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7:54-60 / 스데반의 죽음

정인순 2010. 12. 29. 14:34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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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죽음

2004년 5월 5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7:54-60

 

 

7:54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서 스데반 집사님이 측은하게 느껴지십니까? 도리어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막게 되는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서 일을 벌리시는 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생명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둘로 가르는 경계선을 만들기 위한 겁니다. 즉 사람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을 둘러보면, 그 어떤 경계선도 눈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다 한 공기를 마시고, 모두 같은 지구라는 터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한 편이라고 간주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 세상에 경계선이 나타나도록 조치해 버립니다.


 

죽음에 속한 세계와 생명의 속한 세계를 구분 짓게 됩니다. 따라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보고 측은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러워해야 합니다.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성령을 받은 자라면 필히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어디를 가도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로 구분되는 경계선이 역할을 맡길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선 역할은 비단 스데반 집사님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애에 나서실 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악마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세계의 대표자와 생명의 세계의 대표자가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입니다.


 

두 개의 세계는 서로 대치하는 상황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악마에게 속한 세계의 속성은 이러합니다. 돈이 떡이 되게 하는 목적으로 움직이고, 사람들의 환영과 인기와 존경을 기대하면서 사는 세계요, 세계의 권세와 번영과 영광을 사모하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추구하게 되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일을 막고 방해하는 식이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어느 쪽도 속하지 않을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한 쪽의 세계에 소속이 되기 마련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죽음이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세상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려고 할까요? 오늘 본문 54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마음에 찔렸으면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왜 이를 갑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어느 포도원 비유인데요, 어떤 포도원에 악한 농부들이 있었습니다. 그 농부들에게 농산물을 받아내기 위해서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랬더니만 악한 농부들이 자기에게 오는 종이란 종은 전부 다 핍박하고 죽여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이 오게 됩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그 아들을 공경하기는커녕 그 아들마저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께서 분노하여 그 농부를 진멸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보낸 종들이 결코 악한 농부들과 타협이나 하고 노닥거리기 위해서 파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바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악한 농부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게 되겠지요.


 

바로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이 보낸 종 역할을 하는 자가 오늘 본문에서는 스데반 집사님이요 선지자들입니다. 흔히 이방민족들의 설화나 전설에 나오는 천사 이야기는 땅 속한 백성들이 아주 극진히 대접해 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는 이 땅의 사람들이 극도로 미워하면서 그 사람을 핍박하게 됩니다. 52절에 봐도 그러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처럼 선지자들은 이 죽음으로 위협받고 지배받는 이 세상에 생명의 세계를 알려주려 온 자들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속성을 잘 말해주는 경우가 열왕기하 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열왕기하 2:11-14에 보면,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승 엘리야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고 남겨진 제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만 가지고서 물이 갈라지게 했습니다. 기존의 죽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질서가 펼쳐지는 현장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 곁에 와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도 그저 위로조로 들을 공산이 큽니다. 아무리 종교가 위대해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놀랍게도 그냥 하늘에서 온 불 수레와 불 병거를 타고 홀연히 이 세계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엘리야가 언급한 모든 이야기가 단순히 자기 견해가 아니라 정말 생명의 세계에 속해서 그 세계의 다가섬에 의해서만 들려지고 알려질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추종한다는 선지 생도 50명은 이러한 스승의 운명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즉 평소에 그들이 스승에게 배운 말씀이 그저 이 세상을 위한 말씀인줄 만 알았지 참으로 죽음조차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믿지를 못한 겁니다.


 

이 점은 오늘날 소위 성경 공부나 설교를 듣는 우리들에게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디 써먹고 보다 유식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처럼 확실한 생명의 세계에 이미 소속되어 있기에 죽음조차 편하게 받아드리고 싶은 생각과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2:17-18에 보면,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 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왕하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시신을 이 땅에 두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엘리야가 그 전에 말한 모든 말씀은 결코 지상에서 만들어낸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 불수레와 불말을 내려보내어서 엘리야를 거두어갔던 그 세계에서 보내준 말들을 엘리야는 자기 세상에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시대에서도 죽음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가름하는 경계선 역할을 엘리야 선지자가 충실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는 하늘에서 불수레와 불말로 모셔가지를 않습니까?


 

그것은 스데반 집사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입장에서 죽고 사는 운명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음 자체를 초월하는 그 세계에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떠는 이 세계가 내세우는 최고의 무기인 죽음 앞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차라리 그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초청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처럼 '승천'이 더 신나는가 아니면 '자는 것'이 더 신나느냐 상호 우열을 비교할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죽음과 상관없음을 그 어떤 식으로도 자신이 속한 시대의 세상에 전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사람을 잡습니다. 그렇게 잡아야 그 사람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영원히 연결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이란 곧 지금도 하늘서 손꼽아 기다리시는 예수님과의 상봉의 순간입니다. 뭘 타고 올라가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기다려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관권입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을 측은히 여길 것이 아니라 부러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은 우리는 이미 우리는 죽음이 있는 쪽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쪽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실패인지 성공인지를 확실하게 정리하게 하옵소서. 세상 것 좋아해서 하나님 계신 쪽에다 돌을 던지는 일이 없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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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행 7:53-60 (스데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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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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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하여 !!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나서 사람들에게 그만 돌에 맞아서 현장에서 죽고 말았는데,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을 방문했다고 하면, 우리는 거기서 애통해하면서 울어야 합니까? 아니면 부러워해야 합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았으면 죽음의 순간에도 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예수님과 얼마나 친밀했으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그렇게 가볍게 여길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참으로 좋겠구나” 라고 하면서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한데, 반면에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쉽다. 실패했구나”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참으로 많은데, 돈이 많다든지 인기가 많으면 당연히 부럽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이러한 죽음을 보고서 같이 부러워하면서 거기에 기대를 건다는 것은, 그런 사람은 지금 당장에 죽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매우 가볍게 여기고 언제든지 천국으로 떠나갈 수 있는, 그런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그것은 자기가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 충만하면 삶의 무게가, 즉 존재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에 귀한 복음을 전하는데, 반면에 거기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악령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54절에 보면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라고 하는데, 마음에 찔렸으면 회개를 해야하는데 오히려 이를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이 평소에 얼마나 악령에 사로잡혀 있으면, 성령의 사로잡힌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갈겠느냐는 겁니다.

(행 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경계선 !!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 무리와 스데반 집사님과는 서로 대조가 되는 다른 세계에 속해있는데, 그들이 경계선에서 만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서로 대조가 되는 세계가 경계선에서 만나면 이런 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을 보고, “참 좋은 사람인데 안 되었구나. 졸지에 그냥 죽고 마네” 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스데반 집사님이 속해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반대에 속한 세계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사람을 잡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되면 그만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는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은연중에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들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그렇게 해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서, “너는 어느 세계에 속해있는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은 서로 대치가 되는 두 세계의 경계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정반대가 되는 두 개의 세계를 말이죠.

물론 이 경계선은 스데반 집사님이 처음이 아닌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이전에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는데, 그때 인간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악마가 예수님에게 다가왔다는 말이죠. 그러한 예수님과 악마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고 하니, 보이지 않는 천국과 보이는 이 세상에는 경계선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파악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저쪽에서는 세상의 대표자인 마귀가 마중을 나왔다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다같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경계선이 생기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경계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것을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과 그에게 돌을 던진 자들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경제적인 문제와, 사람들에게 인기를 추구하는 것과,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해서, 그런 모습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아하, 이것이 바로 경계선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 경계선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의 편에 서게 되고, 세상의 인기몰이에 나설 때 그게 마귀의 편에 서게 되고, 이 세상의 영광과 번영을 추구하게 될 때 그게 마귀의 편에 서게 되는, 우리가 그렇게 악마와 한 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목사님, 저는 아무리 살아봐도 그런 경계선이 보이지 않아요. 그냥 한 하늘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는데, 무슨 경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래서 성경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기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것 같지만 말이죠.

하지만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서 한 통속이라고 여겼던 이 세상이, 그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균열이 생기면서 저쪽 편과 이쪽 편이 껍질을 벗겨내듯이, 그렇게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은 참으로 불쌍하다” 라고 하면서 동정심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서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았던 천국과 이 세상의 경계선을, 그때그때마다 상황에 맞추어서 구분하고 있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해서 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죽어도 괜찮은 세계 !!

그렇다고 하면 스데반 집사님의 세계는 무엇입니까?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넉넉한 세계인데,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과는 반대가 되는 세계는 무엇입니까? 죽으면 안 되는 세계인데, 즉 죽음 속에 갇혀있는 세계라는 말이죠. 죽으면 절대로 안 되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가 속한 세계가 죽어도 괜찮은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60절에 나오는데, 자기 경계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보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겁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스데반 집사님은 평소에 자기 목숨에 연연해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인데, 이미 영생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말이죠. 그것이 저쪽 죽음의 세계에서 돌을 던져서 죽이는 순간에 그 내막이 갈라지면서 드러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스데반 집사님에게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일어나도록 인도하고 다니신다는 겁니다. 지금도 역시 그러한데, 예수님을 통해서 악마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서 악마의 세계가 복음을 듣고 이를 간 것처럼, 우리도 역시 주님께서 그렇게 데리고 다니면서, 아무리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미쳐있고 악마의 편이라는 것을, 그러한 정체를 노출시킨다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저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주님, 저에게 그런 것을 시키지 마세요” 라고 사양하면 안 되고, 물론 사양할 수도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스데반 집사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들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인데,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먼저 52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들이 선지자를 핍박하였다 !!

이게 스데반 집사님의 판결문인데, 집사님이 바로 판사라는 겁니다. 그 주위에 있는 자들은 피고들이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함을 어떻게 판결하는고 하니, 그 판결문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준 선지자들을 너희들이 괴롭혔고, 그의 말을 무시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핍박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들이 그런 행세를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는 살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자기도 어떻게 괜찮게 살았다고 하는, 그런 나름 기대한 판결문이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악마에 속한 자들이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란 말이죠.

인간들이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예수님의 일을 가로막은 세 가지의 시험, 즉 돌이 떡이 되게 하고, 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또한 부귀영화를 차지하겠다고 하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자기의 죄를 덮고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 세상의 너무나도 똑똑하게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죠. 선지자들이 그렇게 인간들이 “제발 이것만은 들키지 않았으면” 라고 하는 요소를 들이밀 때, 그들은 이를 갈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선지자를 핍박해도 나는 핍박하지 않을 거야” 라고 장담을 하겠지만, 하지만 막상 선지자가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선지자를 핍박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숨겨진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지자가 감사원 직원이라고 하면, 우리가 잘 포장을 해서 바깥에 내놓은 것은 감사를 하지 않고, 비밀금고에 숨겨진 장부를 찾아내어서 살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니, 어떻게 알았을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선지자들을 핍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주인이 자기 종들을 악한 농부들에게 보낼 때는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아들마저도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선지자를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보냈는데, 그러니 선지자는 어떤 배경을 깔고 이 땅에 왔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열왕기하 1장을 보겠는데,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만나서,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는 장면인데 말이죠.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와 엘리사 !!

이 장면을 보게 되면, 사람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위로 올라갈 수 없는데, 물론 로켓을 타고 올라갈 수는 있지만, 그 로켓도 내려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고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들만 사는 세계에 하늘의 소식을 남기고 소개하는, 그런 기능을 해야하는 자들이 곧 선지자라는 말이죠.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에도 그런 것들이 많은데, 보통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껌벅 죽으면서 극진히 대접을 하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그 산신령은 “이 금도끼가 니 도끼냐? 은도끼가 니 도끼냐? 그냥 평범한 도끼라고? 그러면 세 개를 다 가져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온 천사가 선녀인데, 그런 선녀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잘 해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옷을 감추고 같이 살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이방인들이 조작한 것이고, 실제로 하늘에서 온 선지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그렇게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는 결국 하늘로 다시 귀환하고 만다는 겁니다.

 

아무튼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에 대해서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는 아는데, 그런데 다른 선지 생도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묻는데, “엘리야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갈 때는 두 사람이었는데 올 때는 혼자이니까 말이죠. 그리고 엘리야는 이제 자기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했으니, 당연히 죽어서 땅에 묻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 생도들 : 선지자님, 시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 엘리사 : 그런 것은 없다.

* 생도들 : 에이, 그러지 마시고 좀 가르쳐주세요.

* 엘리사 : 정말로 없어.

* 생도들 :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시체가 있는데, 무슨 말을 하십니까?

* 엘리사 : 정말로 없어. 하늘로 올라갔어.

 

그렇게 해서 실제로 생도들이 사흘 동안이나 50명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는데, 그러면 왜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엘리야가 승천하는 대목에 집어넣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선지자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세상이다” 라는 겁니다.

(왕하 2: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왕하 2:16)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 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왕하 2:17)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 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 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불수레와 돌세례 !!

오늘 본문에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나오는데, 그것을 보고 “참 똑똑하네. 신학공부를 제대로 했구만”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서 죽었지만, 하지만 그것은 엘리야처럼 불수레를 타고 올라가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다만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역할은 엘리야가 맡은 역할이고,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서 하늘로 올라가는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려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한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자동차에 치어서 올라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성도는 이 시대의 선지자인데, 선지자가 죽는 것은 오늘 본문 마지막인 60절에 보면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주무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무시는 것이나, 불수레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나, 그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음을 극복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꼭 불수레를 타야 폼이 나고 신이 납니까? 돌에 맞아도, 그게 신난다는 겁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선지생도 50명은 사흘 동안이나 시체를 찾는데, 엘리야의 시체를 왜 찾습니까? 분명히 없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고 왜 찾느냐는 말이죠. 선지생도가 되어서 율법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했지만, 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서 초월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신학공부를 해서 그저 밥벌이를 할 생각만 한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도 역시 그러한데, 이런 공부가 우리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하늘로 올라가는 불수레로 여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했다고 하면, “당신, 그렇게 설교하면 맞아죽어” 라고 하지 말고, 지금 돌에 맞아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설교내용이 하늘나라의 영생에 관한 것이면 된 것이지, 이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돌에 맞아서 죽던, 혹은 불에 타서 죽던, 그게 바로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일인데, 그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는 겁니다. 자기 위해서 잠옷을 입는데,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울고불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우리가 선지생도 50명이라고 하면, 그러면 엘리야의 시체를 왜 찾습니까? 엘리야의 다가옴이 곧 영생의 나라의 다가옴인 것을 지식으로는 배우고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정말로 엘리야의 다가옴이 생명의 다가옴이라는 것을, 이 세상과의 경계를 짓기 위한 다가옴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에이, 설마 그럴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엘리야가 죽고 난 다음에 시체를 찾았다는 겁니다. “설마 시체가 하늘로 올라갔겠어? 자기가 무슨 천사도 아니고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은 오늘 본문의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본문을 공부하면서도, “설마 스데반 집사님이 하늘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겠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돌에 맞으니 의식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그런 환상을 보았다는 말이죠. 일종의 자기 착각인데, 자기가 너무 그런 예수님을 사모하고 원하다가 보니 그런 환상과 환각에 사로잡힌 것이지,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에 충만해서 말씀을 전하면 이를 갈면서 모독하고, 또한 평소에 스데반 집사님이 “너희가 예수님을 모독하고 죽였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라고 해면, “그것은 그렇지만!” 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이 세상 영광을 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스데반 집사님이 그만 돌에 맞아죽으니, “내가 뭐라고 했노? 몸조심을 좀 하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데 안 되었다” 라고 하면서 슬금슬금 내빼게 되는데, 바로 그런 정신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영생의 세계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스데반 집사님을 측은하게 여길 게 아니라, 오히려 스데반 집사님이 우리를 측은하게 보신다는 겁니다. 진짜로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의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날씨가 좋아야 놀러 가는데,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갈지 몰라도, 저는 안 갈랍니다” 라고 한다면, 죽음이 무서워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그리고 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경계선을 만들고 있는 일에 참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돈보다도 예수님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증거하게 하실 때, 비록 저들은 우리에게 이를 갈고 돌을 던지지만, 그 순간에 주님의 영생의 세계와 이 세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체험을 우리가 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모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우리 속에 마귀가 준 세속적인 욕심이 들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스데반 집사님을 부러워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모습이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만이 우리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12,10 정리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