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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시편 67:7 / 희생의 알고리즘 / 260309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시편

시편 67:7 / 희생의 알고리즘 / 260309

정인순 2026. 3. 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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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260309a 부산강의 : [시편]83(67:7)-희생의 알고리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67편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1절)라고 돼 있지요. 얼굴빛을 비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출애굽 33장 20절에 보면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등은 봤는데 하나님의 얼굴은 못 본 거예요. 등과 얼굴에 간격이 있겠지요.

등에서 얼굴, 모세에서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오기가 너무 힘들었지요. 변진섭의 노래에 나오지요.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너에게로 또다시) 등에서 얼굴은 최종적입니다. 최종성. 등에서 얼굴로 온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 자기 세계에 합류시키는 방식이에요. 등에서 얼굴로 갈 때 모세는 자체적으로 거룩하지 않아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깨끗하지 않아요. 죄가 많습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얼굴을 보질 못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모세에 주어진 것이 율법이고, 율법은 선한 것이고, 율법은 거룩을 요구를 해요. 그래서 ‘모세+율법’은 어디 있느냐 하면 얼굴을 보는 세계에 도달됩니다. 이게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변화산에서 그때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연관된 가운데서 이야기를 해요. 성공했다 이 말이죠. 모세는 등을 보다가 얼굴 보는데 성공을 한 겁니다.

뭔가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 세계가 있다는 말이고,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에요. 다만 율법이 제공돼야 된다는 점에서 율법이 제공되지 않는 그런 쪽에서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편 67편에 나오는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소서, 한다는 말은 그냥 향하면 되는 게 아니고 무슨 조건을 만족해야 돼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할 때 얼굴을 보는 그때가 온다는 겁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합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세에게 율법을 통해서 거룩해서 결국은 등을 보던 모세가, 시내산에선 등을 보다가 내려와서 죽어서 하나님께로 합류가 되는데, 그럼 얼굴을 본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나와요. 얼굴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원형이 있다는 말은 나머지는 뭐가 돼요? 모델이 된다는 뜻이죠. 원형이 있어서 원형을 카피하면 뭐가 되겠어요? 그 원형을 카피하게 되면 유사 원형들이 나오겠지요. 골로새서 1장 15절, 시간 관계상 다 못 찾아요. 여러분 다 알고 계시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이런 뜻이에요. 이 대목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형상의 원형이 있다는 말은 거기에 대한 유사적인 모사적인 요소들이 세계를 장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거죠.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모사. 로마서 5장에서 모형, 인간은 원형의 모형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또는 모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형 따로 있고 모사 따로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하나님이 벌이는 연극무대다.

연극무대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세상은 가짜다. 진짜가 아니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아니하니라”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해석이 안 되지요.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이고,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이퀄equal시키는 거예요. 동일화시키잖아요. 그러면 그 나타난 것 중에서 인간에게 제일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본인이라, 본인. 거울 보면 보이니까. 보이는 것 중에서 나.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당신은 타인, 남. 나와 남의 모음이 바로 이 사회. 그 사회의 기본단위는 ‘가족’입니다.

가족의 특징은 없는 데서 새로 생겼다는 거예요. Happy Birthday 생일이잖아요. 없는 데서 생긴 거예요.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없는 데서 생겨서 한 세 살, 네 살 귀엽기 짝이 없어요. 유치원,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예쁘지요. 그런데 그 예쁜 것 시효가 다 끝났습니다. 끝났으니까 말썽꾸러기 됐잖아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 예뻐서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애를 또 낳아야 돼요. 애 낳는 게 마약 같아요.

애 못 낳는다 하니까 짜증나서 개 키우고, 개 열두 마리. 개 헌혈 하고, 개 유치원에다 개 소풍. 개 유치원의 학부모 모임. 인간 대신 개 키우는 거예요. 그 개에다가 인간의 자기의 형상, 복사판의 복사판을 개한테 밀어서 개한테 옷 입히고. 털 있는데 왜 털옷 입혀요. 말이 안 되지요. 복사판의 하청이에요. 계속 하청주고, 하청주고, 하청을 외주를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사회에서 나와 너에서 뭘 그리워하느냐 하면 바로 사랑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사랑은 뭐냐 하면 사상의 공유에요. 생각의 공유. 나 너와 대화가 돼, 이게 뭔 뜻이에요? 사상이 의식이 공유된다. 소통이 가능하다. 그것 때문에 연애하다가 부부가 된 겁니다. 생각이 같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애 낳기 전까지는 유효한데 애 낳고 난 뒤에는 애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놓고 난리 나지요. 그다음부터는 공유될 거로 여겼는데 착각이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모사, 그러니까 복사판은 원형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뭐냐? 안에 최종적으로 구멍이 뚫려있어요. 제가 어제 오후설교 때 이걸 도넛이라 했어요. 평면을 조각조각 붙이면 구가 될 수 있어요. 도넛의 구멍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메울 수 없는 인간들끼리 나와 너와 만나서 이 빈 결핍을 네가 좀 채워달라고 서로가 요구하니까 인간과 인간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인간은 서로 맞겠다, 하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래서 지금 내린 결론은 뭐냐? 인간에겐 뭐가 없다? 사랑이 없다. 인간은 사랑이 없어요. 유사 사랑을 자꾸 만들어내는데 인간은 오롯이 나 위주로 엮을 수 있는 공유의 영역은 없습니다. 이걸 고상한 단어 각자도생, 이걸 외래어로 하면 독고다이. 너는 네 길 가고 나는 내 길 가고 서로 갈 길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부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부부관계가 사랑은 없습니다. 최종적인 공유지역 없어요. 그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건 하나의 요령인데요. 부부 사이에 반드시 중립지역을 만들어놓고 이 중립지역에 서로 다가가지 않기. 요까지만 와야지 그 선을 넘어서 너무 가까이 가게 되면 저쪽에서 화를 내잖아요. 이게 부부가 육십, 칠십까지 이혼하지 않고 사는 요령이에요. 침범하지 않기. 내 영역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해버리면 사랑이 오면 나는 도망하게 돼 있어요. 너무 가까이 오면 도망하게 돼요, 인간은.

인간에겐 테두리가 있고, 이 테두리를 뭐라 하냐? 이걸 존재라 합니다. 인간의 존재성은 테두리 친 조건 하에 자기 존재가 있어요. 테두리가 없으면 뭐가 없어요? 내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내가 의미가 없으면 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사는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테두리를 쳐야 돼요. 옛날 중세시대 서양에 성채 있지요. 성채는 반드시 둘레에 해자가 있어요. 해자가 뭡니까? 둘러서 흐르는 시냇물 같은 거죠. 건너올 때는 뭡니까? 다리를 건너오는 거예요.

부부사이에 대화할 때도 무조건 내 말에 동의하라고 하지 말고, 다리 건널 때 수위가 있어요. 그 이야기는 들어줄게. 그 이야기는 돌려줄게. 안 듣는다. 그러한 간격, 틈이 있어줘야 부부관계가 오래 유지됩니다. 어차피 인간에겐 사랑이 없고 자기 사랑에 매몰돼 있기 때문에 그걸 서로가 인정하는 가운데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의견을 제시하되 압박을 가하면 상대가 도망칩니다. 그래서 노래가사에 그런 것 있지요(사랑은 늘 도망가, 이문세). ‘늘 당신은 내 앞에 도망치고 있다.’ 사랑은 자꾸 도망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오늘 시편 67편에서는 이 내용이에요. 어떤 내용이냐 하면,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있다. 이 세상에는 천국이란 게 있음을 증거하는 그 본부, 여행사죠. 일종의 천국 가는 여행사는 분명히 있다. 천국은 있으니까. 있다는 근거가 뭐냐? 바로 얼굴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받는 같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

왜 마주볼 수 있지요? 아까 모세는 등을 봤지요. 등과 얼굴 사이, 이게 역사거든요. 이스라엘부터 출발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모세로부터 출발해요. 모세가 개입해서 물에서 건져냈잖아요.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빈손으로 내려왔습니까, 뭘 들고 뭘 보고 왔습니까? 율법이죠. 그럼 여기서 정리정돈하면 이래요. 등을 봤던 모세가 얼굴은 보지 못했는데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데 합류하려면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을 완성해야 돼요. 이 율법은 거룩이니까 거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시편 67편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려주옵소서, 라는 말은 그전에 이미 율법으로 인하여 충분히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뭐가 됐다? 거룩한 백성으로 확정되고 완벽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본다 이 말이죠.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하나님, 또는 아버지와의 만남. 이것을 시편 67편에서는 예언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결국 이 이야기는 율법 작용에 대해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관여돼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관여될 때 두 가지입니다. 율법의 관여는 인간 쪽에서 율법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율법이 인간을 덮칠 것이냐? 둘 중에 하나에요.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은 도망칩니다. 사랑한다 하면 도망가듯이.

난 당신이 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바라는데 나중에 ‘그럴 리가 없어. 나를 좋아할 리 없어’ 이렇게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당신을 좋아합니다’ 하면 그땐 어떻게 합니까? 반가웠어요, 한다. 안 그러면 도망친다. 몇 번입니까? 도망쳐요. 당신이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그건 자기를 잘 몰라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당신은 딱 거기 있어. 대기하고 있어. 딴 데 가지 말고.’ 그런 뜻이란 말이죠. 그쪽에서 움직여버리면 짜증나. 왜? ‘내 쪽에서 시작하지 않는 일이 네가 왜 건방지게 나를 사랑해. 내가 널 사랑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난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끝나버려요.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 할 때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너희들이 지키는 것은 나는 안 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3장에 나와요.

또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그 말씀은 여러분들이 평생 잊지 말라고 같이 봅시다. 누가 교회 좀 다닌다고 뭐라 하거든 로마서 5장 이 말씀만 딱 해버리면 그쪽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됐어요. 스톱, 거기서 스톱해야 돼요. 뒤의 것 붙이면 안 돼요. 뒤의 것 붙이면 혼동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이유는 뭐다? 범죄를 더하게 함이에요. 하나님이 착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방향이, 방향이 율법이 덮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게 아니고, 그건 바리새인들보고 많이 하라 해. 그게 아니고 율법이 덮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 쪽에서 인간 쪽으로 덮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구원받겠다고 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습니다. 내가 덮칠게. 덮치는데 덮쳤다, 안 덮쳤다는 걸 뭐로 파악하느냐? 말씀을 볼 때마다 짜증이 확 올라와요. 자꾸 나를 몹쓸 존재로 몰아세우는 것이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고유의 자기 의로움이 있잖아요. 나도 사람입니다, 하는 게 있다고요. 사람이 아닌데 흙인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인 척해요. 가짜가 진짜인 척한다 이 말이죠.

율법이 이렇게 덮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쓴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이 한 고백 있잖아요.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나는 저 세리와 같이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아니하고 나는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할 때 중요한 것은, 그거는 자기한 걸 끄집어낸 거고 판결을 어떻게 냈습니까? ‘지옥에나 가라’ 이게 판결이에요.

그러면 얼굴이 우리 인간에게, 그러니까 원형인 가짜에게 들이닥칠 때 우리는 가짜였다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척하지만 사실은 썩은 형상이고 안 받는 천국에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고장 난 형상인 것을 발각당하는 식으로 옵니다. 오면서 그 얼굴 그 작업을 하면서, 그다음에 로마서 5장 20절 마저 읽어보세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억울하지요. 그다음에 뭡니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러나(but)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지요. 그러면 은혜가 넘치려면 선제작업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없는 죄도 죄가 우리 속에 만들어지는 현장으로서 우리가 제공돼야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러면 칼 들고 설칠까요? 칼 들고 설치는 것만 죄가 아니고 자기 위주로 사는 그게 죄거든요. 자기 의.

그래서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떤 상황, 또는 사건들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사건들의 연결, 연결하도록 하는 겁니다. 어제는 어제 사건이 있었고, 오늘 되면 또 오늘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오늘 점심 먹을 때 어디서 먹느냐? 또 고기튀김이냐, 뭐 또 딴 데 가느냐? 그 모든 사건 가운데서 나의 고집과 나의 사랑이 유감없이 발휘될 때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요.

그러면 여기서 그다음 질문은 뭐냐? 죄잖아요, 죄. 죄가 더한 곳에, 죄가 넘치는 곳에 뭐가? 은혜가. 죄가 일곱 개라면 은혜가 일곱 개 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일곱 개라면 은혜는 7 곱하기 7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감사가 나오지요. 죄 진만큼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죄는 조금 지었는데 은혜는 곱빼기로 퍼붓는 거예요.

아들이, “엄마 용돈 만 원만” 하니까 “이게 서른 되도록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너 좀 오늘 맞아야 되겠다. 혼 좀 나야겠다”고 해서 금고 열어서 오백만 원 쯤 해서 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런 것. 만 원 달라했는데 오백만 원 줘버리는 거예요. 얻어맞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죄 안 지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런 거요. 사실은 죄 안 지어서 큰일 난 게 아니고 죄가 발각 안 됐으면 큰일 날 뻔한 거예요. 성경을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한 거예요.

인간은 이미 짐승 수준이란 걸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이야기해요. 짐승은 뭐냐 하면 하는 일이 있어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서 이방인들이 짐승 수준인 것을 보이기 위해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하는 것은 짐승이 하는 거다. 짐승이 하는 것이란 말은 이건 뭐가 빠져있다는 뜻이에요? 정작 하나님의 원형과 관련된 가짜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요소가 빠졌을 때는 이방인이란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그런 짐승,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와 관계없다면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맨날 돈만 생각하고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생각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안 받아요. 천국에서 거부당합니다. 심사대상에서 거부당해요. 그럼 여기 그 나라와 그 의라면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되는가?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주님의 희생이 들어가는 겁니다.

보통 어떤 사람이 이야기할 때 남 험담하잖아요. 험담할 때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 했는데 험담하지 말라, 이렇게 잔소리를 한다고요. 근데 생각해보세요. 험담을 하고 안 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대화 속에 희생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험담 안 한 점잖은 사람, 지옥 가서 점잖아해.

희생이 빠져버리면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착실하게 험담 안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험담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희생이란 보쌈에 싸여서 하나님의 얼굴과 얼굴을 볼 것이요, 이렇게 돼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뭐냐 하면 믿음, 소망, 사랑이 나와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한 뿌리에서 나오는 건데 그 뿌리가 뭐냐? 희생에서 나온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뭐다? 사랑이다. 십자가 사랑에서 나온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세 가지를 다 가져야 됩니다, 라고 보통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세 가지를 이야기하게 되면 두 가지하면 하나는 놓치게 되고, 하나를 지키면 두 가지 놓치게 되고, 세 가지 다 균형 맞추기가 인간에겐 불가능해요. 그러나 하나만 알면 돼요. 하나만 알게 되면 믿음, 소망, 사랑 거기서 다 나왔다. 그게 뭐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희생이다.

희생의 특징은 나는 주님을 위해 희생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희생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에요. 나는 주를 위해서 사랑한 적도 없고 소망한 적도 없고 믿은 적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나 말고 주님에게 일어난 상황이 아버지와 관계 되어서 그 효력으로 우리가 죄인이구나.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그런 결과물을 낳게 한 그 고리,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거예요.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희생의 알고리즘이에요. 알고리즘 아시죠. 하나의 동영상 치면 연관된 동영상 뜨는 게 알고리즘이잖아요. ‘광화문’ 치면 우파 데모하는 것 쭉 나오고 트럼프 나오고 전천년설, 후천년설 나오고 연관돼 있지요. 이란 성경에 나와 있다. 이런 게 뜨는 이유가 광화문, 태극기 쳤는데 그런 게 막 나온다고요.

그게 알고리즘이잖아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희생의 알고리즘. 주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완료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써 하나님의 성도가 있는데 그 성도가 바로 최종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시편 67편의 완성체,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제부터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시편 67편 4절,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해놓고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 그리고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6절) 어렵다는 게 7절에 나와요. “땅의 모든” 그다음에 뭡니까? “끝” 야 이 단어가 굉장히 어려운 단어에요. 끝이란 것.

지금 시편 67편에서 끝을 언급하잖아요. 끝을 언급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뭘 미리 당겨서 알았다? 끝이 어떻게 끝나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그 시대의 중보자 역할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담당시켰다는 거예요. 어떤 중보자? 본인만 구원받는 게 아니고 본인을 통해서 다른 열방, 다른 민족에게도 구원받을 사람을 챙길 수 있도록 제대로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있는 자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는 그 설계도, 거기에 모든 필요한 조건, 규격 그것을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이게 조건이 되는 겁니다. 얼굴빛으로 비춘다는 것을 아까 뭐로 정리했습니까? 희생이에요. 희생인데 그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얼굴과 등,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율법에 대한 연결성, 그것을 완료시키는 조건은 뭐냐? 희생입니다.

여기선 희생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중보자의 희생을 위해서 어떻게 되느냐? 멸망해야 됩니다. 그걸 선제적 저주, 저주를 앞당겨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겨 받는 거예요. 어떤 나라가 패망했다 하면 그들은 이것을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이거는 하나님께 저주받았다, 이래 하잖아요. 또 구십오 세 된 노인네가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죽었다, 하잖아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원형이 아니에요. 유사품들이에요.

인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무니다. 이 세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만이 확정된 죽음이지 그 외에는 유사품들이에요. 인간은 안 죽습니다. 아니 못 죽습니다. 죽음이란 개념은 하나님과 갖고 실시해야 될 개념이지 인간이 그걸 차용해서 내가 목숨 끊어지니까 나는 죽을 거다. 잘 있어라. 이제는 내 목숨 놓는다. 이런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만이 독점적으로 죽음이에요. 그게 독점적으로 죽음이 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 신앙인들 많이 죽었잖아요. 그건 죽은 게 아니에요. 그건 이 땅에서 사라질 뿐이지요. 죽는 게 아닙니다. 잠자고 있을 뿐이지 죽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제대로 죽으신 분은 이 땅에서 예수님만 죽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제대로 저주를 품어야 함유해야 아버지가 내린 심판과 저주를 최종적으로 함유해야 죽음이에요.

그 죽음의 끝을 누가 독점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독점했어요. 십자가에서. 나머지 모든 죽음은 거기서 파생된 겁니다. 특히 악마의 지옥 가는 것. 그래서 죽음의 특징은 이상하게 안 죽는다는 거예요. 지옥 가면 안 죽어요. 요한복음 5장 28절에 나오지요. 죽은 자도 어떻게 된다? 무덤에서 다 소환시켜요. 다 소환시켜서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부활로 나온다는 말은 죽는다, 안 죽는다? 안 죽어요. 차라리 죽으면 속 편하지. 자살하면 되지요? 안 죽으니까 문제인 거예요. 약 먹어도 안 죽고.

생명의 루프, 삶의 루프, 아침에 일어나니까 5월 4일에 일어나니까 5월 3일이 반복되는 영화 같은 게 있잖아요. 미치지요. 똑같은 일이 매일 일어나보세요. 그게 뭐냐? 크게 쓰겠어요.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고 싶은데 안 될 것 같아요. ‘갇혔다’ 인간은 무한루프에 갇혔다. 죽음도 모르면서 숨을 끊어지지요. 죽음이 아닌데. 생명도 아니면서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이 세상의 죽음은 가짜, 허상의 세계에서 율법을 뿌려놓으니까 인간은 율법이 어디서 오는 건 몰라요. 율법의 원형은 몰라요. 율법은 예수님이 원형이에요. 모든 일점일획이라도 예수님이 다 이루니까. 율법의 정답은, 수능의 정답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데 주님께서 문제를 이 세상에 퍼뜨려놓으니까 전부 다 만점 되기 위해서 문제 푸는데 나중에 채점하니까 다 빵점이에요. 정답이 없어. 정답이 없다는 말은 추잡고 더럽다는 뜻이고, 이거는 거룩하지 않다는 뜻이죠.

내가 추잡고 더럽다는 것을 더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렇다면 은혜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희생이죠. 희생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네가 네 인생에서 손 떼란 이야기에요. 정답도 아니고 가짜만 붙들고 남한테 내세울 생각하지 말고 자기에 대해서 포기를 하면 돼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옳다, 그르다 나는 남한테 험담만 했습니다. 험담이 고 그런 것 묻지 않고 희생이 너를 어떻게 했는가? 희생은 나를 나에게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4장에 보게 되면,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은 내 안에서 나의 주인이 나오게 하는, 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한테 나오게 하심이라. 그렇게 해서 이 땅에 펼쳐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흔적만 남기는 것, 이것이 주의 성령이 하신 일이에요. 땅 끝가지 나의 증인이 된다, 그 원리를 계속 고집하고 계시겠지요.

여기서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한 게 7절에 나오지요. 뭡니까? “땅” 그다음에 “끝” ‘땅 끝’ 알려면 땅의 시작을 알아야 되겠지요. 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요.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열 시간이 이상 걸리는데 특별히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여러분에게 진자교회니까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땅 끝이라 하는 것은 계시가 와서 땅이란 개념이 성립돼요. 인간이 사는 것은 땅이 아니에요. 율법에 의한 의미를 갖고 있는 땅이 될 때 땅이 시작되고, 땅 끝은 율법이 완성될 때 끝이 되는 거예요. 땅 끝이 되면 이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시간으로 가버려요. 이스라엘 백성은 중보자기 때문에 이 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아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시편 67편의 예언이 나중에 완성되는 시간 간격을 그들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유일한 개념의 땅이에요, 땅.

계시가 없는 땅은 땅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적 의미와 관련지어서 모든 성경은 규명돼야 돼요. 땅이 있다. 땅에게 주어진 모든 계시적인 지시가 끝에서 완료가 되었다, 하면 땅 끝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희생이 땅 끝이 되는 겁니다. 그걸 신약성경에서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땅이 남아있더라도 북미에서 월드컵 해도 땅이 아닙니다.

이미 땅 끝으로 말미암아 땅이란 의미는 이제 더 이상 계시적 의미로 쓰지 않고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시간에 돌입했다. 이게 정당하네요. 끝 속으로 돌입했다. 끝 속으로 들어왔다.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어요.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땅이 분명히 있는데 땅에다가 천국이란 다른 땅이 밀어붙여 덮쳐버린 거예요.

거기서 생긴 것이 뭐냐? 기존의 땅의 끝장을 보겠다. 그걸 쉽게 말해서 심판하겠다. 심판하겠다, 하면 날 심판하는구나, 하는데 성경에선 그게 아니고 네가 심판당하는 것은 네 잘못이 아니고 땅 위에 살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 다른 땅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되는데 그 교체되는 그쪽에 속하느냐, 아니면 그냥 땅에 미련 있게 남아있는지, 그걸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제가 함축해서 이야기했다면 그걸 이제 차근차근 봐야 될 시간이죠. 그걸 보게 되면 굉장히 지루하지만 그것도 특별히 간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 내용에서 땅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이 아니면 땅으로 간주하질 않습니다. ‘약속+땅’이어야 하는데 현재 가나안 땅은 약속이 없는 이방민족이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호수아가 해야 될 일은 뭐냐? 또는 여호수아에게 덮친 언약이 해야 될 일은 뭐냐? 이 땅을 ‘하나님이 원하는 땅이 되기 위해서’에요. 왜 기존의 땅은 땅이 아니고 없는 땅처럼 등장해야 되는가? 시편 67편에서 땅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처음 나오는 개념이거든요. 어렵지요. 우리가 사는 땅은 땅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창세기 9장 14절에 보면, 노아홍수 이후에 땅이 있지요. 땅이 있는데 노아홍수 이전의 땅과 이후의 땅이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홍수 취지가 살게 아니겠어요? 논리적으로 그렇지요. 그 땅이 그 땅 같으면 이건 홍수 일으킨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이유를 품은 새로운 땅이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 이유를 품었다는 것을 뭐로 나타내는가? 창세기 9장 14절에, 구름 안에 있고 구름 속에 뭐가 나타나지요? 무지개 나타납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을 품은 땅과 언약이 없던 땅을 대비하면서 무지개의 취지, 노아언약의 취지를 계속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전까지는 동물의 피를 먹었지만 창세기 9장 5절에서는 그다음부터 피는 일체 먹지 마라. 피는 네가 먹을 게 안 된다. 그럼 피는 누가 사용한단 말입니까? 네까짓 게 피를 먹든지 해볼 생각하지 말고 피는 누가 가져가느냐? 피는 주님이 가져갑니다. 언약의 주인공이 피를 가져가요. 피로써 뭘 해보겠다는 거예요.

레위기 17장에 피는 곧 생명이니, 이렇게 해서 피는 어디서 피를 집중해서 드러내야 되느냐? 그거는 제단이 있어야 되고 제단 있기 위해서는 제단의 설계도면이 시내산에서 내려와야 돼요. 그리고 제단에서 흘린 피는 어떤 피냐 하면 다른 피와 달라서 인간의 죄를 자기 백성의 죄를 씻어주는 피입니다. 믿습니까? 많이 들었지요. 많이 알고 있지요.

그게 기존의 땅은 땅이 아니란 것과 연관돼 있다는 거예요. 무지개는 특징이 뭡니까? 아름답지요. 아름답다는 말은 어느 것과 대조될 때 아름답다? 심판과 황폐와 저주와 대비될 때 무지개는 그지없이 빨주노초파남보 아름다운 겁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이룰 때까지 나는 이 세상에 언약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지, 각오, 또는 열심히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합니까? ①하나님이 하신다. ②하나님의 이름이 하신다. 몇 번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해요. 이름이란 말은 존재가 있을 때 붙일 수 있는 게 이름이잖아요. 존재 없는 이름은 없잖아요. 누가 할 때는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자기 존재를 지상의 존재로 누굴 보내시고 그 이름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장되어서 이 땅에 오셨어요. 오시고 난 뒤에 여기 있다가 성립되고, 여기 있다 그다음에 나를 보내소서.

어제 오후설교 때 했어요. 이사야 할 때. 존재가 없는데 이미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하나님의 존재의 증인으로서 살려내는 조건 하에 하나님의 존재의 연장으로서 이사야가 있고, 이사야에게 누가 갈꼬? 내가 여기 가겠나이다. 그럼 계속해서 끈이 연결돼 있지요. 끈이 연결돼 있으면 두 사람이 옛날 초등학교 놀이 있지요. 끈 들고 노는.

둘 사이에 끈이 있다면 끈을 묶는 존재의 테두리는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끈을 제공한 쪽에서 존재의 테두리를 쳐버리죠. 이 테두리를 사도 바울은 주의 이름이라 합니다. 주 안에 있다. 성령 안에, 십자가 안에.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네가 네 존재의 테두리를 칠 수 있는 자격은 이제는 끝났다, 없다. 네가 어디서 뭘 하든지 간에 네 존재성을 구축하는 테두리는 주의 이름으로 테두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걸 주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례’라고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세례라고 하지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존재의 확장이니까 떠나지 않지요. 그 존재의 테두리는 주의 이름이지요. 그런데 그 열방, 모든 족속들의 자기 고유의 이름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이름이 있었지요. 그런데 뭘 줍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요. 세례는 뭐라 했습니까? 함께, 테두리 치는 거죠. 주의 이름의 존재만 허락되고 나머지 우리 존재는 거기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합류하는 거예요.

합류해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시편 67편 7절에 나오는 땅 끝의 재생, 땅 끝이라는 그 예언의 완성을 증거하는 자들이 여기 있어요. 땅 끝에서 드디어 주를 본다는. 땅 끝에서 주를 본다는 말은, 땅 끝이 해남마을이에요? 모든 시간이 종결되었음을 중보자기 때문에 미리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자기 미래가 자기 운명이 이미 확정되었음을 앞당겨서 자기 속에 작동하게 된 거예요.

자기 운명을 알게 된 거예요. 굳이 부채도사 찾아가지 마세요. 무당 찾아가지 마세요. 우리의 운명은 이미 끝났어요. 왜, 어떻게? 죽을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제대로 죽게 되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는 혜택을 은혜라 합니다. 이제는 내 이름이 삭제되는 것, 죽고 난 뒤에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그 미래를 보장받게 되죠.

이제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바턴을 이어받아서 나의 미래는 날아가고 누구의 미래입니까? 주님의 완성된 미래에 합류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있어요. 그게 언약의 끈입니다. 이것을 시편 67편에서는 이미 예고하고 있지요. 10분 쉽시다.


20260309b 부산강의 : [시편]83(67:7)-희생의 알고리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땅의 의미는 새롭게 바뀝니다. 피가 있는데 창세기 9장 5절에는 이 땅은 어떤 땅이냐? 피 중심의 땅, 피라는 데서 생명이 나오고, 노아홍수 때는 물이 터졌잖아요. 생명이 터져 나오는 땅 중심으로 가는데 그 생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인데 그걸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피라는 모습으로 등장해요. 피가 흐르려면 희생물이 필요하고 희생물이 희생하면서 피를 내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희생물은 노아방주에 의하면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 집어넣은 이유가 있어요. 정결한 짐승이 노아식구와 더불어 같이 탑승했거든요. 노아방주에 많은 짐승과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만 희생자는 딱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정결한 짐승. 정결한 짐승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요. 그다음에 노아방주가 나오면서 땅이 나오는데 이 땅에서 노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정결한 짐승을 잡아버려요. 번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번제 드리면서 하나님이 선언을 해요.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이유가 뭐냐? 태생이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을 살려낸 이유는, 깨끗한 정결한 희생물이 희생하고 있다는 그 자체에 결과물로 연관되어서 그 사람만 희생물을 위하여 살려두지 그 외에는 살려두지 않는다, 그 원칙이에요. 이게 창세기 8장 21절에 나와요.

내가 이제부터 다시 홍수로 심판하지 않노니 어려부터 인간의 모든 생각과 사상이 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받지 않는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 나중에 신약의 성도라는 것이 결국 뭡니까? 이 상황을 드럼통, 우리 몸을 신체를 늙어가는 몸을 드럼통이라고 한다면 드럼통 안에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가 이미 성도라면 들어가 있겠지요.

그럼 젊을 때는 이것이 모호하고 희미하고 잘 드러나지 않아요. 이십 대, 삼십 대는 천하에 자기가 제일 똑똑하고 잘난 줄 알아요. 그러나 나이가 칠십이 살짝,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고 살짝 넘어가면서 내가 나한테 믿을 구석은 없다. 육십 대는 왜 안 되느냐? 육십 대는 아직 자슥을 믿어요.

자식이고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다 소용없고 이제는 누구도 못 믿어요? 나도 나를 못 믿어요. 하는 것마다 냉장고 앞에 뭘 붙여야 돼. ‘냉장고 안에 배추 들어있다. 사지 마라’ 했는데 또 사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는 누구만 있어요? 노인네만 있어요. 젊은이들은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 없어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교회 안 나와요, 전부 다. 그 시간에 돈 벌기 바쁜데 뭐. 돈 벌어서 자기 단도리하는데 바쁜데 뭐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겠습니까. 다 그래 살고 있지요.

정결한 짐승이 흘리는 피, 피 중심의 땅, 그리고 평화. 에스겔 1장에 보면 나옵니다. 보좌가 있던 배경은 무지개 펴있어요. 그리고 그 보좌 아래쪽은 뭡니까? 맹렬한 불 심판이 떨어집니다. 드론이 떴다? 드론 위에는 아주 청명한 푸른 하늘, 드론이 있는 그 밑에는 폭탄이 떨어지는 장소. 그게 바로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오는 보좌의 기능입니다. 보통 소방헬리콥터 안에 뭘 품었어요? 물을 품지요. 산불 났을 때 배수관을 열면 물이 쏟아지잖아요.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오는 구조가 밑이 개방돼 있어요. 개방되어 있어서 숯불이 나와요. 물론 숯불갈비 좋아하는 사람은 좋다만.

보좌의 특징이 드론이에요. 드론으로 전 세계에다 불 심판을 불로 싸질러버리는 기능을 천사가 하고 있는 거예요. 보좌의 특징이 뭐냐? 안에는 주의 이름이 있고, 바깥에는 천사의 기능, 이게 보좌의 구성요소입니다. 그것을 이미 땅에서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희생물, 피 흘림 이것을 고정된 지점에서 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 뭐냐 하면 성막이었고 그것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성막, 성전이고 피를 내고 제사 하고 제사 제대로 피 잘 냈습니다. 죄 씻음 받는 피 냈습니다, 하고 그걸 인정하기 위해서 하늘로 연락을 취합니다. 그 연락이 바로 연기. 연기를 하나님이 어떻게 한다? 레위기 1장에 흠향하신다. ‘일이 잘 되고 있구먼, 제대로 태웠네. 다 태웠네. 잘 태웠어.’ 저주내리는 율법의 완성의 저주를 받으시고 더는 제사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거예요.

이것을 위하여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의 표식, 싸인을 해줬어요. 몸의 싸인이 있고 몸 밖의 싸인이 있는데 몸 안의 싸인은 뭐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유월절 할 수 없다. 몸 밖의 싸인은 어린양의 피를 발라버리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 안쪽에는 거기에 참여한 자는 공통적으로 할례, 그리고 여성들은 남성이 대표자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남성에 종속되는 입장에 있으면 돼요.

그렇게 해서 인간의 육이 끊어졌다는 게 할례거든요.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은 인간의 육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표시로 할례를 행했고 바깥에는 그걸 대체해야 되니까 어린양이 등장해서 피를 흘렸다. 나중에 어린양이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장자, 아들이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 안의 패밀리, 같이 식사하는 그 장소는 패밀리레스토랑, 생일날 스테이크 하려면 돈 좀 더 줘야 돼. 특별식 나오는.

그 작업을 위해서 땅의 존재 이유가 뭐냐? 제단을 통해서 그 제단 중심의 새로운 하나님의 맏이 되는 민족들을 끄집어내는,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 모아지고 모집될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새로운 땅은 이러이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설계도면을 갖고 있는데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는 뭐가 있어야 된다? 그게 오늘 강의에 결정적입니다.

자, 하나님이 받으시는 땅, 하나님 영원히 함께 있는 임마누엘 땅엔 뭐가 있어야 된다? 여기에 언약궤. 결국 여호수아가 어떤 이방민족의 땅을 정복하겠다는 것은 언약궤를 안치할 특별한 땅을 약속이 없는 민족을 내쫓고, 그들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여튼 다 내쫓고 하나님의 언약궤에 집중해야 언약궤에 집합해야 될 새로운 민족으로 그 땅을 채우는 무슨 땅? 그것이 약속의 땅이거든요. 땅이잖아요. 약속의 땅이라는 율법의 진수가 드러납니다.

그러면 율법은 신약에 누가 다 이뤘습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방금 한 이 구조를 다 이루시고 땅에 있다 어디로 갔어요? 사도행전 1장 10절에 하늘로 올라갔지요, 그죠? 그럼 지상의 땅은 땅이 아니고 주님이 계신 곳이 바로 그 어디나 하늘나라죠. 그 땅, 그게 성령 안. 성령 안이 바로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희생의 취지만 남고 일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아까 누가복음 18장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뭘 했습니다, 내가 뭘 했습니다, 내가 뭘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어떤 분이 글 올려놨는데 나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또는 십자가마을에 <선택>이란 이름으로 글을 올려놨거든요. 나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교회에 댓글로 했어요. 나는 뭘 했다가 너무 많다. 앞으론 바꾸세요. ‘주님께서 이렇게 했다’고 바꾸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이마에 피나게 하셨습니다.’ 왜? 모든 것을 주께서 이혼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쉬워요.

언약궤죠. 그러니까 여호수아를 볼 차례에요. 여호수아 내용은 다 아실 겁니다. 모세언약에 기준해서 정복에 나섭니다. 여호수아의 기본은 여호수아언약이 있다, 없다? 없어요. 여호수아언약이 없어요. 여호수아를 쳐다보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의 특징은 뭐냐? 죽은 분의 약속, 언약이죠. 죽은 분의 언약이 지금 내 시대에 그대로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걸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죽음이 살아 있다. 또는 죽은 분이 살아 있다. 죽은 분은 누굽니까? 오늘날 죽은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살아 있는 거예요. 말이 어렵지요.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말해도 그다음부터는 다 정확하게 접근이 안 돼요. 죽음이 살아 있는 거예요. 이걸 달리 하면 운동하는 죽음이다. 움직이는 죽음. 귀신 잡아먹자. 가만있어도 죽음의 운동해요.

친척이 죽는 것은 이건 죽음이 아니에요. 유사 죽음이에요. 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에요. 진짜 죽음의 운동해서 ‘날 잡아먹자’ 해서 잡아먹히면 구원이고, 안 잡아먹히면 종교인이 되죠.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어릴 때부터 뭘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일조 했습니다. 짜증나, 짜증나 정말. 헌금을 얼마나 했고, 교회를 어떻게 세우고, 충성하고, 구제하고, 청소 막하고 이랬습니다. 그래 많이 해. 왜 희생이 빠졌느냐, 희생이.

거기다가 어떤 사람은 또 설교 듣고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나쁜 짓도 많이 하고요. 남 험담도 많이 했습니다. 그만, 그만, 그만. 짜증나, 듣기에 짜증나. 어떻게 남편을 구박했고, 아내로서 내 역할을…. 짜증나. 그런 소리하지 마. 누가 널 희생했는가, 딱 하나만 이야기해. 딴소리하지 말고. 그래서 난 죄인 맞습니다. 죄인 된다고 천당 보내주는 것 아니에요. 그런 흉내는 바리새인이 많이 했어요. ‘부족합니다. 다 내 탓이오.’ 천주교인들이 했던 것 아닙니까. 차 뒤에 붙여서. 백날 내 탓이라 해서 지옥에나 가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희생이라니까, 희생. 목회를 몇 년하고 강의를 다니고 소용없어요. 주께서 짜증나니까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죽음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 나사로 또 죽었어요. 근데 나사로에게 장착된 것은 뭡니까? 주께서 나를 살려준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이 살아 있다. 나는 이 땅에서 사라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 점은 나사로가 알게 될 거예요. 전에는 죽는 게 아쉬운데 이제는 말씀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주체가 아니고 말씀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게 이름이 바뀌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는 금지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언약궤입니다. 여호수아의 원칙 첫 번째는 진멸입니다. 그냥 다 죽여요. 애고 어른이고 다 죽습니다. 이방인들의 모든 것은 다 죽입니다. 다 죽이는 대상 가운데 이스라엘은 포함된다, 포함 안 된다? 포함됩니다. 여호수아 24장 20절, 네가 언약을 어기고 희생이 살아 있는 내용이 들어있지 않는 다른 신, 우상이죠. 여호와는 희생의 죽음을 실어 나르는 그 역할 하라고 이스라엘 줬는데 이스라엘이 죽음을 실어 나르는 그 장착된 내용을 빼고 언약이 없는 다른 신을 섬기면 너희들도 망한다.

신명기 8장에도 나와요. 시간관계상 다 못 찾는데 그 내용이 나와요. 하여튼 모든 거주지를 다 진멸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멸망시켜버리고 그걸 이스라엘 지파로 갈아엎고 채우기를 실시하는 겁니다. 그 실시한 내용이 아까 이야기한 모세언약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그럼 모세언약이 뭔데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집주인을 내쫓고 차지하느냐. 그게 텅텅 비어있으면 차지하면 되는데 고유의 주인이 있어요. 그런데 그 주인의 모습이 이스라엘 히브리인의 모습과 똑같아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쪽은 이스라엘은 언약이 뒤에서 민다는 것과 그쪽에서는 아무것도 없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도 정복할 때 주저했겠습니까, 안 그러면 용감했겠습니까? 주저할 수밖에 없지요. 윤리적으로 딱 깨놓고 인간적으로 우리가 잘 사는 그들에게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을 그냥 좋게 잘 지내자, 이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요. 그게 아니고 진멸해야 된다니까, 진멸. 갓난아이까지, 갓난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갓난아이 다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 짓을 감히 인간의 탈을 쓰고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어요? 못하지요. 못하니까 누가 하느냐? 천사가 앞장서서 그 일을 하게 합니다. 여호수아 새 땅으로 교체작업, 이걸 정복이라 해요. 기존의 가나안 열 족속 몰아내고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 할당하는데 이 할당을 뭐라 하느냐? 기업이라 해요. 우리 쉬운 말로 상속분, 또는 유산.

아버지 유산을 자식이 상속받을 때 유언장 받을 때 그 상속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식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아버지가 일 다 해놓고 아버지의 성과를 일방적으로 자식의 몫으로 돌리는 거예요.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것은 중요치 않고 마지막에 유언장에 뭐가 남아있는가가 자식에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자식 하나가 좋은 이유가 있어요. 싸울 이유가 없어요. 우리 형제는 너무 친해서 안 싸워요. 돈 문제가 없을 때는 안 싸워요. 그것도 자기가 각자 노력해서 얻은 것으론 안 싸우는데 누가 공짜로 주는데 아버지 쪽에서 공짜로 주는데 어떤 자식을 편애해서 많이 주고, 어떤 자식은 아버지 저에게 남길 것은요? 너는 빚이나 받아라. 편애, 미움 이것이 바로 언약 안에 포함돼 있어요.

이방민족은 우리보다 죄를 더 지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지독한 편애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믿습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 우리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미워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미워한 거예요. 창세전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 이미 결정 난 사항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받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고 진짜 좋아할 건 이걸 좋아해야 돼요. 결정 난 사항에 결과물이 나다. 이미 윗선에서 결정한 것을 아래 있는 우리는 그냥 은혜로 받을 뿐이지 내가 이걸 어떻게 유지할 방법, 이걸 어떻게 끝까지 천국 갈 때까지 잘 지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 묻지 마세요. 우리한테 그런 염려, 걱정거리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 지으면 우리가 받았던 구원도 취소될 게 아니겠습니까. 선택받았다 했지만 선택된 자도 자를 수가 있는데 나 잘리면 어떻게 해요? 그런 염려 같은 것, 그거는 새로운 것이 우리한테 주어지면 그 새로운 것 안에는 걱정까지 이미 해결된 것이 새로움으로 들어와요. 새로운 게 뭐냐 하면 너 죽었다, 이게 새로움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은 어제부로 죽었는데 오늘 살려준다, 이 내용이에요.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해서 잘 간수해서 주님 숨 끊을 때까지 주여 찬송합니다, 이렇게 폼 나게 그때 사진 막 찍고 동영상 찍어서 봐라 믿음 있잖아. 폼 내게 죽는 이것까지 단도리는 내가 한다는 그런 걱정근심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 없습니다. 그런 걱정 안 하셔야 됩니다.

이건 하나의 시간관인데, 그래서 시편 67편이 그만큼 중요한데, 고래라 칩시다. 시간은 이게 과거고 현재고 미래라면 인간이 아는 시간은 과거를 거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갑니다. 인간의 한계점이에요. 사실은 시간을 거꾸로 생각한 건데 인간은 이걸 모르고 인간은 변화된 것, 변화 중, 변화될 것 이걸 합쳐서 시간이라 해요. 변화된 것을 과거라 하고, 변화 중인 것을 현재라 하고,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는 소망, 이걸 미래라 합니다. 합쳐서 시간이라 하거든요.

주님께서 계시를 어떻게 하느냐? 인간은 이렇게 해요. 내가 이렇게 믿음 좋아서 감람산에서 은혜 받고 했으니까 이제는 술 끊고 담배 끊고 욕설도 끊고 신앙생활 잘하고 봉사해야지. 그럼 뭡니까? 뭐는 점선이에요? 그렇게 해서 잘하게 되면 점선, 미래는 아직 어떻게 됩니까? 손에 안 잡히지요. 미지의 것은 남아있지요.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지요.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걱정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이게 뭐예요? 이게 무슨 믿음이에요. 가능성이지 possibility지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계시는 시간이 이리 가는 게 아니고(고래 꼬리에서 머리로), 머리부터 뚫고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를 ‘잘 돼야 될 텐데’를 매일같이 패는 작업이 신앙생활의 은혜입니다.

‘잘 해야 될 텐데’를 내가 다 했어, 안 했어? 또 얻어맞는 그것의 반복이 우리 일상생활이에요. 시편 67편은 예수님에 의해서 다 이뤄졌다고요. 그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면서 우리를 개 패듯이 패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돼요. 뭐 믿음이 없다는 등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두 마음을 품었구나, 네가 요동치는 물결과 같다,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시지만 그걸 한 가지로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로마서 5장 20절,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없는 죄도 더하게 함이라. 그 율법에 복음으로 대체하고 말씀으로 대체를 해요. 율법에 말씀을 줘버리면 우리로 하여금 항상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는 이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오게 하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데, 전에 있는 감사가 아니고 어떤 감사냐? 새롭게 느껴지는 감사.

그래서 결론은 인간은 새로움 없이는 생활이 지옥 같다.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새로운 감사가 없으면 지옥 같아요. 그 새로움은 얻어터져야 나와요. 그냥 나오지 않고 얻어터져야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 베드로도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용서하라 하니까 예수님 일곱 번하면 됩니까? 일곱 번에 일곱 번에 일곱 번이라도, 사백구십 번 해라. 그럼 사백구십 번 하면 사백구십일 번째 가서 그럼 됐습니까? 사백구십칠을 해라, 그렇게 할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주여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겠습니까? 인간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그냥 하신다고 끝나면 안 되지요. 증거가 있어야지, 뭐로써? 피의 희생으로 끝나는. 희생이에요, 희생. 훌륭함이 아니고 착함이 아니고 희생이라니까요.

희생은 뭐냐? 희생돼야 될 자가 있고 희생하실 분이 따로 있잖아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모집하는 거예요. 사실은 여러분들의 골목골목에서 그걸 보셔야 돼요. 주께서 붙여놓은 벽보를 보셔야 돼요. ‘죄인구함’ 이게 골목마다 다 붙어있어요. 나 여기 있습니다, 하면 되는데 죄인구함. ‘미싱사 3명 모집’ 이것 말고 ‘죄인구함’이에요.

이걸 위해서 사도들이 죽고 싶지만 못 죽고 남아있어서 죄인을 구한다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 죄인을 구하는데 언약궤로 모집합니다. 언약궤가 처음에 어디로 오느냐 하면 길갈에서 와요. 언약궤 경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하고 일 년 뒤에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갑니다. 할 일이 있었지요. 언약궤를 만들어야 돼요.

언약궤는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거기 주변에 누가 있느냐 하면 자기 이름들이 있겠지요. 자기 인생, 자기 존재가 있겠지요. 이 존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거하고 주의 이름으로 되돌려 받는 작업을 언약궤에서 하고 있습니다. 올 때 뭐로 오느냐? 죄인으로 와야 되기 때문에 십계명부터 해서 율법을 선포했어요.

소가 바칠 때는 얼마를 갚아야 되고, 난간을 만들고, 여자는 여자 옷을 입고 청바지 입지 마라, 그런 이야기. 뭐 온갖 시시콜콜한 그 모든 것은 그렇게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에 그 법을 줌으로써 너는 어떠한 것도 직조, 텍스타일, 법의 구조 안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율법은 발달하겠어요, 발달 안 하겠어요? 발달하지요.

왜냐? 계속해서 문화가 발달하면 거기에 대한 율법도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어디까지 율법이 증가하느냐 하면 내 자아를 부정하는 데까지 증가하는 율법의 조항이 바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게 뭐라 하죠, 네 자로? ‘산상설교’에요. 너 죽었어.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누가 돈 빌려 달라 하는데 거저 주라. 이 율법을 대게 되면 도대체 경제활동 자체가 없지요. 실례지만 혹시 성도십니까? 예, 성도입니다. 돈 오백만 땡겨주세요. 아니고 나도 돈 없는데…. 성도 아니네. 딴 데 가자. 비판하지 말라하는데 비판해서 차타고 내내…. 그러니까 이거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런 것, 7장에 복음을 개돼지한테 전하지 마랄. 누가 개인지 돼지인지, 본인이 개일 경우도 있잖아요. 그리고 7장 13절에 보면 뭐 나옵니까? 좁은 길로 가라. 좁은 길로 가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사람이 통하고 이야깃거리가 있어야지 자기 혼자 좁은 길로 가면 없잖아요. 넓은 길은 뭐다? 멸망의 길. 아니 내일 멸망할지라도 나 오늘 수다 떨고 싶어. 사람이 찾는 길 찾고 싶어요. 모든 인간은 결국 우리의 내부가 천국에 적합지 않다는 것을 최종적인 율법적 기능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언약궤를 만듭니다. 언약궤가 용도가 있었어요. 어디 있느냐? 요단강을 건너가요. 홍해는 뭐가 없다? 언약궤가 없어요. 그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어요. 요단강은 하나님의 이름이 구체적 사물로 물체로 나타납니다. 깊은 곳까지 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갑니다. 그 흘러내려오는 H₂O, 뭡니까? 물이 무슨 시건이 있어서 알아서 멈춰요? 희한해. H₂O가 멈춰서 지나간 것은 빠지고 길을 내어 스톱이 된 거예요. 그때 한창 홍수 있을 땐데 빠지고 난 뒤에 그들은 빠져나왔지요.

그다음부터는 그것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궤를 놓고 이 언약궤에서 양면이 나와요. 여러분 007 영화나 미국 첩보영화에 보면 다이아몬드 하나 놔두니까 거기서 빛이 쫙 나오지요. 둘로 나눠지지요. 언약궤 나오고 여기서 저주가 나오고 축복이 나오지요. 언약궤가 모든 율법의 출처였다. 언약궤 율법에 걸려든 사람은 어디로 와야 된다? 언약궤로 와야 산다. 여기는 피가 있는데 그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이거는 율법을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에 언약궤를 직접 만지면 죽는다. 안 죽기 위해서 누가 했다? 레위지파가 특별히 언약궤를 사수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수아의 땅 개념에서 땅 개념이 둘로 합니다. 땅 있는 자, 열두 지파. 땅 없는 자, 한 지파, 레위지파. 합치면 열세 지파인데 야곱의 언약에 그런 게 없잖아요. 그럼 뭐냐? 한 지파 앞에 투영된 것이다.

레위지파가 다이아몬드라면 다이아몬드에 햇빛 쪼이면 뭐가 나온다? 열두 지파가 나와요. 열두 지파에서 있었던 실무진들을 통해서 레위지파는 땅이 없다는 말은 다른 땅을 사모한다. 눈에 보이는 땅 말고 없는 땅이 최종적이라는 걸 보여주는 역할이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무엇과 함께 산다? 언약궤와 함께 살지요.

레위지파가 땅은 없는데 거주지는 있어요. 48군데 거주지가 있어서 각 지파에 파견 근무하는 것처럼 케이크 위에 딸기나 초콜릿을 뿌리듯이 뿌려놓잖아요.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 오늘날 열두 지파가 어떠냐? 참깨 뿌리듯이 흩어진 열두 지파로 각각의 보이지 않는 이 땅 말고 없어질 땅이 아닌 다른 땅을 사모하는 열두 지파로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요단강에서 길갈로 가요. 그다음에 실로로 옮깁니다. 길갈, 실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정복하는 코스 따라 요단강 건너서 중부지역 지나서 먼저 위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가서 예루살렘에 멈추게 돼 있거든요. 현재 이란을 치는 미군의 사령부가 중부사령부에요. 왜 미국 중부나 치지 남의 나라 중부를 치느냐? 그게 미국의 군대는 전 세계를 다 내가 볼 때 중동에 관해서 중부사령부에요.

그래서 북쪽을 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이제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길갈에서 언약궤는 실로에 있어요. 실로에 있다가 여호수아가 칠 년 만에 정복을 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어디로 가느냐? 세겜으로 옮겨요. 아니 세겜으로 옮기는 게 아니고 세겜은 요셉의 해골을 안치합니다. 어쨌든 간에 세겜이 중심지고 실로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 실로를 지켜야 될 것이 누구라 했습니까? 제사장. 그 제사장 중에 사사 시대 끝부분에 지켜야 될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엘리 제사장.

엘리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켜야 되는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엉망이라. 다시 말해서 죄인이어야 되는데 자기 죄를 인정해야 되는데 아들들이 제사장도 권력이라고 재벌2세라고 지 마음대로 까부는 거예요. 그것이 아버지가 돼서 혈육관계로 한계가 있어서 결국 아버지도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전쟁을 일으켜요.

블레셋과 전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땅에 있어야 될 언약궤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블레셋 땅으로 포로 잡혀갑니다. 그런데 말이 포로지 포로 잡혀간 언약궤가 인적이 드문 아무도 없는데 다곤 신과 붙어서 다곤 신이 아침에 보니까 이건 뭐 완전히 박살나버렸어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 다곤 신이 이겼다고 다곤 신당에다 언약궤를 놨는데 다곤 신이 반신불수가 되어 손모가지가 다 날아간 거예요.

그래서 다곤 신만 문제가 아니고 그다음부터 언약궤를 이동하는데 현재 가자 지역, 블레셋 지역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아스돗, 그다음에 가드, 에글론 가는 데마다 이것은 정복을 이스라엘이 정복 못하니까 누가 정복하느냐 하면 언약궤가 홀로 정복해요. 이건 뭐 맞춤부터 제작까지 다 한 거예요, 정말.

전에 했지요. 지구를 지키는 자는 누구다? 꼭 어린아이들이 지켜요. 크로스 해서. 어른들은 다 소용없어. 어린이가 안 일어서면 외계인을 막을 수가 없어. 어린아이가 지켜, 어린아이가. 이건 멀쩡하게 하는 있는 나무상자 하나가 천만, 백만, 수십만 인간이 못한 걸 혼자 다해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블레셋이 회의해서 토해내요. 도로 가져가라. 우리 감당이 안 된다.

이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믿어야 될 사람만 감당이 되고 그 외에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복음도 성령의 역사지만 복음 받는 자도 성령께서 미리 전조작업이 없으면 복음을 그냥 개돼지가 귀한 줄 모르듯이 귀한 줄 몰라요. 이게 뭐고? 치워라. 나한테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갖다버리지요.

따라서 버리면 복음 전한 사람도 자존심 상하잖아요. 너한테는 달래도 안 줘, 이렇게 버티지 마시고 튕겨져 나오셔야 되죠. 그래야 되지 안 그러면 복음 아는 우리가 복음 안다는 그게 자기 의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복음을 빙자한 나 잘났다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복음을 주고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 저쪽에는 천국 해당사항이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모양이다, 하고 그냥 물러서야 돼요. 물론 나오면서 침은 뱉지 말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제자들에게 뭐하라 했습니까? 던지지 말고 먼지 묻었네, 하고 먼지 터는 게 심판받을 대상이라고 여기다가 표시한 거예요. 간첩이 와서 표시하듯이 이 집은 심판대상 표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도를 누가해요? 우리 힘으로 못해요. 성령께서 어디 집에 가라도 아니에요. 그냥 만나게 해줘요. 만나고 튕겨 나오고, 만나고 튕겨 나오고, 이렇게 돼요. 이 교회도 마찬가지고. 만나고 튕겨 나오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디 갔느냐? 벧세메스에 갔는데 인수인계 받았어요. 벧세메스 사람들이 택배 물건인 줄 알고 소가 오는데 쏟아지겠다, 해서 덥석 잡으니까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더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이란 곳에 이십 년간 대기됩니다. 감당할 수가 있어야지. 이십 년간 대기하는 그 기간에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드디어 사울 왕이 날아가고, 사울 왕은 왜 죽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요청했던 거거든요. 이제부터 하나님 믿지 말고 우리가 대통령 뽑자. 대통령 뽑은 거예요. 중국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냥 뽑힌 거예요. 뽑아놓고 어떻게 합니까? 제거해버립니다. 인간 지도자의 한계점을 보여주지요. 이스라엘에는 뭐가 필요 없다? 이스라엘에는 왕 자체, 지도자 자체가 필요가 없다. 왜?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필요 없다.’

이거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마태복음 23장 볼까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8~10절)

너희 지도자는 누굽니까? 그리스도. 또 희생이에요. 희생되지 아니한 자는 지도자가 없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야기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없습니다. 누가 지목해서 보여줬습니까? 하늘의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님을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새 언약의 특징은 어느 누구도 그 살과 피에 그 사람의 행위가 섞이면 안 된다. 이 새 언약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어떤 순교도 주의 피에 섞이면 돼요, 안 돼요? 순교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니 죄 안 지을 수 없어요. 안 지을 수 없는 죄 중에 하나가 순교하는 거예요. 분명히 스데반 집사는 순교했지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은 거죠.

그러면 예수님의 이 언약을 가리는 자가 누굽니까? 최종적으로 언약을 가리는 자가 나의 존재라는 사실, 육체를 가진 내가 죽을 때까지 숨 쉴 때까지 계속해서 가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성경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가리면 말씀으로 죽어라, 해서 새롭게 감사가 또 나오고. 감사해서 나는 성도다, 해서 까불다가 또 죄 지어서 그다음에 또 그것 뜯어내고, 너는 네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체라는 걸 또 알려주고.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부러 맞닥뜨리게 해요.

이제 마지막으로 어렵게 하겠습니다. 다수. 다수 중의 나에요. 이 말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고 모든 움직이는 것은, 그 원인을 거쳐서 수천 가지 수만 가지의 일어난 일들의 파동에 의해서 나한테 이런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에 왜 나한테 이런 일을 했냐고 그 원인을 추적해보면 추적이 안 돼요.

어떤 개와 와서 내 바지를 물었다. 내 바지를 왜 물었는가, 쫓아가보니까 그 개를 보호해야 될 부부가 부부싸움을 한 가예요. 부부싸움을 왜 했는가? 아들 잘 키우니, 못 키우니 하다가 싸운 거예요. 그럼 왜 애를 못 키웠는가? 성적이 떨어진 거예요. 수학성적이 왜 떨어졌는가? 그 반에 담임선생이 바뀌어서 그런 거예요. 담임선생은 새로 전근 와서 그렇고. 그럼 전근 오기 전의 학교에 가서 따져야 됩니까? 왜 선생님을 우리 아이 학교에 보냈습니까, 교육청에 따질까요?

이 정도 아는 것이 연기설, 화엄경에 나오는 불교이론이잖아요. 모든 것은 그냥 인연이다. 인연이라 여겨라. 불교는 인연이라 여기고 지옥 가는 거예요. 그들은 뭐가 빠져요? 희생이 빠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드디어 하나님이 지정했던 다윗이 왕이 돼요.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때에 칼을 갈았다든지, 물론 원수를 갚기 위해 칠 년을 무술을 익혔던 게 아니에요. 골리앗을 이겼을 때에 다윗은 어른이 아니었고 뭡니까? 소년이었어요. 모든 기존의 어른에 대한 부정이죠. 능력 없는 자가 소위 능력 있고 방패가 있어도 이길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전쟁은 소년을 통해서 전쟁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다윗이 사울 왕을 대신 왕이 됩니다. 그때 여부스 족속이 갖고 있던 예루살렘, 여호수아 때 마침 정복하지 못한 그 장소를 차지하고 이름을 예루살렘으로 바꾸면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딱 안치를 해요. 그럼 이게 뭡니까? 언약궤가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증거로서 다윗이 왕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구체화되는 그 한 가운데 언약궤가 자리 잡음으로써 진짜 하나님의 땅, 왕국은 이런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는 것이 언약궤가 고정된 장소에 제자리를 찾아왔을 때 그때입니다. 바로 그때 이후의 시가 시편 67편, 특히 7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땅의 끝, 새로운 땅에 언약궤는 땅의 시작 그게 뭡니까? 땅 끝이에요.

이 복음을 로마서 10장에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은, 땅 끝은 해남마을이 아니고 땅 끝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이 새로운 땅과 그리고 기존의 땅의 끝과 시작을 이어주는 그 중심에 복음의 말씀이 있고 거기에 투입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의 죄인이 무슨 할 일이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습니까? 능력이 없기에 천하의 죄인이기에 비로소 몰랐던 사명이 기쁨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주시고 이 사명조차 이미 말씀에 예언된 그대로임을 추가될 행동이 필요하지 않음을 더욱 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