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괜찮은 자아의 탈락(에스겔 20:49) / 251128 본문
녹취:이하림
광주강의20251128a 에스겔 20장 49절(괜찮은 자아의 탈락)-이 근호 목사
오늘은『신구약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14페이지 세 번째 질문,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에 관한 질문입니다. 푸른 나무/ 마른 나무, 서로 대조적이죠. 푸른 나무는 살아있고 마른 나무는 죽어있어요. 푸른 나무, 마른 나무를 에스겔 선지자가 먼저 예언했습니다. 그 질문을 보면 에스겔 20장 46-47절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구절을 49절까지 보겠습니다.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방들의 삼림을 쳐서 예언하라 남방 삼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의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멸하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찌라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핵심 부분을 끄집어낸다면 ‘남방 삼림’입니다. 남방 삼림은 유다고, 또 하나 끄집어내라면 ‘비유’라는 거예요. 여기 ‘불’이 있고 불이 어디를 향하여 지핍니다. 불이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이 불됨을 드러내는 방법은 불에 탈 거리를 하나님께서 마련하면 되겠죠. 그게 ‘삼림’에 해당됩니다.
삼림은 에스겔에 의하면 두 종류로 나뉘어져요.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 이걸 다 합하면 삼림이 되겠죠. ‘불이 있다, 삼림이 있고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가 있다. 불과 삼림의 만남에서 맹렬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런데 이게 비유다.’ 이게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라는 것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는 주저해서도 안 되고 머뭇거려도 안돼요. 머뭇거리는 것도 안돼요. 말씀에 대한 태도는 간단합니다. ‘말씀에 대해 목숨을 걸고 자기 목숨을 본인이 갖고 있는 것에서 놔버려야 한다.’ 이게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찾아온 이유가 내 목숨을 여기에 담으라는 거예요. 접시가 오면 접시가 왜 오는가? 목숨을 그 접시에 담아야 돼요. 네가 갖고 있으면 안 되는 목숨을 현재 네가 갖고 있다는 거예요. 내 목숨을 내가 갖고 있으니까 내가 할 도리, 보통 사람들의 도리가 뭐냐 하면 ‘어떻게 내가 살 것인가’에 대한 치중을 하겠죠.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뭘 살리는데? 자아를 살리죠. 나를 살리려 하죠. 그런데 나를 살리면, 이 말씀의 세계에서는 나 살리는 것을 용납 안합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 전체에 없어요. ‘나는 어떻게 삽니까?’하는 내용이 성경에 없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에겐 뭐가 있느냐? 어떻게 하든 나는 살아야겠다는 게 있잖아요. 있으니까 성경을 볼 때 나를 살릴 수 있는 요소를 뽑아보려고 탐색을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러한 인간들의 기웃거림, 머뭇거림, 주저함을 알고 뭐로 이야기하는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비유로.
인간이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은 인간 본인한텐 비유가 아니고 심각한 문제에요. 진지한 문제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전혀 문제가 안돼요, 그게. ‘사느냐 죽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네 목숨을 네가 갖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민 말씀에다 그걸 얹어서 말씀이 그냥 말씀 쪽으로 가도록 자기를 포기하는가?’ 그게 성경말씀에서 중요한 문제죠.
‘말씀이냐 아니면 자아냐’ 이게 문제지,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말씀에 입각하면 그건 문젯거리가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비유에 대한 의미를 본인이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서 방해하고 있습니다. 차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다’를 기본으로 할 때 인간은 주위 환경에서 유리한 것만 찾아 나서겠죠. 그중에서 말씀도 마찬가지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찾아서 내게 유리하게 하는데, 내가 산다는 것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측’합니다, 인간은.
예측을 하는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예측에서 나오는 원천을 소급해보면 뭐가 들어있는가?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살아야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한테도 내가 좋은 인상을 남겨야 되겠다. 어떻게 하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말씀을 듣든지 복음을 듣든지 해서 하나님 앞에 좋은 인상을 남겨야 되겠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이미 이야기한 이 ‘죄인 됨’을 아주 강렬하게 반발하는, 거부하는 그러한 마음자세를 보이는 겁니다. 내가 산다 하니까 자꾸 예측을 하는 거예요. ‘나이 서른 되는데 시집은 언제 갈 것인가?’, ‘키는 몇 센티까지 클 것인가?’ 전부 ‘내가 산다’가 기본 되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성경에 대해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주저하거나 머뭇거리게 만들어요. 주저하거나 머뭇거린다는 말은 아끼고 싶은 것이 내 손에 있다는 거죠. 뭐 대표적인 게 자식이죠. ‘자식이 이렇게 나오는데 나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거. 어머니의 본성이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한테는 나쁜 인상을 안 남기려고 이렇게 요령을 부리는데,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뜻은 단호합니다. “내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양보하지 않겠다.”
양보하지 않게 되면 양보하지 않는 결과가 뭐냐?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일점일획이라도, 아무리 자식이 귀하더라도, 자의식이 생겨서 말씀을 거부한다는 어떤 핑계도 주의 말씀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자의식이 생겨서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데에 있어서 엄마도 같이 흔들린다는 것은 사실은 엄마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밖에 안돼요. 엄마가. ‘나는 구원받았는데 쟤도 자식이니까 데려가야 되겠다.’하는 그 생각 자체가 지금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거예요. 본인은 과연 주님께서 본인을 데리고 간다는 그러한 간증이라도 뭐 있습니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데려가지 않아요. 우리를 교체하죠. 자아가 있는 이상 안 데려갑니다. 자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말씀으로 바꾸어서 데려가는 거예요. 말씀으로 바꿔서.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머뭇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락(lock)에 걸려있기 때문이에요. 락, lock, 자물쇠가 자기한테 걸려있어요. 딸꾹질 같은 거예요. 뭔가 좋은 말을 하고 싶은데 윽, 윽,하고 온전하게 바치지 못하고 내 쪽으로 잡아당기는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는데요.
락이 걸린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경우라도 괜찮은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경우라도. ‘최선을 다하고 잘 믿기 위해서 하나님 복음 섬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괜찮은 것이다.’라는 인식. 아까 이야기한 ‘죄인 됨’이라는 그것은 안중에 없어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럼 온전히 락이 풀린 상태는 어떠냐 하면, 사람 찾지 않고 주님 찾는 사람이 락이 풀린 거죠. 왜냐하면 예측을 하게 되면 사람은 여기 예측에 모델을 동원시켜요. 이런 경우에는 이게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자꾸 구성을 해요, 인간은.
딸이 시집갈 때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는 당신 딸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빈손으로 오세요. 우리가 다해줄 테니까.’ 이런 모델을 그리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일본말만 할 줄 알면, 그것도 능숙하지 않고 대화만 되도 평생을 다 책임지겠습니다.’ 어떤 모델을 예측할 때는 그냥 예측하는 게 아니고 내가 괜찮은 존재니까 괜찮은 존재에 격이 맞는 그런 예측을 우리는 자꾸 만들어내고 연상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것이 말씀 속에 없다는 점을 미리 알고 말씀에 대해서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몽땅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보통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몽땅 바치겠습니다, 해놓고는 바쳐진 내가 어떻게 흘러갈까 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이것 역시 머뭇거리고 주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되는가’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됩니까?” 여러 가지 있지만 한마디로 이야기해달라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지옥을 알면 횡재한 겁니다.” 성경에서 지옥을 알면 이것은 횡재한 겁니다.
오늘 질문 3번에 나온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의 구분. 특히 누가복음 23장 31절에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할 때 이 ‘푸른 나무’는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 빼놓고 나머지 모든 마른 나무는 어딜 가느냐? 지옥에 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지옥 간다 할 때, ‘나는 지옥가면 안 돼!’하면 자기 자신을 계속 붙잡고 있는 모습이죠.
그럼 락이 풀린 사람들, 자기가 자기를 붙잡지 않고 놔버린 사람의 특징은 뭐냐? 주님한테 이렇게 말해요. “주님, 그거 궁금하네요. 지옥이 뭡니까?” 갑자기 자기 생각을 안 하고 “주께서 언급한 그 진노의 불, 불꽃, 맹렬한 지옥불의 세계가 어떻습니까?” 거기에 관심이 꽂히면 돼요. 거기에 관심이 꽂히면 된다고요. 지옥에 관심이 꽂히면 딸이 시집을 가든 아들이 자의식이 생기든 그딴 것은 이미 관심 밖의 문제에요. ‘아들도 지옥가고 나도 지옥가고 그럼 안 되는데.’라고 하는 것도 관심 밖의 문제에요.
주께서 제시한 개념, 주님의 개념은 어디서 나온 개념이냐 하면 주님에게서 나왔잖아요. 이게 영의 세계의 확장입니다. 이걸 성경의 영적 해석이라 합니다. 성경의 영적 해석의 그 개념에다 관심을 둬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목숨에 대해서 주저하거나 자기 목숨에 대해서 머뭇거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아주 특이한 모습을 보이죠.
반대로 이런 영의 세계의 확장 말고 영적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은 뭐냐? 육적 해석이겠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천 월미도에 있는 놀이동산, 저는 안 가봤어요. 안 가봤는데 유튜브 보면 나와요. 거기에 ‘디스코 팡팡’이라는 놀이기구가 있답니다. 여러분 아셔요? 둥그런 대야 비슷한 데다 사람들 넣어놓고 좌우로 흔들고 빙빙 돌고. ‘잘 붙드세요.’해서 붙들어도 나중에 힘 빠지면 떨어지고 난리도 아닌…. 거기 디스코 팡팡 탄 사람은 ‘가만있어봐. 지금 밥할 때 됐는데?’ 이게 생각납니까? 안 나죠. 진동하는 그 놀이기구타서 기분이 업 되죠? 신난 거예요. 제목도 ‘팡팡’이잖아요. 팡팡.
주님에 의해서만 알려진 지옥 개념이 디스코 팡팡이라면 그 개념 안에서 즐기면 되잖아요. ‘아, 나 지옥가면 안 돼.’ 이런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어떤 개념을 이야기할 때, 이걸 ‘비유’ 라 하는데, 비유를 할 때 일반 자기 목숨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비유가 돼요.
아까 에스겔 20장 49절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완전히 맹렬한 불에 타야 될 삼림, 그 당시에 이스라엘, 범죄한 유다가 에스겔보고 말하기를 “너는 왜 자꾸 비유로 말하느냐?” 비유로 이야기한다는 말은 내가 평소에 해석해왔던 현실을 따로 못 놓겠다는 뜻이에요. 내가 쥐고 있는 이게 진짜 해석인데 네가 말하는 것은 도대체 자꾸 비유처럼 들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그 비유의 세계에 들어와 버리면 인간들이 자기 살고자 해석했던 것, 그 세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것이 되죠. ‘거짓’. 거짓이죠. ‘지나온 것은 모두 거짓인 걸’ 어디에 나오는 가사인데 여러분 혹시 이 노래 알아요? 이문세가 불렀던 <옛사랑>이라는 가사에 보면 나와요. 지나온 것은 모두 거짓이에요.
그 사람이 에스겔 예언하는데 ‘왜 비유로 이야기하느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터무니없는 망상처럼 들린다. 거짓말 치지 마.’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에스겔 본인은 그렇게 말한 그들이 주님의 맹렬한 진노의 불에 불살라져도 그들은 합당한 존재들이 되는 거예요. 합당한 존재들. 그들에게 지옥의 진노의 불이 쳐발려야 마땅한 발언들을 그냥 내뱉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다 치고 제가 어렵게 가보겠습니다. 어떤 조각가가 조각품을 제시하는데 가격이 2000만원이에요. 2000만원 짜리 조각품을 전시했습니다. 그럼 조각은 어떻게 생겼는가? 전시장 한 구석에 빈 터를 딱 만들어놓고 여기 조각품을 세웠다는 거예요. 벌거벗은 임금님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데 있다는 것, 이게 제 작품입니다. 이게 2000만원이에요. 아무것도 조각하지 않았는데 여기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됩니다, 이런 거예요. 그 가격이 2000만원이에요.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미 써먹었던 거예요. 봉이 김선달. 대동강이 자기 겁니까? 자기 것도 아닌데. 사기의 원조 아닙니까? 캄보디아 사기의 원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기꾼의 원조죠. 대동강 물이 자기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돈 받고 팔아먹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이걸 보고 ‘이건 사기다.’ 사기라고 할 거란 말이죠. 그럼 어떤 사람이 이 조각가한테 2000만원 지불하고 “그럼 이 조각품 우리 집에 가져갑니다.” “예, 가져가세요.” ‘드디어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이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이게 지금 성립이 안돼요. 뭐 실체가 없으니까.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이걸 믿으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은 이걸 믿으라는 거예요. 네가 여기 조각품을 못 보는 이유는, 너는 돈을 주고 이 조각품을 구매하면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 뭐가 있어요? ‘내’ 것, 나의 것이 있죠. 그 나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기(詐欺, 나쁜 꾀로 남을 속임)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사기로 간주하는 그 원동력이 나로부터 나와요.
내가 존재하매 누구는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조각품이에요. 내가 보이기 때문에. 내가 유일한 실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실체가 없어요. 그래서 신이 있다는 걸로 교회에서 사기를 치고 있잖아요. 이건 2000만원 주고 집에 가면 그만인데, 교회는 있지도 않은 신을 향하여 달마다 십일조를… 그것도 다달이 장부적어가면서 이거 안내면 집사도 못되고 장로도 못되게 만들어요, 십일조 안했다고. 이런 사기꾼들 보세요.
그런데 이런 종교라는 사기가 왜 필요하냐 하면, 인간들이 그 사기꾼한테 가고 또 교회 철야한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사기가 아닌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진짜라는 것. 아까 이야기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매 일상을 통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야.’ 본인이 본인한테 자꾸 믿음을 주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한테.
그리고 본인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미래에 대해 예측을 해요. ‘우리 딸은 진짜 예측한 대로 강남에 사는 남자가 와서 가져갔다. 돈 한 푼 안들이고 시집갔다.’ 그럴 때 거기 남아있는 결과물은 뭐였습니까? ‘역시 나의 예측은 하나님이 인정해줘. 역시 진짜 믿음으로 사니까 하나님이 도와준다.’
아까 이야기한 문장을 다시 쓸게요. ‘나는 뽑아낼 수 없는 Lock에 걸렸다. 자물쇠가 걸려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여전히 괜찮은 존재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님 빼놓고 다 지옥 보내는 이유를 아시겠죠? 주님 빼고 다 지옥 가는 이유를 아시겠죠. 인간은 태어나기를 이런 의식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러면 아까 횡재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이 뭔가를 알면 그 사람은 횡재했다고 이야기했죠. 지옥에 관심을 두고 내가 지옥 가냐 안 가냐 관심 말고, 지옥이 왜 생겼으며 지옥은 어떤 동네며 지옥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 거기에 관심을 둔 사람 같으면 거기서 무엇이 누락돼요? ‘나 지옥가면 안 돼. 나 괜찮은 사람이니까 어떤 경우라도 지옥가면 안 돼.’라는 사실은 누락되겠죠. 빠져버리겠죠, 거기서. 그럼 락이 풀린 거예요.
“네가 왜 예수님의 말씀, 지옥에 관심이 있느냐?”라고 그 사람한테 물으면 “주님은 진리고…”. ‘주님은 진리다.’ 이러면 안 되고요. 그것은 역시 락이 걸려있는 거예요. ‘주님은 진리고 나는 그 진리를 아니까 나는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면 역시 나를 계속 갖고 있다고요. “주님은 진리고” 그다음에 “나는 거짓이거든.” 나는 거짓이다 이 말이죠.
그럼 다른 사람이 묻죠. “네가 뭐 나쁜 짓했는데 거짓이냐?” “나는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보거든. 태어나기를.” 그럼 내가 괜찮은 사람 같으면 내 자녀, 자식, 모든 가정환경을 어떻게 봐요? 괜찮은 가정으로 보는 거예요. 괜찮은 가정이니까 괜찮은 가정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나오죠. ‘망가지지 않도록. 아주 망가지지 않도록 좀 도와주세요.’
그런데 마태복음 5장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했죠. 그럼 율법이 없어지려면 조건이 뭡니까? 천지가 없어져야 되죠. 천지가 없어지는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다 포함됐죠. 하늘과 땅, 해 다 포함됐죠.
그러니까 주의 뜻은 명확합니다. 뭐를 포기하고 뭐를 건지겠다? 창조된 모든 것을 인간까지 포함해서 다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건지겠습니까? 율법의 완성. ‘다 이루었다’만 건지겠다. 이 확고한 주님의 뜻은 그 앞에 아부를 하고 아양을 떨어도 소용없어요. 이건 요지부동이에요. 변동사항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에 대한 기본전제는 의외로 굉장히 간단해요. 명쾌하고 명백하게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끝. “네가 망가졌다고 섭섭해하지 마라. 네가 망가진다고 염려하지 마라. 왜냐하면 착한 일이 네가 죄인 됨을 방해하기에.”
가만있어도 죄인이고, 착한 일해도 죄인이고, 또 하나 추가하면 의도적으로 나쁜 짓해도 뭐가 됩니까? 죄인이고. 그러니까 나오는 결론은 뭡니까? 그냥 살아. 그냥 살아. 그냥 살라는 거예요. 그냥 살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냥 살면, 그냥 사는 것은 어디에 포함되느냐? 일점일획이라도 양보할 수 없는 말씀의 세계, 율법의 세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냥 살아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식 위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모조모 따지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고요.
명쾌하고 명백한 사실은,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그 사실은 나쁜 짓해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말씀 안에 합류된, 포함된 내용에 출렁거림이다 이 말입니다. 자꾸 자식이 망가진다고 안 편다고 걱정하는 것은 아직 덜 망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망가져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죄인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죄지어도 죄인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은. 주께서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찾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정말 어려운 문제요. 아까 이야기 끄집어냈는데 ‘지옥은 무엇이냐?’에요. 지옥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것은 인간 쪽에서 먼저 문제제기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이용해요. 말씀이 육신을 만나잖아요. 그러면 말씀은 예수님이고 육신은 아담의 몸이잖아요.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 되는데 그 육신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누구도 다 갖고 있어요? 인간이 갖고 있죠.
육신이 육신으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육신으로서 뿜뿜 자기의 의사와 뜻과 이 세상 살아가는 요령과 이런 것을 주저하지 않고 뿜어내죠. 인간은 계속 자기 의사와 행동을, 결심과 의지를 뿜어내잖아요. 뿜어 내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말씀의 입장에서는 뭐만 하면 돼요? “그것은 거짓이야. 그것은 아니야.” 이것만 하면 되겠죠? 그렇죠? 인간의 모든 나오는 뜻을 거부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라도 일치되는 게 있으면 안돼요. 일치되는 게 있으면 예수님을 살려두려고 할 거예요. 일치되는 게 없어요. 열두 제자들이 한 행동은 뭐냐? ‘예수님의 인생은 모르겠고, 나는 나부터 내 갈길, 내 살길을 찾겠습니다.’ 그래서 떠난 거예요.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주님을 싫어하고 미워한 게 아닌데 무엇이 우선이었습니까? 이 상황에서 나 사는 게 우선이었다는 겁니다. 나를 고기 잡는 어부가 되게 하든 제자가 되게 하든 그건 주님 본인의 뜻이고요. 주님 본인의 뜻이 있다 해서 내 뜻을 접은 게 아니고 내 뜻은 계속 여전히 생생하게 1순위로 살아있는 거예요, 인간은.
제자들 모습이 성경에 나온 걸 보면 여러분 감사해야 됩니다. 어쩌면 우리 모습과 똑같은지에 대해서 어떤 위로를 받아야 돼요. 예수님은 예수님이고요, 우선은 내가 살고 보는 게 우선이에요. 그럼 여기 문제가 되는 ‘지옥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되겠죠. ‘인간이 염두에 둔 지옥은 무엇이냐?’
이 논리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차이’입니다. 무슨 차이냐? ‘내가 소망한 것과의 차이’ 이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옥이에요. 내가 소망한 것, 내가 합류하는 그 세계와는 확연하게 다른 그 차이 세계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지옥이에요. 지옥을 만드신 주님 보기에 어떻습니까? 같잖아가지고 코가 튀어나오겠다. 웃기지도 않아요.
내가 소망하지 않는 곳. 예를 들면 평생토록 나를 해코지한 인간이 있다. 끝까지 전도해도 안 받아준다. 그러면 내가 전도하는 노동을 했잖아요. 내 노동을 개무시했죠? 그럼 우리 마음속에 울분이 나오겠죠? 울분이 나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되겠어요? 어디가야 내 속이 풀립니까? 어디가야 됩니까? 지옥. 그게 지옥이에요. 이 지옥이 마련되면 나는 어디가요? 지옥과의 맞은 편, 나는 천국 가니까 이게 내 소망에 지금 부합되는 거예요.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인위적입니까? 락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거예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라는 철학가가 바로 이러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담은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세계도 가능하냐 하면 ‘아담은 죄 지은 적이 없다’. 하나님은 아담을 죄 지은 적 없는 세계로 만들 수 있다. 왜? 신은 모든 게 가능하니까. 미쳤어요, 하여튼. 미친 게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신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느냐? ‘이 두 세계가 공존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철학이니까 철학자니까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변화를 하나의 원칙 속에 딱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싶은 거예요. 정리하고 싶은데 변화가 너무나 다양해서 이 다양한 변화마저 하나의 원칙 속에 담으려고 하니까 전지전능한 신을 소환해야 돼요. 신을 소환해서, 인간들이 아는 게 이것(‘아담은 죄를 지었다’)이라면, 창세기 3장에 나오니까 아는데 그래도 신은 인간보다 월등해야 되잖아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는 걸 알고 계셔야 되잖아요.
그러면 인간보다 많은 걸 더 온전히 아는 신이 있다면 그 신에 의해서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세상의 많은 변화까지 신은 알고 있으니까 그 신이 알고 있는 데다가 ‘아담이 죄 지은 적 없다’를 집어넣으면 우리는 무엇을 획득할 수 있어요? 제대로 된 신의 온전함에 편승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럼 이건 ‘절대불변의 원칙을 내가 가졌다’가 되겠죠. 세상에 우리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신이란 것을 소환해서, 그 신의 존재를 도입해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라이프니츠가 철학으로 설명하는 신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아담은 죄를 지었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다’가 공존할 수 없지만 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신은 ‘차이’다. 신의 활동은 차이를 만든다. 신이 곧 차이다. 따라서 여기서 신적인 윤리와 도덕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비록 내 뜻과 안 맞더라도 신의 뜻이 이렇다는 일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친절과 사랑을 다 베풀어야 된다는 겁니다.
베푼다 하니까… 제가 화요일, 목요일마다 우리 손자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데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인사를 하거든요. “공수”하면 손 모으고 선생님과 인사하고 같은 말을 데려다주는 나한테도 하는데, 인사말이 한 달마다 바뀌어요. ‘친절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는 9월. 10월은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배려라는 말이 어려운데…. 11월, ‘너그러운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그 친절, 배려, 너그러움을 차이나는 모든 사회 구석구석에다 소위 하나님 믿는 사람이 적용하게 되면 이 사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완벽한 천국이 된다는 아이디어가 라이프니츠 아이디어에요. 종교? 이슬람이냐, 히잡을 쓰느냐 안 쓰느냐, 동성애를 하느냐 아니면 이성애자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이렇게 묻지 말고, 그런 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타났기에 우리는 형제를 무조건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따라서 성경 볼 필요도 없이 이런 철학적 인식만으로 이 땅에서 온전한 신의 나라를, 성경 필요 없고 계시도 필요 없고 우리의 양심과 이성, 철학적 지식만으로도 우리는 천국,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다. 이게 나중에 신학적으로 더 발전하면 산상설교는 이 땅에서 우리 손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파가 나오죠. 그 신학이 또 따라 나와요.
자, 이쯤 했으면 제가 질문해야 될 시간이 왔죠? 뭐가 문제입니까, 지금? 라이프니츠 이 사람이 뭐가 문제에요? 라이프니츠 이 사람 생각뿐 아니에요. 성령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 뭐가 문제입니까? 아까 여러 번 반복했는데, 뭐가 문제에요? 자기가 뭔지를 모른다? 죄인인 줄 모르고 자기를 아직도 뭐로 본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쓸 만한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탈락이 안돼요.
결국 모든 이런 체제에서 마지막 뽑아 나오는 게 뭡니까? ‘나는 무엇을 실천하면 됩니까?’ 이게 바로 ‘이성적으로 정리 안 되는 신과 영혼과 자유가 실천적으로는 증명된다.’는『실천이성비판』(칸트 저서)이라는 거예요. 도덕법. 도덕법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뭐가 아니다? 인간은 결코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인간은 죄인이냐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내가 살아있는 척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내가 살아있는 ‘척’을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아있는 흉내, 모션. 흉내를 내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창세기 2장 17절에 정면으로 배치되죠. “정녕 죽으리라” 이 개념.
‘죽으리라’는 개념을 주님께서 비유로 계속해서 이야기할 때 인간은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본 거예요. 왜냐하면 숨 끊어지기까지는 자기가 살아있는 실체로 있는 게 분명하니까 이 ‘죽으리라’는 것도 ‘언젠간 죽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젠간 죽겠지. 지금 자기가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언젠가는 요양병원에 가서 치매 걸려 누워있으면 자는 잠에 죽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은 뭐해야 됩니까? 살아있는 척을 해야겠죠. 살아있는 척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라 해요. 애도. 슬픈 몸짓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관에 묻혀 죽어있고 나는 살아있으니까 죽은 사람은 본인이 본인한테 애도를 못하죠. 죽은 사람이 관속에서 ‘아이고~아이고~’ 시끄럽게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애도는 누가 해야 돼요? 덜 죽은 사람, 아직 못 죽은 사람이 애도를 하면서 거기서 차이를 두는 거예요. ‘이 분은 고인이고 나는 생전에 살아있다’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에스겔이 20장에서 푸른 나무, 마른 나무 이야기할 때 그때 그 이야기를 듣던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 사람들이 에스겔보고 욕할만하죠? 욕할만하죠, 그 당시에.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욕 정도가 아니고 제거대상으로 삼을만하죠? 예수님이 직장에서 행정실장으로 앉아서 하루 종일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를 해보세요. 퇴직 정도가 아니고 그냥 살해하고 싶죠. 입만 떼면 거짓이라고 욕하니까.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안하려고 했어요, 선지자. 왜냐하면 ‘너는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입만 떼면 욕을 하느냐?’ 욕한다고 육두문자 욕을 한 게 아니고, 선지자 자체가 말씀에 옴팍 싸이다보니까 선지자 본인이 기존의 인간류과 다르게 차이점을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을 보여주는 관점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너무 다른 것을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뭘 줬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라 해도 되는데 정확히는 예언. 예언이 뭡니까? 장차 어떤 인물이, 이 말씀대로 될 인물이, 이걸 그대로 실현할 인물이 이 땅에 진짜 인간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이것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미래를 기억한다’. 인간들은 과거밖에 기억 못하죠. 미래는 점선(…)으로 남겨두잖아요. 그런데 미래를 기억했어요. 무엇 때문에? 성신으로 인하여. 그럼 오늘날 성도는 뭘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았죠. 성령 받으면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1128b 에스겔 20장 49절(괜찮은 자아의 탈락)-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인간들이 규정하는 지옥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고 빠뜨리지 않고 성경을 이해한다든지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서 비롯된 어떤 개념이 지옥이다. ‘내가 결정한 차이를 내가 유지하겠다. 어쨌든 간에 나는 포함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포함되는 그곳이 지옥이다.’라는 사실을 주께서 유도해내죠. 주님께서 유도해내세요.
이것은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에게서 똑같은 의식을 뽑아내요. 착하다 안 착하다, 나쁘다 안 나쁘다 관계없이 공통적인 요소를 주께서는 뽑아냅니다. 그러면 그 공통적 요소를 뽑아내는 방법이 뭐냐? 이것이 바로 에스겔 20장에 나오는 푸른 나무, 마른 나무를 예수님 자기중심으로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23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3장 31절에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이 말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을 마른 나무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그게 23장 28절부터 나와요.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나’라는 예수님과 차이를 두는 ‘너희’가 나와요. 나와 너희가 구분되어서 너희는 결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심판이 주어진다. 인간과 인간을 가려내지 않고, ‘인간이냐? 다 얻어맞아라.’ 이런 심판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29절에 나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적어볼게요. 수태한 자, 반대말은 뭐가 있습니까? 수태 못한 자. 수태한 자-수태 못한 자. 그 다음에, 해산한 자-해산하지 못한 자. 젖을 먹이는 자-젖을 먹이지 못한 자. 이 관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얼마든지 구분 가능하죠. 어느 쪽이 행복하냐? 뻔하죠. 수태해서 젖을 먹일 여유 있는 쪽이 (행)복이고 반면에 수태하지 못한 자, 이것은 불행이죠. 저주가 되겠죠, 하나님의 저주. 벌 받을만한 짓을 한 저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부러워한다? 수태 못한 자를 부러워할 정도가 되고, 젖이 없어 먹일 아이가 아예 생기지 않은 쪽을 다행스럽게, 복된 쪽으로 생각할 정도로 나의 있음, 자식 있음이 곧 저주의 있음으로서 표출된다 이 말입니다. 식구가 단출하게 두 식구면 두 식구만 탄식하면 되는데 애 하나 생겼으니까 세 식구가 탄식을 하니 탄식의 강도가 더 세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좀 심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이 말은 뭡니까? 너 주제파악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너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어. 자꾸 자기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벌을 받아도 덜 받는 쪽으로, 자기를 좋게 보는 인식을 향하여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심판이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보편적이고 전면적인 심판이 주어진다.
그런데 에스겔에서 말한 하나님의 그 비유가 주님 오시고 난 뒤에 뭐가 됩니까? 비유는 끝났고 이것이 실제 현실로 주어지는 거예요. 실제 현실로. 인간들의 현실파악,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지 아시겠죠? 자기중심적으로 보니까. 그래서 31절에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는 예수님 자신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그 뒤에 나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죠. 그럼 십자가 처형 장소에 몇 명 갑니까? 두 명 아니고 세 명이죠. 십자가 달리는 처형에 세 명 갔죠. 이것은 뭐냐? 십자가에 달리지 않은, 쳐다보고 있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세 명 다 누구누구라 할 것도 없이 똑같은 신의 저주를 받고 있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 광경을 그들은 목격합니다.
그 신의 저주를 받으면서 그 세 명 중에, 그 관중들 중에서 딱 한 사람만이 뭘 발견하느냐? “예수님이 받은 저주가 바로 내가 받을 저주입니다.”라고 받아들인 사람. 그래서 강도는 말합니다. ‘살려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해요? “주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이 강도가 얼마나 대단한지요. 지금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받는 이 저주가, 유일하게, 다른 방법은 일체 안돼요, 천국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는 것을 이 강도는 믿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으로 모자라요. 그냥, 그냥, 경상도 말로 기냥 알게 되었어요. 저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 저 개념이 모든 인간의 중심을 떨어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아버지와 관계했을 때 저것이 유일한 통로고 길이고 진리고 생명인 것을 강도는 알았던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이야기하죠. “저희 죄를 사하여 달라.” 35절에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희롱하죠. 조롱하는 겁니다.
이 3번 문제를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비유라는 것은 육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유도하고, 육에서 나온 말씀 속에서 어떤 경우라도 영의 말씀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들어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완전히 차이난다는 거예요.
지옥은 무엇이냐? 지옥은 바로 예수님의 절차, 예수님의 생애 경과 속에서 이미 출현된 게 지옥이죠. 아버지께 저주받는 것. 십자가의 준거. 지옥은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표현해준 지옥만이 진짜, 진짜 지옥이에요. 아들이지만 죄 때문에, 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차없이 버리는 그 세계가 바로 지옥입니다.
뭐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죄가 있음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는 그 세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출발부터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 사는 세계도 지옥이고 가야 될 곳도 지옥이죠.
전도서 9장 10절을 읽어보세요.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여기서 약간 더 오버한다면 “…장차 들어갈 죽음의 세계에는 일도 ‘1도’ 없고 계획도 ‘1도’ 없고 지식도 ‘1도’ 없고 지혜도 ‘아무짝도’ 소용없다.” 그러니까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나? 나 또는 내 것이라는 것, 내 생각에는, 제 의견은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고 동시에 천국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당하는 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죠.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냥 해요. 어느 것도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개념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 개념을 만끽하시고 거기서 마음껏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그 개념에 우리의 모든 걸 맡기시기 바랍니다. 뭘 해도 의로운 것은 없고 죄밖에 없다는 사실. 새삼스럽게 나쁜 짓하지 마세요. 가만있어도 죄로 드러나게 해주시는 이 고마움.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 앞의 사건은 십자가, 뒤의 사건은 부활입니다. 철학자들, 요새는 과학자를 말합니다, 그 당시에 과학자를 철학자라 했으니까, 과학자든 철학자든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뭐가 없는가? 이 부활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나간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 2000년 전 죽었다. 이것은 과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건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지금 이 순간 아닙니까, 지금 이 순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삶 사이에 끼어들 분은 인간 중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만 이것을 경험하게 했기 때문에. 인간은 죽는 사건과 살아난 사건 사이에 어떤 인간도 끼어든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앴어요.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 이 사건에 낀 예수님의 영, 성령이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 부활 사건이 한꺼번에 다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까 미래를 기억한다고 이야기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내 미래가 아니거든요. ‘내가 이거 기억하면 착한 일 되어서 구원해줍니까?’ 이런 소리하면 안돼요. 내 기억이 아니라고요. 내 경험이 아니고 주님의 경험이 내 인생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과 사건을 재정립하는 용도로 우리가 활용되죠. ‘내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고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의 때문에 산다.’ 이것은 오늘날 내 기억과 차이나면서 새롭게 예상치도 못한 주님의 기억이 성령을 통해서 내 기억과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주의 증인이 되니까요.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렵고 고민이 될 때에, 주님이 하신 일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이거 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어떤 식으로 나를 이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쌍화탕을 사가라. 예. 쌍화탕 한 박스 말고 두 박스를 사가야 된다. 감기 몸살 걸리지 말라고. 너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돼. 이건 나한테 준 사건이에요. 써서 못 먹겠습니다, 그 소리하지 마. 네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야. 모든 일에 적용이 되는 그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자아의 세계가 교체가 일어나야 되죠.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의 교체가 아니고, 내 중심이 말씀중심으로 바뀌면서 주님이 나를 주도하는 세계. 그 전까지는 내가 주님께 요령껏 잘해보려고, 좋은 인상 남기려한 내가 주도한 나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바꾸어지게 되면 우린 어디에 속한 사람이다? 미래의 코난. 이미 미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게 3번입니다.
4번 봅시다. 15페이지, [구약의 가난한 자에 대한 개념]. [질문> 자크 엘룰의『하나님이냐 돈이냐』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분의 돈에 대한 개념이 성경적인지 알고 싶습니다.… 모든 가난한 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있는 반면 부자는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못 들어가듯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한데 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내일 모레 주일 낮 설교의 본문이 이거에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 13:5)는 그 대목이에요. 그 대목인데 물론 여기서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안 나올 거예요. 16페이지에 답변 나오죠. 답변 보겠습니다. 질문을 했으니까 답변을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사람 질문은 자크 엘룰의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여튼 질문은 모두 말씀에서 나와야 돼요. 누가, 어느 신학자가, 이러면 안돼요. 어느 목사가 이야기한다, 이런 것은 질문 자체가 별 의미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재물을 섬긴다.’ 이것은 성립이 안 되고요. ‘재물을 갖고 있는 나를 섬긴다. 나를 내가 지킨다.’가 됩니다. 재물을 갖고 있는 나. 그러니까 재물을 섬기면 이 사람 질문처럼 부자들은 하늘나라 가기 좀 어렵지만, 재물을 섬기는 나를 섬겨버리면 이것은 재물이 돈 10원밖에 없는 가난한 자도 어떻습니까? 이것은 재물을 섬기는 게 성립되죠.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이냐 나냐 그 이야기에요.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나를 섬길 것이냐 그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재물 이야기 언급하면서 앞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20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했죠. 예수님께서 여기서 땅과 하늘, 서로 대조되는 전혀 섞이지 않는 두 공간을 언급했습니다. 한쪽은 땅이고 한쪽은 하늘이에요. 공간이 몇 개다? 인간에게 공간은 두 개밖에 허용한 적이 없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 갈 생각이 없거든, 땅에 영원히 살고 싶거든 땅에다 네가 저축해라.
그런데 ‘네가 하늘에 살고 싶거든’.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을 저는 이렇게 고치겠습니다. ‘땅을 떠날 마음이 있거든’, 다른 말로 하면 ‘땅의 생활에 진저리나거든’, ‘빨리 꺼지고 싶어 환장하거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런 뜻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방향성’. 현재 하늘에 있느냐 땅에 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의 시선, 네 응시가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이 6장 21절에 나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지금 하늘의 보물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땅에 대해서 결별해 있습니다. 마음은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늘에 자기 보물이 있다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자기 보물이 있는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는 거죠. 쳐다보게 되면 하늘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계시죠. 하나님 계시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섬기겠습니까? 재물보다 하나님을, 하나님 가 계신 곳을 섬기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는 뭐냐?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 했잖아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수능 문제 한번 낼까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1번,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를 많이 한다. 2번,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다. 3번, 구제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이야기. 4번, 아예 재물에는 신경 안 쓴다. 몇 번입니까?
정답이 없죠. 정답이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보면 정답은 이렇게 돼요. ‘자기를 미워한다.’ 자기를 미워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자기를 미워한다. 도대체 나란 인간은 안 돼, 안 돼, 안 돼! 그 이유가 있어요. 하늘에 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안 해도 되죠? 두 사건,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는 사건과 하나님의 의로 복음을 다 이루었으니까, 말씀을 다 이루었으니까 의로운 아들을 살리는 부활 사건에 누구만 끼어있다고요? 다른 사람은 못 끼어요. 목자를 치니 양들은 다 흩어졌어요. 따르는 무리는 다 없어지고 달랑 예수님만 남아서 예수님이 브릿지, 다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 사건과 저 사건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거예요.
다 빠져버렸죠. 그러면 하늘나라 가신 분,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밖에 없을 때, 예수님 마음만 오직 아버지 가 계신 곳에 있는 진짜 마음이라고 인정받을 때 평소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살고자 하지 않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고자 하는 마음이겠죠. 그 마음도 오직 예수님만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환경에 뒤집어씌인 거예요, 인간이. 인간이 뭘 못 이겨요? 내 결심과 각오와 내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뚫을 수 없어요. 벗어낼 수 없습니다. 벗겨낼 수가 없어요, 이 환경이라는 걸. 이걸 누가 아시냐? 주님이 알아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방법은 없어요. 왜냐? 뭐든지 쌓는다, 모아둔다, 저축한다,는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하면 이 땅에서 했던 인간들의 행세에요. 이 땅에서.
인간들이 왜 땅에다 쌓아두느냐? 그것은 누구를 위함이에요? 부자 되려고 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살아보려고 한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인간들은 가장 적나라하게 자기가 습관적으로 습득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6장 19절에 보면 좀과 동록이 해하는데 거기에 뭐가 오죠?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한다 하죠. 주님이 좀 말려주면 안됩니까? 구약의 열왕기상도 그렇고 수요일에 약간 언급했는데요. 기본적으로요. 예를 들어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하지 말고 아예 골리앗이 다윗에게 넙죽 절하고 전쟁한다, 싸운다는 그런 긴장된 관계가 아예 생기지 않도록 주께서 막아주면 안될까요? 우리네 인생도.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좀 알아서 기도할 게 아예 없도록 알아서 착착 도와주면 안 될까요? 어떻습니까?
감사라는 것은 나로 인하여 막혀있는데 이게 왜 막혀 있느냐 하면 감사가 은혜기 때문이에요. 주시면 감사한 게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선물을 받아야 감사가 이어져요. 100억 되면 감사하는 게 없어요. 100억 있다가 나중에 99억 되면 불평을 일으켜요. 안돼요. 감사 자체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 선물을 누가 훼방질하고 있어요? 내가 훼방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주신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는 누구를 제거하려 해요? 나를 제거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제가 수요일에도 얘기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했지만 이게 이스라엘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의도적으로 말썽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이 땅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이스라엘은 일단 받아놓고는 이것을 내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으니까 주께서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 뭐를 공격해야 돼요? 이 내 것을 떨어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나는 도적이고, 나는 녹슮이다’. 내가 도둑놈이에요. 내가 도둑놈.
그럼 이 은혜가 어디서 옵니까? 이 은혜, 선물은 어디서 와요? 땅에서 오는 게 아니고, 인간의 노동에서 오는 게 아니고 어디서 옵니까? 하늘에서 오죠. 하늘에서 오는 것을 땅의 도둑놈하고 녹슨 게 막고 있죠. 누가 도둑이에요? 내가 도둑이죠. 내가 도둑놈이고 내가 은혜를 녹슬 게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봐야 돼요. 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내게. 내가 문제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가 있다면 지금 내가 굶는 것, 내가 때 끼니 굶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봐야 돼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도대체 어느 인간이 그걸 버텨냅니까?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인내성 있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라고 분명히 이야기하실 건데, 이게 버티는 게 아니에요. 이게 인내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명쾌하고 명백한 사실 그걸로 족해요.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성경말씀을 내 감정을 동원하고 기분을 동원해서 일치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럼 판판이 실패해요. 성경말씀은 내 기분 맞췄다고 나한테 실현되는 게 아니고 내 형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입장에서는 지금 완료된 상태라고요. 완료된 상태. 그걸 우리는 방해 놓을 뿐이고, 그 방해를 제거하는 것도 누구 몫입니까? 주님이 알아서 제거할 몫이에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긴데요.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영어 방언 나옵니다. ‘You need me.’ 이게 맞는가? 아니면 ‘I need you.’ 이게 맞는가? 어느 쪽이에요? 인간은 출발을 어디서 합니까? 당신은 내게 필요하다 하잖아요. 출발을.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당신에게 필요한 나’가 되는 거예요. 당신에게 필요한 나. 그러니까 예수님께 필요한 게 누구다? 나다.
이게 발상의 전환이거든요. 이게 성령 받아야 가능한 거예요. 뭐 길길이 뛰며 불평하지 말고. 이 못난 내가 누구한테 꼭 필요한 존재에요? 잘나시고 잘나신 주님한테 이 못난 존재가 필요한 거예요. 그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고 싶어요. ‘소자 생산’.
아무것도 아닌 자를 생산함으로써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은 돈도 아슬아슬하게 월급 얼마 되지도 않고 맨날 생활보조금 타면서 말씀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미쳤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해? 집에 돈도 없으면서 말씀이 그렇게 좋대. 그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돼요. 왜냐하면 You need me가 아니라 I need you가 되니까.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정신 발상이 바뀐 거예요. 한 평생에 한번 바뀌어서 살아보세요. 바뀌어보라고요.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고! 밥상머리 엎어버려야 되는데… ‘내게 필요한 너’가 아니고, 주님이 필요해서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 하는 거예요. 제가 어떤 가사를 한번 불러드릴 테니까요.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어떤 가사인지.
You Needed Me
Anne Murray(1977)
I cried a tear, you wiped it dry
내 눈에 눈물 흐를 때면 당신은 내 눈물을 닦아주었어요
I was confused, you cleared my mind
내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당신이 맑게 해주었어요
I sold my soul, you bought it back for me
내 영혼이 팔렸을 때 당신은 내 영혼을 다시 심어주었어요
And held me up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꼭 you raise me up 노래 비슷하죠? 그 노래는 아니에요.)
And gave me dignity
나의 존귀함을 일깨워주었죠
Somehow you needed me
어떻게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했던 거예요
(여기도 나오네요. 당신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여기 있었습니다.)
You gave me strength
당신은 내게 힘을 주었어요
To stand alone again to face the world out on my own again
스스로 다시 일어서서 세상과 다시 맞설 수 있는 (힘을)
You put me high upon a pedestal
당신은 저를 높이 반석 위에 올려 주었어요
(이건 시편에 나오는 반석 위에 나를 세우시리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you raise me up’에도 높은 곳에 나를 세웠다는 가사가 나오죠.)
So high that I could almost see eternity,
그 위에서 제가 영원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하셨어요
You needed me, You needed me
당신은 제가 필요했던 거예요
(가사가 아주 멋있죠? 이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내 힘이 아니고 내가 당신을 믿고 버티는 것은 내 힘이 아니고 바로 당신의 힘이라는 것과)
And I can't believe it's you, I can't believe it's true
난 그런 당신이 믿어지지 않아요 난 그런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을 정도에요)
I needed you and you were there
전 당신이 필요했고 당신은 그곳에 있었어요
(내가 당신이 필요할 때면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었죠)
And I'll never leave
그리고 난 결코 떠나지 않아요
Why should I leave? I'd be a fool
왜 떠나야 하죠? (떠나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제가 바보가 될 텐데
'Cause I've finally found someone who really cares,
누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지 마침내 나는 알았으니까요
You held my hand when it was cold
추운 날이면 당신은 제 손을 잡아 주었어요
when I was lost, you took me home
내가 방황하고 있을 때면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You gave me hope, When I was at the end,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는 희망을 안겨 주었죠
And turned my lies back into truth again
제 거짓말을 다시 진실로 바꿔놓았죠
(이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 이 노래를 뽑았어요. ‘나의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다음 ‘당신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었어요’ 요한복음 15장 14절 말씀.)
You even called me friend
당신은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었어요
You gave me strength
당신은 내게 힘을 주었어요
To stand alone again to face the world out on my own again
스스로 다시 일어서서 세상과 다시 맞설 수 있는 (힘을)
You put me high upon a pedestal
당신은 저를 높이 반석 위에 올려 주었어요
So high that I could almost see eternity,
그 위에서 제가 영원을 내려다볼 수 있게 하셨어요
You needed me, You needed me
당신은 제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 노래가 무슨 노랠까? 톡톡 두 번 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짓은 안하죠. 이 노래가 바로 앤 머레이가 불렀던 ‘You needed me’라는 노래에요. 저작권이라는 잔소리 듣기 때문에 강의 중에 틀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할 때. 한번 들어보세요.
여기서 다시 한번 보게 되면 마태복음 6장에서 재물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너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섬기도록 출발점을 이미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나 외에는 도무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돈이 전부에요. 돈도 없는데 무슨 애인이 있어요? 요새 남자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너 집 사는데 얼마 보탤 거야?’ 이렇게 나올 건데. ‘같이 살아가면서 대출 이자부터 대출 원금 어떻게 갚을 건지 계획을 세워봐라.’ 이렇게 나올 건데요.
그래서 여기 답변을 보면 이렇습니다. ‘돈은 중립이 아니다.’ 16페이지 밑에 보면 나와요. 돈은 중립이 아니라는 이 말은 가난하냐 부자냐를 내가 결정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난과 부자를 누가 결정했는가? 그건 하나님이 정해준 것도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죄인이 무슨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어요?
이것은 어디서 왔느냐? 환경. 인간들의 더러운 마귀적인, 지옥 같은 환경이 ‘너는 가난한 자, 너는 부자’라는 차이를 만들어내었고 가난한 자도 거기에 말려들어서 자기 인생을 탓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저는 저들처럼 왜 여유롭게 못 삽니까? 제가 재벌이 되게 해달라고 합니까? 넓은 아파트를 달라 합니까? 하루 세 끼 정도는 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원망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원망은… 이미 가난한 자는 가난한 채로 자기의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어요. ‘나는’이 반드시 들어가고 ‘나는 ~해서 저 사람보다 가난하다.’ 주께서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테두리, ‘나는’ 하는 이것. 인생이 형성된 관계망, 이것을 공격합니다. 부자만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돈 있다고 공격한다? 아닙니다. ‘돈을 바라보면서 산다’ 이걸 공격하는 거예요. 이걸 공격한다고요. 돈 있으면 더 행복할 텐데. 돈 있으면 아픈 것도 병원에 가서 낫게 되고 낫게 되어서 몸 건강하면 행복할 텐데. 모든 것이 돈 있으면 해결된다는 생각, 돈에 의존하는 관계망을 공격하는 거예요. 따라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람들이 오게 되면, 너한테 있는 여분의 돈이 어느 정도 나한테 넘어올 수 있느냐를 생각할 때 그것은 바로 돈의 관계잖아요. 그런 것을 치는 거예요.
주님께로 부자 청년이 왔을 때 부자 청년은 자기가 이렇게 돈으로 뭉쳐진 관계인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자기는 성경말씀만 율법만 지키면 된다 생각했거든요. 그 관계를 공격하죠.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부자 청년이 가고 난 뒤에 다른 사람도 모든 걸 팔고 주님 따라갈 수 있습니까? 못 따라와요.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지금 예수님은 부자 청년한테 지시한 거예요.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그러면 주님 아무도 구원 못 받겠습니다.” 그 말이 맞죠. 아무도 구원 못 받죠. 그러나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아는 게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는 거예요. 구원은 누구 몫이냐? 주의 몫이죠. I need you. I가 주님이라면 주님이 나, 이 못난 나, 돈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내가 필요한 거죠. 따라서 재물 섬기지 않고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답변이에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태어나면서 우리는 내가 나 사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아무도 없어요.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이고 은혜입니까. 고마울 일이죠. 자기 죄를 안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기적이 어디 있어요? 신기한 게 어디 있어요? 없습니다.
병에 들려서 이제 내일모레 죽는다 죽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 포기할까요, 포기 안할까요? 포기 안합니다. 사람이 죽을 병이 든다고 해서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인 것을 받아들일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4번 문제의 결론은 뭐로 내립니까? 결론은, 가난한 자도 죄인이다. 간단하죠. 너도 죄인이고. 방향은 땅의 방향밖에 없다.
5번 봅시다. [어린 양]. [질문> 어린 양 개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들 중,] 여기 ‘상징’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거 틀린 말이죠. 예수님은 실재죠. 상징은 예수님한테 없습니다. 인간 보기에 상징으로 보이죠. 아까 이야기했죠. 비유인데 우리 보기에는 비유지만 주님한테는 그게 실재라고요.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한 첫 마디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말하잖습니까? 어린 양 개념은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어린 양 사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혹시 이와 관련된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은 있어요. 성경책. 다만 성령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책이라는 거예요. 그럼 다른 책은 왜 안 되느냐? 다른 책은 성령 없어도 이해되는 책. 그래서 다른 책은 말씀의 능력이 나올 수 없는 책.
우선 출애굽기 34장 19-20절 봅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제가 얼마 전 수요 설교 때도 했습니다만 ‘어린 양을 품고 있다고 해서 심판하는 천사가 그냥 지나쳐가지 않는다.’ 이 비슷한 이야기했죠? 집에서 키우는 양을 정 있게 딱 품고 있다고 해서 바깥에서 심판으로 맏이를 죽이러 온 천사가 “아이고, 이 집은 어린 양을 사랑하는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사랑하는구나. 야, 넘어가자. 이 집은 됐어. 구원받았어.”하고 넘어갑니까? 아니죠. 그게 답변이에요.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진다는 말은 그 죽음에 참여하는 자만 그 죽음과 동반해서 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무슨 죄? 세상 죄잖아요. 세상 죄니까 어떤 경우에 그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느냐 하면 어린 양의 죽음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You need me처럼, ‘내게 필요한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필요한 나’. 저쪽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어린 양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는, 나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죽은 것이다. 이제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죽음이 살아있으면서 죽을 이유를 어린 양부터 방출하겠죠. 보여주겠죠. 어디까지 도달하도록? 나한테 도달하도록. 신호, 시그널이 막 오는 거예요. “내가 죽은 이유는…” 하면서 죽은 이유를 우리에게 샅샅이 찾아내는 거죠.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수색영장, 압수영장 들고 와서 “보물을 어디다 숨겨놨어? 쓰레기 같은 거 어디다 숨겼어?” 다 들추어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행정당국에서 하는 것은 멍청하니 볼 수밖에 없죠. 말릴 수 없죠. 말리면 공무집행 방해되기 때문에 가중처벌 받잖아요. 그래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들추어내는 거예요. 뭘 들추어내요? 세상 죄 어디에 해당되는가를 내 인생사에 관여해서 다 들추어내는 거예요. 들추어내는 중 하나가 뭐냐? 유월절에 우리가 뭘 먹느냐? 딱딱한 떡을 먹고 그다음에 금식하고 그날 밤에는 잠도 자지 않고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딱딱한 떡을 먹으면서 같이 체험하는데, 그 떡을 성경에서는 ‘고난의 떡’이라 합니다. 고난의 떡. 어린 양의 고난에 합세.
어린 양의 고난에 같이 합세하는 일을 어린 양부터 개시, 출발시킨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일을 만들었고 그 파도가 가만있는 우리 인생에 드디어 들이닥친 겁니다. 그게 바로 5번 어린 양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고난 받죠.
6번. 진도 좀 나가야 돼요. [여호수아서에 대한 질문]. [질문> 목사님, 여전히 건강하시지요.] 도대체 몇 살 때 이야기입니까? 몇 년도 이야기에요? 2008년도. 2008년도 같으면 그때 건강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이 여호수아 전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누가 언약의 자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어도…]
질문이 지금 뭐에요? ‘구약과 신약에서부터 오늘까지 성경은 누가 언약의 자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이건 하나님께서 모세 5경을 통해서 말씀해주신 게 아니에요? 약속의 땅이라고. 그래서 제가 여기 숨어있는 질문을 끄집어내서 답변을 열 가지나 쭉 해놨습니다. 그걸 짧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바로 땅과 민족이에요. 씨, 땅. 약속의 땅, 그다음에 뭡니까? 약속의 민족. 그 두 가지에요.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담겨 있습니다. “바깥 하늘에 별 보이냐?” “보입니다.” “숫자가 어때?” “너무 많습니다.” “헤아려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네 자손이 그렇게 될 것이다.” 자손. 그다음 나오는 창세기 15장을 계속 보면 ‘현재 죄인이 살고 있는 땅, 가나안 땅을 너희들이 교체해서 들어가고 너희가 살고 그들은 추방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너희가 가거든 언약대로 살면 너희는 약속의 민족이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어보면 뻔한 이야기인데 왜 이것을 질문했는가? 그 취지를 내 나름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구약 해석에 있어서 그 토대가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으면 나무라고 잘하면 복주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애초부터 그들이 잘못 안하도록 막아놓으면 될 텐데 왜 자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하느냐?
이스라엘 민족이라 하지만 이게 죄인입니다. 죄인을 뭐로 바꿔야 됩니까? 죄인을 약속의 땅에 살만한 약속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고난 속에 주님의 이름도 함께 고난, 고생을 겸하여 받아서 죄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에 합세한 입장에서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백성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다 바닥났죠. 그리고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약속의 자손, 성령을 통해서 온전하게 백성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과 부합되는 연속적인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이렇게 분명하고 명쾌한데 우리는 여전히 자아의 세계에서 꿈틀거리고 늘 하나님께 원망할 준비하고 있고 불평할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에 입각해 돌아보면서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친히 간섭하고 관여하시는 이 고난의 사건을 도리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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