 다음에 1, 2, 3, 4, 5, 6, 7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도 하지 않느냐 하면, 안식일에 만나를 줬습니까? 육일에 이틀 치를 줘서 칠일에는 만나를 못 주우러 갑니다. 칠일에는 양식 줍지 않는 날, 다른 말로 하면 양식 없는 날, 다른 말로 하면 사십 일 동안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살았던 그 생활의 재현, 그 일부를 지상에서 맛보게 하는 겁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살았던 이 날이 바로 생명, 그걸 다른 말로 영생의 상태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는 상태, 내 힘으로 살 것 같으면 힘 떨어져서 죽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힘 떨어지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살아요. 그냥 축복 가운데 사는 겁니다. 그 영생을 주는데 영생에 안식일 결과의 핵심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 안식일에 어린양을 잡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육일이 되란 말이죠.


항상 일하면서 ‘언제쯤 안식일이 올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 육일은 애굽이죠. 칠일은 약속의 땅 그러니까 계명 안에 애굽도 들어있고 약속의 땅도 들어있고. 애굽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그냥 일하지 않고 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그들은 하나의 역할로 배당받아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휘시키죠.


예수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했죠. 그렇게 궁금했던 우리가 왜 살지, 우리가 왜 구원받았는지 궁금했는데 안식일의 완성, 주인으로서 오신 분을 보니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하는 거죠.


그렇다면 안식일을 칠일의 덕분으로서 우리가 애굽 생활은 작고 천국의 생활은 크게 하라고 안식을 주셨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이게 형식적이 되니까 이게 반대가 됐어요. 언제 안식일이 지나서 빨리 가게 문 열까? 요새 같으면 상당히 순진한 생각이죠. 우리는 막 여는데 바보같이. 고신 측 목사는 안식일에 문 열면 안 된다 하는데 우리교회 교인들은 안식일에 문 활짝 열어요. 안식일에 마트에 가서 물건 한꺼번에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까 이야기했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안식일을 어겨서라도 안식일을 지키라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거예요. 신약 때 안식일은 이미 십자가로써 완성 되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먹지 말라는 음식을 먹지요.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이 없는 대로. 완성한 것을 먹는 이유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난 것을 복음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율법으로 율법의 벗어남을 이야기하고,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있어야 될 걸 이야기하죠. 왜? 율법이 있어야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막 사는 사람한테는 막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막 안 사는 사람에게는 막 사는 걸 이야기해야 돼요.


아까 도적질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나 도적질 안 했다는 부자 청년 지옥 갔지요. 지옥 가려면 도적질하지 말란 말이죠. 하지만 도적질해서라도 천국 가려면 도적질하지 말라가 계명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해보니 더 어렵네.


이미 결과로부터 복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안목은, 예수님은 안식일이 됐다 하면 병고치고 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면 되겠느냐 할 때에 안식일에 너 담요 들고 올라가. 안식일에 그러면 안 된다는데.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시키는 거야. 일부러 안식일을 어김으로서 안식일의 참된 뜻은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는 그것이 훼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진짜 안식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로 다 끝나버렸는데 인간은 그게 천당 가는데 모자란다는 거예요. 행함으로 보태야 된다는 거예요.


진짜 그렇게 주님을 모독하다니 간땡이 부었어. 피를 모독하다니 인간의 행함으로. 그러면서도 구원받기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예수님을 그렇게 짓밟아놓고, 어디 무슨 마을? 이런 분개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주님의 분개하는 마음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농담 삼아 얕보는 사람에게는 분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개인적으로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 같은 사람을 내세우는 거예요.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이렇다고 이야기해도 역시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착한 구석을 마지막으로 쥐고 싶어요. 자기 안에 굴을 파서 나는 죄인이라 생각하지만 그래서 뭔가 내가 나답다는 하나의 의로운 것, 그것은 자기도 못 찾아. 너무 깊숙이 넣어서. 포장 잘해서 방사능폐기물처럼 저 밑에 숨겨서 지도 잘 못 꺼내. 내가 분명히 착하긴 착한데 뭐 때문에 착한지 몰라서 잊어버려.


그런데 자기는 잊어버렸는데 주님께서는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가 숨겨놓는 진짜 착하고 구원받는 이유, 왜 나는 이렇게 착할 수밖에 없으며 훌륭할 수밖에 없는가, 나는 왜 구원받을 자격이 되는가를 그것을 주께서는 파헤쳐가면서 이것 숨겨놨잖아. 이것 봐. 이게 십자가 모독한 거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망한 백성 중에 한 사람입니다. 구조적이잖아요. 내가 망한 게 아니고 구조적으로 이 구조의 대변인이에요. 이 세상 자체를, 애굽 자체를 좋아했어요. 말이 통하니까, 생각이 통하니까, 잘난 맛에 사니까 그게 우리 몸에 습관화 되어서 편하게 된 겁니다. 반복된 학습은 습관을 낳아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것밖에 몰랐던 거죠.


그런데 직접 주님 만나고 보니까 이게 얼마나 위선덩어리고 남 핑계, 지 핑계 할 것 없이 내가 예수님을 은근히 안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거예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은근히 안 사랑해. 나는 내가 더 사랑스러워. 이걸 까발려주시는 그런 사태를 일으키십니다. 사태라 해서 망하고 그런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한테 실망스러운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줘요.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말이 마지막 걸린 거예요. 간음죄도 죄가 아니고, 살인죄도 죄가 아니라 자기가 율법으로 의롭다한 그것이 죄였어요. 내가 성경말씀대로 행동함으로 의라 한 그것이 마지막 자기가 주님 앞에 들통 났을 때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그런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착한 사람 비교해서 나쁜 놈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조건 나쁜 놈이라는 그 고백이 그 사람을 당신은 누가 뭐래도 구원받은 것 맞다는 판정을 받게 하는 겁니다. 두 번 다시 그 사람은 자기 의를 안 내세울 거니까. 이미 바닥이 구멍이 나버렸어. 주께서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서 뒤집어버려서 숨길 장소가 없어. 그것이 바로 율법이 우리에게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십계명이 갖고 있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환경 속에 몰아넣을 거예요. 이스라엘 북쪽의 나라 아람, 이쪽에 모압, 암몬, 에돔, 두로, 블레셋 그리고 돌아다니는 미디안, 나중에는 앗수르, 저쪽에 바벨론 나오겠지요. 중간에 아모리. 이스라엘 주변의 이런 나라들이 뭘 갖고 있습니까? 아모리 족속은 그모스란 신을 갖고 있고, 모압도 그모스고. 암몬은 몰렉 이런 신, 블레셋은 유명한 다곤, 손모가지 부러진 다곤. 그리고 주변에 바알.


이런 우상들, 신들이 있는데 이 모든 신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헛된 이미지다. 헛된 환상이거든요. 아무리 사람이 환상이라 하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 신을 섬기고 있어요. 우상이 이미지고 허상이라면 허상을 섬기는 그 인간은 여전히 허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 자체를 실체로 보지 않고 허상을 보는 것은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안목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이 적들이 하나도 안 무서워. 허수아비니까. 그런데 아낙 자손 같은 경우에는 키 2미터가 넘어요. 장대 같은 사람들 있어요. 강호동 이상 되는 사람들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부다 헛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문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이스라엘이 어디서 나온 민족입니까?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다만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보조출연자, 엑스트라로 뽑혀 나온 사람들이란 말이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촬영할 때 애먹었어요. 독수리 날개 동원해서 애굽에서 홍해 건너올 때 요란스러웠습니다. ‘컷’ 될 때까지 참 힘들었어요. 뒤에 노인네들 천천히 가는 것 빨리 몰아넣고 구름기둥, 불기둥 세트 세우고 뒤에 애굽 군사들 그것도 엑스트라 해서 말 타고 가다가 물에 빠져 다 죽고. 전부 엑스트라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물에 빠지며 죽으면 끝이라 하거든요. 죽으면 끝이 아니에요. 살아있을 때 죽은 거예요. 살아있을 때 죽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구십 되어서 죽습니다. 이런 안목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내가 반칙 같은 느낌이 드는데 실제라니까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에요.


그래서 이 둘 사이의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 그 유명한 전쟁, ‘붙이시매’ 전쟁이라. 원래 동네 형들 놀다가 심심하면 세 살, 네 살 붙여서 둘이 싸워봐라. 시키는 대로 세 살 애가 네 살 애 때려서 엎어지고 울고불고 하잖아요. 그러면 잘 했다. 너 큰 인물 되겠다. 이러잖아요. 거기에 아이들이 어릴 때는 멋도 모르고 말려들어서 싸움 안 하면 오히려 형들한테 얻어맞을까봐 억지로 싸움도 하고. 그러다 코피 나서 엄마한테 혼나고.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전쟁입니다.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왜 붙여주시는가? 주님의 안목으로 바꿔라 이 말이에요. 네가 자꾸 애굽의 안목을 유지하고 있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그냥 네 상태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뀌어져야 천국에서 권태롭지 않고 영원히 살 수가 있어요. 문제는 천국 가야 되니까. 천국 백성답게 안목이 바뀌기 위해서 이 세상 헛것들이 다 필요해요. 주변의 헛것들이 소용없는 게 아니고 붙어라, 붙어라 하거든요.


저쪽에서는 엄청나게 달려드는데 이쪽에서는 벌벌 떨면서 그러면 어쩔까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누가 이겼습니까? 여리고 성 어떻게 할까요? 그냥 뺑뺑 돌아라. 하나님 약속대로 무너진다. 보니까 무너졌잖아요. 그런데 기적도 기적이 일어나야 기적인 줄 알지만 기적이 일어나기 전 0.1초 전이라도 벌벌 떠는 거예요. 마치 시험합격 되기 전에 끝까지 자기 이름 발견할 때까지는 항상 벌벌 떨기 마련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안 볼란다하는 사람도 있고. 간이 약해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런 사람들 붙여서 결국 누구한테 주목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이런 것들이 배치돼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만 신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 신이고 다른 것은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신을 만들도록 하나님께서 붙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짜 못 됐지요. 우상 섬기라고 해놓고 조져버리는 거예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래요. 은혜 받지 못하고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쪽에는 언약이 없고 이쪽은 언약이 있거든요. 이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언약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없는 것들을 통해서 있는 자와 붙여서 한 번씩 깨지게 만들어서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사는구나를 깨닫는 이것을 하나님은 영원한 성소, 영원한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전쟁을 일으켜서 너희들 안에서 영원한 내 거처가 되게 하겠다. 성소, 하나님이 거하는 천국이 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하려면 먼저 이스라엘 내부부터 말씀으로 쑤셔서 하나님의 안목과 말씀 속의 안목과 항상 정리가 되도록 해야 되겠지요. 말씀 자체에 애굽과 약속의 땅이 항상 담겨 있어서 결국에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는 이 힘이 전 세계를 다 정복하고 남음이 있는 힘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12절 봅시다. 11절에서 12절 넘어갈 때 그냥 못 넘어가요. 계명 1, 2, 3, 4, 5, 6, 7, 8, 9, 10 열 가지 계명이 있다. 다 동등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2계명은 1계명에 종속되고, 3계명은 2계명에 종속되고, 4계명은 역시 1계명에 2, 3, 4 종속되는 거예요. 5, 6, 7, 8, 9, 10은 합쳐서 4계명에 종속이 돼요. 그래서 1, 2, 3, 4 이것이 사실은 하나의 계명이고,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거예요.


신은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신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4계명, 안식일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래서 안식일은 영원하리라. 안식일을 영원히 폐하지 못하리라. 에스겔에 나옵니다. 이걸 보고 또 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으로 모자라고 예수님도 믿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지켜라. 왜? 에스겔에 나오잖아요. 이렇게 주장한단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그걸 또 지킨다는 사람 있어요.


어제 건장한 30대 초반 된 사람이 들어와서 대번에 하는 소리가, ‘크리스마스는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거든요.’ ‘어떻게 아십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가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어머니인 것도 아십니까?’ ‘안상홍이 또 왔구먼.’ ‘안상홍인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5, 6, 7, 8, 9, 10모든 것이 안식일에 종속이 돼버리면 안식일에 제사를 위해서 5, 6, 7, 8, 9, 10 같은 이것이 인간의 행함이 제사 앞에서 소멸돼야 돼요. 5, 6, 7, 8, 9, 10 이것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런 것 있잖아요.


이런 말씀이 4번째 계명에 전부다 일치돼요. 제가 하는 말은, 5, 6, 7, 8, 9, 10에서 바로 1계명으로 가는 길이 없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안 섬기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고 필히 제사의 의미를 알아야 비로소 나 외에 다른 섬기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저기 있고 나 여기 있으니까 믿자. 이런 건 없어요. 진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 제시한 것은 제사, 죽음을 가운데 두고 우리는 죽음 안에서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은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복 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따라서 제사제도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다가서고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으로 다가섬으로 말미암아 십계명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한 거예요. 5, 6, 7, 8, 9, 10 이 모든 것은 바로 애굽적인 요소에서 제사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의미에서 그러한 계명을 실현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면 여기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애굽 땅에서 나왔던 그 부모의 말씀, 부모의 경험과 부모가 전하고 있는 애굽 땅에서 탈출한 내용을 자식들이 그 역사를 계시를 받아야 됩니다. 그게 부모에 대한 공경입니다. 부모는 그 당시 제사장이고 또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후세에 대대로 전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어요.


그리고 이 부모들은 일년에 세 번씩 하나님이 계신 제사장 있는 세미나에 가서 배워서 그걸 자식한테 그대로 이야기해요. 그래서 부모 역할은 그 당시 한 가정에서 목사 역할로서 부모는 이마에도 신명기 말씀, 손목에도 말씀으로 무장해서 우리 가정은 말씀에 의해서 인도받는 가정이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그 자리가 부모의 자리에요. 따라서 그 부모를 무시한다는 말은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게 돼요.


특히 부모는 일년에 세 번씩 와서 여호와께 보여라. 실제로 제사장에게 나오지만 제사장에게 보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 나에게 보여라. 모든 가정은 각각 개별적 가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가정들이 모여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거예요.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제사장의 제사 덕분에 우리는 산다는 것을 각 구석구석 가족들에게 알려줘라.


이스라엘 구조가 이래요. 제일 밑바닥에 땅이 있고 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기 때문에 그 중간 계층을 제사장이 하죠. 공간적으로 제사장은 성막에서 활동해요. 나중에 보면 성막에서 된 것이 성전이었어요. 여기에 있는 각 가장들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 가장들이 뭘 분배받느냐 하면, 소유권자 하나님에게 지상에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이걸 상속분이라 하고 다른 말로 기업이라 해요. 하나님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분한테 받았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땅주인이죠. 만날 때 어떻게 만납니까? 그러면 십일조를 하늘에 던지면 됩니까? 새들이나 좋아하죠. 그러면 안 되고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되죠. 제사장은 그것으로 제사에 전념함으로써 7월 10일에 죄를 용서해주시고 복이 유통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구조가 언약이 없는 다른 나라를 붙이시매 승리하시게 하신다니까요.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빈 땅이 아니고 빼앗은 땅이에요. 누가 빼앗았습니까? 우리가 빼앗은 게 아니고 용사되시는 하나님이 빼앗아 준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이란 지옥을 빼앗아 천국으로 만든 셈이 된다 말이죠. 옛날에 마귀가 산 땅이거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모든 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 그걸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그런 셈이란 말이죠.


그러면 상속분이 될 때 이 땅에서 농사짓고 할 때 가장이라 하는 것은 결국 땅주인을 찾아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생산을 했으니까 그 생산의 일부를 세금조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겠습니다. 그래서 이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 당시 방식으로 누리고 있는 그런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 당시 방식이란 농사짓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만약에 제사제도가 깨지면 밑에서 저주가 올라와요. 내 말씀을 안 지키면 너희가 여기서 메뚜기가 창궐할 것이고, 가뭄이 들 것이고, 아무리 네가 수고해도 소산물을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이 언약을 지키면 여기서 축복이 올라와서 이 땅은 너희가 풍족히 먹고 마시고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별적인 가정이란 없지요. 신명기에 보면 아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주위에 있는 이장님들, 작목반 반장님들 불러다가 ‘작목반 여러분, 25번지 아이가 말을 안 듣습니다. 몽둥이 하나씩 준비해서 내 애를 패주세요.’ 그게 뭐냐? 아버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중요하니까. 언약 때문에 복을 받고 살아왔으니까. 이게 아주 특이한 구석구석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과 용서 그것만 남기고 나머지 인간의 공로는 삭제되어야 될 그 땅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공경할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가정의 대표자로.


그런데 만약에 아버지가 죽었으면 어떻게 합니까? 가까운 일가친척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야 돼요. 일가친척 예를 들어 삼촌이 있다. 그 삼촌이 그걸 대신하려고 나서겠어요? 안 나서지요. 지 자식도 골치 아픈데 남의 자식까지 거두겠어요. 만약에 큰 아들이 아들이 없다. 그러면 결혼 안 한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한다. 하려 하겠어요? 요새는 연상연하가 있다마는 스물다섯 살인 시동생과 사십 일곱 된 형수와 결혼하라 하면 누가 좋아요? 형수는 좋아서 춤을 추고 시동생은 흐흐흑. 종용히 여자 친구와 헤어져야 하고. 누가 하겠어요. 안 하려고 한단 말이죠.


그 말은 하나님이 우선이지 단란한 가정이 우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들어가요. 아브라함의 언약과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이 우리를 살리지,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살리지 나만의 행복, 나만의 소박한 가정이 나를 살리지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기 있는 가장들이 나중에는 형식적으로 제사장에게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건 좋은데 나중에 이게 형식이 돼버리고 가만히 여자들이 바알 종교를 섬기게 됩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이사 가면 이삿날 정하고. 결혼한다. 교회 가지만 그냥 재미로 궁합 맞는가 보는 것. 이게 풍요의 세계를 원하는 거예요. 나만이 잘 되는 것, 더불어 잘 되는 게 아니고. 애굽적 사고방식이죠.


참 하나님께서 못 됐어. 일부러 그런 신을 섬기라고 고을마다 산마다 높은데다 전부다 이상한 종교의 전당들을 쌓았는데 그게 산당이라. 여자들이 거기서 비는 겁니다. 그저 산신령께 빕니다. 우리 아이 국어 성적 안 나왔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좀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주시고. 그냥 비는 거예요. 요즘은 교회 가서 빌면 돼요. 교회가 산당이니까. 하지만 옛날에는 들키면 안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사기에 보면, 사적으로 신당을 아예 가정에 모시고 있어. 제사장도 모시고. 지 마음대로 지 본성 당기는 대로 주변에 있는 신들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했죠. 망하라고. 결국 너는 애굽이었음을 들통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란 말은, 하나님이 과거의 사건들을 후손들에게 전달해서 그 사건들이 지금도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이 살려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경우에는 죽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전제 돼있어요. 언약을 어길 경우에만 살인이 해당이 되고 언약과 상관없는 사적인 것, 개별적인 것은 어떤 경우라도 허용 안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구조적이지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개입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살인을 해도 언약을 어길 경우에만 살인을 해요. 살인은 어떤 경우냐 하면, 무당 찾아갔을 때 죽여 버려요. 남녀가 간통할 때 죽여 버립니다. 애굽적이니까. 그 다음에 부모를 무시할 때 죽여 버려요. 그리고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 말 안 들을 때 죽여 버립니다. 요즘 같으면 다 죽고 남은 자식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 죽입니까? 안 죽여요. 왜? 내 자식이거든. 신고 안합니다. 자식이 애먹여도 그저 집안의 흉이라고 쉬쉬하고 있지 안 알립니다. 그럴 줄 알고 신명기 마지막에 보면, 내가 백날 이야기해봐야 너희들 결국은 내 말 안 듣는다. 결국 마귀 섬기고 이 나라는 망하게 돼있다는 것을 신명기 32장에 보면, 이미 이스라엘 망할 것을 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망해야 삽니다.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그것 하나 알고 갑시다. 그러면 우리가 망하려면 지금 다 망할까요? 아니에요. 지금 매일같이 우린 망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영광 생각 안 하죠. 천국 생각 안 하죠. 구원 생각도 안 하죠. 매일같이 망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 축복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죽어야 마땅하고 매일같이 없어도 마땅하고 지금 당장 죽어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삶의 무거운 무게로부터 실망을 느끼지 않고 실패도 없고 그게 성공한 인생이에요.


왜?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서 구원하는 것이 원래 인간에게 주신 코스에요. 잘 되서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인간은 잘 되면 하나님 버리게 돼있지 절대로 하나님 안 믿게 돼있어요. 잘 되서 집 잘 짓고 배부를 때 하나님 잊을까 하노라. 신명기 9장 보면 나오잖아요. 돈 좀 생기면 여호와 버리게 돼있어요. 안 그러고 싶어도 몸이 애굽 몸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돼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부자를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사실은 안 된 사람이에요.


그 다음에 살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살인한다. 두 번째 그 밑에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애굽의 풍습인데요, 간음이란 여자를 두 명, 세 명 그러니까 아내를 여러 명 두지 말라 이 말입니다. 애굽에서는 남자가 능력 있다는 표시로 여자를 많이 뒀거든요. 그렇게 돼버리면 이스라엘에서는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이 돼요.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할 권력이 어떻게 됩니까? 소위 잘 산다는 그 사람한테 집중이 되고 여자들도 거기에 많이 몰리게 되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거리가 더 멀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주신 땅인데 네가 거기서 넘보지 말라. 유명한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잖아요. 그럴 때 도적질하지 말라는 이 본문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경계선을 왜 넘어옵니까? 왕이라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 주신 은혜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한 거고. 간음도 애굽과 이스라엘이 차이가 난다.


그 다음에 16절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 말은 이것도 역시 구조에서 개인으로 나서지 말란 말이죠. 구조에서 개인으로 나서버리면 개인과 개인이 결탁이 이뤄지면 그 일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이 발생되니까. 구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렵게 하는 것은 괜찮은데 너희들이 나서서 어렵지 않아야 될 사람을 너희들이 배부르겠다고 어렵게 만들면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겁니다.


원래 머리가 나쁘고 원래 가진 것도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의 배당된 하나님의 뜻이에요.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배운 것이 구두 닦는 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님 은혜라고 생각하면 구원받는 건데 그렇지 않고 그걸 탐내서 도적질해서 개인적으로 배를 채운다면 언약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경계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납이 안 돼요.


자기 주어진 신분과 처지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너무 과분한 기대나 욕심을 부리면 이것은 경계선을 넘게 되어서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울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요. 나 하나 살겠다고 다른 사람이 우는 법이 생긴다고. 그러면 그에 대한 하소연이 하나님께 도달되면 우리에게 저주로 이어지죠.


그 다음에 끝으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결국은 아까 똑같은 말을 계속하죠. 5, 6, 7, 8, 9, 10의 계명은 뭡니까? 이게 애굽에서 개별적인 자기만의 이익을 제4계명 제사에 합류되면 여기서 제사부터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기 말라 해서 전체가 하나의 구조적으로 뭉쳐지는 거죠. 개인으로 죄 짓고 그 죄를 구조적으로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집단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내가 잘나서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사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것이 십계명의 완성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저희들은 개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보다도 나 같은 인간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다시 가짐으로서 그런 생각을 가진 이와 형제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