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주님 자리 잡기(출애굽기 25:8) / 260424 본문
녹취:이하림
광주강의20260424a 출애굽기 25장 8절(주님 자리잡기)-이 근호 목사
『 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30페이지 [13. 민수기 31장 16절에 대해서]. [질문> 민수기 31장 16절에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 것이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 것이라고 하는지요. 이해가 안 가서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질문했죠.
민수기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율법에 해당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빈 공터에 사건이 일어나면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가 됩니다. 율법이 실체라면 역사는 그 실체의 그림자에 해당되죠. 그림자가 단독적으로 그림자 되는 법은 없죠. 뭔가 물건이 있을 때 그 물건에 빛이 투영되게 되면, 어두운 면이 생기죠.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미지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죠. 그러면 그림자 역할을 하는 역사도 그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은 ‘말씀을 빨아 당기는 흡입기’라고 보시면 돼요. 호옵-하고 빨아들이면 그 말씀이 예수님 쪽으로 다 빨려오죠. 거기에 율법도 포함되어 있고 율법으로 야기된 역사마저 예수님 쪽으로 오니까, 예수님이 서 계신다면 거기에 그림자가 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유발한 역사,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발생된 역사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같은 데 보면 그런 면이 역사 속에 제대로 나타나있는데, 열왕기상 1장에 보면 다윗이 죽어요. 죽고 난 뒤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되는데, 그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열왕기상 1장 볼게요. 다윗이 살아있을 때 밧세바가 상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조용하게 아무 일 없이… 역사란 사건이 이어지는 거죠. 사건이 없을 것 같으면 밧세바도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돼요.
그런데 아도니야라는 사람이 self 왕이 되죠. 아도니야가 셀프 왕이 되면서 여기서 밧세바가 어떤 위기감을 느껴요. 1장 21절에 보면 “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 열조와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 죄인이 되리라. 권력을 가지게 되면 권력을 권력답게 부각하는 방법은? 자기에게 견제되는, 라이벌 되는 것을 뭐로 몰아세우겠습니까? 죄인으로 몰아세우겠죠. 밧세바의 관심사는 그겁니다.
그러나 우리 상식으로서는 죄라는 것은 율법에 위반될 때 죄잖아요. 그러나 율법에 위반되는 것이 죄라고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그런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에서 배제당하면 죄인이다’라는 것이 정치판의, 선과 악의 구분이겠죠. 그게 율법에 대한 인간 인식의 한계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죠. 전부다 하나님, 하나님 찾지만 사실은 실질적으로 하나님 빠지고 당장 인간이 느끼는 것은 ‘저 인간이 나에게, 나는 저 인간에게’. 그냥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서 모든 현실, 진리 같은 것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으로 역사, 현실이 이루어지는데, 인간들은 율법이고 뭐고 간에 없고 ‘인간과 인간의 투쟁에 의해 이 현실은 그런 식으로 구성된다.’ 이걸 철석같이 믿어요.
그런데 오늘 이 민수기의 질문과 관련해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율법을 누가 가지고 왔죠. 율법 가지고 온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5경에서. 모세가 가져왔잖아요. 그러면 모세라는 인물과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뭐냐? 모세에게는 뭐가 짊어져있는가? 쌀 포대를 자기 어깨에 얹어 짊어지듯이 율법,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죠, 율법을 얹고 온 존재가 모세에요.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빈손으로 내려온 게 아니에요. 두 돌판을 들고 왔잖아요. 그리고 그냥 돌판만이 다가 아니고 시내산에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알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내려왔죠. 그러면 모세 존재는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어 있어 변화하는 역사에 속한 인물이 아니고, 이미 고정되고 확정된 말씀을 얹고, 자기 존재에다 말씀을 얹고 나타난 존재가 모세 존재죠.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이래야 돼요. 성도가 말씀이 자기 어깨에 얹어지지 않으면 그냥 맨날 같은 인간하고 싸워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예를 들면, 말도 안 되는 예지만 모세가 중학생이라 합시다. 중학교 입학했는데 거기에 일진이든 뭐 학교 자체적인 폭력배가 모세보고 시비걸 때, 뭐 돈 내놔라, 빵 사오라, 담배 사와라 할 때, 모세가 고분고분 듣겠습니까? 아니면 그 말에 대해서 무시하겠습니까? 무시하죠.
왜냐하면 율법을 짊어지고 있으니까요. ‘너 내 말 잘 들으면 앞으로 네 학교생활 편하다.’ 이건 어떤 변화의 여지가 있잖아요. ‘잘하면, 내 말 잘 들으면, 이 권력에 복종하면 너는 편하게 학교생활하고 너 괴롭히는 애는 우리가 대신 커버해줄게.’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의 운명은 뭡니까? 말씀으로 이미 확정되었죠. 그냥 말로만 확정된 게 아니고, 그 말씀이 모세를 짓누르고 있죠. 짓누르고 있다고요. 말씀이 가는대로 같이 이동하고 있죠. 이동을 하든 뭐하든 고정된 것은 맞잖아요. 확정되고 고정되어 있잖아요.
따라서 여기서 밧세바가 아직 현실파악이 어둡다고 볼 수 있어요. 밧세바는 남편 다윗과 혼인은 했지만, 다윗언약에 대해서는 감각이 별로 없어요, 감각이. 그저 ‘능력 있는 남편 그늘아래 있으면 나는 안전빵이다.’ 이렇게 생각했지, ‘남편이 받은 다윗언약 안에서 우리는 안정되다.’는 그런 인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셀프 왕 되었다 하니까 밧세바는 이미 권력투쟁에 들어갔다고 생각해서 어쩔 줄을 모르죠. 그래서 늙어 죽어가는 다윗 붙들고 이제는 바가지를 긁어요. ‘뭐하냐? 분명히 정신 멀쩡할 때 우리 솔로몬이 왕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도니야가 지금 왕 되어서 백성들이 따르고 있다.’ 만세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27절에도 그런 이야기 나와요. 나단이 들어와서 나단도 같이 거기에 합세해가지고 “이것이 내 주 왕의 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밧세바가 나단 선지자와 독촉을 하고 제사장 사독도 나오고 하는 그 뒤의 이야기를 여러분 대략 아시잖아요. 이미 왕이 된 아도니야가 있는데, 따로 다윗이 마지막 죽을 힘을 내서 사독 불러서 솔로몬을 정식 왕이 되게 해요. 왕이 되어서 노새 태워 만세를 부르니까 이번에는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아도니야 쪽에서 정치적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왕기상 1장을 보면서 언약은 간 데도 없고 언약을 받았다고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영웅시되어 있는 상징적 존재 다윗이 무슨 말을 하느냐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뭡니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그냥 역사, 이 현실, 그것이 온 몸에 와닿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언약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시큰둥하고 그걸 별로 믿지도 않습니다.
이 비슷한 예가, 약간 고차원 예지만,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죠. 10장 9절에,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기도하고 있는데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잡아먹으라. 이거 하나님의 말씀이죠. “잡아먹으라.” 그런데 베드로가 “고맙습니다. 배고픈데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릇 안에 뭐가 들었다는 것을 미리 봤어요. 그래서 14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지금껏 내가 율법 하나, 주님의 명령 하나는 절대적으로 귀한 것으로 여겨서 제가 율법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떤 것도 타협 없이 지켰습니다. 보니까 못 먹게 되어 있는 거라 못 먹겠습니다.’ 결국 이걸 한마디로 하면 ‘의심’이죠, 의심. 의심을 한다는 것, 베드로가 하나님이 지시했는데 의심을 한다는 것은 지금 뭐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모세 같은 경우에, 율법이 주가 되고 모세는 율법의 종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누가 주인이에요? 본인의 구원, 본인의 영생, 천국 가기가 주가 되고 율법은 보조가 되어버렸죠. 그래서 발생된 것이 의심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믿음이 있는가 시험해보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내 안에서 어느새 나의 믿음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에요. 주님이 주신 믿음이 내 믿음이 되는 것은… 주님의 믿음이 오면 오히려 누구 믿음을 포기해야 돼요? 내 믿음을 포기하고 내 믿음과 바꿔치기가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믿음이 오니까 거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나 믿습니다.’를 가지고 마중 나가는 거예요. ‘나 믿습니다. 나 주의 말씀 믿습니다.’로 마중을 나가니까 주님 보시기에 그게 버리운 자에요. 그게 버리운 거예요.
“너 이 성경지식, 이 율법지식을 제대로 믿나?”
“믿습니다! 내가 자신만만합니다. 믿습니다.”
“이 지식을 네가 믿나?”
“믿습니다.”
“그런데 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믿느냐?”
“그거는… 잘 모르겠는데요? 내 안은 내가 주인공이라서 나로 꽉 찼는데요.”
내 안에 나로 꽉 찬 것이 방어본능인데,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 복음 지식으로 꽉 찼다는 말은 이게 무기가 돼요. 누구를 상대하려고 무기를 만드는 거예요? 남하고 말할 때, 남을 만날 때, 내가 남들한테 믿는 자로 보이기 위해서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모든 지식을 확보하려고 하는 거죠. 이것은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자기가 더욱 공고히 된 거죠. 강화되었죠. 강화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나 말을 보면 불안불안해요. 굉장히 안정감이 없이 초조감을 느낀다 할까요? 그런 것은 제 느낌이니까 무시해도 돼요. 제 느낌은 늘 틀리니까. 왜 초조감이 느껴지냐 하면 늘 방어하고 변명할 마음태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서에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고립감’.
‘세상은 내 마음을 못 알아줘. 내 아픔을 세상은 안 알아줘.’ 이거 지금 누구 상대하는 거예요? 내가 누굴 상대한다? 나란 인간이 누굴 상대한다? 인간에게 늘 속으로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대사,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닙니다!’ 동서끼리 싸울 때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과수원 다 말아먹어놓고 이걸 또 탐냅니까?’
사람들이 다가오거나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방어본능부터 먼저 예민하게 작동을 해요. 내 거 뺏어갈까 싶어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죠. 뭐 더 빼앗길 게 있어요? 강남강의에서도, 지킬 게 있느냐고 제가 물었잖아요. 지킬 게 있느냐고. 아직도 지킬 게 있어요? 지킬 게 있다는 말은 내 평소의 기쁨은 주님의 말씀의 완성이 나를 덮어씌우는 게 기쁨이 아니고, ‘이것은 내 거야.’라는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문 콱 닫아버리고 안에서 잠가버린 채 자처해서 고립감에 속하면서 철저한 자기 봉쇄인 거죠.
자기 봉쇄에 대해서, 문에 달린 조그만 문 있잖아요. 작은 문으로 빼꼼히 보고 ‘어디서 오셨습니까? 왜 오셨습니까?’ 이 문장을 다시 쓰겠는데요. 내가 쓰면서도 지겹다, 정말. 너무 많이 써서. 그러나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또 쓰겠어요. ‘네가 뭔데 나한테 말을 걸지?’ 왜? 말을 거는 노림수가 뭐야? 이유가 뭐냐? 뭐 때문에 나한테 말 거는데?
“이란하고 미국하고 전쟁한다. 전쟁하는데…”
“전쟁하고 말고, 그 말을 왜 나한테 하는데? 왜 말을 거는데? 이란과 미국의 전쟁이 옳다, 그르다 문제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북한이 뭘 어떻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 진짜 중요하고 진지한 진리는, 네가 왜 나한테 말 거는데? 우리 얼굴 보지 말자. 뭘 부탁하려고 말을 거노? 뭘 부탁하려고?”
“이란이… 아휴, 미국 어떻게 되는가?”
“돈 없다.” 선수 쳐버리는 거예요. “빌려줄 돈 없다.”
세상 관계가 돈과 돈 관계 외에, 돈과 돈 관계보다 절박한 게 어디 있어요? 무슨 말을 할 때는…
“아이고, 머리 잘 나왔네요.”
“돈 없다. 돈 없단 말이야. 돈 없어. 빌려줄 돈 없어! 나도 나 먹을 거 없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머리가 잘 나왔다고요.”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어. 위선 떨지 마. 내가 다 알아. 너 나한테 돈 빌리러 왔지?”
네가 뭔데 나한테 왜 말을 걸어?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수십 년 시달린 사람들이에요. 아시죠? 공직에 있는 사람, 교사. 학부모 찾아왔다. 왜? 애가 죽든 말든 얻어터지든 나한테 맡기지, 왜 오는데? 부모가 학교에 왜 오는데? 학교 찾아오면 겁이 덜컥 나요. 그렇죠? 학교 와서 선생님보고 하는 말이,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그 이야기하러 온 거예요. ‘하늘나라 갈 때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그 이야기하러 온 거예요.
성경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기본이 버리운 자에요, 인간은. 인간은 버림받은 자에요. 버리운 자에요. 중립지역에 인간은 있지 않아요. ‘내가 천국을 선택할까, 지옥을 선택할까? 어느 쪽을 선택할까?’ 그것은 자기가 버리웠다는 것에 대해서 지금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중립이 아니고 중성도 아니고 이미 버리운 자에요.
그러면 뭐하면 돼요? ‘아, 나 버려졌구나.’ 이게 믿음이잖아요! 이게 믿음이라면 그다음부터는 사람 대 사람과 변명하거나 봉쇄하거나 의도적으로 그 사람과 다툴 하등의 이유가 없죠. “이란과 미국이 한참 전쟁하고 있지요.” “예. 그런데 돈 없어요, 나. 빌려줄 돈 없어. 당신한테 빌려줄 돈 없다고.”
인간의 고립감이 내부적으로 모순되어 있어요. 안 찾아오면 외롭고 찾아오면 짐 되고 그런 거거든요. 이 고립감의 반대말이 뭐냐? 고립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뭐냐? ‘거저 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는 것’이에요. 거저 주신 은혜가 뭐에요? 햇빛, 달빛, 그리고 비, 목숨, 호흡 전부다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겁니까? 거저 준 거죠, 거저.
거저 주신 것을 잃어버리니까 인간은 고립감에 함몰되어버리죠. ‘내가 이렇게 외로운 걸 아무도 못 알아준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선물 이-만큼 받고 있으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이야기합니다. 시내산에서 왔던 모세는 다른 민족이 아니고… 말씀, 율법을 받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특별한 율법 담을 그릇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버렸잖아요. 그릇을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여기 민수기 31장에 왜 이 사람은 살려두고 저 사람은 살려두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에 정확한 정답은 이렇습니다. 다 죽여야 돼요. 다 죽이는데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을 따로 남겼다는 말은 율법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이동 중이라는 거죠.
지난 사건 말고 새로운 사건-새로운 사건이란 전쟁사건- 전쟁사건을 통해서 이방민족을 전리품으로 했을 때의 처리과정이 점점 더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그 특징이 뭐냐? 처음에는 모든 백성을 다 죽이라 하잖아요. 다윗언약에 이동해 와서는 어떻게 되나? ‘왕을 죽여라’입니다. 왕을 죽여라.
그리고 신약에 오면 ‘짐승을 잡아라.’ 결국 그 모든 말씀은 어디를 표적으로 노립니까? 옛 뱀. 용. 악마. 악마를 노리는 쪽으로 말씀이 진행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자신의 진공청소기, 흡입기로 확 빨아들이는 거예요. 악마 대 예수님, 일대 일로 붙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싸운다는 약속의 일관성 때문에. 나머지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거예요. 나머지는 인간과 인간끼리 싸우고 있어요, 누가 잘났는지.
신약에서 예수님만이 마귀와 싸운다 하는 것을 구약에서 미리 낌새로 바알 종교, 우상숭배를 통해 모형적으로 미리미리 예고편, 맛을 보여주고 온 거예요. ‘여호와 말고 바알 섬기면 너희는 혼난다.’라는 것을 약간씩 보여줬어요.
그래서 역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모르니까 그들은 여호와만 믿고 우리는 바알 종교 안 믿으면 복 받을 줄 알았어요. 그 오해가 요한복음 5장 46절에 나옵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의 모세에 대한 오해죠.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45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를 하나님 여호와께 고소하는 게 아니죠. 누구한테 입니까? “내가 너희를 (예수님의)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는 이미 예수님 자신 편이지, 너희들 편이 아니다. 모세를 신봉하는 너희가 모세의 적이다.
왜? 존재 자체가 율법을 지킬 생각하지 말고, 율법이라는 산사태가 임해서 거기에 파묻히면 되잖아요. 율법에 파묻히면… 거북이 위에 큰 눈사태가 오게 되면, 얼른 보면 거북이는 안 보이고 뭐가 움직여요, 조금씩? 눈 덩어리가 움직이죠. 그것처럼 그렇게 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덮여있는 그 율법을 누가 빨아 당긴다고요? 예수님이 빨아 당겼죠. 그게 사도 바울이 말한 예수 안에서 사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살고 나는 그 밑에 깔려 살고. 그런데 신약에 성령이 오셔서 그렇게 된 과정 속에서 요한복음 5장에 반드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의 현실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인식관을 우리도 같이 겪어야 돼요.
겪는 방법에 대해서 일단 간단한 문장으로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수학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간단한 문장은 ‘사유의 외재성’. 생각하는 것은 바깥의 힘에 의해서 생각해야 된다. 이 반대말이 뭐냐 하면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에요. 소위 인텔리전스(intelligence)라 해요.
바리새인들이 이거 한 거예요. 헬라어, 히브리어 분석하고 율법을 통해서 뭘 뽑아내는 거예요? 마치 원석에서 필요한 광물을 뽑아내듯이 율법을 가지고 거기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뽑아내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사유의 외재성이에요, 내재성이에요? 사유의 내재성이 되겠죠. 그러나 사유는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1장에 ‘이 세상 지혜로서는 십자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내용이죠.
그 원인이 뭐냐? 주지주의가 신학의 발전 아닙니까. 신학의 발달사, 구약성경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스스로 견해를 달리 하면서 더 납득이 되고 이성적으로 인정이 되는 것을 가지고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학문을 갈고 닦았던 거예요. 결국 이것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인 거예요.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하는데, 제발 사람을 만나되 사람을 상대하지 마세요. 만나긴 만나는데 상대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과 상대하기 바쁘기 때문에, 성도는. 이걸 수학적으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말씀드릴게요.
y=x²-4=0이라는 방정식의 해를 구할 때, y=x²-4의 포물선 그래프가 y=0과 만나는 두 지점인 x=2, -2이 해(解, solution)가 되는 겁니다. x=+2, x=-2 이게 해답이 되거든요. y=0인 선과 만나죠, 두 지점이.

왜 두 지점을 언급해야 되느냐? 무엇 때문인가?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여기서 지식이 나오죠. 이 지식가지고 하늘나라 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성향, 성격이 계속 유효하게 흐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만나니까 인간1, 인간2. 그런데 인간을 안 만나면 고립감에 빠지죠.
‘아니야, 내가 지식으로 알려고 하면 내가 아는 건 한계가 있어. 책에는 뭐라고 되어 있지? 다른 전문가는 뭐라고 이야기했지?’ 책과 유튜브 등을 보면서 누구와 만나야 돼요? 다른 사람과 만나야 되잖아요, 나한테 유용한. 율법을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고, 나는 나를 믿으니까 내게 필요한 것을 내가 골라 채택하는 방법이 인간 문명, 지식의 발달과정이에요. 과학도 그렇고 수학도 마찬가지고.
f(x). function이에요. ‘괄호 안에 들어있는 x의 변화로 인하여 funtion, 기능이 달라진다.’ 수학에서 이것을 함수(函數)라고 해요.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는 기능들이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는 거예요. 이게 함수에요.
함수를 f(x)=x²-4라고 했다는 말은, x값에 따라 어떤 기능이 있는가 규칙을 한번 세워보자는 거예요. 그 규칙의 자국, 한땀 한땀 먹물을 찍어보면 위 그림처럼 포물선 그래프가 생기는 거예요. f(x)=x²-4 그래프에서 이 원칙(f(x)=x²-4=0, 즉 y=0)에 있는 자들의 해는 반드시 x=+2,-2가 된다고 수학에서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사람 대 사람이잖아요. 단독이 아니고, 혼자 소주 까먹고 이불 속에서 자기가 상상한 게 아니고, 사회에 나가서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지식을 확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가만있는데 저쪽에서도 가만있다.’ 이런 게 있습니까? ‘나 가만있으니까 너 움직이지 마.’ 이렇습니까? 아니잖아요.
저쪽에서 움직인다. 그럼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나도 가만있어야 돼요, 움직여야 돼요? 같이 보조를 맞춰주고 무슨 의견을 드러내고 당신이 한 것에 대해서 싫다, 좋다 무슨 반응을 나타내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상대성이 있으니까 하나만 이야기하지 말고 둘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둘을 이야기할 때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u함수에요. x와 y, 이 둘을 변수로 하는 u함수가 있다면, x값이 변함에 따라 (y값은 고정) u함수값(u(x))이 변하겠죠. 아까 단독이 아니고 하나 더 있다고 했으니까 -3개, 4개도 있는데 그것은 너무 복잡해서 안 되고 지금 간추려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y값이 변함에 따라 (x값은 고정) u함수값(u(y))이 변하겠죠. y=3이라면 u(3)=8이 되고, y=6이라면 u(6)=16이 되고 뭐 왔다갔다 하겠죠.
이 둘을 합쳐보자. 둘을 합쳐보면,

d: 미분. differential. 극소변화량.
du란 극소변화량으로 변화를 계속 잘게 좁혀보는 거예요. 극소량의 변화를 알아내면 큰 범위의 변화를 알아내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지금 종로학원에 왔어요.
∂: 편미분 기호. partial. 다변수 함수에서 한 변수만 미분하고 나머지 변수는 상수로 취급하는 미분. ∂u/∂x는 y를 고정한 채 x에 대해 미분한 값이며, ∂u/∂y는 x를 고정한 채 y에 대해 미분한 값.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아내가 남편한테 “당신 왜 늦게 왔어?” 시비 거는데, 남편이 뭐라고 하느냐? “내 친구 알지? 그 친구 만났어.” 그 친구 만나서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갑자기 둘 요소에 뭐가 포함되었어요? 친구까지 들어오잖아요. 그럼 진짜 맞는가 친구한테 전화하겠죠. 그러면 요소가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남편만 관리하면 되는데 남편의 친구까지 연결되잖아요. 그게 이 세상의 복잡성을 만드는 거예요.
이제 이 수학을 아시겠습니까? 더하기 하는 거예요, 더하기. 나는 남편만 관리하면 되는데, 남편의 친구까지 관리함으로써 복잡해지는 거예요.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져요. 복잡해진 그것을 더 잘게 쪼개야 분명하게 변화량이 나오니까 쪼개는 거예요. 쪼개는데 이렇게 수식으로 하면 잘 모르니까 이걸 그림으로 한번 그려볼게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돼요.

x축, y축이 있고 수직적으로는 u축이 있습니다. u=x²+y² 그래프를 입체적으로 그리면 사발 또는 바가지 모양이거든요.
이 사발이 복잡하니까 뒤집어보는 거예요. 설명하기 편하게 변형시켜볼게요.

u축에 마이너스를 붙여 함수를 반전시키면, -u=x²+y²이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이야기 다 끝나갑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하느냐 하는데, 조금 기다려보세요.
이 그래프가 약간 올라와 있도록 u축으로 1만큼 평행이동 시켜보면 -(u-1)=x²+y²

올리고 난 뒤에 이것을 0으로 두는 거예요. -(u-1)=x²+y²=0. 이제 다 왔습니다. 다 왔어요. 이제부터 빨리 다른 것 합시다, 하시는데 다른 것 합니다. 기다리세요. 이거 한 1분도 안 걸려요. 뒤집어진 이 그래프가 0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x축, y축으로 움직일 때 u값을 0으로 고정시킨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결국은 옆으로 움직여도 높이가 변하지 않는 x,y의 순서쌍(방정식의 해)을 찾아내라는 뜻이고요. 이것을 그래프 모양으로 나타내면, 서양에서 중세 때 가운데 머리는 대머리로 비우고 옆머리만 짧게 깎아놓은 형태 있잖아요, 그런 타원형의 선이 나와요.

그러니까 ‘x, y 어떤 인간도 이 선을 넘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이야기하려고 미분방정식까지 동원한 거예요. 미분방정식이 하나가 아니라 쌍으로 해서 복잡성을 표현한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인간들 일은 넘어서면 안 되는 제로 지점이 있는 거예요.
시내산 올라갈 때, 누구만 올라갔어요? 모세만 올라갔죠. 모세가 인간들 지점의 삶에서 어디로 올라갔어요? 하나님만 계시는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모세는 기존의 인간형은 끝나죠. 기존의 인간형은 아닌 거예요. 벌써 구약 때부터 성도라 하는 것은 그냥 보통 인간이 아니고 특수한 인간이에요.
보통 인간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인간 대 인간이죠. ‘네가 말 잘하면 내가 곱게 해주지.’ 이건 무슨 관계에요? x, y가 밀고 당기는 관계에요. 내 중심으로 봤을 때, 네가 어떻게 보느냐? 이게 understand 아닙니까. ‘남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어떻게 보이느냐? y 중심일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돼? 그럼 내가 옳다고 할 때, 남들이 어떻게 나와줘야 기분이 좋아?’
전부다 모든 관계는 나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방정식이잖아요, 방정식. 방정식을 이렇게 도입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기가 x라면, x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주변의 변화를 살펴서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 내 자존심을 높이느냐 낮추느냐, 그런 식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말을 왜 나한테 그따위로 하느냐?’ 이거 누구 중심이에요? ‘나는 잘났단 말이야. 나는 고정됐단 말이야. 나 건드리면 안돼. 나는 딱 싫어.’ 그럼 그쪽에서 하는 말이 ‘너는 내 생각 안 하나?’ 이게 뭐냐 하면 미분방정식이잖아요. x, y의 관계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x, y가 하나님 보시기에 equal(=) 0가 되죠.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전부다 버림받아야 마땅한 것들이. 하나님보고 내 편 되어달라고? 누구 편 되라고? 그런 건 없어요.
특히 여기 질문 가운데서 민수기 31장 16절에 보면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뭐했어요? 범죄했죠. 범죄의 결과가 뭡니까? 남자는 다 죽이게 되어 있죠.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방민족에서 범죄하면 안 죽여요. 그런데 어느 지점에 와 있을 때 죽여야 돼요? 하나님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 왔을 때 어떤 인간도 범죄하면 죽이죠.
어떤 인간이 범죄한 것이 상식적으로 양심적으로 범죄한 거예요, 율법에 위반해서 범죄한 거예요? 율법에 위반해서 범죄한 거죠. 율법은 누구한테만 주어졌습니까? 이스라엘한테만 주어졌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전쟁할 때, 그리고 내부적으로 지적할 때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죽는 죽음은 일반 사람들이 늙어죽는 것하고 달라요. 그들이 살인죄, 간음죄해서 죽는 것하고 차원이 달라요.
율법적으로 물어요, 율법적으로. 율법적으로 묻는다고요. 이게 특수성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잖아요. 특수성에 입각해서, 그 특수성은 누가 준 율법이다? 모세를 통해서 왔잖아요. 모세가 율법을 뒤집어쓰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고 그 안에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율법을 주니까 거기 나타난 역사는 내 중심만 따지는 이방민족들은 도저히 납득하고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그러한 현실적인 결과가 이스라엘 역사라는 계시의 이름으로 예수님까지 계속해서 진격하고 있더라 이 말이죠.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모세 존재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누구 존재가 중요해요? 너, 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같은 범죄를 해도 같이 죽어도 그 죽음의 질이 달라요. 그냥 숨 끊어지는 죽음 말고, 너는 지옥 갈 방향, 너는 천국 갈 방향.
죽기야 누구나 다 죽으니까 그게 뭐 문제겠어요. 죽더라도 죽고 안 죽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어느 방향으로 지금 가고 있느냐?’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맞닥뜨릴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강의 중 그래프 등은 첨부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광주강의20260424b 출애굽기 25장 8절(주님 자리잡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5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그렇게 되어 있죠.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에 다들 바빠요. 모든 시간은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활용해서 더 많은 수입을 얻는가,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몰두해야 되고요. 자투리 시간 내서 취미로 성경보고 교회 나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삶이잖아요. 성경이야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뭐 그런 내용이겠죠.
그럼 내가 묻죠. “무슨 일을 하셨는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고 제대로 말씀대로 잘 살면 네가 복 받고 또 말씀대로 잘 사는 게 인간 된 도리다, 뭐 그런 이야기잖아.”라고 할 때, 출애굽기 25장 8절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한다.
이게 인간이 원했던 거예요? 누가 오라 했습니까? 인간들이 하나님 보고 싶다고 초빙했어요? 호텔에 자리 마련해놓고 거기 오시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그럼 누가 거하겠다는 거예요? 누구 의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거하겠다고 했잖아요. 인간들은 돈 벌기 바쁜데? 지금 애 키우느라 바쁜데? 하나님 안 챙겨도 지금 다른 고민거리가 많아요. 몸의 건강문제, 뭐 여러 가지가 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것 다 생각 안하고 일방적으로 오신대요. 서울에 있는 아들 집에 며느리랑 둘 다 맞벌이하느라 바쁜데, 일방적으로 촌에 있는 시어머니가 “야야, 나 몇 일에 간다. 너네 비밀번호 뭐고?” 아차, 비밀번호는 하나님이 정하지. 그냥 서울에 오신대요. 너희 집에 내가 거할 곳을 일방적으로 확정하고 쳐들어간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나님이에요.
방금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누구를 부릅니까?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를 부를 때 연결고리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모세를 불렀던 거예요. 그런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테 내가 너희들 중에 거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없었다고요.
하나님께서는 그저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그 내력, 그러한 이야기만 하셨지, ‘나 너희 집에 간다. 너희 있는 곳에 내 집을 만들겠다.’ 이것은 모세 때 처음이었습니다, 모세 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쳐라 이야기했지만, 내가 있을 곳이라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모세를 불러서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나라 있지도 않았는데 모세를 통해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오시기 위해서 모세한테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거예요. 시스템에는 정보가 있어야 돼요. 정보가 있는데 이 정보가 이스라엘 모든 민족까지 파급되어야 돼요.
여러분, 컴퓨터 사면 컴퓨터 기계만 덜렁 줍니까? 컴퓨터 사서 부팅하고 켜면 컴퓨터 내에 돌아가는 기본 운용체제가 있죠. 이스라엘은 밥 먹고 살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땅에 거하겠다는 하나님을 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에 참여된 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다윗 때는 이것을 ‘성전’이라 하죠. 고린도전서 6장에서 오늘날 성전은 어디라 했습니까?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19절)
어때요? 하나님의 고집이 한결같죠. ‘나 너의 더러운 몸속에 산다.’ 이 취지가 지금도 요지부동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더러운 걸 깨끗케 해서 집에 모실까요? 촌에서 손님 오면 윙- 청소해서 모실까요? 어떻게 할까요?
주님의 거룩이 들어오게 되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수요일에 제가 이야기했던 것은 빌립보서 3장 8절, ‘배설물’. 배설물로 튀어나오는 게 있는데, 주님은 아담이잖아요. 마지막 아담, 거룩한 아담. 주님이 들어오면 바깥에 자동적으로 쫓겨나가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그게 뭐겠습니까? 옛 아담.
새로운 아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새로운 아담의 일부가 된다면 그로 인하여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하는 게 옛 아담이에요. 옛 아담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육신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육신이 포함되어 있어요.
피부 속에서 새 피부가 올라오게 되면 무엇은 마땅히 뜯겨져 나가야 돼요? 옛날 노화된 피부는 뜯겨져 나가야 되잖아요. 그게 울며 슬퍼할 일입니까? 네? ‘아이고, 아까워라. 내 딱지.’ 이럽니까? 발톱에 무좀 걸렸을 때 무좀 낫는 과정이 뭡니까? 옛날 발톱은 뜯겨져 나가고 새 발톱이 안에서 살아나잖아요. 그거 보고 막 기뻐해야 돼요, 안 그러면 울어야 됩니까?
기뻐해야 되잖아요. 어떤 기쁨이에요? 내가 몰랐던 나의 죄가 들추어지는 것에 대해서 ‘야호! 감사합니다!’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되죠. 그런데 왜 그걸 사람들이 안 기뻐하죠? 아까 미분방정식 동원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내 죄가 노출되는 것을 왜 안 기뻐해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문제가 좀 어렵습니까? 그럼 후딱 답변해야죠.
인간의 시선과 눈치와 코치를 보면서 평생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내 자체가 해체되고 뜯겨져 나가면 ‘저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비아냥대고 놀리고 조롱하겠는가?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내가 어떤 대단한 존재인데. 나 싫어!’ 이렇게 되죠. ‘나 살고 싶어.’ 그런데 주님께서는 범죄하면 우상 섬기면 죽는다잖아요.
언약궤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언약궤라 하는 것은… 모세가 와서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가 성막이에요. 그런데 성막 가운데 더 국소적으로 한 지점을 딱 집어서 거기서 만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 그 장소가 언약궤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불기둥, 구름기둥 일어났잖아요. 일어난 지점이 어디일까요? 그게 민수기 10장에 나와요(33-36절). ‘언약궤가 움직이면 너희들도 나 따라와야 돼.’ 이 말이거든요. 언약궤 움직이는 그 지점에서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이 피어오릅니다.
그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실 분이 있을 거예요. ‘야, 이스라엘 백성 정말 좋겠다.’ 왜? 초자연적인 현상이 항상 있었잖아요. 새벽에 나가면 만나가 떨어져 있죠. 이게 초자연적 현상이잖아요. 자기가 노동하지 않았는데 양식이 주어졌고. 그리고 옮길 때는 성막 쪽에서 불기둥, 구름기둥 피어나니까 ‘야, 그들의 신앙은 거저먹기네.’ 이렇게 되겠죠.
주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그들 눈에 보이는 식으로 인도했는데 과연 그들이 늘 찬양하고 기뻐했습니까, 아니면 원망했습니까? 원망했죠. 그 이야기를 지금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14.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튀어나왔는가]와 질문의 취지가 똑같은 거예요. 그다음에 [15.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혼인]. 15번 질문, 14번 질문, 아까 처음 했던 13번 질문 전부다 질문하는 취지 자체가 이거에요. ‘구약 사람들은 참 좋겠다. 기적을 눈으로 보기 때문에 참 좋겠다.’ 했어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나중에 나온 포도주 있잖아요. 물이 포도주 된 그 포도주를 마실 때, 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까? 물이 포도주 된 것 보고 기뻐했습니까, 아니면 포도주 맛이 좋다고 기뻐했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포도주 맛이 좋다고 기뻐했죠.
만약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처음에 있던 포도주와 똑같다면 기뻐했겠어요, 안 기뻐했겠어요? 안 기뻐했겠죠. 보세요. 인간은 모든 결정과 가치와 의미를 누가 정해요? 자기가 대대로 느껴왔던 육신, 아담의 몸에서 이 책에 있는 질문, 질문, 질문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아담의 몸에서.
‘보고 믿겠습니다. 이스라엘 좋겠다. 왜? 초자연적인 현상을 봤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보여주면 믿지 말래도 믿겠어요.’ 이런 거 있잖아요.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그다음부터 예수님 죽을 때 따라갔습니까? 안 따라갔죠. 왜요? 왜 그런 거예요? 물 위를 걷게 해줬으면 이제는 정신 차려서 주님 십자가 질 때 ‘아이고, 물 위를 걷게 하신 분인데 다 무슨 대책이 있겠지.’ 이런 생각이 왜 안 드는 거예요?
‘사유(생각)는 아담의 생각과 몸에 짓눌려있다.’ 나의 지금 하고 있는 아담의 생각과 몸에 짓눌려있어요. 아담은 마귀와 결탁되었죠. 결탁됐기 때문에 아담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아담이 물려준 육신과 그 생각으로는 뭔가 무서운 게 있어요. 뭐가 무섭습니까? ‘죽을까봐’. 정답 맞죠? 죽을까봐 무섭죠. 그걸 달리 하겠어요. 같은 뜻인데 말장난은 아니지만 ‘살지 못할까봐’. 뉘앙스가 달라요, 뉘앙스가.
‘아이고, 죽을까봐? 믿음이 있는데 그리 용기가 없나? 예수님 사랑하는데, 예수님 오시면 천국 가는데 죽지.’ 이건 쉬워요. 죽는 것은 쉬운데, 살지 못하는 것은? 똑같은 말인데 살지 못하는 것은 안 쉬워요.
경남하고 경북 사투리가 조금 달라요. 경남 부산 쪽에서 ‘서울대학교’ 발음하라고 하면 ‘서울↗대학교’ 이렇게 한다고요. 경북 대구는 ‘서울↘대학교’.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둘 다 경상도네.’ 글로 쓰면 똑같은데 뉘앙스가 다르죠.
죽는 것은, 안중근도 죽는 걸 겁 안냈어요. 이상하게 죽게 되면 용기를 낸다고요. 그러나 죽는 것은 안 무서운데 살지 못할까봐 무서워요. 이게 지금 말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애가 아직 안 컸잖아. 시집을 안 갔잖아. 장가 안 갔고. 내가 필요하다니까. 이 어미가 필요하다고.
제 말은 인간이 아담의 몸과 신체, 그리고 아담이 갖고 있던 정신을 이어받는 입장에서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감당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쳐들어와서 너희들 속에 내가 거할 곳을 내가 친히 장만하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나타난 게 뭐냐? 언약궤였어요.
그 언약궤 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번-계속 있다, 2번-도중에 불탔다. 몇 번 입니까? 언약궤가 불타버리고 없어요. 성전 불탈 때 언약궤도 같이 불타버렸어요. 뭐 전설에 의하면 빼돌려서 현재 예루살렘에 있다 하는데요. 있겠죠, 가짜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불타버려요. 오늘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대목을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언약궤가 불타면 시간과 공간도 같이 불탑니다. 없어져요. 왜냐하면 언약궤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잖아요.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요 오메가에요. 시작과 끝이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거기서 꽉 붙잡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의 절기는 어디서 나오겠어요? 언약궤의 취지를 시간적으로 보여주고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절기입니다.
열왕기상 8장을 볼게요. 열왕기상 8장에 보면 46절,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해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모든 인간은 범죄하는 거예요.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이 언약궤를 향하여 기도하면(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49절,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분명히 되어 있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솔로몬도 알고 그 뒤의 왕들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언약궤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까지 피었으니까 이 원칙을 안다고요.
그러면 왜 그들은 나라가 망했습니까? 용서한다면서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그쪽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면서요? 범죄하지 않는 인간이 없으니까. 범죄할 때마다 언약궤를 향하여 기도하면 용서를 해주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들은 용서받지 못했지요? 어렵고 안 어렵고를 떠나서 이건 중요한 문제에요.
이스라엘 망했잖아요. 언약궤 있으면 안 망해야 되잖아요. 안 망해야 돼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 이걸 보는 모든 인간도 그렇게 생각하고. 46절 다시 봅시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했을 때에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준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왜 그들은 망했냐 이 말입니다, 제 질문은. 왜 망했어요?
그들은 뭘 못했는가? 이걸 못했어요. ‘주께 범죄’ 이게 뭐고? 이걸 모른 거예요. 주께 범죄한 것을 몰랐어요. 왜? 누가 안 왔으니까? 주님이 안 왔으니까 주께 범죄가 뭔지 모르는 거예요. 주님이 안 왔으니까. 그들은 주께 범죄라는 그 단어, 문장 너무 잘 알아요, 지식적으로. 주지주의 아닙니까. 지식을 확보하잖아요.
그런데 그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통해 자기들 의견을 모아서 저건 범죄한 거다, 저건 범죄한 거라고 말씀과 율법을 참조해서 누가 평가하고 누가 판단 내렸어요? 인간과 인간끼리 모여서 지혜를 짜내고 판단한 거예요.
그러나 막상 주님이 오니까 누가 누구를 고소한다고 했어요, 아까 요한복음 5장에? 그렇게 사람을 판단해서 지옥 갈 사람, 천국 갈 사람 판단하는 너희들, 너희들을 누가 고소해요? 너희들이 그렇게 받드는 모세가 너희들을 고소할 것이다. 45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주가 오기 전까지는 죄를 모르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이 있어요. 개혁주의 신학. 신학가지고 판단해요. 삼위일체가지고 판단한다고요. 주님께서 오시면 ‘너 나한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 누구와 함께 있지? 그 인간 떼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신학이 문제입니다, 신학이. 구원에 무슨 신학이 필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을 안해도 된다, 하지 마라가 아니라 신학이 죄인 줄 알고 하면 돼요. ‘아, 이게 주님의 십자가를 가로막는 거구나.’ 이렇게 하고 배우면 되죠.
인간이 아담의 몸이 있는 한 자기 성깔을 못 버려요. 그렇죠? 그럼 그 성깔을 못 버리니까 그다음 성깔도 못 버려요. ‘너 죄 지었으니까 빨리 십자가 믿고 예수 믿고 해서 죄 씻음 받아야지.’ 이건 죄 아닙니까? 그것도 죄라고요. 왜 본인이 해결하려고 해요? 주께서는, 너에게서 뭔가 떨어져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떨어져 나가는 것에 관련해서 제가 찾아보니까 재미나는 옛날 팝송이 있어서 한 번 봅시다.
He'll have to go
1959, Jim Reeves
Put your sweet lips a little closer to the phone
Let's pretend that we're together all alone
I'll tell the man to turn the jukebox way down low
And you can tell your friend there with you he'll have to go
달콤한 입술을 전화기에 좀더 가까이 대고
우리가 함께 있는 척해요, 하루 종일
나는 종업원에게 음악소리 좀 낮추라고 말할게요
당신도 말할 수 있죠, 거기 함께 있는 친구에게
그는 가야만 한다고(이제 그만 가라고)
‘그는 가야만 한다.’는 게 노래 제목이에요. He'll have to go. 그는 가야만 한대요.
Whisper to me, tell me do you love me true
Or is he holding you the way I do?
Though love is blind, make up your mind, I've got to know
Should I hang up or will you tell him he'll have to go?
내게 속삭여줘요 말해줘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그가 내가 하듯 당신을 붙들고 있나요?
비록 사랑은 눈을 멀게 하지만 마음을 정하세요
난 알아야만 하겠어요
내가 전화를 끊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가서 그만 가라고 말하겠나요?
전에 남자하고 잘 지냈잖아. 이제 그를 떼내 보내라 이 말이죠.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사랑하니까. ‘네 속에 내 처소를 마련할래, 아니면 네가 만든 처소가지고 천당 간다고 우길래?’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팝송하고 관련 없지만, 제가 지금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You can't say the words I want to hear
While you're with another man
Do you want me, answer yes or no
Darling I'll understand
당신은 말할 수 없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당신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내가 대답하기를 원하나요? 예, 아니오라고 말해보세요
그대는 나를 이해할 거예요
Put your sweet lips a little closer to the phone
Let's pretend that we're together all alone
I'll tell the man to turn the jukebox way down low
And you can tell your friend there with you he'll have to go
달콤한 입술을 전화기에 좀더 가까이 대고
우리가 함께 있는 척해요, 하루 종일
나는 종업원에게 음악소리 좀 낮추라고 말할게요
당신도 말할 수 있죠, 거기 함께 있는 친구에게
그는 가야만 한다고(이제 그만 가라고)
노래가사가 상당히 실생활 같죠. 복잡한 철학이 아니고, 굉장히 순진하고 예뻐 보이잖아요. 노래 한번 들어봅시다. 노래가 아주 재밌죠? 주제가 아주 뚜렷하잖아요. 아주 옛날 옛날 노래에요. 1960년 노래인데. 지금 삼각관계죠. 남자가 노래를 불렀으니까, 남자가 어떤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옆에 있는 다른 남자를 빨리 떼내고 나한테 오라.
이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처소를 마련하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 우리는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게 바리새인 되고 사두개인처럼 신학이 형성되고 지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옛 아담의 모습이 항상 쉬지도 않고 감추겠어요, 나오게 하겠습니까? 나오죠. 나오면 나오는 그 모든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은 역사적이 아니고 이미 초역사적이죠.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구약사람들 참 좋겠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있어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어서 좋겠다.’ 하죠. 신약에 누가 초자연적 현상입니까? 나. 누구와 함께 있는? 내가 실선이고 예수님을 점선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한테는 이 관계, 함께 있다는 관계, 플러스 된 관계가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이죠. 다른 사람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설명할 길이 없죠. ‘네가 뭐 착각해서 믿었지. 믿는다고 착각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욕 얻어먹죠.
그러나 본인은 어때요? 본인은 주님과 함께 있죠. 이걸 어떻게 구분합니까? 날마다 이 성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요. 무엇 때문에? 뭐가 나오기 때문에? 배설물이 나오기 때문에. 이게 누가 들어오지 아니하면 ‘내가 이렇게 못났습니다. 나는 구정물입니다. 나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는 말을 얼굴에 미소 띠면서 할 수 없어요. ‘이거 뭐 당연한 거 아니에요?’하는 그 넉넉함으로 그것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도는 사람 대 사람이 만나기 전에 항상 누가 뒤에서 자꾸 들쑤십니까? 들쑤심을 당해야 돼요. 누가 밀어내요? 주님이 밀어내죠. 주님이 밀어내니까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는 없는데 말을 건넬 필요가 있는 현상들, 그러한 상황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좋아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죠. 그게 바로 주의 증인 되는 거예요.
[14.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튀어나왔는가] 그것은 내용에 다 들어있어요. 여기 보면 역사가 몇 년 텀(term, 기간)이 있다 했죠. 34페이지에 130년 기간이 있어요. 사실은 더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역사가 텀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되죠.
[15.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 이것은 전에 한 것 같은데요. 전에 설명을 여러 번 한 것 같아요. 역시 이 질문에 대한 이해는, 눈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이 혼인해서 인간의 자식을 낳는다면 눈에 보이는 거죠. 그 인간과 인간이 결혼해서 자식 낳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는가? 그건 눈에 딱 보이잖아. 눈에 딱 보이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죠. 그거는 신앙 관계없이 결혼해서 애 낳는 것 다 알잖아요. 과학적으로 규명했잖아요. 정자, 난자 만나서 아이가 생긴다. 그건 초등학교 학생도 다 알고 있는데요.
그런 식으로 설명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혼인함으로써 인간 자체적인 한계를 드러내죠. 아까 미분방정식에서 0으로 나타냈었죠. du=0
타원의 한계선을 넘어가면 죽는다. 이 ‘죽는다’는 늙어죽는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 영역에 가면 ‘이것은 더러워서 죽는다.’에요. 다른 말로 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아담의 몸을 지녔기에 죽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마땅한 조치죠.
어떤 분이 전화해서 이야기했어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아담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그걸 어디서 들었느냐? 대구 사람이라 다른 지역 강의에 참석 못하시는 집사님이 수요설교 전에 지역 강의내용을 메모해서 와요. 강의내용을 자기가 요약해서 그걸 저한테 숙제처럼 내놓는 시간이 그 시간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숙제로 내놓으면 ‘잘했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되지만 ‘그거는 오해했습니다.’ 설명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거예요. 그게 녹음할 때 들어간 거예요.
그 다음에 [16. 바로의 딸]. 바로의 딸도 마찬가지에요. 이것도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거죠. 바로의 딸이 애굽 사람인데 히브리인을 어떻게 양자로 받아들였나 그 내용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행여나 바로의 딸이 자기 아버지한테 명령 어겼다고 고초당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그게 질문이죠.
그런데 답변에도 나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들어오시려면 빛이 지구의 성층권을 뚫고 들어오듯이 인간을 지배하는 악마의 권력, 권세를 뚫고 들어오잖아요. 뚫고 들어와서 자신의 약속의 대상에게 안착을 한단 말이죠.
그러면 뚫을 때 어차피 뭐를 뚫어야 돼요? 언약이라는 그 비계 덩어리를 뚫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 권력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보호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권력을 이용하신 거죠. 왜냐하면 그 당시 권력은 아버지, 장차 율법을 전수하고 가르쳐야 될 남자를 사전에 다 없애버리기 위해서 딸은 살리되, 딸은 애 낳는 기계로 팔려 가면 되니까, 아들은 무조건 다 죽이는 거였거든요.
이것을 강남강의에서는 ‘철두철미’라 했어요. 권력에 누수가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도록. 국가 말고 다른 세계가 국가처럼 실제로 있다는 인식을 갖지 못하도록 국가가 다 커트해버리는 거예요. 그 세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양다리 걸치는 거예요.
오늘 했던 강의와 연결시켜볼까요? 이렇게 정리해봅시다. 다 아시지만.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시작은 아담의 몸이다.’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아담이 사는 방식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아담의 몸과 사람의 만남으로서 보이는 것이 전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이것이 세상사는 상식.
그런데 여기에 주께서는 내 자리 마련. 내 자리 마련하면서 인간들은 이런 죄를 지었잖아요. 이 죄에서 못 빠져나오죠. 이게 상식이고 옳다 하는데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주께서 내 자리 마련을 위해 들어옴으로써 여기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죄가 발굴되죠.
이 죄라 하는 것은 인간들한테 물어서 몰라요. 신학한테 물어서 모르고 직접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나의 모든 설교나 강의나 사는 모든 것, 호흡하는 것 무조건 뭐가 돼요? 무조건 죄가 되는 거예요. 무조건. 조건 없이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존재의 가벼움이죠.
죄가 된다는 말은 이걸 의로 바꿀 수 없다는 거죠. 그러면 나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못 지죠. 그러니까 아까 노래에서 같이 있는 사람 떼내라 하잖아요, 사람 만나는 사람은. 그럼 사람 안 만나고 고립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어요? 본인이 본인하고 있잖아요. 너라는 본인을 너에게서 떼내라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일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왜 자기 편을 드는가? 따져보세요. 자꾸 내 편들죠.
그다음 [17. 놋뱀에 대해서]. 놋뱀 이거 했는데. 서울강의(260416 요일 5:15 <말씀과 말씀의 만남>)에서 했죠. 다시 한 번, 놋뱀이 뭐냐 하면… ‘우씨, 저리 가! 불뱀 무서워.’ 저리 가게 했는데, 그 대목을 볼게요. 다른 건 다 빼고요. 원망하다 불뱀 몰려왔죠, 난데없이.
‘성도 자체가 초자연적 현상.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증상 또는 증인’. 아시겠죠? 맨날 죄가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는. 전혀 아담적이지 않죠.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성도 자체가 초자연적입니다.
이것과 대비해서 먹을 것, 입을 것 없다고 애굽으로 가자고 했을 때 인간이 원망 나오죠. 광야에서 원망이 나오잖아요. 원망했을 때 주께서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죠. 불뱀이 사방에서 몰려와요. 동쪽에서 몰려오면 안돼요. 서쪽으로 도망가면 되니까. 사방에서 불뱀이 몰려와서 완전히 불뱀에 포위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경상도 말인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 이야기해보세요. ‘만데이’. 언덕을 말해요. 만데이에 있는데 불뱀이 사방에서 기어 올라오면 피할 곳이 없잖아요. 그럴 때 아담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요. 기도해서 이 만데이까지 오지 않도록. 저리 가! 저리 가! 모세 너 뭐해? 빨리 기도해서 불뱀이 내게서 떨어지게 해 달라 하잖아요.
사사기에 나오죠. 항상 내 몸에 불리한 조건이 왔을 때 다급할 때 기도해서 ‘하나님은 내 몸에서 불행이 떨어지게 해 달라.’ 왜 그래야 되는데요? 여러분 의견 들어봅시다. 왜 불행이 나한테서 떨어져야 돼요? 1번-이유 있다, 2번-이유 없다. 몇 번입니까? 이유가 없어요.
나는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하는 게 아니고 마귀가 ‘너는 더 살아야 돼. 죽으면 안 돼.’라는 것을 우리한테 이미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그 이전에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거예요. 가장 급할 때 마지막 남는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아야 되겠다. 국회의원 같아. 정당이고 구호고 간에 무조건 당선. 당선되고 보자,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똑같은 거예요. 권력 쥐고 보자.
(불뱀을) 가라 했거든요. 가라 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가는 게 아니고, 변화가 아니고요. 아예 놋뱀을 만들어서 고정적으로 장대에 매달았어요. 매달아놓고 조건을 줍니다. ‘잘못했다 해. 원망한 것 잘못했다 해.’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죠.
병 고친 게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 은혜를 모르고 내가 나 불편하다고 나 사는 게 힘들다고 하나님 원망한 것, 내가 나 챙기는 것, 나 지키려는 이 자체가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주님의 조치-주님의 조치가 뭐죠? 물러가는 게 아니라 놋뱀을 우리 코앞에 들이대는 이 조치-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이 나았잖아요. 그게 놋뱀이에요. 그게 주님의 사랑이고. 더 이상 내 몸은 내가 지키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 말고 다른 몸을 주셨는데 그 다른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주신 거예요. 요한복음 3장에서 이 땅에 놋뱀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그 죽으신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뤘다는 증거로서 죽은 몸이 위로 올라가죠(13-14절).
시선의 이동이에요. 인간 대 인간으로 다루던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하는 시선이 어떻게 돼요? 주님이 올라가니까 시선이 어떻게 돼요? 쳐다보게 되죠. 위치가 높이 있으니까. 쳐다볼 때 쳐다보는 사람과 주님 사이에 끈이 연결되면서,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그렇게 안 주겠다고 버텼던 영생이 그렇게 해서 난데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신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인간의 지혜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영생 받았다’가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주님이 자기 자리로 전환시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18. 출애굽기 20장 8-11절에 대해서] 하고 마치겠습니다. 안식일이 나오는데 39페이지,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러한 취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질문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먼저 유대인 내부에서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더라도 안식일 지켰을 때에 나오는 혜택을 입은 자들이 등장했어요.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일어났던 그때가 언제입니까? 안식일이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잖아요.
어차피 이방인은 제켜놓은 거예요. 이방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구원의 대상도 아니고, 나(예수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기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요. 하나님이 자기 자리를 잡는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38년 된 병자.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죠. 38년 동안 감기 안 걸린 바리새인.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 아니죠. 율법대로 해서 자기는 지금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38년 된 병자, 소경도 마찬가지에요. ‘누구 때문에 소경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동안 유대인 사상에 푹 젖었다는 뜻이에요(요 9:2).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도 알고 있는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가면 낫는 방식이 아니고, 주님이 개입해서 38년 된 병에서 나았죠. 낫고 난 뒤에 주님께서 안식일에 담요 들고 가라고 하신 거예요. 뛰어가라고 까지는 안했습니다. 가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인간 있고 율법 있고 하나님 있다.’ 유대인들 생각입니다. ‘인간이 율법대로 살게 되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율법 흡입기니까 본인이 율법을 완성해서 완성된 결과물로 38년 된 병자가 자비를 얻었잖아요, 자비. ‘베데스다 못’의 뜻이 뭐에요? ‘자비의 연못’이에요. 자비를 받았잖아요. 예수님이 자비의 못이 되셨어요. 물 없는 그냥 자비에요.
자비를 받았다는 말은 유대인 안에서 자비의 하나님이 같이 거주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미리 38년 된 병자를 통해서 시범조로 보여준 거잖아요.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이지만 이방인 취급을 받죠. 이제는 이 혜택이 어디로 갑니까? 유대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그대로 가서 이방인에게 십자가라는 자비, ‘네 죄는 내가 알아서 내가 다 처리했다.’는 공식 통보를 해줘버리면, 그 사람은 죽어도 영생을 얻으리라.
주님 자체가 안식일의 주인이고 오늘날 우리가 움직이는 안식일의 완성품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는 것, 인간들 만나고 뻔하고 뻔한 생활의 반복. 그러나 이제는 알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런 가운데서도 가는 방향이 지옥이 아니고 천국가게 해주신 그러한 생각 자체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혜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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